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스크랩] 마가복음에 나타난 비유의 핵심-심상법

baromi 2005. 8. 26. 08:03

마가복음의 비유를 어떻게 설교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일반적으로 비유해석의 역사와 더불어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Hughes 1991:157-170) 우리의 논의를 돕기 위해서 비유해석의 역사를 간략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1. 비유해석의 역사에 대한 간략한 고찰

비유에 대한 설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해석적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진행되어 왔다: 장르(genre)이해; 정황(situation)이해; 청중(audience)이해(Thiselton 1985:82ff). 특히 비유에 대한 장르이해는 주로 세 가지 형태의 비유해석들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비유를 `신앙의 규례`(regula fidei)에 따라 영적이고 도덕적인 의미들의 집합체로 보아 풍유적으로 해석할 것인가(오리겐과 어그스틴과 트렌취에 의한 `알레고리`로서 비유이해); 아니면 하나님 나라나 그의 도덕적 가르침과 관련된 역사적 예수 혹은 비유의 양식(form)과 관련된 초대교회의 정황(Sitz im Leben), 그리고 비유들을 채택하여 적절한 문맥 가운데 사용한 복음서 저자의 의도에 중점을 둔 단일 메시지로서의 역사적인 해석(역사적 문맥을 중심으로 한 율리허, 예레미아, 그리고 다드의 `직유`로서의 비유이해)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비유자체의 세계가 청중들의 삶에 던져주는 내재적이고 실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는 신문학적(新文學的)인 해석(Via와 Crossan에 의한 `은유`로서의 비유이해)을 따를 것인가에 논의의 초점이 모아져 왔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비유의 세부적 요소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풍유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지양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비유의 의미가 단지 하나의 주된 메시지(one main point)를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에서 입증되었다(Blomberg 1990). 이것은 한 마디로 비유해석을 한 가지로 획일화할 수 없음을 시사해 준다.

장르이해에 따른 해석적 시도들 외에 비유 해석은 또한 비유의 청중이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되어 논의되기도 하였다. 즉 비유 해석은 예수의 비유가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어졌는지 아니면 예수의 대적자들(종교지도자들)에게 주어졌는지를 분석하는 것과 관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비유의 양식(form)을 취하게 된 초대교회 청중의 상황에 대한 분석과 함께 각각의 복음서의 기자와 그 청중에 대한 이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의 청중의 상황과 관련된 실존적 관심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위의 이러한 비유해석들과 함께 최근 `내러티브`(narrative)로서 복음서의 장르에 대한 인식은 복음서의 비유들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지평을 열어왔다. 특히 비유해석에 있어서 내러티브에 대한 인식은 서사성(narrativity)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비유의 서사적 문맥과 정황(narrative context)을 강조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비유해석에 있어서 서사성에 대한 강조는 비유가 주어진 서사적 문맥(narrative context)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비유를 가진 복음서의 구성(plot)과 그 세계(story world) 그리고 복음서의 중심주제(main theme)와 연관된 이해를 요구할 뿐 아니라 또한 비유가 주어진 다양한 서사적 단계들에서 가지는 비유의 청중들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복음서를 내러티브로 이해할 때에 복음서가 가지는 내러티브적 의사소통의 다양한 서사적 단계들(narrative levels)과 그에 따른 비유의 청중들에 대한 이해는 아래의 다음과 같은 도표로서 제시될 수 있다(Lancer 1981:133-134; Tolbert 1989:92-106):

서사세계(narrative world)의 경계
내포된 저자 (implied author) 내포된 독자(implied reader)
작중인물 (예수와 대담자) 작중인물
원 저자 해설자 비유내 인물간 청자 원 독자
(narrator) 3 단계 서사독서 (narratee)
2 단계 서사독서
1 단계 서사독서



서사적 단계들을 고려한 내러티브의 의사소통(narrative communication)의 과정에 대한 이해는 복음서의 비유를 해석하는 해석자(설교자)로 하여금 복음서 내에 주어진 비유와 관련된 다양한 문맥과 정황에 대한 고려를 요구할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서사단계 내의 인물들 간의 의사소통의 관계들을 보다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해준다. 즉 도표에서 보는 대로 1 단계 서사독서는 해설자(narrator)와 청자(narratee) 사이의 관계, 즉 복음서의 저자와 청중 사이의 의사소통의 관계를 관찰하게 하며; 2 단계 서사독서는 작중인물들(가령 예수와 대담자) 사이의 의사소통의 관계를 관찰하게 하며; 그리고 3 단계의 서사독서는 비유내의 인물들 간의 관계를 관찰하게 해 준다.

