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자료

[스크랩] 독립운동과 기독교인의 활동(2)

baromi 2008. 7. 5. 20:10
증거문서 Ⅷ
1919년 4월 1일 부터 5일 사이의 면담
(1) 송시웅. 47세, 포천(抱川). 앞서의 사람과 같은 진술을 했다. [(16 참조)] 이 사람은 두개골 정수리에 총을 맞아, 루들로우(Ludlow) 박사의 집도로 탄환을 적출. 무종교.
(2) 성명니. 32세, 덕산. 다리에 총탄을 맞아 루들로우 박사로부터 수술을 받았다. 제 정신이 아니어서 자세한 것을 조사할 수는 없다. 독립만세에 참가. 무종교.
(3) 산선난. 27세, 포천군 산면 선달리. 장날 솔무장에 갔다가 2백여명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헌병들이 나와 사람들에게 만세부르는 시장 속으로 들어 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군중은 이 경고를 무시했다. 군중은 몽둥이나 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폭력을 쓰지 않았다. 한국인 헌병들은 공중에 대고 발포했으나, 일본 헌병들은 군중에게 총을 쏘았다. 9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했다. 이 사람은 다리에 총을 맞았으나 몰래 세브란스병원까지 왔다. 무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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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박연낙. 25세, 고양군 지도면(知道面) 토당리(土堂里), 사면교회 교인. 3월말 자기 부락 및 다른 부락 사람들과 만나, 질서있게 마을을 돌며 ‘만세’를 불렀다. 이 사건이 있자, 서울에서 몇 명의 기마헌병이 와서 만세 부르기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주민들은 이 말을 받아들여 그 날은 폭력 또는 충돌이 없었다. 5일 후 많은 헌병들이 서울에서 내려와서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지난 번 만세를 부른 사람이 있는가고 물었다. 이 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그러나 그만 두라고 했기 때문에 만세를 중지하고 집에 돌아갔다고 해명했다. 박 씨와 이 밖에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총독의 관저에서[형무소가 아니라 했다] 그와 많은 다른 사람들이 끌려 나가 태형(笞刑)을 받았다. 그의 몸은 멍이 들어 있었다. 그는 12시와 2시에 각각 30대씩 60대의 매를 맞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와같은 벌을 받았다. 그는 지금 병원에서 치료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 3명의 젊은이들은 똑같은 증언을 했다.
(5) 정흥봉. 16세
(6) 이천세. 21세
(7) 장우상. 24세
(8) 박차권. 41세, 이천읍(利川邑). 박씨는 이정문, 읍내면 방고리 사람과 함께 4월 3일 병원에 도착했다. 목에 심한 총상을 입은 박 씨는 즉시 손을 써 목숨은 구했다. 그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장날 만세를 불렀다. 많은 군중이 모였으나 폭력은 없었다. 이들은 저녁때 일본 헌병들의 습격을 받아 많은 사람이 죽거나 부상했다. 박 씨의 목은 대단한 상처를 입어 말하기 불편하여, 더 증언할 수 없었다.
(9) 김금동. 15세. [서양식으로 13세], 충청도(忠淸道). 아버지의 등에 업혀 병원에 왔다. 종아리와 앞팔에 관통상을 입었는데, 그의 아버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부락민들이 예정된대로 4월 1일 저녁에 나와서 만세를 불렀다. 자정에 봉우리마다 봉화가 올랐으며, 만세 소리가 계속되었으나 폭력은 사용되지 않았다. 당장 8명의 일본 헌병들이 나타나 20명의 남자와 소년들에게 총질을 하여 1명이 죽고 13명이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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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방춘호. 25세, 위의 김금동과 같은 마을. 다리에 부상했는데 위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그의 동생 방신식, 21세. 다리와 팔 등 여러 곳에 총을 맞았고, 그의 큰 형은 사망했다.
(11) 박승군. 44세, 위와 같은 마을. 발포사건에 대해 같은 증언을 했다. 이 사람은 B.B총탄을 여러 군데 맞았다.
(12) 이복연. 26세, 수원(水原). 3월 말일, 인근에서 모여든 3백 내지 3백 50명의 부락민들에 끼어 면사무소에 당도하기까지 여러 마을을 행진했다. 면장도 이 대열에 끼어, 함께 주재소로 갔다. 한국인 주재소 주임이 나와, “나는 공무원인 경찰관으로서 경찰복을 입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과 같이 행동할 수 없으나, 마음만은 여러분과 같소. 어서 만세를 부르시오. 나도 독립이 되기 바라오.”라고 말했다. 군중이 좀더 나아갔을 때, 갑자기 일본 군인 3명이 접근하여 발포, 2명이 부상하여 쓰러졌다. 나머지 데모 대원들은 달아나다가 이웃 사람 2명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40~50명이 되돌아왔다. 이들은 곧 협박을 받고, 체포되어, 한데 묶여, 수원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들은 서에서 2일 동안 감금되어, 몸 수색과 심문을 받고 50대 내지 90대씩의 태형을 받은 뒤 풀려났다. 두 부상자도 집으로 돌려 보냈다. 한편 일본인 의사가 부상자들을 돌보며, 이복연 씨의 총알 박힌 다리를 탈지면으로 묶었다. 그는 4월 4일 세브란스병원으로 왔다. 그는 군중이 폭력은 쓰지 않고, 다만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만을 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증거문서 Ⅸ
구낙서라는 한국 청년의 죽음
3월 27일 하오 9시 경, 안동(安東)과 서울에서는 많은 청년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만세가 2, 3분 계속되었을 때, 대병력의 경찰·헌병 및 군인들이 도착하여 해산시켰다. 구낙서 청년은 다른 사람들처럼 혼자 마음 놓고 집으로 가면서 골목길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가 등을 난폭히 밀어,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그를 습격한 자는 군중 속에 있던, 그를 눈여겨 두었다가 미행하면서 적당한 공격 장소를 찾던 한 경찰관이었다. 경찰관은 청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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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뜨린 후, 칼을 뽑아 ‘나무군이 참나무 장작 패듯’ 문자 그대로 그를 패어 두개골이 터져 뇌가 보이게 되었다. 이것은 적어도 칼로 같은 장소를 세 번 내리쳐 생긴 것이다. 그의 양손은 무참히 잘리고 왼쪽 손목은 뼈가 드러났다. 시체를 본 사람들은 칼을 스무번 친 자국이 있다고 말했으나 사진에는 열 군데만이 나타났다.
경찰관은 이 무방비한 젊은이를 이같이 잔인하게 공격한 후, 그대로 달아났다. 죽어가는 청년을 그대로 버려둔 채 지나가던 한국인들이 가까운 한국병원[국제병원]에 운반해 갔으나, 별수가 없어서, 들것에 들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떠났다. 행여 목숨은 구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세브란스병원으로 급히 가던 도중 본정(本町)파출소의 한 경찰관에게 제지되었다. 이 경찰은 갖은 협박을 다하면서 환자를 외국인병원에 못데려 가도록 했다. 한국인들은 환자가 너무 중상이기 때문에 좀 거리가 떨어진 일본 병원으로 데려 가면 그만큼 지연되어 치명적이 될 것이라고 사정했다. 일본 관헌은 이러한 환자들을 외국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쓴 것은 물론이다. 세브란스병원에 당도하자 마자, 진찰한 결과, 이미 죽어 있다는 것이었다. 청년이 언제 숨졌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시체는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와 손은 무수히 칼에 찔려 절단되어 있었으며, 옷은 피로 온통 물들었다. 실로 잊혀지지 못할 광경이었다.
다음 날, 기독교 학교에 다니는 그의 사촌 여동생은 시체실에서 오빠의 시체를 지켜보며 떠날 줄 몰랐다. 아무리 타일러도 유해를 떠나려 하지 않았다.
한국의 자유를 위하여 또 하나의 목숨이 희생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참상을 보는 위대한 하느님이 머지 않아 오셔서, 의와 정의로 판단하시기를 바란다.’
[주(註)] 지금까지의 사망자 수는 약 1천 명으로 추산된다. 한국민은 한 자루의 총이나 칼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맨손을 쳐들어 하느님과 의와 정의를 아는 자들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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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문서 Ⅹ
세브란스병원으로부터의 부상자 이송에 관한 진술
4월 10일
진술자__________
4월 10일 오전, 정상(井上)이라는 헌병 군조(軍曹)가 병원 사무실에 찾아와 부상자 중 몇 명을 경찰이 심문코자 한다고 하면서, 그들을 대화정(大和町) 헌병 파견실에 데려다 심문해야겠다고 말했다.
이를 보고 받은 애비슨 박사는 환자 이송 문제는 외과의사인 루들로우 박사의 결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옮기는 것보다는 병원에서 심문하라고 제의했다. 헌병은 이에 동의하면서, 비밀리에 심문을 행할 수 있도록 독방 하나를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헌병대가 한 사람 심문하는 데, 한 시간 씩은 걸릴 것으로 여겼다.
오후에는 헌병 군조 나가세(Nagase)가 헌병 9명을 데리고 병원에 왔다. 나가세는 자기의 증명과 심문을 받아야 할 7명의 명단을 제시했다. 이 환자들을 병상에서 독방으로 옮길 수 있을지 결정하도록, 루들로우 박사가 불려 왔다.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독방에서, 그리고 옮길 수 없는 자들은 병상에서 심문이 있었다. 심문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5시 30분경 끝난 것으로 여겨진다.
나가세 군조는 심문이 끝난 후, 2명은 퇴원하기 24시간 전에 경찰에 통고한다는 조건으로 남겨 두고, 5명은 더 심문하기 위해 데려 가야겠다고 말했다. 에비슨 박사는 루들로우 박사를 불러 이 환자들을 안전히 옮길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루들로우 박사는 지금은 한 명도 옮겨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나가세 군조는 경찰서에도 붕대를 감아주고 치료를 돌볼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루들로우 박사는 5명 중 특히 3명은 안 된다고 반대하다가, 잠시 후, 3명 중 한 사람을 남겨 놓기로 했다. 또 흥정을 계속하다가 한 사람 더 남겨 놓기로 하여, 결국 아래와 같은 세 사람을 데려갔다.
엄명석. 배와 팔에 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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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보. 얼굴에 총상, 탄환 제거.
이명귀. 사타구니와 허벅다리에 총상.
이리하여 4명은 원장 에스테브(Esteb) 양의 책임 아래 병원에 남고, 퇴원하기 24시간 전, 경찰서에 통고하도록 되었는데, 이들은 다음과 같다.
이개동. 오른편 허벅다리와 왼편 무릎에 총상.
강용이. 허벅다리에 총상, 상당 부분이 떨어져 나갔음.
김일남. 양 허벅다리와 뺨에 총상.
유순영. 양 허벅다리 총상.
석방된 남자들의 고문 이야기
1919년 3월 1일 아침 9시, 남대문역으로부터 데모가 시작되어 남대문 쪽으로 진행하였다. 데모 군중은 뛰면서 “만세”를 불렀다. 나는 데모가 시작되었을 때, 마침 부근에 있다가 애국심에 북받쳐, 군중에 끼어 얼마간 행진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정거장 있는 데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의 이마와 목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본 경찰 몇 명이 나를 데모자로 체포했다.
일본 헌병 3명이 나를 경찰 본부로 연행, 나는 하루밤을 그 곳 감방에서 지냈다. 나는 다음날 아침 10시 경, 검사 앞에 불려 나가, 심문을 받았다.
검사 : 왜 ‘만세’를 불렀는가?
나 : 대한 독립의 이야기를 들으니 하도 기뻐서 함께 불렀다.
검사 :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는가?
나 : 시킨 사람은 없다. 내 스스로 했다.
검사 : 그러면, 너는 질서를 문란했을 뿐만 아니라, 진짜 폭도다. 처벌받을 테니 각오해.
나 : 법에 따라 처벌하라.
검사 : 기독교 신자인가?
나 : 그렇다.
이같이 심문을 받은 뒤, 나는 안쪽 감방에 끌려가 이틀 동안 갇혀 있었다. 3일째 오전 11시 경, 훈계를 들은 후 석방되었다. 석방된지 이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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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집에 찾아와, 저녁을 함께 했다. 나는 그에게 미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친구가 그 편지를 읽어 보자고 해서,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편지를 가지고 가고 싶다고 했으나, 나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자 그는, “편지를 자기에게 주면, 기독교청년회(Y.M.C.A.) 공업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움직일 수 있다. 수천 명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그 학교 학생들은 어디에나 고용되어 있다. 담배 공장들에 고용되어 있는 학생들도 움직일 수 있다. 나는 이 편지를 가지고, 독립운동을 도울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달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편지를 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대답했다. 나는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 날 아침 10시 경, 헌병 2명이 나를 체포하러 내 집에 왔다. 나는 그들에게 연행되어 경찰본부에 감금되었다. 감금된 지 약 3시간 후에 심문관 앞에 불려 나갔다.
검사 : 너의 죄를 아는가?
나 : 내 죄를 모른다.
검사 : (노하며), 너와 미국에 있는 너의 친구 간의 연락에 대해 말하라. 응하지 않으면, 고문으로 벌받게 된다.
나 : 나는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렇게 대답하자, 내 옆에 서 있던 헌병들이 손으로 내 얼굴을 때렸다. 나는 이내 분개하여 그들을 몇 차례 걷어찼다. 헌병들은 이에 맞서 나를 심하게 때렸다. 검사는 이 싸움을 중단시키고 나를 독방에 가두었다. 옆에는 고문 기구가 있었다. 이윽고, 나는 똑바로 선 채 압착기에 넣어졌다. 등의 바퀴가 돌음에 따라, 압착기의 4면이 조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실을 털어 놓으라고 했으나, 나는 계속 결백을 주장했다. 나는 계속 항의하면서, “죽일 테면 죽여라”고 외쳤다. 나는 다시 압착기에 넣어 졌는데, 등의 바퀴를 너무 세게 조여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죄없음을 주장하면서, 항의했다. 그들은 “이 놈은 악질”이라고 말하면서,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들은 내 오른손의 가운데 손가락을 튼튼한 끈에 묶어, 끈을 천정 부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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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에 둘러 맨 후, 이를 잡아 당겼다. 내 몸둥이는 손가락에 매달려 뜨게 되고 발끝만이 바닥에 닿았다. 나는 차차 의식을 잃어 갔다.
눈을 떠 보니 바닥에 뉘여 있었으며, 얼마나 매달려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마를 만져 보니, 땀으로 젖어 있었다. 몸을 가누기 어려웠으나, 그래도 편안한 자세를 취하려 했다. 다음날 오전 11시 경 나는 또 심문받으러 끌려 나갔다. 그런 후 훈계를 듣고 두 번째로 석방되었다. 나의 집은 수색을 당했으나, 증거될 만한 물건은 발견되지 않았다. 내 손은 퉁퉁 부은 상태이므로, 한국인 의사한테 며칠 치료를 받았으나 효험이 없어, 세브란스병원을 찾아가 외과에서 치료를 받았다.
