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자료

[스크랩] 독립운동과 기독교인의 활동(1)

baromi 2008. 7. 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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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세 [1]
The Korean Sit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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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기독교교회총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 발간

 

한국의 정세 [1]
The Korean Situation
최근 사건들에 대한 목격자들의 신빙성 있는 증언
미국기독교교회총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 발간
미국기독교교회총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 위원 명단
헨리 에이 애트킨슨(Henry A. Atkinson) 목사
오우 아아르 애비슨(O. R. Avison) 박사
데이비드 피이 배로우즈(David P. Barrows) 교수
앨런 아아르 바돌로뮤(Allen R. Bartholomew) 목사
에이 에이치 브리그즈(A. H. Briggs) 목사
에프 에스 브로크먼(F. S. Brockman)
에스 피이 브루크스(S. P. Brooks) 총장
아아더 제이 브라운(Arthur J. Brown) 목사
차알스 아아르 브라운(Charles R. Brown) 목사
윌리엄 아이 체임버얼린(Wm. I. Chamberlain) 목사
토머스 에스 클리스(Thomas S. Clyce) 목사
조오지 아이 코크런(George I. Cochran)
스티븐 제이 코리(Stephen J. Corey) 목사
핸포오드 크로포오드(Hanford Crawford)
에드읜 헤일 델크(Edwin Heyl Delk) 목사
시드니 엘 걸리크(Sidney L. Gulick) 목사
에이치 에이치 가이(H. H. Guy) 교수
윌리엄 아이 헤이븐(William I. Haven) 목사
이이 아아르 헨드릭스(E. R. Hendrix) 감독
해밀턴 홀트(Hamilton Ho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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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알스 디이 허리(Charles D. Hurrey)
제레미어 더블유 젱크스(Jeremiah W. Jenks) 교수
에이치 비이 존슨(H. B. Johnson) 목사
앨버트 지이 로오슨(Albert G. Lawson) 목사
존 비이 레넌(John B. Lennon)
프레데리크 린치(Frederick Lynch) 목사
프랜시스 제이 매코넬(Francis J. McConnell) 감독
차알스 에스 맥파알랜드(Charles S. MacfarIand) 목사
셰일러 매테우스(Shailer Mathews) 부감독
존 아아르 모트(John R. Mott) 박사
시이 에스 내시(C. S. Nash) 총장
프랭크 메이슨 노오드(Frank Mason North) 목사
워렌 올니 2세(Warren Olney, Jr.)
도레무스 스카더(Doremus Scudder) 목사
로버트 이이 스피어(Robert E. Speer) 박사
시드니 스트롱(Sydney Strong) 목사
헨리 더블유 템플(Henry W. Temple)
아모스 피이 와일더(Amos P. Wilder) 교수
에프 더블유 윌리엄스(F. W. Williams) 교수
루터 비이 울프(Luther B Wolf)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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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주요 전문(電文)-
이 소책자를 인쇄에 넣으려 할 즈음, 일본(日本) 수상 원(原) 각하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문을 받았다.
‘본인은 한국 내 일본정부요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하는 학대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음을 귀(貴) 위원회에 다짐하고 싶다. 본인은 실제의 사실에 대해 공명 정대하게 주시할 충분한 용의가 있다. 본인이 여러 차례 언명한 바와 같이, 근 10년 전, 합방할 당시, 한국에 수립된 정권은, 변화된 여건에 적응할 실질적인 변동이 촉구되고 있다. 지난 9월 현 내각이 발족한 이래, 본인은 한국에 필요한 행정 개혁안 작성에 몰두해 왔다. 이를 위한 광범한 개혁안이 이미 심의 중에 있다. 불행하게도 한반도 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혼란으로 인하여, 개혁안을 곧 정식으로 채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본인의 견해로는 최근의 사태가 회전되었음을 감안하여 이제 현안의 개혁안을 안심하고 채택하여, 절차상의 법적 요건이 완료되는 대로 시행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현재로서는 이 개혁안을 보다 완전한 형태로 발표하는 것을 보류할 것이나 본인과 본인의 동료들은 한국민에게 항구적인 복리를 증진하고, 한국에서의 생활여건을 훨씬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확고한 결심이 오해 또는 곡해되지 않을 것임을 믿는 바이다.’
위의 전문은 동양관계위원회가 1919년 6월 26일 수상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전문에 대한 원(原) 수상의 회답으로, 7월 10일 접수된 것이다.
‘한국의 박해를 둘러싼 소란은 더욱 심각해 선의(善意)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사실의 공표를 막을 수는 없다. 귀하는 박해가 멎었으며, 온당한 행정개혁이 진행되고 있다고, 공식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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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기독교교회총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Fedcil)에 이같은 요지의 전문을 보낼 수 있겠는가?’
이에 앞서 4월 20일 팔전(八田) 총영사는 일본 외무대신 내전(內田) 자작(子爵)에게 한국 사태에 관한 전문을 보냈다.
다음은 그 전문에 대한 회답으로, 팔전이 받은 것이며, 1919년 5월 15일 본(本) 동양관계위원회에 수교된 것이다.
‘원(原) 수상은 요즘 한국 행정부에, 개혁을 도입시키는 문제에 대해 심히 우려해 왔다. 그는 현재 이 개혁을 실천에 옮길 가장 좋은 방법을 특별히 조사 중에 있는데, 이 때 외국 신문들이 성급하게, 또 흥분을 자아내게 하면 더욱 곤란해지고 심각한 방해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귀관은 이와같은 사정을 미국기독교교회총연합회에 설명할 것이며, 동시에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게 된 그들의 우호적인 정신에 대해 본인의 사의를 전달토록 하라. 귀관은 문제가 적당히 다뤄지지 않으면 전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는 데 대해서 그들의 주의를 더 끌게 하고, 그들이 건전하고도 온건한 태도를 계속 유지하도록 촉구할 것을 또한 수상은 바라고 있다.’
위의 전문들은 본 위원회(Fedcil), 팔전 총영사 및 원 수상 자신이 한국으로부터 온 호소에 대해 진지하게 대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원 수상과 그의 동료들은 그들의 권한을 최대로 발휘하여 잘못을 시정하고 한국에 새로운 시대를 이룩할 것으로 믿어 마지 않는다.
위원장 윌리엄 아이 헤이븐(Wiliam I. Haven)
총 무 시드니 엘 걸리크(Sydney L. Gu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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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정세(韓·日情勢)
3월 초 상해(上海) 및 천진(天津)으로부터의 전보 소식들은 한국 내에서 주목할 만한, 독립을 위한 봉기 사건이 일어나고 일본정부는 이를 야만무도하게 진압중이라는 것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4월이 되면서, 이 전보들을 확인하는 상당한 자세한 내용을 담은 편지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서한과 전보는 엄격한 검열을 피하기 위해 많은 간접적인 경로를 통하여 들어 왔으며, 모두가 주한(駐韓) 외국선교부이사회 총무 앞으로 온 것이다. 선교사들이 미국 내 친지 및 친척들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이 이 외국선교부이사회 총무들에게도 발송되었다.
모두가 한국인들이 일본으로부터 무자비하게 받고 있는 야만무도한 처우로부터 이들을 구제할 모종의 조처가 미국에서 마련될 것을 호소한 내용이다. 4월 중순경, 한국 사태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가지고, 한국에서 직접 뉴우요오크에 도착한 첫 사람은 캐나다 장로교회 외국선교부이사회 총무인 에이 이이 암스트롱(A. E. Armstrong) 목사였다. 암스트롱 목사는 극동(極東)에 10개월간 머물면서, 중국(中國)·만주·(滿洲)·한국 및 일본 등지에 있는 소속 선교복서에 대한 순방을 끝마치고, 미국으로 떠나기 위해 횡빈(橫濱)에서 배를 타려고 할 때, 한국을 다시 방문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3월 16일 서울에 도착한 후, 3일간 머물면서, 여러 당사자들과 협의를 가졌으며, 완전하고도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그는 뉴우요오크에 도착하는 즉시, 미국장로교회 외국선교부이사회 총무인 아아더 제이 브라운(Arthur J. Brown) 박사, 미국 감리교 감독교회 외국선교부이사회 총무 프랭크 메이슨 노드(Frank Mason North) 박사, 미국성서공회 총무 윌리엄 제이 헤이븐(William J. Haven) 박사 등과 협의했다. 이들은 협의 끝에, 다루어야 할 문제가 외국선교부이사회보다는 미국기독교교회총연합회에서 가장 적절히 다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판단, 이에 따라 4월 16일 이 연합회의 동양관계위원회가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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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이후, 동양관계위원회는 10여 차례 회합을 갖고, 문제의 검토 뿐만 아니라, 타당한 대책을 강구했다. 이 회합 중 뉴우요오크의 저명 일본인들이 두 차례 참석토록 초청되었으며, 이 일본인 친구들 중의 몇몇은 즉각 본국에 선처를 요망하는 급전을 쳤다.
이 위원회는 이와같이 조용하고도 우호적인 방법으로 실속있는 성과를 얻도록 영향력을 발휘하려 했다. 위원회는 한국으로부터 계속 밀어 닥치는 자료를 일간 신문들에 내 주기에 앞서, 먼저 위와같은 방법을 쓰는 것이 정당한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방법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위원회는 가지고 있는 그 많은 정확한 정보를 일반에게 알려야 할 때가 온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 책자에 수록된 다음의 문서들은 위원회가 절대로 믿을만한 것으로 본 것인데, 이의 준비과정에는 한국에 있는 30여 명의 미국인과 영국(英國)인이 참여했다. 문서 중 어떤 것은 보고용으로 정성들여 마련된 것이며, 어떤 것은 사신(私信)이고, 목격자들의 선서·구술서들도 있다. 입수된 모든 자료를 발간하면 약 1천 페이지의 책이 될 것이다.
보고용 문서 중에는 빽빽히 1백 14페이지나 되는 것도 있다. 오늘날과 같이, 많은 나라에서 흥분과 정치적 소란이 일고 있는 때에는, 입증이 불가능한 극단적인 진술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많은 과장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기술된 사실들은 사실 자체를 나타낸 것이다.
위원회는 두가지 원칙적인 이유 때문에 이 자료를 일반에게 공개한다. 첫째, 위원회는 비인도적인 처우와 불법으로부터 한국인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모든 영향력의 발휘를 바라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이곳 미국에 건전하고도 계발적인 여론이 조성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여론은 일본에서 진보적인 반군국주의 세력으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정의와 공정한 처우의 실현을 위한 그들의 노력을 강화하도록 해 주어야 할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위원회는 또한 위원회의 자격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정치문제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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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명백히 밝혀 두고 싶다. 한국에 대한 정치적 독립의 부여 여부는 본 위원회가 판단을 밝혀야 할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본 위원회는 모든 정직한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잔인성, 고문, 비인도적 처우, 종교 박해 및 학살 등은 어디서나 중지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러한 만행이 한국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는 증거는 수긍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같은 사태에 대처하여, 정확히 공정하고도 정통한 여론이 조성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이러한 여론은 일본을 비판할 때, 반동적인 군부 세력과 자유주의적인 진보 세력을 분별할수 있어야 할 것이다. 건전하고 정당한 비판은 군국주의 정신과 실행을 통해 전 세계에 초래케 한 재난을 인식시키게 될 것이다. 일본도 군국주의의 올가미에 걸려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도 인정미 있고 진보적인 인사들이 이끄는 자유주의적인 반군국주의 운동이 전개되고 있으며, 우리는 이들이 미국에 있는 그들의 친지가 한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것에 대해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은 심적(心的) 고통을 같이 느낄 것으로 믿는다.
