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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회개케 할 수 없는 자들(히6:6)과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 에서(히12:17)

baromi 2005. 9. 3. 08:05

 

       회개케할 수 없는 자들(히6:6)과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한 에서(히12:17)

 

히브리서6:1-8의 해석이 분분합니다. 서로의 안경에 따라서 달리 보이나 봅니다. 이 구절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다시 회개케할 수 없다”(아둔나톤…팔린 아나카이니제인 에이스 메타노이안)는 말입니다. 히브리서6장6절의 다시 회개할 수 없다는 말은 6장4절의 “아둔나톤”(불가능하다)이란 말과 연결됩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바로 히브리서12장17절에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메타노이아스 토폰 욱스 휴렌)는 말입니다. 히브리서에서 12장17절의 이 말만큼 히6:6의 “다시 회개케할 수 없다”는 말과 유사한 것이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히브리서6장4-5절의 표현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보다는(물론 충분히 의의가 있습니다. 저는 안드레28님의 해석을 따릅니다), 히브리서12장17절의 표현을 음미하는 것도 좋은 길잡이를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12장17절의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은 히브리서기자가 수신인들에게 권면하는 중에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쓴뿌리가 나는가”, “음행하는 자가 있는가”를 “두려워하라”면서 주는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히브리서의 수신인들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 수신인들에게 주는 권면의 내용을 볼 때, “너희들 중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곧, 거듭난 자들 속에 섞여 있는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러한 것을 두려워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모습이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거듭난 자들이 교회 가운데 있지만, 한국교회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 자들”도 또한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인 듯 싶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교회”라고 불리워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용어의 사용에 따라서, 한국교회에는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두려워해야 할 내용 중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부분을 히브리서6장과 관련해서 히브리서6장4-5절에서 표현한 사람들이 과연 거듭난 사람들이냐 아니냐는 논쟁에 적용시켜 볼 수 있습니다. 에서가 과연 거듭난 사람이었는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이미 바울사도가 잘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9장6-13에서입니다. 바울사도는 먼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6절) 합니다.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합니다(6절). 그것을 연이어 강조하기를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고 합니다(7절).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선택 속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해서 다 개인적인 특별한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이것을 고려하면 집단적 선택과 개인적 선택간에 구별을 성경이 하지 않고 있다는 박창진님의 주장은 참으로 억설임에 분명합니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습니다(8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그런데, 약속의 씨는 “약속의 자녀”라고 하면서 그 약속의 씨를 “이삭”으로 예를 듭니다. 문제는, 이삭의 자녀들인 야곱과 에서입니다. 이들 모두가 다 “약속의 자녀들”일까요? 바울은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13절에서 결론짓기를,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내리는 결론입니다. 이런 바울의 설명의 의도는 바로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삶의 종국은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예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주장은 결코 운명론이 아닙니다. 그런 운명의 작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이 당사자들에게 충분히 넉넉하게 풍성하게 주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예정된 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결정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예정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에서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에 대입시켜 봅시다. 에서가 장자로 태어났습니다. “장자”가 될 기회를 얻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 장자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심지어는 야곱에게 속아서 그 장자의 특권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기에게 주어질 축복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도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울사도는, “그런즉 우리는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서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9장14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어느 누가 감히 힐문하느냐고 뒤이어서 설명하는 것이 롬9장15-23절입니다. “무슨 말하리요”라고 바울은 결론을 짓습니다.

 

이러한 히브리서12장17절의 에서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이해를 이 표현들과 가장 유사한 히브리서6장6절의 “다시는 회개할 수가 없다”는 표현의 이해에 적용시켜 봅시다. 에서가 무시한 것이 무엇일까요? 장자권입니다. 몇 번이나 무시했을까요? 야곱에게 붉은 죽을 사 먹을  때만 그러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평소의 태도를 반영해주는 일화일 뿐입니다. 평소에 그의 삶을 통해서 그는 장자권을 무시해 왔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자권은 육적인 장자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태어났다는 것을 번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육체의 장자권은 아브라함의 육체의 혈통을 잇는 것과도 같습니다. 지금 바울사도가 말하는 것은, 영적인 장자권입니다. 곧 약속의 자녀로서  씨가 되는 것입니다. 약속의 혈통 안에 들어오는 것 말입니다.

 

이렇게 약속의 혈통으로 들어오는 것은 믿음 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혈통을 가졌다고 해서 이런 믿음을 자동적으로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따라서 태어나야 합니다. 이 약속을 따라서 태어난 자들이 바로 이삭이요, 야곱이요, 또한 신약에 들어오면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에서보다 육체의 혈통으로 보자면 보잘 것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혈통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본성을 부여받습니다. 영적 혈통의 본성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혈통은 이미 태어나기도 전부터 “예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선택된 사람이라고 해서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되어도 믿음과 회개의 과정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이 선택받은 자들이 거쳐야 할 것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믿음과 회개가 오직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그림같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에서의 삶입니다. 에서는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태어나기도 전에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을 보고 미워한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미워하였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불의하다고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님께서는 성경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변증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는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야곱이 그러하였습니다. 험한 인생을 사는 중에 그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 회개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회개입니다.

 

이제 히브리서6장으로 돌아와도 될까요? 에서가 무시하고 짓밟는 장자권, 그의 생애를 통해서 계속 짓밟아왔던 장자권을 히브리서6장에서는 하나님을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밖는 것에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6장4-5절의 사람들이 에서와 같지 않다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다시 회개케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던 에서와 너무나도 닮았습니다. 그러한 에서를 닮지 말라고 두려워하라고 한 권면이 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러한 에서를 인용하면서 두려워하라고 해서, 에서를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한 모습으로 본다는 것이 과연 말이나 되는 것일까요? 약속의 자녀가 아닌데, 어떻게 그를 약속의 자녀로 생각할 수 있나요?

 

어떻게 거듭나지 않은 자들을 거듭난 자들로 보시나요?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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