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자료

근대교회사

baromi 2005. 9. 9. 08:35
LONG

4. 친첸도르프와 헤른후트 형제교회


1) 친첸도르프의 생애와 업적


- 친첸도르프 백작(Nikolaus Ludwig Graf von Zinzendorf, 1700-1760)은 슈페너, 프랑케 그리고 아르놀트 다음으로 독일 경건주의의 4번째되는 주요인물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헤른후트 형제교회의 창시자이며 인물로서 역사에 그의 신학과 경건에서 의미를 가졌다.

- 루터교 신앙 때문에 작센으로 이주하게된 오스트리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친첸도르프는 1700년 드레스덴에서 장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오버라우지츠(Oberlausitz)에 있는 그의 외할머니 게어스도르프 남작부인(Freifrau Henriette Katharina von Gersdorf)의 영지에서 아른트와 슈페너의 얼 속에서 자랐지만 또한 신비적이고 영성적인 영향을 받았다. 친첸도르프의 외할머니는 당시 교육을 받은 부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 1710년부터 1716년까지 친첸도르프는 할레에 있는 프랑케의 학교(Pädagogium)에 다녔으며 프랑케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 할레의 경건주의의 선교활동에 의하여 지속적인 영향을 받았다.

-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법학공부를 한 후에 서유럽으로 연수여행을 하였다; 초기 계몽주의, 칼빈주의 그리고 얀센주의와의 만남.

- 그의 신학과 경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백작궁 로이스-에버스도르프(Reuß-Ebersdorf)와의 교통이다. 다양한 그리스도인들의 초교파적, “형제애적 공동체”(philadelphische Gemeinschaft)는 후에 헤른후트 형제교회의 모델이 되었다. 1721년부터 드레스덴에서 궁중고문관이며 법률고문관으로서 그는 형제애적인 공동체를 모으고 경건주의적인 글을 쓰는데 활동하였다.

- 1722년부터 친첸도르프는 모라비아의 신앙망명자들이 오버라우지츠(Oberlausitz)에 있는 자기의 영지에 이주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것이 목수인 다비트(Christian David) 지도 하에 헤른후트 취락의 시작이다. 이 망명자들은 후스파 운동에 기원을 둔 형제단의 후손들이었다.

- 내부적인 어려운 갈등 후에 이 교회는 1727년 8월 13일 공동 성만찬 예식에 의해 내적인 신생을 경험하였다. 친첸도르프의 영향으로 루터교의 지역교회와 연합이 이루어졌지만 과거의 독자적인 교회의 전통 또한 갱신되었다.

- 헤른후트 형제교회의 표식: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자비로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을 열어주신 구세주와 밀접한 연합에 대한 인식. 감사와 활동을 압박하는 종교적인 체험에 근거한 뚜렷한 교회인식. 새로운 예배의식: 애찬과 세족식. “쾨레”(Chöre) 안에서 성과 가족 상황(기혼과 미혼을 표시)에 따라 그리고 “반덴”(Banden) 안에서 개인적인 선호에 따른 교회 구조. 일용할 양식의 실천(Lospraxis): 성구 한 구절이나 찬송가 가사를 다음 날의 표어로 삼음(1728년 5월 3일 저녁 모임에서 친첸도르프가 다음 날을 위한 찬송가 가사를 선택).

- 헤른후트 경건주의의 세상에 대한 활동은 자율적이고 교회로부터 나온 선교운동에 있다. 선교지 교회에서 교파적인 특징의 단념 그리고 식민지 세력으로부터 독립에 의해 헤른후트 선교는 곧 바로 할레의 선교를 능가하였다. 서인도와 그린란드에서 시작한 선교는 1760년까지 200명이 넘는 선교사들을 지구의 곳곳에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 헤른후트의 친첸도르프는 슈페너가 의미한 교회 속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로서 형제교회를 형제들의 자기 인식 때문에 현실화 시킬 수 없었다. 많은 긴장과 갈등 후에 1747년 작센에서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의 동류로서 인정받았다.

- 친첸도르프의 »비유이론«은 헤른후트의 입장을 종파적인 교회주의로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의 종파들과 단체들은 하나님의 각기 다른 교육방법들(τρóποι παιδεíας)이다. 새로운 종파가 아니지만 종파들 가운데서 하나의 종파로서 헤른후트 형제교회는 기독교의 모든 축복에 대한 특별한 공동체로서 활동하고자 한 것이다. 친첸도르프의 수 많은 여행을 통해 헤른후트의 지교회들이 생겨났다.


2) 친첸도르프 신학의 개요


- 친첸도르프의 신학은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새롭게 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오직 십자가에 있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존재한다. 자연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거부: “하나님을 머리로 아는 사람은, 무신론자가 될 것이다”, “예수가 없이는 나도 무신론자가 되었을 것이다.” 기독자의 구원에 대한 확신은 십자가에 달린 사람과 자신을 대신하여 형벌의 고통을 당하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경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 중심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은 종교적인 감정의 체험에서 표현된다(“피와 상처의 신학”).

헤른후트 형제교회 뿐만 아니라 친첸도르프의 신학도 계몽주의와 고전주의(레싱, 괴테 그리고 헤르더) 그리고 19세기의 신학사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자신을 가리켜 “더 높은 차원의 헤른후트”라고 했다.


5. 뷰르템베르크의 경건주의

  

   독일의 모든 지역 가운데 특히 뷰르템베르크는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은 곳이다. 사색적이고 사변적인 이곳에 신비적이고 명상적인 요소들이 합류하였다. 중요한 인물: 요한 알브레히트 벵엘(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이 있는데 그는 성서학적인 저술들로 의의가 있다(헬라어 신약성서 1737년, 신약성서 주해 Gnomon Novi Testamenti 1742년). 또 한사람은 야콥 뵈메(Jakob Böhme)의 영향을 받은 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외팅어(F.Chr. Oetinger 1702-1782)이다.

- 외팅어는 경건주의의 독창적이고 열광적인 인물이다. 벵엘이 성서신학자라면 외팅어의 체계는 신학적인 것만이 아니라 신지학적인 체계였다. 외팅어는 자연의 법칙을 도입했다. 그에게는 자연과 계시 모두 중요하였다.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 1702년 괴핑엔에서 시 서기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엄한 교육(체벌, 암기를 강요)을 받았다. 수도원학교에서 경건주의의 정신과 만났다.

- 외팅어의 주요저서: Theologia ex idea vitae deducta, 1765

* 카발라: “전통을 통해 이어 받음”의 의미가 있다. 13세기 유대교의 신비적이고 신지학(神智學)적인 비밀의 가르침이다. 카발라는 탈무드주의와 이성주의의 반동으로서 13세기에 스페인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이후 수백년 동안 유대교 신비주의의 산실이 되었다. 카발라는 아브라함이 쓴 것으로 간주되어지는 예지라(Jesira, 창조)를 내포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세상은 10개의 신적인 유출(Emanationen)과 히브리어 알파벳 22개의 조합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과정과 사건들을 해석. 아주 복잡한 수학적인 체계와 종말에 대한 예언이 수록되어 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의 추방은 이제까지 비밀교리의 카발라에 새로운 전성기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메시아니즘은 카발라에 의해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되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도 여기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이 있으며 전세계에 이 책을 해독할 수 있는 랍비는 극히 소수이며 그 내용, 특히 종말론이 너무 무시무시하여 감히 말하지 못한다고 한다.

* 신지학: 야콥 뵈메(Jakob Böhme)의 철학체계. “거룩한 철학”(philosphia sacra)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으로 성서적인 계시를 해석.

   

IV. 유럽의 운동으로서 계몽주의


1. 계몽주의의 전제조건들과 특성


  17세기의 역사적인 조건들로부터 경건주의 뿐 아니라 계몽주의도 유럽의 운동으로 두드러진다. 계몽주의는 17세기에 시작된다. 계몽주의(독: Aufklärung, 영: enlightenment, 불: les lumières, 이: illuminismo)는 암흑의 시대를 전제로 한다. 인간이 어둠을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성은 이 시대를 전체적으로 특징짓는 것이며 불어로 철학적인 시대(Le scècle philosophiqe), 이성의 시대(L'age de la raison)로 표현된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새로운 과학과 철학은 중세의 교회에 의해 보증된 보편적인 질서에 문제를 제기했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문화의 탄생을 가져온 교회 내부의 종교적인 운동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전의 세계에 대한 해석과 세계의 권력을 아직 직접 극복하지는 못했다.

  절대국가에서 인간은 이론적으로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동물(animal sociale et rationale)이였다. 절대국가는 국민들을 실제적으로 절대국가에 의해 공적으로 인정받은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훈련시켰다. 경건주의가 이성에 세워진 국가에 대해 종교의 질서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참 기독교”에 상응되는 경건의 실천을 실행하는 엘리트 그룹을 관철시키시려고 노력하는 동안, 계몽주의에 의해 시민문화의 형성이 이루어졌다. 이 시민문화는 이미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시로부터 경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활의 영역을 유효하게 추구하였다.

  인간의 의의와 탐구는 무엇보다도 현세의 복락에 대한 필요에 있었지 영원한 구원에 대한 약속은 약화되었다. 바울과 어거스틴적인 종교개혁의 죄론과 은총론은 자연신학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

  * 자연신학(종교): 이미 영국의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7/78-1535)의 유토피아에서 이상적이고 자연종교의 근본이 발전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에 있어서 창조주로서 그리고 세상의 지배자로서 도달할 수 없는 힘이다.


2. 서유럽의 계몽주의


1) 홀란드


- 홀란드에서는 근대의 철학적인 체계가 탄생한다. 스페인을 대항하여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 후기 인문주의(‘신스토아주의’)와 무역을 하는 시민들로 부유하게 된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성장은 양심의 자유와 관용에 대한 조건들을 충족시켰다. 홀란드는 유럽에서 “핍박 받는 자의 방주”가 되었다.

- 프랑스인 데까르뜨(René Descartes, 1596-1650)는 그의 철학에 근대적인 인간의 자아인식을 가져다 주었다. 이성에 입각하여 그는 자신을 확인하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자신의 능력 안에 있는 객체로서 이해한다.

급진적인 의심이 인식, 자신의 인식 원리가 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하나님의 존재는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로부터(aucilla theologiae)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관찰과 이성적인 원리에 근거한 학문의 기본 원리가 된다.

-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에 있어서 기독교의 전통에 대한 비판적인 정신이 나왔다.  주요저서: “신학과 정치적인 논문”(Tractatus theologico-politicus, 1670).  기독교는 사랑, 경외, 자유와 관용에 세워진 것이지 교리와 기적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구약은 그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책이다. 데카르트에 있어서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하나님을 자연 그리고 본질과 동일시 한다: (하나님과 세계의 구별에 대한 폐지) 새로운 신학과 정신사에 강한 비판적인 도전이 되었다.


2) 영국


- 새로운 정신은 영국에서 이미 17세기에 남의 눈을 끌었다: 체버리의 허버트(Herbert of Cherbury, 1581-1648)는 자신의 저서 ‘진리에 관하여’(De veritate, 1625)에서 자연종교의 근본을 제시하였다.

- 철학자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영국의 경험철학의 전형적인 대표자이다.  그의 기독교 이해는 관용, 덕 그리고 도덕 위에 기초한 것이다. 계시와 이성의 관계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앙의 진리들은 초이성적인 것이지만 반이성적이 아니다.

- 로크의 두 가지 주된 성향: 기독교의 이성적인 것과 성서적 원시 기독교로의 회귀는 1700년경 영국 이신론의 목적이다. 그러나 영국의 이신론자들은 언제나 맹렬히 성서비평을 하였다: 성서는 그들에게 더 이상 이성과 자연을 능가하는 계시의 문서가 아니었다. 이신론은 창조신앙을 굳게 잡았지만 세상의 경과에서 하나님의 관여를 부인한다.

- 영국 이신론의 두 개의 중요한 글들: 톨랜드(J. Toland)의 ‘신비적이 아닌 기독교’(Christianity not mysterious, 1696)와 틴델(M. Tindal)의 ‘옛 것으로서 그리고 창조로서의 기독교’(Christianity as old and as creation, 1730).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에 반대되는 불가사이한 아무 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기적들에서 부활의 보고에 이르는 특히 구약 성경에 대한 비판을 뜻한 것이다. 이신론적이고 반이신론적인 논쟁글들에서 문제되었던 것들은 특히 성경에 나온 기적과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구약성경의 예언들에 대한 이해와 정경의 개념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18세기 유럽의 성서신학의 중심문제이다.

-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이신론적인 논쟁의 영향이 본질적으로 영국에서 보다 더 강했다. 영국의 국교회는 급진적인 교회비판을 물리치기 위해 완전히 강화되었다. 영국의 신학에서는 역사적 사고가 일찍 확고한 기반을 차지할 수 있었는데 성서의 축자영감설이 독일에서 처럼 지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3) 프랑스


- 프랑스의 계몽주의는 절대적인 통치권과 교회의 전통적인 지배와 아주 철저하게 관계를 끊었다.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 프랑스 대혁명 이전의 구체제)과 교회와의 밀접한 관계는 교회로 하여금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대원수가 되게 하였다.

- 나중에 홀란드로 피신했던 프랑스인 피엘 벨(Pierre Bayle, 1647-1706)은 유럽 계몽주의의 비판적인 근원적인 저작 가운데 하나인 ‘역사와 고증의 사전’(Di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 1695-97)을 저술하였다.

- 프랑스 계몽주의의 주된 대표자는 볼테르(Voltaire, 1694-1778)이다. 정신의 자유, 관용 그리고 인권을 위한 선구자로서 프랑스 시민계급에서 강한 영향을 끼쳤다. 영국의 이신론의 추종자로서 그는 1726-1728년까지 영국에 머물었으며 이신론의 사상을 프랑스로 가지고 와서 카톨릭 교회에 대한 투쟁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écrasez l'infâme!«). 그는 영국의 정치적인 상황을 모범으로서 제시하였다. 그의 ‘도덕에 관한 에세이’(1754-58)는 이제까지 성서적인 경향의 인류역사를 깨뜨리고 이상적인 척도 없이 문화적인 상이점을 비관적인 관점으로 명백히 제시하였다.