처음으로 ‘평민’을 수상으로 맞아들인 현 일본내각 자체는 자유주의적이긴 하나, 전임 내각들이 물려준 가혹한 군국주의정책 및 방법을 상속하고 있다. 현 내각은 한국 내에서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도, 한국의 행정개혁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었음을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봉기로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 더우기 정부와 군부 내의 정적(政敵)은 다수인 데다가 막강하며, 현 내각을 몰락시킬 기회를 엿보고 있다.
미국은 일본의 진보적 반군국주의 운동에 대해 가능한 한, 최대의 정신적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방금 위에서 지적한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일본 국민과 정부를 마구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지나치게 일본의 정책과 지도자들을 지배해 온 보수주의적인 귀족세력과, 현재 대두하고 있는 새로운 자유주의적 정책과 지도자들을 구별함으로써 이 운동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중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희망은 모든 나라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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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있어서의 군국주의의 타도가 국민 전계층(全階層)에 있어서의 시민의 자유와 민권의 확립에 놓여 있는 것이다.
미국기독교교회총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
위원장 윌리엄 아이 헤이븐
총 무 시드니 걸리크.
 
 
 
 
증거 문서 Ⅰ
한국 내 혼란
작성자__________
1919년 3월 21일
한국은 현재 브라이스(Bryce) 조사위원회같은 위원회가 또 한번 진상을 조사할 만한 충분한 분야라 말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현 세대의 동요 추세가 한국에도 미쳐, 한국민이 자유를 요구하도록 일깨워 주기에 이르자 일본 군국 체제는 3월 1일 이후, 최근 유럽에서 분쇄된 프러시아(Prussia)식 군국주의 기구의 모든 특징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벨기에(Belgium)에서 자행된 바 있는 각종 만행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한 신문 보도에 의하면, 한국인 6천 명이 현재 투옥되어 있지만, 아마 이것도 실제 숫자보다 적은 것이다. 한층 더한 자유의 쟁취를 위한 이 운동은 거국적이며, 이 운동의 선도자들에는 기독교인, 그리고 재래 신앙의 개혁된 형태인 천도교의 신자들 및 불교도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관립학교 학생들도 기독교 계통 학교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가담하고 있다. 그리고 ‘법과 질서’의 미명 하에 날마다 인도에 어긋나는 행위가 수없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식민체제
일본은 1908년 한국을 보호령으로 삼은 데 이어, 1910년에는 이 나라를 정식으로 합병했다. 합병 이전의 행정체계는 무질서했다. 일본은 강력한 집행으로써 평온과 질서를 가져오고, 한국의 천연자원을 개발하기 시작하였으며, 사법 조직을 마련하고, 처음으로 교육제도를 폈을 뿐만 아니라 통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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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선하고 위생 관념을 기르게 했다. 일본의 후원으로 많은 개혁이 이루어졌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 지배를 위해 사용된 방법은 한국인의 마음을 사지를 못했다. 일본 국민의 천성은 독재적인 체제들에 매력을 느낀다. 그들의 경찰 조직은 철두철미 독일(獨逸)식이며, 식민지 지배에 있어서는 영국(英國)식 방법이 아니라 프러시아식의 본을 떴다. 칼은 권위의 상징이다. 칼은 군인, 헌병 및 경찰 뿐만 아니라, 민간인 공무원들도 차고 다닌다. 각 학교의 남자 선생들도 칼을 찼으며, 사실상, 관직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 권위의 상징으로 칼을 차고 다닌다. 군국주의 체계의 강화를 위해 광범위한 스파이(spy) 조직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집회의 자유, 언론의 자유도 없고, 자유로이 이야기할 수도 없다. 그리고 체포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마음대로 억울한 일을 진정할 권리도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자치에의 참여도 없다. 한국인은 법정에 일본인과의 송사에서 이길 가망이 없다고 한다. 인신보호법은 알지도 못한다. 국가는 피고인을 공개 재판에 회부하기에 앞서 2주 혹은 그 이상 구속해 둘 권리가 있으며, 구속 기간을 임의로 10일 더 연장하고 싶다면, 절차를 거치지 않고 마음대로 그렇게 한다.
피고인은 변호사와 항의하거나, 친지들을 만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고문은 마음대로 행해지고, 결백함이 입증될 때까지는 죄인 취급을 받는다. 한국인은 정부 산하의 많은 유급(有給) 관직에 참여할 수 없다. 경찰과 헌병 중에는 한국인이 더러 있기는 하나, 다른 공무원 부서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다. 한국은 직업을 구하려는 일본인에게는 낙원이다. 정부관리들은 한국 청년을 타락시킬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매춘업은 번창하여 서울에서 지방으로 번지고 있다.
독립협회는 한국인의 불평을 호소한 선언서를 발표했다. 또한 한국인의 가슴에 사무친 것은 일본이 학교에서 한국어 사용을 금하기로 한 결정이다. 일본어를 학교에서 가르치는 유일한 언어로 공포한 것은 1920년의 일이다. 폴란드(Poland)를 비롯한 그밖의 나라들의 교훈은 일본인들에게는 아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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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도 없는 것 같다. 이어 따뜻한 남부지방에 사는 한국인들의 토지를 빼앗고, 그들을 만주로 강제 이주시키려는 조직적인 기도가 있는 듯하다.
한국인 지주나 소작인이 토지를 팔도록, 그것도 불리한 가격으로 내놓도록 하고, 그들의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가서 정착토록 압력이 가해진다. 한국인이 떠난 자리에는 일본인이 대신 들어온다. 이러한 정착은 정부로부터 상당한 특권을 받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라는 반관반민(半官半民) 회사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 한 노련한 선교사는 언젠가 ‘철로를 부설하고, 도로를 건설하고, 교육을 증진하고, 위생을 이해하는, 이 모든 것 역시 영락없이 독일식이다.’라고 통렬하게 이 사태를 요약했다.
일본의 개혁 경향
한마디로 말해, 일본제국의 전체적인 정부기구는 정부 내 문관 조직이 군부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일 체계를 반영하고 있다. 지난 9월 사내(寺內) 백작이 이끌던 관료적인 내각은 붕괴하고, 원(原) 내각이 계승했다. 일본 신문들은 신 내각이 일본에서는 처음있는 민주정부라고 갈채를 보냈으며, 정부의 행동이 이러한 호칭을 받을만한 듯하였다. 의회가 개원된 직후, 신임 각료 중 한 사람은 신 내각의 식민정책을 묻는 질의에 대한 답변으로, 정부는 식민지들을 계속 칙령으로 통치할 수 없음을 깨달았으며, 새로운 방법을 고려 중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장관은 새로운 방법이 언제 시행될 수 있을 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 후 신문들은 한국의 무단정치(武斷政治)를 민사정부로 대체하기를 바라는 문관파와, 이에 반대하는 군국주의자들의 내분이 있음을 드러내는 듯했다. 현재 군부인사들은 파리(Paris)평화회담에 참석한 일본대표들이 징집 폐지에 관해 취한 조처를 비준할 수 없다고 신문에 떠들어대고 있다. 그런데 3월 1일 동경(東京)에서는 성년 남자 선거권을 요구하는 거대한 군중 데모가 일어났다. 이 결과 원(原) 내각은 2, 3일 후 참정권을 대폭 확대한 선거개혁법안을 마련해서 중의원의 가결을 보았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일본제국의 본토에 서서히 자리잡는 중인 듯하며, 이로 미루어 볼 때 식민지에도 밝은 전망이 나타날 희망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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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의 기원
그러는 동안, 일련의 사건이 겹쳐 일어나는 바람에 한국 내의 위기가 촉진되었다. 이 사건의 첫번째 것은 파리평화회담과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전파였다. 조선총독부 내무국장은 선교사대표단에게 총독부는 한 한국인이 윌슨(Wilson) 미국 대통령이 파리평화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그곳으로 떠나기 전, 그와 만나, 한국문제를 파리회담에 제기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윌슨 대통령은 파리평화회담은 전쟁에 관련된 국가들만을 다룰 수 있으므로, 한국과 같이 평화로운 나라의 문제는 적절히 제기될 수 없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한다. 그러자, 이 한국인은 한국문제가 토의될 경우, 한국 민족이 불만에 차 있다는 사실을 확연히 나타내 보일 수는 없을 것이냐고 물었다. 대통령은 이에 대해 자기는 그러한 경우,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다른 소식통들에 의하면, 이것은 아주 그럴듯한 이야기인 것 같다. 서양 국가들과 하와이(Hawaii)·시베리아(Siberia) 및 중국 등지에는 많은 한국인이 살고 있으며, 한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어디나, 독립운동이 급속히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평화회담의 진행은 일련의 사건들에 또 하나의 사건을 이루었다. 약소국가들의 복음인 민족자결주의 원칙, 국제연맹, 전쟁에 의해 해방된 피압박 민족의 부활, 이 모든 것은 교육받은 한국인의 상상에 불을 질렀다.
마침 이때 한국에는 민족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전(前) 황제인 고종(高宗)은 태자(太子)를 일본의 황녀(皇女)와 결혼시키기로 한 전날인 1월 20일 서거했다. 고종의 사인(死因)은 졸도(卒倒)로 공식 발표되었다. 그러나 전 황제의 별세는 자살 아니면, 독살일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민족이 일본 통치에 만족하고 있다고 명시한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절했다고 하며,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에게 이같은 문서를 제시하여 서명받으려 했다는 풍문도 공식으로 부인되었다. 고종의 서거 소식은 잠시 발표가 보류되었다.
장례를 치루기 위한 준비가 마련되었다. 일본의회는 10만 원(圓)의 장례비 지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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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한 뒤, 고인에게 경의를 표해, 휴회했다. 1894년 살해된 고종의 황후는 서울 동대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매장되었었다. 고종은 서울에서 약 27킬로 떨어진 곳에 장사지내기로 결정이 되었었으며, 한국의 풍습에 따라, 황후를 황제 옆에 묻어야 했다. 따라서 황후의 능은 발굴되어, 2월 12일 이장식이 성대히 거행되었는데, 비용은 모두 한국인들이 부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인들은 민족적 굴욕을 다시금 통렬히 느끼게 되었다. 3월 3일은 고종의 국장일(國葬日)이었다. 장례식은 시내에서는 일본인이, 시외에서는 한국인이 각각 주관키로 되어 있었다. 물론, 일본이 주관한 장례식은 한국인들의 비위에는 맞지 않았다.
