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스크랩] Re:마음에서 마음으로II(약5:19-20,2:21-26)

baromi 2005. 8. 30. 07:56

부산***교회3일집회:둘째저녁                                                                                     19/07/2005

 

                                         마음에서 마음으로II(약5:19-20,2:21-26)

 

 십자가의 복음은 자유의 복음입니다. 이 자유를 누리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하지만, “머리의 마음”(mind)으로가 아니라, “가슴의 마음”(heart)으로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제 집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마침 기독교방송을 어머니께서 켜서서, 어떤 분이 설교를 하면서 드는 예화를 들었습니다. 나이야가랴의 곡예사에 대한 잘 알려진 예화였습니다. 아주 노련하게 외줄 위에서 나이야가랴 폭포수 위를 능숙하게 건넌 곡예사가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나의 어깨에 올라서서 나와 함께 건널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고 했는데,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있어요 자신을 맡기는 한 아이가 있었는데, 왜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그 아이에게 물었더니, 저 분은 내 아버지예요 하였더랬습니다. 좋은 예화입니다. 지식만이 아니라 인격적인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결론인즉, 그러니, 500억 들여서 성전을 짓고 있는 교회문제로 근심걱정하지 말고 모든 것을 다 주님에게 맡기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평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맡긴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 위탁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이 자유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 좀 노골적으로 질문해 보겠습니다. 제가 집회를 통해서 말씀을 전하는 방식이 김진홍목사가 전하는 스타일과 비교해서 재미있습니까? 재미없습니까? 그 분 설교 참 구수하게 잘 하시쟎아요? 제가 그런 분과 저를 비교하니까 우습지요? 왜 제가 하필이면 김진홍목사를 예로 드느냐 하면 저희 어머니께서 무척 좋아하시는 설교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가 이렇게 다른 목사와 저를 비교하면서 회중들이 어느 목사가 더 은혜를 끼친다고 생각할까 하는 것에 신경을 쓰게 된다면 제가 자유할까요 자유하지 못할까요? 우리 ***목사님이 이웃교회와 한우리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진다든지 하면 박목사님이 자유할까요 자유하지 못할까요? 제가 목사들이 빠지기 쉬운 비교의식을 지적했으니, 여러분들에게 질문해도 괜챦겠지요? 여러분들은 이런 비교에서 자유하십니까? 이웃이나 친척이 자기보다 아파트평수가 좀 더 넓은 곳으로 이사를 간다고 하면 배가 아프지요? 차를 좀 더 좋은 것으로 구입하면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유하십니까? 자유하지 못합니까? 같이 입사한 동료가 승진을 자기보다 먼저 하게 되면 괴롭지요? 자유하십니까? 자유하지 못하십니까? 동료가 더 이쁘다고 인정을 받으면서 칭찬을 받는 것 같으면 기분이 나쁘십니까? 왜 5촌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고 4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일까요? T.S.Eliot라는 영국의 시인은, 모든 불행은 비교에서 온다고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비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고 잘못된 기준에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비교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가 기준이 됩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자면,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발전이 있으십니까? 성장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제가 김진홍목사나 조용기목사의 흉내를 낼까요? 그 분들은 그 분들 나름대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있는 줄 믿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쓰십니다. 저는 다시 한 번 더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그 분들같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분들의 은사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분수를 넘어서는 것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올바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나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준으로 할 때 세상의 그 어떤 기준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자유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 자신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mind)에 심겨진 복음의 도가 우리의 마음(heart)에 인격적으로 온유함으로 받아들여질 때 이런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제까지의 말씀의 요약입니다. 어제 말씀을 나누고 나서 뒤에 환담을 나누는 중에,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인격적으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참 중요한 줄 알지만, 그 주님이 어떻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들으면 참 기분이 좋습니다. 저의 설명들을 잘 이해하고 따라오고 계시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들을 던질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질문이 되는 것 자체가 “튜닝”이 된 것을 보여줍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결코 “머리”(mind)를 사용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실상은 참으로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렇게 권면했습니다(딤후1: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1장7절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자유하는 마음입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입니다. 여기서 “근신하는 마음”이란 “a sound mind”입니다. “건전한 지각(정신,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생각하는 기능을 건전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저는 이것을 “건전한 마음의 법칙”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뜻과 계시의 말씀을 이 “마음”(mind, reason, understanding)을 통해서 깨닫고 그것이 우리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의지적 결단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것을 무시하고 감정에 영향을 미쳐서 무언가를 느끼게 만들고 그 느낌을 “지각”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합리화를 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감정이나 정서가 무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의 체험이나 표현은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순서가 무시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 지각과 이성의 기능이 인격에까지 이르지 못한 채로 압도적이 되어버리게 되면, 곧 아는 것으로만 그쳐버리게 된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건전한 신앙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머리의 마음에서 가슴의 마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체험이 중요한 줄 알면서도, 그 진리로서의 예수가 어떻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실로서 고백할 수 있는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특별히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종교다원주의의 영향 하에서, 예수의 유일성이 부인되는 현실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종교다원주의나 포스터모더니즘의 원리를 어제도 실상 간단히 언급했었더랬습니다. 문화상대주의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쉬운 예로, 오리로도 토끼로도 볼 수 있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리로, 어떤 사람은 토끼로 이 그림을 지각합니다. 종교다원주의를 지각하는 사람들은, 사람들 이렇게 이런 그림들을 지각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진지를 이해하는 것도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되고, 어느 곳으로 오르러라도 산으로 올라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기만 하면 어떤 종교를 믿더라도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하지요. 자, 이 그림을 한 번 보십시오. 왜 이 그림에서 어떤 사람은 오리도 보고 다른 사람은 토끼를 봅니다. 이 자극물자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토끼나 오리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 그림에서 호랑이나 늑대를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런 단순한 그림을 지각할 때에도 그 자극물의 특성에 따라서 우리가 지각하는 것처럼, 현실을 파악하고 그래서 진리를 지각할 때에도, 그 현실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보게 됩니다. 현실은 복잡하기 때문에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의 특성입니다. 좀 어렵습니까?

