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스크랩]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 41문

baromi 2007. 9. 3. 09:13
제 41 문: 그는 왜 장사 지낸바가 되었습니까?
답: 이는 그가 (역사 속에서) 정말로 죽었음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Quare etiam sepultus est?
-Ut eo testatum saceret, se vero mortuum esse.

(참고성경구절)
고전 15:3-4; 요이 7

(해설)

I. 그리스도의 장사지냄은 그의 죽음을 증거한다.

1. 확실한 죽음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은 죽을 때까지 거기 달려 있는데, 더러는 하루 이상 달려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에 의해(신 21:23) 해가 지면 다리를 꺾어 죽게 하여 시체를 내렸다. 예수는 오후 3시경에 죽으셨다(마 27:46). 이 죽음을 유대인, 로마병정, 백부장, 아리마대 요셉 그리고 빌라도가 확인했다(요 19:31-35; 막 15:44-45).
예수께서 죽어 장사 지냄 바 된다는 것은 그 자신이 요나의 사건과 밀알 비유로 설명하며 예언했다. “(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요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사야서는 구원자가 오셨다가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예언했다. “(사 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2. 장사지냄의 의미

예수께서 장사 지낸 바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그가 분명히 죽었음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을 부인하는 자들 가운데는 예수께서 죽지 않고 기절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주장에 대해 그의 장사지냄은 강력하게 반박하는 것이다. 그가 죽은 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의 부활소식도 대수롭지 않는 사실이 될 것이다.
기독교 이단 중에 영지주의(靈知主義)파에 속하는 假現說者(가현설자)들이 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온 것을 부인한다. 이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그렇게 보였을 뿐 실제로 못 박힌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헬라적 이원론에 빠져 있어서 물질은 모두 악하고 영적인 것은 모두 고귀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이 악하다고 하는 물질인 육신으로 오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십자가의 죽음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한다. 이런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중생(重生)하는 일과 연관시켰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죽어 장사지내야할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옛 자아(自我) 또는 육(신)인 것이다.


II. 예수의 장사 지냄 바 됨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나?

1. 첫째, 우리가 영적으로 예수와 함께 장사지냄을 받을 통해 그의 구원에 뿌리를 박고 죄와 세상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를 믿으면 자기도 모른 사이에 자기의 정욕대로 살로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둘째, 예수의 장사지냄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를 제거하며 우리의 죽음이 안식처에 쉬는 것으로 만든다는 위로를 준다.
2. 그의 장사 지낸 바 됨은 그의 비하(卑下)의 마지막 단계로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마무리 짓는 것이다.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의 육체가 다른 사람의 시신처럼 무덤에 매장된다는 것은 경멸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장사지냄이 있기 때문에 그의 부활은 더욱 영광스러운 것이다. The Commentary of Dr. Zacharias Ursinus on the Heidelberg Catechism(tr. by The Rev. G. W. Williard, A.M.(Phillipsburf, New Jersey: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852), 225.
3. 예수의 장사지냄은 우리로 하여금 무덤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평화롭게 잠자는 안식처로 볼 수 있도록 인식을 바꾸어 주었다. 서구에는 무덤을 ‘평화의 안식처’(Friedenshof)라고 부른다.
4. 예수의 장사지냄은 부활의 관점으로 볼 때 그가 그 자신의 몸속에 있던 죽음의 세력을 극복한 것이며 그 자신의 능력으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죽음을 내어 던져 버림으로써 그의 부활이 유령적이고 공상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의 실제적인 부활이었음을 보여준다.(Ursinus, 225).
5.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의 머리로서 무덤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을 여신 것을 알기 때문에, 부활을 소망하는 우리도 예수처럼 장사지냄을 받았다가 그의 능력으로 부활함을 확신하다.
6. 그러면 예수께서 죽어 무덤에 들어가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이것은 육신으로 오신 그가 죽으심을 통해 죄인을 얽어매고 있는 육신 또는 ‘육의 체제’를 파괴하여 구원의 기틀을 만든 것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우리 구원은 하나의 이론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장사지냄)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 역사 속에서 장사됨은 마치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들어감과 더불어 우리의 옛 자아가 죽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예수의 장사지냄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는 것을 의미한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매장(埋葬)과 화장(火葬)문제: 만일 우리의 죽음이 결국 죽음의 세력을 제거하는 역사와 관계한다면 화장이 그렇게 비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구약의 번제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시고 한 줌의 재로 된 것을 가르친다. 화장을 통해 죽음의 세력을 제거하는 사실이 더욱 실감나기 때문이다.

(설교자료)
-고기 배속의 요나
-롬 6장 강해
출처 : 백석대학교 권호덕교수
글쓴이 : 권호덕 Herm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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