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역사자료

[스크랩] 독립운동과 기독교인의 활동 (3)

baromi 2008. 7. 5. 20:09
증거문서 XXVII
편지
친애하는 __________씨에게,
무엇부터 써야 할지 모르겠읍니다. 요사이는 일이 제대로 안 됩니다. 한국은 여전히 혁명의 진통을 겪고 있읍니다.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이 몹시 고생하고 있읍니다. 일본 국민은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읍니다. 기독교가 너무 민주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 중 한 명은 투옥되어 있읍니다.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_______신문에 쓴 글 때문에 요주의 인물 명단에 올라 있읍니다. 이 신문의 편집장은 그 글 때문에 신문을 거의 폐간당할 뻔하게 만들었으며, 정부는 후에 그를 부를지 모른다고 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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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싶이 일본과 한국의 모든 신문은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읍니다.
불쌍한 한국 사람들은 굉장히 고생하고 있읍니다. 나는 6천 명은 족히 살해되고, 수천 명이 60 내지 90대 씩의 곤장을 맞은 것으로 여기고 있읍니다. 그들이 한 일이란 독립만세를 부른 것 뿐입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투석 등 폭력이 있었으나,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정부가 한 일은 그들에게 발포하여 죽이거나 불구자로 만든 것 이외는 없읍니다. 물론, 정부는 그들에게 만세를 중지하라고 했었으나, 이 무서운 사건을 중지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알기 위해, 만세운동의 지도자들과 만난 일이 없읍니다.
나는 정부 관리들에게 [또한 신문에 낸 글을 통해] 진보적인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미움을 사고 있읍니다. 나 역시 즉각적인 독립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 편지를 상해(上海)를 통해 보냅니다. 요사이는 이런 식으로 아니면 보낼 수 없읍니다. 우리가 독일과 꼭같은 군국주의 정부의 치하에서 당하고 있는 고통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일요일 군인 몇 명한테 붙들렸었으나 곧 풀려났읍니다. 나는 경찰에서 얻어맞은 한 남자를 면회하려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요사이는 시골로 돌아다니는 것이 가치있는 생활입니다. 아, 잔인한 일본이어! 심지어 가장 훌륭한 일본인 기독교인들도 그들의 일본제국을 지지합니다. 나는 이제 일본이 어떠한 나라인지 알고 있읍니다. 일본은 거족적으로 침략적이어서, 어떠한 댓가를 치루고라도 목적을 달성하려는 나라입니다. 가령 이를 위해, 기독교와 사랑을 필요로 한다면, 이를 사용할 것이며 마키아벨리(Machiavelli)의 가장 추악한 방법이 필요하면 그것을 사용하면서도, 만면에 미소짓는 거짓으로 가득찬 나라입니다. 나는 2년 걸려 일본이 어떠한 나라인지 알게 되었읍니다.
증거문서 XXVIII
편지
친애하는 __________씨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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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__는 조용합니다마는, 다른 곳들은 여전히 소요가 계속되고 있읍니다. 거의 매일 우리는 몇 차례 피검자들의 무리가 지방에서 _______으로 심문받으러 가는 것을 봅니다. 수많은 교회가 군인들에 의해 불탔읍니다. 북부 장로교회인들은 적어도 교회 건물 7개와 한 커다란 학교가 이런 식으로 파괴되었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남부 감리교인 등 다른 선교부들도 이와 비슷한 손실을 당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상급학교 학생들은 아직까지 수업받으러 돌아오지 않고 있읍니다. 내가 관계하고 있는 두 전문학교에 다니는 수많은 학생들이 아직 옥에 갇혀 있읍니다.
_______에서 _______킬로 떨어진 _______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읍니다. 군인들은 그곳 마을의 남자들에게 화요일 오후 교회로 나오라고 명령했읍니다. 기독교인 12, 13명과 천도교인 20여 명이 명령에 따라 교회에 들어갔을 때,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교회 안으로 총질하여 그들을 죽이거나 부상시켰읍니다. 이어 교회는 방화되었읍니다. 이 불로 그 마을의 절반이 연소했고, 나머지 절반은 군인들이 또 불을 질렀읍니다. 이리하여 3채를 제외한 모든 집들이 파괴되었읍니다. 이것은 한 헌병이 살해된 데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되고 있읍니다만,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헌병은 그 마을에서 상당한 거리에 있는 곳에서 살해된 것입니다. 우리는 당국이 만행을 저지른 자들을 문책하고, 타버린 마을들을 복구하기 위해 재건을 시작하고 있다고 듣고 있읍니다.
1919년 4월 30일
증거문서 XXIX
편지
친애하는 __________씨에게,
모우리 씨는 4월 4일 체포되어 19일까지 구류되어 있다가, 6개월의 강제 노동형을 선고 받은 후, 상고 심리가 끝날 때까지 보석으로 석방되었읍니다. 모우리씨의 죄는 한국인 “죄인” 5명을 은익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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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구내와 모페트 박사 집 구내에서 불온 인쇄물을 준비하도록 허용했다는 것입니다. 이 한국인 중 한 명은 모우리 씨의 비서이고, 내가 알기로는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학생 친구들로서, 그중 한 명은 평양의 길선주(吉善宙) 목사의 아들입니다. 길 목사는 독립선언서 서명자 중 한 사람입니다. 모우리 씨는 법정에서 한국인 5명이 때때로, 밤에 자기 집에서 잤다는 사실은 시인했으나, 경찰이 그들을 수배 중이었다는 것과 그들이 경찰로부터 쫓기는 몸이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고 부인했읍니다. 그는 또 그들 중에는 그러한 기미가 있지나 않나 의심은 되었다고 했읍니다. 모우리 씨는 몇 년 동안 자기 집에서 이런 식으로 학생 등 한국인 친구들을 접대하는 습관이 있었으며 그전에도 이들 중 몇 명을 접대한 일이 있었읍니다. 그러나 모우리 씨는 경찰이 자기에게 이들을 수배 중이라고 통고해 준 일이 없으며, 따라서 자기는 경찰이 그들을 원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읍니다. 또한 요사이는 어느 누가 한국인 기독교인이라는 사실만으로, 경찰은 그를 체포하여 조사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공판은 4월 15일 거행되었는데, 이 사건을 의뢰할 변호사를 얻고자 할 모우리 씨와 모페트 박사는 14일 하오 2시에야 이러한 사실을 통고받았기 때문에, 너무 늦어 변호사를 대지 못했읍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구할 수 있는 변호사라야 서울에 살고 있고, 공판은 15일 상오 10시에 열리게 되었읍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변호사 없이 그대로 재판에 회부된 것입니다. 검사는 금고 2년 또는 벌금 2백 원(圓)을 구형했읍니다. 판사는 이를 19일까지 숙고한 후 검사의 구형대로 판결을 내렸읍니다. 이 때 모페트 박사는 오쿠보 씨를 모우리 씨의 법정 대리인으로 고용하고 수속을 밟아, 모우리 씨는 보석금 3백 원을 내고 석방되었읍니다.
