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스크랩] 마가복음의 제자도-심상법

baromi 2005. 8. 26. 08:03
복음서는 각각의 복음서 기자가 자신이 속한 교회의 특별한 문제에 대하여 목회적인 목적(의도)을 가지고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수많은 사건들을 선택·배열·묘사하여 스토리 형식으로 기술한 것(narrative: dih,ghsij[눅 1:1])으로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의 대속적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던 사실들을 그 중심으로 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복음서의 내용인 예수의 생애가 십자가와 부활을 향해 나아간다. 복음서는 한마디로 예수의 생애에 대한 초대교회의 기억과 선포(cf 행 10:34-43)를 의미한다. 여기에 각각의 복음서는 동일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일화들(사건들)을 서술하고 있지만 그들이 묘사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신학적인 예수의 상)에는 그 신학적 뉘앙스 혹은 강조점이 각기 다르다. 마태복음서는 `의(義)의 교사`로서, 마가복음서는 `고난받는 종`으로서, 누가복음서는 `우주적인 구원자`로서, 그리고 요한복음서는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예수를 묘사하고 있다.

특히 초대교회의 정체성과 예수의 생애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초대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정체성에 위기가 찾아 왔을 때 예수의 생애를 회상하게 되었고 이것들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것들이 바로 복음서이다. 이 가운데 마가복음서는 엄청난 외부의 시련(환난)으로 인해 두려워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초대교회 청중들에게 복음서의 기자인 마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모습을 부각하여 예수의 생애를 전함으로써 참된 복음 전파자 즉 예수의제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막 1:17) 쓰여졌다.

마가복음서는 이것을 읽는 교회(독자)로 하여금 예수의 공 사역(특별히 이적사역과 수난사역)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 신가`(신분)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가지게 함과 동시에 그러한 깨달음을 통하여 참된 제자의 삶(제자도)을 살도록(막 1:17; 8:34ff) 촉구한다. 결국 마가복음서는 독자들을 향하여 두 가지 신앙적인 반응을 촉구하는데 그것은 복음서를 통하여 반복하여 묻고있는 예수의 신분에 대한 질문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8:29)라는 질문에 올바른 대답을 하도록 촉구할 뿐만 아니라, "나를 따르라"(1:17)라는 명령에 올바른 순종을 하도록 요구한다. 그런데 `예수의 신분`에 대한 질문과 `따르라`는 제자도의 명령은 모두 수난의 주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점에 있어 수난은 마가의 기독론과 제자도의 중심에 놓여있다. 특히 막 8:31; [9:12;] 9:31; 10:33-34; 10:45의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구절들은 기독론과 관련되고, 막 8:34-38의 제자들의 수난에 대한 구절들은 제자도와 관련된다. 이것을 마가복음에서 제시되는 두 주된 인물들(예수님[중심인물]과 제자들)에 대하여 부여된 사명과 관련하여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막 1:1; 1:11; 8:27-33; 9:7; 12:6; 15:39)

/ 예수: 메시아의 길(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
표제(1:1)-"주의 길"- 섬김/수난/죽음(8:31; 9:31; 10:33-34, 45과 8:34-38)-->깨달음과 순종
\ 제자들: 제자의 길(주님을 따르는 자의 삶)

"나를 따르라"(막 1:17; 8:34-38; 10:52)

지금까지 마가복음서는 주로 기독론과 관련한 구원론에 대한 설교로 활용되어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기독론(예수가 누구신가)과 관련하여 제자도(제자의 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왔다. 즉 올바른 신앙 고백은 올바른 제자의 삶을 이끄는 근본으로서 예수의 신분에 대한 질문은 마가복음의 스토리를 통하여 제자들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도전해 왔다. 먼저 예수님의 신분(정체성)에 대한 마가복음서의 강조를 마가복음서 전체의 메시지와 연관시켜 이해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천둥 같은 서곡>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막 1:1)
/ | 막 1-8 장 (막 8:22-26) 막 8-16 장
(이적들) | (수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베드로)
수난(과 부활)예언
|
책망/부인/저주
|
예수님의 수난
|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백부장)
|
"[여자들은]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 16:8)
<무서움에 떨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으로 종결>

우리가 아는 대로 마가복음서의 중심 인물은 예수님이시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그의 신분>에 대한 의문과 논란을 중심으로 많은 사건들과 함께 갈등과 서스펜스를 야기하며 마가의 스토리는 극적으로 진행되어간다. 막 1:1-13에서 예수님이 독자들에게 소개되고, 막 1:14-8:26은 예수님의 공사역을 보여주며 막 8:27-16:8(20)은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과 그에 따르는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해 준다. 신분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그의 사역은 크게 이적사역(막 1-8장)과 수난사역(막 8-16장) 두 가지로 구분되어 이해되어진다. 먼저 마가복음서의 중심 주제인 예수의 신분에 대하여 살펴보자.

