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자료

[스크랩] 분리파 청교도와 이향성-이상규

baromi 2006. 4. 24. 09:21
분리파 청교도와 이향성(離鄕性)  

신앙의 자유 찾아 나그네적 삶을 추구  
  
이상규 교수 / 고신대학교 역사신학, 신학박사

우리는 그저 청교도라고 말하지만 사실 청교도에는 두 부류가 있었다. 분리파 청교도와 비분리파 청교도가 그것이다. 분리파란 영국교회 내에서는 교회개혁이 불가능함으로 영국교회로부터의 분리는 필연적이라고 여기는 이들로서 독립파(Independents) 혹은 회중파(Congregationalists)로 불리기도 했다. 이 그룹의 대표적인 인물은 로버트 브라운(Robert Browne, 1550-1633)과 그의 친구 로버트 헤리스(Robert Harrison)였다. 이들에 이해 1581년 놀위치(Norwich)에 최초의 회중교회가 설립되었다.

회중교회는 설립되자마자 영국교회와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해 과격하게 비판했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고, 투옥되거나 해외로 추방되었다. 브라운은 화란 젤란드(Zeeland)지방에 피난민 교회를 세우고 화란에서의 회중주의를 전파하는 책, <종교개혁론>(A Treatise of Reformation)을 집필하기도 했다.

브라운은 그의 책에서 국가와 교회의 완전한 분리를 주창하였다. 교회가 국가와 어떤 형태로든지 관계를 맺게 되면 교회는 부패하고 타락하게 된다고 보았고, 영국교회와 같은 국가교회나, 장로교회와 같은 국민교회도 부정하였다. 브라운이 이상으로 여겼던 교회는 국가와 아무런 관계도 없이 오직 하나님과의 계약만 있었던 초대교회와 같은 형식의 교회였다. 브라운은 국가와 교회의 완전한 분리를 주창한 것이다.

즉 그는 개별교회의 완전한 독립과 자치(self governing)를 강조하여 목사나 장로 집사, 교사 등도 지 교회별로 자치적으로 선출한다. 그래서 어떤 특정의 지교회가 다른 지교회 위에 군립 할 수 없으며, 각 지 교회 간에는 협력을 추구했을 따름이다.

브라운은 화란 피난민교회에서 목회에 성공하지 못했고, 1585년 영국으로 돌아가 영국국교회에 복귀하였다. 그의 복귀가 내면의 진심에서 국교회에 대한 동의의 결과인지, 불가피한 외부적 상황에 따른 결과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브라운은 1591-1633년 사망 시까지 국교회 성직자로 살았다. 브라운의 국교회 복귀 후에도 회중교회 운동은 헨리 바로우(Henry Barrow, ca 1550-93), 존 그린우드(John Greenwood) 등의 지도하에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1593년 교회적 문제에 대한 여왕의 지상권을 부인한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이런 핍박 때문에 회중교회 교인들은 화란으로 피난하거나 추방되었다.
분리파는 국가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재세례교도와 유사한 점이 있었다. 분리주의적 청교도 중 일부가 후일 메노나이트(Mennonite)들과 제휴한 일이 있는데, 이것은 이들 간의 교리적 유사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분리파와는 달리 비분리파 청교도는 영국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원치 않거나 분리를 잠정적인 것으로 보는 그룹 인데 장로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이들은 영국교회 안에 있으면서 개혁을 이루려고 시도하였던 온건한 그룹이었다. 그렇다면 영국을 떠나 새로운 대륙으로 이주해 간 청교도는 어느 그룹의 사람들일까? 자명한 일이지만 그들은 분리파 청교도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장로교적 인사들이 아니라 분리주의적 회중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청교도들의 삶의 여정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한 가지 특징은 이 땅의 삶의 터전에 연연하지 않고 나그네적 삶을 추구하는 이향성(離鄕性)이다. 비록 청교도 운동은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시작되지만 이 신앙운동은 이미 메리여왕 때부터 발현하였고, 메리의 친 천주교정책에 반대하여 조국을 떠나 제네바나 라인랜드(Rheinland)의 여러 도시로 망명한 사실에서 그 이향성을 엿볼 수 있다.