데모의 시작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 갔다. 당국은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이 일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학교 교장들은 서울 부청(府廳)으로 부윤(府尹)한테 불려가, 학생들이 일본에 유학 중인 한국 학생들의 행동에 휩쓸리지 않도록 미리 경고해 두라는 당부를 받았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한국 학생들은 2월 중 독립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여 많은 학생들이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두지 않을 수 없다.
토요일인 3월 1일, 서울 거리에는 파고다공원에서 군중 대집회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벽보가 나붙었다.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가 배부되었다. 정오가 좀 지나자, 이 선언서에 서명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한국인의 여관에 모여 당국에 전화를 걸어,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밝히고, 자기들이 모여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당국은 이 연락을 받은 즉시, 관원을 보내어 그들을 체포했다. 경찰은 이들이 음식점에서 자신들의 계획이 성공했음을 기뻐하는 축배를 들고 있을 때, 그들을 포위했다고, 신문에 발표했다.
한편 많은 학생들을 포함한 시민들이 파고다공원에 모여, 거기서부터 일부 주요 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팔을 들어 만세를 부르면서 질서정연히 행진했다. 이들은 경찰서 또는 여러 영사관 등 공공 건물 앞에서는 행진을 중지하고, 모자를 벗어 흔들면서 힘껏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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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관에 메시지와 독립선언서 등을 집어넣었다. 단 한 건의 난동 행위도 없었다. 한 곳에서는 기마 헌병들이 군중에게 돌격히여 칼을 휘둘러 부상을 입혔다. 경찰은 될 수 있는대로 많이 체포했으며, 다음 날인 일요일, 이 군중 데모에 관련했다는 혐의로 집에서도 연행해 갔다. 33인의 서명자 중 15명이 천도교인, 15명이 기독교인, 그리고 3명이 불교도였다. 기독교인 중 대부분이 여러 도시의 교회 목사이며, 이들 중 다수가 대학에서 교육받은 자들이었다. 한 사람은 기독교청년회(Y.M.C.A.) 총무였으며, 세브란스(Severance)병원에 관계한 사람도 있었다. 이 날 이후, 매일 성직자들이 체포되어, 도시의 교회치고 당시 목사가 감금되어 있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일요일인 3월 2일, 서을에서는 데모가 없었다. 다음날이 바로 고종의 장례식 날이었다. 각 학교는 일본이 주관하는 장례 행렬에 따라, 일정한 구간씩을 할당받았다. 관립, 사립 또는 기독교 계통의 어떠한 상급 학교도 선생들만이 참가했을 뿐이며, 학생들은 장례식을 묵살해 버렸다. 장례식은 군사적 장관(壯觀)이었다. 해군과 육군 분견대로 구성된 첫 대열은 어느 지정된 지점을 통과하는 데 18분이 걸렸다.
신도(神道)의 신관(神官), 유해(遺骸), 정부 대표 및 공무원들이 참여한 두 번째 대열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세 번째 대열은 첫 번째 대열과 같은 길이의 육군과 해군의 행렬이었다.
한국식 장례식은 시외에서 거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다음날 서울 거리는 조용했다. 이 이틀 동안 학교는 휴교이었다.
다음 날인 3월 5일, 상급 학교에서는 학생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으며, 나라가 독립하기까지는 학생들이 이제 등교하지 않을 것이란 소문이 학교교장들의 귀에까지 들려 왔다. 그때부터 근 한 달 간은, 문을 열 수 있었던 상급 학교는 하나도 없었다.
수요일인 5일, 마침 9시 정각이 되자, 역 앞, 큰 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이들이 가게와 골목길에서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부르며 역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인력거를 탄 한 남자가 거리에 나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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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에게 둘러싸인 채 남대문 쪽으로 달려가, 문을 지나 궁을 향해 시내로 달려갔으며, 군중은 붉은 완장을 두르고 만세를 불렀다.
이 데모는 거의 모두가 학생으로 이루어졌으며, 데모 대열이 전진함에 따라 고등보통여학교 학생들도 가담했다. 경찰은 뜻밖에 허를 찔렸음이 분명했다. 데모 대원들은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1. 6킬로쯤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궁 앞 넓은 광장에 정렬하고 있다가, 군도를 들고 군중에게 돌격했다. 이래서 많은 부상자가 났다. 경찰은 남녀 구별없이, 여자들도 거칠게 다루면서 때렸다. 많은 여학생들을 포함하여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학생들은 폭력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목적은 다만 데모한다는 데 있음이 분명해 보였으며, 그들은 나라를 위해 체포되는 것을 명예로 알았다. 데모 군중이 거리를 지나갈 때, 세브란스병원에 있던 간호학생 거의 전원이 뛰쳐 나왔다. 이들은 붕대를 가지고 나와, 필요하면 적십자사 활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중 15명이 체포되어, 하오까지 경찰서에 붙들려 있었다. 이들은 간호학교 우두머리[선교사]들이 밖으로 뛰쳐 나가라고, 명령했는지의 여부를 추궁받았다. 이들보다 나이 어린 여자 고등학교 학생들도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대부분이 감금되었었는데, 이들이 감옥에서 겪은 고생은 후에 더 이야기하겠다.
다른 여러가지 데모도 일어났다. 철도 종업원들은 경찰의 처사에 항의하기 위해 며칠 간 파업을 벌였다.
한국인 점포는 덧문을 내린 채 3주일 간 문을 닫았다. 문인(文人)들은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마련하여 기독교 선교사 한 사람과 기독교인 한 사람을 총독 집무실에 보냈으나, 총독 집무실은 그러한 문서는 경찰부에서 접수해야 한다고 말하며 받지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를 들고 경찰에 찾아갔다가 당장 체포되었다. 독립선언서와 문인들의 탄원서는 모두 장중한 문체(文體)로 되어 있으며, 한국민에게 정신적인 ‘공포’를 가한 자들에 대해 자비의 정신을 고취하고 있음을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다. [그후 또 하나의 탄원서가, 합방 후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부여받은 두 인사에 의해 제출되었었다. 이 중 한 사람은 1866년 왕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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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조약을 체결하고, 서방세계에 한국의 문호를 개방할 것을 청원한 바 있다. 이 인사는 80세가 넘은 고령인 데다, 너무 허약하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해 체포를 면했으나, 그의 친척 중 남자는 모두 감금되고, 군인들이 그의 집 주위에 비상선을 쳤다. 물론, 함께 탄원서를 낸 한 사람도 즉각 체포되었다. 두 사람은 자작이다.]
서울 이외에서의 데모
서울서의 데모 발생과 때를 같이하여, 이와 비슷한 데모가 전국 주요 도시에서 일어났다. 지방 데모도 역시 질서정연했다. 그러나 외국인의 눈길이 채 미치지 않는 지방 도회지의 경찰, 옥리(獄吏) 등은 많은 지역에서 극도로 잔인한 행동을 했다. 이들은 군중에게 발포하여 사망자도 발생했다.
총상을 입은 두 환자가 모처에서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다. 외국인들은 대도시인 평양에서의 보고에서, 군중은 초가집이 불탈 때, 이영을 끌어 내리는 소방용 갈구리로 무장한 소방 대원들로부터 습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래서 많은 중상자가 생겼다.
총에 맞아 부상한 사람이 5명이나 병원에서 숨졌어도, 당국의 명령으로, 사인을 총상에 인한 것으로 보고할 수는 없었다 한다. 당국은 북쪽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을 골탕먹이기로 결정한 듯하며, 교회들은 무참히 파괴되었다. 경찰은 대부분의 경우, 데모대원들을 심문하여 기독교인임을 자백한 자들만을 체포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이 하급 계층 출신이라고 꾸민 성명서에, 한국인 부호 24명의 서명을 받게 하려던 기도(企圖)가 있었으나, 이들은 성명에 불응했다. 이들이 며칠간 압력을 받아도 응하지 않자, 이 시도를 포기했다. 부호에 대한 압력 이야기가 나온 김에 밝혀 두어야 할 것은, 부자들은 그들의 개인 재정을 정기적으로 경찰로부터 감사받아야 했다. 이와같이 한국 내 일본정부는 철저했다.
캐나다(Canada) 장로교회 외국선교부 소속의 부서가 있는 함흥(咸興)에서 일어났던 사태는 평양의 것과 비슷했다. 소방대와 곤봉으로 무장한 품팔이 일군들이 동원되어 군중에게 폭행을 자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한 목사의 목격 증언은 이렇다. 그 때 당국은 데모 부상자들이, 선교사가 경영하는 병원에서는 치료를 받지 못하게 했었다. 마침 목사는, 데모가 한창일 때 경찰서에 갔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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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 천막 안에서 손에 갈구리창을 든 소방대원들과 곤봉으로 무장한 품팔이 일군들이 군중을 습격하라는 신호를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 자들이 경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리라고 믿기는 도저히 어렵다. 경찰서장은 외국인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외국인 목숨은 비기독교인들이 노리는 대상이 된다고 말했으나, 선교사들은 이러한 위협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외국인들에게 가해질 어떠한 피해도 그 책임은 서장 자신에게 있다고 대꾸했다.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 사건을 지금 모두 상세히 기록할 수는 없다. 이 사건들은 전국에 걸쳐 일어난 것의 좋은 본보기다. 사건을 기록한 외국인들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사정이 어떠했었는지, 결국에는 진상이 밝혀질 것이다.
관영신문(官營新聞) 보도, 특히 초기 단계에 나온 보도들은, 선교사들의 선동으로 이 데모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공공연히 선교사들을 비난했다. 이러한 보도는 상당한 수의 기독교인들이 이 운동에 관여한 사실을 구실로 하여 나온 것이다. 기독교인 이외의 사람들이 관여한 역할에 대해서는 극히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꾸미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경찰 출입 기자들은 기독교계 학생들에 관해서는 과장 보도한 반면, 관립학교 학생과 불교도들의 참여에 대해서는 사실을 얼버무리려 했다. 미국영사의 해명 요구가 있자, 그 후 일본정부는 선교사들에 의한 선동설을 믿지 않는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 발표와 국내 신문들은 계속 그러한 선동 기사를 전했다.
경찰의 만행
한국 안에서 경찰 취조방법의 기본 원칙은 구타와 고문이었다. 체포되면, 체포된 자는 으레 수갑을 차게 마련이고, 경찰관 몇 명으로부터 발길질 당한다. 3월 5일 데모 때, 한 남학생은 약혼녀가 경찰관 여러 명으로부터 폭행당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녀를 구출하려 뛰어 들었으나, 이내 붙들려 심하게 구타당했다. 그는 체포되어, 감금된 지 약 3주일이 되는 데도 아직 석방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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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 차림의 일본인들이, 경찰이 보는 데서 데모 대원들을 체포하여 굴욕적으로 다룬 경우도 허다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평양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있었다.
