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유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야한다는 성령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한 출발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에베소(아시아지역)에서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19:21)고 말하는 것이 처음이다. 이후 바울은 마게도냐 지방(유럽지역)에서 석달을 보낸다. 그리고 아시아 지방을 통과하여 드로아에서 이틀을 머문다. 여기까지는 육로로 다닌다. 그러나 이후 앗소에서부터는 배를 타고 움직인다. 앗소-미둘레네-기오-사모-밀레도를 지나간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를 방문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까지 불러오는데, 그 이유는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였다(20:16,17 ).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을 한후 고스-로도-바다라를 거쳐 두로에 도착한다. 두로에 도착한 후 바울은 “예루사람으로 지금 올라가지 말라”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여러 날을 머문다. 두로-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샤랴에 도착하여 또다시 “예루살렘에 지금 올라가지 말라”는 제자들의 권고를 듣고 여러 날 머문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누가의 진술을 살펴보면, 이런 바울의 여정에는 일정과 관련하여 특징이 있다. 그것은 “제자들이 지금 올라가지 말라”고 한 두로와 가이샤랴에서만 여러 날을 머물고 나머지 항구에서는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했다. 바울은 앞서 자신이 말한 대로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일들을 처리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의 바람은 “예루살렘으로 지금 올라가지 말라”는 제자들의 만류로 지체되어 “오순절쯤에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때 마침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온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발견하고 소동을 일으킨다.
나는 이러한 관찰 속에서 “제자들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한 것을 통해서 아마도 하나님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시기를 적절히 조정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오순절에 맞추어 도착하도록 했던 것 같다. 만약 바울의 원래 계획대로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면, 바울은 함께 간 헬라인들 때문에라도 오순절이 되기 전에 일들을 처리하고 예루살렘을 떠났을 것이다. 아마도 바울의 원래 의도는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을 최대한 자극하지 않고 떠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 증거는 1차 예루살렘방문이다(행 15장). 사도 바울은 1차 예루살렘방문에서도 직접적인 복음전파는 전혀 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단지 사도들과 회의만 하고 떠난다. 왜 그랬을까? 박창진님은 로마서9-11장을 근거로 바울이 예루살렘행을 고집한 이유는 자기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박창진님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를 올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서 자기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했다(롬 9:1-3절). 그러나 그가 선택한 방법은 바울 자신이 직접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마지막 날에 남은 자들이 돌아올 것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피력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이스라엘백성)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11:11).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11:13).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11:25-26). 그렇기에 바울은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더욱 더 이방인전도에 힘을 다한다. 이상의 이러한 고찰은 박창진님이 주장한 것과는 반대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21장의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오순절에 도착하여 마침 그때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과 맞닥뜨렸음을 말한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나는 성령이 처음부터 말씀하셨던, 예루살렘에서 체포됨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 섭리를 본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것은 성령의 계획과 뜻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제자들의 염려와 걱정까지도 사용하신다. 나는 사도행전 23장 11절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발견한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루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모양과 같이 로마에서도 그렇게 증거하여야 할 것이다”는 것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파하게 된 상황을 포함한 의미이다. 즉 바울이 고소됨으로써 재판장에서 복음을 전파한 것과 같이 그렇게 로마에서도 고소됨으로써 재판장에서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27장 23절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라고 말한다. 이 구절 역시 바울이 고소당한자로 로마에 가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4. 자유인의 신분과 제약의 신분에 대하여
이상의 이러한 지적과 함께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박창진님은 자유인의 신분과 제약을 당하는 상태에 대한 언급과 관련하여 “만약 그런 식으로 말하게 되면 바울 사도가 모든 지역에서 감옥에 있는 것이 복음 전파에 더 유리했다고 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에서 나타난 바울 사도의 기도는 그의 예루살렘 행에 대한 변경이 있기 전에 관한 것이기도 당연한 것입니다. 변경 시점이 사도행전 21장이니까요”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에서의 1차 연금생활 중에 기록했다고 하는 소위 옥중서신인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에서 바울이 자신의 연금생활을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한군데만 언급하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 6장 19-20). 여기에서 보게 되는 것과 같이, 박창진님은 사도 바울의 고백과 진술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느낌과 생각만으로 글을 적는다.