1. 예수의 신분에 대한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가복음서의 표제구인 막 1: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이 제시하는 대로, 마가복음서는 작중(作中)의 중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그의 신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수의 신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마가의 청중의 특별한 상황(문제)에 대한 신학적 답변으로 주어졌다. 즉 마가가 묘사(제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떠한 복음인가를 올바로 깨달은 사람은 예수를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을 해야 된다.

특별히 이것은 복음서의 중반부인 8:27-29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던진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와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는 질문에 독자가 마가의 스토리를 통해서 - 스토리에 나오는 사건과 작중인물들의 반응에 비추어서 -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에 요구한다.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마가복음서에 나타난 의문들과 논의들을 요점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막 1:1(저자의 결론: 표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 막 1:11(하늘로 선언: 예수의 세례 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 예수께 대한 신적 계시
- 1:24, 34(귀신의 외침):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오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4절)
- 1:27; 2:7(예수의 신분에 대한 의문): "이는 어찜이뇨?"/"이 사람이 어찌...?"
- 3:11; 5:7(마귀들의 고백과 인정: 이적[축귀]기사 중):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 3:30(종교 지도자들의 오해/대적):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 4:41(제자들의 의문):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 6:3(고향에서 신분에 대한 의문):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 6:14-16(헤롯의 의문): 세례요한; 엘리야; 옛 선지자 중의 하나?
- 6:49(제자들의 생각): "유령인가?"
- 8:27-28(예수의 질문):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중 하나
- 8:29a(예수의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8:29b(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 어떤 그리스도냐? 고난의 길을 가는 그리스도(8:31). 그러나 베드로는 이해하지 못함.
- 9:7(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신적 계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예수는 세례 요한/엘리야/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시각장애가운데 있음.
- 12:6(비유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
- 14:61(대제사장의 질문):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 14:62(예수님의 답변): "내가 그니라". 대답은 묵살되고 신성 모독죄로 사형으로 정죄(62-63)
- 15:2(빌라도의 질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15:2(예수님의 답변): "네 말이 옳도다"
- 15:3-5(대제사장들의 고소와 빌라도의 반복된 질문과 예수님의 침묵)
- 15:18, 31(군병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조롱): "유대인의 왕/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
- 15:39(백부장의 고백: 예수의 죽음 후):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막 1:1은 마가복음의 중심주제가 무엇인지를 함축적으로 제시해 준다.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마가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족보나 그의 탄생기사에 대한 언급이 없고 오히려 천둥 같은 선언조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이 구절은 마가복음의 내용을 함축하는 마가복음의 표제어로서 곧 마가복음의 중심인물인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한 이야기가 마가복음의 중심주제임을 알려준다. 즉 마가가 선별하여 제시하고 있는 예수님의 생애의 스토리(사역들)를 통한 그의 신분(기독론)에 대한 바른 이해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마가의 청중이 가져야 할 바른 삶(제자도)의 골격이 된다. 이점에 있어서 마가복음의 전반부(1-8장)는 특히 예수님의 이적사역을 통해 제자들이 바른 깨달음을 가지게 되는지에 대한 여부가 자주 논란이 되었고(막 4:12, 23; 7:14, 18; 8:17-21) 결국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소경과 귀머거리와 같은 상태에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막 8:17-21. 특히 18절을 유의하라). 여기서 우리는 `눈`과 `귀` 그리고 이와 관련된 `본다`, `듣는다` 그리고 `깨닫는다`와 같은 단어들의 잦은 반복들과 함께 소경과 귀머거리를 고치신 이적사역의 이중기록들(막 7:31-37; 8:22-26; 9:14-29; 10:46-52)이 이러한 의미(교훈)를 가중시키고 있음을 발견한다.