- 35권으로 된 ‘백과사전’(편집: 디데로 Diderot와 알렘베르 d'Alembert)은 계몽주의적인 이상을 프랑스의 시민들에게 전달해주었다. 보편적인 신에 대한 신앙을 고수했던 반기독교적인 볼테르로부터 시작하여 사람들은 바로 무신론과 유물론까지 나아가게 되었다(디데로, 드 라메뜨리 de Lamettrie, 드트리히 폰 홀바흐스 남작 Baron Dietrich von Holbachs ‘자연의 체계’ Systéme de la nature[1770]).

-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는 다른 방법으로 계몽주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인간의 행복에 대한 원천은 이성적인 인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인간의 감정과 정서의 힘에 있는 것이다(“자연으로 돌아가라!”는 프로그램). 원래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하다고 한다. 사회, 문화, 국가 그리고 종교는 인간의 천부적인 선한 성향을 망쳐버린다. 인간의 양심에는 보편적인 의지(volonté générale)가 자리잡고 있다.

루소는 두 개의 저서를 통해 큰 영향을 끼쳤다:

‘Du contrat social’(1762): 이상적이고 자연적인 국가 질서의 프로그램.

‘에밀’(Emil, 1762): 자연을 따르는 교육의 이상.

루소의 이상에 반대되는 장애들은 만일의 경우에는 제거되어야만 한다. 그리하여 루소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적인 아버지로 간주된다.


3. 독일의 계몽주의


1) 독일 계몽주의의 특색


- 독일에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계몽주의는 서유럽에 비해 특징적인 차이가 있다. 이성과 계시는 긴장으로 가득찬 대립에서가 아닌 조화적인 보완에 의해 결정되어 진다. 계몽주의적 사상들이 독일에서 근본적으로 서유럽과 다른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없는 것이 있다면 정치적인 폭파력과 교회에 대한 비판적이고 원수적인 태도이다.

- 이 차이에는 신학적인 것과 같이 일반 역사에 원인이 있다: 30년 전쟁 때문에 독일의 발전은 서유럽에 비해 상당히 퇴보되었다. 이것은 종파적이고 정치, 문화적인 파멸을 가져오게 되어서 독일의 계몽주의는 특히 개신교 지역, 제후들의 거주지 그리고 대학에 퍼졌다. 그러므로 독일 계몽주의의 주된 대변자들은 대학 교수들과 절대주의 아래 있는 계몽되었던 지배층이었다.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는 독일에서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 정통주의에 대한 경건주의의 싸움은 실제적인 개혁 목적에서 독일의 계몽주의에 본질적으로 진로를 터주었다. 신학적인 계몽주의는 독일에서 신학적인 과정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경건주의처럼 실제적인 개혁운동이었다(K. Scholder).


2)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와 독일에서 계몽주의의 시작


-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는 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독일의 계몽철학의 시작에 자리를 잡고 있다. 플라톤 경향적이고 포괄적인 사상과 함께 그는 유럽 일류의 철학자였다(베를린과 성 페터스부르크에 있는 학문의 아카데미 설립에 동기를 부여하였다).

-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신앙과 이성의 일치가 중요하였다. 이성과 계시, 철학과 신학, 육과 영은 조화로운 결합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예정조화, prästabilierte Harmonie).

- 이 조화에 있어서 결합이 필요불가결하고 영원한 진리와 실제적인 진리의 구별이 있다. 라이프니츠는 기하학적인 법칙 그리고 완전한 진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전자에 넣는다. 여기에는 계시와 이성 사이의 모순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 진리들을 사고에 불가결한 것으로서 증명하기 때문이다. 분명 이와함께 계시는 이성에, 신학은 철학에 종속되어 있다.

실제적인 진리에 있어서(예를 들면 자연법칙) 더 상위의 규칙에 관철, 자연법칙의 어김이 나타날 수 있다. 그리하여 라이프니츠는 기적의 초이성화에 대한 생각이 가능한 것이라고 언명하는 시도를 하였다.

- 하나님, 세상 그리고 인간에 관한 포괄적인 사고는 라이프니츠에 있어서 그의 단자론에 나타나 있다. “단자들은 자연의 참원자들이며 언어를 가진, 사물의 요소이다(Die Monaden sind die wahren Atome der Natur und mit einem Wort, die Elemente der Dinge).” 단자의 개념에서 라이프니츠는 영혼, 생각 뿐 아니라 힘, 실제를 총괄하였다. 단자는 모든 것에 결합되어 있으며 여러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로써 라이프니츠는 철학적이고 이상적인 세계 관찰과 마찬가지로 기계적인 자연과학을 인정할 수 있었다.

- 하나님의 은총의 단자는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의 기초가 되어 있다. 라이프니츠는 변신론(辯神論, Theodizee)에 대한 문제, 세상에 있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우리의 세계는 “가능한 모든 세상의 최고”라는 논제로 푼다. 또한 악은 세상에 속하여 있으며 이것은 유한한 존재의 한계 안에 근거하고 있다. 이성은 세상의 원래 모습으로서 선과 신적인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라이프니츠의 낙관적인 세계관은 죄를 단지 불완전한 선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했다.

 

3)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와 신학적 볼프주의


- 라이프니츠의 노선에 선 철학자 크리스티안 볼프는 특히 독일 계몽주의의 영향을 널리 끼친 사상가였다. 그는 1707년부터 할레대학교에서 가르쳤다. 할레대학교와 괴팅엔대학교는 독일 계몽주의의 정신적인 중심지이다.

- 볼프의 철학은 확실한 개념에 논리적인 증명과 이것의 완전한 연관에 세워진 것이다. 반대되는 개념(Widerspruch), 다양한 근거들에 대한 명제(Satz)의 도움으로 그는 포괄적이고 합리적인 형이상학을 세웠다. 이것은 그의 증명방법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이성적인 통찰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될 수 있다. 계시는 이성을 보완하며 이것은 이성을 반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계시는 초이성적이기 때문이다. 볼프는 계시의 내용적인 가르침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은 계시에게 이것의 가능성과 한계를 밝혀준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이해는 인간 안에 있어서 도덕적인 능력의 강화에 세워져 있었다.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볼프에 있어서 하나님의 완전에 대한 증거는 소위 말하는 물리신학(Physikotheologie)에서 보여진다. 이 신학에서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완전에 관한 거울로서 나타나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하나님으로 정해진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창조는 창조주의 완전을 반영하고 있다.

- 계몽주의와 경건주의 사이의 대립은 특히 할레대학교에서 볼프의 해임에 여실히 반영되어 있다(1723년). 중국의 윤리론의 예를 들면서 볼프는 도덕이 단지 계시와 독립되게 이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어떤 강연에서 증명하였는데 이것은 프랑케의 심각한 반대를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 볼프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신학자들은 소위 말하는 볼프주의 또는 과도기적 신학에 속하게 되었다. 이것은 18세기 전반기 경건주의에서 계몽주의의 과도기에 있는 신학자들이다. 이들은 정통주의적이고 경건주의적인 전통뿐만 아니라 이성과 자연 종교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는 시도를 하였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차이가 있으며 볼프에 대한 입장도 상이하다.

- 중요한 인물은 바움가르텐(Siegmund Jakob Baumgarten, 1706-1757)이다. 그는 할레대학교에서 젬믈러의 선생이었다. 바움가르텐은 할레의 경건주의 출신이었으며 볼프의 “시위방법론”을 가지고 정통주의 교리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서술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성서의 구두영감설에 확고히 서 있었으나 자연적인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계시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그는 서유럽의 성서신학에 대한 비평적인 글들을 ‘할레 도서관의 소식’(Nachrichten von einer Hallischen Bibliothek, 1748-1751)을 통하여 독일에 소개하였다.

- 그 이외의 신학자들:

라인베크(J. G. Reinbeck, 1683-1741), 베를린 교구 감독,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관한 영향력 있는 저서를 남김.

슈미트(J. L. Schmidt, 1702-1749), 베르트하임(Wertheim) 성경의 저자,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 성서의 예언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것은 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라이마루스(H. S. Reimarus, 1694-1768), 함부르크 인문계 고등학교 교사, 베르트하임 성경을 통해 자신의 고등 비평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인 숭배자를 위한 변증 또는 보호의 글’을 쓰는 동기를 부여 받았다.

- 위의 마지막에 언급된 두명의 비평적인 볼프주의자들 외에 과도기 신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볼프로부터 선을 긋고 있다. 이들은 성서적이고 교회사적인 연구로 주목을 받았다.

부데우스(J. F. Buddeus, 1667-1729);

모스하임(J. L. von Mosheim, 1694-1755): 헬름슈테트와 괴팅엔 대학교에서 활동하였고 실용적인 방법론을 교회사에 도입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새로운 교회사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파프(C. M. Pfaff, 1686-1760)와 발히(J. G. Walch, 1693-1725)는 대루터전집의 편집으로 유명하다(1740-1753).


4) 요한 잘로모 젬믈러와 신신학

- 신신학(Neologie, 新神學)은 18세기 중반에 독일 계몽주의 신학의 극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성과 계시와의 관계에서 비판적인 이성의 고유한 중량이 점점 강해졌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구 프로테스탄트의 성서론을 공격한다.

- 독일에서 역사적 비평적 신학의 창시자는 젬믈러(J. S. Semler, 1725-1791)였다. 그는 독일 계몽주의의 가장 중요한 신학자였다. 그의 저술과 더불어 구프로테스탄티즘에서 신프로테스탄티즘으로의 전환이 나타난다. 역사 비평 방법의 일관된 적용을 통해 젬믈러의 신학은 정통주의와 경건주의와 확실한 경계를 긋게 된다. 그러나 또한 과격한 계몽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해 젬믈러는 “경건한 계몽주의자”로 불러진다. 그리하여 독일 계몽주의의 특성은 젬믈러에게서 확실히 보여진다.

- 1725년부터 할레대학교에서 가르쳤던 젬믈러의 주저서는 ‘정경의 자유로운 연구에 대한 논문’(Abhandlung von freier Untersuchung des Kanon, 1771-1775)이다. 상대적으로 늦게 형성된 역사적 조건을 가진 신약성서 정경에 관한 인식은 법적인 정경 이해와 구두영감설의 과제를 가져왔다. 정경이 되었던 성서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포함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성서와 동일하지는 않다. 성서 해석에 있어서 또한 “적용”(Akkomodation)이 유념되었다. 즉 예수와 사도들은 초대 교회의 종교적인 모범의 지평에 적용되었을 것이다. 유대교와 이교도에서 온 영향들이 나온지 얼마되지 않은 기독교에 유입되었다.

- 젬믈러는 이 역사적인 작업을 신학과 종교의 차이로 표현했다. 그는 두 가지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이것은 계몽주의 이래 학문적인 신학 작업에 있어서 길을 제시하는 구분이 되었다. 신학은 이제 목사와 교사에 있어서 변할 수 있고 수정을 요하고 발전이 가능한 과목이다. 이와 반대로 종교는 성서적인 종교, 신앙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일로서 이웃사랑에 대한 근본 진리에 대한 합의이다 젬믈러는 이 구분으로 두 가지 목적을 이루었다: 신적인 계시의 개념으로서 “구원의 순서” 이전의 동시적인 고려에 있는 학문적인 신학에 대한 자유.

- 젬믈러는 신학과 종교의 구분에서 한층 더 나아가 공적인 종교와 사적인 종교로 구분하였다. 공적인 종교는 근본을 신앙고백에 두고 있는데 비해, 사적인 종교는 기독교 신앙의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형태를 묘사한다. 젬믈러는 기독교의 개인 종교의 자유를 대변하였고 ‘자유로운 신학적인 가르침의 시도’(Versuch einer freieren theologischen Lehrart, 1777)에서 신학 연구의 자유를 요청하였다. 동시에 그는 냉소적인 개인주의에 기독교 신앙을 전달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젬믈러는 1788년의 뵐른(Wölln)의 종교칙서를 인정하였다. 뵐른의 종교칙서는 신앙고백서들에 대해 목사와 교사의 가르침을 요청하였다.

- 젬믈러 이외의 신학자들은 부분적으로 전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편적인  복지와 인간애에 대한 비교의적이고 도덕적인 기독교의 촉진에 대한 목적에 있어서 일치하였다. 중요한 신신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자크(A. F. W. Sack, 1703-1786); 예루살렘(J. F. W. Jerusalem, 1709-1789)의 ‘종교의 우수한 진리에 관한 고찰’(Betrachtungen über die vornehmsten Wahrheiten der Religion); 슈팔딩(J. J. Spalding, 1714-1804)의 ‘설교직의 유용과 장려’ (Nutzbarkeit der Predigtamtes und deren Beförderung); 퇼러(J. G. Toeller, 1724-1774)와 텔러 (W. A. Teller, 1734-1804). 대부분 교회의 직무를 가진 신학자들은 그들의 설교를 통하여 기독교에 대한 시대에 맞는 사회 윤리적인 해석의 의미에서 활동하였다.


5) 단편논쟁(Fragmentenstreit)과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


- 독일에서 초자연적인 계시를 부인하고 이성주의로부터 영성주의 그리고 스피노자주의까지 진전한 급진적인 계몽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에게 속한 사람들로는 슐츠(J. H. Schulz, 1739-1804)와 만년의 텔러이다.

- 기독교에 대해 과격하게 공격한 독일에서 무엇보다도 ‘익명의 단편들’(Fragmente eines Ungenannten)의 발행으로 일어났다. 1774년과 1778년 사이 볼펜뷔텔(Wolfenbüttel) 도서관에서 레싱(G. E. Lessing)은 함부르크의 고등학교 교사이며 동양학 학자인 라이마루스(H. S. Reimarus)의 ‘하나님에 대한 이성적인 숭배자를 위한 변증 또는 보호의 글’(Apologie oder Schutzschrift für die vernünftigen Verehrer Gottes)로부터 발췌를 출판하였다. 이미 1768년 고인이 된 라이마루스는 이 글에서 날카롭게 성서비평을 하였으며 복음서 안에서 상반되는 것들을 강하게 표출시키고 기만논제를 세웠다. 이에 의하면 기독교의 탄생은 완전히 제자들의 사기였다는 것이다. 예수는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좌절되었고 그의 제자들은 그의 죽음 이후 그들의 명의상의 실망을 극복하고 세상에서 주목을 받을 수 있도록 부활을 날조하였다는 것이다. 레싱은 이 책의 발행으로 기독교의 본래의 의미와 본질에 관한 토론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후기 정통주의와 이상주의적인 계몽주의 사이의 대립은 더욱 깊어졌다. 이 ‘익명의 단편들’의 발행은 논쟁을 일으켰으며 이 논쟁에는 함부르크의 주목사(主牧師)인 괴체(Goeze)와 젬믈러가 참여하였고 레싱은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았다.