석방된 사람들로부터 잔인한 고문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한 학생에게는 주동자들을 말하라고 추궁했으나 대지 않자, 기억을 더듬으라고 손톱을 까버렸다. 어떤 죄수는 역시 주동자를 말하지 않는다고 손끝을 태웠다. 어떤 사람은 등에서 나사로 조종하는 수직 압착기에 집어 넣어, 나사를 돌리면 사방이 죄어지면서 압박이 점점 강해지는 상태에서 심문을 받았다. 이것이 정보를 짜내는 한 방법이다. 이 사람은 이런 고문을 당한 후, 오른 손가락에 튼튼한 끈을 동여매고, 그 끈을 천정의 고리에 걸어 잡아다녀, 몸뚱이는 뜨고 발가락 끝이 땅에 닿도록 매달려졌다. 그는 이러는 사이에 의식을 잃게 되었으며,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바닥에 뉘어져 있었고, 상처에는 고약이 발려 있었다. 그는 손이 퉁퉁 부은 채 출옥했으며, 그 손은 이미 절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여자들은 이보다 더 심한 곤욕을 겪었다. 여자들은 체포된 후, 첫 2, 3일간은 몇 군데의 경찰서에 분산 감금되었다. 확인된 바로는 이들 경찰서 유치장에는 여경들이 근무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이 여자들은 친척 또는 친지들과의 연락이 허용되지 않았다.
석방된 한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체포된 지 2, 3시간 후, 소녀는 한 경관 앞에 끌려 나갔다. 경관은 소녀를 심문하면서, 얼굴 어깨 및 다리 등을 때렸다. 다음 날 똑같은 과정이 제2의 경관에 의해서 반복되었다. 3일째는 제3의 경관에게 끌려 갔는데, 이 자는 소녀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그녀와 다른 여자들도 임신하고 있다고 넌지시 약을 올렸다. 그녀는 이에 “배를 째고 볼테면 보아라”고 대꾸했다.
그러나 경관은, 성경에 가라사대 죄없는 사람은 벌거벗어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고 했으니,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이 말은 아담(Adam)과 이브(Eve)가 원죄를 짓기 전 벌거숭이의 상태였음을 야비하게 가리킨 것임] 여자가 울자, 그는 더 이상 벗으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나, 다시 때렸다. 그녀는 4일째 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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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경관에게 불려가 심문을 받고 또 구타당했다. 그녀가 겪은 시련 중 한 가지 참기 어려운 것은 바닥에 꿇어 앉아 한시간 동안 무거운 판자를 어깨 높이로 들고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팔이 떨리면 계속 얻어맞았다. 여자들은 화장실에 갈 때에도 항상 감시를 받았다. 그녀는 5일째 되던 날,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졌다. 그녀와 다른 두 소녀가 형리(刑吏)의 방으로 불려 갔다. 그녀는 다른 두 소녀가 방에 불려 들어가 있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잠시 후 둘이 머리채를 등에 늘어뜨린 채, 옷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서, 벌거숭이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호출되어 방으로 들어가니, 형리와 함께 2명의 여간수(女看守)가 있었다. 형리로부터 심문을 받은 후, 그녀는 여간수로부터 옷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잠시 못 벗겠다고 버티다가 위협에 못이겨 벗었다. 여간수들은 그녀의 땋은 머리를 풀어 헤쳤는데, 이것은 굴욕을 주려는 목적 이외에는 딴 뜻이 없는 듯했다.
이렇게 몇 분간 벗은 채로 서 있다가, 한 여간수가 따라 오라고 하여, 치마를 걸치고, 나머지 옷은 싸들고, 복도를 지나 감방에 이르니 앞서 간 두 여자가 이미 와 있었다. 그녀는 감방으로 오는 도중, 형무소 남자 직원 몇 명과 마주쳤다. 다음날 그녀는 여간수에 이끌리어 아주 젊은 일본인 의사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여기서, 검진을 받게 되었으니 또 옷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참 동안 승강이 끝에, 그녀는 한 가지만은 벗지 않아도 되었다. 의사는 그녀의 가슴을 타진했으나, 건강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았으며, 진찰이 끝난 후 감방으로 되돌아 왔다. 며칠 후, 한 금테를 두른 관리가 그녀의 감방에 들어와 허리까지 옷을 벗게 한 후, 등과 가슴을 두드려 보고 나갔다. 관리가 다녀간 후, 얼마 안되어 그녀와 2, 3명의 다른 여자들은 풀려 나왔다. 이들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통고를 받은 친척, 또는 교장들에게 인계되었다. 이들은 감방에 있을 때, 끊임없이 여간수들로부터 감시를 받았으며, 말도 못하고 하루 종일 지루하게 웅크리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앉아 있다가, 위치를 바꾸어도 매를 맞았다. 이들은 매일 아침 식사 후, 15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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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외 산책이 허용되었다.
피의자들에 대한 고문과 잔인의 이야기들이 선교사 사회에 널지 퍼지자, 경성일보는 한국 사람들이 ‘지독한 거짓말장이’라는 내용의 사설을 두 세 개 발표하면서, 잔학행위설은 형무소 당국이 조사한 결과, 고문한 사실이 없음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한 선교사가 이 사실을 일본인에게 보이자, 일본인은 천진난만하게도 고문이 추방된 이상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다른 외국인은 그 신문의 편집인과 문제의 사설에 대해 논의한 즉, 잔혹행위가 있음을 알고는 있으나 사설 보도는 ‘공식적인 발언인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선교사들에 대한 냉대
선교단체도 무사할 리 없었다. 평양에서는 거리를 지나가던 외국 여인 2명이 총 개머리판으로 구타당했다. 남자 선교사 2명은 경찰이 체포하려던 한국 여인들을 보호하려다 체포되었다. 이들은 경찰서에 몇 분간 머문 후, 군인들의 경계를 받으며 거리를 행진한 후 석방되었다. 이 두 선교사는 스테이시 엘 로버츠(Stacy L. Roberts) 목사와, 아편퇴치운동을 벌여 국제적인 인물이던 북경(北京)의 이이 더블유 드윙(E. W. Thwing) 목사였다.
남부지방에서는 호주(濠洲) 장로교 외국선교부 여성 회원 2명이 체포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3월 20일 동양선교회 소속의 존 토머스(John Thomas) 목사가 강경(江景)에서 군인들로부터 습격을 당해 호되게 구타당했다. 그가 영국 여권을 꺼내 보이자, 이들은 그것을 팽개쳐 밟아 버렸고, 또한 일본 당국이 발행한 전도 허가증을 제시했으나 역시 짓밟아 버렸다. 이 모든 경우가 영사(領事) 문제에 관련된 것이어서 신속한 조처가 취해졌다. 선천(宣川)에서는 데모가 시작되자 이내, 선교사들의 가옥들은 수색당했다. 3월 17일 검사의 지휘를 받은 경찰대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당도하여 모든 대문과 구내 곳곳에 경비병을 배치하고 교내 여러 건물들을 수색했다. 함흥사건과 관련하여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당국은 외국인 보호 책임을 벗어 버리려 했었다. 어떤 영사는 당국으로부터, 자국인들이 거리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자국인이 수난을 당할 경우, 그것은 당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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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을 져야 할 일이라고 말하면서 거절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2, 3일전, 예의 서울 유력지(有力紙)는 고무적인 사설을 통해, 분란을 종식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마련하도록 선교사들이 당국과 협의하라고 권유했으며, 어떤 대표적 일본인은 선교사단체의 충언을 요청하였다. 이 정도가 외국인 보호문제에 대한 현재의 상황이다. 토요일인 3월 22일, 서울에서는 또 가두 데모가 일어났다. 데모는 빨리 진압되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일요일인 다음날 저녁 서울 시내 여러 곳에서는 동시에 데모가 일어났다.
동대문에서는 총검을 마구 휘둘러대는 바람에 많은 부상자가 생겼다. 많은 사망자가 났다는 소문이 그치지 않았다. 군인들이 시가지를 순찰 중이었고, 사실상 계엄령 하에 있었다. 3월 1일 이래 이러한 상태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현 단계에서 예언하기는 너무 이르다. 한국인들이 완전 독립을 위한 그들의 주장을 완화할 것인지, 또는 끝까지 소극적인 저항정책을 추구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근본적인 개혁 계획을 받아들일 것인지는 예언할 수 없다. 지금까지 독립운동을 위해 한국인들이 보인 조직력에 대해, 그들을 아는 외국인들은 놀라움과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진정한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식민지 행정의 시행방법이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있음을 깨닫고, 보다 다행스러운 여건이 마련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일본인도 많이 있다. 일본의 정책은 그릇되었다. 그것은 영국식 식민지정책이 아니라 독일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은 민족을 착취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이익을 주려는 노력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문화를 가진 민족에게, 그들의 욕구를 무시하고 문화를 강요하려는 노력이었다.
한편, 결과야 어떻든 한국과 일본이 다같이 좀더 높은 문명 수준에 오르는 데에, 사실의 광포가 도움이 될 것이다.
증거문서 Ⅱ
한국 사태의 전반적인 개관
작성자 모 위원회
1919년 4월 7일
한국 사태의 전반적인 줄거리를 알릴 필요가 있겠다. 일본 당국은 얼마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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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어린 왕세자(王世子)를 양 국민 융합의 상징으로 일본의 황녀와 결혼시킬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1월 25일을 결혼일로 정해놓고 준비를 진행 중에, 1월 22일 왕세자의 아버지인 전(前) 황제[고종]가 대단히 이상한 상황에서 사망했다. 물론, 이 때문에 결혼은 연기되었고, 그때부터 한국인들의 마음이 동요되기 시작했음이 누가 보나 분명했다. 또한 시기적으로 파리에서는 평화회담이 열리고 있는데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자기 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한국인들에게 강하게 작용했음이 분명했다.
한국 이외의 중국, 하와이 및 미국 등지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또한 그들의 조국을 해방하기 위해 무엇인가 성취해 볼 기회를 찾고 있었으며, 한국 내의 지도자들과 접촉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모든 영향력의 흐름이 어떻게 상호 작용한 것인지, 우리는 정확히 알고 있지는 못하나, 이러한 것의 상호작용은 왕의 장례식을 이틀 앞둔 3월 1일, 비로소 데모로 나타난 것이다.
이 나라 각계 각층의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작성, 서명한 뒤, 수 천장이 인쇄되었다. 이 서명자 중 15명은 천도교 지도자들이었다. 천도교는 일본이 한국을 점령 합방하기 전후에 기세를 드높였던 동학(東學) 및 일진회(一進會) 운동을 영속화한 것이다. 서명자 중 15명은 기독교인이며 이 중에는 평양의 길선주(吉善宙) 목사와 선천의 양전백(梁甸伯) 목사 같은 매우 저명한 인사들도 끼어 있었다. 나머지 3명의 서명자는 불교도라고 한다. 독립선언서에는 천도교 교주가 맨 처음에, 그리고 길 목사가 두 번째로 서명했다.