마침내 중반부에서 복음서의 클라이맥스가 되는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질문("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이 가이사랴 빌립보의 노중에서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여기에 베드로의 답변("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이 있은 후에 비로소 예수님의 수난 예언이 소개된다(막 8:27-31). 그러나 이점에서 제자들의 대변자인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거절(책망)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격렬한 책망을 받는다(32-33절). 이어서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교훈 하신다(막 8:34-38).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이해는 그의 이적사역 그리고 수난사역을 바로 깨달음으로써 되어져야 하며 이것은 단순히 외관상으로 들음(귀)과 봄(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옥토처럼) 순종과 따름으로 이어져야 함을 마가는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곧 `듣고 따름/순종`(부자청년의 부정적 예[막 10:17-22])과 `보고 따름`(소경 바디메오의 긍정적 예[10:46-52])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능력적인 사역을 함과 동시에 그는 수난의 길을 가야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독자는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러한 계시는 예수님의 공사역의 시작에서 하늘로부터 예수님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졌고(막 1:11), 이 아들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 메시아(그리스도)의 이적(異蹟)의 사역을 행하는 그리스도로서 입증되어 졌고(막 8:29), 그리고 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적 계시는 고난의 사역에 대한 예언이 있은 지 얼마 후에 비로소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산에서 주어졌다(막 9:7).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는 이 계시(비밀)는 수난과 부활의 때까지는 여전히 베일에 감추어 진 채 진행되다가(막 9:9), 마침내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신 후에 백부장(최초의 이방인)에 의해 비로소 공개적으로 고백되어졌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

결론적으로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 예수님의 이적사역과 수난사역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는 마가복음의 중심된 주제이고 이를 올바로 깨닫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 즉 주님과 복음을 위해 고난(부끄러움)을 감수하고,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까닭에 이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논란은 마가복음을 통해 반복하여 나타나면서(막 1:1; 1:11; 3:11, 30; 4:41; 5:7; 6:3; 6:14-16; 6:49; 8:27-29; 9:7; 14:61-62; 15:2-5; 15:18, 31; 15:39) 스토리 내에서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하여 갈등과 서스펜스를 일으키며 흘러가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결국 복음서를 통해 수난 받은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복음(막 1:1)을 깨달은 독자는 결코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두려움가운데 있을 수가 없고 믿음과 순종 그리고 봉사(섬김)와 희생의 제자도로 나아가야 함을 마가는 여러 등장인물들(제자들; 베드로; 수로보니게 여인; 부자청년; 거지 소경 바디메오; 성전의 과부; 향유 부은 여인; 부활의 메시지를 받은 여인들)을 통하여 극적으로 교훈해 간다. 여기에 마가복음의 중심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한 논란의 의도가 있다. 그리고 독자는 마가복음의 스토리를 읽으면서/들으면서 막 8:29에서 제자들에게 던져진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하는 동일한 질문에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를 요청 받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신분을 중심으로 한 중심주제를 가지고 마가복음을 통전적으로 읽게 될 경우 우리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과 함께 참된 기독론과 그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인 제자도의 다양한 삶(믿음; 순종; 섬김과 봉사; 소유에 대한 문제; 연합; 기도; 자기성찰; 참된 정결; 등등)에 도전 받게 된다. 이러한 읽기는 비록 기독론을 중심으로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구심적 접근) 주님의 제자로서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여러 등장인물들의 모습들을 통하여 함께 나눌 수 있는 장점(원심적 접근)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슬프게도 마가복음서는 독자들에게 예수가 누구 신가를 명확하게 소개하고 있지만(1:1), 작중의 인물들(특히 제자들)은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예수를 따르는데 요구되는 수난의 길을 걷지 못하고 배반과 도망침과 부인의 길을 가고 있다. 수제자인 베드로 역시도 능력의 그리스도는 이해하지만(8:29) 수난의 그리스도는 이해하지 못하고(8:31이하) 정작 주님에게 수난이 찾아왔을 때 그는 예수를 부인한다. 놀랍게도 마가복음서에서는 십자가상에서 예수의 운명하심을 본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15:39)만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마가복음서의 예수의 신분에 대한 스토리는 환난과 시련가운데 있는 마가의 독자들에게 매우 강한 신앙적 도전으로 남아있다. 과연 너희가 믿는 예수는 누구신가? 그분이 진실로 수난을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고 한다면 그분을 너희는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복음(예수)을 믿고 따르는데 환난이 온다고 두려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하는 모습(16:8의 여인들의 모습처럼)을 보일 수가 있는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 마가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던져진 주된 질문은 과연 수난(특히 예수의 수난과 성도의 수난)의 의미는 무엇인가?