- 레싱의 견해는 그의 유명한 문장에 나타나 있다: “필요한 이성적인 진리들의 증명은 우연한 역사적인 진실이 결코 될 수 없다”(‘영과 능력에 대한 증명에 관하여’, 1777). 여기에서 레싱은 라이프니츠에 있어서의 이성적인 진리와 실제 진리 사이의 차이가 결합되어 있다. 성서의 역사적인 진리는 영과 능력의 증거를 이끌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무조건적인 필요에 비추지 않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종교들은 신적인 교육과정을 위한 장소이며 이 교육과정의 목적은 사랑과 이성의 참 종교이다(‘인류에 대한 교육’, 1780). 이것은 ‘Nathan’의 반지 비유에도 나와 있다. 기독교 계시의 역사성에 대한 라이마루스의 날카로운 비판은 레싱에게 있어서 원래의 결정적인 종교는 사랑과 이성으로 보여질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 계몽주의 세기의 한 가운데서 또한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이 뚜렷이 나타났다. 이 비판은 과거의 입장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것은 계몽주의의 문제 제기를 극복한 사상가의 새로운 정신이다: 하만(Johann Georg Hamann, 1730-1788). 이성과 계시, 죄와 은총의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올라가게 되었다. 하만은 집중적인 성서 읽기를 통하여 1758년 런던에서 회심을 경험하였다. 이 회심은 그를 새로운 자기인식으로 이끌었다: 신앙밖에 있는 추상적이고 이론에 서 있는 이성은 우리 존재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다. 우리 모두의 인식은 하나님의 인간되심, 육신과 이 세상 존재의 구체화로 나타난 하나님의 강림에 해결점을 가지고 있다. 하만은 18세기 루터 신학에서 가장 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글은 19세기에야 심오한 영향을 발휘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V. 프랑스 혁명 이후의 교회의 상황


  프랑스 혁명 전의 전체 역사적인 상황과 그 이후 이것의 결과는 아주 심한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당연히 1800년의 시대, 깊은 중간 휴지라고 말하게 된다. 계속되는 역사 발전이 지속적으로 이 시대로부터 결정되었다.

  전체주의 국가의 몰락과 국민의회에 의한 공화정의 선언은 결정적으로 정치적 변혁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귀족의 국가에 있는 통치권이 시민계급으로 이양되었다.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서 지금까지의 상황의 혁명적인 변형은 변화의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이 변화는 경제와 사회의 영역에서 이미 18세기와 연결되어 있다. 기계의 발명들은 산업생산의 조건을 만들었고, 이것은 도시와 농촌에서 인간의 생활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또한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면에서 프랑스 혁명은 1800년대의 교양인들에게 적극적인 승인이거나 괴로운 거부를 체험하게 하는 결과를 냈다. 이 혁명의 이전에 있었던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본 정신사적인 전통, 즉 중세의 교회비판적인 경향, 르네상스, 인문주의 그리고 유럽의 계몽주의 철학은 프랑스에서 혁명적인 사건과 함께 직접적인 연관을 맺을 수 있었다. 마침내 이 이념들은 정치적이고 결사적인 구체화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의 전개와 독재자의 공포적인 통치력과 프랑스의 지배적 세력 아래 있는 유럽의 국민들에 대해 무거운 멍에였던 그 결과는 혁명이전의 상태로 복귀를 추진했던 다각도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1. 프랑스 혁명부터 비인회의까지 - 1800년대


1) 프랑스 혁명


- 18세기에서 19세기로의 변화는 결정적인 교회사적 분기점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1800년의 시대라고 말한다.

- 사회적인 갈등들과 프랑스 계몽주의의 결사 정치적인 폭파력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게 했다. 전제적인 국가의 분쇄와 시민계급에게 통치권의 인수됨과 더불어 구정권과 깊게 연결된 교회는 또한 국가와 사회적인 생활로부터 제외되었다. 이로써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수 백년 동안 지속되어오던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해체되었다. 프랑스와는 달리 이미 프랑스 혁명 이전에 국가와 교회 사이의 성공적인 분리는 미국에서(1776년 영국으로부터 분리됨) 교회와 적대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다. 미국에서 기독교와 국가로부터 독립된 교회는 오히려 국민과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 국민의회의 교회정치적인 중요한 조처(1789-1792): 교회재산에 대한 국가재산으로의 귀속, 모든 수도원과 재단의 해체, “성직자에 대한 시민헌법”. “시민헌법”의 내용: 교회의 국가 행정기관에의 예속, 시민에 의한 주교와 성직자의 선출, 성직자의 급료에 대한 확정, 시골이외에서 성직자 권세에 대한 복종으로부터 해방(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반대, 갈리아적인 전통!), 모든 성직자에게 국가와 헌법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요구. 이 지시에 대한 성직자들의 맹렬한 저항이 있었다.

- 국민의회의 反교회적이고 反기독교적인 조치들(1792-95): 기독교적인 연도(서력기원) 사용과 기독교의 축제 폐지; 혼인 선포에 대한 순수한 민사적인 업무, 수많은 교회를 황폐시킴, 예술품에 대한 약탈과 파괴.

- 로베스삐엘(Robespierre) 아래에서 1794년 이성과 지고의 존재에 대한 숭배의 새로운 제식(祭式). 반교회적인 조치들은 국민들 사이에서 상당한 저항을 받았다.

- 1795년 공포정치가 끝나고 난후 종교의 자유가 다시 주어졌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의 지속.

-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은 1801년 7월 15일의 협약에서 카톨릭 교회를 회복하였다: 카톨릭 교회는 프랑스 국민의 대다수 교회로서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았지만, 국가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다. 국가는 성직자의 봉급을 책임지게 되었고 교황은 새로운 주교들을 임명하였으나 혁명에 의하여 잃어버린 교회 재산을 승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 1803년 레겐스부르크의 제국 대표자 결의


-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은 또한 舊독일제국의 종말을 정했으며 국가와 사회에 대한 교회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프랑스 혁명이 독일에 직접 번짐으로 상이한 사회와 단체의 구조가 저지되었다(국가적인 사분오열과 시민사회의 약한 위치). 그러나 혁명적인 프랑스에 대항한 동맹전쟁에 의해 독일은 바로 변화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 1797년 독일제국은 라인강 서쪽지역을 프랑스에 양도했다. 이것은 특히 세곳의 카톨릭 대주교가 다스리는 선제후국인 마인츠, 쾰른 그리고 트리어에 해당되었다. 이들에게 속한 라인강 서쪽지역의 상실에 대해 선제후들은 라인강 동쪽지역에서 손해배상을 받아야 했다.

- 프로이센에서 연맹이 이루어지기 바로 전에 나사우(Nassau) 공국(公國)에서 두 개의 종파가 완전히 통합되었다: 행정, 예배의식 그리고 교리에서 일치.


VI. 19세기의 신앙과 신학사

 

1. 슐라이에르마허


  19세기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역사에 적용되는 것은 또한 개신교의 신앙사와 신학사에 적용이 된다: 19세기는 우리에게 아주 복잡한 세계로서 만나진다. 이 세계 안에서 수많은 개별현상들과 사건들로 이루어진 소위 말하는 외적 역사는 아주 여러 모습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신앙과 신학의 역사이다.

  19세기의 초반에 “19세기의 교부”로 불리어지는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가 활동하다. 이 칭호에는 먼저 19세기 신학자들 가운데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논쟁의 여지없는 중대한 의미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또한 비판적인 견해도 이 많이 인용되었던 진술에 함께 울리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어떻게 19세기의 신학 주류에  서느냐에 따라, 이 위대한 발의자 슐라이에르마허가 평가되기 때문이다.

  - 슐라이에르마허는 1768.11.21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과 부친 모두 개혁교회 신학자 집안 출신이다. 그의 외조부는 베를린에서 궁정설교자요 감독이었고, 그의 외삼촌은 할레 대학교의 신학교수였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과격하고 경건주의적인 교회와 힘든 종교적인 싸움을 해야만 했다. 슐라이에르마허 아버지는 과격한 경건주의에서 계몽주의의 합리적인 신학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헤른후트의 확고 부동한 신봉자가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가 태어날 당시 그의 아버지는 프로이센의 군목이었다.

  - 슐라이에르마허는 헤른후트의 형제교회의 정신 안에서 교육을 받았다. 1783년 오버라우지츠(Oberlausitz)지역의 니스키(Niesky)에 있는 학교에 들어갔다. 어머니의 죽음. 자기 삼촌인 슈투벤라우흐(Stubenrauch)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1785년 막데부르크(Magdeburg) 부근의 바르비(Barby)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헤른후트의 설교자가 되어야 했다.

  - 니스키에서 완전히 헤른후트의 경건성의 영향 아래 있었으나 슐라이에르마허는 바르비에서 이 경건성으로부터 힘든 싸움 아래 빠지게 된다. 이 위기에 관한 문서들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편지에 주고받은 내용이다. 이 위기의 원인: 공부하는 것에 대한 심한 압박과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화목제물로서 죽은 것에 대한 의심. 내적인 의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 할레 대학에서 신학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 헤른후트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적인 유년기의 발전에 중요하였다: 종교적인 개인과 종교적인 공동체의 풍요로움에 있어서 지속적인 의미. 1802년 자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고백하고 있다: “내가 모든 것 이후 다시 헤른후트 사람이 됨으로써 나는 더 높은 차원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다.”

  - 1787-89년 할레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특히 에버하르트(J.A.Eberhard, 1739-1809)에게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2. 자유 신학(Die liberale Theologie)

- “자유 신학”이라는 개념은 젬믈러(Semler)의 책 “더욱 자유로운 신학 교수법의 시도(Versuch einer freieren theologischen Lehrart)” (1777년)에서 유래한 것이다. 자유 신학의 역사적 경향의 작업은 그 뿌리를 계몽주의에 두고 있으나 19세기에는 신앙과 역사의 문제 앞에 있는 첨예화한 형태에 있게 된다.

-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ß, 1808-1874)는 헤겔의 영향을 받은 그의 책 ‘예수전’(Leben Jesu) (1835년)으로 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논쟁의 원인: 복음서에 나온 예수에 대한 묘사는 역사적이 아니라 신화적이다. 첨가된 신화들이 예수의 역사적인 모습에 덧입혀졌을 것이다. 슈트라우스에게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치는 인간적인 교사였다.

슈트라우스는 神人間의 관념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에서 보았다. 이 관념이 초대 기독교에 현실화 되었으며 예수의 삶에 첨가되어 생산적인 모습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이성적으로 밝혀질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관념은 관념의 채움을 개체의 표본에 붓지 않고, 무한한 것은 유한한 형태로 이해되지 않는다.« 신약 성서의 기독론적인 언급은 인류의 발전을 총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 슈트라우스의 ‘예수전’은 모든 신학적인 경향으로부터 강한 반박을 받았다. 저자 또한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당했다.

- 바우에르(B. Bauer, 1809-1882)는 극단적인 관점을 가졌다. 그는 신약 성서의 형성을 제2세기로 잡았고 예수의 역사성을 의심하였다.

- 19세기에 신약 성서와 교회사와 교리사의 역사적 연구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의미는 페르디난트 크리스티안 바우르(Ferdinand Christian Baur, 1792-1860)에게 있다. 바우르는 슈트라우스의 선생이며 헤겔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1826년부터 튜빙엔 대학교의 교수였다.

- 바우르는 신약 성서를 초대 기독교의 역사적 정황에 배열하는 것을 시도하였는데 이런 점에서 그는 새로운 역사 비평적인 신학의 창시자이다. 그가 세운 기본 명제: “기독교는 유일하게 기독교의 창시자의 인물을 통해 이것이다라는 모든 것이다(Das Christentum ist alles was es ist, einzig durch die Person seines Stifters).” 요한복음이 아닌 공관복음에서 역사적으로 신뢰할 만한 예수의 모습이 탐구되어질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참 의에 대한 설교가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이 가르침은 그의 인격 안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 바우르는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헤겔의 변증법적인 역사에 의거하여 설명한다: 正으로서 유대 기독교에서 사도 바울의 활동을 통하여 反으로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고 보편적인 이방 기독교로 이어진다. 영지주의적인 경향의 공동의 적과 마르시온에 대항하여 초기 카톨릭 교회는 合으로서 발전되었다. 신약 성서는 이 발전 과정에 따라 배열되어져야만 했다. 그리하여 바우르는 신약 성서에 대하여 “경향적인 비평”(Tendenzkritik)을 요청하였다.

- 바우르는 교리사에 대한 새로운 과목을 창설하였다. 그는 교리의 형성을 포괄적 정신적인 발전 과정에 대입시켰다. 이 발전 과정은 고대 교회의 교리들의 진리를 이것들의 필요한 진보와 더불어 인식하게 한다.

바우르의 주요 저서들:

‘화해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Versöhnung), 1838;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관한 기독교의 가르침’(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Dreieinigkeit und Menschwerdung Gottes), 1841-43; ‘교회사 편찬의 시대’(Die Epochen der kirchlichen Geschihtsschreibung)’, 1852; ‘초기 제3세기까지의 기독교와 교회’(Das Christentum und die christliche Kirche der ersten drei Jahrhunderte), 1853.