한편 이곳 일본에서는 _______씨와 나는 화정(花井卓藏) 박사와 함께 ‘105인 음모 사건’을 담당하고 있던 제택(鵜澤) 박사를 고용하려고 했었읍니다. 4월 10일 _______씨는 동경을 떠나, 제택 박사가 사건을 맡고 있는 장기(長崎)로 떠나, 거기서 그와 잠정적인 약정을 맺었읍니다. 이 두 변호사는 일본에서 가장 훌륭한 형사 변호사로 알려져 있으며, 아시다시피 제택박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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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으로 식촌(植村) 씨의 교회에 다닙니다. 제택 박사는 15일 동경으로 돌아와서, 나는 그 날, 그리고 어저께인 22일 또 그를 만났읍니다. 나는 두 번째 그를 만났을 때는 한국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서 대구보씨와 함께, 사건을 제택 박사에게 정히 위탁했읍니다. 제택 박사는 5월 중순 이전에 한국으로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어저께는 대구보씨에게 사건 날자를 5월 12일로 해결토록 하자는 전보를 쳤읍니다. 나는 또 제택 박사에게 될 수 있는대로 빨리 한국으로 가서, 그 자신이 한국의 실정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대로 오래 체류할 것을 촉구했읍니다. 나는 그와 함께 대단히 솔직히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가 몸소 목격했던 사건 중 일부를 이야기해 주었읍니다. 그는 편견없는 마음을 가지고 한국에 가서, 모든 것을 보겠다고 말했읍니다.
_______씨는 장기(長崎)에서 제택 박사를 만난 후, 한국으로 건너 갔읍니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 체류하면서 제택 박사와의 약정을 완결 짓는 것이 필요하고, 에프 엘 브라운 씨가 동경 세계주일학교총회를 준비하기 위해 멀지 않아 이 곳에 오게 되어 있으므로, 그대로 남아 있었읍니다. 처음에는 유력 일본인에 접근할 모든 통로가 막혀 있는 듯했읍니다. 그러나, 지난 주 동안 한국 내의 진상에 관한 상당히 많은 사실이, 동봉한 ≪재팬 애드버타이저≫지의 스크래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서도 드러나기 시작했읍니다. 이것은 많은 일본 유력 인사들에게 검열 때문에 진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의심을 일으키게 했읍니다. 또한 한국에서 건너온 선교사들이 동경에 와 있다고 알려지자, 나는 다수의 유력 인사들로부터 만나 달라는 초대를 받기 시작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과 만나, 우리들이 보는 견해는 어떠한지 알려 달라고 했읍니다. 나는 우리가 현재 한국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참혹한 사태를 개선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이것이라고 보고, 이에 응하고 있읍니다. 이미 일본기독교동맹은 2명의 대표를 한국에 파견키로 결정했는데, 한 사람은 _______씨이고, 또 한 사람은 아직 미정입니다. 또한 _______씨와 _______박사는 한국사태를 토의하기 위해 25일 만나자고 요청해 왔으며, 그들도 대표단을 파견할 것이라고 했는데, 대표단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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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의원들도 낄 것이라 합니다. 의곡된 보도만을 접해 왔던 일본 여론의 전환이 있게 될 것같은 많은 고무적인 징조가 보입니다.
1919년 4월 23일
동경에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어제 _______남작과 _______박사를 만났읍니다. 일본평화협회의 _______씨, 그리고 _______씨가 참석했읍니다. 우리는 두 시간 동안 이야기했으며, 나는 그들에게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에 대해 대단히 솔직히 이야기했읍니다. 그들은 끝까지 관심을 표명하면서, 재야의 저명인사로 구성된 대표단을 파견해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했읍니다. _______씨와 나는 이러한 대표단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파견할 것을 촉구했읍니다.
위의 두 분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회담은 성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 나는 _______씨를 만나 약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읍니다. 그는 한국민이 더 많은 자유를 바란다는 데 전적으로 동감을 나타냈읍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촉구했읍니다. 첫째, 우리는 세상에 진상을 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부가 아마 이러한 진상의 공표에 분개할 것이나, 이것만이 사태를 바로잡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읍니다. 둘째로, 이러한 진상 공표와 관련하여, 뉴우요오크(New York)·런던(London) 및 파리(Paris)의 신문들로 하여금 이러한 사태는 무단 정권에 의해 초래되었음을 지적케 하고, 일본이 이를 시정하도록 촉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째로, 가능하다면, 미국과 영국 정부가 결속하여 일본이 이러한 면에서 그의 정책을 변경하도록 압력을 가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에게 _______한테도 이야기하라고 했읍니다. 우리는 이 모든 회담에서 정치적인 면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으며, 정치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음을 명백히 하려 했읍니다. 그러나 인도주의적인 면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권리가 있음을 명백히 하려고 합니다.