2. 예수의 수난: 기독론의 기초이며 제자도의 모델

마가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신분에 대한 이해는 수난의 주제를 떠나서 바르게 이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 할 그리스도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란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비로소 공개적으로 자신의 수난과 죽음의 운명 길을 예언하셨다(8:29-31). 그리고 그것을 책망하는 베드로에게 가장 혹독한 책망을 하셨다: "사단아 물러가라". 특별히 변모 기사를 통해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따르는 예수는 수난의 길을 가야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시고(9:7a; 9:12) 그들이 `그의 말`(8:31의 수난 예언)을 들을 것을 명하셨다(9:7b).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길`(way)에 대한 중심단락(8:27-10:52)은 그 구조가 세 단계의 점진적 수난의 예언들(8:31; 9:31; 10:33-34)의 언급들을 중심으로 건설되어 있는 점이 이 사실을 잘 입증해 준다. 그리고 막 10:45는 이 단락의 신학(기독론과 제자도)을 요약해 주는 극적 진술로 이해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는 어떤 사람들의 기소처럼 `[자신의 몸인]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14:58; 15:29)로서 소개된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죽음(운명하심)을 보았던 백부장의 고백(15:39)은 이점에 있어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결론적으로 마가복음에서 수난은 마가의 스토리와 그에 따른 메시지를 이해하는 중심 되는 주제이다. 수난을 이해함이 없이는 예수가 누구 신지(예수의 신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고, 또한 참된 제자(제자도)가 될 수 없다(막 8:34-38). 그러므로 수난은 마가복음을 이해하는 맞쇠(master key)로 마가의 기독론과 제자도를 이해하는 핵이며 측정계가 된다. 마가복음서의 영성(제자도)의 측정계는 수난이다.

1)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수난을?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10:27; 14:36)이 어떻게 수난을 당할 수 있나? 왜 하나님이 수난을 받아야 하나? 라는 의문(신정[神政]에 대한 의문)에 대한 답변이 마가복음서가 강조하는 `복음`으로서 이것은 (외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비밀(秘密)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啓示)이다(참고. 막 4:11-12.). 이점에 있어서 예수의 생애(특히 십자가)는 마가복음서의 `비유`(수수께끼)가 된다 예수의 이적들을 본 베드로의 신앙고백(8:29b)과 수난 예언에 대한 그의 오해(8:32)가 바로 이러한 계시적 긴장과 역설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즉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적 사역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보았던 베드로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라고 하였지만(8:29) 그러나 곧 이어 주어진 예수님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언(8:31)은 베드로를 매우 당혹케 하였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이적적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가 무능하게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서 수난과 죽음을 당할 수 있나? 이것은 베드로(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었다: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베드로(8:33). 메시아(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이해는 독자들에게 주어진 마가복음서의 비밀(秘密)이고 역설(逆說)이며 긴장(緊張)이다. 그러나 이것은 천둥 같은 서두(1:1)에서 이미 마가가 선포한 메시지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서를 통하여 제자들은 수난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배반하고 부인하고 도주하며 흩어진다. 복음서는 결국 여인들의 무서움에 대한 언급으로 끝(16:8)을 맺는다. 결국 마가복음에서 `수난`은 예수의 길과 제자도의 길을 이해하는데 철저히
`걸림돌`로 나타난다. 이점은 오늘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우리의 생애에 밤(어둠)의 시간이 오고 (유혹과 환난과 시련의) 광풍이 몰아치면 우리 역시도 이러한 밤의 시간과 광풍의 시간을 믿음으로 이겨내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채 제자들처럼 불신앙과 무지의 외마디(막 4:38)를 지르지 아니할까? 과연 하나님은 우리의 시련(환난, 수난, 그리고 죽음)을 돌아보시는 분이신가?

2) "선생님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4:38).

