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자료

[스크랩]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 /A. W. 토저

baromi 2008. 4. 8. 07:30

 

오늘날 이곳 저곳에서 기도 집회가 성행한다. 기도의 막대한 필요성을 봐서 이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의 관찰이 틀림이 없다면 이러한 많은 노력이 헛되이 소모되며, 아무런 성과도 낳지를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그들의 동기가 건전치 못한데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람이 기도를 한낱 자기들의 불순한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려 한다. 즉, 기도를 자기 발전을 위한 어떤 기술, 또는 지상적인 성공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가지 각색의 개인 중심의 종교적 계획을 가지고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있다.
이런 계획 중에는 비성경적인 것 내지 성경에 없는 것들이 많이 끼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러 사람들에게 서신을 띄워 하나님의 뜻에 가당치도 않는 자기들 계획 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도록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당부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기도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명백히 말해 주고 있다.
기도라 하면 의인 아벨로부터 묵시의 기록자 요한에 이르도록 온갖 믿는 영혼들이 이 일을 힘써 왔던 것이며, 오늘날에 이르도록 교회가 이 지상에서 투쟁해 오는 기간에 끊임없이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 요소가 되어 왔던 것이다. 기도를 정확하게 파악한다면, 아무리 많은 말로도 미처 그것을 표현할 수 없다 이 글은 다만 그릇되게 인식되고 이용되는 기도에 대하여 언급하려는 것이다.

기도의 능력에 대하여 성경은 밝히 말씀해 주고 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성령으로 감동된 야고보는 기록하였다. 이와같이 성경 전체와 기독교인의 경험이 또한 기도의 능력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이 없을 경우 그 기도는 잘못된 기도임이 분명하다. 이 기도의 능력을 시인한 사도 야고보는 동시에 효력없는 기도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였다.
  "너희가 구하는데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기도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지만 그런 중에도 그것은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활동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기에 기도와 사람에 대하여 모든 것을 잘 알고 계셨던 주님은 "항상 기도하여 쉬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실패의 원인

우리의 기도가 무력한 이유가 어디 있는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의도는 기도하려는 의욕을 말살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력한 기도 뒤에 숨어 있는 원인을 찾아내서 그것을 제거하려는데 있다. 우리의 기도 속에 치명적인 독소가 들어 있는 한 아무리 기도를 계속해보아야 유익이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기도를 계속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기도를 바로 하느냐가 선결 문제이다. 바른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흔히 드리는 기도를 들을 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쉽게 알 수가 있다. 세간에서 그래도 영적 방면으로 손꼽힌다는 사람들이 모이는 특별 기도집회에 있어서도 흔히 드리는 기도가 일상사에 관한 경건한 어조의 독백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보통
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성령 에 감동되어 기도드리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의 반응에 그 마음이 지배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많은 것을 약속해 주는 듯 보이면서도 아무 실속없는, 비없는 구름과도 같다.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리자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해야만 한다. 바로 이렇게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할 수 있는 길을 열리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드린 간구가 거절당해 본 일은 일찍이 없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은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어주심 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아느니라"(요일 5:14,15)

또한 능력 있는 기도를 드리자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시듯 넓고, 크게 세상의 형편을 보고 드리는 기도여야 한다. 세상이 스스로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보시느냐가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매일 매일 변하는 세상의 형편을 무기력하게 따라가는 기도는 헛된 기도이다. 여러가지 소식통을 통해 보도되는 변화 무쌍한 세상일은 이리 튕기고 저리 튕기는 탁구공과 같이 팔팔하게 움직이는듯 보이기는 하겠지만 실상은 그 속에 아무런 뜻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분명히 세상의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중한 일이란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 것이다.
한편 그는 어떤 것이 중요한 것인가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만큼 신령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는 우리를 능력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경지까지 인도해 주실 것이다.

지난 수년간 나는 하나의 굳은 신념이 마음속에 자리잡는 것을 경험해 왔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할 큰 두 가지 소원이 기도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게 되리라는 징조가 현재의 세계 정세 속에서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들 가운데 다시 나타난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교회가 오늘날의 세속적인 포로의 위치에서 해방되는 사실이다.
지난 여러 세대 동안 복음주의 신앙가들은 귀로만 듣고 신앙생활을 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옛날 찬란하고도 흐뭇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었던 신앙의 선진들을 야릇한 연모의 정으로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즐겨 인용하거나, 또는 일찍이 하나님께서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내신 바 있는 지식 중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영적 양식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아브라함, 야곱, 모세, 이사야 같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낸 하나님의 기록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
우리는 흠모의 정을 가슴 깊이 안고,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한 기사를 읽게 된다. 그밖에 우리는 에드워드나 피니의 기록을 읽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다시 한번 나타나기를 연모해 마지않는다.

