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구약 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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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어놓고' 읽는 책 물론 덮어놓고(!) 읽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성경은 열려진 책입니다. 아니로니칼 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영원한 베스트셀러이면서도 덮어놓고 읽혀지는 책이 성경입니다. 상당히 많은 교회에서, 성경은 목회자들의 설교를 위한 필수적 자료집에 불과하고, 좀더 세련된(?) 평신도들에게는 묵상의 시간(Quite Time)을 위한 교과서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개신교가 천주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성경의 권위에 대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운동의 유명한 구호 중의 하나가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와 '성경 전체로'(tota scriptura)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성경은 성직자들의 독점물(獨占物)이었습니다. 평신도들에게는 닫혀진 책이었습니다. 성경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진 책'이 된 것은 특별히 16세기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운동과 근대사회의 민주적 정부의 덕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 너무나 친숙하게 되고, 누구든지 성경을 소유할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읽을 뿐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성경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덮어놓고' 읽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성경은 결코 읽기 쉬운 책, 이해하기 쉬운 책은 아닙니다. 특별히 구약이 그렇습니다. 문화적 정황 구약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상황과는 너무도 다른 문화적 환경아래 살고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쓰여졌으며, 또한 그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은 시내 산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왕국의 옛 언약 행정부 아래서 살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시내 산에서 수립된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은 고대 세계의 수많은 민족들 중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삼았습니다. 시내 산 언약으로 알려진 이 언약은 이스라엘의 삶과 생활 방식과 예배를 구성하였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필요와 환경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법률[율법]들을 통하여 그러했습니다. 또한 이 언약은 분명한 어조로 이스라엘의 사명을 규정하였습니다. 즉 참된 한 분 하나님을 다신론[多神論]적 세계 안에서 증거하고,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뜻인 의[義]로운 삶을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이라는 것을 이 언약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언약은 이스라엘이 바라고 소망하는 축복된 미래 ― 잃어버린 낙원의 대치(代置)로서, 그리고 구속받을 땅에 대한 시사회(試寫會, preview)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려는 약속의 땅에서 안식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 ― 의 윤곽을 그려주었습니다. 심지어 창세기도 시내 산 사건 이후에 쓰여졌다는 사실과, 시내 산 이후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무엇보다도 옛 언약의 조건들과 규정들 아래 살고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종류의 문헌인가? 구약은 서로 다른 '종류'의 글들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 네러티브(narrative), 법률들(laws), 예언(prophecy), 시편(psalm), 지혜(wisdom) 등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글들을 담고 있습니다. 소위 우리가 장르(genre)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글의 종류'(genre)들은 다시금 '한 단계 아래의 종류'(sub-genre)들을 갖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이라 불리는 장르 가운데 기도문들, 찬양의 노래, 신앙고백, 헌신의 노래, 경건(敬虔)을 가르치는 교훈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보호할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왕에 대한 말씀들 등이 있습니다. 지혜 문헌들 역시 다양한 종류의 글들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잠언집, 욥의 시련에 관한 이야기, 전도서 저자의 영적 고뇌들, 아가서에 나타난 사랑의 승리 등이 있습니다. 예언 문헌 안에도 경고문, 비난과 고소문, 탄식, 심판선언, 미래적 회복 선언, 그리고 먼 미래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에 대한 환상들 등이 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삶을 규정하고 구성하는 법률들(율법들) 역시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의례, 제사법, 정결법, 가족관계법, 종들과 이웃을 대하는 법, 사법적인 규정들, 정치와 경제에 관한 법규들, 전쟁법 등을 포함합니다. 이상과 같은 다양한 문헌들은 제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기능(機能)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독자들을 이러한 문헌의 종류들(장르)을 조심스럽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장르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성경을 읽는 독자들을 그 의미를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 문구들을 음미해 보십시오: 잠언은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은 예언이 아닙니다. 예언은 역사가 아닙니다.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신뢰의 고백("고난의 날에 그[하나님]가 나를 그의 처소에 안전히 보호하실 것입니다," 시 27:5)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신뢰의 고백이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아니란 말입니다. 또 다른 예로, "야웨를 찬양하라," 혹은 "주(主)안에서 기뻐하라"는 문구는 예배에로의 초청 선언이지 결코 명령이 아닙니다. 