3월 1일, 이들 33인은 서울에서 만나 1명을 시내의 한 공원에 보내어 모여있던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케 한 후, 서명자들은 모두 경찰에 자수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한국 내 7, 8개 도시에서도 이와 비슷한 데모가 일어났다. 이같은 데모에서는 참가자들이 기독교인, 천도교인 또는 불도인을 막론하고 모두 개인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밝혔다. 또한 이 운동은 소극적 저항임을 밝히면서, 재산을 파괴해서는 안되며, 일본인이더라도 부상시켜서는 안됨을 촉구했다. 데모의 이러한 성격은 아래에 지적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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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계속 유지되어 왔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있은 후, 데모대원들에게 태극기가 배부되자 이들은 일어나서 깃발을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서울에는 이날 왕의 장례식을 위해 수천 명이 모였었으며, 이들이 독립을 외치면서 주요 거리들을 메웠으나 질서 있는 행동을 했다. 외국인들이 데모를 목격한 바로는, 평양을 비롯한 그밖의 도시에서도 수천 명씩 참가한 데모였으나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날인 일요일은 일부 도시에서 예배가 금지되기는 했어도 평온했다. 그러나 월요일이 되자 세번째 데모가 서울을 제외한 많은 곳에서 일어났다. 서울이 제외되었던 것은 전 황제의 장례식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독립운동은 매우 은밀히 조직되었기 때문에 선교사들, 그리고 일본 당국의 비밀경찰도, 시기의 심각한 긴박성은 의식했었으나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예측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 운동을 지향한, 주목할 만한 조직력이 대두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불과 2, 3일 이내에 이 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심지어 산간 벽지에까지 파급하였다.
경찰, 헌병 그리고 군인들은 어디에나 출동하여, 군중을 해산하고 주동자들을 체포했다. 처음에는 그리 거친 방법은 사용하지 않다가, 그 후부터 특히 지방의 경우, 매우 잔인한 방법이 사용되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계속 발길질당하고, 주먹이나 총 개머리판으로 구타당하고, 대검과 군도로 찔리우고, 또는 총에 맞고 해서 선교사 병원과 관립병원, 그밖의 개인병원들도 부상자들로 가득 찼다고 한다. 세브란스병원의 경우, 부상자 수용장소가 모자라, 복도에까지 침대와 간이침대를 꺼내 놓고 받아 들였다. 이들 부상자들로부터의 한결같은 증언은, 데모 군중이 공격을 받았을 때까지는 폭력을 쓴 일이 없으며, 다만 독립만세만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발포당하거나 그밖의 공격을 받았다. 어느 곳에서는 군중이 발포를 당하자 헌병들을 습격하여 4명을 죽였으며, 지방 몇 곳의 헌병분견대가 파괴당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우, 헌병과 군인들은 체포하려 들지 않고, 경고 없이 발포했으며, 만세소리가 들려 오는 방향에 대고 무차별 사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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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한 때가 종종 있었다.
심지어 여인들은 옥외에서 발가벗기어 심하게 구타당하기도 했다. 군인, 경찰 및 헌병들은 집에 난입하여 붙들 사람을 찾지 못하면, 여자들과 심지어 아이들까지 머리채를 끌어내다 때렸다. 한번은 한 남자를 고문하기 위해 불을 사용한 것이 확인되었다. 이 흉노(匈奴) 같은 야만행위는 우리를 모두 몹시 분개케 했으며, 체포 정도로 각오했던 사람들을 어느 정도 공포에 떨게 했으나, 그들의 확고한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으며 목숨을 구하기 위해 데모와 항의방법을 고치게 되었다. 예컨대, 이들은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점포문을 닫고 근 1개월간 영업을 하지 않고 있으며, 여러 가지 면에서 거부와 파업을 일으키고, 세금 납부 거부운동을 벌일 것을 꾀하고 있다 한다. 그러나 야수와 같은 탄압이 계속되면, 한국인들로서도 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으나 보복이 있게 될 것은 명백한 일이다.
당국은 데모 억제 방안으로 데모가 났을 때, 기독교인을 개인 개인으로 취급하여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연대책임을 지도록 결정했음이 분명하며, 어떤 곳에서는 그 지방 교회의 임원 전부를 체포하기까지도 했다. 이러한 조처는 사람들에게 전반적으로 공포감을 줌과 동시에, 그 한 달 동안 예배를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처사는 특히 평안남도(平安南道)의 경우가 심했다.
물론, 우리 기독교 계통 학교들은 처음부터 이 운동에 말려들었다. 남녀학생들은 이 운동에 열성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 결과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제외한 모든 기독교 계통 학교들이 3월 1일부터 문을 닫고 있다. 이들 학교가 문을 닫고 있는 것은 정부의 조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많은 학생과 선생들이 이미 체포되었고 또한 학생 대부분이 데모의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수업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부는 정상 상태의 면목을 유지하고, 한국에 평온이 깃들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휴교가 되지 않도록 부심했던 것이다. 이는 또한 대단히 심각한 상태인 것이, 정부가 이를 기화로 법정수업일수 미달을 이유로 들어 영원히 폐교 조치시킬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두 학교가 이미 이러한 취지의 경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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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 때문이라면, 관립학교들이 기독교 계통 학교들과 처지가 다를 바 없음을 감안할 때, 어색한 편법이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실제 수업이 없는 상태일지라도, 교사들의 출근으로 일과를 진행시킴으로써 ‘공식적’으로는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독립운동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에 의해 주로 지탱되는 듯 보이지만 절대로 이 두 계층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운동은 대중으로부터 직접적인 호응을 받았으며 사실 지방에 따라서는 기독교인 아닌 사람들은 참여했으나, 기독교인들은 불참한 곳도 있다. 이 운동은 신문에서 보도된 것처럼 일부 지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방방곡곡, 각계 각층에 퍼져 있다. 더군다나 지난 2주일 동안 나이 많은 선비들과 심지어 한·일합방 당시 친일업적의 공로를 인정받아 새로 귀족이 된 사람들까지 일본정부에 독립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가 즉각 체포되었다. 실제 탄원자 중 한 사람은 1866년 당시의 왕에게 일본과의 조약 체결과 아울러 서양(西洋)에 대한 문호 개방을 처음으로 탄원한 자로서, 지금까지 항상 친일파였으며 일본천황으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은 사람이다. 이러한 탄원서
제출은, 정부가 이 운동이 한국민 각계 각층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음을 부득이 인정하게 될 때까지 계속되리라 한다.
기독교인이 참여한 부분에 대해 언급하려면 확실한 소식통으로부터 입수한 한 보고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보고에 따르면 3월 1일의 데모 개최에 앞서 천도교측은 기독교측과의 협의에서 독립선언과 함께 필요하다면 폭력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으나, 기독교측 지도자들은 압박과 적폐의 시정과 함께 정부의 개혁실시를 탄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폭력의 사용은 반대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양측이 채택한 절충안은 독립의 선언과 폭력을 사용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 저명한 관리는 이제 곧 언급할 정부 관리들의 한 회의에서, 데모에 폭력의 요소가 없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참여 때문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혼란의 와중에서 한 가지 불가피한 부수 사건은 선교사들이 이 운동 전체를 선동하고 원조하고 있다는 비난이었다. 일본어 신문들은 이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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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랄한 기사로써 맹렬히 지지했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두 번째로 유력한 일본 신문에 실린 이같은 기사의 사본을 동봉한다. 서울 주재 미국 총영사는 당국에 이러한 기사에 대해 항의를 제기했으며, 위의 일본 신문 기사는 그후 공식으로 취소되었으나, 이에 못지 않은 중요 기사들이 전국에, 그리고 일본에까지 나타났다.
당국이 강력한 반외국(反外國) 감정, 특히 미국에 대한 반감을 자극하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아야겠다. 동양선교회 소속 영국인 목사 존 토머스 씨에 대한 행패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경찰과 군인들이 그를 때린 것은 그가 데모를 선동한 미국인으로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일부 선교사들을 구타하려고 한다는 보고가 있었으며, 사실 곤봉과 칼로 무장한 일본인 깡패들이 기마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 거리를 누비기도 했다. 이 깡패들은 한국인을 위협하여 난동을 촉진시킬 뿐만 아니라, 요즈음같이 혼란한 때에 당국이 눈감아 주는 틈을 타서 어떠한 음흉한 짓에도 가담하기 위해 끌어들인 자들이다.
일본 관리들은 한 신문 특파원과의 회견에서, 외국인에 관한 한 밤에는 담배에 불을 붙여가지고 다니면 어떤 일본인도 그를 선교사로 잘못 볼 우려가 없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홀드크로프트(Holdcroft) 씨는 밤중에 역으로 가던 도중 일본 깡패 2명에게 정지당한 후 국적, 직업, 행선지 등을 꼬치꼬치 심문 당했다.
중국 신문들, 특히 ≪북경타임즈(Times)≫·≪천진타임즈≫·≪노드차이나스타아(North China Star)≫ 및 ≪차이나프레스(China Press)≫등에서 일본 군인들의 만행에 대한 보도로 평양, 선천 및 그밖의 지방들의 선교사들이 목격한 것 들이 언급된 경우가 간혹 있었다. 이 중 어떤 것들은 선교사들을 일견 반일 선전에 관련시킬 수도 있는 인명, 시일, 지명을 넣은 것으로서, 발표되어서는 안 될 성질의 것들이었다.