밤의 광풍 중에 바다에서 제자들이 외친 이 절규는 마가복음서의 메시지를 독자들의 가슴속을 울려주는 메아리처럼 반향 되어 복음서의 종결까지 나아가는 역할을 한다. 과연 하나님(의 아들)은 수난과 죽음을 돌아보지 못하시는 분이신가? 그렇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예수의 수난(죽음)의 마지막에 이방인 백부장이 이 모든 된 일(수난)을 보고 고백하기를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선언한다(15:39). 결국 마가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 즉 다스림(theodicy)은 우리의 수난(죽음)에도 미치지 못하는가?`라는 의문에 이방인 백부장을 통하여 "아니오" 라는 대답을 던져준다. 결과적으로 복음서를 통해 마가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죽음을 돌아보심을 강하게 입증한다. 마침내 밤(수난)의 긴 시간이 지나고 부활의 아침이 힘차게 소개되고(16:2),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진실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돌아보셨다. 그는 잠시 동안의 잠(죽음)을 자시고 이제 깨어서 부활의 주님으로 어두움의 세력을 잠잠케 하신다. 복음서를 통해 독자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비록 복음으로 인해 무서운 환난과 수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능히 돌보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주님)을 위해 당하는 수난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복음을 위해, 주님을 위해 당하는 수난은 하나님의 현존과 다스림을 볼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된다.

3)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15:34).

십자가상에서 버림받은 하나님의 아들의 절규. 이 절규(탄원) 속에서 하나님의 현존도 없고 응답도 없다. 십자가 위에서 오직 버림받은 아들의 절규만 메아리친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서는 사람들의 조롱과 모멸의 말들만 가득하다. 왜 하나님은 그 아들의 절규(탄원)에 응답하지 않는가? 그토록 순종하는 아들이었는데 그토록 사랑스러운 아들, 기뻐하는 아들(막 1:11; 9:7)이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산 아래의 배역한 세대(`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인 우리 - 귀신에 의해 손상 당한 한 아들의 모습처럼 - 를 위한 배려였다고 마가는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통치)는 수난(죽음)의 길을 통해서 온다. 수난은 메시아(그리스도)가 걸어가야 할 길이며,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막 8:31; 9:31; 10:33-34; 10:45과 8:34-38; 13:9-13).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 왔을 때에도" 옥토의 사람들은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받아 아름다운 결실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점은 오늘 주님을 따르는,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제자들에게도 똑같은 도전으로 나타난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에 고난(수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패인가 승리의 과정인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는 자는..."(막 8:34);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면..."(막 8:38). 주님(복음)때문에 오는 수난은 하나님의 돌봄이 없는, 하나님이 무능하셔서 오는 수난이 아니다. 비록 수난은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악한 세대에서 수난을 참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된다(막 8:38). 확실히 수난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위해 사는 모든 제자들이 걸어가야(지불하여야) 할 길(몫)이다.

3. 제자도(Discipleship): 예수 중심의 제자도

예수의 사역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의 신분에 대한 올바른 고백은 올바른 제자도를 위한 초석이다. 마가복음서에서 예수의 신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올바른 들음과 올바른 봄)는 곧 순종과 따름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제자도는 철저히 예수 중심의 제자도를 말한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막 9:7).

마가에 따르면 `하나님의 복음`(1:14)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1:1; 참고. 8:35, 38)이다. 곧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이다(참고. 8:35, 38의 "나와 복음"/"나와 내 말"을 유의하라).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곧 하나님의 대리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변화산 상에서 하나님은 제자들에게 "저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셨다(9:7). 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탄적인 행동이다(8:32-33). 예수는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는 분"(12:14)이시다. 오직 그 분을 통해서, 그 분의 가르치심을 순종하고 따름으로써만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전할 수 있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닫힌 것들(눈/입/귀)이 열려("에바다"[7:34]), 올바로 `주(主)의 길`(1:3)을 깨닫고 따를 수 있다. 예수는 우리의 제자도의 기원/원천이시고 또한 모범이시다.

마가복음서가 제시하는 제자도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회개와 믿음으로 시작한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그의 공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종말을 선언하시고 하나님의 복음(도래)을 전하며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다스림)는 더 이상 외형적인 장소(성전)나 외형적 조건들(제사제도나 율법준수)을 통해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나타나고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들어간다: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1) 회개와 믿음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조건으로서 마가복음서의 핵심된 메시지이다. 이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죄용서와 구원이 선언되어진다. 성전을 통해서나 속죄제도 없이도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죄용서와 구원(치유)이 선언되어지고 이렇게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온 자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즉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시발점이다.

