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질문자료

[스크랩] Re:롬11장22절에 대한 박창진과 홀리죠이의 견해

baromi 2005. 5. 12. 08:46

(박창진님)

 

첫 번째 본문은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꺽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고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믿으므로 선)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믿으므로 선)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믿으므로 선)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0-22).”

 

제가 님의 말대로 로마 교회를 팔아먹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제가 팔아먹은 로마 교회를 님이 되찾아 회복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님의 관점을 따르면 위의 본문이 아래와 같이 쓰여져야 하리라고 여겨지네요.(- -)

[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꺽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21] 하나님이 원 가지들고 아끼지 아니하셨은즉-아니하셨지만- 너(믿으므로 선)도-는- 아끼지 아니하시리라-아끼지 아니하시지 않으리라-

[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너는 결코 넘어지지 아니할 것이지만- 엄위가 있으니 너희(믿으므로 선)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그렇지 않은 경우는 없겠지만- 너(믿으므로 선)도 찍히는 바 되리라-결코 찍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라-”(롬 11:20-22).”

 

제가 대변인 노릇을 잘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으니 이제 님의 해석을 밝혀주시죠?

 

(홀리죠이)

 

이런 해석들에 대해서 지금까지 400여년이 흘러오는 중에 님이 알고 계시는 “개혁주의자들”과 “개혁신학을 추구하는 분들”, 그리고 “님의 은사가 되시는 분”은 어떻게 해석하면서 그들의 개혁주의신학을 개진하고 있으십니까? 그런 것에 대해서 탐문해 보셨습니까?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기에 그렇게 이 구절들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시는가요?

 

이 구절의 바로 앞에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의 뜻을 대적하느뇨”(롬9:18-19)을 읽지 못하셨습니까?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절대주권사상”이야말로 바로 님께서 제기한 그 구절들을 해석하는 배경이 되지요. 이런 맥락, 이런 배경을 절대 잊어버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런 배경에서 본다면, 위의 구절들은 그렇게 난해구절도 아닙니다.

 

보십시오. 바울사도는 지금 로마의 이방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유대인들과 대조하면서 유대인들의 장래에 대해서 기술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분의 언약의 신실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대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대조를 통해서 “믿음으로 접붙인 바 된 이방인들”이 교만하지 않도록 교훈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의 사도의 의도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으니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찌라도 네가 뿌리는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11:17-18)고 분명히 그의 의도를 사도는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20절)이라고 합니다. 사도가 지금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 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서 사도의 하는 말이 바로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 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21절),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22절하)라고 합니다.

 

, 여기서 질문이 필요합니다. 님께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원가지”들이 누구입니까? 유대인이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라면, 그 유대인들 모두다 다 구원에 이르렀고 모든 유대인들이 중생받았습니까? 유대인들이 모두 다 찍힘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이 바로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가지들 중에서도 찍힘을 받은 것이 있고, 찍힘을 받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바울이 2장28-29에서 말한 것과 상통합니다. 곧,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의 할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니라.”

 

