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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의 감동으로”(행 21:4절)라는 구절에 대하여
“성령의 감동으로”라는 구절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에 여기에서 나는 박창진님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이에 대한 나의 주장을 제시한다.
[성령의 감동으로”란 성령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나 하나님의 책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이 말하나 그것은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하기에 사람이 주체로 나타나는 것일 뿐입니다. 글에서 사람이 주체로 나타난다는 것이 성령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그 권위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지금 올라가지 말라”의 주체가 제자들이고, 예루살렘행의 주체는 성령님이라는 것이 그 권위에 있어서 차이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논의를 진행하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야기됩니다.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부분과 사람이 말하는 부분을 구분하여 서로 다른 권위를 부여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위에 인용한 박창진님의 글에서 나는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먼저 동의하는 부분은 “‘성령의 감동으로’란 성령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자신을 뜻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만약 사도행전 21장 4절이 성령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자신을 뜻을 나타내시는 것에 대한 서술이라고 한다면,” 박창진님이 주장하듯 “지금 올라가지 말라 의 주체가 제자들이고 예루살렘행의 주체는 성령님이라는 것이 그 권위에 있어서 차이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니라는 것”에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박창진님이 “글에서 사람이 주체로 나타난다는 것이 성령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그 권위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 각권의 서술스타일의 특징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내가 논증할 것이지만, 나는 사도행전 21장 4절이 성령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사도행전 21장 4절은 뒤에 나오는 사도행전 21장 11-12절과 같이 성령의 뜻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서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1장 4절의 누가의 서술 스타일은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이 직접 혹은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누가의 서술스타일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21장 4절이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서술이라고 한다면, 이 구절은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직접 혹은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누가의 서술스타일에서 유일하게 예외적이며 이상한 서술 스타일이 될 것이다.
먼저 분명한 사도행전 21장 11-12절에서 성령님이 나타내고자 한 자신의 뜻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체포될 것이다”는 것이다. 이 계시를 들은 제자들과 심지어 지금까지 아무 말없이 따라왔다 누가를 비롯한 동료들까지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한다. 바울은 이 권고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데, 그것은 아마도 지금까지 “올라가지 말라”고 권한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제자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동안 함께 다녔던 누가를 비롯한 사람들까지도 그런 권고를 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적어도 이 본문에서 성령은 “올라가지 말라”고 계시하신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사도행전 21장4절을 살펴보자. 본문은 다음과 같다:
그들이 바울에게 성령을 통해서(dia)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말하였다.
οιτινες τω Παυλω ελεγον δια του πνυματος μη επιβαινειν εις Ιεροσολυμα
문제는 여기에서 δια του πνευματος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나는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예수님 성령님 주의 사자들)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하여 누가가 어떻게 서술하느냐를 살펴볼 것이다. 좀더 여력이 되면 누가복음까지 살펴보면 좋으리라 생각하지만 나로서는 그럴만한 여력이 되지 않기에 사도행전에 제한한다. 우선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예수님, 성령님, 혹은 주의 사자)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한 서술은 대략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이 말씀을 듣는 대상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인데, 예를 들면, 1장 7-8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나 5장19-20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와 같은 경우이다. 그 외에도 많은 예들이 있다.
두 번째는 “있게 될 사실에 대한 단순한 예언”의 경우인데, 11장 27-28절 “선지자들이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dia)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와 앞서 이미 언급한 21장 10-11절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말하기를 성령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로서, 사도행전에서는 오직 이 두 경우뿐이며 또한 특이하게도 “선지자”라는 호칭과 관계되어 있다.
세 번째는 하나님(예수님, 성령님, 주의 사자)이 제삼의 사람을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경우로서, 약 8회만 나타난다(혹시 빠진 것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이 경우에는 모두 dia라는 전치사를 통해서 그 말씀하시는 주체와 그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들을 구별하며, 또한 그 주체는 모두 하나님(예수님, 성령님)으로 나타난다.
1:2 (예수님께서)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dia) 명하시고
1:16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dia)
2:16 (하나님이) 선지자 요엘로(dia) 말씀하신 것이니
3:18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dia)
3:21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dia)
4:24-25 하나님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dia) 말씀하시기를
10:34-36 하나님은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dia)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15:7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dia) 복음의 말씀을 들어
우리의 관심대상인 21장 4절은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예수님, 성령님, 주의 사자)의 말씀하시는 것을 기술한 것에서 유일하게 예외적인 형식이다. 즉 그 주체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다른 구절들에 나타난 누가의 서술스타일에 따르면, 이 구절은 “성령님이 제자들을 통하여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로 되어야 한다. 왜 유일하게 이 구절만 달리 서술하고 있을까?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21장 4절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dia)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하였다”라는 구절을 “성령이 말씀하신 것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으로 이해한다.
2. “(지금) 올라가지 말라”가 “다음 기회에 올라가라”(박창진님의 주장)를 의미할 수 없는 문법적 근거
“제자들이 성령으로 바울에게 지금 올라가지 말라고 말했다”는 구절은 οιτινες τω Παυλω ελεγον δια του πνυματος μη επιβαινειν εις Ιεροσολυμα이다. 이 구절에서 핵심은
λεγον μη επιβαινειν 이다.
과거 현재부정사
아래의 infinitive에 대한 설명은 Raphael Kühner, Bernhard Gerth, Ausführliche Grammatik der griechischen Sprache이다.
부정사는 시간의 단계(Zeitstufe)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통해서 나타내는 동사개념의 상태(Bechaffenheit)만를 나타낸다. 부정사의 시간의 단계는 주동사의 시간형식을 통해 나타낸다. 그러나 이때 부정사의 시제는 주동사 자체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시제를 기초로 한다. 말하다 혹은 의미하다는 동사 다음에 나오는 현재 부정사는 “말하는 사람의 시제와 동시적인 것”을 나타낸다.
문법적으로 따져보면, 올라가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은 “말하는 시점”과 “올라가지 않는 것”이 동시적인 시점을 나타낸다. 또한 부정사 자체가 동사개념의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에 “올라가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은 말하는 시점에 동시적으로 올라가느냐 올라가지 않느냐라는 상태를 나타낼 뿐이다. 따라서 이것을 “다음 기회에 올라가라”는 것으로 읽는 것은 본문이 의도하지 않는 박창진님 자신의 생각을 넣어서 읽는 것이다. 나는 “올라가지 말라”는 권고를 “말하는 그 시점에서 지금 올라가지 말라”는 권고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제자들이 올라가지 말라고 말한 그 시점이 아니라 몇일 후에 올라간 것은 제자들의 권고와 대치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나는 여기에서 제자들의 권고가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제자들의 “올라가지 말라는 권고”는 성령이 말씀하신 바울의 미래적 상황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일 뿐이다.
그리고 사도행전 21장 13절에서 바울이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까지 선교여행을 함께 하여왔던 누가를 비롯한 동역자들까지도 이전과는 달리 성령의 분명한 뜻을 알면서도 올라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21장 12절에서 누가는 특이하게 “우리가 그곳 사람들과 더불어 권고하였다”라고 말하면서 이전에는 각 지역의 제자들만 올라가지 말라고 권고하였고 누가를 비롯한 선교여행을 함께 했던 사람들은 올라가지 말라고 권고하지 않았지만, 21장 12절에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순간에 누가를 비롯한 선교여행을 함께했던 동역자들까지도 인간적인 걱정과 염려를 견디지 못하고 인간적인 반응을 보여준다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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