이처럼 시는 시로, 잠언은 잠언으로, 초청의 말씀은 초청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야기체 설교문 대충 구약의 절반 분량을 차지하는 역사서(historical books)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역사적 네러티브를 담고 있는 책들은 현대적 의미에서 우리가 말하는 역사서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네러티브 설교들(이야기화된 설교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실제적으로 발생한 역사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이스라엘의 과거에 발생하였던 사건들이나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의미에서의 역사서들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에게 그들의 옛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지금 그의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시고 계시며, 그 백성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가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설교와 같습니다. 구약의 역사서들이라 불리는 역사적 네러티브 책들의 경우, 그 저자는 그가 살고 있었던 동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길에 관해, 믿음의 길에 관해, 순종의 길에 관해, 희망의 길에 관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인가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創造) 백성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다시금 회상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기적에 의해 출생한 민족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하였습니다. 그들이 걸어왔던 길들은 신(神)의 은총과 인간의 배반으로 이루어진 직조물(織造物)이며, 하나님의 인내와 그의 백성들의 반역으로 얼룩진 부끄러운 역사였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역사서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믿음의 길로 걸어갈 것을 권면(勸勉)하며, 순종의 역사를 만들라고 충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러티브 책들의 저자들은 그들 당대의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선포했던 설교자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네러티브 책들은 '선포된 설교'들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역사와 구약역사서 위에서 말한 바처럼 역사적 네러티브 책들이 '선포된 설교'들이라 할 수 있다면, 이것은 구약 역사서들을 읽는 독자들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줍니다. 첫째로, 우리는 역사서 저자들의 메시지에 담겨있는 커다란 주제들을 분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그 설교(메시지)의 중요한 주제들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설교'들인 역사서를 연구한다는 것은 각각의 설교들 안에 담겨 있는 중요한 요점들을 파악하는 것을 말합니다. 역사서를 읽으면서, 기껏해야 그 안에 기록된 인물들이나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얻는데 그친다면 그것은 본질을 놓치는 격이 될 것입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서 성경을 읽거나 성경공부를 한다면, 교회에서 열리는 성경 퀴즈대회에 나가 우승은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성경을 잘못 다루는 것이 됩니다. 성경은, 특별히 역사서는 단순히 인물, 정보, 기관, 제도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러한 책들(역사서)은 전체로서 읽혀지고 통째로 연구되어져야 합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역사서들은 마치 '성경 이야기들'처럼 단순히 수많은 이야기들의 모음집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질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문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마치 잘 구성된 설교들처럼 그렇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서는 '한 자리에' 앉아서, 혹은 단숨에 읽혀지도록 구성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매우 중요한 해석학적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구약(옛 언약을 담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 새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왕국을 새롭게 집행해 나가는 새로운 시대를 여신 분 ― 를 통해서 이루신 일들에 대해 조명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독자들은 구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약속들(아브라함과 이스라엘과 다윗에게 약속한 언약들), 혹은 소위 '메시아'적 예언구절들, 아니면 그리스도의 '모형들'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그것들이 위치해 있는 구약(옛 언약)의 맥락에서 따로 떼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독립적이며 고립적인 증거구절들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것들은 구약 성경 안에 증거 되고 있는 구원역사의 전반적 전개과정에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요소들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거시적(巨視的) 구원역사의 흐름 안에서 그것들을 바라보거나 이해할 때 그것들의 기본적인 가치와 의미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러한 장엄한 구원역사의 전개과정 안에서 제각기 구체적이고 독특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러한 역할을 통해서만 그것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행하신 일과 지금 행하시고 계신 일들과 앞으로 행하실 일들은 모두 '구원에 관한 이전의 모든 역사'를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요약 그러므로 이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증거로서 구약전체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다방면으로 조명(照明)하고 밝히 드러냅니다. 구약전체는 그 당시에서 바라볼 때 앞으로 전개되어지고, 지금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어지는 것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읽는 독자들 중 그 당대의 시점에서 앞으로 전개되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시려고 왔는지에 대해서도 올바로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을 그리스도라는 프리즘(prism)을 통하여 읽지 않는 사람은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을 위하여 구약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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