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질문자료

[스크랩] 성도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다고요?

baromi 2005. 3. 22. 18:19
 소래의 ㅎ교회의 ㅎ목사님은 계속되는 그의 강론에서 성도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음을 언급하면서,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후의 삶의 여정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의 여부에 따라 이미 받은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ㅎ목사님은 이런 그의 논지를 주장하면서 증거본문으로 출32:32-33, 시69:28, 계3:5, 빌2:12 등을 인용합니다. 


ㅎ목사님이 인용한 성경구절들은 그 자체로만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생명책에서의 도말'과 '구원상실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듯한 일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본문해석은 언제나 문맥 내지는 동일한 주제를 총체적인 계시의 관점으로 접근해 해석해야 한다는 사실을 요구받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문법적, 역사적, 신학적 해석방법이라고도 일컫습니다.


우리는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의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여부를 확인하기 전에, 먼저 생명책에 성도의 이름이 녹명됐다는 사실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확인해 봐야 합니다. 빌4:3에는 성도들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기록돼 있다고 언급합니다. 눅10:20에서 예수님은 귀신의 항복보다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늘의 생명책에 제자들의 이름이 기록돼 있음을 명백히 가리킵니다. 이 외에도 말3:16, 사4:3, 히12:2 등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하늘에 녹명돼 있음을 동일한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계20:15에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에서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불못, 곧 둘째 사망에 처해질 것에 대해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여러 구절에서 성도 곧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돼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상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성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됐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확실성(롬3:24, 4:25, 8:1-2, 엡2:1)과 안정성(롬8:38-39, 요10:28-29, 히10:17) 및 영원성(히9:12, 10:12, 14, 18절)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하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됐다는 사실은 구원의 보증에 대한 하나님의 인침을 표상적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토록 성도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하고 안전하며 영속적으로 유효하다는 확증의 표식 말입니다.


그러면 언제 성도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일까요. 에베소서 기자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사랑으로 우리를 택해 주셨다고 기술합니다(엡1:4-5). 이 외에도 딤후1:9에서는 ‘영원 전’부터로, 딛1:2에서는 ‘영원한 때 전’부터로 설명합니다. 이는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의 이름이 창세 전에 하늘 생명책에 녹명됐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선택의 원리에 의해 수많은 인류 중 일부 특정 사람들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은혜로 구원해 주실 것을 영원 전부터 이미 예정하셨음을 가리킵니다. 로마서 기자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뛰어 넘는 이런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의 경륜을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들어 설명합니다. 롬9:11-13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지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 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선택교리의 요건은 피택자의 행위여부에 있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의 뜻, 곧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엡2:8-9). 에서와 야곱의 경우 먼저 된 자가 나중 된 자를 섬길 수밖에 없음이 이런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선택원리에 근거합니다. 그리고 이런 원리는 모든 인류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성도의 이름이 행위와 무관하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늘 ‘생명책’에 기록됐다는 점과 그 시점이 ‘창세 전’이란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요소들이 총체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원의 절대 확실성과 안전성 및 영원성에 대한 하나님의 인침이며 동시에 어떤 이유로라도 결코 상실되거나 취소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속적인 보증을 강력히 뒷받침합니다.


이상의 결론을 근거로 처음에 제기된 본 주제의 질문으로 되돌아갑니다. 다시 말해 성도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것처럼 기록된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출32:32-33절의 내용입니다. 이는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40일간을 머무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받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지연을 핑계로 아론을 충동해 황금송아지 상을 만들어 예배하는 우상숭배사건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시고자 노를 발하십니다. 이때 모세가 이를 적극 만류하면서 간청하는 가운데 이렇게 탄원합니다.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32절). 여기서 ‘기록하신 책’에서 모세의 이름을 지워달라는 기도의 본의(本意)는 문자 그대로 하늘 생명책에서 모세의 이름을 도말해 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불가능한 사실을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모세의 자기희생적인 간절한 애정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마치 의사 앞에서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자녀를 바라보며 ‘내 생명을 담보삼아 아이를 살려달라’는 처절한 어머니의 절규처럼 말입니다. 여기서도 아이 어머니의 생명은 어떤 이유로라도 결코 담보될 수 없습니다. 단지 아이를 살리려는 간절한 모정의 발로가 이런 식의 극단적인 언어적 표현을 통해 표출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33절에서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고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생명책에서 성도의 이름이 도말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경고의 말씀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이미 살펴봤듯이 성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다는 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사건으로서 행위와는 무관하기에(롬3:20-22, 28절) 어떤 이유로도 결코 중도에서 성도의 구원은 상실되거나 무효화될 수 없습니다. 단 구원받은 성도라도 죄성은 여전히 본성 속에서 활동하고 있음으로 인해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성도의 범죄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결코 무효화시킬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과 영원성 및 충족성으로 인해서 말입니다(롬8:1-2, 히9:12, 10:12-18).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회복된 하나님과의 교제를 일시적으로 단절시킬 수 있습니다(사59:2, 시66:18). 그러나 자백하면 이내 용서해 주시며 단절된 교제는 곧 회복될 것입니다(요일1:7-9).