-1870년부터 신학분야는 그의 죽음이 한참 지난 후 자유 신학으로 여겨졌던 사람인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에 의해 각인 되어졌다. 신학 발전에 있어서 칸트, 슐라이에르마허 그리고 바우르로부터 영향을 받은 리츨은 기독교를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고 개인의 신앙 체험에 집중하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신약 성서는 확실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참 계시를 증거한다. 리츨은 기독교를 두 개의 과열점의 한 생략(Ellipse)으로 묘사한다: 모든 인간의 도덕적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칭의와 화해”로서 구원. 윤리적인 행위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인간 의지의 변화와 방향 전환이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각 사람의 구원의 핵심이다. 이리하여 리츨의 신학은 본질적으로 세 가지 요소로 결정되어 진다: 윤리의 강조,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증거와 확실한 인식에 있는 신앙 체험. 신비주의, 경건주의, 사색 그리고 카톨릭의 제식신심(祭式信心)에 대한 그의 반박에서 리츨은 시대에 맞는 “문화프로테스탄티즘(Kuturprotestantismus)" 신학자이다. 1864년부터 그는 괴팅엔 대학교 신학부에서 가르쳤다.

주요저서: ‘칭의와 화해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und Versöhnung, 1870-1874), ‘기독교 강의’ (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1875).

- 리츨의 신학은 19세기가 저물어 가는 때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특히 1886년부터 라데(M. Rade)에 의해 편집된 학술지인 ‘기독교세계’ (Die Christliche Welt)는 다양한 리츨 문하생들의 기관지(機關誌)이었다.

- 1879년부터 말부르크 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인 헤르만(Wilhelm Herrmann, 1846-1922)은 리츨보다 더 강력하게 예수 인격에 감격하여 개인 신앙체험을 강조했다. 이로부터 윤리적 진지함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주요저서: ‘윤리'(Ethik, 1901). 불트만(Rudolf Bultmann)처럼 바르트(Karl Barth)도 말부르크 대학교에서 헤르만에게서 배웠다.

- 자신의 시대에 가장 유명한 신학자인 교회사가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은 고대 교회사가요 교리사가로서 리츨의 역사 경향적인 작업을 계승하였다. 이것은 이미 1892년 하르낙이 신앙고백 내용들의 역사적인 뿌리에 대한 주위를 환기시켰던 사도신경에 관한 논쟁에서 나타나고 있다. 역사적인 현상으로서 초기 기독교와 예수의 원래적인 가르침에 대한 인지는 하르낙을 비교리적인 기독교에 대한 요구로 이끌었다. 그는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복음의 토양 위에 있는 헬라 정신의 산물로 여겼다.

하르낙은 1888년부터 베를린대학교에서 활동하였다. 주요저서: ‘교리사'(Lehrbuch der Dogmengeschichte, 1885ff.).


3. 중재신학

- 신학적인 자유주의와 신앙고백주의 사이에 많은 신학자들이 헤겔과 슐라이에르마허와 연결하여 중재를 시도했다.

- 헤겔로부터 두 명의 사색적인 신학자인 다우프(K. Daub, 1765-1836)와 마르하이네케(Ph. Marheineke, 1780-1846)가 유래하였다.

- 특히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와 근대 문화에 다리를 놓으려고 했던 사람들을 중재신학자라고 한다. 이들의 기관지는 1828년부터 발행된 ‘신학연구와 비판’(Theologischen Studien und Kritiken)이었다.

- 여러 가지 경향을 받아들이는 중재신학자들과 약간 동질 그룹에서 탁월한 사람은 로테(Richard Rothe, 1799-1867)이다. 로테는 부흥운동, 슐라이에르마허, 헤겔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근본 사상은 교회 안에서 예수로부터 온 공동체 생활의 윤리적 완전의 과정이 국가 안에서의 완성에 있다. 교회와 국가가 경험적인 단체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의 역사와 제도로서의 교회의 역사 사이를 엄격하게 구별한다. 기독교의 원칙은 모든 현세적인 상황을 그의 힘으로 달성하는 것이다.

주요저작: ‘신학적 윤리’(1845-48).

- 니취(C. I. Nitsch, 1787-1868)는 교회와 신앙고백의 연관을 절대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연합을 위하여 싸웠다.

주요저작: ‘기독교 교리의 체계’(System der christlichen Lehre, 1829)와 ‘실천신학’(Praktische Theologie, 1847-67).


4. 성서신학


- 모든 신학의 성서적인 기초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강조했던 인상 깊은 신학자들을 여기에 요약해본다.

- 1843부터 튜빙엔 대학교에서 가르쳤던 베크(J. T. Beck, 1804-1878)는 성서축자주의(Biblizismus)와 벵엘의 구속사적 신학으로부터 왔다. 성서에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단계를 전개한 하나님의 계시가 근본적으로 드러나 있다.

주요저서: ‘성서에 나타난 기독교의 교의학’(Die christliche Lehrwissenschaft nach den biblischen Urkunden, 1847).

- 1860년부터 할레 대학교에서 활동한 캘러(Martin Kähler, 1835-1921)는 신앙과 역사의 관계의 근본문제를 선구적으로 파악하였다. 1892년 “소위 말하는 역사적 예수와 역사적이고 성서적인 그리스도”(Der sog. historische Jesus und der geschichtliche biblische Christus)라는 강연을 했다. 이 제목은 중요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역사적 예수가 아닌 교회에 의해 설교되고 증거된 그리스도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이다. 역사적인 예수의 모습을 그려내기 위한 시도들은 잘못되었다. 복음서를 “교회에 기초를 둔 설교의 문서들”로서 이해해야만 한다. 확실히 캘러에게 있어서 설교되어진 그리스도는 바로 역사적인 예수였다.

- 이미 20세기까지 영향을 끼친 슐라터(Adolf Schlatter, 1852-1938)는 1898년부터 튜빙엔 대학교의 교수로 일했다. 그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신약성서 신학과 고대 유대교의 종교와 역사 연구 영역에 있다. 그의 주석 연구에서 그는 소위 말하는 “목격행위”(Sehakt)와 “삶의 행위”(Lebensakt)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단순히 인간적인 학문으로부터 주석을 지키고 주석을 전적으로 사실, 즉 “그리스도의 역사”와 연관시키려고 했다.

수많은 저작이 있으며 특히 그 가운데서도 신약성서 주석이 있다.

5. 종교사학파


- 1892년 봐이스(Johannes Weiß)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설교’ (Die Predigt Jesu vom Reiche Gottes)라는 작은 책이 출판되었다. 순수하게 주석적으로 그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는 종말론적 성격을 가졌다고 확신하였다. 이것은 리츨의 윤리적인 발전 사상을 극단적으로 반박한 것이다.

- 이것은 괴팅엔 대학교의 일련의 젊은 주석 신학자들의 서막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초대 기독교의 관계를 고대 종교사와 더불어 문서비평과 양식사(Formgeschichte)에 기초하여 연구하였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 군켈(H. Gunkel), 부세(W. Bousset), 그레스만(H. Greßmann), 다이스만(A. Deißmann), 브레데(W. Wrede).

- 성서적이고 성서 밖의 종교사 사이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유사성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과정 가운데 성서적인 종교의 특별한 종류를 드러냈다. 근대적인 관념에 대한 성서적 선포의 낯설음이 명백해졌다. 이와 함께 성서적인 선포로부터 직접적인 다리를 현재에 놓으려는 자유 신학의 시도들은 의문시되었다.

- 이것은 특히 종교사학파의 한 조직신학자를 반사하고 있다: 트뢸취(E. Trorltsch, 1865-1923)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으며 후에 베를린 대학교의 철학교수가 되었다.

- 역사가이며 또한 종교철학가요 종교사회학자로서 트뢸취는 자신의 문제제기로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는 학자이다. 근대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관계에 관한 문제, 계시와 역사 그리고 개인의 결정의 자유와 특히 근대의 역사에서 공동체의 조건과 같은 것들은 트뢸취가 문제를 삼은 연구 영역이었다.

교회사에 있어서 중요한 점: 그의 위대한 연구 결과인 저작, ‘기독교 교회와 단체들에 대한 사회학’(Die Soziallehren der christlichen Kirchen und Gruppen, 1912).

-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필연적 종말론”(konsequente Eschatologie)이라는 명제로 활발한 토론을 불러 일으켰고 예수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서술의 불가능함을 증명했다. 이것은 특히 그의 저작에 나타나 있다: ‘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 까지’(Von Reimarus zu Wrede, 1906), 이 책은 1913년의 제2판부터 ‘예수 생애 연구의 역사’(Geschichte der Leben-Jesu-Forschung)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6. 독일의 부흥운동과 루터교의 교파주의


  1) 부흥운동의 일반적 성격


- 부흥운동이란 19세기 초반에 있었던 교파를 초월하는 종교적인 출발을 의미한다. 시간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은 독일의 부흥운동보다 앞섰다.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고 스위스의 개신교에서는 부흥운동을 “레베위”(Réveil)라고 한다. 나라와 언어를 초월하여 광범위한 연합의 감정이 형성되어 있다.

- 이 운동은 여러 가지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계몽주의의 이성적인 종교에 대한 강력한 반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심각성, 이 죄로부터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로운 삶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 중생에 대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체험; 개인의 중생은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정신으로부터 사회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적이고 세상을 향한 활동과 이방인들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널리 퍼뜨려야 한다는 선교의 열정이 있다. 프랑스 혁명 정신에 대한 비판.

- 목회자뿐만 아니라 특히 평신도들이 성경을 새롭게 발견했으며 자유로운 협회와 단체의 형태로 공동 활동을 하였다. 경건이 이 협회에서 생동하게 되고 경험되었다.


  2) 부흥운동의 뿌리


- 개신교에서 초기의 경건주의는 부흥운동의 역사적인 뿌리이다. 무엇보다도 헤른후트의 형제교회의 디아스포라 설교자들로부터 결정적인 자극들이 부흥운동을 일으키게 했다.

- 부흥운동의 첫 번째 국면에서 “더 높은 차원의 헤른후트 사람”으로서의 슐라이에르마허 또한 중요하게 자극을 준 사람이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로 예를 들면 키일의 감독교구장인 하름스(Claus Harms)와 베를린 대학교의 교회사가인 네안더(August Neander)가 있다. 물론 후에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경계와 투쟁이 있었다. 이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다음과 같은 하름스의 언급이 있다: “나를 낳은 그(슐라이에르마허)는 나에게 전혀 빵을 주지 않았다.”

- 부흥운동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1780년 아욱스부르크 출신의 울스페르거(J.A. Urlsperger)에 의해 바젤에서 설립된 “독일 기독교 협회”(Deutsche Christentums- gesellschaft)이다. 이 협회의 회원: 융 슈틸링(H. Jung-Stilling, 1740-1817), 오벌린(J.F. Oberlin, 1740-1826), 라파터(J.C. Lavater, 1741-1801). 또한 계몽주의의 비판자인 헤르더(J.G. Herder)와 하만(J.G. Hamann)은 부흥운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계몽주의와 부흥운동은 상반적으로만 나타날 수 없었다. 계몽주의와 부흥운동에서 자연과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은 이미 이성으로 체험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체험은 기독교의 계시에서 비로소 완전해진다. 이 관점은 독일의 계몽주의를 부흥운동, 또한 단체의 신앙형태를 결합시켰다.


3) 부흥운동의 역사적 발전


- 19세기 전반에 세 개의 국면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면 (대략 1800-1815):

낭만주의, 이상주의 그리고 민족적인 성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정신적인 넓은 영역 안에서 종파를 초월하는 체험적인 기독교가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국면 (대략 1815-1830):

부흥설교, 정기 간행물과 논문, 성서공회와 선교회를 통해 국민과 교회에서 더욱 광범위하게 퍼졌다. 교파들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경계 설정 그리고 독일의 이상주의의 철학과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경계설정으로 다시 중요하게 되었다.

셋째 국면 (대략 1830-1848):

교파주의로의 발전. 제도로서의 교회와 교회의 신앙고백이 중심에 오게 되었다. 부흥운동의 넓은 영향의 감소, 합리주의와 교파주의 사이의 교회적인 당파 싸움.


4) 부흥운동의 중심과 주대표자


- 초교파적으로 종교적인 출발은 알고이의 가톨릭 부흥에 있다. 이 부흥운동은 레겐스부르크의 감독인 자일러(J.M. Sailer)의 제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여기에서부터 다양한 영향들이 독일의 개신교에 미쳤다: 특히 프랑켄, 뷰르템베르크, 니더라인, 베스트팔렌의 일부분, 베를린, 함부르크, 브레멘, 하노버, 슐레지엔과 폼메른.

- 프랑켄의 부흥은 뉘른베르크와 에어랑엔 대학교에서 시작되었다. 개혁교회 신학교수인 크라프트(Christian Krafft, 1784-1845)와 교육학자인 칼 폰 라우머(Karl von Raumer, 1783-1865)가 중심적인 인물이다. 루터교의 한 지역에서 시작된 에어랑엔의 부흥은 계속 하나의 교파적인 루터교의 경향으로 발전하였다.

- 폼메른 지역의 부흥의 중심은 코트비츠(Hans Ernst Kottwitz) 남작이다. 헤른후트 형제교회 출신으로 프로이센의 귀족과의 관계, 사회적인 활동, 베를린에 각성한 모임의 주역이었다. 에어랑엔의 부흥과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의 부흥도 루터교적인 교파주의로 나아갔다. 부흥운동의 주요 기관지는 헹스텐베르크(E.W. Hengstenberg, 1802-1869)에 의해 창간된 “복음 교회 신문”(Evangelische Kirchenzeitung, 1827)이었다. 이 신문에는 부흥운동과 합리주의의 치열한 공방이 수록되어 있다.

- 뷰르템베르크에서 부흥운동은 경건주의, 그 중에서도 벵엘(Johann Albert Bengel, 1687-1752)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다. 벵엘은 1000년 왕국이 1836년에 시작된다고 확신하였다. 종말론적이고 묵시론적 정서는 그 시대의 정치적인 불안정과 연관을 맺었다. 또한 한(J.M. Hahn, 1758-1819)으로부터 기인한 한파 공동체들도 천년왕국설의 영향을 받았다. 불름하르트(J.Chr. Blumhardt, 1805-1880)에 의해 바트 볼(Bad Ball)은 1852년부터 슈바벤 지방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뷰르템베르크의 탁월한 부흥설교가는 호프아커(L. Hofacker, 1798-1828)이었다.