 

  이것을 예수님께서 왜 유일하신 구원자인가 하는 질문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공자도,석가도, 마호메트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구원자이고 구주가 되실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가지 차원에서 이것을 답변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런 포스터모던이즘, 상대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서 이렇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가 영원한 현실의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토끼와 오리라는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자극물을 보면서, 그렇게 보는 것이 그런 자극물의 그런 복합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지각해야 할, 우리가 판단하고 이해해야 할 이 현실, 이 영원한 현실, 곧 하나님을 가장 잘 나타내고 그 특성과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영원한 현실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을까요?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한 사람 보셨습니까? 예, 한국의 정신병원에 가면 그런 사람 있답니다. 어떤 정신병동에서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한 환자가 “나는 이 세상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말하길, “나는 너를 보낸 적이 없다” 하였답니다. 부처도, 공자도, 마호메트도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미쳤지요? 예,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라면 미쳤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보십니까? 만일, 미친 것이 아니라면, 고등종교사기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고등종교사기꾼이라고 한다면, 그 죽음이 이상합니다. 사기를 쳤는데,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해버립니다. 사기를 쳐도 잘 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의 언행과 희생과 헌신을 생각해 보면 사기꾼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나는 하나님이다”고 하는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원한 현실, 진리를 객관적으로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예수는 성령을 파송하신 분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하나님의 영을 파송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실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을 파송한다는 것을 어불성설입니다. 어떤 부흥사는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사람도 있기는 합디다만은.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유일하신 반영입니다. 어떻게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됩니까? 왜 모로갑니까? 총을 싸고 사람을 죽이면서 서울을 가면 됩니까? 가도 바로 가야지요. 어느 방향으로 올라도 산을 타는 것은, 취미요, 오락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취미와 오락이 아닙니다. 인생이 갈대라고 할 때에, 인생의 연약함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인생은 뻘밭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까? 비유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진리는 어느 쪽으로든지 산을 타는 문제가 아니라, 산정상에서 하늘을 올라가는 문제입니다. 하늘에서 새끼줄이 내려오지 않으면 못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 그 새끼줄인 것입니다.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시는 야곱의 꿈 속의 인자이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지각(mind)으로 이해해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종교다원주의의 사조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런 지식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그 지식이 나의 마음(heart)에, 온유함으로 받아들여지는데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유함”으로 받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바로 1장21절 자체가 답을 줍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모든” 더러운 것과 “모든”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창녀가 자기 신체의 한 부분은 절대로 손님에게 맡기지 않으면서 그것을 지켰기 때문에 자신의 창녀행위를 정당화시키고 자신은 순결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답니다. 우리도 간혹, 어떤 악한 것은 청산했는데, 청산하지 않고 남겨둔 것을 청산한 부분적인 어떤 것으로 정당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가령, 내가 도둑질은 하더라도 강도질은 안한다. 내가 욕설은 하더라도 거짓말은 안한다. 내가 내가 세금포탈은 해도 마누라 폭력은 안한다. 내가 마누라폭력은 해도 바람은 안피운다 등등의 여러 가지 변명들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마음에 심겨진 도를 온유함으로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모든 더러운 것”, “모든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기만성과 패괴성을 깨닫는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인생이 죄인이라는 것은, 사과에 오물이 묻어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과 자체가 썩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영혼에 묻어있는 죄를 닦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영혼의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원천, 곧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나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재밌게도, 죄(S-I-N)라는 단어의 그 중심에 바로 “나”(I)가 놓여져 있습니다. “요-나”를 처리해야 합니다. 