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스크랩]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 39문

baromi 2007. 9. 3. 09:12
제 39문: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그가 다른 죽음의 방식으로 죽은 것보다 더 의미가 큽니까?
답: 확실히 더 의미가 있습니다: 이로써 나는 내게 지워진 저주를 그 분이 스스로 짊어지셨음을 확신합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Est vero quiddam amplius, quod affixus sit cruci, quam si alio genere mortis affectus esset?
-Sane amplius: Ex hac enim re sum certus, eum maledictionem, que mihi incumbebat, in se recepisse: nam mors crucis a Deo erat maledicta.

(참고성경구절)
갈 3:13

(해설)
제 39문은 아담이 범죄하고 타락했을 때 우리가 함께 받은 저주가 우리로부터 제거되는 방식에 대한 내용을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붙은 저주를 어떻게 떼 내어버리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경은 이 저주를 떼 내어버릴 때 샤머니즘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복채와 같은 돈을 낼 필요도 없다. 또 별미 헌금을 낼 필요도 없다. 또는 신적인 기운이나 능력을 우리 몸속으로 집어넣어 저주를 몸 밖으로 몰아내는 방법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독특한 방식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轉嫁(전가)의 방법인데 하나님이 제시하신 방법인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서 37-52문은 사실상 이 轉嫁문제를 다룬다. 그 중에 제 37문은 전가사상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를 이해하려면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I. 내게 지워진 저주란 무엇일까?

저주란 인간이 범죄함으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분리됨을 통해 오는 인간이 져야할 모든 비극적인 짐을 말한다. 신약성경은 그것을 한 마디로 ‘사망’이라고 말한다. 불안, 공포, 질병, 분쟁, 시기, 질투, 노동의 피곤, 늙어감, 육체적 죽음, 하나님 앞에 선한 일을 할 수 없음, 사단의 지배 등등.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위의 내용은 오늘날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의 뿌리인 것이다. 이것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육체의 고통
-2) 인간 사이의 갈등
-3) 자연으로 인한 고통
-4) 죽음의 고통
우리 각자는 어떤 경우에 이런 저주를 절실히 느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인간실존의 고통을 인식할 수 있다. 마약하거나 큰 질병에 걸렸을 때, 죽음 앞에 설 때, 전쟁이 일어날 때, 분쟁하고 시기하고 질시할 때 등등.


II.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셨다.

1. 저주를 받는 방법: 나무에 달리심

구약성경에는 저주를 받는 것을 상징하는 그림들이 자주 나온다.
⑴ 나무에 달린 자: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바울도 이 구절을 인용하여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했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2) 놋뱀: 주님께서는 자기의 구속사역을 ‘놋뱀’에 비유하여 설명하셨다: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뱀은 저주를 상징한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에’ 저주를 받으셨음을 의미한다. 만일 예수께서 우리 대신에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그 모든 저주를 우리 자신이 받아야 한다.

2. 우리를 위하여

아담은 자신의 실수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위해’(por nobis) 저주를 받았던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은 이 사실을 잘 증거한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골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즉 우리가 받을 저주의 증서에 기록된 것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받으셨다는 말이다. 이 저주를 받을 때 예수께서는 그 부끄러움을 참으셨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께서 이렇게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음을 통해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

3. 가계에 흘러내려오는 저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저주를 대신 다 받으셨는데 근간에 나온 저서에 의하면 저주가 가계를 통해 흘러 내려온다고 한다.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칫하면 우리는 무속적으로 이 문제를 해석할 위험에 빠진다. 즉 그 조상의 죽은 귀신들이 그 가정 또는 그 가옥에 붙어 있어서 계속 후손들을 저주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가문이나 개인에게 계속 저주스러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은 우선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살면 결코 저주가 따르지 않는다. 문제는 예수를 믿은 후에도 계속 남이 모르는 죄의 버릇이 있는 경우 사탄이 그를 곤경에 빠뜨릴 것이다. 사탄은 육신의 정욕이 있는 곳에 강하게 역사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그 사람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서 성령이 충만하면 사탄의 저주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가문에 과거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탄이 좋아하는 일만하고 살았다 하자. 그 가문은 분명히 마귀로 충만한 집안이었다. 그런 가문의 집터에는 귀신의 역사가 있을 수 있다. 귀신들은 지역공간과 관계하는 것 같다. 군대 귀신들이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이런 것을 증거한다. 그럼에도 그 후손이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 사탄의 모든 저주로부터 해방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가 중요한 것이다. 자기 조상들을 지배한 사탄들과 영적인 전쟁을 해야 할 것이다.
출처 : 백석대학교 권호덕교수
글쓴이 : 권호덕 Herm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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