우리는 마가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이적적 사역이 어떻게 사람들 가운데 `회개와 믿음`의 반응으로 나타날 뿐 아니라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간의 논쟁의 시발점이 됨을 본다. 마가복음에서 이러한 `회개`와 `믿음`의 반응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잘 볼 수 없고 오히려 불결한 병자들(특히 문둥병자와 중풍병자 그리고 소경과 귀머거리나 어눌한 자)이나 여인들과 이방인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결국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타락한 성전이나 성전제도나 기관이 없이도 오직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음을 마가는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거룩함은 외관상의 장소나 제도나 율법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와 도덕적 삶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마가는 강조한다. 더 이상 거룩함과 더러움(불결)의 구별은 `밖`의 문제가 아니라 `안`의 문제 곧 내면의 문제이다(막 7장을 보라).

마가복음을 통해서 관찰된 무명의 사람들의 `회개`와 `믿음`의 용기 있는 모습들은 우리의 목회 사역이 외관적인 장소나 제도(기득권의 원천인 `강도의 굴혈`)에만 의존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잘못 수종들었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누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 지를 지속적으로 성찰하게 해 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님이 강조하셨던 `회개`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해 준다. 죄로부터 돌이킴이 있는 내면의 변화인 `회개`와 예수 중심의 복음의 본질을 이해한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우리 스스로 조심하고 또한 우리들이 섬기는 성도들을 그와 같이 바르게 교도하여야 한다. 점점 제도화되어 가는 한국교회 어쩌면 중세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에게 지금 예수께서 외치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은 보다 경각심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주 근본적인 것을 놓치고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일들에 너무나도 많은 시간들을 보낼 때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이점이 있어 예수님의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막 8:15. cf. 마 16:5-12)의 말씀은 오는 시대에 우리 모두가 경각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 선지자적 경고이다.

2) 제자도의 부름과 약속: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막 1:16-20의 단락은 `부르다`(kale,w)는 단어의 출현(1:20)으로 인해 `부름기사`(call story)라고 부른다. 그 외 다른 `부름기사`로는 막 2:13-17(레위를 부르심)과 3:13-19(열둘을 부르심), 그리고 막 6:7-13(열둘을 전도로 부르심)과 막 10:17-22(한 부자를 부르심)을 들 수 있다.

이 단락은 천국복음의 선언과 요구와 함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첫 번째 사건으로서 제자도의 규범적 모습을 보여준다. 앞의 `회개`와 `믿음`의 부름은 이 단락의 `따르라`는 부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회개`와 `믿음`과 `따름`의 세 가지 명령들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3 단계의 점진적 요구와 반응이다. 이 경우 `따름`은 회개와 믿음을 전제하고 표현한 것으로서 회개와 믿음은 제자도의 시작이다. 특히 여기에 언급된 부름 받은 네 명의 제자들(시몬; 안드레; 야고보;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의 핵심적 인물들이다.

특히 17절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의말씀은 제자도의 골격이 되는 말씀이다. 여기 "따라 오라"라는 의미로 사용된 "[Deu/te]]] ovpi,sw"(come after)의 헬라어 단어(cf. 1:20)는 18절에서 "avkolouqe,w"(follow)라는 단어와 호환적으로 사용(cf. 8:34)되고 있는데 이것은 마가복음에서 `제자가 됨`(being a disciple)을 의미한다. 이 단락에서 자주 반복하여 언급된 `버리다`[avfi,hmi](1:18, 20)와 `따르다`[(Deu/te]]) ovpi,sw/avkolouqe,w](1:17, 18, 20)의 단어는 마가복음의 제자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어휘들이다.