나는 여기 온 보람이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렇게 느끼는 또 하나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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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많은 정의감 있는 일본인들을 만남으로써 그들의 전반적인 성격을 더 공정히 평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군국주의만을 제거할 수 있으면, 일본인에게는 위대한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1919년 4월 26일
23일과 26일 글월을 보낸 후, 사건은 신속히 일어나고 있읍니다. 그 첫째는 장곡천(長谷川) 백작이 한국에 잔학행위가 있었음을 시인한 것입니다. 27일과 29일자 ≪재팬 애드버타이저≫지에 실린 두 발췌기사를 동봉합니다. 이를 읽어 보시면, 시인했다는 사실이 자명해질 것입니다. 이 기사가 포함하는 내용 이외에, 믿을 만한 한국인들에 의하면, 참혹한 사건이 한국내 여러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평양 북쪽 1백 76킬로 떨어진 맹산(孟山)에서 일어났다는 사건 이야기도 동봉합니다. 그 곳에는 교회가 있고,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신뢰할만한 전도부인에 의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참혹한 사건들도 알고 있으나, 위와 같은 것은 실례에 불과합니다. 무수한 마을에서 같은 종류의 사건이 일어났으니, 단지 규모가 작다는 차이 뿐입니다.
나는 유력한 일본인들을 만나, 그들에게 한국 내의 진상을 알리는 데 다소의 진전을 보고 있읍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진상을 알고서는 누구 못지않게 분개하며 경악하는 것을 보고 크게 고무되었읍니다.
1919년 4월 30일
일본 정부의 한 고관과의 회견은 더욱 흥미있고 만족스러웠읍니다. 그의 태도는 매우 간곡하고 감수성이 강했읍니다. 그는 자신의 관직 때문에 정부의 정책에 대해 상세한 발언을 할 수는 없었으나, 한국에 대한 정책이 어떠하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냈읍니다. 회견은 우리 측으로부터 한국 내의 소요를 진압함에 있어서, 기독교에 대해 지나치게 억압하고 있다고 보는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시작되었읍니다. 기독교인들이 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한국의 장차의 기독교 사업에 대한 우리의 우려를 표명한 데 대해, 그는 정부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차별할 의도가 없으며, 기독교인들이 특히 관여되어 있다고 보는 이유의 이면에는 양측에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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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지의 답변을 했읍니다. 그는 정부가 한국에서 개혁을 단행하려고 하는 차에 소요가 일어났으며, 때문에 그것을 진압하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진압 후 정부는 명확한 개혁안을 제의할 것이나 주제넘게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다고 전했읍니다. 그는 정부가 반기독교적 편견은 가지고 있지 않으나, 흔히 하급 관리들이 정부의 뜻을 적절히 전달하지 못하며,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읍니다. 그는 질서가 회복된 후, 과오와 지나친 열성을 나타낸 관리들은 처벌될 것이라고 전했읍니다. 그는 한국인도 일본 본토의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했으나, 이러한 이상(理想)은 “대번에” 실현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했읍니다. 그는 한국이 이집트(Egypt)나 인도(印度)와는 다르다고 했읍니다. 거기서는 영국이 외국인을 통치하고 있는 것이나, 한국인과 일본인은 원래부터 같은 종족이므로, 결국에는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했읍니다. 전 세계, 심지어 파리(Paris)에도 인종 차별이 있으며, 그것은 하루 아침에 근절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었읍니다. 그는 또 일본인과 한국인간에 교육상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읍니다. 아마 그의 가장 중요하고도 뜻있는 발언은 한국 내 사립학교는 일본 본토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와 성경을 가르칠 자유가 완전히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과거 우리가 겪었던 곤란한 교육적 문제에 대한 사정을 잘 알고 있겠지만, 그의 이같은 발언은 한국 내 행정부의 정책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선교부는 새로운 교육법이 공포된 이후 한결같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 왔읍니다. 그는 결론으로 일본 본토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신앙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진정한 개혁이 실시될 것임을 한국인들에게 전하라고 했읍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그러한 말을 전해 주어도 한국인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유감스럽게 지적했읍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어떠한 행동도 맡지 않았읍니다. 정부의 또 다른 고관인 _______의 경우처럼, 우리는 그가 명백히 지지한 자유가 불원 실현될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고 밝히면서, 현 동요의 이유를 기술한 문서 한 장을 그에게 주고 나왔읍니다. 이 문서는 지난번 편지에 선생께 동봉한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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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일본기독교동맹이 프렌드(Friend)파-퀘이커-선교부의 질버트 바울즈(Gilbert Bowles) 씨를 동행시켜서 2명의 일본인 목사를 함께 한국에 보내서 직접 정보를 얻게 할 계획을 흥미있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들은 5월 21일 경 서울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리는 신호(神戶)에 도착한 후, 잔혹행위는 중지될 것이라는 4월 27일자 장곡천과 총독의 확약과, 정부는 반기독교적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위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방화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았읍니다. 정부가 반기독교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공무원의 행위는 기독교에 대해 명백한 악감을 나타내고 있음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읍니다.
1919년 5월 17일 신호(神戶)에서
증거문서 XXX
편지
아버님께,
저는 아버님이 옳지 못했던 견해를 바로잡으실 수 있도록 사태를 다소 설명하여 드리겠읍니다. _______에서 온 전보는 항상 믿을 만한 것은 못되며, 허다한 낭설이 퍼진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절대로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사건들이 끝장날 때까지 무엇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도 모르고 있었읍니다. 우리한테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와서, 이러한 사태 아래서 교회 임원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의 조언을 구하는데, 우리가 그들에게 해준 것이라곤, 우리는 이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며, 이 운동 때문에 교회가 파괴될 위험이 있다는 것과, 그들의 독립운동 호소가 무엇을 성취할 희망은 극히 희박한 데 비해 생명을 잃을 우려와 압박을 더욱 가중시킬 우려가 크다는 것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 정도였읍니다.
목사들이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은 관헌에게는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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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그들을 후원하고 있는 듯이 보이겠으나, 그것은 우리가 이 나라의 기독교 사회에 조성한, 잘 조직된 영향력의 계통을 실증하는 것 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교회 조직이 공식적으로 이용된 일은 없읍니다. 저는 교회 임원들이 그들의 직권 또는 정치적인 교회 내 집회를 이용하여 정치 선전을 행했다는 예를 한 번도 들은 일이 없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기독교인들의 상호 신뢰와 친분관계는 독립운동 때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임을 받은 후, 가장 강경하고도 효력있는 정치적 노력의 수단이 된 것입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_______의 _______목사, _______의 _______목사 등의 이름은 전국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독립운동에 쏠리게 하는 데 어느 무엇보다도 공헌이 컸읍니다. 관리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무시하고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의심하고 있읍니다. 이것은 방법, 정신 및 운영에 있어 한국인의 운동인 것입니다.
