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스크랩]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 42문

baromi 2007. 9. 3. 09:13
제 42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면 왜 우리는 죽음을 당해야 합니까?
답: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에 대해 보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등지고), 영생으로(에로 향하여)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At cum Christus pro nobis mortem oppetierit, cur nobis quoque est moriendum?
-Mors nostra non est pro peccatis nostris satisfactio, sed peccati abolitio, & transitus in vitam aeternam.

(참고성경구절)
요 5:24; 고전 15:26; 빌 1:21

(해설)

I.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다.

1. 자연인의 죽음

자연인(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에게 있어서는(인류의 첫 범죄 사건 때 언도된 대로) ‘영적인 죽음’(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됨) 뿐 아니라 육체적 죽음은 죄에 대한 형벌이다(창 2:17; 롬 6:23).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했다. 자연인의 이런 죽음을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죽음을 향한 심판으로 가는 길일뿐이다. 자연인이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 곧 자연인으로 하여금 죽도록 언도하신 것은 범죄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크신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만일 괴물 같은 인간들이 이 세상에 영원히 산다고 한다면 괴로워서 살 수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히틀러, 스탈린, 등등 독재자들이 영원히 산다면 서민들은 지옥의 생활을 할 것이다. 이런 자들을 일정한 시간 동안 살게 하시다가 죽게 하신 것은 죄의 횡포를 막기 위하심에 있다.

2. 그리스도인의 죽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신자들의 죽음의 의미는 자연인들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신자들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역할을 하는 그런 죽음이 아니다. 신자들은 죽음을 통해 오히려 여러모로 은혜를 받는다. 신자들은 죽을 때 죽음의 공포를 가지지 않는다. 신자들의 죽음은 최후의 심판을 내대보며 영육 간에 아울러 쉬는 죽음인 것이다. 또 그 동안 육신의 정욕과 싸운 성화과정의 완료를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죽음을 통해 사망의 권세를 지닌 마귀를 제거하셨다. “(히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딤후 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Otto Thelemann, Handreihung zum Heidelberger Katechismus fuer Prediger, Lehrer und Gemeindeglieder (Detmold: Verlag von Schenk, 1892), 184.

II. 우리의 죽음은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킨다.

1. 육신의 죽음은 신자(信者)들에게 좋은 것이다.

이 죽음은 인생살이의 내외적인 모든 비참함이 종결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직 “육 안”에 살고 있는 신자들은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한다. 육신의 죽음은 바로 이런 고난이 끝난다는 말이다. 만일 누가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도 육체적인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 땅에서 영원히 살려 애쓴다면 그는 사실상 기독교인이 아니다.
내 친구 중 한 사람의 형님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일이다. 아직 젊은 나이로(40대 초반) 가족과 큰 산업체를 뒤로 두고 죽게 되었다. 무척 오랫동안 병원에서 고생을 했고 또 간호하는 가족들도 고통을 당했다. 몇 년을 병원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다. 우리 친구들을 매우 사랑해 주시던 형수님의 마음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귀국해서 방문했더니 그 동안 자기가 받은 위로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우리 친구 양승헌 박사가 와서 말씀을 전해주면서 기도해 준 것인데, “이제 형님은 더 이상 아프지 않는 곳으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신자들에게는 죽음이 이별이라는 점에서는 슬프지만 새로운 소망과 고통이 없는 곳으로 간다는 점에서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2. 육신의 죽음은 죄를 완전히 죽이는(Absterben der Sünden) 순간이다.

인간이 불행한 것은 죄의 권세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죄의 지배 체제를 벗어나야 그 비참함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⑴ 육신의 죽음 곧 육체와 영혼이 분리됨을 통해 신자의 영혼은 죄가 자리를 잡고 있는 육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다(롬 7:18). 원인이 되는 죄가 제거되기 때문에 결과가 되는 죽음도 제거되는 것이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롬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히 4: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⑵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통해 한편으로는 죄에서 해방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생에로, 하나님의 자녀의 완전한 자유에로 나아간다(롬 8:21; 요 5:24; 12:26; 고후 5:1).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3. 신자들에게 있어서 육신의 죽음은 안식의 잠을 의미한다
(요 11:11; 고전 18:20; 빌 1:21; 고후 5:2; 빌 1:23)

바울은 신자들의 육신적인 몸이 죽어 파괴되면, 부활할 때, 하나님이 지으신 것으로 새로운 옷을 입는다고 말한다.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우리가 죄의 권능이 육신의 몸 안에 살고 있는 한, 사망의 쏘는 것, 곧 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나 부활하게 되면 죄가 전혀 지배하지 않게 된다. 영광스러운 몸이 되는 것이 바울의 가르침이다.
성경은 모든 성도들의 죽음을 잠으로 표현한다.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행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설교자료)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의 의미(장례식 설교)
출처 : 백석대학교 권호덕교수
글쓴이 : 권호덕 Herm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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