이 제자도의 부름에는 `버림`의 `신속하고 철저한 순종의 삶`이 요구되는데 이것은 `나 중심`에서 `그리스도[십자가] 중심`의 삶으로 전환된 삶을 말한다(cf. 갈 2:20). 특히 이들의 망설임 없이 신속하고("곧") 철저한("[모든 것을] 버려 두고") 따름의 모습(cf. 막10:28)은 제자도의 좋은 귀감이 된다: 시몬과 안드레[어부들](1:16-18):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음"; 야고보와 요한[어부들](1:19-20):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을 때 "아버지를 그 삯군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감". 여기 `버림`과 `따름`의 모습은 앞의 `회개`와 `믿음`의 모습과 병행하여 강조되는 것으로서 마가복음의 제자도의 요구와 반응의 핵심적 내용이다. 마가복음은 이러한 `버림`과 `따름`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여러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서 잘 제시하고 있다. 그 중에 우리가 앞으로 다룰 제자도의 부름에 대한 또 다른 예들인 부자 청년(10:17-31: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근심하여 감")과 소경 바디메오의 사건(10:46-52): "곧 보게되어 길에서 좇음")에서 제자도의 참된 모습을 잘 반추해 볼 수 있다. 마가복음에서의 제자도의 `따르라`는 부름은 `고난의 길`(막 8:34-39)을 동반한다.

/ 즉시 순종
"나를 따라오너라"(막 1:17)---> 자기를 부인하고[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짐(8:34)
\ 철저한 순종

`따름`에 대한 예수님의 약속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는 일이다. 구약에서 `사람 낚는 어부`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자주 묘사(겔 12:13; 합 1:15)되는데 이 어부가 되는 약속은 구약의 언급들(렘 16:16; 겔 29:4; 38:4; 암 4:2; 합 1:14-17)을 고려할 때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비추어 사람들을 모으는 종말론적인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주님의 이와 같은 약속의 성취는 마가복음에서는 구체적으로 실현되지는 않지만(막 14:28과 16:7에서 회복의 약속은 나타남), 요한복음(21장)에서 부활 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여주신 이적과 권면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이것은 성령이 강림한 후에 그들이 권능을 받고 주님의 증인(눅 24:46-49; 행 1:8)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제자도란 모든 신자에 대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으로 `사람 낚는 어부` 곧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한 `따르는 삶`은 유대인들이 랍비를 통해 `토라`(Torah)를 배우는 정도의 삶이 아니라 말 그대로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8:35과 10:29)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말한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이 사역은 복음전파와 함께 `회개`와 `믿음`의 선포(막 1:15)가 요청된다. 결국 이방 갈릴리의 사역은 사람 낚는 선교의 사역에 그 중심이 있음을 본다. 특히 수난의 밤이 깊어져 갈 때(막 14:17) 베드로의 넘어짐(부인과 도주)을 보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수난을 받고 부활하신 후 끝까지 따르지 못한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회복하시기 위해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다(막 14:28; 16:7)는 약속의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우리들까지)에게 한없는 위로가 된다.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지 연약한 우리가 아니다. 그가 앞서서 이 길을 가셨다.

`따르라`는 제자도의 부름에는 항상 `버림`(부인/잃음)이 있어야 한다. 길에서 한 부자는 제물이 많은 고로 이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못하고 슬퍼하며 돌아갔다(10:22). 그러나 바디메오는 부름도 없었는데도 자기의 겉옷을 버려 둔 채 예수를 길에서 좇았다(10:52). 이 버림은 세상(의 영광)에 대한 버림이고, 재물에 대한 버림이고, 욕심에 대한 버림이고(막 4:19), 심지어는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에 대한 버림이고(10:29), 또한 자기에 대한 버림 곧 제 목숨까지도 버리는 것(막 8:34-35)을 말한다.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주님을 이용하여 더 많은 것들을 쟁취하려고만 한다면 그것은 마가복음의 메시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오늘의 한국교회는 풍요 속에서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더 가지려고만 하고 있다. 이점이 오늘의 한국교회와 사역자의 비극이다.

3) 제자의 길: 중심 단락

마가복음의 제자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가복음의 중심 단락인 막 8:27-10:52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 단락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길`에 주어진 예수님의 메시아의 길에 대한 계시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길에 대한 교훈들로 구성되어있다.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들은 "길에"/"노중에서"라는 단어(막 8:27, 9:33, 34; 10:17; 10:32; 10:46, 52)와 수난에 대한 예언(막8:31; [9:12;] 9:31; 10:33-34; [10:45])과 요구(막 8:34-38), 그리고 "따른다"/"좇다"라는 단어(막 8:34; 9:38; 10:21; 10:28; 10:32; [10:38;] 10:52)이다. 이 가운데 수난의 언급(8:31; 9:31; 10:33-34과 8:34-38)과 함께 "[보게되어] 길에서 좇으니라"(막 10:52)가 이 단락의 요약된 표현이다.