가령 막 4:1-20(34)의 단락에는 그 자체의 독자적인 이야기의 세계(막 4:3-8)를 가진 비유(3 단계서사독서의 세계)가 있고 이 비유는 예수께서 바닷가에 가르치실 때 그에게 나아 온 무리(4;1-2), 더 나아가 그의 제자들(4:10)에게 주어졌음을 본다(2 단계 서사독서의 세계). 그러나 이 단락에 나오는 "너희"와 "외인들"에 대한 언급이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의 언급(4:9, 23)은 곧장 마가의 청중에게 전달되는 언급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엄밀한 의미에서 저자(해설자)가 청중(청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한 부분으로 주어진 것이다(1 단계 서사독서의 세계).

이처럼 서사적 단계들을 고려한 비유의 내러티브적 의사소통의 과정에 대한 이해는 해석자로 하여금 먼저 해설자(혹은 원 저자)와 청자(혹은 원 독자)사이의 정황에 대한 이해에 비추어서 이 비유가 주어진 문맥적 정황(즉 가르침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고려하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나서 해석자는 비유 자체를 분석(씨 뿌리는 자, 씨, 뿌려진 토양들)하여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비유의 의미, 더 나아가 저자가 의도하는 비유의 의미를 추구한다. 이처럼 마가복음내의 다양한 의사소통들의 관계에 나타난 서사층들(narrative levels)의 이해는 그 층마다 현존하는 비유의 정황들을 고려함으로써 비유의 의미를 보다 본문의 의미 혹은 저자의 의도에 가깝게 이해하게 해 준다.

결과적으로 위의 해석적 발전들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지금까지의 마가복음의 비유설교를 보다 다차원적으로 풍성하고 역동적으로 만들어 주는데 놀라운 공헌을 해 준다. 특별히 비유가 가지는 서사적 문맥에 대한 강조는 비유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마가복음의 비유설교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마가복음에 나타난 비유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규명하고 그것의 해석적 방법들과 절차들을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2. 마가복음의 비유들

마가복음의 비유는 다른 공관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그리 많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마가복음 내에서 가지는 역할과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마가복음에서 `비유`라는 단어는 13번 언급되어졌는데(막 3:23; 4:2, 10, 11, 13[2x], 30, 33, 34; 7:17; 12:1, 12, 13:28) 그것들은 주로 짧은 어록이나 이야기 형태 또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을 의미하거나 비유의 의미를 묘사하거나 알레고리를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Donahue 1988:28). 마가복음에 언급된 비유들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다: 마가복음 4:1-34에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그 해석, 그리고 그와 관련된 비유들(엄밀히 자라는 씨 비유; 겨자씨 비유); 막 7:14-23의 비유와 그 해석; 막 12:1-12의 포도 원의 악한 종들 비유; 막 13:28-29의 무화과나무의 비유와 13:34-37의 문지기 비유들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비유들 외에도 비유적 어록들(parabolic sayings)로는 막 2:19-20과 막 2:21-22, 그리고 막 3:23-27[과 4:21-25]을 들 수 있다. 이들 비유들에 대한 설교는 이미 위에서 비유해석의 역사를 통해 살펴본 것들을 토대로 하여 - 특히 서사성에 대한 강조를 둔 비유해석에 기초하여 - 다음과 같은 해석적 방법들과 절차들을 고려해 볼 수 있다.

3. 비유해석의 방법 혹은 절차들

먼저 설교해야 할 비유가 마가복음의 문맥에서 누구에게 주어졌으며, 또한 어떤 내러티브의 상황 또는 사건에서 주어진 것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이점은 앞에서 논의한 서사적 의사소통의 단계 중에서 제 2의 서사독서 단계를 이해하는 것으로서 주해(설교)할 비유가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어졌는지 아니면 예수의 대적자들에게 주어졌는지 아니면 그 외 다른 청중에게 주어졌는지를 규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규명과 함께 해석자는 비유가 또한 어떠한 사건 가운데 주어졌는지를 규명하여야 한다. 즉 비유가 이적사건 중에서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논쟁사건에서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그 외에 어떤 사건에서 주어진 것인지를 관찰하여야 한다.