이것을 처리하지 않으면 어떤 형태의 종교나, 어떤 형태의 도덕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한마디로 “나님종교”를 믿는 것입니다. 교회를 믿으면서도 ‘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말로는 예수님 믿고 하나님믿는다 하면서도 “나님”을 여전히 믿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나를 처리해야 합니다. 나를 죽이고, 나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됩니다. 그래야, 크리스챤입니다. 저의 말이 아니고 바울사도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크리스챤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못박았느니라’(갈5:24). 그럴때에 나님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종교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대체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는 것입니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오해하지 않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천사가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크리스챤이 되더라도, “남은 죄”가 있습니다. 아니 본성이 처리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남은 죄”가 있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비유를 들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나무뿌리를 통째로 뽑았는데, 아직 그 잔뿌리가 땅에 남아 있어서, 나무를 다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뒤에 바로 그곳에서 그 나뭇잎사귀가 다시 나는것과도 같습니다. 뽑았다 하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죄의 잔뿌리들이 올라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좀 흉한 예이지만, 이해를 위해서 듭니다. 똥을 싣고 가던 똥차가 그 안의 똥을 다 비우고 청소를 깨끗이 했다면, 그 차 안에서 냄새가 나겠습니까? 안나겠습니까? 그 차 안에서 맛있는 식사를 여러분들은 할 수 있겠습니까? 냄새가 난다고 안하시겠습니까? 질문하겠습니다. 그 똥차에서 나는 냄새가 똥을 비우기 전과 후에 어떻게 차이가 나겠습니까? 좀 다른 듯 해도 냄새가 흉한 것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질문합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몇 번 했습니까? 한 번은 창세기12장에서, 또 한 번은 창세기17장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거짓말을 합니다. 같은 거짓말입니까? 다릅니까? 12장의 거짓말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기심을 받기(15장) 전이고 17장은 그 후입니다. 그런데도 냄새가 비슷합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방향이 다릅니다. 앞의 것은 똥을 비우기 전이고, 뒤의 것은 똥을 비운 뒤입니다. 앞의 것은 지옥을 향하여 가는 중에 나는 냄새이고, 다른 것은, 천국을 향해서 가다가 나는 냄새입니다. 점점 없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향수가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은 냄새나는 그 똥차 안으로 누가 들어오셨느냐 하면,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식사를 하시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예수님과 교제를 나누다 보면, 내 안에 똥냄새가 사라집니다. 나의 남은 죄들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정과 욕심들이 못이 박혔는데도 꿈틀거리면서 다시 살아나려고 용을 쓰다가는 기어이는 힘이 약하여져서 꿈틀거리지도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비록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의인이 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성숙해져가고, 자꾸만 자라가고 자꾸만 승리해 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은혜의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4장6절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라는 말의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더 큰” 은혜입니까? 5절에 나오는 것과 대조하겠지요?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은혜라는 것 같은데, 이상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원어로 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성령”이라는 말의 원어가 “토 프뉴마”, 곧 단순히 “그 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경고하셨더랬습니다. “가인아, 네 속에 죄의 소원(사모함)이 있는데, 조심해서 죄짓지 말아라”는 것이었습니다(창4:7). 그런데, 가인이 어떻게 했습니까? 아벨을 쳐죽여버렸습니다. 사람 속에는, 거듭난 사람속에조차도, 이렇게 죄의 사모함, 죄의 열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심하고, 근신하고,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났다고 조금 갑죽대면서 교만해 진다면 죄를 짓게 됩니다. 야고보가 말합니다. “너희 속에 두신 영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면서, 겸손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어떤 맥락에서 하고 있는 줄을 유의하십시오. 남은 죄를 조심하지 않고, 갑죽대다가, 야고보사도가 편지를 보내는 교회 안에 어떤 일이 지금 발생했습니까? 4장1-2절을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에 싸움이 있고, 다툼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살인하며 시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교만하면 이런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다윗이 심지어 간음과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가 시험에 드는 것은, 바로 이런 남은 죄를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지 못하고 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더 큰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더 큰 은혜입니까? 나를 교만하게 만들고, 나를 죄짓게 만드는 그 죄의 열정, 죄의 사모함보다도 무엇이 더 크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어떻게 그 은혜를 사모하면서 살까요? 