- 니더라인의 부흥운동은 이 지역의 개혁교회 경건주의와 연관을 맺고있다. 지거란트(Siegerland)의 초기 부흥운동에서 융 슈틸링(H. Jung-Stilling, 1740-1817)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후에 부페탈에서 부흥설교가들이 활동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콜브뤼게(H. F. Kohlbrügge, 1802-1875)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니더라인에서는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산업과 밀접히 관련되었다. 심각한 사회적인 곤경과 은둔적인 종교적 경건 사이의 갈등이 여기에서는 특별히 많았다.

- 브레멘에서는 멘케(Gottfried Menke, 1768-1831)가 경건한 설교들로 영향을 미쳤다. 이 설교들에서 그는 세속의 정치사와 구속사를 직접 비교하였다. 그는 1789년을 악마의 권세들로부터 승리하는 해로 여겼다.

- 니더작센 지역의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인물들은 페트리(L.A. Petri, 1803-1873) 그리고 ‘시와 하프’(Psalter und Harfe, 1833)라는 찬송시집을 낸 찬송가 작사자인 슈피타(C.J.Ph. Spitta, 1801-1859)가 있다. 함부르크에서는 함스(L.Harms, 1808-1865)가 활동하였다.

- 헤센에서는 특별히 엄격한 루터파인 필마르(A.F.Chr. Vilmar, 1800-1868)가 있다. 그는 부흥운동의 개인주의를 멀리하였다.

- 부흥운동으로부터 성서공회와 선교회가 나타났다.

뷰르템베르크 성서공회, 1804;

프로이센 대 성서공회, 1814;

바젤 선교회, 1815;

베를린 선교회, 1824;

라인 선교회, 1828;

북독일 선교회와 라이프치히 선교회, 1836;

헤르만부르크 선교회, 1849;

노이엔데텔스아우 선교회, 1853.


7. 유럽과 북미의 부흥운동


1) 영국

 

- 독일보다 약 100년 전 영국과 북미에서 부흥운동의 수많은 물결이 일어났다. 영국의 계몽주의가 교회와 국민 사이에 야기 시켰던 위기는 영국에서 처음 종교적인 각성을 일으키게 되었다. 영국의 이신론은 단지 보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만을 지켰고, 바로 이것은 종교적인 공백과 무관심을 가져왔다. 성경에 기초한 개인의 삶의 모습은 심하게 동요되었다.

- 국가 교회 안에 경건의 실천을 요청하는 종교적인 모임들(“religious societies")이 형성되었다. 개인의 신앙은 칼빈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입증되어야만 했다.

- 감리교 운동에서 영국에서의 부흥운동은 최고점에 도달했다. 감리교 운동은 교회사에서 최종적인 위대한 교회 형성(E. Beyreuther)으로 불러지게 되었다. 감리교의 창시자는 성공회의 신부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이다. 그 외에 중요한 인물로는 화이트필드(G. Whitefield, 1714-1770)와 존 웨슬리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이다.

- 웨슬리 형제는 1729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생 클럽을 조직하였다.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거룩한 생활로 “규칙쟁이”(Methodisten)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 헤른후트 형제교회의 말씀 선포에 대한 터득과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통한 감명 아래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에 회심하였다. 이 회심은 그로 하여금 그의 동생과 화이트필드와 함께 전 영국,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를 순회하게 한 그의 독창적인 부흥 설교들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노천에서 수 천명에게 설교하였다. 원시 기독교적인 순회 사도직의 갱신.

- 감리교적인 말씀 선포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촉구했으며 회개의 투쟁과 은혜 체험 아래 회심을 목적으로 삼아 확고한 공동체 형식을 이끌어 냈다.

- 감리교 운동의 특징은 웨슬리에 의해 만들어진 평신도 설교자직에 있다. 이것으로부터 자극은 19세기에 노동조합운동과 노동당에 원동력을 주었다. 그리하여 영국에서는 유럽 대륙 보다는 더 활발한 기독교적인 경향을 지닌 사회정책이 있게 되었다.

- 웨슬리가 죽은 다음 1795년 감리교는 영국 성공회로부터 분리하였다. 물론 이것은 엄격한 교파구별의 필요를 느끼지 않은 에큐메니칼 정신을 지녔다.

- 19세기 초반에 영국 성공회는 새로운 부흥운동인 “저 교회 운동”(Low-Church- Bewegung)을 경험하였다. 노예제도 폐지에 대한 자극은 이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났다. 고 교회적인 성공회주의는 비국교 교회를 간섭하였다. 1804년 비국교도들과 영국성공회 교도들에 의해 “영국과 해외 성서공회”가 설립되었다.

- 대륙의 교파주의와 병행하여 옥스퍼드 운동이 일어났다. 주요인물: 뉴만(J.H. Newman, 1801-1890). 예배의식과 성례전, 제도와 교회의 직무에 대한 강조. 성직 계승권의 갱신. 이 고 교회적인 경향은 오늘까지 영국 성공회의 신학과 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 북 아메리카


- 영국의 부흥운동과 거의 동시대에 북미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중심인물: 에드워즈(J. Edwards, 1703-1758). 칼빈주의적이고 청교도적인 기초에 근거하여 그는 복음 전도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설교의 주제: 개인의 회심에 대한 요청. 특징: 종말론적 정서를 강하게 띤 선교에 대한 열정. 미국에서 복음 전도에 대한 요청과 전 세계를 향한 이방인 선교.

-  에드워즈의 제자는 홉킨스(S. Hopkins, 1721-1803)이다. 선교 활동에 열성적인 그는 노예해방을 위해 정열적으로 투쟁하였다.

- 급속하게 퍼진 감리교회는 동부 해안으로부터 서부로 이어지는 주민들의 대 이동을 말을 탄 순회 설교자들의 도움을 받아 인도하였고 수많은 이주민들에게 성경에 확고히 선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했다.

- 19세기 초반에 소위 말하는 천막집회들이라고 불리는 부흥운동의 다양한 조류가 있었다. 동부 해안에 있는 대학들에서 시작하여 부흥은 계속 퍼져 나갔다. 부흥운동은 미국의 개신교를 자유교회들로 오늘날까지 지탱하게 했다: 자각적인 선교열,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협력과 종교와 사회의 다양한 접촉은 오늘날까지 특징을 이루고 있다.


3) 스코틀랜드


- 스코틀랜드의 부흥운동은 촬머스(Chalmers, 1780-1847)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의 부흥설교는 1845년 에딘버러에서 사회적인 빈곤에 대한 책임있는 구제를 호소했다. 그는 고대교회의 집사직을 갱신했다.

- 1843년 스코트랜드에서 국가교회와의 분열이 있었으며 “스코틀랜드 자유교회”가 설립되었다.


4) 서부유럽의 프로테스탄티즘에 있어서 부흥운동


- 스위스에서 제네바의 부흥운동은 국가와 교회에 있는 이성주의와 투쟁했던 젊은 신학도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독일, 영국 그리고 스코틀랜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본래의 칼빈주의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1831년부터 제네바 교회와 프랑스에서 복음 전도 활동이 있었다.

- 바트란드(Waadtland)에서 비네(Alexandre Vinet, 1797-1847)는 중심적인 신학자이다. 그는 국가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교회를 그의 양심과 복음과 일치시켰다.

- 바젤에서 독일 기독교연합에 의해 중요한 자극들이 남부 독일로 전해졌다. 1815년 바젤 선교회가 창립되었다.

-프랑스 부흥운동에서 모노드(Adolphe Monod, 1802-1856)는 중요한 설교자였다. 홀랜드에서 빌더다이크(Bilderdijk, 1759-1831)는 넓게 교육을 받은 부흥운동의 지도자이다.

- 또한 루터교적인 스칸디나비아에는 다양한 부흥운동이 있었다. 덴마크 교회에는 특히 그룬트비히(N.F.S. Grundtvig, 1783-1872)가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의 목적은 사도신경에 기초한 순수한 국민교회였다. 덴마크 시민대학의 창설자. 노르웨이에서는 하우게(Hans Nielsen Hauge, 1771-1824)가 중요한 부흥설교가 이었다.  노르웨이에서 부흥운동은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교회를 중심으로 경건한 사람들의 결합이다.

스웨덴에서 부흥운동은 헤른후트와 스코틀랜드의 영향을 받았다. 경건문학의 광범위한 유포:  성화의 강력한 강조에 비해 루터의 칭의론이 두드러졌다. 1815년 스웨덴 성서공회, 1835년 선교회가 창설되었다.


8. 제1차 대전 이후의 신학사


1) 개신교 신학의 새로운 모색


- 리츨의 신학, 특히 그의 제자 빌헬름 헤르만(Wilhelm Herrmann)의 신학은 공유의 기초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과 이후에  리츨의 신학으로부터 개신교 신학의 모든 조류들이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신학의 중심 개념은 “윤리”와 “문화”였다. 기독교 신앙은  자유로운 문화개신교주의(Kulturprotestantismus)의 세계에서 아주 분명하게 공동체 생활에서처럼 개인 생활에서 윤리의 요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힘이었다.

- 1917년 처음으로 오토(Rudolf Otto, 1869-1937)의 작품인 ‘거룩한 것(Das Heilige)’이 나왔다. 1930년까지 이 책은 22판이 나왔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하나님 이해에 대한 서곡이다. 이미 이것으로부터 인간이 “놀람과 떨림의 신비”(myterium tremendum et fascinosum) 안에서 만나는 “절대 타자(ganz Andere)”로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성적이고, 윤리적 종교적인 기독교 이해에 대한 신학의 시대정신과의 거리가 완전히 확실하게 되었다.

- 1917년 베를린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인 홀(Karl Holl, 1866-1926)은 루터의 95개 논제 400주년을 기념하는 ‘루터는 종교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가?(Was verstand Luther unter Religion?)’ 라는 유명한 강연을 했다. 여기에서 이 새로운 루터상이 확실하게 제시되었다. 이것은 꼼꼼한 역사적인 작업과 체계적인 연구로부터 특히 초기 루터의 신학, 그의 십자가 신학과 칭의신학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다. 홀은 영웅과 민족 해방투사의 진보적인 루터 모습을 뒤에 남겨 두었다. 그의 연구와 더불어 소위 말하는 루터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었다. 루터 르네상스는 다가오는 시대의 변증법적 신학에 또한 큰 의미를 가졌다. 루터의 신앙의 중심은 “양심의 종교”이며 이것은 당위의 인식을 근거한다는 홀의 논제는 전체 종교개혁적인 신학의 이해에 있어서 의미 심장한 새로운 시작에 확실히 시대 정신의 영향을 나타내고 있다.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변증법적 신학은 성과 있는 신학적인 새로운 의식을 이끌었다. 이 신학은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발전 과정과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바르트가 1911년 아르가우(Aargau)州에 있는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교회에서 목회자로 일했을 때 먼저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시대의 新改新敎-자유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사회적인 문제와의 대치, 종교사회학으로의 방향전환이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그의 신학선생의 전쟁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와 종교사회주의의 거부를 통하여 바르트를 흔들리게 했다.  친구인 투르나이젠(E. Thurneysen, 1888-1974)과 함께 바르트는 자유신학을 버리고 오직 성서에서 자신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다. 자신의 설교 사명을 위한 심도있는 성서연구를 통해 1919년 로마서 주석이 나왔다(1919년 제1판). 


2. 변증법적 신학의 신학적 출발


- 변증법적 신학의 출발은 특히 바르트의 강연에서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1919년 9월 25일탐바흐(Tambach)에서 행한 강연 “사회 안에 있는 기독교인 (Der Christ in der Gesellschaft)”. 여기에서 중요한 방향전환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기독교인과 기독교적인 문화재들로부터의 전향과 그리스도로의 방향전환, 인간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나타나셨던 하나님께로 전향을 의미했으며 이로써 소위 말하는 기독교적인 세계에 대해 극단적이고 생소하게 대립하였다. 소위 말하는 모든 기독교적인 운동들을 통과해 “위에서부터 수직적인” 운동이 지나가며, “이 운동의 힘과 의미는 죽은 사람들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서 드러나게 된다.

- 이 운동은 모든 현존하는 것에 대한 전면적 부정, 소위 말하는 기독교-사회적인, 기독교-민족적인, 기독교-윤리적인 것과 같은 “이음표 기독교”(Bindestrich-Christentum)에 대한 종말을 뜻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이 종교의 방식들, 예를 들면 기독교적인 윤리의 종교와 같은 것으로 “위에서부터 수직적인” 운동에 저항하는데 있다.

- 하나님의 부정은 그러나 동시에 긍정이다. 초기의 루터와 비슷하게 바르트는 하나님이 파괴하시면서 재건하시고, 확신을 박탈하시면서 새로운 확신을 선물로 주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 변증법적 사고구조는 변증법적 신학에 이름을 붙였다: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하나님을 의미하는 부정은 긍정적이다. 한편 하나님 위에 세워지지 않은 모든 긍정들은 부정적이다.” 기독교적인 문화 작업에 협력하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에 대해 기독교적인 책임에 대한 긍정이 대립하였다. 바르트는 그리하여 사회민주주의와의 협력을 요청할 수 있었다.

- 그러나 이성과 계시, 문화와 기독교 사이의 전통적인 조화가 이처럼 근원적으로 깨뜨려진다면 어떻게 하나님에 관한 이러한 언급이 전적으로 가능하겠는가? 바르트는 이 문제에 대하여 1920년 4월 17일 아라우(Aarau)에서 행한 강연에서 해답을 주었다: “성서적인 질문, 이해 그리고 전망”. 바르트는 성서에서 “놀랄 만한 것”을 발견했다: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들어보지 못한 감동에 대한 증언. 계몽주의이래 시작된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성서와 역사적 문서 사이의 갈등을 바르트는 성서의 증인들의 감동으로 답하였다. 이와 함께 성서는 역사적 비평에 열려 있었다. 물론 이 비평은 감동의 기초에 도달할 수 있을 수 없었다. 바르트는 성서를 근원적으로 종교의 세계와 대치 시킨다; 무신론의 세계가 아닌 종교적인 세계가 먼저 성서에 의해 도전되었다.

