Point 2: 서바나의 문제
박창진님은 바울의 예루살렘행이 성령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성령은 서바나로 가기 원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박창진님의 주장은 본문을 세밀하게 읽지 않은 결과이다.
1. 박창진님은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으로 가야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시점이 지금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지금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 것은 예루살렘의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복음(뜻)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 것은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로마서 15장 25, 26절에서 “바울은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고 자신의 예루살렘행의 목적을 분명하게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했고 할수만 있으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었지만, 그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은 이방인들의 구원이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이것은 사도행전 21장 이하에서도 분명히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한 지역에 도달하면 그 즉시 혹은 하루정도 뒤에 곧장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 그는 7일동안이나 침묵하고 단지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누고 성전에서 결례만을 행한다.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게 된 이유는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발견하고 붙잡아 고소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조용히 예루살렘을 떠났을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바울의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서도 나타난다. 그때에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누고 선교의 중요한 원칙을 정하고 조용히 예루살렘을 떠났다.
2. 박창진님은 “성령님께서는 바울 사도가 서바나로 가기를 원하셨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롬 15:23)를 들고 있다. 그러면서 박창진님은 바울은 이 여정에 로마에 들러 교제하고 로마교회가 서바나로 보내 주게 될 것을 바랐다고 주장한다. 박창진님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것”이라고 말한 것에 근거해서 바울 사도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결국 예루살렘을 갔고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죄수로 로마에 가게 되었고 로마서에서 말하였던 로마 방문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박창진님은 “ 비록 그러한 중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계속되지만 자유인으로 가는 것보다는 훨씬 못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도 바울 사도가 자유인으로 서바나를 다녀오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자유인으로 서바나를 다녀왔다면 복음 전파에 있어서 엄청난 진보가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딤전 1:15)은 이러한 깨달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성령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은 죄에 대한 공적 고백이라고 하겠습니다.”라고 결론짓는다.
나는 바울의 예루살렘행이 성령의 뜻이 아니었다는 박창진님의 주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시한다.
바울의 서바나행에 대한 소원이 성령의 뜻이었다는 직접적인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선교활동을 통해서 보여주는 모습에서 추측하면 이러한 바울의 소원이 성령의 뜻과 일치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서바나행이 바울의 예루살렘행과 대치된다고 주장할 수 없다. 더욱이 설령 바울의 로마를 지나 서바나로 가려는 계획이 성령의 뜻과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방법과 그 시기를 알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것”이라는 바울의 말이 죄수의 신분이 아니라 자유인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게 될 것을 의미하는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선교활동의 모습들과 서신서들, 특히 로마의 감옥에서 기록했다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에서 나오는 바울의 고백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특별히 빌립보서 1장 12절이하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되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로마서 15장 30절 이하에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그 첫 번째로 “유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에게서 구원을 받게 해 달라”고 말한다. 즉 바울은 사도행전 20장 22, 23절에서 스스로 말하듯 예루살렘에서 있게 될 일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바울이 자신의 로마행에 대한 모습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을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박창진님은 바울이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갔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간 것이 아니다. 바울은 고발당한 신분으로 로마에 갔다. 즉 바울은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에 갔다. 따라서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 로마시민권자들은 황제에게 호소한 재판에서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신분이 보장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즉 바울은 로마에서 황제에게 재판을 받기 전까지 거의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단지 로마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정도의 제재만 있었다. 이 말은 바울이 로마에서 충분히 복음을 전파하고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나누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을 전파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로마서에서 말하였던 로마 방문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박창진님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또한 박창진님은 바울이 로마에 머문 시기가 두 번이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일차로 고발당한 신분으로 로마에 가서 로마지역을 벗어날 수 없는 정도의 제재속에서 로마에 머물렀다. 그리고 바울은 고발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자유롭게 되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이 시기에 바울은 서바나를 다녀왔고 디모데에게 서신을 보냈다(디모데전서). 그리고 서바나에서 돌아온 직후 네로 황제의 방화 사건이후 있게 된 박해 때 죄인으로 체포되어 투옥되고(디모데후서) 처형당했다.
마지막으로 박창진님은 디모데전서 1장 15절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라는 바울의 고백이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기 때문에 복음전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바울의 인정과 죄고백으로 생각하지만, 문맥은 전혀 이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바울은 감사하는 이유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충성되다고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셨기 때문이라고 먼저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로 행했다고 고백하면서 그런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긍휼히 여기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은혜, 믿음, 사랑이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다고 지적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 죄인들중에 자신이 우두머리였다고 말한다.