신앙의 자유와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조국을 등졌던 이들이 엘리자베스가 집권하자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엘리자베스의 종교정책에 만족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 쪽으로 기울어졌던 이복동생 에드워드나 천주교 쪽으로 기울어졌던 이복언니 메리와는 달리 ‘중도정책’(via media)을 채용했다.

그것이 후일의 영국교회, 곧 성공회의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엘리자베스의 종교정책은 중도정책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공정하게 말할 때 개신교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구라파에서 진정한 개혁신앙의 맛을 보고 돌아왔던 청교도들에게는 엘리자베스의 정책은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영국 스쿠루비(Scrooby) 지역의 청교도들은 1608년 다시 조국을 떠나 화란으로의 이민을 선택했다. 흔히 ‘순례자의 조상’(Pilgrim's fathers)이라고 불리는 102명의 청교도들이 1620년 영국을 떠나 뉴잉글랜드로 떠나기 12년 전의 일이었다.

순례자의 길, 이것은 청교도들의 정신적 요체의 외향성일 뿐이다. 초기 청교도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셨던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도록 지시하셨던 창세기 12장 1절의 말씀을 애독했고, 그 이향의 길이 성경을 관통하는 정신으로 이해했다.

그 일관된 나그네로서의 삶을 보여주는 히브리서 11잘 8절의 말씀, 곧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는 말씀은 저들이 가는 역려과객(歷旅過客)의 날들의 빛이었다. 이런 점들은 초기 청교도 문학 속에도 자연스럽게 배여 있다. 청교도 문학가인 존 밀턴(John Milton, 1608-74)은 1667년에 쓴 <신락원>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돌리고 낙원의 동쪽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저희 행복의 자리, 그 위에 그 화염의 검 휘날리고, 문에는 무서운 얼굴과 불 무기 가득했다. 눈물이 저절로 흘렀으나, 즉시 씻었다. 안주(安住)의 땅을 택하도록 세계는 온통 그들 앞에 있었다. ‘섭리’는 그들의 안내자. 두 사람은 손에 손을 잡고 방랑의 발 무겁게 에덴을 통과하며 그 쓸쓸한 길을 갔다.

저명한 청교도 작가의 대작이 인간의 쓸쓸한 이향장면으로 마감된다는 점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신락원>이 출판된 지 약 10년이 지난 1678년에 나온 <천로역정> 제1부 서두는 “남루한 옷을 입고 얼굴을 그의 집으로부터 돌리고 손에는 한권의 책을 들고 커다란 짐을 등에 진” 청교도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나오는 청교도는 죄의 짓고 타의에 의해 낙원으로부터 추방당하는 인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무서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멸망의 도성을 떠나 스스로 고향을 떠나는 인간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가 자기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으로 달려갔을 때,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그의 뒤에서 돌아오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는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삶, 삶, 영원한 삶’이라고 왜치면서 멀리 달려갔다. 그는 뒤도 돌아오지 않고 광야의 중앙을 향하여 빠져 나갔다.”

주인공 기독도는 기족조차 버리고 이 세상이라는 광야를 헤쳐 가는 나그네였다. 그가 가야했던 ‘절망의 늪’과 ‘굴욕의 골짜기,’‘허영의 거리,’‘의혹의 도성’은 나그네 길을 방해하는 뿌리쳐야 할 대상이었을 뿐이다. 순례자의 길을 가야 하는 청교도의 이향성을 이보다 더 매력적으로 묘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88)은 청교도였고, 허락받지 않는 설교자였다는 이유로 12년(1660-1672)동안 감옥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천로역정은 감옥에서 빗어낸 작품이었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메모 :

'교회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회심자료]루터는 회심하지 않았었다!  (0) 2006.10.30
[스크랩] 개신교 정통주의?  (0) 2006.08.26
[스크랩] 이레니우스의 이단논박  (0) 2005.09.15
근대교회사  (0) 2005.09.09
종교개혁사  (0) 2005.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