증거문서 XI
경찰에 체포되었던 한국 소녀의 경험
진술자__________
3월 5일 나는 사랑하는 우리 나라의 자유를 위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남대문에서 행진에 끼어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 있다는 표시로, 붉은 띠와, 팔에 붉은 완장을 찼다. 우리는 “만세”를 부르면서, 정거장에서 종로(鍾路) 쪽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우리가 덕수궁(德壽宮)에 가까이 왔을 때, 돌연, 한 일본 경찰관이 뒤에서 나의 머리채를 잡아 당겨, 땅에 콱 넘어졌다. 그가 나에게 몇 번 사정없이 발길질하는 바람에, 나는 거의 의식을 잃었다. 경찰은 나의 머리를 잡아 끌어, 종로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경찰서 입구에 줄지어 서 있던 20여 명의 일본인 경찰은 놀려대며, 발길질하고 칼로 때렸으며, 얼굴을 너무 얻어맞아 거의 의식을 잃었다. 잔인이 너무 지나쳐, 나는 때로는 그들이 나를 때리는지, 또는 다른 사람을 때리는지 깨닫지 못했다. 나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손과 다리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내 몸은 얻어맞아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방으로 끌려 들어갔는데, 여기에서도 여전히 거칠게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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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나를 마루 위에서 끌기도 하고, 칼로 얼굴을 때리고, 방 한 구석으로 밀기도 했다. 이때 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음이 분명하다. 그 이후 일어난 일을 기억할 수 없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남자와 여자들이 꽉 차있는 방에 들어와 있음을 알았다. 그 중 어떤 사람은 너무 처참한 꼴이 되어 있어, 맞은 것을 보기에 마음이 아팠다. 얼마 후, 우리는 한 사람씩, 경찰관에 의해 반대 심문을 받았다. 심문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는 내 힘에 벅차다. 나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질문에 대답할 적마다 얼굴을 한대씩 얻어맞았다. 그들은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며, 저주와 가장 지독한 욕설을 퍼부었다. 한사람은 “이 더러운 창녀, 애 뱄지?”하고 욕하기도 했다. 또 내 가슴을 드러내 보이라고 명령, 듣지 않자, 윗옷을 찢어 버리고, 몸서리쳐지는 온갖 못된 말을 했다. 그들은 내 손가락들을 한데 묶고, 이를 난폭하게 홱 잡아 당기기도 했는데, 이 때 마치 손가락들이 손에서 빠지는 듯했다. 나는 눈을 감고, 마루에 넘어졌다. 그러자 심문관들은 노해, 아까처럼 꿇어 앉으라고 고함치며, 다가 와서, 가슴을 잡고 난폭하게 때렸다. 이러한 잔인무도한 짓이 또 어디 있을까? 심문자는 이어, “무어, 독립을 원한다구? 주제넘게스리. 감옥에 갇히면 독립을 얻을 거야. 네 목숨은 단 한 칼이면 없어져.” 했다. 그리고 나서, 머리카락을 붙잡아 흔들고, 귀를 잡아 당겼다. 이렇게 하고도 시원치 않은지, 몽둥이로 머리 위를 사정 없이 때렸다. 또 팔을 뻗어 무거운 의자를 들게 하여,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몽둥이로 팔꿈치를 때렸다. 여전히 의자를 들게 한 채 창문 옆에 꿇어 앉게 했다. 의자가 내려져서 창문 유리라도 닿으면, 와서 때리곤 했다. 한 시간 정도 이런 식으로 지내고 있을 때, 계단으로 내려 가라고 했다. 완전히 기진맥진해진 것을 알았다. 걸을 수가 없었다. 겨우 기었다. 그것도 내 뒤를 따라온 그들의 전문적 정탐군들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간신히 마루 위를 긴 것이다. 나는 일어나서 계단을 내려가려 했다. 한 계단 내려 딛으려고 할 때, 기운이 쑥 빠져, 전 계단을 내리 굴렀다. 또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방으로 기어 들어 오라 했다. 그 방 담당 경찰관은 기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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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들어 오는 나를 보고 퍽 재미있어 했다. 내 비참한 꼴을 보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때 나는 기도했다. 기도하면서 예수를 본 것 같았다. 높은 곳으로부터 상당한 위안을 얻었다. 나는 주님이 이 때 위안을 주신 데 대해 감사한다. 나는 경찰서에서 모두 5일간 지낸 후 서대문 형무소로 송치되었다. 거기서 그들은 나를 발가벗겼으며, 남자들이 내 몸을 보았다. 이어 옷을 입게 된 후, 방으로 인도되었다. 나는 조롱당하고 저주를 받았는데, 도저히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이 방에는 나같은 처지의 사람이 16명 있었다. 방이 그리 크지 않아 빽빽히 들어 앉았다. 화장실 시설은 돼지우리처럼 방안에 있었다. 방이 어찌나 더럽던지 돼지가 살기에도 적합치 않았다. 먹을 것이라고는 콩밥과 소금이었다. 우리가 먹고 있는 동안, 이따금 누군가 들여다 보고, “개새끼들!”, “돼지새끼들!” 하고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이튿날, 한 사람이 경찰 의사를 불렀다. 여러 명이 들어 와서, 나를 발가벗긴 채 저울로 몸무게를 달았다. 이들도 비웃으면서 내게 침을 뱉았다. 이따금 간수가 나에게 공개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거리낌없이 내 사정을 털어 놓을 수 있을 기회로 보고, 큰 위안을 가지고, 공개재판에 기대를 걸었으나, 아뿔사! 이게 웬일이냐? 나는 어느날 재판도 받아 보지 못하고, 나의 죄상이 무엇인지도 혹은 내가 사실 어떤 위법행위를 한 것인지도 들어 보지 못한채 석방되었다.
증거문서 XII
석방된 소녀 죄수의 이야기
진술자__________
1919년 3월 28일인 오늘, 나이 21세 쯤 되는 ○○○라는 처녀가 우리 집에 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3월 3일, 평양 거리에서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거기에는 남녀 양쪽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경찰은 담배를 피우는지, 술을 마시는지, 그리고 기독교인인지를 물었다. 얼마 안 되어, 12명의 감리교 여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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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의 장로교인, 그리고 1명의 천도교 여신도 등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거의 또는 전혀 벌을 받지 않고 석방되었다. 감리교 여신도들 중 3명은 전도부인이었다. 경찰은 많은 남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든 여자들을 발가벗겼다. 그들은 내가 길거리에서 만세를 부른 것 이외에는 나무랄 것을 발견못했다. 그들은 내 온 몸에 땀이 솟아날 때까지 때렸다. 그리고 나서는 ‘어 ! 덥겠군.’ 하면서 찬물을, 내 발가벗은 온 몸에 끼얹었다. 내 양 팔은 등 뒤로 단단히 묶였다. 그들은 또 내 몸이 땀으로 덮일 때까지 다시 때렸다. 이어 또 찬물을 끼얹었다. 그리고나서는, 춥겠다고 하면서 담배꽁초로 내 몸을 지졌다. [어떤 사람들은 인두 찜도 당했다]
나의 죄는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운동에 가담한 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식을 잃을 때까지 맞았다. 한 젊은 여자는 바로 그 때 월경 중이었다. 그녀는 옷 벗기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들은 그녀의 옷을 찢어 버리고, 더욱 세차게 때렸다. 그러나, 찬물은 끼얹지 않았다. 4일 후 감옥으로 연행되었다. 여기서는 한 방에 남녀가 같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하루는 한 노인이 맞아 숨졌다. 예의 전도부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그 노인 옆에 있었다. 그 여자는 시체를 치워달라고 했으나, 밤새도록 시체를 지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여자는 손을 묶였을 뿐 아니라, 발도 수갑이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들은 우리의 성경도 빼앗아 가버려, 말하거나 기도도 못하게 했다. 그들은 욕설과 야비한 말들을 마구했다.
이러한 짓은 모두 일본인들이 한 짓이다. 방에 한국인 경찰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사람 치는 것과 욕설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성경을 알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모독하면서, 옥에 갇혔던 사울(Saul)이란 사람이 있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들 대부분에게 외국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더냐고 묻고, 선교사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해 가장 악랄하고 잔인했으며, 또한 기독교 계통 학교에서 배운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어떤 소녀들은 너무 변한 나머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후, 위 여인 중 한 사람이 감옥에서 죽었다. [확인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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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문서 XIII
대구(大邱)에서 일어난 만행
진술자__________
이곳에 데모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체포된 3월 8일, 제3교회 장로의 아들이고 정규 교인이기도 한 김용내라는 젊은이는 일본 경찰관에게 붙잡혀, 땅에 내동댕이쳐졌으며, 엎어진채 경관에게 머리와 목 뒤를 몇 번 걷어 차였다. 그는 경찰서로 연행될 때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이 사건은 목격자의 증언을 들은 것이다. 청년은 감옥에 2주간 갇혀 있었다. 이 기간동안 위에 말한 목격자는 옆의 감방에 있다가, 함께 석방되었다. 이 목격자는, 청년이 옥중에서 받는 벌을 견디지 못해 무수히 외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감방에서의 벌은 흔히 감방 열쇠로 머리를 때리는 것이었다. 청년은 석방된 후에도, 여전히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풀려난 지 2, 3일 후, 청년은 앓기 시작했고, 머리가 지독히 아프다고 말하면서, “머리 한 쪽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정신 착란이 되고 열흘 정도 앓다가 죽었다. 그가 숨을 거두던 날 밤, 헛소리를 하면서, 자기는 죄가 없고, 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항의하고 있었다. 그를 돌본 의사는 머리에 맞은 구타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사인을 밝혔다. 그의 몸둥이와 목과 두개골 밑은 거멓게 변색해 있었다. 그는 일본인 변호사 밑에서 일하는 서기였으며, 대구에서는 대단히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직 감옥에 있으며, 가족중 3명이 사살되고, 다수가 부상했으며, 40~50명이 체포되었다. 부상자 중 한 사람을 만나, 그로부터 직접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오후가 되면서 데모가 일어나 몇 명이 체포되었다. 오후 늦게, 그와 다른 15명이, 부상자 한 명이 들어와 있는 여관 앞에 서 있었다. 그 때 일본 군인 3명과 경찰관 8명이 와서 사람들을 나가라고 명령했다. 그의 형이 무장하지 않은 무고한 사람은 무엇때문에 쏘아 넘어뜨리느냐고 묻자, 군인 한 명이 총대로 그를 갈겼다. 형이 이렇게 맞는 것을 보고 그도 항의하자, 옆구리에 총을 맞았다. 상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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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줄줄 흐르는 것을 보고, 또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하자, 이번에는 목에 총을 쏘아 관통되었다. 이 두 번째 총탄은 15명의 군중에 적어도 10명의 정규 경찰관이 있었는데도 한 일본인 상인이 발사한 것이었다. 그 날 2명의 일본 민간인이 총질을 도맡아 했고, 또 그것을 자랑한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석방된 다른 죄수로부터 열쇠가 고문에 사용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손가락 사이에 열쇠를 끼우고 손가락 끝을 묶어 살이 마비될 때까지 열쇠를 비트는 방법이다. 이것도 목격자들의 직접 증언에 의한 것이다.
우리가 듣는, 발포로 인한 사망자수 보고는 모두가 지나치게 줄인 것이며, 사망 또는 매장은 기록조차 되어있지 않다. 나는 4월 11일 하루를 70여 명의 기독교인에 대한 재판을 방청하면서 보냈다. 이 중, 특히 6개월을 구형받은 사람들 중에는 군중 속에 끼어 있었을 뿐 만세를 부르지 않았다고 증언한 사람들도 들어 있다. 당국은 모든 것을 가장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 같았다.
증거문서 XIV
선교사들의 무죄를 밝힌 1919년 3월 14일자 경성일보 기사
최근 외국 선교사들이 소요를 선동하거나, 적어도 난동자들에게 동정을 나타냈다는 풍문이 자자했다. 이러한 풍문이 생긴 것은 난동의 주동자들 중에 기독교 목사들과 기독교 계통 학교의 학생들이 발견된 데 기인한 것이므로, 풍문이 돌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무근임이 이 사건을 조사한 당국의 조사 결과 입증되었다. 당국은 이 문제를 철저히 그리고 엄숙히 조사한 결과, 외국인들이 이번 소요를 교사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소요의 발생을 미리 알았거나, 난동자들을 지원했다는 증거도 없다. 정당한 근거없이 외국인들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은 옳지 못하다. 단순히 의심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에 대한 허위 보도와 근거없는 비난을 날조하여, 신문을 통해 이를 퍼뜨리는 것은 더욱 규탄되어야 마땅하다. 그러한 행위는 외국인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일으켜, 국제관계에 곤란을 초래할 수도 있다. 외국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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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 또는 그와 비슷한 범죄를 자행한 혐의가 발견되면, 당국은 가차없이 그런 자를 기소할 것이다. 최근 혼란에 대해서는 관련이 없음이 밝혀진 이상, 국민은 외국인들에게 아직도 품고 있을지 모를 의심은 불식해야 할 것이다.
증거문서 XV
동창(東倉)에서 일어난 데모
동창 마을에는 약 3백 채의 집이 있다. 이 마을의 젊은이들은 얼마전부터 데모하기를 원했었으나, 교회의 장로인 한(韓) 선생과 그 외 교회 임원들은 마을에서 멀지 않은 광산에는 데모를 계기로 경찰에 대항해 일어날 수도 있는 5백여 명의 광부가 일하고 있기도 해서 시위자들 편에서 폭력을 쓸 염려가 없지도 않아 그것을 만류했다.
그러나 3월 29일, 이 날이 마침 장날이어서, 인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데모가 시작된 것은 어린이 몇 명에 의해서였다. 다른 사람들도 데모에 가담하여, 결국에는 4, 5백 명이 마을을 행진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데모는 아주 평화스러웠으며, 관헌에게 투석하거나 저항하지 않았다. 경찰이 나와 17명을 체포했는데, 이 중 절반 정도가 기독교인이었다. 체포된 사람 중에는 여자도 5명 끼어 있었다. 후에 더 많은 사람들이 검거되었다. 체포된 사람은 모두 주재소로 연행되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주로, 검거된 5명의 여자 중 세 여인의 체험을 다룬다.
○○○ 여인은 이 마을에 사는 과부로서, 나이는 31세[한국식], 아이가 하나 있다. 군중 속에서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관에게 붙들렸다. 그녀는 주재소로 끌려갔는데, 한 경찰이 그녀의 속옷을 찢어 버리자 항의했다. 경찰은 검푸르게 멍들 때까지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여인이 그녀 자신의 손으로 자기 속옷을 움켜잡자, 경찰관들은 그녀의 몸과 속옷 사이에 곤장을 끼워 틀어 옷을 뺏았다. 이들은 얼마 동안 그녀의 팔과 다리를 곤장으로 아주 조직적으로 계속 때렸다. 이들은 때리기를 중지하더니, 앉아서 차를 마시고 일본식 과자를 먹었다. 나체 여인을 감상하여 가면서. 방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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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있었다. 약 1시간 후, 벗긴 옷 중 한 두 가지를 입게 하고, 많은 체포된 자들을 가두어 둔 옆방으로 들여 보냈다. 저녁 전기가 들어 왔을 즈음, 다시 불려나가 한 나이 많은 부부에게 인계되었다. 노부부는 경찰로부터 여인에 대해 책임을 지고, 부르면 언제든지 데려오도록 지시를 받았다. 여인은 그 후 1주 동안, 거의 누워있어야 했으며 걸을 수가 없었다.