이 운동의 와중에서 교회가 취한 처사가 올바르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장로·학생 및 저명한 기독교인들 다수가 현재 투옥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국제 정세에 접촉하여, 약소국가들에 대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현재와 같은 시기에,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깨닫는 입장에 있은 것은 기독교인 뿐임은 명백합니다. 호소·항의 및 시끄럽게 구는 것이 무력만큼 강력하다는 생각은 기독교인들이 지금과 같은 처신을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결코 전국을 휩쓸지 못했을 것입니다. 온갖 협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은 것은 기독교인들 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존재를 정의를 구현케 할 영향력으로 느껴 왔읍니다. 기독교 사회에는 길만 트이면, 대규모로 일을 벌려, 전진할 각오가 되어 있는 유능한 인재들이 있읍니다. 교회는 만주(滿洲)와 국경선을 같이한 도(道)에서 가장 강력하여, 지역상 중국에 망명한 정치적 선동자들의 영향을 가장 빨리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것이 기독교 지도자들을 독립 운동의 선두에 서게 한 요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교사 단체가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는 가까운 선교사들조차 데모가 일어난 후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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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에 가담해 왔음을 알게 되었읍니다.
총이나, 칼, 또는 재정적 지원이나 든든한 정치적 지원자 없이, 세계 막강의 군사 정권에 도전하려는 신념이나 무모를 발휘할 선교사는 없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일본 치하에서 고난을 겪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 고유의 식으로 일본의 문턱에서 항의하여 자결하고 있읍니다. 독립운동의 정신은 자결(自決)이냐 자멸(自滅)이냐의 택일입니다.
이 운동의 범위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가능합니다. 봉기는 주야로 일어나고 있읍니다. 특히 수천 명이 모여들어 체포하기가 제일 어려울 장날이 이용되었읍니다. 전국의 학생들은 동맹 휴학을 했으며, 경찰이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던 학생들만이 학원에 돌아 왔으나, 대개 공부하는 척한 데 불과합니다. 상당히 많은 농부들이 씨 뿌리기를 거부하고 있읍니다. 상인들은 매일, 가게 문을 열라고 총검으로 위협할 때까지, 문 열기를 거부하고 있읍니다. 통신이 두절되어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읍니다. 그러나 봉기가 간단 없이 계속된 지 2개월이 되는 현재에도 매일 피검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벽촌의 부락까지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겠읍니다. 이들이 데모하는 방법은 보통 어느 지정된 날 모든 젊은이들을 시장에 모이도록 그 부근 모든 마을에 사람을 보내 연락한 후, 모두 함께 관청으로 가서, 목이 쉬도록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입니다. 모든 도(道)와 전국 큰 시장의 대부분이 데모를 치루었읍니다. 상하·귀천, 기독교인·유교인, 기독교학교·관립학교 등이 구별 없이, 죽음이나 투옥 또는 구타를 쾌히 각오하고, 데모에 참가했읍니다. 이들은 피압박 민족의 외치는 소리가 어떻게든지 자비로운 하느님에게 들리고, 새로이 자유와 정의의 대의(大義)를 표방한 세계의 도움을 얻기 위한 희망에서, 자신이나 가족들도 돌보지 않고, 이 운동에 뛰어들었읍니다.
이러한 동란의 진압 수단은 무자비했읍니다. 사실 진압방법이 현재와 같은 상태에 이른 것은, 봉기를 분쇄하려는 관헌의 방법이 잔인했기 때문입니다. 일어난 사건들을 표현하는 데 ‘끔찍’이라는 말이 적합하겠읍니다. 체포할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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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봉·칼·총·주먹, 그리고 채찍 등이 으레 따랐읍니다. 군중의 기세가 너무 위협적으로 보이면, 잘잘못에 관계없이 군중에게 무차별 발포하여, 해산시키고 있읍니다. 체포된 후에도 가혹한 대우를 받습니다. 심문은 말 뿐이고 관리가 사람치는 것은, 데모를 했건 안 했건 상관 없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읍니다. 물론 모두가 같은 마음이며, 이러한 무차별 처벌이 그렇게 거리낌없이 행해진 것은 이같은 공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처벌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노인들은 체포되어, 그들의 아들, 손자 또는 주동자였다가 체포를 피해 도망간 이웃 사람들을 대신하여 얻어맞습니다. 아낙네들도 이런 식으로 얻어맞고 투옥되면서 남편의 행방을 대라고 강요당합니다. 많은 농부들은 다시 농사 지으러 돌아갈 수 있을 만큼 구타하고 내보내 준다는 말을 듣고 있읍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흔히 곤장 90대를 무자비하게 얻어맞고 들것에 들려 집으로 돌아옵니다. 강간 이야기도 흔히 들을 수 있읍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고문하는 것은 보통 일인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즉사했는지는 아무도 헤아릴 수 없읍니다. 이 지역에서만도 많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숨졌읍니다. 기독교 간부들의 대부분은 발포가 데모진압수단으로 사용되기 이전에 이미 투옥되어 있는 듯합니다. 이 도시에서 죽은 유일한 기독교인은 체포될 때 목 등을 걷어차여 숨진 것입니다. 그의 장례식은 이 도시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으며 군대의 삼엄한 경호를 받은 장의 행렬에서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기독교인들과 함께 찬송가를 부르면서 따라 갔읍니다. 이 도(道)에서 불탄 교회는 하나도 없으나, 이 곳 북쪽의 여러 지역에서는 큰 교회들의 방화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있읍니다. 이같은 만행의 확인된 한 실례로는, 20명 내지 25명의 기독교인들을 교회에 가두어 놓고, 발포한 데 이어, 교회를 태워 버린 경우가 _______에서 있었읍니다. 이는 최근 도착한 새로운 군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합니다. 한국 여인은 한국 풍습에 어긋나는 방법으로 알몸을 드러내느니, 차라리 죽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여자 신자를 발가벗겨 놓고 때리며, 굴욕을 줌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것이 관리의 공통적인 타락상인 것 같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들의 몸을 수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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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이라고도 주장되나, 그 결과는 한국 군중을 격노케 하고 있읍니다.