두 번째로 이러한 관찰과 분석에 이어 해석자(설교자)는 비유에 나오는 내용(사람; 사물; 사건)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일종의 3 단계 서사독서) 특히 언급된 것이 사람일 경우에 주어진 상황에서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관찰하여 그것의 의미를 해석해야 하는데 가령 여기에 구약의 인용이 있다면(cf. 막 12:10-11) 구약적 문맥과 연관하여 그것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끝으로 이들 비유들은 마가복음의 전체 문맥에서 어떤 역할과 의미를 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에서 언급된 비유란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가복음의 구성(plot)과 의도(혹은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기 때문이다.

도나휘(Donahue)의 주장처럼 마가복음이 일종의 `비유적 내러티브`로 이해된다면, 이 경우 마가복음에 언급된 비유들은 마가복음에서 보여진 예수의 사역(하나님 나라의 사역)과 어떠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야 할 뿐 아니라 마가복음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제자도)과도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를 또한 고려해야 한다. 학자들에 다르면 마가복음의 중심 주제는 본문에서 두 가지로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사역(이적사역과 수난사역)을 통해 드러난 예수의 신분("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에 대한 깨달음과 그에 따른 제자로서의 삶("나를 따르라")을 말한다. 마가복음의 비유는 이들 중심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그리고 이외에도 이들 비유는 그 자체의 세계로서도 현재의 독자들의 상황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보다 내재적이고 실존적인 기능과 역할을 하는데 이점을 해석자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필자가 Via나 Crossan의 해석방법을 통해 간단하게 언급한 것처럼 비유는 이 비유를 듣는 오늘의 청중에게 어떤 [신앙적] 행동(반응)을 하도록 유발하게 한다는 것이다. 즉 비유를 들을 때에 청중은 비유의 세계 속에 들어가 자신을 비유에 나오는 사람들과 동일시하거나 또는 비유를 듣는 사람들과 동일시하는 경험을 갖는다. 이 경우 비유는 그 비유를 듣는 청중으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의 변혁적 행동을 하도록 촉구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해석적 문제들과 절차들을 고려한 우리의 마가복음의 비유설교는 오늘의 청중의 상황에 비추어서 매우 다양하게 설교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그것들을 요약한다면 마가복음에 나타난 비유들의 설교는 1).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습을 예수의 비유를 통해 제시해 준다. 특히 막 4;1-20에 나타난 비유들에 대한 이러한 설교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A. M. Hunter와 C. H. Dodd와 G. E. Ladd, 그리고 E Schweizer의 글들을 보라); 2). 또한 그것이 마가복음내의 전후 문맥을 고려한 사건의 정황이나 마가복음 전체의 줄거리(plot)와 의도를 따라 비유가 가지는 의미를 설교로 전달할 수 있다. 여기에는 예수의 신분에 대한 이해에 집중된 기독론과 그에 다른 제자도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이러한 설교는 Donahue나 Tolbert의 제안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3). 그리고 이러한 비유는 비유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설교로 제시될 수 있는데 이 경우에 비유는 현 청중의 실존적 상황에 큰 도전으로 제시될 수 있다(이러한 설교는 Via나 Crossan의 제안을 통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위의 다양한 해석적 제안들에 비추어서 필자는 막 4 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마가복음의 비유설교의 몇 가지 가능성들을 타진해 보려고 한다.

4.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몇 가지 설교의 가능성

1) 비유의 청중에 대한 이해
본문에 따르면 이 비유(4:3-9)는 예수께서 바닷가에서 가르치실 때에 자기에게 나아 온 무리에게 주어졌다(4:1-2). 그러나 그 이후의 해석과 그에 따른 또 다른 비유들(4:10-34)은 제자들을 포함하여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자들`에게 주어졌다(4:10, 21, 33). 그러나 소위 `저자의 독자를 향한 눈인사`로 이해하는 막 13:14의 언급("읽는 자는 깨달을진저")은 이 비유가 주어진 실제적 대상이 마가의 청중임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마가의 청중은 예루살렘 멸망 전(AD 66-68) 환난과 핍박 앞에 직면하여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방기독교인들로 이해할 때 비유의 의미는 이와 같은 청중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수반한다.

