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스크랩] 마음에서 마음으로I(약5:19-20,1:21)

baromi 2005. 8. 30. 07:56

부산***교회(3일집회):첫째저녁                                                                               18/07/2005

 

                                          마음에서 마음으로I(약5:19-20,1:21)

 

  전혀 얼굴도 알지 못한 채로 집회청빙을 받았을 때 솔직히 당황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권하심에 순종하기로 하고 결심하게 된 것은, 박목사님과 마음이 통하는 신학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기회에 그 마음을 확인하고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회제목까지도 “마음에서 마음으로”라고 정했습니다. 첫째는 “나의 마음에서 나의 마음으로”, 둘째는, “나의 마음에서 너의 마음으로”, 셋째는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의 마음으로”라는 제목으로 3일저녁 동안 야고보서를 상고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권면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이번 5년만의 고국방문을 통해서 느낀 첫인상이 어안이 벙벙할 정도의 변화였습니다. 아직도 적응이 되질 않고 있습니다. 산소방문을 하면서도 시골이 도시로 변화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내 현지인들이 이런 변화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서 택시기사분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여쭸습니다. 좋은 것도 있고 좋지 않은 것도 있지요. 균형있게 개발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염려였습니다. 후유증이 있을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아야 할 것이 변화가 된다든지 변화되어야 할 것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문제입니다. 변화에는 민감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하되, 변화되지 않아야 할 것은 생명을 주면서라도 고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영국이나 유럽의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문화의 차이를 느끼곤 합니다. 가령, 차운전스타일에 대한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외길에서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한국에서나 영국에서나 모두 깜박이를 켭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영국에서는 먼저 가세요 하는 사인입니다. 한국에서는 어떻습니까? 내가 여기 있다. 오지 마라. 나아가서 오지 마. 오면 죽는다는 사인입니다. 제가 오해하고 있습니까? 문화의 차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이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자 하는 욧점은, 영국문화의 스타일이 좀 더 발전적이라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외국생활했다고 표내는 것이라고 보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진짜욧점은, 그들이 이렇게 문화적으로 세련되고, 교양이 있어 보여도, 그 깊은 문화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죄인된 개인주의와 인간의 욕망들이 처리되지 않은 채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또한 본성이 처리되고 변화되어야 죄인들입니다. 세계최고의 문명과 문화의 꽃을 피웠던 독일, 모짜르트와 베토벤의 나라에서, 1,2차대전을 통해서 어쩌면 인류최대의 만행이랄 수 있는 유대인대학살과 같은 아이디어를 고안해 내었습니다. 그런 문명과 문화의 변화라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 변화되어서 나온 것이라면 참 다행입니다. 하지만, 변화되지 않은 본성을 감춘 위장일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것이지요. 나는 변화하였다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지요. 초가지붕에서 아파트로 이사해 놓고는 나는 변화하였다고 만족하는 것이지요. 밀란 쿤데라라는 체코의 작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에서 말하길, “수세식 화장실이 인류문명에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무언가 깨끗하게 되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스스로를 그런 변화로 인하여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피상적인 변화에 대한 만족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뀐다 하여도 마땅히 바꿔야 할 것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에 이르게 되고, 그렇게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알아서 마땅히 변화되어지고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런 변화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죄인들이 거듭나서 그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 도이고 진리입니다. 세상이 변화하여도 이것은 변화되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세상이 변한다면서 이 진리까지 변화가 된다면, 인류는 진짜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위기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진단하는 염려의 소리들을 아실 것입니다. 저로서는 첫단추까지 끌러놓고 진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의 진단이 엉성할 뿐만 아니라, 그 대안 또한 엉성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첫단추까지 끌러놓고서 위기의 진단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문제를 점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의 말이 어렵지 않게 들리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야고보서 사도가 쓴 편지의 결론을 읽을 수 있습니다. 결론의 관점에서 그의 편지 전체를 조망하는 것이 필요해서, 저는 오늘 편지의 결론부터 설명하려고 하려고 합니다. 종말의 관점에서 현재의 나의 인생을 조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의 인생을 새롭게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야고보서를 이해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새로운 이해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결론은 5장7절부터 시작됩니다. 