Cristo;" !Ihsou'" heij" to;n kovsmon aJmartwlou;" sw'sai, w|n prw'tov" eijmi ejgwv.
동직과거능 인칭대명사 동직현능
문법적으로 관계절에 있는 동사는 주절의 동사의 시제를 따라가기 때문에 “내가 괴수니라”에서 ειμι가 단어 자체로는 현재이지만 의미는 주절의 동사인 ηεις의 시상인 과거를 따라간다. 즉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는데, 죄인들중에 내가 우두머리였습니다” 이다. 이것은 앞에서 바울이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였다는 것을 달리 표현한 말이지, 예루살렘행과 서바나행과 관련하여 바울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사도바울의 로마행과 관련하여 나의 주장은 “사도 바울은 성령께 완전히 순종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박창진님의 주장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성령의 말씀을 거역한 것으로 이것은 로마와 서바나까지 복음을 전파하려는 성령의 계획에 반대되는 것이다] 는 것이다. 이 글은 박창진님의 주장과 관련하여 사도행전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어구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 다음으로 로마서 15장의 "서바나에 대한 언급"을 살펴본다.
Point 1: 행 21:4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하더라” 의 해석
박창진님은 행 21:4의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권고를 “다음 기회에 올라가라는 권고”라고 이해한다. 박창진님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 사도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행21:10)와 그 뒤에 이어지는 제자들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으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행21:12)를 든다. 직접 인용해 보자.
아가보 선지자의 말은 단순히 있을 사실에 대한 설명이라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앞의 문맥과 연결되기에 금지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일행과 성도들이 함께 바울 사도를 만류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앞의 제자들의 말과 문법적 구조가 동일하기에 ““지금 올라가지 말라”고 권했다”입니다. 바울 사도는 만류하는 그들을 책망하며 “죽을 각오도 하였다”고 말하며 그들의 만류를 뿌리칩니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됩니다. “여러 날이 지난 후에”가 “지금 올라가지 말라”는 만류를 받아들인 결과가 아닙니다. 이는 앞에서 제자들의 만류가 있고 난 후의 “여러 날이 지난 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올라가지 말라”가 “며칠 후에 올라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음 기회에 올라가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행 21:4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하더라”와
21:4 oi{tine" tw'/ Pauvlw/ e[legon dia; tou' pneuvmato" mh; ejpibaivnein eij" @Ierosovluma.
행 21:12 “우리가 ...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parekalou'men hJmei'" ..... tou' mh; ajnabaivnein aujto;n eij" !Ierousalhvm.
이 두 문장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문법적으로 번역을 하면 “지금 올라가지 말라”는 의미이다. 나는 이 말이 “몇일 후에 올라가라”는 의미라고 주장하였는데, 그 이유는 “올라가지 말라”는 권고 후에 항상 따라오는 “몇일 후 혹은 여러 날이 지난 후”라는 어구 때문이다.
그러나 박창진님은 이 말이 “다음 기회에 올라가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박창진님은 “다음기회에 올라가라”로 해석하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단지 박창진님은 “여러날이 지난 후에”는 “지금 올라가지 말라”는 만류를 받아들인 결과가 아니라고만 지적한다. 아마도 내가 추측하기에 박창진님은 “올라가지 말라”고 권고하는 사람들과 “올라가고자 하는 바울” 사이에 설왕설래가 진행되었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당연히 바울은 몇 일이 지난 후에 올라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 같다. 사실 이러한 추측은 상당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 가지 덧붙이면 바울이 가이사랴에 도착하기 까지는 배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각 항구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고 싣는 “몇일 동안은” 그 항구 혹은 가까운 지역에서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지냈고 가이사랴에서는 육로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피곤도 풀고 또한 “행장도 준비해야했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문법적으로 “지금 올라가지 말라”는 말이 “다음 기회에 올라가라”로 해석된다는 박창진님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본문은 그 반대를 지지한다.