- 1922년 완전히 개정된 로마서 주석 제2판이 나왔다. 그는 이제까지의 새로운 출발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 주석서로부터 20년대이래 놀라운 반응이 나왔다. 특히 키엘케가르드(S. Kierkegaard, 1813-1855)의 사상, 니체(F. Nietsches)의 친구인 오버벡(F. Overbeck)에 의한 시민적인 기독교에 대한 비판 그리고 러시아의 작가인 도스토옙스키(Dostojewskij)는 이 신학적인 새로운 출발에 함께 관여하게 되었다.

- 바르트와 투르나이젠 외에 변증법적 신학의 그룹에 속한 신학자들: 루터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로 유사한 이해에 도달한 고가르텐(F. Gogarten, 1887-1969); 슐라이에르마허에게 신학의 불행에 책임이 있다고 했던 브루너(E. Brunner, 1889-1966): 불트만(R. Bultmann, 1884-1976)은 1924년 ‘신화와 말씀’이라는 저서를 냈다. 그는 신약성서에 대한 역사적 연구로부터 그리고 종교개혁적인 신학, 특히 루터 신학의 재발견을 통하여 변증법적 신학을 발견했다.

-  “시간들의 사이에서”(Zwischen den Zeiten)라는 제목을 단 고가르텐의 논문이 ‘기독교 세계’(Christliche Welt)에 실렸다. 새로운 신학에 대한 이 비평적인 위치의 결정은 1923년부터 1933년까지 널리 영향을 끼치며 유포된 학술지의 이름이 되었다. 이 학술지의 편집자: 메르츠(Georg Merz, 1892-1959).

- 변증법적 신학자들의 그룹은 1933년 이미 오랫동안 감지할 수 있었던 차이점들로 분열되었다: 독일 기독교에 대한 고가르텐의 애착 때문에 바르트와 거리가 멀어졌다. 1934년 바르트와 브루너 사이에 신학에 있어서 인간론적인 “접촉점”에 대한 논쟁으로 결별하였다. 바르트와 불트만 사이에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에 대한 프로그램 때문에 문제가 되었고 불트만의 하이덱거(M. Heidegger) 철학의 개념적인 차용으로 20세기의 두 거장 신학자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3. 바이마르 공화국의 교회들


- 왕정의 종말과 공화정이 선언된 1918년 11월 9일은 또한 교회들에 있어서 심오한 역사적 분기점을 뜻했다. 교회들은 이제 막대한 정치적, 정신적 그리고 법적-조직적인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독일의 개신교회는 1918년 11월 9일로 수 백년간의 법 구조인, 통치자의 교회지배를 떨쳐버렸다.

- 루터교회들에 대한 중요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국가 교회적인 구조가 사라지고 난 다음 어떻게 독자적인 교회지배를 만들어야 하는가? 새로운 시작은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었다: 개신교와 가톨릭 국민들의 국가와 황제에 충성적인 성향;


VII. 에큐메니칼 운동


1. 19세기 에큐메니칼 선교대회


   인도, 중국, 일본 그리고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선교협력을 요구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보와 의견의 공유이다. 이러한 필요 아래 선교대회들이 네 가지 분야에서 개최되었다. 첫째, 지역적인 선교대회이다. 선교사들이 사역하고 있는 지역들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선교대회들이 개최되었는데 여기에서 선교협력의 이론과 실제 그리고 조직의 문제들이 직접 탐구되었다. 이 대회는 1900년 개최된 마드라스 대회가 경계표가 되었다. 둘째, 복음주의 연맹의 대회들이다. 이것은 1854년 뉴욕에서 시작된 미국대회 그리고 1900년 뉴욕에서의 미국 대회 절정, 1910년 에딘버러 대회를 촉구할 수 있었던 일련의 사례들을 내포하고 있다. 셋째는 대륙선교대회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며 1866년 이래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계기독학생연맹의 형성이라 할 수 있다. 학생운동은 1910년 에딘버러 대회에서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실제적으로 학생을 대표하는 회의이다. 이것에 의하여 국제선교협의회(I.M.C.)와 에큐메니칼 운동의 진로가 설정되었다.

  이러한 네 가지 선교대회의 절정은 1910년 6월 14일에서 23일까지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렸던 세계선교대회(W.M.C.)이다. 이 대회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의 세계적이고 국가적인 기구들이 조직되었다. 이 대회의 목표는 비기독교 세계를 연구하는데 있었으며 효과적인 복음화를 이루기 위한 상호협력적인 전략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에 나타난 에딘버러의 독특성은

1) 아시아인들과 아시아 세계로부터 온 100여명의 특파원이 참가하였다. 이들이 가지고 온 자료들은 토의를 위한 자료로 제공되어졌고 상호협력을 고무하고 보편적인 전략 개발에 공헌하게 되었다.

2) 각국의 선교부들과 협의회에서 파송한 1200여명의 공식 대표들이 모였으며 재정적인 부담금은 참가자들이 맡았다.

3) 비기독교세계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제한하였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부를 배제시켰다.

4) 자체에 부여된 신학적인 제한성들을 신앙의 확신 안에서 설정하였다.

5) 신앙과 질서운동에 알 맞는 신학적인 논쟁을 배제하였다.

6) 앵글로-카톨릭 선교부, 퀘이커 교도들, 스칸디나비아와 독일의 루터란 선교부들, 중국의 내륙 선교부가 참가한 총괄적인 대회였다.

7) 17개 나라의 아시아 제국을 제외한 선교 기관들의 대표자들은 서구인들이었다. 의장인 Mott는 아시아, 태평양 연안, 아프리카에서 온 대표들이 한정적인 사실에 대하여 분명히 언잖은 태도를 취하였다.

8) 서구에서 모였던 대회였다.

9) 비상한 힘을 생성하였다. 영적으로 그것은 기도의 힘에 뿌리를 가지는 것이었다. 기도는 대회전과 기간 중에 전 대륙에서 행해졌다. 대회 기간 중 매일 아침마다 기도로 시작하였고 정오에는 30분 동안 세계 선교를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에딘버러 대회의 성과로는 선교부에 관심을 갱신하는 것이었으며 교회의 독특한 비젼을 얻게 되었고 세계 선교의 실재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속위원회를 창안하였다.


   1)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필리핀의 선교사 주교인 브렌트(Charles H. Brent)의 신앙과 직제 운동은 1910년 에딘버러에 기인한 것이다. 브랜트는 신앙과 직제의 문제들이 교회일치를 위한 프로그램에서 배제될 수 없는 중요한 사항들임을 직시하였다. 에딘버러 대회가 끝나기 전 브랜트는 그의 뜻을 친구들에게 전했는데, 신앙과 직제의 문제를 다루는 세계대회를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그러한 모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까지 가질 수 없었으며 1927년에야 로잔에서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이 모임은 에딘버러에서 제기된 신앙과 직제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두 번째 세계대회였다. 이 운동은 일치의식의 증가를 겨냥하였으며 대표자들은 성공회, 개신교, 로마 카톨릭, 희랍 정교회가 함께 그들의 공통적인 기독교 일치를 주장할 것을 이구동성으로 희망하였다. 희랍정교회는 1919년에, 로마 카톨릭은 1965년 바티칸 II 대회의 마지막에 일치를 위한 모임에 가담할 것을 다루었다. 1948년 암스텔담 대회에서 W.C.C.가 형성되었을 때, 에딘버러에서 구성된 상임위원회는 W.C.C.의 신앙과 직제를 위한 위원회가 되었다. 이 위원회는 비회원 교회들에 소속되어 있는 신학자들과 유대관계를 갖는 특수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여기에는 9명의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 위원으로 소속되어 있다. 이들은 1968년 W.C.C. 웁살라 대회에서 위원들로 지명되었다.


     2) 생활과 사업(life and work)


   신앙과 직제와 더불어 생활과 사업은 에큐메니칼 조직의 영향력을 대변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실제적인 행동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생활과 사업의 저명한 지도자인 스웨덴의 죄더블롬 주교(Archbishop Nathan Söderblom)는 신앙 안에서 일치를 위한 길은 교회들의 연합적인 활동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생활과 사업을 위한 중요한 국제대회는 1925년에 열린 스톡홀름 대회, 1937년 옥스포드 대회이다.

   생활과 사업 운동은 신앙과 직제는 세계대회에서 각기 다른 시대에 출항하였다. 신앙과 직제는 국제선교대회(I.M.C.)와 생활과 사업이 시작하고 난 후 13년 뒤에 시작되었다.


2. 1948년 이후의 에큐메니칼 운동


   1937년 옥스포드에서 제2차 생활과 사업 대회와 에딘버러에서 제2차 신앙과 직제 대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이 두 개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협력과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창설이 결정되었다. 1948년 암스텔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가 설립되었다. 이 대회주제: “세상의 혼란과 하나님의 구원계획”. 두 개의 에큐메니칼 운동들이 이제 통합되었다. 196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3차 세계대회에 정교회들이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하였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20세기에 수많은 대회와 더불어 교파들의 접근에 근본적인 자극들을 가져다주었다. 20세기의 교회사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그 이전의 세기들과 비교해볼 때 교파들 간에 근본적으로 변화된 분위기를 만들었다

ARTICLE

근대교회사


I. 서론


근대의 의미: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방법론적이 아닌 실제적인 점에서 나눈다. 두 가지 원칙은 실제적인 것과 연대적인 것

1559년 이후 ‘Magdeburger Zenturien': 고대, 중세, 근대 이렇게 시대구분을 하였다. 개신교 최초의 교회사이다.

1588년 이후 카톨릭 측에서 Baronius의 ‘Annales ecclesiastici'가 발행되었다.

근대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가?

Ernst Troltsch: 18세기. 루터는 그의 삶과 사상에 있어서 아직도 중세기 인물이다. 계몽주의부터 근대가 시작되었다. 문화사적인 관점에서 18세기를 근대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사가 루터로부터 근대가 시작된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Karl Heussi: 16세기와 18세기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카톨릭 측의 Jedin은 17세기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았다.

K. D. Schmidt, B. Moeller: 근대의 시작은 17세기이다.

1555년은 결정적인 중간휴지: 종교개혁과 근대초기이며 종파의 시대이다. 이것은 결국 1648년 30년 전쟁의 종결을 가져왔다.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를 야기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세기부터 근대라고 한다.


II. 종파의 시대에 대한 개괄


1.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 (1555년)


- 1555년 아욱스부르크 제국국회(칼 5세가 참석지 않고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왕에 의해 진행)는 카톨릭파와 루터파 사이에 신앙고백이 다시 일치할 때까지 이 두 파간의 무기한의 종교평화협정을 결정하였다(1555. 9.25의 제국국회 의결).

결정된 내용들

- 종교의 자유는 이 두 파간의 선택에만 해당된다: 카톨릭과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과 이와 관련된 신앙고백.  재세례파, 반삼위일체론자들, 영성주의자들 같은 종교개혁의 측면 운동들과 츠빙글리파는 이 협약에서 제외되었다.

- 이 협약에는 보편적인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cuius regio - eius religio(한 나라에 한 종파: 제후의 종파에 따라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종파가 결정됨)라는 원칙이 성립되다.  제후들은 두 종파 가운데 하나만 고를 수 있으며, 국민은 이곳에서 제후의 종파를 따라야만 한다(ius reformandi).

- 과거의 이단정죄법이 무효화되었다: 타종파의 국민은 이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ius emigrandi). 자신의 종파에 속한 지역으로의 이주에 있어서 자신의 재산과 가족의 재산은 소유물 보호법 하에 있게 되었다.

- 성직자인 제후가 다스리는 제후국인 경우 예외가 적용되다: 소위 말하는 "Reservatum ecclesiasticum"(종교상의 예외).  성직자인 제후는 종파의 개종에 의해 사인이 된다.  그는 성직을 잃고 세속의 통치권도 잃게 된다.

- 두 개의 종파가 공존하는 자유도시들에 대해서는 이 두 가지가 모두 존속된다.

- 종교적인 제후국들 안에 있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속한 도시들과 마을은 루터교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이 규정은 종교평화협약에 들어있지 않았지만 프로테스탄트파를 인정한 소위 "Declaratio Ferdinandea"라고 불리우는 페르디난트 왕의 개인적인 성명에 들어 있었다.

- 칼5세는 1557년 자신의 직위에서 물러나고 황제대관을 포기하였다: 그는 1558년 스페인에서 세상을 떴다.

-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으로 독일 제국에서는 통일된 기독교의 신앙고백이 종말을 고하고 종파의 시대가 시작된다.


2. 이 시대의 일반적인 성격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부터 1648년의 베스트팔렌 평화조약까지에 걸친 시대를 일컫는 “종파의 시대”라는 개념은 이 세기의 종교사회학자인 트렐취(Ernst Troeltsch, 1865-1923)와 역사학자 브루너(Otto Brunner, 1898-1982)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종교개혁시대부터 1555년까지 그리고 이와 연결되는 반종교개혁 시대를 내포하였던 전통적인 시대구분에 있어서 1555년이 중간휴지(休止)성격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을 때, 일반사와 교회사의 서술에서는 이 개념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독일 제국의 상황에서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이 체결된 1555년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 시대의 종파적인 특징을 아주 확실하게 만든 한 중요한 분기점이다.

  중세후기와 종교개혁시대와는 달리 1555년부터 실제적으로 변화된 것은 모든 삶이 종파의 표시 아래 즉 종파적인 대립 아래 있게된 것이다. 중세후기의 종교적인 운동들과 종교개혁의 초창기는 이 종파적인 극화(極化)를 알지 못한다. 상반되게 구별되고 상이한 종파들과 교회들, 국가들과 정치적인 복안들 가운데서 중세 기독교적인 단일문화의 분열은 이 시대를 본래적으로 결정하는 요소이다. 이 시대의 종파적인 특징은 정치에서 16세기와 17세기에 일어났던 큰 전쟁에 나타나지만 기독교 선교와 타 대륙에 유럽 세력의 식민지 팽창에서도 보여진다.