2) 비유의 내용 분석
비유의 스토리는 크게 `씨 뿌리는 자`와 `씨`와 `토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뿌려진 씨가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을 당하지만 결국 놀랍게 결실하게 됨을 말한다("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8절]). 비유에서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를 가리키고, 그가 뿌린 `씨`는 (예수의) 말씀(4:14) 곧 `복음`(cf. 막 8:35, 38; 13:10; 14:9)을 가리키며, 씨가 뿌려진 다양한 토양들(길가; 돌밭; 가시떨기; 옥토)은 예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본문에서는 `온 무리`로 언급됨)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또한 마가복음에 묘사된 다양한 인물들을 가리킨다. 물론 예수께서 비유를 통해 제시한 이 네 가지 토양들(사람들)은 마가복음의 저자에 따르면 자신의 복음을 듣는 청중을 가리키지만 또한 오늘날 복음에 반응하는 모든 사람들과 교회의 모습을 반영하기도 한다. 특이한 점은 비유의 스토리(2;1-20)가 `씨 뿌리는 자`에서 `씨`를 거쳐 `토양`으로 나아가는 점이다. 이 세 가지 요소를 마가복음을 통해 그 의미를 살펴보자.

3) 마가복음에서의 의미: 하나님 나라(씨)와 예수의 신분(씨 뿌리는 자)과 제자도(밭)`씨뿌리는 자의 비유`(막 4:1-20)는 마가복음을 이해하는 일종의 해석적 열쇠로 이해된다. 막 4:13에 따르면 이 비유는 예수의 교훈을 간파하는 `대 비유`로서 마가복음 전체 곧 예수의 사역과 그에 따른 제자도의 삶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도나휘(Donahue)의 주장처럼 "마가복음은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독자가 제자도의 삶에 비추어서 본문을 해석하고 평가하도록 결단하게 하는 일종의 비유적 스토리 혹은 내러티브적 비유"(1981:148)로 이해된다. 이 경우 예수(역사적 예수)의 사역(삶)은 일종의 `하나님의 비유`로 간주된다(Keck 1971:243-249; Donahue 1988:198).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사역과 신분은 감추어진 비밀(秘密)이면서 동시에 주어진 계시(啓示)다. 특히 예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과 그의 신분에 대한 비밀로 제시되는데 이점은 우리의 비유이해에 근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유해석은 이들 주제들과 관련하여 제시되어야 한다.

먼저 이 비유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해서는 슈바이처(E. Schweizer)에 의해서 잘 논의(1975, 1983)되었다. 슈바이처는 이 비유가 단순히 갈릴리 농부들에 의해 일어날 수 있는 그 이상의 특별한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보았다(cf. 막 4:11, 26, 30). 왜냐면 하나님의 나라는 매우 신비하기 때문에 비유를 통해서 이러한 모습이 잘 설명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100배의 결실에 대한 언급은 이 중 특이한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모습을 잘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비유를 통해 보여진 대로 뿌려진 씨는 새들에 의해 먹힘을 당하고, 태양에 의해 뿌리가 말라 타버리는 일을 당하였고, 가시에 의해 자람이 막힘을 당하였다. 이것은 예수의 사역을 통해 보여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기도 하였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씨 뿌리는 자`로 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다(cf. 막 1:14-15). 그러나 그의 말(가르침)과 행동(사역)은 여러 곳에서 거절(배척)을 당하였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현존하였지만 격렬한 배척과 수난을 당하였다. 씨는 완전히 없어진 것처럼 보였다. 결국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영원히 그의 나라가 끝장이 난 것처럼, 완전히 삼켜 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하셨고 그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놀라운 결실을 보았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모습이기도 하다. `씨 뿌리는 자`로서 오신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나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을 통해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비록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라 마침내 놀라운 결실을 하게 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철저히 실패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그것이 자라서 결실 하게 되었음을 본다("떨어져... 싹이 나...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다": 길가에서는 새들에게 삼키어져서 생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돌밭에서는 싹은 났고, 가시떨기에서는 결실하지는 못했지만 자랐고, 그리고 옥토에서는 결실하게 되었다. 특히 막 4:26-32의 두 왕국비유에서 첫 번째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엄밀하게 스스로 자라 마침내 결실 하게 되어 추수까지 나아가게 됨을 암시할 뿐 아니라 또한 처음에는 보잘것없이 미비하지만 나중에는 큰 나무가 됨을 보였다. 이처럼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예수가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계시적 기능을 한다. 특히 3절의 `보라`(ivdou.)의 언급은 이 점을 잘 반영한다(3절의 헬라어 원문에서는 "보라 씨 뿌리는 자가 씨 뿌리러 왔다"[cf. 막 1:14-15]라는 언급되어 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사역(이적사역과 수난사역)을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예수의 신분에 대한 의혹과 논란을 서술하면서 참된 예수의 정체성을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1:1). 예수는 과연 누구신가? - 단지 나사렛 사람인 마리아의 아들 목수인가(6:3)? 유령인가(6:49)? 귀신들린 사람인가(3: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세례요한, 엘리야, 혹은 선지자 중의 하나인가(6:14-16; 8:28)?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1:1)? 결국 마가복음의 중반부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8:27);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8:29)라는 예수의 질문을 통해 그의 신분에 대한 이해가 마가복음의 중심 이슈(막 1:1)임을 보여준다. 사실 이 질문은 단순히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이라기보다는 마가의 독자들의 마음(삶)속에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이어서 14-20절의 비유에 대한 해석은 `씨`에 대한 네 가지 토양의 반응에 그 해석을 집중하고 있는데 이러한 반응은 네 종류의 사람들의 모습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마가복음에 나오는 인물들이 예수의 사역에 대해 어떤 반응을 하고 있는 지를 평가하는 범례들로서 제시되고 있다.