이 자료는 선교부 이사회와는 관련이 없이 2주일 동안 한국에 머무르고 있는 북지나(北支那)의 어느 경솔한 선교사가 여러 개인들로부터 수집한 것들이다. 이 선교사는 이 자료의 대부분을 미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전달해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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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을 받고 입수한 것이었으나, 그는 국경을 넘자마자, 입수한 그대로를, 더구나 이름들을 꼭 밝혀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신문사에 넘겨 버렸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분개하고 있으며, 지금은 별 수 없지만 우리의 입장이 얼마나 난처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일본 당국의 선교사에 대한 악감정이 자극 될 지를 이해할 수 있다. 다행히 미국 총영사가 일본 당국에 압력을 가하여, 현지 신문들과 일본인들이 미국인들에 대한 비난을 더 이상 못하게 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 선교사들 중 누구도 행패를 당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조용히 집에서 지내며 시골 순회도 잘 하지 않고, 꼭 필요한 때 이외에는 밤중에 외출을 하지 않고 있다. 중국 신문들에 공표되었다고 위에서 밝힌 보도에 대해서는 당초 이런 식으로 세상에 알리려던 것은 아니며, 또한 중국에서도 발표될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은 현재 서울 주재 미국 총영사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선서구술서(宣誓口述書)를 받아 둔 실제 사건의 이야기를 다룬 신빙성이 있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 내 교회에 대한 이 운동의 궁극적인 영향은 전혀 의문스럽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의 노력이 실패하면 박해와 교회활동의 심한 억압까지 각오해야 함을 깨닫고, 세심히 주의하면서 이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기도할 때마다 이 문제를 빼놓지 않았으 며, 세계사의 현 시점에서 약소민족을 위해 시민의 자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종교적 자유의 확보를 위해 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도 하느님의 뜻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데모가 시작된 후, 한국 총회의 총회장(The Moderato of the Korean General Assembly)과 그 외의 지도자들이 체포되기 전에 그들에게서 직접 들었다. 관리들은 천도교에 대해서는 완전히 억압하고, 기독교 교회에 대해서는 현재 규모의 절반 정도로 줄이기로 할 작정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 현 군정부가 존속하고 현 독립운동이 와해할 경우, 앞으로의 전망은 암담할 것이 틀림없다. 한편, 한국민을 회유하려던 지난 9년 간의 행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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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실패로 끝났음을 감안할 때, 민사정부의 수립과 아울러 정부의 개혁이 도입되면, 예의 악착같은 반(反)기독교 행위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며 기껏해야 기독교 포교를 크게 제약할 것으로 예상해야 할 것이다. 데모에 대한 심한 억압은 교회 활동이 활발한 지역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음은 아주 명백한 일이다. 북부에 있는 많은 교회 [믿을 만한 보고에 의하면 15개]는 군인, 헌병 및 동원된 깡패들이 창문·기물·종·성경 등을 파괴했으며, 대량 체포가 있었던 많은 지방에서는 항상 기독교도들에 대한 차별대우가 있었다. 일본 정부는 기독교를 소동의 주요 요소로 여기고 있음이 명백하며, 그 전에 의심을 두었던 것이 맞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선교사업에 대한 이 운동의 영향도 마찬가지로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일본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선교사들이 이 소동과는 하등의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것으로 본다고 공언하면서도 피의자들 심문에 있어서는 선교 단체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묶어 두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정부의 선교사 관련 부인 공언은 선교사들과 일본 정부 관리들에게 다같이 놀라운 것이었다. 우리는 석방된 피의자들로부터 선교사의 관련 여부를 규명하려는 당국의 노력을 누누히 듣고 있다. 그러나 심문받는 한국인들은 한결같이 선교사들이 이 운동에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심문은 흔히 1912년의 ‘105인 음모 사건’때 행했던 그러한 정평있는 방법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태는 역시 심각하다. 평양의 모우리(Mowry) 씨가 그의 집 안에서 불온 문서 제작을 허용한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우리는 다만 그가 체포된 이면의 이유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모우리 씨가 번역하던 독립선언서 사본과 회람 신문들이 그의 집에서 발견되었거나, 혹은 그의 비서가 주인 몰래 데모 통지문을 인쇄하기 위해 등사기를 사용했었을 것이다. 그밖의 이유는 상상할 수 없다.
2명의 호주(濠洲) 여선교사가 체포되어 2일간 억류되었었다. 이들은 데모중인 여학생 들을 부르러 나갔다가 데모 가담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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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는 선교사 대표들과 관리들 사이에 적어도 3차례의 비공식 회합이 있었다. 첫 회합에서는 우좌미(宇佐美)가 일단의 선교사들을 초치하고 봉기의 원인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참석한 선교사들은 게일(Gale)·애비슨(Avison)·하아디(Hardy)·노블(Noble) 및 샤록크스(Sharrocks) 등 5명의 박사와 번하이슬(Bernheisel)·벙커(Bunker)·저딘(Gerdine)·휴우 밀러(Hugh Miller) 씨 등이었다.
이 회합에서 대단히 솔직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특히 다년간 한결같이 친일파이던 게일 박사가 군사정부의 실패를 규탄하면서 솔직히 말했다. 그는 우좌미에게 한국민은 지난 9년 간 공포의 통치 밑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제2, 제3차 회합에는 도변(渡邊) 판사, 관옥(關屋)·단우(丹羽) ≪경성일보≫의 산형(山形)과 이 밖에 몇 명의 일본인들이 참석했고, 위의 선교사 대부분이 참석한 이외에 모페트(Moffett) 박사·휘트모어(Whittemore)·웰치(Welch) 감독, 그리고 3차 회합 때는 에그버트 스미드(Egbert Smith) 박사가 참석했다.
일본 측 입장의 요지는 이미 명백히 밝힌 것처럼 선교사들이 정부에 협력, 봉기를 진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웰치 감독이 선교사들 간의 사전 동의에 따라 답변하면서, 절대적 중립만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첫째, 우리가 독립 운동을 중지시키려 해도 쓸데 없을 것이다. 둘째, 그들로부터 분개를 사서 우리의 영향력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세째, 우리의 본국 정부가 그것을 금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측은 특히 반관반민의 ≪경성일보≫를 통해 선교사들은 위와 같은, 이론상으로는 옳은 입장을 버리고 진정한 협력을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계속 촉구했다. 우리는 이 미묘한 입장의 어려움을 지적하지 않아도 잘 알 것으로 믿는다. 이 회합에서 잔혹행위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모페트 박사는 목격자로서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털어 놓았다. ≪경성일보≫의 편집인 산형(山形)은 모페트 박사와의 개인적인 대화에서는 만행의 사실을 쾌히 시인했으나, 신문에 발표된 부인 논평은 공식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관옥(關屋)은 애비슨 박사와 웰치 감독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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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중 봉기 진압을 위해 현재의 ‘관대한’ 방법은 가까운 장래에 극단적인 조처로 바꾸어지게 될 것이라고 확약했다. 웰치 박사는 이에 관해 피를 많이 보게 되면 그만큼 일본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동정은 멀어져 갈 것이라고 말했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비공식 회합을 계속 가져보았자 자신들의 입장만 더 곤란하게 될 우려가 있고 아무런 이익도 없을 것으로 느끼고 있다.
독립운동의 성공 여부에 대해 개인적으로 판단한다면,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외부로부터의 국제 간섭[현재와 같은 세계 정세 하에서는 거의 생각할 수 없지만]이 없다면, 행정 개혁 또는 앞으로 기껏해야 어떤 자치 조처나 부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본은 완전히 개심(改心)하고, 일본 내 군국주의파가 타도되지 않는 한, 거의 자치는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봉기는 완전히 실패하여 소득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실망이다. 우리는 정치에 개입할 생각이 추호도 없으며, 또한 혁명적인 동요 계획에 고의로 가담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위해 감싸줄 수 없으나, 무장하지 않은 무저항의 사람들이 야만적인 취급을 받으며, 심지어 무차별 발포를 당하며, 게다가 이러한 것이 전국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수수방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미칠 지경인 것이다.
우리가 장래를 내다볼 때, 행정개혁이 부여될 경우, 한국에서 진정한 신앙의 자유가 확보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모든 압력을 적절한 방면에 가해야 한다는 것은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알고 있겠지만, 과거에는 기독교 포교 또는 사립학교에서의 기독교 교육에 있어 그러한 자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증거문서 Ⅲ
한국 내 일본 신문이 이 사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보이기 위해, 조선신문(朝鮮新聞)의 최근호에 실린 한 기사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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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마음이 동요되는 것은 미국 선교사들 때문이다. 이 봉기는 그들의 소행이다. 봉기가 일어난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선교사 2, 3명이 체포되어 심문받고 있다. 선교사들 중에는 천박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 이들이 한국인들의 마음을 악하게 하고, 민주주의 씨를 심는다. 그래서 30만 한국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일본과 한국의 합방을 좋아하지 않고 자유를 찾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이 선교사들은 옛 한국인들에게 대하였듯이 현재의 한국인들을 대하고 있으며, 한국인이 기독교학교에 들어오기만 하면 마음대로 아무 말이라도 해도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들은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윌슨의 말을 받아들여 그들의 신앙 뒤에 숨어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완전히 개화하지 못한 이들 한국민족에게 다른 나라들의 관습을 적용하려고 애써 왔다. 기독교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조차 가담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봉기는 선교사들로부터 나온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이러한 봉기 이면에 마술 지팡이를 흔드는 도깨비같은 자태를 볼 수 있다. 이 도깨비는 진실로 가증스럽고 악의에 차고 사납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이 도깨비는 누구일까?
그것은 선교사들과 천도교의 우두머리들이다.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왔다. 이들은 연봉 3백 원(圓)[1백 50달러]이라는 헐값에 자신들을 팔아, 파충류처럼 배로 기어 한국까지 스며들었다. 이 자들의 지식, 인격 및 성품은 이를 만한 것이 조금도 없다.
이들 하느님의 심부름군들은 돈만을 탐하며, 배불리 잔뜩 먹고 집에 앉아 있다. 세상의 모든 악은 바로 이러한 쓰레기들로부터 나온다. 이들은 이 더러운 일을 계획하여 천도교와 손을 잡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이들 선교사는 모두 가증스러운 짐승이다.
왜 신문에 사과문을 내지 않을까?
존 토머스란 자가 심한 폭행을 당했다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 그들은 그가 야수적이라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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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문서 Ⅳ
○○○의 진술
1919년 3월 2일 밤과 3일 새벽, 함흥시에 데모가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많은 학생과 기독교 학교의 한 선생이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3월 3일인 월요일, 경찰은 상점 문을 닫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하며,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큰 길거리에 모이게 되었다. 군중 중의 한 사람이 나팔을 불자 이들은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시내 여러 학교의 학생들이 참가했으며, 이중 많은 학생이 체포되었다. 이날 일본 소방대원들은 소방용 갈구리창을 가지고 나왔으나 중상자는 없었다.
3월 4일, 낮 12시 30분 경 한국인들은 또 만세를 드높이 불렀으며, 이 소리를 듣고 일본 소방대가 출동했는데 곤봉·고깽이 자루·긴 갈구리창·철봉·자루가 짧은 곤봉, 갈구리 등으로 무장했었다. 이들은 군중 속으로 뛰어 들어 닥치는대로 곤봉으로 머리를 때리고 갈구리창으로 찍어 잡아 당겨 잠시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어 얼굴에 피가 흘러 내리는 채 소방대에 의해 경찰서로 끌려 갔다.
중상자 중에는 한국인 경찰관의 동생인 최규세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매우 심한 부상을 입어 울고 있었으며, 머리는 왼편에 입은 심한 상처 때문에 한쪽으로 기울었으며, 얼굴에는 피가 흘러 내렸다. 이 학생은 2, 3일간 중태로 있다가 집에 돌려 보내졌다.
한 사람은 일본 소방대원 2명에게 끌리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머리 위에는 난폭하게 맞은 자리가 났으며, 얼굴은 왼쪽을 심하게 얻어맞아 제 형상이 아니고 상처로부터 피가 줄줄 흘렀다. 또한 왼쪽 다리를 몹시 절었으며, 그도 역시 고통으로 신음했다. 이 사람은 나이 50여 세 되는 기독교인이다. 병원에서 며칠간 치료받은 후, 경찰은 기소 없이 그를 석방했다. 그의 이름은 최학성이다.