○○○ 여인은 34세된 과부로 아이가 둘 있다. 역시 데모에 참가했다가 경찰관에게 붙잡혔다. 주재소로 연행되는 도중, 반항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팔은 뼈가 어긋날 정도로 비틀린채 끌려 갔다. 경찰관은 주재소 사무실로 데리고 들어가, 손으로 얼굴을 친 후, 앉혀 놓고 머리를 찼다. 여인이 고꾸라졌는데도 계속 발길질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여인은 겉옷은 벗었으나 속옷은 그대로 두었다. 속옷도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버티었다. 바로 이 때, 거리에서 또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자, 경찰은 이 짓을 중단했으며, 여러 경찰관이 또 체포하러 밖으로 나갔다. 여인은, 옷 한 두 가지를 입게 해 주어, 체포된 자들이 억류되어 있는 옆방으로 들여 보내졌다. 여인은 거기서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아침 다음에 소개할 여인과 함께 풀려났다.
위의 두 여인은 노동자 계급이 아닌 한국의 중류 계급에 속해, 총명하고, 지식있는 사람들이다. 두 사람은 여러 차례 성경연구소에 다녔다.
○○○ 여인은 ○○○의 부인이다. 남편은 ○○○에서 얼마 동안 교편을 잡았다. 여인은 대단히 총명하고, 지식 있는 여성이며, 네 살된 아이가 있고, 임신 2, 3개월 쯤 되어 있다. 그녀는 데모에 약간 참가한 후, 딸이 체포되어 고민하던 표학선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갔다. 그녀가 집안에서 나왔을때, 경찰과 헌병 몇 명이 뜰에 들어왔다. 이들은 그녀가 교사인 것을 알고, 학교에서 찾았었다. 이들은 그녀에게, 몸을 숨기려고 한다고 욕했으나, 교사는 그렇지 않다고 부인했다. “만세”를 불렀느냐는 물음에는 불렀다고 했다. 이들은 등에 업은 어린애를 내려 놓고 따라 오라고 명령하여, 복종했다. 주재소 문 앞에 이르자, 한 경찰관이 등 뒤에서 힘껏 발길질하여 그녀는 앞의 방안으로 고꾸라졌다. 어리둥절하여 바닥에 넘어져 있는데, 경찰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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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로 머리를 힘껏 걷어찼다. 그러다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더니, 머리와 얼굴을 수 없이 쳤다. 경찰은 여인의 옷을 붙들어 맨 끈을 확 잡아 당기며,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다. 주저하자 차고 때리면서 옷을 벗겼다. 무거운 몽둥이와 곤장을 가지고도 때렸다. 속옷도 확 잡아 채고 가슴을 차면서, 한국 어린이들에게 반일감정을 심게 한다고 욕할 뿐 아니라, 때려 죽이겠다고 했다. 그녀는 벗겨진 속옷으로 벌거숭이를 가리려 했으나, 이것마저 채갔다. 앉으려 했으나 끊임없는 발길질과 내리치는 몽둥이 때문에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방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 했으나, 그 때마다 사람들을 향하도록 몸을 돌려 놓았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손과 팔로 감싸려 했으나, 또 한 사람이 등 뒤에서 양팔을 비틀어 붙들고 있는 동안, 차기와 때리기가 계속되었다. 몸뚱이 전체를 얻어맞았다. 그녀는 감각이 마비되어, 고통 의식을 잃고 있었다. 얼굴은 붓고, 몸의 색갈은 변했다. 학대가 계속되는 동안, 계속 버티어야만 했다. 이들은 마침내 그치고, 그녀를 방벽에 잠시 그대로 놓아 두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정정렬에 관한 진술에서 언급된 바 있는 점심을 먹었다. 그 후 그녀에게 옷을 입으라 하고 옆 방에 들여 보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게 했다. 밤 9시경, 위에 언급된 세 여인과 그 밖의 두 여자는 다시 사무실로 불려 들어 왔다. “만세” 부르는 것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이제는 깨달았느냐고 묻고, 다시는 그런 것 할 생각 말라고 했다. 3명은 석방했으나, 표학선·이효성 두 여자는 그대로 두었다. 두 여자는 옆방으로 보내져, 다른 죄수들과 함께 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수감자의 심문이 시작되었는데, 남자 몇 명이 먼저 받았다. 그러는 동안, 여자들이 경찰에서 치른 곤욕의 소식이 마을에 퍼져, 5백여 명이 아침에 모였다. 이들 중 일부는 주재소를 습격하고 여인 학대를 복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韓) 장로가 폭력 사용, 또는 불법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만류했다. 마침내 냉정히 처신하자는 의향이 우세하여, 대표 두 사람을 보내, 항의하기로 결정되었다. 선정된 두 대표는 기독교인이 아니며, 한 사람이 일본말을 할 줄 알았다. 두 대표가 주재소로 들어가고, 군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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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기다렸다. 대표들은 여자를 발가벗기는 것이 불법이라고 항의했다. 주재소 주임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그것이 일본 법에서는 허용된다고 했다. 또한 불법 문서를 찾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대표들은 그러면, 왜 늙은 여자가 아닌 젊은 여자들만을 골라서 발가벗기고, 벗긴 후에는 왜 때렸으며, 남자들은 그대로 두고 여자만 옷을 벗긴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따졌다. 주임은 답변을 못했다. 이 밖에도 상당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을 대표들은 단호했으며, 마을 사람들도 더욱 동요되고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투옥되거나, 갇힌 자들을 석방토록 요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주임은 결국 굴복하게 되어, 피의자 4명만을 남기고 모두 석방키로 동의했다. 위에 언급한 그 과부는 양쪽에서 부축을 받으면서 나와야 했으며, 또 한 여인은 남자에 업혀 돌아갔다. 여자들이 이런 상태에서 풀려나오는 것을 본 군중에게 연민의 물결이 휩쓸어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어떤 사람들은 “저런 야만인들 밑에서 사느니보다 죽는 편이 낫다”고 울부짖었으며, 맨주먹으로 주재소를 습격한 후, 주임을 잡아, 발가벗겨 죽도록 패주자는 의견이 강력했다. 그러나 한 장로 등 신중론자들의 의견이 우세하여, 폭력행위를 못하게 했으며, 마침내 해산하게 되었다.
하루 이틀 뒤, 마을에서 멀지 않은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 6백 명의 대표가 한 장로를 찾아와 사건을 자세히 물었다. 대표들은 그러한 야만인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하고, 경찰을 습격하여 복수하기로 결정했다고 알렸다. 한 장로는 이들과 한참 동안 시비를 따졌다. 대표 중 적어도 한 사람은 술을 마시고 왔다가 참지 못해 한 장로의 사타구니를 때렸다. 그러나 한 장로는 마침내 그들을 설득해서, 적어도 현재 주재소에 갇혀 있는 기독교인들이 석방되거나, 또는 다른 장소로 이송되기까지는 기다리도록 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폭력에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았다.
후에 이 곳에서는 또 데모가 있었으며, 적어도 2명이 총에 맞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위에 부분적으로 기술한 사건과는 특별한 관련이 없으므로, 여기서 자세히 밝힐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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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문서 XVI
경찰의 수사방법에 대한 진술……
__________에 보내는 서한
친애하는 ○○○씨 에게.
우리는 3월 5일 시작된 방학이 끝난 후 4월 4일 전문학교와 학원의 새 학기를 시작할 계획이었읍니다. 방학이 시작될 무렵 학생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퇴학당했으며, 또 그 전 날 밤 자정이 지나 곤봉을 든 소방대원들이 기숙사를 수색, 학생 몇 명이 끌려나가 구타당했기 때문에 졸업식 행사 없이 졸업장을 수여했읍니다. 4월 2일과 3일, 시내 집들이 조직적으로 수색당했으며, 기독교 계통 학교의 학생들은 체포되어, 몇 명은 구타당하고, 몇 명은 이내 하학당하고, 나머지는 구속되어 있읍니다. 경찰서장이 한 일본인 교수에게 한 말에 의하면, 새 학기 등록을 할 학생들은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답니다. 누구나 아다시피, 이러한 체포에는 으레 구타와 발길질이 따르게 되어 있으며, 조사와 심문에 앞서 이같이 학대하는 상황에서는 학생들이 등록하리라고 예상할 수 없읍니다. 학원에는 전에 학생이었던 자와 새 학생이 왔었으나, 개교 전망을 알아보러 온 칼 찬 부윤(府尹)과 그의 통역관을 보고는, 둘 다 사라졌읍니다. 전문학교에는 한 학생이 나왔었으나 경찰서장이 한 말을 듣고는 곧 가버렸읍니다. 이것이 학교 문 여는 것을 미리 막자는 속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때문에 학생들이 등록을 않고 있읍니다.
4월 4일, 하오 3시 30분.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홀드크로프트(Holdcroft) 부인의 집에서 기도회를 가지려고 모였을 때, 갑자기 경찰과 헌병의 비상선이 온통 우리 구내 주위에 쳐진 가운데 검사·경찰 및 헌병이 집들을 수색하기 시작했읍니다. 우리는 이 집들 중 한 집으로부터 전화로 연락을 받았읍니다. 나는 곧 나의 집으로 가보니, 구내 대문들이 닫혔으며 헌병들이 보초를 서 있고, 20여 명의 경찰과 헌병이 구내를 경계 중임을 보았읍니다. 집 안에 들어가 보니, 나의 아내와 아이들이, 16명 내지 20명의 헌병·경찰 및 형사들이 검사의 지휘를 받아 방 셋을 수색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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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사에게 수색 영장을 가져왔느냐고 물은 즉, 필요 없다는 대답이었읍니다. 나는 이 수색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읍니다. 통역도 대동한 그는, 그러자 나에게 자기 명함을 내주므로, 나는 “물론 당신은 강제로 수색할 수 있으나, 내가 동의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읍니다. 그는 어쨌든 좋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가 검사이기 때문에 나의 동의 없이도, 수색할 권한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집안 전체를 뒤졌는데, 특히 나의 서재와 모페트(Moffet) 부인의 침실을 철저히 뒤져, 책상·설합·서류·서한 등, 심지어 재산 문서와 금고까지도 수색했읍니다.
그들은 태도가 거칠거나 무례하지는 않았으며, 한 사람은, 이 짓을 싫어하나, 명령이기 때문에 안 할 수 없다고 말했읍니다. 그러나 20명의 경찰·헌병·형사 등이 거의 찾아 낼 것이 없는데도 모든 것을 뒤지는 것을 참으며 보는 것이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읍니다. 그들은 내 서재에 있던 내 비서 책상의 설합 속 서류 중에서 다음과 같은 하찮은 것을 발견해냈읍니다.
(1) 한국어로 된 이태왕(李太王) 추도 예배와 3.1 독립운동 예배 프로 한 장.
(2) 안주(安州) 데모 때의 사망자 수와 여러 마을에서 참가한 데모자의 수를 적은 한국어로 된 종이 조각.
(3) 우표와 소인이 찍힌 한 봉투. 신 학교에 보낼 이 봉투에는 독립신문(獨立新聞) 5부가 들어 있었음. 내가 서울에 있을 때 온 것으로, 나의 한국어 편지가 함께 들어 있는 비서의 책상에서 나온 것.
나는 전에는 이러한 것들을 본 일이 없으며, 검사의 통역도 후에 나에게, 나의 비서 도 위의 두 가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부인했다고 합디다.
그들은 본채 수색을 끝낸 후 바깥채·손님채·구내 아래 부분에 있는 한옥(韓屋)을 뒤지기 시작했는데, 이 한옥은 전에 전도부인·그녀의 아들, 그리고 내 비서가 몇 년 간 살았었으며, 그들이 다시 쓰도록 허락한 집입니다. 우리가 손님채의 앞문을 열려고 할 때, 내 비서가 뒷문으로 나왔는데, 아마 거기서 며칠 밤 자고 있었던 것 같았읍니다. [내가 그에게 2월부터는 그가 전에 살았던 한옥에 다시 거주하도록 허락한 일이 있으나, 그가 여기 방을 차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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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던 것은 모르고 있었읍니다] 그들은 그를 붙들어 포박했는데, 그 광경을 본 나의 두 아들 말을 들으면, 때리고 차고 쥐어박고 하여, 코에서 피가 났으며, 한 사람은 짧은 채찍으로 뺨을 후려쳤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위에 말한 한옥에서는 한국어로 된 두 장의 등사된 계시문을 찾아냈읍니다. 형사는 나에게, 소년 몇 명이 서재에서 등사기를 가져다가 저 빈집에서 계시문을 인쇄했었다고, 그 중 한 명이 자백했다고 전했읍니다. 물론 나는 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읍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3월 17일부터 25일까지 9일간 서울에 가 있을 동안에 일어난 것같읍니다.