그 결론의 결론이 바로 19-20절입니다:“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Brethren, if any of you do err from the truth, and one convert him…이것을 보면, “미혹되어”입니다/한글번역에서는 간혹 수동태와 능동태의 구분이 철저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진리를 떠난 자를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미혹되어 있는 사람들”, “오류에 빠져서 진리에서 떠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돌아서게 하는 자의 축복을 야고보는 그의 편지의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류에 빠진 자들”이 도대체 누구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각도에서 야고보서신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또한 그가 제시하는 “진리”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 야고보서신이 한국교회에 필요한 지를 아시겠습니까? “지푸라기” 서신이 아닙니다. “황금목거리서신”이라고 저는 이 서신서의 별명을 붙이고 싶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참으로 오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고신교회에도 신학적인 오류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저는 먼저 “진리”에 대한 오류부터 지적할까 생각합니다. 현대사회와 현대교회에서 이상해진 것은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개념입니다. 이전에는 내가 살고 죽는 근거였었습니다. 최소한 공자조차도 “아침에 도를 발견하면 저녁엔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진리란 이렇게 죽고 사는 문제였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리가 교양이나 일종의 취미가 되었습니다. 알면 좋고 몰라도 좋은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올라도 정상에 오르면 그만입니다. 꿩잡기만 하면 매입니다.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됩니다. 각자 꼴리는 대로, 취향대로 싸우지만 말고 살자고 합니다. 사실, 이런 태도는 충분히 이해될 만합니다. 이번 런던테러의 진범이 파키스탄계열의 영국인들이었다고 합니다. 2차대전이후 폭격에 의해서 파괴된 도시들을 건축하기 위해서 영제국이 통치하던 나라의 국민들을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서 데려와 집을 짓게 하고 귀화시켜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들의 후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들어온 사람들이 몸만 들어온 것이 아니고 그들의 종교까지도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에는 현재 무슬림인구들이 엄청나게 늘어가고 있어서 무슬림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벌어진 일이 이번 런던테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종교와 신앙의 문제로 폭력과 테러가 발생하게 되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갖게 됩니다. 제발 싸우지 말자는 것이지요. 데카르트가 회의했던 것이 바로 이런 동기였었습니다. 유럽에서의 개신교와 카톨릭간의 “30년전쟁”으로 인해서 회의가 전사회적으로 팽배한 가운데에 어떻게 하면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한 것이 그의 “방법론적 회의”입니다. 이런 태도가 아이러니하게도 소위 계몽주의를 거쳐서 “절대주의”에 이르게 됩니다. 소위 진보, 보수의 대립도 이런 틀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시 서로를 정죄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이런 것 때문에 다시 역사의  추는 반대편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합니다. 진리가 어디 있느냐.  차깜박이를 이렇게 깜박이든 저렇게 깜박이든, 문화적으로 어떤 집단이 일치하게 사용해서 사고만 나지 않고 싸우지만 않고 살면 되는 것이 아니냐 생각하게 됩니다. 현대 미국문화가 세계문화를 선도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상대주의가 절정에 이른 것이 바로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옳지요? 예. 옳은 부분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사고와 철학의 옳은 면만을 보고 문제점을 보지 못한다면, “미혹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결코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였던 계몽주의철학과 그 아류인 “절대주의”에 근거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 반대인 “상대주의”, “허무주의”, “실용주의”에 근거한 것도 아닙니다. 복음의 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는 좌로도 우로도 기울지 아니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 “진리”의 형식적인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형식상의 문제에 있어서 두 번째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진리는 “명제적”일 뿐만 아니라 “인격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유식하다는 소문을 듣고는 잔뜩 쫄아서 저도 좀 유식한 척 폼을 잡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들을 보았습니다. “진리”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라는 식으로 기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진짜로 180도입니까?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인 것은 여러가지 형태의 삼각형의 특별한 한 경우를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크리드라는 헬라의 수학자가 가상한 가상평면상의 경우입니다. 이러한 가상평면은 실제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제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를 관념적으로 가상해서 존재한다고 가정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상의 존재를 전제하고 진술하는 것을 “가상의 철학”(if philosophy)라고 합니다. 이런 것이 “진리”가 되겠습니까? 실제세계에서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이상이거나 이하입니다.