여기서 `길`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대속적 수난의 길(메시아의 길)을 의미하며(10:32-34; 막 10:45),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길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락에서 보여주는 제자의 길은 수난(8:31; 9:7, 12; 9:31; 10:32-34; 10:45과 8:34-38[cf 13:9-13])과 함께 섬김(9:33-37; 10:35-45)과 연합(9:38-42)과 자기 성찰(9:43-48)의 모습으로 제시된다. 특히 이 단락에서 길에서 예수께 달려나와 놀라운 간청을 하였지만 많은 재물로 인해 주님의 제자도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한 한 사람(익명으로)의 모습(10:17-22)과 비록 거지이고 소경이지만 따르라는 부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겉옷을 벗어둔 채 주님을 그 (수난의) 길로 곧장 따른 바디메오의(유명으로) 모습(10:46-52)이 상호 대조적으로 제시되어짐으로써 참된 제자도가 무엇인지를 극적으로 교훈해 준다.

4) 종말에 처한 근신의 제자도

막 13장은 부활 후 제자들의 상황에 대해 말씀하신 종말("끝")에 대한 준비를 위한 강론으로 근신의 제자도를 보여준다. 막 13장은 "본다"/"주의하다"/"조심하다"(1, 2, 5, 9, 14, 21[2x], 23, 26, 29, 33절)라는 동사와 "깨어 있다"라는 동사(33, 34, 35, 37절)가 반복하여 나타나는데 이점은 종말에 처한 독자들에게 근신의 삶을 촉구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막 13:33-37은 종말론 강론의 결어로 중심 되는 메시지는 "깨어 있어라"는 경고로 주어졌다. 주인(인자)이 다시 돌아 올 때까지 지속되는 이 종말론적인 (시험의) `밤`("저물 때"/"밤중"/"닭 울 때"/"새벽"의 표현에 유의)은 `깨어 있으라`는 권면에 실패했던 겟세마네의 그 (시험의) 밤과 비교될 수 있다. 13장에서의 3번 "깨어 있으라"는 권면(33, 35, 37절)과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의 3번이나 언급된 깨어 있으라는 기도의 권면(34, 37, & 38절)과 비교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깨어 기도함]과 제자들[잠])의 대조적 모습을 본다. 무서운 시험(수난)의 시간이 임박하게 됨을 주님으로부터 미리 경고 받은(14:26-31) 베드로는 "깨어 있으라"는 3번의 반복된 권면(기회)에도 잠을 잤다. 결국 그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14:66-71). 철저한 자만 - 예수님의 경고(14:27-31)에도 불구하고 - 에 대한 철저한 실패였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주님은 겟세마네에서 자신의 시험(수난)의 시간을 기도로 준비한다. 그리고 기도 후 예수님은 이 시험을 당당하게 대면한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14:41-42). 이 일 후에 이어지는 법정에서의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대조적이다. 베드로는 아래 뜰의 비자의 법정에서 예수를 저주하며 부인하기까지 하지만 예수님은 산헤드린에서 "내가 그니라" 라고 담대히 선언하며 수난(죽음)의 길로 간다. 근신(기도)의 삶을 사는 제자는 결코 수난의 시험에도 승리하며 이 길을 걷는다. 과연 누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마가복음은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근신의 제자도` 이것은 종말(시험)을 만난 모든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13:37). 옥토와 같은 제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깨어있는 제자일 것이다. 그는 말씀으로 인해 환난이니 핍박이 와도,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찾아와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받아 결실 하는 사람이다(막 4:20). 과연 마가복음서에서 보여주는 참된 제자는 누구일까? 예수의 제자들인가? 아무리 복음서를 다 뒤져보아도 예수 같은 사람은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친히 자신의 삶으로서 `주의 길`(1:3)을 보여주신/가신 분이시다. 그 분이 우리의 제자의 길의 원천이시고 모델이시다. 우리가 그 분을 믿고 순종하며 따를 때 우리는 참된 그의 제자가 될 수 있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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