내 집을 수색하고 있는 동안, 스누크(Snook) 양·모우리(Mowry) 씨·질리스(Gillis) 씨·맥머트리(McMurtrie) 씨·레이너(Reiner) 씨 .베어드(Baird) 박사 등 여러분의 집과 그리고 외국인 학교 기숙사도 수색되었읍니다. 베츠(Betts) 양은 수색 영장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수색을 거부했읍니다. 검사가 많이 나오지 않아, 그녀 집 수색반에는 검사가 없었읍니다. 그래서 수색을 그만둔 것입니다. 스누크 양 집에서는 요리하는 아주머니, 새먼(Salmon) 양의 비서인 청년이 체포되었읍니다. 새먼 양의 방은 신중히 수색되었읍니다. 수색반은 모우리 씨의 집에서는 시내의 교회 학교 교원을 체포했읍니다. 교원은 교장인 모우리 씨를 만나, 그날 개교 문제에 대해 상의하러 와 있다가, 나가는 길을 마침 경찰이 와서 잡힌 것입니다. 교원 이외에, 감옥에서 방금 석방되어, 모우리 교장에게 석방소식을 알리려 왔던 한 학생도 체포되었읍니다. 나는 다른 한 학생도 잡힌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우리 씨의 비서를 찾지 못해 실망을 나타내는 것을 보았읍니다. 수색반은 질리스 씨 집에서는, 2주간 그 집 정원에서 일하던 한 소년과, 시골에서 온 한 신학생과, 전에 이곳 학생이던 서울의 한 의대생을 체포했읍니다 . 이 세 사람은 질리스씨가 기도회에서 돌아오기 전 그의 집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레이너 씨의 뜰에서는, 구내에 있다가 도망가려던 한 사람이 헌병에 자수, 헌병은 그를 때리기 시작하여 머리를 치고, 때려 눕힌 후, 몇 번 머리를 찼읍니다. 그들은 또 베어드 박사의 집에서는 그의 비서 노릇하던 한 전문학교 학생을 체포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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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는 한, 체포된 자들이 우리 구내 또는 집에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읍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확실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러나 전 국민이 불법적인 구타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개중에는 경찰이 오는 것을 보기만 해도, 숨어 체포를 모면하려고 했읍니다. 그들은 나의 요리인도 수색했으나 체포하지는 않았읍니다. 그들은 체포된 자들을 데리고 갔으며, 신학교 기숙사로 들어갔읍니다. 거기서, 등사기 한 대를 또 빼앗고, 남 장로교 교수 사택의 두 창문을 깨고 들어가, 그 곳으로 도망쳐 들어간 한 사람을 체포했다고 합디다. 수색하던 세 사람이 돌아와 내 서재에서 등사기 2대를 가져가겠다 하여, 예치증을 써 놓고 그렇게 하라고 하니, 다음날 경찰서에서 찾아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읍니다. 그날 밤 7시와 8시 사이에 모우리 씨는 내게 전화를 걸어, 경찰이 사람을 보내 나와 자기를 나와 달란다고 했읍니다. 나는 경찰이 보낸 사람과 모우리 씨를 집 대문에서 만나 그들과 함께 서로 갔읍니다. 우리는 경찰 3명이 있는 작은 방으로 안내되었으며, 35분 동안 앉아기다리고 있을때, 모우리 씨가 호출되었읍니다. 우리는 앉아 기다리면서 영어로 말하고 있는데, 경찰관 한 명이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군요. 놀라서 나는, “무어라고? 우리가 체포된 것이냐?”하고 물었읍니다. 그는 곧 일어나, 잠간 기다리라고 말한 후 나갔읍니다. 그리고 이내 돌아와서는 “걱정 마시오. 잘 되었읍니다.”라고 말했읍니다. 나는 “암, 그렇고 말고”라고 대답하고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했읍니다. 모우리 씨가 불려 들어간후, 한 시간 동안을 기다렸으며, 이어 나도 내 집을 수색했던 검사와 그의 통역, 또 한 사람의 서기, 그리고 잠시 한 나이 많은 관리 앞에 심문 받으러 불려 나갔읍니다. 그들은 대단히 정중하고, 퍽 요령있게 질문했읍니다. 그들은 특히 내가 3·1 독립운동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또는 관련이 있었는지, 나의 비서에 대하여, 비서가 내 집에 와 있게 된 것, 집의 열쇠 사용, 나 몰래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읍니다. 또한 비서가 나의 등사기를 사용하게 된 데 대해, 내가 등사기 사용에 동의했었는지, 또는 알고 있었는지를 물었읍니다. 그들은 내 서재에 있는 비서 책상 안에서 발견된 세 가지 서류, 나의 서울로의 출장 등에 관해 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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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대단히 부자라는 평판이 있다고 말하면서, 전도부인과 비서의 급료는 얼마냐고 묻고 재정 상태에 대해서도 질문했읍니다. 그들은 한 시간 동안의 심문으로,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며, 사전에 아무 것에도 동의한 바 없고, 내 비서 등과 일당이 아니란 것을 알아냈읍니다. 그들은 내가 나의 아내와 아이의 치료 때문에 서울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비서 등이 나의 집에서 무엇을 했는지, 등사기를 어떻게 사용하게 되었는지, [비서는 자기의 일 때문에 등사기를 항상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음] 모르고 있었음을 알았으며, 내 명의로 된 토지는 선교부이사회, 교회 및 학교 등의 재산임을 확인하고 심문을 마쳤읍니다.
나는 자정이 가까왔으므로 나와 모우리 씨를 집까지 데려다 줄 호위 경찰관 1명을 요청했읍니다. 최근 한 선교사가 밤에 정거장으로 가던 도중, 곤봉으로 무장한 2명의 일본인 괴한에게 행패를 당한 일도 있고 하여, 외국인이 야간에 나돌아 다니는 것은 위험합니다. 경찰은 위험할 것 없다고 말했으나, 나는 일본 신문들이 우리에게 대한 모욕적인 기사를 내고, 하급 일본인들은 우리들에 대해 몹시 증오심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촉구했읍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경찰관을 딸려 보내기로 동의하고 잠간 기다리라고 했읍니다. 그리고 나는 경찰서 본 사무실로 안내되었는데, 거기 한 편에 그날 오후 체포된 학생들과 비서들, 그리고 그 전날 밤 붙잡힌 베어드 박사의 통역이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읍니다. 나는 이 들에게 말을 걸어도 되느냐고 물었으나, 거절당했읍니다. 20여 분 기다리고 있는데 검사와 그의 통역이 들어 와서 집에 같이 갈 경찰을 보낸다고 했읍니다. 나는 모우리 씨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으나, 그의 심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먼저 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읍니다. 그래서 나는 모우리 씨에게, 나는 먼저 간다고 말하고, 그의 부인에게 남편이 조금 후 경찰관의 호위를 받으며 올 것이라고 알려 줌으로써 걱정을 덜게 하려고 그와 만날 것을 청했읍니다. 그러나 그가 현재 심문을 받고 있는 도중이니 자기가 그 뜻을 전해 주겠다고, 한 사람이 말했읍니다. 그 후 나는 한국인 경찰관을 대동하고 갔으나, 모우리 씨 부인은 깨울 수 없어 그대로 집에 갔읍니다. 나는 잠을 잘 못 자서, 다음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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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심한 두통 때문에 누워 있었읍니다. 7시 경 모우리 씨 부인이 맥머트리 씨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나는 귀가했는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맥머트리 씨는 나를 찾아왔으므로, 그에게 번하이설(Bernheisel) 씨를 곧 경찰서에 보내 사정을 확인케 한 후, 모우리 씨가 체포되어 있으면 혐의 내용을 묻게 하여 즉시 선생님께 전보를 치도록 하고, 또 그가 모우리 씨를 면회하여 사식을 차입토록 하라고 제의했읍니다. 번하이설 씨는 선생님께 사정을 적어 보낼 것입니다. 너무 소상하게 글을 쓴 것 같읍니다마는 선생님께서 알고 싶어하는 것을 빼는 것보다는 시시해 보이더라도 알려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읍니다.
토요일인 4월 5일 오후, 체포된 자 중 5명이 석방되었읍니다. 그들은 스누크 양의 요리하는 아주머니, 새먼 양의 비서, 시티교회 학교의 교사, 질리스씨의 사환, 베어드 박사의 비서 등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베어드 박사의 통역이 풀려 나왔는데, 그 자신은 그곳에 있을 때, 구타당하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은 심문을 받으면서 치욕적으로 얻어맞았다고 했읍니다.
토요일 오후, 지난 달 대학을 졸업한 모우리 씨의 비서가 맥머트리 씨를 찾아와, 체포를 모면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경찰에 자수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읍니다. 그래서 우리는 번하이설 씨가 경찰서에 들어 가서, 사람을 보내면 모우리 씨의 비서를 경찰에 자수시킬 준비가 되어 있음을 통고하기로 했읍니다. 또한 무어(Moore) 박사가 번하이설 씨를 승용차에 태워 경찰에 보냈으며, 올 때는 학생들을 모두 알고 있는 한 형사를 차에 태워 와서, 맥머트리 씨의 집에서 나온 모우리 씨의 비서, 이보식을 연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맥머트리 씨는 비서, 형사와 함께 차에 타고 경찰서로 감으로써, 그가 도중에 구타당하는 것을 미리 막아 주었읍니다. 비서는 자기가 생각을 짜내어 이러한 자수 방법을 취한 것입니다. 그는 나에게 조언을 구했으나, 자기 자신이 결정하라고 했읍니다. 그는 금요일 경찰이 수색하러 왔을 때는 피신하여 붙잡히지 않았었읍니다.
이상은 내가 현재 보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 모든 것입니다. 후에 또 사태 논평을 곁들인 글월을 드리겠읍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모우리 씨가 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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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촉되는 일은 하지 않았으리라고 믿고 있읍니다.
1919년 4월 7일
증거문서 XVII
세브란스병원으로부터의 부상자 이동에 관한 진술
O. R. 애비슨 학장
4월 10일 오전, 정상(井上)이라는 헌병 군조가 우리의 병원 사무실에 찾아와 부상자 중 몇 명을 심문해야겠으니, 그들을 대화정(大和町) 헌병 파견실에 데려가야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부상자 이동 요청을 보고받은 애비슨 박사는 이 문제는 외과의인 루들로우 박사의 결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옮기는 것보다는 병원에서 심문하라고 했다.
그는 이에 동의하면서, 비밀리에 심문할 수 있도록, 독방 하나를 마련해 달라고 했다. 한 사람 심문하는 데 한 시간씩은 걸릴 것으로 여겼다.
오후에는 헌병 군조 나가세가 헌병 9명을 데리고 병원에 왔다. 나가세는 자신의 증명과 심문을 원하는 7명의 명단을 제시했다. 이 환자들을 병상에서 독방으로 옮길 수 있을지 결정하도록 루들로우 박사가 불려 왔다. 그리하여 옮길 수 있는 환자는 독방에서, 옮길 수 없는 자들은 병상에서 심문이 있었다. 심문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5시 30분 경 끝난 것으로 여겨진다.
나가세 군조는 심문이 끝난 후, 2명은 퇴원하기 24시간 전에 경찰에 통고한다는 조건으로 남겨 두고, 5명은 더 심문하기 위해 데려가야겠다고 했다. 애비슨 박사는 루들로우 박사를 불러, 환자들을 안전히 옮길 수 있는가고 물었다. 루들로우 박사는 지금은 한 명도 옮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나가세 군조는 경찰서에도 붕대를 감아주며 치료를 돌볼 의사가 있다고 했다. 그러자 루들로우 박사는 5명 중, 특히 3명은 안 된다고 반대하다가, 잠시 후 3명 중 한 사람을 남겨 놓기로 했다. 또 흥정을 계속하다가 한 사람 더 남겨 놓기로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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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래와 같이 세 사람을 데려갔다.
염명석. 복부와 팔에 총상.
송영복. 얼굴에 총상, 탄환 제거.
이명귀. 사타구니와 허벅다리 총상.
이리하여 4명은 원장 에스테브(Esteb) 양의 책임 아래 병원에 남고 퇴원하기 24시간 전 경찰서에 통고하도록 되었는데, 이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이개동. 오른편 허벅다리와 왼편 무릎에 총상.
강용이. 허벅다리에 총상, 상당 부문이 떨어져 나갔음.
김일남. 양 허벅다리와 뺨에 총상.
유순명. 양 허벅다리 총상.
 
 
증거문서 XVIII
한국인 점원의 진술
“4월 1일. 한 일본 경찰관과 한 형사가 나의 집에 와서, 주인을 보자고 했다. 나는 주인이 시골로 갔다고 말한즉, 당장 그에게 전보를 쳐, 경찰이 즉시 만나 보아야겠다고 말하더라고 전하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나한테 도(道) 경찰부까지 같이 가야겠다고 했다. 나는 먼저 가면 따라 가겠다고 하니까,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경찰은 어느 파출소에 도착하자, 어디엔가 전화를 걸어 주인이 나가고 없어 종업원 한 명을 데리고 간다고 하면서, 괜찮으냐고 물었다. 대답은 좋다는 것이었다. 나는 경찰부에 연행되어 들어선즉, 많은 상인들이 이미 와 있었다.
경찰은 우리들에게 통고문 한 장씩을 주면서, 잘 읽어 보라고 했다. 경찰은 또 상점들을 한 달 동안이나 닫아둠으로써 우리들은 법률을 위반했으나, 이에 대한 죄는 용서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관대하게 용서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그래도 가게 문을 열지 않아 법을 어길 경우에는 법에 의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이어 ‘우리들을 도와 보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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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다면, 당장 가게 문을 열겠읍니다’라는 서약서를 나누어 주고 서명하라고 했다. 그리고 서약서 서명을 거부하는 자는 석방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아는 한, 모두가 서명했다.
한 정탐군이 나를 따라 가게까지 와서, 가게 문을 열지 않으면 경찰부로 도로 데려가겠다고 위협하므로 마지 못해 문을 열었다. 얼마 안 있어 일본인과 한국인 정탐군 한 명이 와서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가게에 머물러 있었다.
1919년 4월 2일. 아침 늦게까지 가게에 나가지 않았다. 가게에 와 보니, 잠을쇠가 비틀렸고 고리못이 부러져 문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가게에 있은지 얼마 안되어, 한국인 경찰 한 명이 와서, 구리개의 파출소로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가게 주인의 아들과 함께 경찰관을 따라갔다. 경찰은 왜 가게 문을 일찍 열지 않았느냐고 따지길래, 나는 좀 특별한 장사이기 때문에 일찍 열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일본인 경찰이,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 하여 얼굴을 철썩 때렸다. 가게집 주인 아들도 꽤 여러 번 이런 식으로 얻어맞았다. 나는 두서너 차례 얻어맞았을 뿐이었다.
파출소의 경찰관 한 명이 종이 한 장에다 “나는 아침 8시경 가게문을 열 것을 약속한다”는 말을 적고, 서명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도장을 찍어야 했다.
4월 3일. 나는 아침 9시 가게로 가서 문을 열었다. 얼마 안 되어 경찰이 찾아와, 왜 약속대로 8시에 열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나는 좀 변명을 했으나 또 파출소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또 다시 꾸중을 들었으나 맞지는 않았다.
경찰관은 내가 아침 8시부터 9시 사이에 문을 열어야 한다는 서약서에 또 다시 서명케 했다.
4월 4일. 아침 8시부터 9시 사이에 가게 문을 열었더니 아무 말썽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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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문서 XIX
개인 편지 [캐나다(Canada)인에게 보내는]
친애하는__________씨에게,
한국인의 봉기에 대해 들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건에 대해 몹시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전혀 모른 척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될 수 있는대로 분규로부터는 초연해 있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읍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상습적인 수단인 폭력 행위와 호령을 답습해 오고 있읍니다. 그들은 반란이 일어난 것이 선교사들 때문이라고 책임을 돌려 씌우려 온갖 짓을 다 했으나,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다행히 이 봉기는 선교사들에게만 아니라, 당국에게도 놀라운 것이었읍니다. 그것이야 어떻든,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이유를 밝혀드려야 겠읍니다. 나는 젊은 한국인의 심정을 정직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했으며, 조사 결과를 솔직히 기록했읍니다. 사본 1통을 보냅니다. 내 마음에 남아 있는 두드러진 인상은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이며, 그래서 그 글에 주제넘는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성공적인 통치의 증거로는 행복하고도 감사에 차있는 번창한 민족의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읍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러한 증거를 발견할래야 할 수 없읍니다. 이는 선생님 자신이 본 것이기도 합니다. 한국 내에서의 여행이 상당히 괴로운 것이었다면, 지금은 훨씬 더 그렇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나의 은사인 _______선생님이 그저께 일본에서 돌아왔읍니다. 어디에 가보나, 그의 도착은 사전에 전보로 연락이 되어 있음을 알았고, 또 도착될 것으로 예상이 되어 있었읍니다. 무슨 조직이라도 있냐고요? 그는 두 번이나 체포된 일이 있지요.