특히 비유의 시작(3절)과 끝(9절)에서 마가는 `들음`(순종)을 언급함으로써 비유가 가지는 제자도의 의미를 강조한다. 비유 전에 언급한 3절의 "들어라"의 표현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매일 암송하는 신앙고백인 신 6:4이하의 쉐마의 시작에 있는 표현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이 언급은 지금 예수가 전하려는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미리 주지시켜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예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역할을 해 준다. 이처럼 `들음`에 대한 강조는 4장에서 `들어라(avkou,w)는 단어의 반복된 언급들(13번 나옴)을 통해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들어라"(3절);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9, 23절); "듣기는 들어도"(12절); "말씀을 들을 때에"(15, 16, 18, 20절);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24절); "저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34절).

결국 비유에서 강조되는 근본 문제는 `듣기는 듣지만 깨닫지(순종하지) 못하는데` 있다(12, 24절). 그러므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 강조가 `피상적인(일시적인) 들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듣고 [그것을] 받아` 결실 하는데 있다(20절). 즉 이 비유는 비록 말씀을 (일시적으로) 들었지만 사단이 즉시 와서 그 뿌린 말씀을 빼앗아 가는 상황(`길가`의 경우[15절])이나, 말씀으로 인해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상황(`돌밭`의 경우[16-17절]), 그리고 말씀을 (일시적으로) 들은 후에 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생기는 상황(`가시떨기`의 경우[18-19절])에도, 끝까지 말씀을 `듣고 받음`(믿고 순종함)으로써 결실 하는 `좋은 땅`(마지막 땅)이 되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피상적인(일시적인) 들음` 즉 `불신앙과 오해의 들음`이나 `뿌리 없는 들음`, 그리고 `결실 치 못하는 들음`은 마가복음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의 모습과 사건들을 통해 잘못된 들음으로 제시된다.

결론적으로 독자는 다음과 같은 들음의 두 가지 모습을 복음서를 통해 이해하게 된다: 1). 일시적이고 피상적으로 듣는 행위(12절): "듣기는 들어도"; "들을 때에" 혹은 "말씀을 듣되"(15, 16, 18, 20절); 2). 깨달음과 순종이 따름으로써 결실 하는 주의 깊고 지속적인 들음의 행위(20절): "말씀을듣고 받아 결실 하는". 20절에 묘사된 `들음`은 현재시제로 들음의 계속성을 의미한다.