이러한 혼란의 원인을 선교사들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일부 관리들과 대부분의 반관반민 신문들의 기도(企圖)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 몇 가지의 결과를 낳았읍니다. _______씨의 체포는 전국에 걸쳐 동정을 자아냈읍니다. 옛 _______공동사회의 가장 보수적인 계층도 아마 이제까지의 다른 어떤 일에 의해서 보다도 더욱 이에 감동되었으며, 그들은 선교사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지라, 애국적인 독립운동과 관련된 박해는 우리가 환영받은 일이 없는 분야에 문호를 개방했읍니다. 선교사들은 빈번히 굴욕적인 방법으로 맞으며, 학대당했읍니다. 신문들은 바보라도 안할 짓을 미국 선교사들이 했다는 조롱으로 가득 찼는데, 그것은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을 이 투쟁과 유혈로 이끌은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고 믿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상되는 것처럼, 그러한 기사 때문에 데모를 개최하려던 자들이 이에 속지는 않습니다. 선교사들의 진정한 입장은 아마 과거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내거는 대의를 위해 이 나라에 대한 문제를 토의하는 데 있읍니다. 엄청나게 큰 산사태가 마치 지금 교회로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읍니다. 물론, 이는 주로 정치적이긴 합니다만, 한국민은 이제 기독교와 교회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있으며, 기독교에 새로 귀의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기독교인 형제들의 애국적 지도를 받기 원하고, 또한 그것이 유일한 진실된 삶의 길임을 수 년 전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거부해 왔던 기독교의 충만한 생활을 이제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 지방에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수는 배로 늘고 있다는 보고는, 매우 곤란한 경찰의 감시 속에서도 더욱 빈번해지고 있읍니다. 모든 간부들이 투옥되어 있는 일부 교회들은 실제로는 문을 닫고 있으니, 일반적으로 복음전도 사업은, 선교사들이 교회로 찾아가지 못하더라도 제대로 계속되고 있읍니다. 어떤 곳에서는, 한 경찰관이 어느 관할 구역 내의 모든 교회를 수색하는 임무를 맡았었읍니다. 이 경찰관은 돌아다니면서, 지금은 모두가 기독교인이 되어야 할 때라고 사람들에게 이르고 있읍니다. 어저께 들은 이야기는 인근에 데모가 일어났는데, 일본인 헌병이 한국인 경찰에게 쏘라고 총을 주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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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총을 곤봉 대신 사용하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공중에 대고 쏘았답니다. 그는 한 무방비하고 무고한 노파를 향해 총을 번쩍 들고 미친 듯이 달려가, 노파 옆의 돌벽을 내리쳐, 개머리판이 쪼개지고 총은 파손되었답니다.
봉기의 타당성 여부가 일부 사람들에 의해 제기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일본이 지난 10년 동안 한국인들에게 준 각성은, 한국인 스스로는 백년 걸려도 얻지 못할 성질의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읍니다. 일본은 한국에서 신뢰할만한 깨끗한 정부, 좀 나은 기업, 철도 및 자동차, 도로, 우편 및 전보, 신문, 공립학교, 법원 및 신뢰할만한 법률 등을 일조일석에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사업과 일본의 침략이 함께 이 나라를 깨우쳐 왔으며, 이제 그들도 대표없는 징세의 거부, 일반 경찰에 의한 가택 및 신체 수색에 대한 반대, 재판없이 구타당하는 것에 대한 항의[도로 건설용으로 보상없이 토지를 정부에 몰수당했음], 이른바 신뢰할만한 깨끗한 정부가 일본의 이익이 개입되면 혼탁한 정부로 되는 데 대한 분개 등, 일련의 의사를 표시할 때가 오고 있읍니다. 그들은 한국의 청순함을 저해하는 반 관영조직에 의해 자신들의 모든 사회에 부과된 검찰제도를 증오하고 있읍니다. 그들의 우편물은 조금이라도 구실이 있으면, 수색당하고 압수당하기 일쑤입니다. 상업은 번창하고 있으나, 이는 한국사람들이 일본사람 상전의 경제적인 노예로 되는 상태 하에서 그러한 것입니다. 공정한 입장에서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읍니다. 공립학교는 몇 되지 않습니다. 한국 어린이들이 배울 교과서는 일본을 찬양하고 한국의 옛 영광을 무시하도록 교과 내용이 바뀌었읍니다.
아버지된 사람들은 자식들을 일본 학교에 보내, 저주받은 언어로 거짓말을 배우도록 강요당하는 것을 불평하면서, 주먹을 불끈 쥐어 분노를 나타내고 있읍니다. 기독교 및 비기독교 계통의 학교들은 짓눌려 있으며, 성경은 기독교학교에서 추방명령을 받았읍니다. 신문은 정부의 검열을 거쳐, 날조된 기사로 메워져 있어, 신문인이 이렇게도 무력해질 수도 있을까 여겨집니다. 아무리 권력의 명령 앞에서 그렇게 아니할 수 없다고 치더라도, 지식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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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신문에서 사실을 그렇게도 사실 아닌 허위로 보도를 할 수 있겠읍니까? 새로운 도로 건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나, 적절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총칼의 위협 밑에, 강제 노동으로 건설에 동원된 한국인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읍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이 상급학교에의 진학 권리를 고등학교까지로 제한하고, 동경에 있는 일본인 감독 밑에 둘, 제한된 인원 외에는 해외 유학을 거부하고 있어 분노하고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부체제에 있어서도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일본인은 보수를 한국인보다 2배나 더 받습니다. 배가 높은 물결을 타고 전진은 잘하고 있으나, 배 밑창에 갇힌 노예에게는 참을 수 없게 되었읍니다.