경찰에 연행된 또 한 사람의 중상자 중에는 이름이 박이진이라는 기독교 계통이 아닌 학교의 학생이 있었다. 그는 두개골을 몹시 다쳐 2, 3일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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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게 될 형편이 되어 친구의 집으로 보내졌다. 이 날 적어도 7명의 한국인 남자와 많은 여자들이 상처를 입은 비참한 상태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동안 경찰과 헌병은 체포에 가담하는 것 같지 않았으나, 소방대가 한국인들을 곤봉으로 때리고 체포할 때 그들을 지켜 보고만 있었다.
목격한 바로는, 한국인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을 들보기 위해 몽둥이 하나, 돌 하나 집지 않았고 일본인들에게 욕설 한 마디 하지 않았다.
3월 6일 함흥의 상점들은 여전히 닫쳐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와 있었다. 소 시장 부근에서 또 만세가 일어났으며, 이를 듣고 일본 소방대가 또 곤봉을 들고 출동했다. 많은 사람이 얻어맞고 체포되었는데, 이 중에는 변응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뒷머리를 곤봉으로 얻어맞은 후, 경찰서로 끌려갔는데 숨진 것같이 보였었다. 심지어 이 때에는 돌이나, 몽둥이를 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욕설 한 마디 들어볼 수 없었다. 변 씨는 2, 3일 후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아무런 보상조처도 없었다.
믿을만한 정보에 의하면 그후 2, 3일 뒤 함흥에서 약 16킬로 떨어진 곳에 장보러 왔던 사람들이 함흥에서처럼 만세를 불렀는데, 이들은 경찰의 방해를 받지 않았으며, 만세 부르기가 끝난 후, 경찰관이 그들에게 친절히 몇마디 말하자 모두 집에 돌아갔다 한다.
또한 3월 13일 신흥(新興)에서도 장날을 맞아 만세를 불렀다 하는데, 경찰은 이 무방비한 군중에게 발포하여 4명이 죽고 4명이 부상했다. 사상자 중에는 마침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지나다가 변을 당한 여자도 있었다. 피살자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보자, 한국인들은 헌병들에게 돌을 던졌다. 함흥 부근의 선덕(宣德)에서는 4명이 피살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즈음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는데, 이 중에는 다수의 유력한 기독교인도 끼어 있었다. 이상은 함흥과 함흥 부근 지방에서 1일부터 15일까지 일어난 사건을 요약한 것이다.
위에 말한 증언 중, 3월 4일의 사건은 내가 목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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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문서 Ⅴ
만행에 관한 증언
원문 서명자__________
수안읍(遂安邑)에서
3월 들어 처음 며칠 동안 데모가 일고 있을 때, 2, 3백 명이 황해도(黃海道) 수안읍에 있는 헌병분견대를 찾아가 한국이 독립을 선언했으니 떠나가라고 말했다. 헌병들은 한국이 독립을 성취했다면 물론 떠나갈 것이라고 대답하고, 그러나 떠나기 전에 서울로부터 떠나라는 명령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군중은 이 말을 듣고 만족하여 가버렸다. 두 시간 뒤에, 또 군중이 몰려와 같은 요구를 했다. 이번에는 헌병들이 그들에게 발포하여 5명을 사살했다. 그 외 많은 사람들이 부상하고 투옥되었다. 그 후, 한 노인이 헌병대로 찾아가 한국인들에게 자행한 처사에 항의했다. 헌병들은 이 노인도 쏘아 죽였다. 노인의 부인이 찾아와서 남편의 시체를 보자 그 옆에 주저앉아 한국의 관습에 따라 울부짖었다. 이 여인은 조용히 하라는 말을 듣지 않고 통곡하다가 역시 죽음을 당했다. 그날인지 다음날 아침인지, 이 부부의 딸도 헌병대에 갔으나 칼에 맞아 죽었다.
감옥에 갇힌 부상자들은 2일간 있는 동안 약간의 밥은 받았으나, 물은 조금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 목이 타서 자신들의 오줌을 마셨다 한다. 2일 후 헌병들로부터 석방된 이들 중 일부는 덜미장((Tulmichang)에 있는 수안광산회사 병원에 있게 되었다. 이들의 상처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괴저(壞疽)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종아리의 심한 상처가 괴저성이 되었다. 한 사람은 부상당한 후 잘 돌보지 않아, 썩어 들어가 팔 하나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병원에 이송되어 온 가운데, 한 사람은 39세 정도였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60세가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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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산(孟山)에서
이곳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부른 후, 3월 초순, 헌병들은 56명에게 헌병분견대에 출두하라고 통고하여, 이들은 이에 응했다. 56명이 모두 헌병분견대 구내에 모이자 모두 문을 잠그고, 헌병들은 울타리 벽에 올라가서 사격을 가했다. 사격을 가한 후, 내려 와서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을 총검으로 살해했다. 이리하여 56명 중, 후에 시체더미에서 기어 나올 수 있었던 3명을 제외한 53명이 학살당한 것이다. 이 세 생존자가 아직 살아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신뢰하는 한 여 기독교인이 며칠간의 여행 끝에 외국인 친지를 찾아가 위와 같은 사실을 밝혔으며,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안주(安州)에서
주민들이 3월 1일 밤 독립만세를 불렀어도 폭력은 사용하지 않았는데 경찰과 헌병은 이들에게 발포하여 7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부상자들은 이곳 병원에 입원했다. 경찰은 후에 데모에 참가했던 모든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시내의 모든 집들을 수색했다. 데모한 자들을 쉽게 찾지 못하자, 여인들을 때리고 머리채를 끌어 당기기 일쑤였다. 한 여자는 이 일곱 개가 부러졌다. 한 부상자의 모친은 경찰관에게 아들이 죽으면 복수하겠다고 말하자, 이 경찰은 이 여자의 집에 가서, 마루에 누워있는 그녀의 아들을 다시 찔렀다. 사람들이 이를 읍장한테 항의하자, 읍장은 경찰이 잘못했다고 시인했으며, 이빨이 부러진 여인은 가해자가 누구인지를 밝힐 수 있었다.
반석(盤石)에서
나는 1919년 3월 29일인 오늘, 평양 동쪽 26킬로 떨어진 반석 마을을 찾아갔다. 여기 50여 채의 집이 있는 한쪽편에 교회와 학교가 붙어 있었다. 3월 7일 여기서도 독립운동 데모가 있었다. 군인들이 달려 와서 종루를 뒤집어 엎고 종을 파괴했다. 이들은 종추(鍾槌)로 창문의 유리들을 깨어 버렸다. 이들은 등잔, 설교대 등도 부수고 성경과 찬송가 책도 모두 찢었다. 남자 5명과 여자 1명이 옷을 벗기운 채, 총대와 곤봉으로 구타당했다. 한 남자는 성냥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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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져 화상을 입었다. 이들은 학교 선생 집을 부수고 들어가 선생의 옷장을 때려 부수고 옷은 태워 버렸다. 몇 명은 체포되었으며, 50~60세 사이의 한 남자는 평양까지 끌려가 3월 26일경 숨질 때까지 구타당했다. 3월 24일 군인들이 마을 부근까지 와서 교회 장로 중의 한 사람을 찾았다. 찾아내지 못하자 이들은 30여 세 되는 그의 미모의 부인과 두 살 먹은 어린애까지 데리고 부근에 있는 숲으로 끌고가서 남편이 어디 갔는지 알아 내려고 갖은 방법을 썼다. 그러나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 알려 주려고 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으니까. 이들은 그녀를 발가벗기고, 사정없이 때렸다. 나는 오늘 이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여인은 그 날의 구타 때문에 여직 몸이 부자유스러웠다.
강서(Keng Syo)에서
1919년 3월 30일(일요일), _______목사와 _______양은 강서(江西)로 갔다. 이들은 ‘아주 비참한 상태’를 보았다고 말했다. 신도들은 이날 오후 선교사들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전 11시에 주일학교는 열렸다. 약 25명이 기도하고 있을 때, 군인들이 총대로 유리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 교회지기를 때리고 남자 4명과 여자 3명을 끌고 갔다. 끌려간 이들 중에는 교회 임원은 한 명도 없었다. 교역자들은 이미 모두 끌려 갔거나, 도망간 지 오래다.
증거문서 Ⅵ
…………의 진술
1919년 3월 19일(수요일), 나는 강경(江景)에 있는 우리의 한국인 목사에게, 동양선교회 재산을 둘러보러 다음 날 그 곳으로 내려간다는 전보를 쳤다. 나는 한국 주재 동양선교회 감독이다.
다음 날인 20일(목요일), 나는 일본어에 능통한 한국인 조수와 함께 오후 3시쯤 강경에 도착했다. 그곳 목사는 이미 경찰에 나의 방문을 통고해 놓았었다. 우리는 일본 여관에서 차를 마신 후, 6시 30분에 저녁을 먹는다고 알렸다. 나는 4시쯤 목사의 집과 교회를 둘러보고 잔소리를 좀 하려고 서 있을 때, 5, 6명의 소년들이 만세를 외치면서 언덕을 뛰어 내려와 깃발을 흔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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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이 일을 잊고 있었는데, 2, 3분 뒤에 총을 든 4명의 군인이 경찰관 몇 명과 함께 우리에게 급히 다가왔다. 이들은 우리들을 붙들고 사정없이 때리고 차면서, 아무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우리를 경찰서로 연행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나는 나를 연행하던 경찰관에게 나의 여권과 이달 17일 서울 경찰이 발행한 증명서를 제시했으나 거들떠 보지도 않고 땅에 팽개쳤다. 나는 그것을 다시 주우려 했으나 머리를 얻어 맞고, 발길질당했다. 많은 일본인과 한국인들이 구경했었는데, 이 중 일본인 한 명이 군중 속에서 나오더니, 남자 팔뚝만큼이나 굵고 긴 몽둥이로 나를 때렸다.
나의 두 한국인 조수도 무참히 구타당했는데, 한 명은 얼굴을 맞아 피가 흘러 내렸다.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경찰이 이 두 한국인을 또 치며 차는 것을 보았다. 나 혼자 방으로 끌려갔다. 나는 경찰관인 듯한 한국인에게 항의하면서 나의 여권을 찾아 달라고 부탁했더니, 5시 30분께 가져다 주었다. 그러고나서 일본인 경찰서장이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인 경찰을 통해 그에게 말을 건넸다. 서장은 나에게 여러가지를 물은 뒤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숙소로 돌아가라고 했으나, 바깥에는 아직 군중이 있어 거절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밖에 나와 있을 때, 옆으로 뛰어 지나간 소년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인 경찰이 그 5명의 소년들을 심문해 본 결과 외국인이 이곳에 온 줄도 몰랐다고 말했다 한다.
8시 15분, 여관에서 가져온 가방에서 먹을 것을 좀 꺼내 먹었는데, 서장이 미안하다고 다시 사과하면서 자기들이 잘못했다고 했다.