아무리 족쳐 보아야, 트집 잡을 것이 없어 결국 방면됐지만 그것은 매양 매질을 당하고 난 뒤의 일이었읍니다. 한 바보같은 일본 헌병이 그에게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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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연구할 것이 아니라, 농업에 종사할 것을 다짐한 서류를 가져다가 강제로 서명시키려고 한 일이 있읍니다. 여기서는 매일 사람들이 체포되고, 심문에 앞서, 우선 2평방인치 굵기의 몽둥이로 구타당합니다. 박사님과 나는 오늘, 2, 3일 전 영사관에서 온 2명의 남자를 보았읍니다. 한 사람은 4일 전 석방된 이후 처음으로 자기 집을 나왔는데, 몹시 얻어맞아 멍들어 있었읍니다. 어깨는 보기가 아주 끔찍했읍니다. 가장 원시적인 고문 방법이 사용되고, 다소 세련된 면이 가미됩니다. 예컨대 우리 기독교학교 교사 중의 한 사람이 어저께 하는 이야기가, 자기가 아무리 맞아도 그들이 원하는 정보를 얻어 내지 못하자 그들은 그의 첫 두손가락을 묶고, 그 사이에 펜대를 넣어 돌려댔다는 것입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얼마나 아프겠는가. 신경을 몹시 고통스럽게 하고도 신체에 훼손 자국을 남기지 않게 하는 그 악랄함은 독일식이라고나 할까요? 이 사람들의 죄라는 것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른 것 뿐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수십 가지를 말할 수 있으나, 아마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 한 가지 예를 들겠읍니다. 청년 4명이 데모가 일어난 날 ○○○에 도착했으나, 이에 가담하지는 않았읍니다. 이들은 신학교 학생들이었는데 일본 군인들은 학교 기숙사에서 이들을 체포했읍니다. 학생들은 나무 십자가에 묶여 곤장으로 39대 맞았는데, 때리면서 하는 말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생했듯이 학생들도 같은 고생을 당해 보는 것이 어울릴 것이라고 하고, 기독교인들이기 때문에 나쁜 놈들이라고 했다 합니다.
쓰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서없이 상당히 길어졌지만, 이 글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리고 싶은 것 뿐입니다. 다른 선교사들로부터도 많이 들으셨을 줄 압니다만, 아무리 많이 들으셔도 부족할 것입니다. 일본은 동양의 훈족(Hun 族 : 匈奴族)임을 증명하고 있읍니다. 쉽게 보복할 수 없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습격하는 심술군입니다. 한국인들은 무던히도 잘 자제해 왔읍니다. 동봉한 기사를 읽어 보십시오. 선교부를 관련시키지 않고 공표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일본이 제 고장에서 어떠한 나라인지, 다른 나라들은 물론, 캐나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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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인종 차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국내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공표 하겠으면 _______라는 이름으로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아예 이름을 빼어버리십시오. 신문에 실릴 수 없게 될 경우, 적어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불쌍한 한국인들의 참상을 캐나다가 알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나는 우리가 될 수 있는대로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관여치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선생은 스스로 사태를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우리의 종교가 어두운 구석구석에 밝은 빛을 던질 권리를 거부해야만 할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사실을 그대로 발표하는 수밖에 없으며, 또한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리고 _______에 있는 우리는 한국에 있는 우리의 직원들보다 더 좋은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우편을 통해 이것을 보내고 있읍니다.
1919년 4월 10일
증거문서 XX
학살과 부락을 태워버린 사건들의 첫 이야기
4월 16일 경기도(京畿道) 수원군(水原郡) 팔탄시장 부근을 여행한 언더우드(H. H. Underwood)의 진술 :
일행은 아침 9시 30분경 필자의 차편으로 수원과 오산(烏山)을 거쳐 74킬로 떨어진 팔탄으로 갔다. 팔탄에 이르기 전 3, 4킬로 떨어진 곳에서부터 시장 넘어 얕은 산 뒤로 큰 연기 구름이 보였다.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차를 세웠는데, 필자는 인근의 한 동네로 걸어 들어가 한 농부를 만나, 몇 마디 인사를 한 후,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언더우드 : 저 연기는 무엇인가?
농부 : 불탄 마을에서 오르는 연기다.
언더우드 : 언제 탔는가?
농부 : 어저께.
언더우드 : 누가 태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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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 (두려워 주위를 살피며) 군인들.
언더우드 : 이유는? 사람들이 난동을 부렸는가? 그렇지 않으면 만세를 불렀는가?
농부 : 아무것도 안 했다. 다만 거기는 기독교인 마을이다.
언더우드 : 여기서는 독립만세를 부른 일이 없는가?
농부 : 얼마 전 장날, 장터에서 있었다.
언더우드 : 저 마을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는가?
농부 : 없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을 모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만세를 부르겠는가?
언더우드 : 군인들이 여기, 이 동네에도 왔었는가? 당신은 기독교인인가?
농부 : 아니다. 여기는 기독교인들이 없다.
언더우드 : 저 마을 이름은 무엇인가?
농부 : 제암리(堤岩里)다.
나는 이어 같은 마을에서 다른 한 사람을 만나, 같은 질문을 했는데, 위와 같은 내용의 대답을 얻었으며, 또 최근 제암리로 가 본 사람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으므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주민들은 지난 장날, 장에 모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도 들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은 후, 그 읍으로 차를 몰았으며, 읍 입구에 있는 개울을 건널 수 없었으므로 차에서 내렸다. 우리는 이 읍으로 들어가는 두 큰 길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주재소를 지나갔다. 주재소 밖에는 제 78연대 소속의 군인들이 서 있었다. 우리가 지나갈 때, 한 일본경찰이 나와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면서, 주재소 안으로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우리가 들어서자, 2명의 일본 군인이 일어나 나갔다. 우리는 모두 그들의 견장에 별 3개가 달려붉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제1군조의 뱃지라는 것이다. 우리들을 주재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 경찰관은 소총을 메고, 밖에 나간 군인들을 따라 나갔다. 얼마 안 되어 우리는 방금 나간 경찰관이 선두에 서서 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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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南陽)으로 가는 길을 가는 것을 보았다.
커티스(Curtice) 씨는 이제 증명서를 주재소 주임에게 제시하고, 그와 일본말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일본말을 하지는 못하나, 약간은 알기 때문에 대강은 알아 들었다. 커티스 씨는 그곳 도로·교량, 그리고 서울에 있는 서로 아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아무렇지도 않게 화재에 대해 물었다. 그는 소규모 화재가 있었으나 꺼졌으며, 그리 대단한 것이 못된다고 말했다. 그는 소요사건에 대해 질문받자, 그 부락이 약간 소란스러웠으나 이제는 다 끝났다고 대답했다.
커티스 씨는 일반적인 이야기를 좀 더 하다가, 불구경도 할 겸 소풍이나 조금하고 싶다고 하면서, 마을에서 인력거를 구해 달라고 했다. 주임은 ‘무슨 화재냐’고 물었다. 커티스 씨는 그 근처의 불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우리는 아마 인력거를 타고 5, 6킬로 더 시골길을 달려보고 싶다고 했다. 주임은 약간 놀란 듯 했으나, ‘예’하고는 인력거 승차장이 있는 곳까지 경찰관 한 명을 딸려 보냈다. 거기서 우리는 인력거 3대를 세내어 출발했다. 연기가 일고있는 마을은 읍에서 1.6킬로쯤 떨어져 있었으며, 약간 타고 가다가 인력거에서 내려, 낮은 얻덕 아래를 걸었는데, 산 허리에 얼마전 본 마을이 있었다.
우리의 추산과, 앞서 한국인들의 진술은, 그 마을에 약 40채의 집이 있었으나 이 중 4, 5채 만을 남기고 모두 타 버렸다는데 일치했다. 서 있는 4, 5채의 집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저 연기 나는 잿더미로 화해 있었으며 여기 저기 아직 불꽃이 보였다. 우리는 여인들과 어린이 및 노인들이 마을 윗쪽 산중턱에 앉아서 말없는 절망 속에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마을 끝에서 끝까지 걸었는데, 윗쪽으로 걸으면서 중간 쯤에 처참히 타버린 한 젊은이의 시체가 한 건물 밖에 뉘어있는 것을 보았다. 후에 이 건물은 교회였음을 알았다. 우리는 이 시체를 그대로 사진 찍었다. 마을을 돌아보고 난 후, 우리는 산 중턱을 따라 올라가, 위에 언급한 사람들 중 한 남자를 불렀다. 그가 왔기에 내가 질문을 했으나, 공포와 충격 때문에 얼이 빠져 있음을 알았다.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자기의 모든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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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간의 노력의 결과가 수포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위로하고, 언제 불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그는 어저께, 이맘때(오후 9시)라고 했다.
언더우드 :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한국인 : 군인들 짓이다.
언더우드 : 불에 탔거나, 부상 입은 사람은 많은가?
한국인 : 군인들은 교회 안에 있던 모든 기독교인들을 죽였다.
언더우드 : 화요일 오후에, 왜 교회에 모였는가?
한국인 : 글쎄, 군인들이 와서 기독교인 남자들은 모두 교회에 모이라고 했다.
언더우드 : 여자들도 교회에 모였는가?
한국인 : 없었다. 여자는 오지 말랬다.
언더우드 :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모인 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한국인 : 군인들이 그들에게 총을 쏘고, 또 칼질[군도와 총검]을 한 후, 교회에 불을 질렀다.
언더우드 : 다른 집들은 어떻게 불이 붙었는가?
한국인 : 어떤 집들은 교회의 불이 번졌고, 바람 방향이 달라 불이 번지지 않은 집들은 군인들이 따로이 불을 질렀다.
언더우드 : 당신은 어떻게 살아났는가?
한국인 :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기독교인들만 모이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언더우드 : 당신의 집도 불타버렸는가?
한국인 : 그렇다. (손으로 가리키면서) 폐허가 되었다.
언더우드 : 그런데 몇 집은 남아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한국인 : 외딴 집들이 몇 채만 남은 것이다.
언더우드 : 교회에서 죽은 사람은 몇 명이나 되는가?
한국인 : 약 30명.
나는 이야기를 끝내고, 다른 사람들 있는 곳으로 갔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젊은 여자 몇 명과 할머니들과 19~20세 쯤 된 청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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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기독교인이었으며, 북감리교회 선교부의 노블(Noble) 박사를 알고 있었다. 타버린 교회는 박사의 관할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위와 거의 같거나, 똑같은 질문을 했는데, 시간·방법·사망자 수·방화 등에 대해 같은 대답을 들었다. 나는 청년에게 어떻게 살아 있는가고 물었더니, 나무하러 멀리 산에 갔다가 밤에 돌아와 본 즉, 모든 친구들과 남자 친척들이 죽거나, 교회의 불더미 속에 파묻혔다고 대답했다. 이 사람들이 교회가 있던 곳을 가르쳐 주어, 내려가 보고, 또 한 구의 시체를 발견, 사진 찍어 두었다. 다른 시체들은 여전히 교회의 폐허 속에 묻혀 있었다.
남은 사람들은 아주 궁핍했다. 여기 저기 불 속에서 집어낸 가재 도구가 보였으나 이들은 먹을 양식이 부족했다. 그들 대부분은 식량과 농사 지을 씨앗·종자를 잃었고 그들이 크게 의존하던 가축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잃었다. 우리들은 그들의 사진을 찍은 후 작별을 고하고 마을을 지나, 아직 남아 있는 집들 중 한 집에 가 보았다. 그 집 주인은 노인이었는데, 자기 집이 홀로 남은 것은 불이 옮겨 붙지 않은 데다가, 자기가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방화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설명한 사건 전말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모든 면에서 부합했다. 그도 역시 몇 명이 피살되었는지 몰랐으나, 약 30명 정도로 보았다.
사진을 서너 장 더 찍고, 인력거 있는 곳으로 돌아와, 읍내로 떠났다. 인력거군들은 5킬로 쯤 떨어진 서흥(瑞興)이란 곳으로도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서흥에서도 제암리 사건과 같은 일이 2, 3일 앞서 일어났었다. 이들은 약 15군데가 방화되었으며, 대부분이 기독교인 근거지라고, 묻지도 않는데 말해 주었다. 이 말은 다른 이야기들과도 부합되며, 해당 지역 담당 선교사들이 서울에 보낸 보고와도 부합했다. 군인들은 약 2주 혹은 10일 전 자동차에 실려 투입되었으며, 최초로 마을들이 방화된 것은 그 때였었다. 주임은 얼마전 혼란이 끝났다고 보고했었으며, 우리가 방금 방문한 이 마을의 주민들이 폭력을 썼다는 비난은 듣지 못했다. 경찰은 다른 곳에서는 폭력이 자행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경찰에 작별을 고하고, 올 때처럼 서울로 돌아갔다. 서울에 도착한 것은 하오 5시 30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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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인들과의 회화에는 절대 자신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또한 내가 목격한 것에 대해서도 물론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일본어 회화에 대해서는 ‘불, 폭동, 소규모, 아니다, 그렇다, 교량, 도로, 자동차’ 등의 단어를 띠엄띠엄 알아 들었을 뿐이다.
증거문서 XXI
장곡천(長谷川) 총독의 시인(是認)
[재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 1919년 4월 27일자]
≪재팬 애드버타이저≫지(紙) 전용(專用) ;
서울발 4월 25일. -한국 주재 총독은 자기의 일부 부하들에 의해 취해진 강경 조처를 비난했으며, 죄악의 잔혹행위로 알려진 이 행위에 가담한 일부 부하들은 이미 적절한 처벌을 받고 있다.
총독은 26일 저명한 선교사 대표단을 접견했는데, 이들은 이 달 들어 군인들이 태워버린 한국인 마을들을 시찰했다. 총독은 대표단의 조사 내용을 주의깊게 들은 후, 그들의 진술은 사실이며 그것을 개탄하는 바라고 대답했다.
재발(再發)은 불용(不容)
관련자들은 처벌되었으며, 앞으로는 이러한 행위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한반도 전역에 엄명을 내렸다. 총독은 또 자기의 이 말을 듣는 자는 안심할 것이며 다른 외국인들도 그러할 것이며, 다시는 그러한 사건이 재발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총독은 선교사들이 중요 토의문제가 있을 때는 언제나 자기에게 직접 와서 말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부하들에게 가혹한 억압책을 장려한 일이 없으며, 또 앞으로 이를 용인하지도 않을 것이란 총독의 다짐은 매우 만족스러운 것이다.
피해자에 대한 원조
외국인 사회의 대표자 회합에서 선임된 한 위원회가 최초의 혼란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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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를 입은 자들에게 구조의 손길을 뻗힐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송영(松永) 지사를 방문했다. 송영 지사는 이들에게 정부가 피해자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일본 민간인도 의연금을 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인들로부터도 기꺼이 기부를 받겠으며, 받으면 자신이 직접 전담하여 그 성의를 알리겠다고 전했다. 위원회는 그에게 감사를 드리고 중앙위원회에 가기 위해 물러나왔다.
극악한 잔학상
총독에게 보고된 바 있으며, 서울 주재 ≪재팬 애드버타이저≫지의 특파원으로부터 본사에 타전된, 위의 기사에서 언급된 사실들은 가장 중대한 잔학상을 다루고 있는데, 이의 상보(詳報)가 동경(東京)에 전해졌다.