 

 

증거문서 XXXI
편지
친애하는 __________박사에게,
최근 이 곳에는 새로운 마을방화사건은 없었으며, 정부는 현재 이 곳에서 피해가 가장 심했던 경우에 대해 구조사업을 하고 있읍니다. 서을 거주 서양인대표위원회가 어저께 소집되어, 정부의 구조사업을 돕기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내일 미국영사관에서 모든 외국인들을 모이도록 촉구했읍니다. 피해자들은 쌀은 지니고 있으나, 밥을 떠먹을 숟가락과 그릇들이 없고, 침구류도 없고, 옷은 학살이 있던 당시에 입고 있던 것 뿐이고, 가진 것은 불붙은 집에서 뛰어 나올 때 입던 그대로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피가 치솟아 오르는 것 같읍니다. 북쪽 P.Y.(평양?) _______에 있는 교회[이름은 밝히지 않는 것이 좋음] 가 얼마전 밤에 불탔는데, 기독교인들에게 불을 끄지 못하게 했읍니다. 1만 달러 정도로는 다시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오! 주여, 얼마나 더?”
올 봄에 학교 일은 없으나, 다른 할 일은 많습니다. 서울에는 더 많은 군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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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해 있으며, 몇 주 동안 난동이나 만세는 없었으나, 서울을 수비하고 있읍니다.
오늘 날짜의 ≪경성일보≫는 한국인 한 사람이 3월 26일 선동자의 무리를 이끌고 파출소에 투석한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고 했읍니다. 이는 공공질서 교란에 대해 10년 징역을 규정한 새 법률을 소급하여 실시하는 것을 뜻합니다. 박사님도 법안 사본 하나를 가지고 계시지만, 이 법은 4월 15일 공포되었으나, 발효일은 밝혀져 있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공포 당시의 현행법에 따르면 최고형이 2년이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법(新法)을 현재 법원에 계류 중인 사건에도 적용할 계획인 것으로 결론짓게 됩니다. 한국 교회는 굳건히 서 있읍니다.
유명한_______씨는 얼마전 당국에서 심문받을 때, 평화롭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는 질문에 “당신들 일본인 모두가 기독교인이 되기 시작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면 된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굳이 여기에 밝히지는 않습니다만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옳은 말’을 했기 때문에 행복한 기분으로 자기 감방으로 돌아갔읍니다. 다행히 그들은 그를 구타하지는 않았으나, 나이 많은 그는 얻어맞는 것을 면한 드문 예입니다.
황급히 글월을 올리며……
1919년 4월 30일
증거문서 XXXII
한국에서 실패한 일본제국주의
한 영국인의 글
금년 3월 1일, 한국에는 주목할 만한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은 일본제국주의 통치의 신랄한 고발 때문만이 아니라, 혁명 자체의 성격과 방법 때문에도 주목할만하다. 일본 경찰의 극단적으로 캐묻는 근성에도 불구하고, 2천만 명의 한국인들은 2~3일 동안, 동시에 봉기하여 일본 관헌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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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독립선언서’는 가까운 지역에는 사람이 직접 배부하고 외딴 지역으로는 일본 우편으로 배달됐다. 또 데모날은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이 취한 방법은 소극적인 저항의 것이었다. 폭력은 없었다. 이 나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은 독립 연설과 태극기 흔드는 것과 ‘만세’ 부르는 것으로 만족했다. 3월 1일 서울에 모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대표들은 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찬으로 이 사건을 축하하고 전화로 경찰에 엄숙히 알렸다. 경찰은 이상하게 여기면서 체포하였으나, 그들에게는 이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닥친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각 도로부터, 주요 도시들에서 데모가 발생했다는 소식들이 타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데모의 명백한 목적은 일본 통치에 항의한다는 것과 전 세계에 한국민이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싶다는 뜻을 주지시키는 데 있었다. 전혀 뜻밖에 기습을 당한 일본 당국은 군사력 이외에는 진압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어 며칠 동안 군인들이 미친 듯이 날뛰어 크게 두들겨 부쉈다. 그러나 미리 예정했던 계획에 충실한 한국인들은 이 모든 것을 금욕적인 인내로 참았으며, 다만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 폭력에 의한 반항이 있었을 뿐이다. 일본인들의 필요없는 가혹 때문에 한국인들의 마음에 서린 울분은 총독의 거창한 선언에도 쉽게 누그러지지 않았다. 총독의 선언은 “일본과 한국은 하나의 대강국으로 완전히 결합되어 있으며, 국제연맹의 주요 구성원 중 일원”이라는 것과 모든 한국인들에게 양자(兩者)의 조화있는 통일과 조정을 위해 진력하여, 세계 열강 중의 하나로 인류의 대업(大業)과 정의의 구현에 참여하자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여기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뜻있는 사람이면 유의해 보아야 할만큼 주목되는 소극적인 혁명인 것이다.
앵글로색슨(Anglo-Saxon)의 두 위대한 국민이 자유와 민족주의 원리. 조약의무, 그리고 그로 인한 약소민족의 권익 보장, 군사통치보다는 평화의 통치를 위해 결합되고 있는 이 때에, 2천만 한국인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 입각하여, 그리고 특히 이 두 국민에게 온건히 호소하고 있다. 한국의 독립된 민족 생활은 일본과의 조약에 의해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10년 전에 일본에 의해 지지당했다. 그들은 10년 동안 한국인의 모든 주도권을 박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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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부의 말 발굽 밑에 있었으며, 한국이 잘 되기 바랐던 자들이 우려했듯이 한국이 다시 태양 아래서 제 자리를 되찾게 할 모든 희망을 거의 없애게 했다. 일본은 그들의 무단 통치 및 제국주의 교육의 정책이 모든 민족적 여망을 분쇄하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고 믿을 구실이 생겼으나, 일본 정치가들 중 제 아무리 낙관적인 사람이라도 “일본과 한국은 하나의 위대한 국가로 완전히 결합했다”고 믿을 정도로 그릇되게 생각한 자는 없을 것이 확실하다. 결합이란 ‘영혼’의 문제이며, 일본의 한국에 대한 영혼없는 통치는 한국으로 하여금 오직 울적한 기억 속에서 그의 영혼을 갈라 놓게 했을 뿐이다.