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까? 미혹되지 마십시오! “목사”라고 해서 참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차리고 들으십시오. 진리는 유크리드가상평면의 세계이든, 비유크리트실제평면상의 세계이든지, 그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는 세상이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이상이거나 이하일 수 있다”는 그 세상, 그런 세계를 존재케 한 “인격”과 관련됩니다. “진리는 인격적이다”라고 할 때,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다”라고 할 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왜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이다”라고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부처나 공자나 마호메트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까? 사실, 성경전체가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번 기회에 야고보서를 통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하고 아직 이 진리를 알지 못하여 미혹되어 있는 자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먼저, 1장21절로 돌아가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것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것이 야고보의 권면입니다. 지각이 있는 분은 이 표현을 보면서 질문하게 될 것입니다. 첫번째, 영혼을 구원할 도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질문은 관심의 표현입니다. 이런 질문하지 않는다면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직 절박한 관심을 갖지 않게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만큼 그런대로 괜챦은 아파트에서 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장도 가졌으니, 부족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생각하면,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습니다. 가진다 하더라도, 취미나 교양 정도로 생각합니다. 혹시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바꿨다고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생각하시지는 않습니까? “영혼”이 구원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제가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을 강조하기 전에, 저는 먼저, “영혼을 구원할 도(진리)”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야고보는 그 “도”(진리”를 바로 그의 서신 초두부터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종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 하나님을 야고보는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까? 1장17절을 보십시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라는 것입니까? 모든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변화의 근원이 되시고, 그런 축복들의 근원이 되십니다. “빛들의 아버지”란 말은, “빛들의 근원이요 원천”이란 뜻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빛이 있습니다. 여러분 장래에 빛이 넘칩니까? 검은 구름이 장래에 덥칠 것 같아서 두렵습니까? 그 검은 구름 사이로 “빛들”이 환하게 내려 비취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까? 그 “빛들”이 어디로부터 온다구요?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온다”고 합니다. 이 축복의 빛들을 누리고 계십니까? 이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영혼을 구원받습니다”. 영혼을 구원할 도란 바로 “하나님”에 관한 도입니다. 이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이것은 그의 축복이 영원하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그의 사랑과 인자와 긍휼과 빛들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아침안개처럼 무상하고 변화무쌍하나, 영원히 변치 않을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혼의 구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그 “길”입니다. 이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 거짓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다른 길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거짓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가 누구입니까? “주 그리스도”입니다. “구원자”요 “주님”이란 뜻입니다. 그것을 야고보는 2장1절에서는 “영광의 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누구입니까? 예수의 친동생입니다. 야고보가 예수형을 어떻게 생각해 왔었을까요? 인간적으로 보자면, 불만도 많았을 것입니다. 집안일 내팽개치고 세상을 구원하겠노라고 집안을 떠나버렸습니다. 집안일 다 책임졌을 야고보의 마음에 형님을 “미쳤다”고 생각했을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를 그저 역사적으로 2천년전에 태어났던 유대인의 한 청년이요, 좀 더 존경하는 마음으로 “인류의 4대성현의 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예수를 그저 그런 인생의 한 명쯤으로가 아니라, “영광의 주”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일반적인 지각으로는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어떤 영의 작용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의 역사로서만 가능하게 되는 고백인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그저 인간중의 똑똑하고 어쩜 종교적 천재들 중의 한 명쯤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인류문명의 적으로 알고 조롱하고 무시한다고 하더라도, 그를 “영광의 주”로 믿는 것, 이것이 바로 “영혼을 구원할 도”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변화되는 세상가운데서도 변화되지 않은 복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하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아십니까?

