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자료

[스크랩]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의 항쟁/<자료제공: 생명의 말씀사 `청교도 인물사`>

baromi 2008. 7. 11. 09:21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의 항쟁

 

스코틀랜드에 돌아온 낙스를 귀족과 시민들이 환영하였다. 낙스는 제네바에 있을 때 일시 스코틀랜드에 들려 여러 귀족들을 동역자들로 세웠다(1555). 모레의 백작인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 아질의 백작인 로른(Lorne) 경 그리고 레싱턴의 윌리엄 메이트랜드(William Maitland) 등이 그들이다.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시민들이 낙스와 같은 개신교도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은 우선 신앙적 이유가 가장 컸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가 급속히 프랑스에 귀속되어 간다는 의구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섭정이며 가톨릭 교도인 기즈의 메리가 딸을 프랑스의 황태자와 결혼시켜 스코틀랜드를 프랑스에 예속시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이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이제 이들은, 개신교도가 된다는 것이 국가를 사랑하는 것과 일치한다는 인식틀을 가진 것이다. 낙스는 자신을 환영해 주는 이들로부터 깊은 감격을 느꼈다.

 

이들은 1557년 12월 참복음을 증거하는 목회자 아래 종교 개혁을 하겠다고 서약하여 “제일 계약”(the First Bond)에 서명했다. 1559년 낙스와 이들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시민들은 퍼스(Perth)에 일단 집결했다가 에든버러에 진군하여 섭정에게 종교 개혁을 설득시키려고 하였다.

섭정은 4,000여 명의 정부군과 900명의 프랑스 지원 부대에 전쟁 준비를 명령하였다. 낙스의 군대는 훈련이 안 된 시민군 5,000여 명이었다.

군사적으로 열세인 낙스는 영국 여왕을 직접 만나 지원을 부탁하려다가 자기에 관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감정이 나쁘다는 것을 감안하여 유능한 외교관 윌리엄 메이트랜드를 특사로 보내 영국 여왕의 지원을 확약받았다.

여왕 엘리자베스는 낙스의 여성관에 불만이었지만, 스코틀랜드가 가톨릭으로 남아 프랑스와 연합하여 영국을 위협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불편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지혜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는 있었다. 영국은 일만 명의 군대 지원을 약속하였고, 실제로 윈터(Winter) 제독이 1560년 1월, 8척의 함대를 이끌고 낙스의 진영에 도착하였다.

1560년 1월 마침내 스코틀랜드에서 종교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스코틀랜드의 국내 문제에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한 국제전쟁이 되었다. 낙스는 같은 해 4월부터 에든버러 중심에 있는 성 자일스 교회(St. Giles Church)를 담임했다. 낙스는 그의 후원자들이 이 전쟁에 소극적임을 알고 곧 승리할 수 있다는 전투 정신을 설교로 불어넣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슬픔과 혼란과 공포가 기쁨과 명예와 용기로써 변화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베냐민 지파를 이기게 하셨듯이 우리를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왜냐하면 시절이 아무리 험악하더라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리는 다시 한번 세상에 널리 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했는지 엘리자베스 여왕의 특사 토머스 랜돌프(Thomas Randolph)는 여왕에게 “낙스의 음성이 500개 나팔보다 더 효과적으로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들]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던디와 퍼스에서 낙스의 설교를 듣고 가톨릭 교회의 성상을 파괴하는 소동도 일어났다.
한 청년은 낙스의 설교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는 처음 설교를 시작할 때는 몸을 약간 구부정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어찌나 활기와 정력에 넘치는지, 마치 설교단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그 속에서 날아 오르려는 것처럼 보였다······[그가 다니엘서를 강해할 때는 양심이 너무 찔려] 펜을 잡고 필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낙스의 설교는 청중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낙스군과 영국 연합군은 1560년 4월 4일 스코틀랜드 동부 해안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리스 지역도 장악해 버렸다. 프랑스군은 포위되어 제대로 된 전투 한번 치루지 못하고 휴전을 요청하였다.

1560년 6월 11일 스코틀랜드의 섭정 기즈의 메리(메리 스튜어트의 모친)가 돌연히 사망하여 가톨릭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그녀는 한때 “존 낙스의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개신교를 멸시하였으나, 임종시에는 개신교 목사 존 윌록(John Willock) 앞에서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이심을 고백하고 숨을 거두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스코틀랜드의 왕좌는 프랑스에서 과부가 된 메리 스튜어트에게 돌아갔다. 1560년 7월 6일 에든버러 조약에 따라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퇴각하였다. 이제 종교 개혁을 저지할 방해물은 거의 다 제거되었다.

<자료제공: 생명의 말씀사 '청교도 인물사'>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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