저는 주 안에서 한 몸된 형제와 자매는 이 은혜의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으로 기도와 성찬과 세례가 은혜의 방편이라고 고백해 왔지만, 이 세 개의 방편를 압축해서 한 마디로 표현하면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는 것 말입니다. 교회가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한우리”예요. 그러니, “한우리교회”라는 이름자체가 좀 이상합니다. “한우리”라는 말이 교회의 본질을 표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희 양무리교회의 이름도 그렇습니다. 이상한 이름들이지만, 이해가 되지요? 어제 제가 말씀드리길, 하나님의 자녀된 나는 대통령보다 신분이 높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쫀쫀해져선 안된다고 하였지요. 저는 그것을 오늘 이렇게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대통령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자녀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끼리 서로 어떻게 대우해야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어제 초등학교동창 둘이 오랜만에 제가 귀국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어제 저녁첫집회에 참석했었습니다. 늦게야 교회생활을 하게 된 친구인데, 저를 기억하고는 애써 찾다가 실상 25년여만에 만났던 셈입니다. 이런 친구는 피를 나눈 형제들보다 더 진한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25년만에 만난 초등학교동창이라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예수의 피를 나눈 인연이요, 영원토록 주를 찬양하며 동거동락하게 될 인연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이 그런 의미를 가집니다. 주 안에서의 형제자매와 주 밖에서의 형제자매는 차원이 다르고 질이 다릅니다. 내일은 주 밖의 사람들을 향한 크리스챤의 삶을 생각해 볼 것입니다. 오늘 남은 시간엔 주 안에서 형제자매들에게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할까 생각하려고 합니다. 주안에서 형제가 나와 성품이 다를 수 있고 취향이나 삶의 스타일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다르면 불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깐 교회를 떠나면 되겠지요? 가장 못된 방법이고, 가장 추한 방법입니다. 나와 기질과 성품과 스타일이 다른 형제와 자매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보내주신 천사예요. 아니, 주님 당신께서 나타나신 것이예요. 주님 뵙고 싶습니까? 제가 보여드릴께요. 바로 옆을 보세요. 주님께서 지금 형제의 모습으로 자매의 모습으로 나타나 계십니다. 여기에, 혹시, 자기만 주님의 몸이요 지체라고 생각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아직 꼭지 덜 떨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있으면 손들어 보세요. 그런 사람있으면 바로 그 사람 자신이야말로 꼭지가 덜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나와 얼굴도 다르지요? 모도 나있지요? 그 모에 의해서 내가 다듬어지지요. 그래서 잠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철이 철을 빛나게 하는 것처럼 친구가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철이 부딪혀야 빛이 납니다. 이 빛이 어디로부터 오나요?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혹시, 교회 안에서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눈을 감고 그 얼굴을 떠올려보세요. 고백하세요. ‘주님, 내가 주님을 미워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을 하면서도 실상은 주님을 미워했습니다.” 이런 고백이 가능해야 여러분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인 것이 증명됩니다. 형제를 미워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형제 안에서 주의 얼굴을 뵙지 못한다면, 주의 얼굴을 친히 뵐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형제 안에서 주의 영광을 뵙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사랑하는 첩경입니다.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형제 안에서 주의 영광을 보네 주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탈무드에 이런 얘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옛날옛날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형은 가난했었습니다. 동생은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 자녀들이 많았습니다. 둘 다 가까운 곳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추수때가 되어서 추수를 하는데, 동생 마음에 염려가 됩니다. 이번에 날씨가 변변치가 않아서 추수량이 적은데, 형님댁이 걱정이 된 것입니다. 집안일 돌보시느라고 손님들 치루고 여러일들 살피시는데, 돈도 필요할 터인데…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기 논에 타작한 곡식단을 들고는 밤늦게 형님의 낮가리에 올려놓았습니다. 형님도 추수하다가 염려가 되었습니다. 동생댁이 걱정입니다. 변변치 않은 추수에 이거 동생댁에는 아이들도 많은데,쌀이 더 필요할 거야. 곡식단을 들어서는 밤늦게 동생의 낮가리에 올려놓았습니다. 다음날 낮에 보니, 형님도 동생도 모두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흐음…어제 분명히 내가 형님낮가리에 곡식단을 올려놓았다 싶은데, 전혀 자기 낮가리가 낮아지지 않았습니다. 형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러다가…어찌어찌하여, 휘영청 밝은 달밤이 두 형제들이 그 밭에서 만나 부둥켜 앉고는 감사하면서 울었더라는 얘기입니다. 잘알고 있습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터가 예루살렘성전터가 세워졌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실상, 이 예루살렘터가 예수의 죽음에 기초해서 평화가 세워질 교회임을 강조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 형제의 사랑보다 더 진하고 진한 예수의 사랑에 기초해서, 내 형님되신 예수가 당신의 곡식단을 들고는 나의 낮가리에 쌓아두시기 위해서 밤을 거닐고 계십니다. 내가 그의 형제들에게 어떻게 해야할까요? 내가 돌보아야 할 주의 몸된 지체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내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진리증거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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