 

  저의 질문에 “예”(아멘)이라고 하신 분들은 오늘 본문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 도가 “마음에 심겨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렇게 마음에 진리가 “심겨진” 자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아직 받지 않은 것일까요? 야고보는 지금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2장1절에서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받았고 또 다른 한편으로 아직 받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로 받고 어떤 의미로 아직 받지 않은 것일까요? “심겨진”이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엔퓌톤”(implanted)라는 말은, 외부로부터 어떤 것이 들여와진 상태를 말합니다. 씨가 뿌려지고 심겨진 상태입니다. 씨가 뿌려지면 그것으로 끝나나요?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썩어야 합니다. 썩어서 뿌리가 내리고 그 영양분이 뿌리에 공급이 되고 기어이는 그 뿌리가 흙으로부터 영양분을 공급 받아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씨만 뿌려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목과 관계해서 말하자면,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으로는 아직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머리”의 지식이 “가슴”에까지 “뿌리”를 내리고, 가슴의 동력을 받아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심장의 피를 공급 받아, 그 동력으로 나의 손과 발로 삶 속에서 내가 알고 있는 머리의 지식이 살아있는 생명이 되어서 실천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우리 말로 “마음”이라고 하면 이것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머리의 마음”(mind)이 있고, 가슴의 마음(heart)이 있습니다. 머리의 마음으로는 아무리 많은 정보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박사학위 수십개를 딴다고 하더라도 그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신학박사라고 하더라도, 목사라고 하더라도, 교수라고 하더라도, 그 지식과 정보가 그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머리의 마음에 있는 “영혼을 구원할 도(진리)”가 어디에 이르러야 합니까? 가슴의 마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야고보의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을 야고보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 지 아십니까? 1장8절에서는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라 하고, 1장22-27절에서는 “도를 듣기는 듣는데 행하지 않는 자”이며, “거울을 보되 곧 그 모양이 어떠한 지를 잊어버리는 자”라고 합니다. 또한 2장에서는 “거짓된 믿음, 곧 귀신도 믿는 그런 믿음을 가진 자”여서,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합니다.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혼을 구원하는데까지 이르지 못하게 하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교만하게 하는 지식이요, 오히려 사망에 이르게 하는 지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에 그쳐버리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아들로 자랐습니다. 제법 똑똑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법 제가 많이 알고 있는 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습니다. 제가 안다고 하는 신학적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나의 영혼을 구원할 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온유함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저의 가슴을 “벼락”으로 내리치셨습니다. 제가 목사가 된지 6년이 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머리의 댐 속에 있던 지식의 물들이 한길 새치밖에 안되는 이 가슴의 마음으로 떨어지는 중에 빛에너지가 발생합니다.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빛이 내려올 때에 이렇게 “벼락”이 칩니다. 인생의 근본이 흔들립니다. 그것으로 저의 거짓들을, 자기기만들을 주님께서 드러내셨습니다. 가령, 제가 서울대학원의 공부를 포기하고는 신학교에 진학했는데, 저는 그렇게 포기한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포기하고 신학하게 되었노라는 경건의 모양을 자랑했던 것입니다. 저의 포기한 것을 자랑하고 그것을 의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제가 진정으로 포기한 것이었을까요? 그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자랑했던것들, 교회를 위한 헌신과 봉사가 나의 신학적 지식과 그 자랑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추하고 더러워서 자랑할 수 없는 것들인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저의 그런 기만과 거짓이 십자가의 예수님의 몸에 창과 가시가 되어서 내려꽂히는 것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아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것이 저의 탄식이었습니다. 나의 절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그 절망 중에라도, 나의 그런 기만과 거짓과 모든 죄들을 씻어주시고 정결하게 해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십자가에 박히셨음을 보

 

 

여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빛들”과 더불어 온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중의 하나가 “자유와 해방”이었습니다. 세상의 근심으로부터의 자유였습니다. 그 당시 IMF로 인해서 환율위기를 겪을 때에 고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살았던 저희들은 말 그대로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러던 중인데도 마음에 평안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삶이 그렇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눈치로부터 자유해졌습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을 만나면 피곤했습니다. 긴장이 되곤 했습니다. 이전엔 누구를 만나든지 경쟁해서 이기려고 했습니다. 이제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물의 주님께서 나를 아시고 사랑하시니 다른 사람들이 몰라주어도 괜챦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더 높을까요? 노태우대통령이 더 높을까요? 그렇다고 대통령을 무시하는 것 아닙니다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이 질문을 드립니다. 만일, 대통령이 사소한 문제에까지 일일이 신경을 쓰게 된다면, 쫄갑스럽게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대통령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자녀가 사소한 것들에 근심하고 걱정하면 졸갑스러워지지 않겠습니까? 오직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이 자유를, 이 행복을 아십니까?

 

  이 자유를 누리게 되면 경쟁심이 약화되기 때문에, 오히려 퇴보하게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진리를 앎으로 인해서 오게 되는 이 자유는 결코 나태하게 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소명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소명으로서의 연구는, 공부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즐거움이 됩니다. 학위를 따기 위해서가 아니고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는 것 자체가 즐겁습니다. 아는 것만 아니라 살아가는 삶 자체가 즐겁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셔서 이 즐거움도 영원합니다. 영원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오오 자유, 오오 자유, 나는 자유하리라, 비록 얽매였으나 나는 이제 돌아가리 자유주시는 내 주님께~ 보다 더 온전한 자유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즐거움이 여기 모인 모든 분들에게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이미 이 즐거움으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계실 줄을 믿습니다. 더욱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혹시, 이 즐거움을 소망하면서도 아직 누리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신다면 이번 집회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질문만 오히려 던진 부분들에 대해서 조금씩 답변이 제시될 것입니다. 오늘은, 머리의 마음에서 가슴의 마음에 이를 때에 이 자유가 주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자유로 나의 마음에서 너의 마음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에서 세상의 마음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 자유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잠시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출처 :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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