a. “올라가지 말라”에 사용된 부정어가 “ουκ”가 아니라 “μη”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즉 만약 “올라가지 말라”는 것이 성령에 의한 절대적 금지였다면 절대부정에 사용되는 “ουκ나 금지를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어구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단지 부분적인 부정을 의미하는 “μη”를 사용한다. 이것은 굳이 번역하면 “올라가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는 정도의 의미이다. 우리는 이것을 사도행전 16:6-10절에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마게도냐로 보내시는 성령의 말씀과 비교하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절대적 금지를 의미하기 위하여 “kwluqevnte"”와 “oujk”가 사용되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Dih'lqon de; th;n Frugivan kai; Galatikh;n cwvran kwluqevnte" uJpo; tou' aJgivou pneuvmato" lalh'sai to;n lovgon ejn th'/ !Asiva/: ejlqovnte" de; kata; th;n Musivan ejpeivrazon eij" th;n Biqunivan poreuqh'nai, kai; oujk ei[asen aujtou;" to; pneu'ma !Ihsou': parelqovnte" de; th;n Musivan katevbhsan eij" Trw/avda. )
b. “올라가지 말라”는 명령의 주체는 성령이 아니라 제자들이었다.
행 21:4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 하더라”( oi{tine" tw'/ Pauvlw/ e[legon dia; tou' pneuvmato" mh; ejpibaivnein eij" @Ierosovluma. )에서 성령은 간접적으로 언급(dia; tou' pneuvmato")되지만, 행 16장 6-10에서 성령은 직접적인 명령의 전달자(uJpo; tou' aJgivou pneuvmato"/to; pneu'ma !Ihsou)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행 21:4에서 “올라가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은 “제자들”이다. 이것은 행 21:12 “우리가 ...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parekalou'men hJmei'" ..... tou' mh; ajnabaivnein aujto;n eij" !Ierousalhvm)”에서 “권면하다”는 의미의 παρακαλεω를 덧붙임으로 더욱 분명해지며, 행 21:14에서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에서도 나타나는데, 이 어구는 바울이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mh; peiqomevnou de; aujtou' hJsucavsamen )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Tou' kurivou to; qevlhma ginevsqw. )라고 덧붙이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주님의 뜻이 이제 이루어 질 것입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올라가지 말라는 제자들의 권고가 주님의 뜻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며 올라가고자 하는 바울의 주장이 주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제자들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c. 성령이 말씀하신 것은 “올라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겪게 될 일들에 대한 것이었고 그것을 통한 하나님의 일”이었다.
박창진님은 아가보의 예언을 확대해석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에 대한 금지”를 나타낸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를 문맥이 금지를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맥의 흐름은 제자들의 권면에서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한발한발 나아가는 바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아가보의 예언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일”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아가보가 예언을 하면서 보여주는 행동 즉 물건을 취하여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구약(예를 들면 에스겔 37장 예레미야 27장)에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듯 “분명히 있게 될 사실”에 대한 예언의 모습이다. 이것은 바울 자신도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다. 사도행전 20장23절에서 바울 “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o{ti to; pneu'ma to; a{gion kata; povlin diamartuvretaiv moi levgon o{ti desma; kai; qlivyei" me mevnousin)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아가보의 예언은 성령이 주체로 나타는데(levgei to; pneu'ma to; a{gion) 행 20장 23절에 바울에 의해 언급된 예언의 주체도 성령으로 나타난다. 즉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령이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일들”이었다. 그리고 “올라가지 말라”는 권면은 그러한 성령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바울에게 권면한 것이다.
d. 바울의 예루살렘행은 성령의 직접적인 인도였다.
이것은 바울이 사도행전 20장 22절에서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하는 것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우리 말 번역에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라고 잘못 번역되어 있는데, 원문은 “kai; nu'n ijdou; dedemevno" ejgw; tw'/ pneuvmati poreuvomai eij" !Ierousalh;m”이다. 여기에서 "tw'/ pneuvmati"는 분명 성령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서 πνευμα(τι/τος 등)란 단어는 서른 여섯 번 정도 사용되는데, 그 중에서 “더러운 귀신, 악한 영, 귀신, 악귀”를 의미하는 네 번(행 8:7; 16:18; 19:12, 13)의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성령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성경신학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하나님의 백성의 적 에돔의 운명(오바댜연구)-김윤희(횃불트리니티신대원교수) (0) | 2005.09.09 |
---|---|
[스크랩] 인자론 (0) | 2005.09.08 |
바울의 예루살렘행에 대한 박창진님의 견해에 대한 반론 (0) | 2005.09.08 |
구약신학의 역사(동향)-라황용목사 (0) | 2005.09.05 |
[스크랩] 구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0) | 2005.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