진상을 조사한 선교사들은 10명이었으며, 이 일행은 일본 헌병과 군인들이 방화한 마을들을 답사했다. 일본 관헌은 방화와 함께 마을 사람들을 집에서 몰아내면서, 값진 것을 못가지고 나가게 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페허 뿐이며, 어린이·노인·부녀자 등 마을 사람들은 산에 숨어, 거처나 먹을 것, 밤에 덮을 것도 없이 옛집으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했다. 이 산 속에 와있는 피난민들 중에는 부상자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치료를 받지 못해 패혈증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한데 모이게 된 희생자들
선교사 진상조사단은 조사를 위해, 방화로 파괴된 작은 교회가 있던 마을에 도착했다. 이 사건은 헌병과 군인이 이 마을에 들어가 명령을 내릴 것이 있다고 하면서, 마을 남자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여 저지른 것이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50여 명 정도가 되었다.
남자들이 전부 모이자 마자, 헌병과 군인들은 교회 건물을 둘러 싼 후,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발포를 개시했다. 교회 마루바닥이 신음하며 죽어가는 시체더미로 깔릴 때까지, 교회에 대한 일제사격은 계속되었다.
마을의 살아 남은 부녀자들은 선교사들에게, 군인들은 사격 후 교회 안으로 들어가, 아직 살아 있던 사람들을 총검으로 죽였으며, 남편의 운명을 알기 위해 교회에 접근했던 두 여인도 총검으로 살해되어 그시체는 남자 시체더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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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졌다고 말했다. 그 후 시체더미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질러, 교회는 다 타버렸다.
조사단의 선발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시체 2구가 아직 연기나는 폐허 속에 남아 있었으며, 다른 시체들은 이미 한데 모아 눈에 띄지 않게 처리된 뒤였다는 것이다.
이상은 조사단이 총독에게 보고한 것 중의 일부다.
증거문서 XXII
학살과 방화
[1919년 4월 29일자 ≪재팬 애드버타이저≫지 통신]
제암리 방화사건
≪애드버타이저≫ 특파원의 4월 20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다.
본 특파원은 얼마 전부터 마을 전체가 방화되고 마을 사람들의 거의 전부가 섬멸된 사건이 있었다는 풍문을 끈질기게 들어왔다. 최근 이러한 풍문은 경부선(京釜線) 상의 수원 서쪽 24~32킬로 떨어진 지역에서 나왔다. 방화되었다는 장소들의 정확한 명칭을 알기는 어려웠으나, 그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수촌마을 사람들이 이 군인들에 의해 섬멸되었다는 말을 결국 듣게 되었다.
미국 영사관의 커티스 씨가 이 풍문의 진부를 가리기 위한 조사단의 일행에 끼라고 했다. 조사단은 자동차편으로 그 지역으로 갈 것이며, 가능하면, 특히 수촌마을에 가보려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났고, 선교사로서 한국어를 대단히 면밀히 연구해 온 언더우드 씨도 조사단 일원이었으며, 한국어에 능통한 그는 통역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의 차를 타고 출발했으며, 사고에 대비하여 기계공 겸 조수로 중국인 운전수도 데려갔다.
우리는 4월 16일 수요일, 미국영사관에서 출발했다. 우리의 여행 코스 중 서울서 수원까지는 철도와 나란히 달리는 주요 신작로였다. 성으로 둘러싸인 고도(古都) 서울을 빠져나와 옛 신작로 길을 계속 달렸는데, 역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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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흥과 모습이 일본의 동해도(東海道)를 달리는 것에 비유될 수 있었다.
우리는 철도를 끼고 있는 수원시까지 내려와서, 이 곳에서 지금까지의 남향 코스를 급격히 바꾸어 서향 코스를 취했다.
지도상에 3등 도로로 표시되어 있는 이 길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으며, 인력거로 갈아 타기까지의 24킬로의 자동차 여행은, 좁고 썩은 교량들과, 솜씨 좋은 운전, 그리고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기려는 것 등으로 점철되었다.
여전히 일고 있는 연기
우리는 정오경 한 산비탈에 도착했는데 산 기슭에는 큰 읍이 있었으며,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곳이 발안장(發安場)일 것이고, 여기에서 우리의 목적지인 수촌은 5킬로 떨어진 거리이어야 한다. 언더우드 씨는 우리가 멎은 곳 부근의 농가에 가서 우리의 추측이 옳았는지를 알아내고, 또 수촌 방화사건을 확인할 정보를 얻으려 했다. 농부들은 우리 앞에 보이는 읍은 발안장인데, 거기에는 주재소가 있으며, 5킬로 더 떨어진 수촌은 타버렸다고 말했다. 우리는 읍내에서 1.6킬로쯤 떨어진 산 뒤에서 일고 있는 엷은 연기 구름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것은 어저께 정오가 조금 지나, 군인들이 불태운 제암리라는 마을이라고 대답했다. 왜 불에 타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마을에 교회가 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 농부는, 자기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이 곳 마을 사람들은 그 곳 마을 사람들 및 그 곳 희생자들에 동조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집에서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 전했다.
간단히 점심을 마친 후, 우리는 읍내로 향해 차를 몰았으나, 입구에 있는 유일한 다리를 차가 통과할 수 없어 도보로 걷기 시작, 바로 건너편에 있는 주재소를 지나갔다. 주재소 앞에는 하사관 지휘하의 제 78연대 소속 군인 1개조 16명 정도가 정렬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소리 없이 우리들을 통과시켰으나, 얼마 후 우리들에게 달려와, 주재소로 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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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이상 없다”
이 곳 주임은 커티스 씨가 제시한 신분증을 받고, 우리 모두를 앉으라고 했다. 커티스 씨는 이러한 경우에 흔히 있는 인사말부터 시작하여, 인력거를 구해 타고 수촌까지 가고 싶다는 뜻을 주임에게 전했다. 또 관할 구역 내에 소란이 없지나 않느냐고 물었는데, 얼마전 발안장 읍에는 데모가 있었으나 현재로서는 이상 없다는 대답이었다. 산 위에 보이는 저 연기는 무엇이냐고 물은 즉, 어저께 일어난 작은 불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수촌으로 가는 길에, 그 연기 나는 곳도 들리게 될지 모른다고 말하자, 반대는 하지 않았으나, 보잘 것 없는 화재 현장까지 구태어 찾아 간다는 데 대해 놀라는 태도였으므로 그 곳에 대한 은근한 관심은 더 커졌다. 우리는 한국인 경찰관과 함께 장터로 가서, 그가 얻어준 인력거를 타고, 1.6킬로쯤 달리다가, 연기나는 마을로 통하는 작은 길목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낮은 산 그늘에 자리잡은, 40여 채의 집이 있었을 법한 한 마을에 도착했을 때, 4, 5채의 집만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나머지 집들은 모두가 연기나는 폐허였다. 우리는 마을 앞으로 끝까지 쭉 뻗은 오솔길을 따라 걷다가, 중간 쯤에서 타버린 미루나무들로 둘러 싸인 한 울안에 다가갔다. 타버린 미루나무들은 벌건 재로 남아 있었는데, 이 울안에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몹시 타서 뒤틀린 시체 1구를 발견했다. 후에 알았지만 이 곳이 바로 교회가 섰던 자리였다. 우리가 다른 방향에서 돌아오면서 이곳에 왔을 때, 나는 또 하나의 시체를 교회 울안 바로 밖에서 발견했다. 이 시체도 몹시 탔으나 남자임이 분명했다. 교회 주변에는 고기 탄 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우리는 마을 끝까지 가서 산에 올라 군데군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대부분이 부녀자이며 노파도 몇 명 낀 이 사람들은 짚으로 만든 으지개 아래서 보잘 것 없는 물건을 몇 가지씩 옆에 놓고 있었다. 이 중 어떤 젊은 여인들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는데, 누구나 할 것 없이, 적나라한 비참과 절망 속에서 멍하니 무감각 상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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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을 집합
언더우드 씨가 동정을 나타내면서 한국어로 말을 건네자, 몇 사람은 이내 안심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여러 군데서 들은 말은 어느 경우나 본질적인 사실에 있어서는 부합했다. 이에 따르면 우리가 오기 전날, 병정들이 오후 일찍 마을에 와서, 남자 기독교인들은 모두 교회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명령대로 교회에 모인 인원은 30여 명이었다고 하는데, 병정들은 모인 사람들에게 사격을 가한 후, 교회에 들어가,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을 군도와 총검으로 모두 해치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후, 군인들은 교회에 불을 질렀으나 바람 방향과 마을 가운데에 자리 잡은 교회의 위치 때문에 윗쪽 집들에 불이 붙지 않자 집집마다 일일이 방화한 후 떠났다는 것이다.
인력거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폐허된 마을을 내려가다가, 우리는 말짱히 서 있는 마지막 집에 다가가, 집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단히 나이 많은 주인은 자기 집이 무사했던 것은 거리가 약간 떨어져 있는 데다 바람의 변덕 덕택이라 했다. 그가 살아 있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므로 교회로 불려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밝힌 사건 발생의 전말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꼭 일치했다.
우리는 인력거군들이 길에다 인력거를 놓아 둔채, 우리들을 뒤따랐음을 알았다. 그들은 처음에 나타냈던 무뚝뚝한 과묵한 태도를 바꾸고, 장터에 사는 인력거군들이긴 하나, 자진하여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한 사실을 확인해 줄려고 했다. 그들은 또 여기서 10리 떨어진 수촌으로 태워다 주었는데, 수촌도 우리가 볼 수 있었던 많은 마을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방화되었음이 명백했다. 인력거군들은 그 지방에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방화된 곳만도 모두 15군데가 된다고 했다.
두려워서 시체 매장도 못해
우리는 이 지역의 토박이 소식통들로부터 서울에 조금씩 흘러 들어온 모든 소문을 확인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목격했고, 듣고, 냄새맡았다. 그리고 신작로까지 와서 안전하게 될 때까지는, 길이 우리의 무거운 승용차를 위해서는 너무나 험난하므로 시장이 있는 그 읍내로 방향을 되돌렸다. 산 중턱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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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비참한 사람들 생각에 마음이 슬프고 무거웠다. 그들은 무서워서, 심지어 죽은 혈육들의 시체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주재소 밖에서, 읍에 들어 올 때 본 경찰관을 만나, 인력거는 형편 없고, 길은 나쁜 데다, 해는 기울어, 곧 서울로 올라간다고 말했다.
이 특이한 주재소는 전화 또는 전보로 연락이 안 되며, 도로는 거의 사용되는 일이 없으므로, 우리가 서울서 큰 승용차를 타고 갑자기 나타난 데다가, 커티스 씨의 외교에도 힘입어, 무단적(武斷的)인 억압 방법의 결과를 목격하고, 겸하여 간섭 없이 피해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특권을 획득하게 된 것이었다. 주요 신작로까지 왕래하면서 본 주목할 만한 사실은 우리가 나들이하는 현지 주민들을 본 것은 몇 명에 불과했으며, 집에 인접한 논밭을 제외하면 일하는 장면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좀 멀리 떨어진 전답들은 일손이 없이 내버려져 있다는 것은 현재의 절기로 보아 이상하며, 큰 길가에서는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영국 영사의 시찰
위의 ≪재팬 애드버타이저≫의 특파원은 또한 4월 24일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로이즈(Royds) 영국 영사는 우리가 제암리를 처음으로 다녀온 후, 정부 당국자와 회담한 자리에서, 우리의 조사 결과에 언급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선교 사업에 관심을 가진 영국인 몇 명과 함께, 제암리로 내려가 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자동차에 탄 일행은 로이즈 영사·캐나다 선교부의 하디(Hardy) 박사·게일(Gale) 박사·나·예비 운전수 등이었다. 이 승용차 이외에 2대의 오토바이가 동행했는데, 거기에는 그 지역 담당 감독인 노블(Noble) 박사·케이블(Cable) 목사·빌링즈(Billings) 목사·베크(Beck) 목사·헤론 스미드(Herron Smith) 목사 등이 동승했다. 스미드 목사는 한국 내 감리교회 일본인 선교 담당이다.
우리는 전번 때와는 달리, 다른 길을 택했는데, 그 코스는 교량이 더 나은 상태였다. 정오께 발안장 읍에 도착하여 주재소 앞에 주차시킨 후, 곧 읍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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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쳐 제암리로 향했다. 주재소 앞에는 많은 경찰관이 있었으나,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뒤에 쳐져서 방화된 마을까지 우리들을 따라왔는데, 우리가 온다는 것을 미리 경고받았음이 틀림없다.
청소되는 폐허
마을에 당도해 보니, 많은 인부들이 폐허를 소제하고 있었는데, 집들을 다시 지으려는 준비 같았다. 불탄 시체들은 모두 옮겨지고, 매우 서둘러 현장을 청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후에 찾아간 마을과는 현저히 대조적이었다. 그 마을들이란 이달 초에 파괴된 곳들이었다.
우리는 제지받는 일 없이 마음대로 사진을 찍었으나,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시작하려 하면, 경찰관이 주위를 배회하여 한국인은 얼어 버리는 것이었다. 경찰이 있는 데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는데, 그들은 우리와 말하는 것을 경찰이 보아 두면,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몹시 후환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었으므로 여러 군데로 흩어져,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들은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으며, 교회에 사람들을 모이게 한 방법·시간·학살 및 방화 등에 이르기까지, 내가 이미 전한 바 있는 사실들을 확인했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집 안에 있던 여인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 본 결과, 살해된 기독교인은 12명이라 하며, 이들의 이름도 알아냈고, 이 밖에 자기 남편들의 생사 여부를 알기 위해 교회로 갔다가 죽음을 당한 두 여인은 각각 40여세와 19세였다. 이 두 여인이 바로 우리가 처음 찾아갔을 때, 교회 밖에서 본 2구의 시체였을 것 같다. 이 가정(假定)이 가능한 것은 두 시체가 교회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살해된 나머지 남자들은 천도교인이며, 25명이었다 한다.
사람이 든 채 집에 방화
우리는 제암리에 이어, 10리 떨어진 수촌 마을로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의 첫 여행 때의 행선지였던 수촌이 5일 밤 또는 6일 아침에 방화된 것을 알았다. 조사단이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주민들은 5일 밤 자다가 자기들 집이 불붙는 것을 알고 깨어났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집에서 뛰어 나오자, 군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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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검에 맞거나 총을 맞았는데, 살해된 사람은 없으나 몇 명이 부상을 입었다. 우리는 칼에 맞아 팔이 절개된 한 남자가 치료를 받지 못해, 병균 침입으로 아마 사망할 것으로 보았다. 영국 영사는 그 후 읍내에 있는 주재소로부터 그 부상자를 수원에 있는 병원으로 입원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 마을에서는 교회와 약 30채의 가옥이 타버렸으며, 이 달 초에 일어났던 사건인데도 아직, 불탄 재를 정리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어 우리는 바로 산 위의 작은 촌락에 올라가 보았는데, 여기서는 4, 5채가 타버렸다.