비유의 주된 관심은 본문을 통해 `씨를 뿌리는 자`로부터 뿌려진 `씨`인 말씀(혹은 예수의 사역)과 그것을 듣는 자인 `밭`의 상황과 반응(결과)으로 움직여간다. 특히 말씀이 뿌려진 여러 상황을 가리키는 `밭`의 모습들은 보다 구체적으로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과 그 인물들의 반응들을 가리킨다. 후자의 이러한 견해는 4-6절에서 언급된 네 가지 밭들이 14-20절에서는 네 부류의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ou-toi, eivsin oi`...])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들 네 가지 토양의 모습은 곧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로 이해되는데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이 예수께 대해 어떤 반응(제자도의 반응)을 해야하는가를 보여주는 놀라운 범례들이 된다. 특별히 비유의 해석(14-20절)은 우리가 어떤 들음의 모습 가운데 있어야 할 지를 깨닫게 해 주는데 이것은 말씀(복음)으로 인해 환난과 핍박이 오거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몰려와도 비유의 옥토처럼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고 순종하여 복음의 놀라운 결실을 이루어야 함을 교훈한다. 마가복음에서 우리는 이러한 네 가지 토양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 인물들(제자들; 베드로; 가룟유다; 세례요한; 수로보니게 여인; 중풍병자의 친구들; 회당장 야이로; 백부장; 바디매오; 부자청년; 성전의 한 과부; 향유 부은 여인; 등)은 마가복음의 제자도를 그려주는 중요한 예들이 된다. Tolbert(1989, 1993)은 이 네 가지 밭들(부류의 사람들)의 씨(예수의 사역)에 대한 반응들이 마가복음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의 행동들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범례들이 됨을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네 종류의 밭의 모습들을 자세히 해석한 이들 구절들을 중심으로 우리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의 예수께 대한 반응들을 적절히 평가함으로써 참된 제자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그말씀 1998년 3월호에 실린 필자의 글을 보라.

4). 독자반응으로 나아가는 비유이해
결국 독자는 이 비유에 묘사된 여러 밭들의 모습들과 그것들의 반응들을 들음(읽음)으로써 갖는 결론은 한편으로는 뿌려진 씨가 여러 가지 상황들(길가; 돌밭; 가시떨기) 가운데 많은 시험과 수난을 당하게 되어 결실치 못하는 실패의 길을 걷지만, 그러나 그 씨는 좋은 땅에 떨어져 반드시 싹이 나고 자라서 결실하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3-8절). 독자는 이 비유를 통해 예수를 `씨 뿌리는 자`로, 그리고 예수가 전한 말씀과 그의 사역(이적사역과 수난사역)을 `씨`(복음)로서 이해함으로써 비유에 내포된 보다 깊은 의미를 복음서의 스토리와 관련하여 이해하게 되어 마침내 자신들이 좋은 땅처럼 마가복음의 메시지에 반응(순종)하여 아름다운 복음의 결실들을 풍성하게 맺는 `사람 낚는 어부`(1:17)가 되고자 한다. 이점은 8절에서는 씨가 결실 하는 것으로 언급되었던 것이 20절은 결실 하는 사람으로 표현되고 있다. 즉 결실 하는 것이 `씨`에서 `사람들`로 나아가고 있음을 통해 이 비유의 스토리는 그 목표가 독자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본다.

이 비유를 통해 독자는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사역이 다양한 반대와 오해와 배척 속에서 실패의 길(십자가의 길)을 가게 됨을 예상(豫想)하지만 결국 그의 사역은 - 마지막으로 언급된 좋은 땅의 모습처럼 -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됨을 확신(確信)하게 된다(Heil 1992:275-276). 이러한 확신은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독자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즉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삶은 많은 반대와 배척과 오해와 환난과 유혹의 상황을 만나 실패의 길을 걷기도 하지만, 그러나 끝까지 인내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풍성한 결실이 주어진다. 사도행전은 이점을 잘 입증해 준다. 사도들과 초대교회가 걸어갔던 복음전파의 길은 환난과 핍박과 수난의 연속이었지만 결실 또한 풍성하였다. 우리가 보는 대로 전해진 말씀(`씨`)은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의 상황들을 만나기도 하였지만 그와 함께 좋은 땅의 풍성한 결실이 있었다(cf. 행 6:7).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복음(씨)을 전할(뿌릴) 때 좋은 땅의 반응만 있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길가(사단의 반대), 돌밭(환난과 핍박의 직면), 그리고 가시떨기(세상의 염려와 재리(財利)의 유혹과 기타 욕심의 시험)의 상황들이 더 많이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복음전파는 좋은 땅을 통해서 결국 결실을 거둔다.

결론적으로 위의 이러한 해석들은 우리의 설교의 상황에서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주제들로 확장하여 다양하게 설교될 수 있다: 1). 하나님의 나라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2). 예수님의 사역(신분)과 씨 뿌리는 자의 비유; 3). 제자도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4). 복음전파와 씨 뿌리는 자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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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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