이와 관련하여 박창진님은 내가 바울이 로마도시 안에서는 아마도 어느 정도 자유롭게 다녔을 것이다 라고 지적한 것의 근거가 무엇인지 밝혀달라고 했는데, 불행하게도 지금 현재로는 그 근거를 정확하게 제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느 책에서인가 그렇게 읽었던 기억이 있지만, 어느 책인지는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억하기에는 로마의 시민법에 대한 책이었던 것 같다. 요즈음의 보호관찰정도로 이해하면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5. 디모데전서 1장 15절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박창진님은 디모데전서 1장 15절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라는 바울의 고백과 관련하여 두 가지를 지적했다. 박창진님의 글을 옮겨보자.
[먼저 질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글을 쓰는 그 시점에서 괴인 중의 괴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안드레님과 같이 과거에 대한 기술일 뿐이라고 하면 현재의 자신에 대한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보아야 하겠는데요. 대부분의 해석은 그 고백이 현재의 바울 사도의 자기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다음으로 겸손의 표본이며, 의인이면서 죄인이고 죄인이면서 의인인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드레님의 주장은 이 설명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왜 과거형을 쓰지 않았을까요? 누가 보아도 과거형을 쓸 자리이고, 과거형을 쓰면 너무나도 매끄러운데 말입니다. 과거형을 쓰는 것이 어려웠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고요. ]
Χρστος Ιησους ηεις τον κοσμον αμαρτωλους σωσαι, ων πρωτος ειμι εγω
과거능동태 인칭대명서 현재능동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는데,
그들(죄인들)중에 내가 우두머리였습니다.
먼저 박창진님의 두 번째 지적부터 살펴보자. “과거형을 쓰지 않고 현재형을 쓴 것”에 대해서 박창진님은 “누가 보아도 과거형을 쓸 자리이고, 과거형을 쓰면 너무나 매끄러운데 말입니다. 과거형을 쓰는 것이 어려웠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고요”라고 지적하는데, 이것은 헬라어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말이다. 이미 내가 지난 글에서 지적하였듯, 헬라어에서 종속절에 사용된 동사의 현재형은 주절에 사용된 동사의 시제에 따라간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헬라어의 문법이다. 박창진님의 지적처럼, 주절에도 과거이고, 종속절에도 과거를 사용하는 것은 헬라어 구문론상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문장이다.
이제 박창진님의 첫 번째 지적을 생각해보자. 우선 특이하게도 (사실의 여부를 떠나서) 박창진님은 나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박창진님 자신이 반대하는 소위 “대부분의 해석”을 끌어들인다. 그러면서 박창진님은 “대부분의 해석은 그 고백이 현재의 바울 사도의 자기인식이라는 것입니다”고 끌고 간다. 여기에서 나는 박창진님이 “대부분의 해석”이라고 말하는 그 해석은 누구의 것들인지 근거를 밝혀주기를 원한다.
다음으로 박창진님은 “안드레님과 같이 과거에 대한 기술일 뿐이라고 하면 현재의 자신에 대한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보아야 하겠다”고 주장을 한다. 과연 그런가? 나는 모태신앙이다. 그리고 중학교 때 소위 성령체험을 했다. 그리고 고3때 내가 죄인이라는 강렬한 인식과 함께 나를 덮친 회개의 경험 끝에 구원받음과 내가 하나님의 백성임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졌다. 이 고백이 현재의 나 자신에 대한 것과 상관이 없는가? 나는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내가 죄인이었고 현재에도 이런저런 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동시에 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백성으로 불러주셨고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는 일에 사용하시려고 하신다고 고백한다. 박창진님의 지적처럼 “과거에 대한 기술은 현재의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가?”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과거에 대한 기술은 현재의 나 자신과 직접적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나아가 나의 미래와도 밀접한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나의 현재적 상황을 놓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닌가?
글쓴이 : andere28 |
조회 : 8 스크랩 : 0 날짜 : 2005.05.09 0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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