우리가 돌아가려고 온 길을 도로 가고 있을 때, 나는 다소 뒤에 처져 걷고 있었는데, 샛길에서 갑자기 한국인 한 사람이 나타나, 5리 떨어진 게롱골 마을로 가자고 했다. 그는 19채의 집 중 17채가 타버렸다고 했다. 나는 시간이 늦어지고, 우리 일행이 훨씬 앞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응할 수 없었다. 나는 경찰의 앞잡이로서 우리 일행을 뒤따르던 한 한국인을 앞질렀다. 그는 그런 곳을 모른다고 잡아뗐으나, 내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말도 할 줄 아는 것을 보고는, 시인하고, 또한 제암리에 대해 우리가 들은 것을 확인했다. 그는 특히 제암리사건의 시간을 확인해 주었는데,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밤에 피해 다니던 한국인들이 등잔을 엎질러 한 마을이 죄 타버렸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 발생의 시간은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는 이 지역의 어떤 곳에 올라 가면 불타버린 9개 마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고지가 있다고 들었으나, 전에 들었던 소문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이미 충분히 보았기 때문에 그냥 서울로 올라갔다.
정부 관리들은 영사관 직원들에게 이러한 만행에 대해 크게 분개와 놀라움을 나타내면서, 피해자들에게 즉각적인 구제를 약속했다.
구제 활동을 펼 수 있도록, 외국인 회합이 개최되어 관리들의 일을 거드는 위원회가 생겼다. 관리들은 이에 대해 사의(謝意)를 나타내고, 이 구제 문제는 공식적인 절차를 거치게 되었다. 많은 관리들이 그 지역, 특히 제암리를 방문했으며, 구제를 벌리기 위한 활발한 조처가 취해지고 있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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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있다.
나는 제암리사건의 폭로를 계기로 하여, 이러한 억압에 종지부가 찍히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증거문서 XXIII
북한(北韓)에서 일어난 사건
1919년 4월 20일, 일요일 오후 황해도(黃海道) 신계군(新溪郡) 농덕마을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인 면장(面長)은 한국인 경찰관 2명을 데리고 면에서 5리쯤 떨어진 이 마을에 왔다. 이들은 이 곳 순회교구 담당인 설교사 송창식의 집에 갔으나, 송 씨 부부는 부활절 예배를 위해 다른 교회를 순회 중이어서 집에 없었다. 이들은 그의 나이 많은 어머니를 때리고, 일곱 어린이들을 놀라게 했다. 뿐만 아니라, 물동이·접시·가구 등을 깨고 송씨의 책들을 찢어 버렸다. 또한 이 마을 교회의 지도자는 부유한 가정 출신의 젊은이로서, 서울에서 성경학교에 다녔었다. 그러나 그는 3월 1일 다른 곳에서 체포되었었다.
이들은 이제 그의 집에 와서, 그의 할아버지를 때리고, 머리에 깊은 상처를 냈다.
이들은 또 주간학교 교사를 때렸으며, 다른 기독교인들 집에 가서는 가재도구를 때려 부쉈다. 이 밖에도 교회의 모든 창문·등잔·난로 등을 때려 부수고, 설교대·성경책·찬송가책 등을 교회 마당에 들어내다 태워 버렸다.
이들은 기독교인들 같은 저급한 사람들은 살 권리가 없으며, 그 지방에서 모두 쫓아 버리겠다고 했다.
이 마을에는 데모란 것이 없었다. 마을 기독교인들은 다른 곳에 가서 독립운동 데모에 가담한 일도 없다. 며칠 전 기독교인이 없는 면에서 비기독교인에 의한 데모가 있었는데, 그 때 6명이 현장에서 총에 맞아 죽고, 많은 부상자가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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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문서 XXIV
군도에 찔린 관립학교 여학생의 이야기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우리는 파고다 공원에서 출발, 대한문(大漢門)으로 가서 힘껏 “만세”를 불렀다. 거기에서 광화문(光化門)으로 가, 다시 만세를 부른 후 서대문 쪽 불란서 영사관과 미국영사관으로 나아가서, 거기서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다. 우리는 서소문(西小門)을 지나 다시 대한문으로 나아갔으며, 거기서 판정동[경찰서가 있음]으로 갔다. 거기에는 우리의 행진을 제지하러 나온 기마 헌병들이 있었으나, 우리가 총독부로 향해 돌진하고 있을 때, 고등관(高等官)이 칼을 뽑아들고 마주 나오면서 칼을 휘둘러, 나의 등을 찔러 7.5센티미터 길이의 상처를 입혔다. 나는 칼에 찔려 넘어지자, 고등관은 발로 내 머리를 짓밟아 약 20분간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되찾자, 일어난 나는 이빨 1개가 부러지고, 코와 입술이 타박상으로 째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내 등은 7.5센티미터나 찔리고, 여러번 걷어채인 내 다리는 검푸르게 멍들어 있었다.
증거문서 XXV
곽산(郭山)과 정주(定州)
곽산교회는 1919년 4월 25일 아침에 불타고, 기독교인들은 불을 끄러 교회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정주에 수감된 피검자들이 받은 잔혹한 고문은 아프리카 야만인들이나 할 법한 그러한 것이었다.
증거문서 XXVI
장문 보고서의 일부
1919년 4월 24일
탄압 방법
다음 글은 거족적인 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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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진술은 미국정부의 대표들에게 맡긴, 서명받은 선서 구술서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 내 여러 지방에 따라 여건이 조금씩 다르며, 사건의 진행이 항상 같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반적인 기술이 아닐 수 없다.
데모가 시작되었을 때 한국인들 속에서 조금의 폭력 행사도 없었다는 사실은 유의돼야 한다. 이 시위운동은 공표된 바와 같이 민족의 여론을 평화스럽게, 그리고 질서있게 표현할 예정이었으며, 초기의 공공집회에 있어서 폭력은 각별히 금지되었고, 후에 폭력 사용을 경고하는 특별한 통지까지 유도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관여한 그들의 데모는 두드러지게 자제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래서 후에 군중이 경찰과 군인들의 폭력에 분개하여 두 세 번 모종의 보복을 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처음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경찰은 만세 부르는 데모 대원들의 무모해 보이는 대담성에 당황한 듯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첫날에 경찰이 군중과 농담까지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군중이 끝까지 해산하기를 거부하자, 관헌의 기분은 초조와 분노로 변하여 미친듯이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경찰·헌병·군인 및 소방대원[갈구리창으로 무장]들은 남자·여자와 어린이들을 무차별하게 발로 차고, 치고 때리고 했는데, 총개머리판·칼[처음에는 칼집에 든 채로였으나, 후에는 집에서 빼어, 유혈이 됨] 곤봉, 그리고 화물찍는 갈구리[엄청난 상처를 입혔음] 등이 사용되었다. 데모가 계속됨에 따라서 칼과 총검이 마음대로 사용되었고, 첫날 이후 데모의 물결이 전국에 파급되자 군인과 헌병들은 경고없이 군중에 발포했으며, “만세”소리가 들리는 때는 언제나 그 방향에 대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부상시켰다. 이에 보복이 따르는 것은 불가피했다. 헌병대 창문이 부숴지고, 헌병들이 살해되기도 했다. 이의 실례는 모락에서 일어났다. 헌병들은 사람들로 가득찬 시장에 발포, 여러 명을 죽였다. 군중은 헌병들을 추격하여 4명을 죽인 것이다.
조선 주재 헌병사령부의 제2인자인 전전(前田) 대령은 이와 관련하여, 3월 30일까지의 경찰 보고를 인용, 경찰과 헌병이 무기를 사용한 곳은 38개소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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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경우 한국인들이 난폭해졌기 때문에 그들 자신과 정부 재산의 보호를 위해 무기의 사용이 필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지역에서 보통 관헌 3, 4명이 수백 수천 명의 한국인들을 상대했다고 전하면서, 필요 이상의 무력은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모든 경우, 한국인 시위자들은 경찰의 방자한 잔인성에 격분하게 되기 전에는 폭력을 삼가했으며, 당국의 무력 조처는 점차 더 필요하게 되기는 커녕, 오히려 최근 일어난 대규모 학살과 마을들의 방화는 데모가 끝나고 군중이 해산한 이후에도 자행되었던 것이다. 경찰은 이것을 응징적인 조처로 간주할지 모르나, 불가피, 또는 자위라는 구실로써는 정당화할 수 없다. 더군다나, 경찰과 외국인들이 동일 사건에 대해 각각 보고할 경우, 언제나 경찰 보고는 날조된 것이며,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곳에서 일어난 사건의 경과에 대해 경찰의 발표는 신뢰할 수 없다.
한국인들이 경찰서를 습격했다고 경찰이 비난하는 증거가 타당성이 없음을 나타낸, 적어도 한가지의 실례를 들자면, 한국인들의 시체는 그들이 쓰러진 시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헌병대 부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이 죽은 곳은 제지를 받지 않고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들이 쏜 총을 맞고 쓰러진 자리이다. 안동(安東)의 경우, 이를 입증할 사진이 있다. 그곳에서는 30명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한 선교사는 발표가 있은 지 14간후 시내 여러 곳의 길가에 쓰러져 있는 7구의 시체를 확인했다.
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의 공식 기록은 경찰과 헌병 9명이 살해되고 1백 9명이 부상했으며, 한국인은 3백 61명이 죽고 8백 60명이 부상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경찰 자체의 인명 피해는 정확함이 틀림없겠으나, 한국인의 인명피해 집계는 옳은 수치에 훨씬 미달이며, 공식적으로 사망 또는 부상한 자들만을 계산한 것이다. 컴컴해진 마을 거리에서 무차별 발표를 당해 죽거나 부상한 자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관영지(官營紙)에 보도된 개별 사건을 종합해 보면, 6백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이 수치에는 최근의 발포로 인한 사망자 수가 끼어 있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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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과 소요의 때에 체포하면, 의례 다소의 폭력이 따르게 마련이겠지만, 이 곳 업저어버들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관헌의, 정당화될 수 없는 무턱댄 잔인성이다. 이것은 체포자에 대한 학대와 구타 뿐만 아니라, 체포하려 하지도 않는 그저 길거리에서 보는 사람도, 누구에게나 해명 또는 조사 없이, 막무가내로 때려, 테러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의 행동이다. 한국인들이 불평이나 항의라도 하면, 더욱 심한 대우와 심지어 총살까지도 각오해야 한다. 일본 민간인들도 경찰의 격려를 받아가며 이같은 일에 가담했다.
경찰이 사용하는 방법 중 특히 몸서리쳐지는 것은 여자들을 다루는 방법이다. 가장 빈번히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는 것은 경찰이 여자들에게 자행하는 난폭한 짓인데, 한국인들은 이러한 난폭한 행동 때문에 그들에게 ‘야만인’이라는 최악의 저주를 퍼붓는 것이다.
그들은 여자들을 경찰서·자택 또는 야외에서, 심문하기 전이나 또는 심문 도중에 발가벗기고 구타했는데, 이는 경찰이나 군인들이 보통 까닭없이 모욕을 주면서 야수적인 기호에 탐닉하려는 것이었다. 교육받은 젊은 여인들이 당한 만행은 첨부 문서들에 나와 있다. 총독 정부가 발표한 대로 새로운 병력의 도착과 더욱 가혹한 억압 방법이 도입된 이래, 여성들에 대한 군인들의 만행은 더 많이 보도되었다. 과거에는 이런 형태의 폭행이 없었다는 것과 이러한 만행설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새로운 명령과 부합되는 것으로서, 이 소식 자체가 믿을 만한 소식통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 말고도, 있을 법한 일이다. 경찰에 이를 불평하면 구타당하며 동시에 또, 그런 불평은 공무원에게는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부상자에 대한 대우도 매우 잔인했다. 대부분의 경우, 부상자는 병원에 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기독교 계통의 병원에 데려온 부상자들은 흔히 부상자의 친지에 의해 몰래 들어온 경우이다 우리 의사들은, 부상자가 병원 밖으로 연행되어 구타당하기도 했고 어떤 부상자들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퇴원하기도 전에 병원에서 감옥으로 직행된 사실을 증언할 수 있다.
평양의 기독교 계통 병원의 경우, 의사들은 총상으로 사망한 환자를 총상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자연사한 것으로 보고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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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감옥은 첫 날부터 초만원이었다. 명사에 대한 예외도 있긴 했으나, 대부분의 경우, 피검자들은 잔인한 대우를 받았다. 데모가 처음 발발하면서부터 대량 체포가 따랐다. 심문은 될 수 있는대로 빨리 끝냈으면, 상당한 수의 사람들이 하루 내지 6주간 구류를 살고 풀려 나왔다. 어떤 경우, 부녀자들은 감옥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았으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서울에서 체포된 소녀들은 한결같이 여간수 및 경찰관들의 만행을 불평하고 있다. 체포된 자의 총수는 1만에서 4만까지로 구구하다.
일본법에 따른 재판이 지난 몇 주 동안 계속되어 왔으나,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변명하지 않았으며, 독립을 위한 소망을 나타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고, 그 이외에는 어떠한 범법 행위도 없었음을 주장했다. 그들의 죄과에 대해서는 6개월부터 3년까지의 중노동형이 선고되고, 많은 경우는[일본 법으로서는 다스릴 수 없는] 최저 15대에서 최고 90대까지의 태형(笞刑)이 부과되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곤봉과 갈구리창으로 무장한 소방대원들은 많은 지방에서 마음대로 군중을 때리고, 해산시키고, 공포에 떨게 하도록 재량권이 주어졌다. 다른 지방에서는 [예비군인 듯한] 일본인 민간인들도 곤봉과 갈구리로 무장, 한국인들에게 달려들었다. 한국 군중은 9년 전 무장해제를 당했기 때문에 무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경찰은 후에 각오해야 될 일이 무엇일지 암시하기 위해, 길거리로 무장한 깡패들[한국인 복장을 한 일본인들]의 떼들을 행렬시켰다. 선교사들이 이들한테 구타당할 것이라는 풍문이 자자했다. 총독부 관리들은 한 신문사 특파원과 미국 관리에게 자기들은 밤중에 담배불을 붙이고 다니면 행패를 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왜냐하면, 담배불을 붙이고 다니면 선교사로 오인될 우려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래서 선교사들은 우호적인 관리들로부터는 야간에 길거리를 다니지 말라는 당부를 받았다. 이 깡패들은 그 후 철수되었는데, 이는 미국 총영사의 항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의 데모는 한 달 이상 계속되다가 이제 거의 완전히 끝났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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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배치된 군인들은 총과 칼 등을 사용하면서 점점 더 난폭해지고, 민중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
봉기 진압에 있어, 정부의 기독교 교회들에 대한 태도
‘정부의 태도’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추리적인 문구로 표현한다. 교회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태도는 신앙은 자유라는 태도며, 기독교인들은 같은 소요사건에 관련된 다른 시민들과 똑같은 처우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정부의 진정한 태도는 정상적으로 기관원들·경찰·헌병 및 군인들의 행동으로부터 추리되어야 한다.