그는 일본어로 된 두 장의 서류를 가져와서, 서명하라고 했다. 나는 무슨 서류인지 몰라서 거절했다. 이미 서류에 서명을 한 한국인 조수들이 와서, 서명하면 금방 석방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서명하라고 말했다. 나는 15분 동안이나 서명할 것을 독촉 받았으나, 끝내 거절했다. 그리곤 기차가 떠나는 시각이 8시 40분이어서, 우리는 경찰이 보낸 인력거 2대에 타고 두 경관의 호위를 받으며 정거장에 도착, 대전(大田)행 기차를 탔다. 나는 대전에서 일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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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문서 Ⅶ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한국인 부상자들의 진술
1919년 3월 29일 하기(下記)의 사람들과 면담.
(1) 이인옥. 19세, 학생, 안주 사람. 이 학생은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 3월 2일 이 인옥은 많은 학생들과 어울려 4천여 명의 군중과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를 부르며 헌병분견대까지 접근했을때, 7명의 헌병이 나와서 군중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이 발포로 8명이 죽고 20명이 부상했다. 군중은 폭력을 쓰지 않았으며, 돌·몽둥이·무기 등을 휴대하지 않았으나, 발포가 있자 흩어졌다. 이 학생은 이곳 한국인 병원에 갔으나, 대충 치료를 받은 후,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으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 거기 가면 만족할 만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몸에 박힌 총알도 빼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학생은 3월 5일 서울에 도착한 즉시 병원에 입원하여 레지던트들로부터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았다. 그는 종교적 신앙을 전혀 가지지 않았다.
(2) 노종연. 61세, 농부, 안주읍 사람. 이 사람은 안주읍 외관에 살고 있었는데, 위의 학생과 같은 데모에 참가했다가 오른쪽 발에 총상을 입고 이 곳 병원에 왔다. 별도로 물어 보았으나, 증언 내용은 위의 학생의 것과 부합했다. 왜 평양 병원으로 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거기 일본 사람들이 자기를 체포하여 더 해를 가할 것이 두려워 서울로 왔다는 것이다. 이 사람도 이렇다 할 종교적 신앙이 없었으며, 한국 또는 외국인 교회에 다니지도 않았다. 그는 3월 5일 이 병원에 와서 곧 치료를 받았다.
(3) 김남산. 27세, 파주(坡州) 사람. 그는 자기 마을에서 많은 이웃사람들과 함께 장이 서는 공웅으로 갔다. 장날인 이날 1천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얼마 안되어 일본인 헌병 6명과 한국인 헌병 2명이 나타났다. 일본 헌병들은 소총만을 휴대하였다. 군중이 계속 만세를 부르자 일본 헌병들이 여러 번 총을 쏘았다. 그가 아는 한, 이 발포로 4명이 죽고, 3명이 부상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망갈 때, 어깨에 총알을 맞아 넘어졌다. 한국인들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무기·몽둥이 또는 돌을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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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 교회 등에 다니지 않았다.
(4) 고면만. 25세, 황해도 사람. 3월 23일 군청(郡廳)에 가서 수백 명의 군중에 끼어 군청 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를 듣고 헌병과 경찰이 곤봉·칼 및 총을 들고 나왔다. 이들은 군중에게 달려 들어 곤봉과 칼로 많은 사람들을 때려 넘어뜨리고 총도 쏘아, 적어도 3명이 죽고 20여 명이 부상했다. 그러자 군중은 흩어졌다. 이 사람은 일본 병원에 가는 것을 거부하여 그곳 한국인 병원에 갔으나, 의사는 그에게 거의 치료해 줄 수 없으니 세브란스병원으로 가라고 권했다. 그는 3월 24일 세브란스로 와서 곧 입원, 지금 회복 중에 있다. 그는 다리 윗부분에 총상을 입었었다. 그도 신앙이 없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5) 이돌사. 23세, 덕산 사람. 저녁때, 약 3백 명의 부락민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이웃을 돌아다녔다. 이들은 헌병대에 당도하여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며 서 있었으나 폭력은 없었다. 헌병들은 한국인 통역을 통해 해산하라고 했다. 이러한 해산 종용이 있을 동안 5, 6킬로 떨어진 서울로부터 다수의 헌병을 실은 차들이 도착하여 15명 정도의 헌병이 내리더니, 군중에게 발포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알고 있는 한, 1명이 죽고 12명이 부상했다. 이 사람은 발에 부상을 입고 찾아 왔다. 그는 일부 한국인 헌병들이 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도 총을 쏘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군중은 모두 노동자 계급이었다. 그는 병원에 온 후, 다음 날인 3월 26일 치료를 받았다. 이 사람도 교회와는 관련이 없다.
(6) 이개동. 27세, 덕산 부락민. 다른 병동에 수용된 사람이나, 위 사람의 진술을 확인했다. 그는 다리에 총을 맞고 찾아왔다.
(7) 염덕창. 35세, 역시 덕산 사람. 비슷한 증언을 했다. 팔과 옆구리에 부상당했다. 무종교.
(8) 송영박. 21세, 같은 마을 사람. 윗입술에 총상을 입었다. 역시 위의 진술들을 확인했다. 무종교.
(9) 강용예. 36세, 역시 덕산 사람. 가까이서 총을 맞아 중상으로 다리가 으깨졌다. 위와 같은 진술을 했다. 무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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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머리에 중상을 입은 남자. 혼수 상태에 빠져 누워 있다. 사건을 진술할 수 없었다.
(11) 차오견. 36세, 서울에서 13, 14킬로 떨어진 고양(高陽) 사람. 왼쪽 아래 다리에 부상. 마을의 가게들은 독립운동에 동조하여 문을 닫았으나, 그 곳 일본 헌병들은 문을 열라고 맹렬했다. 주민들은 이를 거절했으며, 다음 날 약 70명의 소년을 포함한 어른들이 마을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곳 헌병인 한국인 1명과 일본인 1명이 나왔는데, 일본 헌병이 발포했다. 차 씨는 총에 맞았으며, 다른 사람들은 도망갔다.
한국인들은 폭력을 쓰지 않았다. 돌이나 몽둥이를 가지지도 않았고, 태극기 한 두 장만을 가졌었다. 그곳 헌병들은 그전에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일시 천도교 집회에는 다닌 일이 있으나, 교회에는 다니지 않았다. 3월 28일 병원에 와서, 즉시 치료를 받았다.
(12) 안동안. 54세, 고양군 사람. 칼인지 칼집으로 맞아 넘어지자 곤봉으로 또 맞았다. 그는 5백여 명이 이웃에 모여 행진을 한 후 헌병대 밖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많은 사복차림을 한 일본 헌병이 군중 속에 끼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으며, 얼마 안 되어 5명의 기마 경찰, 총을 가진 5명의 헌병, 그리고, 20명의 사복 경찰관이 군중을 덮쳤다. 이에 앞서, 헌병 장교가 권총을 꺼내 들고 위협하면서 해산을 명했으나 군중은 권총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고 대꾸했다. 한국인들은 폭력을 사용치 않았으며, 몽둥이나 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3월 28일 병원에 와서, 곧 치료를 받았다. 무종교.
(13) 김광은. 72세, 안악(安岳) 사람. 온장 시장에 갔다가 거기서 5, 6백명의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헌병 우두머리가 몇 명을 때리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해산을 종용했다. 군중은 이를 보자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왜 사람을 치느냐고 힐난하며, 헌병 분견대에 갇혀 있는 몇 사람의 석방을 요구했다. 군중이 해산하지 않으려 하자, 일본인과 한국인 헌병 각각 2명이 나와 발포하여 3명이 죽고 아마 20여 명이 부상했다. 이에 분격한 한국인들은 헌병대에 투석했으며 헌병들은 울타리 뒤에서 계속 총을 쏘았다. 이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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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에 총을 맞았다. 그는 서울로 오려다가, 진남포(鎭南浦)에서 체포되어 손이 묶인 채 구타당하였으며, 누가 세브란스병원으로 가라고 말했는지 대라는 심문을 받았다. 이런 고초는 재령(載寧)읍에서도 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 병원으로 가라고 말했지만 그가 겁내지 않자 놓아 주었다. 그는 서울에 와서 곧 도움을 받았다.
그는 장로교 신자이다.
(14) 송연복. 21세, 덕산 사람. 얼굴에 총을 맞았으며 광대뼈에서 파편을 뽑아냈다. 덕산서 온 다른 사람들과 같은 진술을 했다.
(15) 구낙소. 처참히 수족이 절단된 상태로 입원한 후, 2, 3시간 만에 사망하여 진술을 받지 못했다.
(16) 이남기. 22세, 파주(坡州). 곤봉으로 너무 지독하게 얻어맞아 의식을 잃어, 어떻게 이렇게 얻어 맞았는지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3월 29일 [토요일] 입원, 다음날 [일요일] 하오 1시 사망.
……………가 진술을 청취했음
(17) 성용. 16세, 혐성리 강 부근에 산다. 3월 23일 밤 10시 이 소년은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가 ‘만세’를 불렀다. 약 20명의 군인이 이들을 해산시키려 출동했다. 군중 대부분이 흩어졌다. 이 소년은 뒤에 처져 있다가 앞서 달려온 군인의 총검으로 상처를 입었다. 이어 두번째 군인이 달려와서 소년의 배에 총검을 찔렀다. 상처의 길이는 배 오른쪽 10센티미터 내지 12.5센티미터였다. 소년은 훈상(Huunsang)학교의 3학년 학생이었다. 그의 할머니는 장로교회에 다니는 신자였다. 소년은 두 세 번 다녀 본 일이 있으나 어머니는 신자가 아니다.
(18) 이한돌. 32세. 서울 동소문 내의 세기문안에서 부상. 3월 22일 경 수백 명이 방망이나 돌도 가지지 않고 나와서 만세를 불렀다. 군인들이 나와서 그들에게 총을 쏘았다. 그는 눈에 한 방 맞아 아마 실명하게 될 것 같다.
(19) 이선명. 33세, 정미소 일군. 무장 안한 5백여 명과 함께 덕음에서 나와 ‘만세’를 불렀다. 4명의 헌병이 현장에 나와 발포하여 1명이 죽고 8명이 부상했는데, 이 씨는 이 8명중 한 사람이며, 이들중 기독교인 또는 천도교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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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도 없었다. 그는 총 한 발이 양 다리를 꿰뚫은 상처를 입었다.
(20) 정영회. 34세, 파주군 사람. 3월 28일 오후 1시, 4백여 명이 ‘만세’를 불렀다. 출동한 일본 헌병들이 발포, 8명이 죽었다. 군중은 폭력을 쓰지 않았고 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정 씨는 목에 관통상을 입었다.
(21) 유영건. 42세, 서울에서 65리 떨어진 파주군 신산리(新山里) 장로교회의 간부. 천여 명의 군중이 맨손으로 ‘만세’를 부르러 나갔다. 그는, 뛰어 따라 오던 일본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목 옆이 관통되었다. 이 사건에서 3명이 죽고 3명이 부상.
(22) 구천면. 34세, 농부. 3월 27일 하오 1시, 5, 6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광주읍(廣州邑)에 나왔다.
이 사람은 헌병들이 쏜 총에 턱을 맞아 턱뼈의 상당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3명이 죽고, 3명이 부상.
 
출처 :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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