  이 시대의 교회사에 루터파, 칼빈파 그리고 카톨릭파의 종파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 시대의 종파적인 특징은 표면적으로 상반되는 과정, 즉 이 시대에 점점 확실시 되어가고 있는 세속화, 다시 말해서 모든 생활의 영역에서 세속화와 연관되어 있다. 종파화와 세속화는 서로 변증법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종파들과 이것들 상호간의 경계가 모든 삶의 영역을 강하게 결정하면 할수록 종교적인 동기를 가진 갈등들로부터 순수히 정치적인 논쟁들이 되었다. 30년전쟁은 독일제국에서 정치와 종교의 겹침을 보인 것이다. 이 전쟁이 오래가면 갈수록 순수히 권력의 이해관계가 더욱 확실히 나타났었다.

종파적인 논쟁에 넌더리가 난 신학과 교회의 경건에 실제 삶에서 신앙의 사수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경건주의는 독일 제국에서 현저하게 기독교의 탈 종파화에 공헌하였다.

종파의 시대에 근대초기의 제후국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중요한 사건은 종파화와 세속화의 관련을 확실히 하였다.

  종파적인 시대는 종파적인 경직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정신적인 활성화와 영적인 깊이가 있었다.


3. 종파로서의 루터교의 형성


1) 루터교 내부의 교리논쟁들


- 독자적인 루터파 교회로의 발전은 17세기가 지나는 사이에 긴 과정을 거쳐서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발전에 대한 길은 맹렬한 신학적인 논쟁을 가져온다. 이러한 논쟁이 어느 정도 해명이 되고 난 후에야 루터교의 공통적인 기초가 발견되어질 수 있었다.

- 이 논쟁들은 정치적인 대립(예를 들면 작센 선제후국과 팔츠 선제후국 사이)과 신학적인 논쟁과 확실히 연관되어 있다. 루터와 멜랑히톤(인문주의적인 사상) 사이에 있어서 신학적인 시작의 차이들은 루터가 죽고난 다음 타인의 눈을 끌도록 한다.

- 논쟁은 멜랑히톤의 제자들(마요르: G. Major, 페핑어: J. Pfeffinger)인 필립파(Philippisten)와  원래 루터의 제자들(플라치우스: M. Flacius, 암스도르프: N. v. Amsdorf)인 순수 루터파 (Gnesioluthraner) 사이에 일어난다.

- 다음의 문제들을 가지고 이 양派가 싸우고 논쟁을 벌였다.

① 중요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논쟁(아디아포라 논쟁, Adiaphoristischer Streit,    1548-1552): 작센 선제후국에서는 1548년 12월 “라이프치히 가협정”(Leipziger Interim)이 나왔는데, 이것은 주로 멜랑히톤이 작성하였다. 라이프치히 가협정은 카톨릭 교회의 법과 예배 의식을 “중요하지 않는 것들”(Adiaphora)로 여기고 받아들였다. 라이프치히 가협정 이후 많은 지역에서 라틴어로 미사가 다시 드려졌으며 성화와 카톨릭의 축일(祝日)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멜랑히톤의 견해에 따르면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또한 라이프치히 인테림은 교회의 교권주의와 7성사를 주변적인 것들로 인정하고 오직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적인 주요 교리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루터의 제자이며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인 마티아스 플라티우스(Matthias Flacius, 1520-1575)는 멜랑히톤과 이 가협정에 대해 승인하는 사람들에 대해 “신앙고백이나 악의 유혹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중간물도 있을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플라티우스는 비텐베르크에서 막데부르크로 가서 암스도르프(Nikolaus von Amsdorf)와 루터의 제자들과 연합하여 가협정에 대한 어떠한 타협도 없는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디아포라 논쟁이다.

② 마요르의 논쟁(Majoristischer Streit, 1552-1558): 아디아포라 논쟁 이후 종교개혁적인 칭의 교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멜랑히톤의 제자인 게오르크 마요르(Georg Major)는 순수루터파인 암스도르프를 반박하였다. 마요르는 구원을 받는데 선행(善行)을 필수적으로 보았고 이와는 반대로 암스도르프는 선행은 구원에 해가 된다고 보았다.

③ 神人協同說 논쟁(Synergistischer Streit, 1556-1560):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가 어느 정도 작용하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멜랑히톤은 “하나님은 인간 자신의 행위의 공로에 의하여 인간을 의롭게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은 목재와 같은 인간과 협동하지 않고 그가 깨달을 수 있는 시기가 되면 그의 의지가 협력하도록 그를 끌어당긴다”고 주장하였다. 루터에 철저했던 제자인 플라티우스(Matthias Flacius)는 이와 반대로 인간은 회심에 있어서 목재(truncus)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완전히 수동적이며 하나님의 사역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플라티우스는 자연적인 인간은 죄에 근거를 둔 악에 대한 의지에 의하여 사탄의 형상을 바꾸어 쓴 것임(ad imaginem Satanae transformatus)을 결론지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비례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과거부터 있어 온 논쟁이었다.

④ 오지안더의 논쟁 (1550-1556): 안드레아스 오지안더(Andreas Osiander, 1488-1552)는 뉘른베르크(Nürnberg)의 宗敎改革史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1549년부터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에서 가르쳤다. 그는 의롭게 됨을 信者의 마음 안에 그리스도의 의의 본질적인 내재로서 이해했다. 그리스도의 神的인 본성이 신자의 내면에 들어오며 신자는 이 내면을 따르게 된다. 이것은 의롭게 됨의 과정에 대한 신비적인 견해이며 멜랑히톤의 의미에 있어서 의롭게 됨의 견해와 정반대 되는 것이었다. 멜랑히톤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의롭게 됨은 그리스도의 義의 공로에 있다. 이것은 “法廷의 칭의론”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고 그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배당하는 의롭다함의 사건이 법정 앞에 열린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법정에서 고소받는 죄인들 앞에 나타났으며 하나님은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의를 인정한 것이다.

⑤ 성찬의 이해에 대한 논쟁들: 칼빈주의에 대한 은밀한 호의는 멜랑히톤의 제자들에 대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크립토칼빈니스텐«Kyrptocalvinisten, 숨겨진 칼빈주의자들). 기독론 논쟁은 그리스도의 음부행과 높임을 받은 주님이 언제나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편재설).


2) 협정신조(1577)와 협정신조서(Konkordienbuch 1580)


- 로마 카톨릭과 칼빈주의는 이미 교리의 조직적인 확정에 있어서 발전을 이루었다(트리엔트 종교회의와 칼빈의 “기독교 강요”).

- 루터교에서 교리적인 일치에 대해서 주축이 된 것은 제후들이었다.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는 소위 토르크의 교리서를 만들도록 하였다. 가장 주동적인 신학자는 야콥 안드레애(Jakob Andreae. 1528-1590)이다.

- 이 문서는 루터적인 지역교회들에게는 교리적 근간이 되었고 조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Solida Declaratio", “확고한 선언”(SD).

짧은 개요가 이 선언 앞에 수록되어 있다.  짧은 개요와 SD와 함께 협정 신조(Formula Concordiae, FC)를 구성하고 있다.

- 협정신조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Confessio Augustana: CA)에 대한 최종적이고 포괄적인 해설서이다.  이것은 독창적인 고백서는 아니다

- 이것의 내적인 목적: 상이한 입장을 통일함

외적 목적: 로마 카톨릭과 칼빈주의에 대한 교리적인 확실한 경계

- 협정신조(Formula Concordiae: FC)의 중요 결정: 성경은 모든 교리들과 선생들을 판단하는 유일한 규범이요 표준이다.  고대 교회의 세개의 고백서(사도신경Apostolicum,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신조)와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교의 신조들은 진리의 증거(testes veritatis)이다.  성서는 신앙 진리의 근본이요, 신앙고백들은 이 신앙진리에 대한 길을 열어준다.  루터 신학의 도움으로 FC는 인간의 회심과 중생에서 자유의지를 거부한다.  FC는 멜랑히톤의 의미에서 칭의의 법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 화체론, 미사의 제사와 평신도에 대한 배잔금지는 영적이고 상징적인 성찬론과 함께 거절된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요소에 있다는 현존론(Realpräsenz)이 루터교의 성찬론이 된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것과 믿음 없이 먹고 마시는 것(manducatio indignorum, manducatio impiorum)이 성찬의 효력에 예속되지 않게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의 예정론이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gratia universalis)로 표현된다.

- CA의 50주년 되는 해에 Dresden에서 협정서가 나왔다. 이 책은 루터교 지역을 위해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서들을 한데 묶은 것이다:

고대 교회의 3가지 고백서(사도신경,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아타나시우스신조);

CA 와 Apologie;

루터의 슈말칼덴 고백서;

멜랑히톤의 논문 "De potestate et primatu papae" 교황의 힘과 수위권에 대하여, 루터의 대․소교리 문답; 협정신조.

- 모든 루터교가 FC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터교의 지역 교회이면서 FC를 받아들이지 않은 교회: Pommern, Holstein, Branschweig-Wolfenbüttel 과 뉘른베르크, 헷센 카셀과 안할트에서는 칼빈주의가 밀고 들어 오려고 하였다.


3) 루터교 정통주의


- 루터교 정통주의는 16세기후반과 17세기 구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의 한 부분이다. 주된 표식은 순수 교리에 대한 몰두와 로마 카톨릭과 칼빈주의의 공격에 대한 방어이다.  교리와 논쟁이 이 신학의 주된 원칙이다.

- 진리의 가르침을 위해 싸운 루터로부터 루터교 정통주의의 길이 시작된다.  칭의론은 루터교 정통주의 신학의 중심에 서 있다.

- 루터교 정통주의의 중요한 안내자는 멜랑히톤이다.

그의 "Loci theologici"(1521)는 초기 정통주의의 중요한 서적들의 제목과 방법론의 모범이다.

Martin Chemnitz(1522-1586): Loci theoloigici

Leonhard Hutter(1563-1616): Compendium locorum theologicorum

Johann Gerhard(1582-1637): Loci theologici(1610-1625), 루터교 정통주의의 주된 교리서들이다.

- 이 교리서들은 멜랑히톤이 신학적인 교리의 체계를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사용한 것을 따르고 있다. 신학적인 주요 개념들에 논리적인 규칙을 도입하였다(Loci- Methode).

루터교 정통주의의 주 표식은 루터교 신학에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도입이다.  이것은 후기 인문주의의 정신과 반대자들의 공격을 정확한 개념화로 방어해야 하는 필연성과 관계가 있다.

- 정통주의의 주요학자들:

Johann Andreas Quenstedt(1610-1688)

Abraham Calov(1612-1688)

David Hollaz(1648-1713)

이들은 소위 말하는 분석적인 방법에 열심이다.  신학은 구원의 길의 질적인 학문으로 이해되었다. 조직적인 짜임으로 교리적인 내용이 조직적으로 창조에서 완성까지, 구원의 목적인 영원한 복락까지 실려 있다.

- 신학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재등장 이후에 성서에 대한 정통주의 교리는 루터교 정통주의의 기초이다.  성서 원칙에 대한 가르침은 성서에 대한 원칙의 아리스토텔레스 범주의 상용에 있다: 성서는 그 자체가 참이며 더 이상의 논증(Beglaubigung)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서는 권위(auctoritas), 완전한 진리(perfectio), 만족(sufficientia)과 명료함(perspicuitas)을 가지고 있다. 성경전체는 낱말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영으로 영감 받은 것으로 이해되었다(口頭靈感設, Vebalinspirationslehre).

- 논리적으로 짜여진 정통주의 성서관은 성서의 역사적인 비평에 대한 문을 열어 주었다. 왜냐하면 정통주의의 성서관의 시작 자체가 성서에 대한 이성적인 비판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4) 게옥 칼릭스트(Georg Calixt)와 소위 말하는 혼합주의 논쟁


- 게옥 칼릭스트(1586-1656)는 당시 중요한 헬름슈테트대학교(헬름슈테트 신학)에서 가르쳤다. 루터교 정통주의의 아성(牙城)인 비텐베르크대학교와는 대조적으로 이곳에서는 후기 인문주의의 정신이 명백하게 나타났다.

- 물론 칼릭스트는 정통 루터교 신학자였지만 멜랑히톤에 기인하여 기독교 종파 싸움의 극복에 관심을 가졌다. 30년전쟁이 가져다 준 황폐의 흔적을 보고 그는 모든 종파들이 공동의 근본으로 되돌아 가기를 원했다. 그는 사도신경과 제5세기까지의 교리적인 결정에 근원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 소위 말하는 5세기 동안의 일치(Consensus quinquesaecularis)는 비텐베르크에 있는 정통주의 신학자 칼로프(Abraham Calrov)로부터 종교적인 혼합이라는 반박을 받았다.

- 1654년 토른(Thorn) 종교회담 이후 혼합주의 논쟁은 격렬해졌다: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자들은 칼릭스트가 루터와 종교개혁을 상대화시켰다고 비난하였다. 이 논쟁들과의 연관 가운데 »루터교«의 개념이 세워졌다.

- 칼릭스트는 자신의 신학에서 특히 윤리를 강조하였다. 물론 교의학과 윤리학이 분리되어져서는 안되지만 두 개의 신학과목으로서 나누이게 된 것은 그에게 기인하고 있다. 또한 그가 종교개혁자의 신학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던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고백의 항목과 덜 기본적인 항목들 사이의 구분으로 칼릭스트는 이미 새시대의 과도기에 서있다.


5) 루터교 정통주의 시대의 경건과 개혁의 노력


- 루터교 정통주의의 시대는 경건문학, 신앙 그리고 영적인 시의 전형적인 시대이다. 1600년경 이 경건문헌의 全盛은 »경건의 위기«와 »경건의 전환«(W. Zeller)과 연관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형이상학의 도움으로 점점 이성적으로 되어가는 신학은 살아있는 신앙, 경건의 욕구에 어떠한 자극도 주지 않았다. 신학과 경건은 종교개혁 이후 3대째의 세대에 특히 논쟁을 하게 되었다. 1600년경을 중심으로 경건운동의 발단에 있어서 엄청난 반대자들(적그리스도로서 교황청)에 대한 두려움과 종말에 대한 위협적인 징조에 대한 공포가 밀려올 수 있게 된다. 그 위에 죄인에게 돌려진 의로 새롭고 거룩한 생활을 체험할 수 있게 되리라는 멜랑히톤적인 틀에 있는 칭의론은 얼마 안되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신앙의 내면화, 구체화 그리고 개인화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 고대교회, 중세 전성기와 중세 후기의 신비 또한 자연철학적인 사조에 있는 모방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음이 납득되어 진다.