한국은 자기 나라의 역사를 잊을 수 없다. 한국은 근 4천년 동안 독립국이었음을 잊을 수 없다. 한국이 오랫동안 중국의 속국이었음은 사실이며, 문명의 대부분을 이 동양 문화의 중심지로부터 이어 받았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독립만은 계속 유지해 왔음을 자랑하고 있다. 한국은 위대한 중국을 패배시킨 장군들을 고이 기억에 간직하여 두고 있으며, 중국 문화에 몰두하며, 한국 고유의 특성을 상실하기 이전에, 독자적으로 이룩했던 예술 및 과학 분야의 진보를 잊지 않고 있다. 또한 일본이 한국을 매개로 하여 중국으로부터 문명의 대부분을 도입한 사실을 한국이 잊지 않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에 처음으로 중국 고전을 가르친 것은 한국 학자들이었다. 또한 일본의 관복(官服)은 한국의 그것을 본뜬 것으로 믿어지며,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것도 한국의 중들이었다. 일본의 도자기 기술이 옛 한국으로부터 직접 전래된 사실 역시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국은 몇 세기 동안 이웃의 두 대국(大國)에게 뒤졌다. 한국 관리들은 민중을 압박한 이기적인 폭군이 되었으며, 억압과 착취 수단에 의해 무지와 무능을 조장했다. 젊은 한국인들은 이 기간을 치욕의 시기라고 말하면서 과거의 죄과 때문에 자기들도 곤란을 겪는 것이라고 분함을 참고 있다. 또한 4천년 동안 유지되어, 위대한 중국조차 존중해 마지 않던 독립이, 마침내는 자기 나라를 통해 옛 문명의 대부분을 도입해 갔고, 게다가 근대화가 자기 나라보다 불과 20~30년 앞선 일본에게 빼앗겨야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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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분노는 더욱 진지하다.
일본과의 합방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사건은 잘 알려져 있다. 청일(淸日)전쟁은 일본을 동양의 패자로 만들었다. 일본은 자국의 안전을 위해 한국의 절대 중립을 요구하면서, 한국이 해마다 중국에 바치는 조공(朝貢)을 면제토록 요구했다. 그러나 위험은 다른 곳으로부터 일어났다. 러시아(Russia)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 영향이 너무 커져, 일본의 그것과 충돌하게 된 것이다. 결과는 한국의 독립 유지를 내세워, 노일(露日)전쟁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한국은 일본의 보호령이 되었고,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 고종(高宗) 황제가 1907년 헤이그(Hague)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일본의 내정간섭을 비밀리에 항의케 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황제 자신은 폐위(廢位)되고, 한국에 대한 일본의 속박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등(伊藤博文) 통감이 하르빈(Harbin)에서 한국인에게 암살당한 사건과 한반도에서 반란이 계속되자 일본은 마침내 1910년 합방할 구실을 찾았다. 합방은 필연적이라는 구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은 동양의 분쟁 핵심이며, 한국이 스스로를 통치하기에 적당치 못한 상태에서 독립해 있는 동안에 동양의 평화가 위협 받았다. 그래서 유럽(Europe) 강대국에 이긴 승리에 의기양양해진 일본은 동양 평화의 수호자가 되어, 한국의 합방으로 새로운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일본이 개입한 지 10년 동안은 성공적으로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솔직히 비유하면, 주부가 여름 과일을 보존하는 식이었다. 그녀는 생생한 줄기에서 과일을 따서, 병 속에 넣어 둘 때, 달게 하기 위해 설탕을 충분히 쳐두고 외부의 침입을 받지 못하도록 단단히 마개를 막아 둔다. 그것은 훌륭해 보이며, 소비자에게 아주 좋을 것 같으나, 일단 마개를 열면 발효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일본은 병에 넣어 마개를 막는 과정에서 추한 꼴을 보이지 않았고, 설탕도 아끼지 않고 넣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을 누가 먹게 될 것인지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그런데 때가 되어, 마개가 튀어 나오자, 발효는 시작된 것이다.
일본의 한국통치는 일본으로서는 명예가 되는 것이었다. 일본은 세계의 동의를 얻고자 하는 데 신경을 써, 한국 총독은 9년간 해마다 한국의 개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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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에 관해 그럴듯하게 꾸며낸 영문 보고서를 발표했다. 매년 선전 자료는 있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일본은 점진적인 개선 방안을 수립하여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도로·철도·항만 및 통신 시설 등의 수(數)와 효율이 내국인의 감시와 외부인의 찬사를 받을만큼 증가되었다. 지방 행정, 징세 및 법원의 적폐가 시정되었다. 농업, 교역 및 공업은 장려되었다. 병원 수는 늘고, 경찰의 위생 단속은 위생 상태를 개선했다. 교육 연한은 연장되고 균등해졌다. 재정의 기반은 좀더 안정되고, 통화의 문란은 시정되었다. 위에 나열한 것 과 같은 개혁으로, 한국인들은 일본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국적인 한국인이 더욱 감사드리고 싶게 하는 일본 통치의 다른 면도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정치적인 무관심의 가장 밑에,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그리고 기회가 처음으로 생길 기미가 보이자 폭발한 민족의 여망을 길러 주게 강요한 점이었다. 군대의 점령 및 무단정치, 또한 일본과 한국 거주 일본인을 위해 한국을 착취하려는 명백한 통치 목적-이러한 것들이 민감한 한국인의 마음에 사무쳐, “민족의 여망이 최대한도로 만족될 그 날”에 희망을 걸게 하는 것이다. 무단정치는 자유의 흔적조차 남겨 놓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행동은 경찰과 헌병의 꼬치꼬치 캐묻는 조사 대상이 되어 있다. 모든 공공 집회와 단체의 조직은 법률의 통제를 받는다. 세계 사건들을 토의할 집회는 불가능하며, 민주적인 발언은 불가피하게 관헌과의 충돌을 의미하게 된다. 언론 자유란 알지도 못한다. 2년 전 평양 숭실(崇實)전문학교 학생 3명이 졸업식 때, 고별 연설에서 약간 자유주의적인 말을 했다 하여 체포되었으며, 그 대학의 문학회는 부득이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도 재갈이 물려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진보적인 한국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사상을 표현할 매개체를 발견할 수 없다. 한국 젊은이들 중에서 가장 총명한 _______씨는 5개 이상의 잡지를 편집했었으나, 집지는 하나 하나 나오는 대로 판매금지당했다. 그는 최근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는 혐의로 수감되어 있다. 한국인들이 경영하는 잡지 중에는, 한국에 한 두 가지가 있고, 4, 5개가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나오고 있다 한국내 신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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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일본인이, 심지어 ≪기독신보(基督申報)≫의 경우에도 일본인이 편집하고 있다. 한국인 편집자는 세계 정세에 관한 단평도 발행이 금지되어 있다.