일본은 처음부터, 한반도를 통치하게 된 이래, 신교(新敎 : Protestant)를 항상 정부의 두통거리로 여겼다. 그 이유는 먼 데서 찾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발족하면서부터 독재 정부에 안겨 주었던 문제 때문인 것이다. 그것은 로마(Rome) 시대에도 존재했었다. 그것이 이제 한국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침략국이 피지배 민족을 분열시켜 자기 나라에 동화시키려는 정책에 방해가 되는 가장 강력한 조직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에이 제이 브라운(A. J. Brown) 박사는 그가 지은 1912년의 ‘105인 음모 사건’이란 소책자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일본은 외국 실업인들이 댓가를 치르고 알게 된 것같이, 그들 통치 하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어한다. 이는 자기들 계획을 절대적으로 마음대로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한국에서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 교회에서, 그들이 관장 못하는 수많은 강력한 조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들 자신이 인식하게 된 자연스런 단결[특히 우리 교회의 정책 형태 하에서] 이 있으며, 이것이 정부에게는 하나의 명백한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위기에 처하여, 교회에 대한 정부의 전반적인 태도는 이러한 유대와 단결의 인식으로써 크게 영향을 받는다. 기독교에 대해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무단 정부는 교회의 제일의 적인, 정신적인 목적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할 뿐더러, 또 여기 관련되는 정신적인 힘과 요소들이 얼마나 강한가를 적절히 평가할 수 없어서, 그 정치 단위 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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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적절히 조직된 그 집단이 동시에 그곳 인구 중 가장 계발되고 진보적인 계층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우려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마한(Mahan) 제독은 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서한에서 위의 소책자[105인 음모 사건]를 인용,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모 사건, 21페이지 참조]
‘기독교인의 모임들이 야기한 의혹은 로마시대부터 당연할 뿐만 아니라, 이는 비기독교 정부들의 특색으로 되어 왔다. 이것은 엘리자베드(Elizabeth) 및 제임즈(James) 1세 시대 영국의 천주교도들의 경우에서처럼 충분한 근거가 있을 때도 있었다. 활력에 넘치는 긴밀한 종교적 공감으로써 결속한 사람들은 다른 목적, 이를테면 애국적 목적을 위한 결합에 대단히 유리한 상태에 있다.’
교회 조직의 세력에 대한 정부의 우려는 정부가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에 의한 기독교 포교를 장려한 것을 보아도 명백히 입증된 것이다. 이 회중교회는 단합과 통합성이 결여된 것이므로, 지배하기가 좀 수월하다. 이 교회는 순전히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자치와 통일의 장로교 조직, 그리고 단합과 또한 강력한 외국기구 관련을 겸한 감리교 조직은 둘 다 일본정부에게는 위험스런 존재다. 무단 정부가 한국 내 교회를 의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외국의 영향력이 한국에서는 지대하리라는 사실이다. 한국인의 교회가 이론상으로는 자치에 의해 운영된다고는 하나, 오랜 세월 동안 외국 영향력의 지배를 받아 왔음을 시인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신속히 자립하고 있으며 집회에서 표결을 통하여 외국인들을 누를 수 있고 또 때로는 압도할 상태가 되어 있다. 바로 금년에는, 교회의 집회에서 선교사들이 자문적인 참여 이외의 활동에는 실제로 참여하지 않는다는 선교사들 자신의 운동의 개시를 보았다. 이러한 외국 영향력의 존재는 의심할 여지없이, 당국을 더욱 자국하게 되었다. 당국은 외국 영향력이 그들이 바라는 일본화정책에 장애가 된다고 느끼고 있다.
한 전직 총독은 “우리는 한국인들을 미국인들의 아류로 만들려 하는 이 곳 선교사들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는데, 이 말이 정당할 수는 없으나, 정부의 공식적 견해 를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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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뚜렷한 한 몫을 맡은 현 소요의 즉각적 결과는 이미 기독교에 대해 지니고 있던 의심을 확인 및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 소요가 절대로 순전한 기독교인의 봉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나, 나아가 그것의 발단도 순전히 기독교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도, 기독교가 정부에 적의를 품고 있다는 생각을 상쇄하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정부의 이같은 견해는 교회에 대한 현재 처우의 해명으로서 유의해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정부는 이같은 취지의 발언을 한 일이 없으나, 관리들의 행동은 정부의 발언 이상으로 이러한 사실을 드러낸다.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 도의 실질적 책임자인 충청도의 부지사는 일부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저명한 한국인들을 불러들인 공식 석상에서, 기독교는 서양 종교이기 때문에 동양인에게는 적응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경찰은 어디서나, 위와 같이 충고하고 있다. 검사는 모우리 씨에 대한 공개 재판의 논고에서 “이 문제에서 기독교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데모가 일어난 첫 날부터, 관리들은 어느 계층의 참여보다도 기독교인의 참여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데모에 직접 참가한 사람들은 물론 현장에서 무차별 검거되었으나, 전국적으로 행해진 검거 선풍 때에는 기독교인들이 유별나게 많이 검거되었으며, 많은 경우, 심지어 데모가 일어나기 전에도 그러했었다.
경찰은 즉각 전국적으로 목사·장로, 이 밖의 교회 임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는 몇 주 동안의 감금과 심문 끝에 석방되었다. 이들에 대한 선고는 매일 있었으며, 데모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도 6개월부터 3년간의 징역형을 받았다. 물론, 데모에 고의로 참가하여, 이의 결과를 예상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변명이 있을 수 없었다. 우리는 단순히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대량으로 검거되어 구타당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마을의 남자와 여자들을 모아 놓고, 기독교인이라고 시인한 사람들만을 골라 학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내보냈다. 군인과 헌병들은 길가는 사람들을 보고 기독교인이냐고 물어, 그렇다고 하면 때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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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마을에 남아 있는 기독교인들은 그 곳 경찰과 헌병들로부터 온갖 선전을 들었다. 그들의 선전은 기독교는 근절되고, 신자는 총살당할 것이며, 기독교인의 집회는 금지될 운명에 있다고 했다. 또한 천도교는 한국 고유의 종교이므로 완전히 폐지해 버리게 될 것이나, 기독교는 외래 종교이므로 전폐되지는 않더라도 법적인 제한을 가해, 현재 규모의 절반으로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선전에는 일관성은 없으나, 모두가 협박 전술의 일부임은 분명하다. 선전이 근거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19개 교회가 군인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또는 깡그리 파괴되었다는 것으로도 입증이 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종·기물·성경 및 찬송가가 전소 또는 파괴되었다. 이 밖에 7개의 교회가 전소되어 버렸다. 우리는 아래 기록한 글 이외에는 다른 선교부의 교회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만행의 영향은 지방마다 달랐다. 지방에 따라서는 예배가 완전히 중단되었고, 체포되지 않은 교회 임원들은 피신하고, 교인들은 흩어졌다. 지방에 따라서는 교회의 집회가 금지되고, 어떤 곳에서는 예배가 계속은 되었으나 형사와 밀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서 열리고, 교인의 수는 줄어 들었다. 또 어떤 지방에서는 소요가 교회의 집회에는 영향이 없었고, 많은 새로운 구도자(求道者)들이 기독교인들이 획득한 애국이란 명성에 이끌리어 참석하기도 했다. 교회 재산을 파괴할 때, 그 지방의 관리들은 항상 당치도 않는 해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다. 가령,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의 포기를 과시하기 위해 자신들의 교회에 방화했다든가,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적대시하여 교회를 불살랐다 하는 것 등이다.
일본으로부터 추가로 병력이 들어온 후,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하고 있다. 이 군인들은 “가혹한 조처를 취한다”는 확고한 목적으로 투입되었으며, 이는 실제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방화·칼질·파괴·전 마을의 방화[경우에 따라서는 흉노족과 투르크(Turk) 족이 으레 하는식으로 마을주민을 학살] 등을 일삼는 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재 기록코자 하는 것은 서울에서 80킬로 떨어진 일단의 마을들에 관한 것이다. 마을이 방화되었다는 첫 소식이 서울에 들어온 지 2주 후, 외국인들은 그 진상을 조사했다. 방화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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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시찰하러 떠난 조사단은 여전히 연기가 일고 있는 한 마을에 당도했다. 그 마을은 바로 전 날 방화된 것이다. 제암리라고 하는 이 마을에는 40여 호가 있었는데 군인들이 마을의 감리교회에 마을 남자 30여 명을 불러들였다. 이들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이었다. 군인들은 교회에 모인 이들에게 모두 발포 살해하려 했으며, 이어 교회를 불질렀다. 6명이 타고 있는 교회 벽을 뚫고 탈출하려 했으나, 밖에서 총검에 맞아 숨졌다. 자기의 남편을 찾아 간 두 여인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이어 마을은 깡그리 불에 타버렸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과 미국의 영사관 대표, 적십자사 직원, 그리고 해외 거주 영국애국동맹(The Patriotic League of Britons Overseas) 회원들에 의해 직접 확인된 것이다. 폐허와 타죽은 시체, 총검에 찔려 죽은 시체의 사진도 찍혔다. 이러한 만행은 외국인들이 의외로 그곳 사건을 조사하러 현지에 내려가기까지 그 지역에서는 2주간 계속 자행되었던 것이다. 외국인 조사단 일행은 그 지역의 다른 여러 군데의 파괴된 마을도 시찰했으며, 그 밖의 11개 마을에 관한 소식도 들었다. 이같은 사실은 다른 지역에서도 보고되고 있으며, 이 보고가 다른 상황 하에서라면, 의아스럽게 받아 들여질지 모른다. 그러나 잔혹하기 이를데 없더라도 엄연한 사실이다. 모든 경우, 군인·헌병 및 경찰의 적대(敵對) 대상은 기독교인이다. 폐허화한 지역의 인접 지역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위와 같은 것이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들어, 사람들은 밤중에도 의지개 없이 산에서 지새고 있다. 이들은 야밤 중에 자고 있는 동안 마을이 방화되고, 주민이 학살될 것이 두려워 마을에 있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마을에서는 기독교인들에게 교회 건물을 헐으라고 명령하고, 기독교인이 안되겠다는 서약에 서명하지 않으면 반란 분자로 체포할 것이라고 했다. 기독교인임을 공언(公言)하는 것은 혁명 목적의 고백과 다름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미국의 한 교회 잡지는 “일본인은 미국 사람들에 대해 숭배에 가까울 정도로 존경심을 느끼고 있다”는 취지의 글을 실은 일이 있는데, 그 글을 쓴 사람은 이곳 정부 관리들과 잠시라도 같이 지내보면 미국과 기독교에 관한 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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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견해를 알게 될 것이다. 공포 분위기가 계속 지속되고 있는 일부 시골 지역에서는, 주민은 총에 맞을까 두려워,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가지 못하고 있으며, 감히 들에 나가 일도 못하고 있다. 다른 방법으로 공포를 일으키게 하는 술책도 사용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을 마치 총살이라도 할 것같이 줄을 세워 놓았다가 돌려 보낸 후, 다음날 다시 이러한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인데, 실제 발포는 않더라도 주민들은 이러한 때마다 눈 앞에 학살과 황폐의 실례를 보게 될 듯하여 이 위협이 언제 실천에 옮겨질 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증오는 항상 기독교인들에게 쏠렸다.
이러한 비인도적 만행이 세상에 알려진 결과, 정부는 제암리 등 4개 마을 주민들을 위한 구제 대책에 착수하여, 그들에게 농기구와 씨앗을 제공키로 약속하고 있다. 죽은 농부들을 소생시킬 수는 없는 것이나, 외국인들이 만약 분개의 선풍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조처도 취해지지 않고 있을 것이다. 네 마을보다 2주 앞서 폐허가 된 마을들의 경우, 아무런 조처도 취해진 바 없다. 일본인들의 변명은 이러하다. 지시할 것이 있어 마을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했으나 이들은 도망가기에 바빠, 등잔을 차 넘어뜨려, 여기서 화재가 났다는 것이다.
일본은 학살에 대해서는 해명을 않고 있으나, 이것이 일본인들이 받아들이는 보편적인 경찰 해명의 본보기이다. 이 보고서에서 이 이상 더 자세히 밝힐 수는 없다. 다음의 문서들도 참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규를 진압한다는 미명 아래 기독교 억압을 위한 일관된 운동이 계속되고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말살하고 기독교의 전파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노인과 어린이들을 욕하고, 때리고, 무장 관헌으로 하여금 집회를 해산시키고, 대량 검거, 검거된 자들에 대한 학대, 공갈, 협박 및 학살 등이 자행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진술은 사진, 서명된 성명 및 정리되어 있는 이야기 등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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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현 소요의 결과에 대한 의문은 조선총독부가 총독부 내 민간인 공무원들과 일본정부의 진보파 계열로부터 조선통치를 비판받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더 늘어나고 있다.
조사자들은 무단 정권을 어리석은 정책이라고 규정지으면서 비판을 주저하지 않으며, 일본 내 유력지들은 그들의 정보가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항의에 가담하고 있다. 한국인을 위하여, 한국어로, 일본에 의하여 발행되는 ≪반도(半島)≫라는 월간 잡지는 4월호가 몰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발행이 금지되었고, 편집인은 체포되었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이 잡지는 총독부가 사태를 잘 다루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 장문의 논설을 실어 당국으로부터 그러한 조처를 당한 것이다.
일본의 학생층이 한국에 자유를 주자는 데 호의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풍문 이외에는, 물론 한국의 독립에 찬성하는 일본인은 없다. 가등(加藤) 자작(子爵)과 같은 진보적인 인사들은 한국의 자치에 찬성하고 나섰으나, 그들 대부분은 무단정치가 장차 민사정치로 대체되어야 하며, 총독통치는 식민정책에 실패했다고 보고 있다. 위에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 본토의 양심있는 일본인들은 한국에서의 정부의 극단적인 방법에 찬성하지 않고,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정부 개혁이 있으리라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정무총감 산형(山形)의 최초 성명은 “정부의 개혁이 있을 즈음, 동요가 생긴 것은 유감스럽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모든 관리들은 어떠한 개혁도 시작되기 전에, 현재의 봉기는 진압되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는 듯하며, 한편 일본 의회의 한국사태에 관한 질문은, 소요의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여 제거하라는 것보다도, 한반도에서 질서를 유지 못한 점을 들어 행정부를 비판하는 데 있는 듯하다.
우리는 민주주의적인 경향이 일본제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그밖의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명백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며, 중대한 사건은, 어느 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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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고가 선교회 이사회에 도달하기 전에도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다. 그저께만 해도 2대의 자동차에 분승한 일본인들이 “민주주의 만세”를 부르며 서울 거리를 누볐었다. 이 데모와 관련하며 6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다수의 상반된 세력이 오늘날 일본과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정책이나 통치의 성격, 또는 이 두가지에 어떤 현저한 변화가 있지 않는 한, 한국에서의 선교 사업은 대단한 제약과 곤란의 시기를 겪게 될 것이라는 가장 명백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심각한 문제들이 앞에 놓여 있다.
정무총감은 동경 여행을 마치고 최근 돌아왔다. 그가 동경에서 돌아오면 유화정책을 발표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으나, 도리어 공식 발표의 취지는 과거에 사용된 “관대한” 정책은 극도의 강경책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총독은 “정부의 경질을 도모하기 위해 일으키는 치안 교란”은 10년의 징역으로 처벌할 새로운 법을 공포했는데, 이 법에는 특히 외국인도 포함시키고 있어 주목된다.
행정부가 이 때에 레호보암(Rehoboam) 정책을 쓴 효과가 어떠할지는 앞으로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들은 멸망시키려는 자들을 먼저 미치게 만든다”는 취지의 진부한 격언의 인용이 합당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바로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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