우리의 의무

우리의 눈을 가린 수건이 벗겨지고,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 앞에 자신을 나타나실 때까지 능력있는 기도를 드릴 절대적인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야 할 둘째 목적은 교회에 영적 생명력이 부활하는 일이다. 우리는 교회가 세상과 짝하는 부끄러운 상태에서 벗어나, 그가 일찍이 누렸던 첫 사랑으로 돌아가며, 참 주님께로 나아가는 일이 있기 위하여 계속 기도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모습은 여지없이 타락하고 그 품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과감한 개혁 아니고는 교회를 구할 길이 없게 된 실정이다. 신령한 눈을 가진 자만 이 교회가 봉착하고 있는 이 곤경을 직시할 수 있으며, 성령으로 충만한 심정만이 교회의 회생(回生)을 위하여 간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비록 우리가 이런 중대한 문제를 두고 기도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잘못 구하면 아무런 보람도 없이 실망과 공허만을 맛보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문제 쓴 자아(自我)에 있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을 때처럼 이기심이 교묘한 모양으로 발동할 때가 없다. 이기심은 에덴 동산에서 뱀으로 나타났고 아간의 장막에서 금덩 이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 이기심이 규명되어 제거되지 않는 한 기도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이기심은 순결하고 능력 있는 기도라도 약하고 무력 한 기도로 전락시킨다.

가령 내가 이 세대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도 내심에 그 영광을 나를 통해 나타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은근히 고개를 들고 있다면 모든 것을 망치고마는 결과가 된다. 교회가 신약시대 교회의 탁월한 모습으로 되돌아 갈 것을 큰 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해도 내가 이 일을 맡고 나섰으면 하는 야망을 품고 있다면 나의 이와 같은 순결치 못한 동기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잘못을 저지른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은밀한 욕망이 나의 기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이렇듯 이기심은 대담하고도 파렴치하게 나를 좇아 제단까지 따라와서 나와 함께 무릎 꿇고 나의 기도가 입술에서 미쳐 나오기도 전에 말해버린다.

예루살렘의 성곽을 수축하기를 바라면서 한편 느헤미야와 같은 성명을 날리기를 원할 수 있는 것이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여지없이 패배당할 것을 원하면서 한편 하늘에서 불을 끌어 내려옴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던 갈멜산의 엘리야가 될 것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 새로운 개혁의 기풍이 불기를 원하는 나의 강한 욕구가 루터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나의 욕망 때문에 유명무실해지고 마는 것이다. 당신은 일찍이 주의 백성들이 육과 마귀를 대적해서 이길 것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한편으론 오색종이를 뿌리며, 개선 장군을 맞는 교회의 갈채와 박수를 내려다보며 무개차 위에 몸을 싣고 지나가는 자신을 꿈꾼 일은 없었는가?

당신이 설교자라면 묻노니, 당신은 일찍이 당신의 설교 한마디 한마디를 전 심령을 기울여 듣고 있는 수천 수만의 열띤 얼굴들을 상상한 일이 없었던가? 당신이 기독교 실업인이라면 묻노니 당신의 사업 성공을 위한 기도가 극적인 응답을 받아 그 간증문이 당신의 큰 사진과 함께 전도지로 인쇄되어 나가는 것을 꿈꾸어본 일이 없었던가?

자, 이쯤 생각할 때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이며 우리의 가장 무력한 곳이 어디인가를 알게 될 줄 믿는다. 우리는 흔히 바른 것을 위해 기도하나 그릇된 이유로 응답이 있기를 바란다. 그 이유의 하나는 성도들 간에 명성을 얻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타임 잡지의 표지 위에 나의 모습이 실릴 가망이 영 사라지고 난 다음에는 크리스챤 라이프 잡지에 실렸으면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다. 즉, 이 세상이 우리의 진가를 알아주지 못하면, 교회는 우리를 알아 주겠지하는 마음이다. 위대한 정치가, 배우, 운동가로서의 명성을 차지하지 못할 바에야 적어도 뛰어난 크리스챤으로 명성 을 떨쳐봐야지 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곧 만나 대신 고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런 심령에게 메마름을 주실 뿐이다.

기도의 위험

기도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한편 위대한 기도의 사자라는 명성을 얻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을 것이다. 기도의 사자라는 영예를 탐하는 것만큼 뿌리깊고 위험한 이기적인 죄는 또 없다. 그것은 자기 숭배나 다름없기 때문이며, 더구나 하나님을 경배한다면서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무엇보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짐으로써 스스로 분토와 같이 여겨야한다. 이 세상의 판단으로 남을 정죄함을 그치고 하나님의 뜻을 심중에 품어야 한다. 명예나 이익을 대하여 는 스스로를 죽은 자와 같이 여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및 하나님의 크신 영광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영광을 다시 한번 나타내 주시되, 아버지 뜻이어든 저를 사용하시고 아니어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당신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합당한 아름다운 자리를 다시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를 사용하시든지 사용하지 아니하시든지 다만 이 기도가 응답을 보게만 하여 주시옵소서. 영광의 하나님이시여, 저를 사용하시거나, 천대하시거나 저버리시거나 오직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

진정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야말로 이 땅에서 가장 능력있는 무기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능력있는 기도를 드릴 엄숙한 의무가 우리 성도에게 지워져 있는 것이다.■

 

 

크리스챤프랜드에서 펌

출처 :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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