지금 사도바울은 원가지들 중에서 찍힘을 받은 것이 있고, 찍힘을 받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만 유대인이었지, 참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찍힘을 받은 것입니다. 무슨 말인 지 아시겠습니까. 바울사는 이어서 꼭같이 “너희도 그러하리라”고 하는 것이지요. 너희가 누구입니까? 지금 이방인과 누구를 대조했다고 합니까? 돌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과 참감람나무인 유대인을 대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참감람나무에도 가짜가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사도의 논리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참감람나무에도 가짜가 있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너희들에게도 가짜가 없으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강조합니다. 22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곧, 그 인자에 거하지 않으면 찍히는 바 되리라는 것입니다. 즉, 참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찍힘을 받으리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참감람나무였던 유대인들도 참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찍힘을 받았습니다. 마음에 할례가 없는 채로 혈통상으로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로마의 이방인들은 참감람나무도 아닌, 돌감람나무였습니다. 그 찍혀짐이 얼마나 더 쉽겠습니까? 로마의 이 이방인들이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으면, 곧 중생을 받지 않고 참 믿음을 가지지 않고 있다면 그 찍힘이라는 것은 참감람나무가 찍힘을 받는 것보다 더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돌감람나무가 접붙혀지는 것보다도 참감람나무가 다시 접붙임을 받는 것은 더욱 더 쉬울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사도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런 역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울사도는 일반원예농법과는 다른 농법을 비유로 듭니다. 실제의 원예법상으로는, 참감람나무가지를 돌감람나무에 접붙입니다(원예법에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십시오). 하지만, 바울사도는 지금 돌감람나무가지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인다고 합니다. 자연의 법칙과는 역리가 되는 방식으로 이 접붙임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강조하려고 그러는 것일까요? 곧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입니다. 절대적인 주권에 근거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23절).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으로는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은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24절, “본성을 거스려”). 본성을 거스려서 새로운 본성을 가지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으로 가지게 되는 새 본성은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본성이기 때문에, 그 본성을 따라서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게 됩니다.

 

  기계적인 자동성 때문에가 아니라, 이 본성이란 곧 하나님께서 그 마음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열심을 가능케 하는 본성입니다. 님께서 저의 설명을 자꾸만 오해하는 것은, 이런 “본성”에 대한 깊은 묵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지적인 결심으로 우리의 본성이 바뀔 것처럼 생각하는 잘못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교회가 오해하고 있는 ‘중생론’입니다. 천박해진 중생론입니다. 이전의 청교도들의 중생론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자기본위적인 신학과 자기편의주의가 합세해서 타락해 버리고 오염되어 버린 중생론입니다.

 

  본성이 바꿔서 거듭나게 된 신자는 그 본성 안에서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중생했다고 해서 천사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면이 필요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거부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 생활해야 합니다. Mortification과 Vivification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성화해 가는 것이지요. 이 육체가 살아있는 한은 죄의 유혹에서 제외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연단과 강건함을 위하여 우리를 육체가운데서 두시고 성도를 훈련시켜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불평할 수 없습니다. C.S.Lewis의 “엄청난 이혼”이란 소설에서 보여주었듯이 빨간 도마뱀을 바로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연단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지요. 그 도마뱀도 변화 되어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을 루이스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결코 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부정하지도 않고, 인간의 책임을 면제시켜 버리지도 않고, 결코 하나님을 식언하는 분, 거짓말하는 분으로도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곧, 개혁주의신학이 지금껏 이렇게 이해해 왔던 것입니다. 님처럼, “중생한 자도 멸망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님이 자주 인용하면서 사용하는 “….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우리라”라는 구절도 마찬가지로 반박할 있습니다. 이제 대해서 칼빈 자신이 이미 효과적으로 반박했습니다. 곧, 에스겔13:9에 나오는 구절, 곧 “그들을 쳐서 내 백성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호적에도 기록되지 못하게 하며”라는 구절을 언급하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수효에 들어있는 사람들을 생명책에 기록하기 시작하셨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면서, 칼빈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거에 의해서(눅10:20)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이름이 처음부터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빌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13:9와 같은 구절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끔 우리의 이해수준에 맞도록 말씀을 조절하신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시편69:28절과 함께 계시록3:5도 함께 칼빈이 인용하면서 이 구절들은 “선택된 자들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이던 자들이 버림을 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주장합니다(기독교강요3권24장9절).

 

이런 칼빈의 설명을 바로 로마서11에 적용을 시킨다면, 제하여짐을 당하게 되는 사람은 바로, 유대인들 중에서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표면적 유대인들이 원가지들이었다 하더라도 제함을 당하는 것처럼, 이방인들 중에서도,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한 채로 “목사생활”하는 자, 입술로 “주여주여”하는 자, “성령받았다”고 하지만, 거짓된 체험을 한 자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요나단 에드워드의 “The Religious Affection”이라는 책을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성경구절의 설명과 더불어서 님이 알지 못하던 세계를 열어줄 것입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