 

시69:28에서의 다윗의 간청 또한 출32:33과 동일한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의 대적자들을 생명책에서 도말해 의인과 함께 기록되지 못하게 해달라고 탄원합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기록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택자들 곧 구원받은 성도들에 한해서입니다(빌4:3, 눅10:20). 불신자들이나 악한 자들은 처음부터 생명책에 기록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 시편은 악인이 의인과 함께 생명책에 기록될 수 없음을 강조함으로 영원한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악인의 종말론적 상태를 역설적으로 시사한다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계3:5의 말씀입니다. 요지는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게 될 텐데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처럼 본의가 왜곡되게 해석되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다. 일부 목회자들이  본문을 해석하면서 특별히 ‘이기는 자’와 생명책에 반드시 흐리지 아니함‘을 연관시키는 가운데 반대로 ’이기지 못하는 자‘는 생명책에서 흐려지게 되는 바’ 곧 생명책에서 지워지게 됨으로 이미 받은 구원일지라도 행위여부에 따라 상실되거나 취소될 수 있음을 강력히 피력하곤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의미로 기술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영적으로 아사(餓死) 직전에 놓인, 그래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로만 가득 찬 사데교회의 위선과 가식적 신앙을 질책하시는 가운데 주신 한 가닥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지금 사데교회는 주님의 시각으로 볼 때 참 성도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상태로서 사실상 생명 없는 죽은 교회를 방불케 합니다. 그럼에도 사데교회에 아직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는 것은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흰 옷 입은 합당한 자 몇 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게 될 것’을 강조해 촉구하십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이기는 자’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일부 목회자들이 얘기하듯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기 위한 적극적인 순종의 삶을 언급하는 것일까요. 다시 말해 이미 받은 구원을 잃지 않기 위해 두렵고 떨리는 심정을 갖고 지속적으로 율법의 요구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문맥상 ‘이기는 자’란 앞부분에서 이미 언급하고 있는 ‘흰옷을 입은 합당한 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흰옷을 입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흰 옷의 용도는 ‘벌거벗은 수치 곧 죄’를 가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문제점과 해결책을 일러주시는 대목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계3:18입니다.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그렇다면 흰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감추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계7:14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계7:9에서 ‘각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이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치는 모습’이 소개됩니다. 이들은 다름 아닌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노’라고 24장로 중 한 장로가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이기는 자’란 곧 흰 옷을 입은 자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죄사함을 받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행함이 아닙니다. 따라서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이기지 못하는 자는 불순종하는 자로서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지거나 지워질 수 있는 것으로 본문을 해석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본의를 왜곡한 철저히 자의적인 해석과 편의적인 적용인 이상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회에 만연된 복음을 빙자한 율법주의로서 결과적으로 ‘다른 복음’에 불과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빌2:12입니다. 본문에서 저자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강권합니다. 이는 행위여부에 따라 구원상실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문맥상 앞 절의 연속선상에서 본문을 바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구속의 도리는 절정을 이뤘으며 그 결과로 예수님은 모든 천상의 왕적 권세를 회복하셨습니다(빌2:6-11, 마28:18).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성도들은 예수님을 명실상부한 왕으로 모신 가운데 그의 남은 생애를 말씀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하나님의 친백성의 신분으로  적극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곧 구원을 누리는 삶으로서 성화적 구원의 삶의 실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저자의 강력한 권고는 순종여부에 따른 구원의 상실이나 무효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구원은 본질에서 ‘한 번 구원으로 영원한 구원을 보증’하기에 행함의 여부로 중도에서 결코 취소되거나 잃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천국백성의 삶을 적극 추구할 것에 대한 강력한 권고의 말씀입니다. 만일 본문의 의미가 구원의 상실에 대한 가능성을 시사하는 말씀이라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과 충족성 및 영원성을 부인하는 셈이 되기에 말입니다. 히9:12절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10:14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의 구원은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 속에 예정된 선택적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구원은 어떤 물리적인 이유로 도중에서 상실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영원토록 안전성이 보증됩니다. 성도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의미는 이런 사실에 대한 확증을 표상적으로 설명해 주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구원받은 이후 성도의 이름이 행위여부에 따라 지워질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은 결코 불가능합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온 몸이 깨끗해 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요13:10).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셈이 됩니다(갈2:21).


그렇습니다. 특정 본문에 대한 왜곡된 해석은 정당한 해석방법을 무시하거나 성경을 종합적인 관점, 특별히 성경신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총체적인 계시관의 결핍과 부족에서 비롯된다 하겠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출처 : remnant7000
글쓴이 : sky blu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