신앙의 자유는 일본헌법에 보장되어 있고, 합방조약에 따라, 이는 한국에도 보장된다. 하급 관리들이 신앙의 자유에까지 간섭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관헌 체제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결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간섭은 특히 지방에서 심했다. 정부는 민족 종교로서 불교를 믿으라고 권장하고 있으며, 현재의 봉기 사건이 있은 후 기독교인 및 선교사들에 대한 악감은 뿌리깊은 편견을 나타내는 것이다. 현재 모든 기독교인들은 의심을 받고 있으며,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고백은 관청의 비위를 자초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일본제국주의 통치가 사리(私利)에 급급하다는 것은 교육제도에서 잘 나타나 있다. 교육제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결정적인 원칙이 있다. 즉 ① 한국 사람들을 일본 사람으로 개조한다. ② 기술 교육에 중점을 둔다. ③ 한국인에게는 인격 도야 위주의 고등교육은 시키지 않는다는 것 등 세 가지다. 이 원칙 중 첫 번째 것을 달성하기 위해 보통, 학교의 교과과정 중 주요 과목은 일본어다. 어느 두 가지 과목을 합한 것보다 도 일본어에는 많은 시간이 배당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과목은 한국어 독본을 제외하고는 일본어로 가르쳐지고 있다. 일본어는 하루 걸러, 두 시간씩 있는데, 그래도 한국 어린이가 여전히 한국어를 이해한다면, 이는 그가 받는 교육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의 교육은 금지되어 있다. 그 대신, 여기저기 한국역사를 집어넣은 일본역사가 가르쳐졌는데, 이는 마치 영국역사 시간에 식민지 역사가 언급되는 것과 흡사하다. 일본의 애국적인 노래가 민족정기를 계발토록 의도되어 있다. 일본의 군사적 위력에 대한 의식이 일본인 교사의 정장(正裝)과 심지어 군도(軍刀)에 의해 어린 마음에 인상되게 된다. 두 번째 목표인 기술교육 치중은 그 자체로서는 나쁠 것 없다. 한국인은 근로의 존엄성을 배우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순전히 교육적인 목적에만 국한되기 때문에, 일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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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을 나무하는 일과 물지기같은 하급 노동자로 삼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교육이 절대적인 찬사를 받으려면, 차원 높은 전반적인 교육과 병행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다 한국이 현 교육제도에 주로 결함이 있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한국인에게는 현대 문물을 모르게 해 두어야 한다는 것은 일본제국주의를 위한 것이며, 따라서 당국은 인격 도야에 목적을 둔 교육의 실시를 두려워 하고 있다. 법학, 의학 및 기술 등 3개의 전문학교 이외에는 의숙(義塾)·단과대학 또는 한국 내의 군사정부가 설립한 종합대학교가 하나도 없었다. 합병 전에 있던 의숙들은 폐지되어 그보다 훨씬 수준이 낮은 고등보통학교로 대체되었다.
한국인들이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교육제도 뿐만 아니라, 인구에 비해 부족한 학교의 수, 특히 한국 거주 일본인을 우대하기 위해 베풀은 차별대우때문이다. 다음 도표는 1916년 총독의 연례보고서에서 밝혀진 각급 학교 및 학생수 등을 나타낸 것이다.
한국 내 한국인 및 일본인 학교, 그리고 기독교 계통 학교의 비교 통계
 
 
한국인을 위한 관립학교
학교별
학교수
학생수
지망자수
공립보통학교
447
67,629
……
고등보통학교
3
537
2,651
여자고등보통학교
2
164
187
전문학교
3
277
844
정부 보조……602,888 원(圓)
인구……17,5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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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을 위한 관립 학교
학교별
학교수
학생수
소학교
324
34,100
중학교
3
375
여자중학교
9
526
전문학교
2
91
정부 보조 ……339,660 원
인구……………300,000
기독교 계통 학교
학교별
학교수
학생수
보통학교
601
22,542
고등보통학교
17
2,125
여자고등보통학교
14
1,352
전문학교
4
250
정부 보조……없음
인구…………300,000
위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공립보통학교의 경우, 정부는 한국인 인구 1천 7백 50만 명 중 4백 47개교를 설립하여, 인구의 약 3백분의 1인 6만 7천 6백 29명의 학생 밖에 수용치 못하게 되어 있다. 이에 비해 30만명의 일본 인구를 위해 3백 24개교를 설치, 인구의 9분의 1인 3만4천 1백명을 수용하고 있다. 이는 한국사람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일본사람보다 못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총독의 보고에 따르면, 한국에는 2만 1천 8백여개의 구식 마을학교(서당)가 있으며, 여기에서 50여만명의 어린이가 교육 반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독교 계통학교에 다니는 2만2천 5백 42명의 어린이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불평하는 것은 고등교육기관에 관한 것이다. 한국 거주 일본인 자녀들은 한국인보다 고급수준의 교육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학생 수에 비해 더욱 풍부한 설비가 되어 있다. 3개 전문학교를 포함하여 한국인이 공립보통학교 이상의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것은 7개 학교에 9백 78명에 불과하나, 일본어린이는 14개 학교에 9백 92명을 수용할 능력이 있다. 바로 이것은 정부가 교육상의 차별정책을 쓰고 있으며, 나아가 한국인에게는 고등교육의 혜택을 거부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하고 있다. 여기서도 한국 사람은 고등교육에 무관심하다고 변명을 할 수는 없게 된다. 왜냐하면, 1919년, 9백 78명 모집에 3천 6백 82명이 지원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많이 의심받고,
출처 :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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