① 요한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


루터와 아른트를 객관적으로 동일시하는 견해는, 스스로를 진리증언의 대열에 선 마지막 사람들이라고 했던 경건주의의 지도자들인 슈페너, 프랑케, 친첸도르프와 벵엘의 역사적인 자기이해(Selbstverständnis)와 상응한 것이다. 쾨텐(Cöthen) 부근의 에드다이츠(Eddeitz) 출신인 요한 아른트는 발렌슈테트(Ballenstädt) 부근의 바데보른(Badeborn)에서 안할트(Anhalt) 지역의 목사로서 직무를 시작했고(1583년), 그곳에서 1585년의 루터교의 성찬고백서의 철저한 고백자로서 서명하였으며, 그곳 지역교회(Landeskirche)의 세례의식에 마귀를 쫓아내는 의식과 성호를 긋는 의식(루터는 세례의식에 마귀를 쫓아내고 성호를 긋는 의식을 넣음: M. Luther, Das Taufbüchlein verdeutscht 1523, in: WA 12, S. 38-48)이 없는 칼빈주의의 도입을 거부하였다. 그 결과로 그는 그곳에서 목사직을 잃게 되었고, 1611년 첼레(Celle)에서 총감독(Generalsuperintendent)이 될 때까지, 쿠베들린부르크(Quedlinburg, 1590년부터), 브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 1599년부터), 그리고 루터의 출생지인 아이스레벤(Eisleben, 1608년부터)에서 일했다. 묵상과 명상에 몰두했던 아른트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1606년부터 수많은 판을 거듭했고, 설교에 그 근원을 둔 경건서적(Andachtsbuch)인 ‘참기독교에 관한 네 권의 책들’(Vier Bücher vom wahren Christentum, 1605-1610)에 서술되어 있다. 이 책에 대한 여러 가지 비판이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최초로 제기되었고 얼마동안 끊임없이 계속되었지만, 루터교 지역에서는 그의 모든 작품 중 첨단의 위치에 있었다. 이 책은 1600년경의 경건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책으로 19세기까지 널리 읽혀졌다. 아른트는 루터의 칭의론의 토대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활화하려고 하였다«. 이로써 아른트는 오늘날 경건역사적인 관점에서 경건주의의 창시자로 간주된다(J. Wallmann).

젊은 시절에는 정통 루터교의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그 일 때문에 희생이 되기도 했던 아른트는 여기에서 주저하지 않고 신비주의의 넓은 경향 뿐 아니라,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베르나르의 클레르보(Clairvaux von Bernhard) 이후 실로 유일하게 아가서를 애정적인 방법으로 주석하는 법을 루터교 안에 도입하였다. 그와 나란히 위대한 찬송작시자 필립 니콜라이(Philipp Nicolai, 1556-1608)가 베스트팔렌(Westfalen) 지역의 우나(Unna)와 함부르크(Hamburg)에서 같은 영향을 끼쳤다.

아른트의 `참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죄로 인하여 이 형상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이것을 이제 다시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었다. 창조주에 의하여 피조물에 새겨진 고귀한 성품은 잃어버릴 수 없는 지참금을 뜻했다: 신적인 성품에 동참하는 것, 이것이 인간존재의 목적이었다. 이것은 플라톤적인 유비사상(Analogiegedanke)을 가지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 명백했다. 즉 이것은 죄가 초래하였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보다는 유사성을 더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분명히 변해야 됨을 깨달았다. 인간은 회심을 통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부인을 통하여, 옛 피조물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피조물로의 부활을 통하여 신적인 영역으로 올라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완전한 변화로서의 거듭남이 여기에서 특히 강조되었다: 거듭남은 사랑 안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과 그 자신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세상을 멀리하고 내면의 깊은 곳으로, 자기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밖으로 눈을 돌려 이웃과 사귀면서 겸손, 사랑, 온유 그리고 온전한 화평을 행하면, 그는 거듭남에 충분히 도달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내부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하나님과 영, 영과 하나님 - 이 주제가 `참 기독교`의 실제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 아른트 외에 경건운동의 중요한 대표자들과 그들의 저술이 있다:

프레토리우스(Stephan Prätorius, 1536-1603): ‘영적인 보고’(Geistliche Schatzkammer, 1636).

니콜라이(Philipp Nicolai, 1556-1608): ‘영원한 생명의 기쁜 거울’(Freudenspiegel des ewigen Lebens, 1599).

헤르베르거(Valerius Herberger, 1562-1627): ‘심령의 설교’(Herz-Postillen).

요한 게하르트(Johann Gerhard, 1582-1637): ‘거룩한 명상’(Meditationes sacrae, 1606).

특히 게하르트에게 있어서 경건과 학문적인 신학은 결합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 이 경건은 수 많은 개혁경향과 관련을 맺고 있다: 아른트의 문하생 안드레애(J.V. Andreae, 1586-1654)와 코메니우스(J.A. Comenius, 1592-1670). 교회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실들이 자주 날카롭게 비판되었다(고발문). 여기에 슙(J.B. Schupp, 1610-1661), 그로스게바우어(Th. Großgebauer, 1627-1661: 황폐된 시온에서 온 파수꾼의 소리), 자우베르트(J. Saubert, 1592-1646), 딜헤르(J.M. Dilherr, 1604-1669), 요한 슈미트(Johann Schmidt, 1594-1658).

- 루터교의 경건서적은 파울 게하르트(Paul Gerhardt, 1607-1676)의 영적인 시에 또한 감화를 끼쳤다. 이 위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찬송시 작가에게 17세기 전체를 표시하는 정통주의와 동시에 진심어린 경건의 긴밀한 맺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게하르트의 많은 찬송시들은 아른트의 경건, 특히 그의 ‘낙원의 정원’(Paradiesgärtlein, 1612)에 새겨져 있다. 요한 아른트의 신비적으로 채색된 경건의 언어는 바하(J.S. Bach)의 칸타타와 수난곡의 가사에도 영향을 주었다.

- 루터교의 경건서적에 신비적 영성주의의 글들도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사람들: 발렌틴 바이겔(Valentin Weigel, 1533-1588); 베트케(Joachim Betke, 1601-1663); 호부르크(Christian Hoburg, 1607-1675). 사색적이고 신비적인 사상의 세계와 더불어 괴어리츠(Görlitz)의 야콥 뵈메(Jakob Böhme, 1575-1624)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4. 30년 전쟁


1) 전쟁의 배경


ⓛ 1608년과 1609년 대립적인 두 파 사이의 정치적이고 종파적인 동맹이 형성되었다. 열렬한 카톨릭 제후인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Maximilian)이 개신교 자유도시인 도나우뵈르트(Donauwörth)에 대한 강압이었다. 막시밀리안은 독일 제국국회에서 이 도시를 추방시키고 카톨릭을 다시 세워 이 도시를 바이에른으로 귀속시켰다. 이에 대하여 수많은 루터파와 개혁교회파 제후들이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4세의 지도 아래 1608년 아하우젠(Ahausen)에서 연맹을 맺자,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편과 세속적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카톨릭 성직자 제후들이 1609년 동맹을 맺었다. 팔츠는 개혁교회 국가였으며 라인강 중부를 건너서 전략적으로 위치하고 있었고, 팔츠 선제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한 7인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중요했다. 개신교의 제후들은 지원을 얻기 위하여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의 헨리 4세와 협의하였다.

② 윌리히(Jülich)와 클레페(Kleve) 지역에 대한 상속권은 새로운 분쟁을 가져왔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종파들이 다투었는데 결국 반대파들은 일시적인 분할에 합의하였다(이 분쟁 중에 팔츠-노이부르크의 볼프강 빌헬름 Wolfgang Wilhelm은 카톨릭으로 브란덴부르크의 요한 지기스문트  Johann Sigismund는 개혁교회로 개종했다).

③ 합스부르크가 국가들 안에 있는 정치적인 갈등이다. 여기에 능력이 없는 황제 루돌프 2세(Rudolf II.)는 제국의 제후들로부터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수년 동안 계속된 혼란 속에서 제후들은 루돌프의 형제인 마티아스(Matthias) 뿐만 아니라 루돌프 자신으로부터 개신교도들을 위한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마티아스는 1606년의 비인의 평화에서 먼저 헝가리, 후에 모라비아와 오스트리아에, 루돌프는 1609년의 칙허장 Majestätsbrief에서 보헤미아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다; 동시에 슐레지엔에 있는 개신교들은 안전을 보장받았다).


2) 30년전쟁의 진행


  1618년 체코의 보헤미아인들은 자기들의 프로테스탄트적 자유가 상실될까 두려워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마티아스(보헤미아의 국왕이기도 함)가 보낸 밀사와 교섭했는데 이 나라에서 가끔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황제의 사신을 창밖으로 내던짐으로써 태도를 표시했다. 이 사건 이후 국왕․황제는 자기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이에 보헤미아인들은 그를 추방하고 새로운 국왕을 선출했다. 그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원조를 얻기 위해 팔츠 선제후를 택했다. 그는 보헤미아에서 프리드리히 5세 칭호를 받았으며 프로테스탄트 연맹으로부터 보헤미아인들에게 원조를 제공했고 네덜란드인은 화폐를 보냈다. 마티아스 후계자인 페르디난트 황제는 교황으로부터 온 화폐, 밀라노로부터 파견된 스페인의 군대, 카톨릭인 바이에른의 군대의 도움으로 1620년 봐이서 베르크(Weißer Berg)에서 프리드리히 5세를 이겼다. 이로써 겨울왕 프리드리히의 지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페르디난트는 다시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보헤미아 귀족의 약 절반의 토지를 몰수했다. 그는 이 토지를 카톨릭 교회교단, 수도원에 기부금으로 증여하거나 그를 도왔던 사람들에게 분배했다.

  1621년 프로테스탄트 연맹도 해체되어 프로테스탄트의 주도권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한 국가인 홀슈타인 제후이기도 한 덴마크 국왕인 크리스티안 4세(Christian IV.)가 장악했다. 그는 독일에서 몇몇의 주교관구를 획득하여 자기 아들에게 줄 왕국을 세우려고 했다. 그는 네덜란드인과 영국인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아 이 전쟁에 참전했다. 그에게 대항하여 황제는 발렌슈타인의 알버트로 하여금 개인적으로 군대를 일으키도록 위임했다. 발렌슈타인은 온갖 국적을 가진 직업 군인을 모집했는데 이들은 보수에 의해서보다는 약탈로 생활했다. 발렌슈타인과 카톨릭 제국의 다른 장군들은 덴마크 국왕을 패배시키고 발틱 해안에 이르러 덴마크 반도까지 침입했다.

  1629년 복권칙령(復權勅令)에 의하여 황제는 1552년 이래 세속화된 영토를 자동적으로 카톨릭교회로 복귀시켰다. 두 개의 대주교구, 12개의 주교구, 이전에 수도원과 종교단체에 속해 있던 100개 이상의 작은 영토들이 포함되었다.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II. Adolf)는 최상급의 능력을 가진 군주로 스웨덴에 있는 모든 당파들을 화해시키고 의회와 조화를 이룸으로 해외에서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기지를 만들었다. 그는 발틱해 동쪽 해안에서 스웨덴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는 네덜란드와 다른 군사 전문가들을 이용하여 강한 훈련, 고조된 용기와 기동성있는 대포로 이름난 당대의 가장 근대적인 군대를 창설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로 하여금 루터의 찬송가를 부르면서 전장으로 진군케 했다. 그는 1630년 독일에 상륙하여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를 구했다. 1631년 브라이텐펠트(Breitenfeld) 전투에서 카톨릭의 틸리(Tilly)를 이김으로 남부 독일을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프랑켄 지역의 주교관구들, 마인츠, 아욱스부르크, 뮨헨을 차지했다. 그는 1632년 뤼첸(Lützen) 전투에서 피살되었다. 그의 재상 옥센스티에르나는 그를 이어 전쟁을 계속했다. 1635년 독일의 작센은 스웨덴을 배제하고 황제와 프라하의 단독강화(Separatfriede von Prag)를 맺었다.

  이 전쟁의 최후 단계는 합스부르크의 황제(Ferdinand III., 1637-1657)와 스페인과 더불어스웨덴과 프랑스의 전적인 정치적인 싸움이었다.


3) 베스트팔렌 평화조약(1648)


  평화회담은 1644년 베스트팔렌, 즉 뮨스터와 오스나브뤼크의 두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베스트팔렌에는 수 백명의 외교관들과 협상자들이 제국과 그 회원국들인 스페인․프랑스․스웨덴․네덜란드․스위스․포르투칼․베니스와 다른 수 많은 이탈리아인과 교황을 대표하여 모였다. 신성로마제국은 1648년 구체화된 뮨스터와 오스나브르크의 두 조약에서 타결에 동의했다. 이것이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이다. 이 조약은 독일의 반 종교개혁에 대한 전반적인 저지를 의미했다. 이것은 독일의 모든 국가들에게 자기의 종교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하여 아욱스부르크 종교평화협약의 조항을 경신할 뿐만 아니라 루터교와 로마 카톨릭 외에 개혁교회도 인정을 받았다.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여러 주는 주권국과 독립국으로 인정되었다. 네덜란드는 포르투칼로부터 브라질과 인도네시아에 있는 전진기지를 소유할 권리를 얻었다. 프랑스는 알사스에 있어서 권리를 얻었다. 신성로마제국 안에서는 브란덴부르크가 막데부르크의 대주교구와 두 개의 주교구인 동부의 폼메른을 획득하고 바이에른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팔츠 일부와 전제후국의 한자리를 획득하여 8명의 선제후가 되었다.

  독일은 이 전쟁 중에 인구의 약 1/3이 죽었다. 독일은 물질적으로 파멸되고 정치적으로 작은 부분으로 분단되어 오랫동안 유럽문제에 있어서 어떤 역할도 못하였다.


III. 경건주의


1. 슈페너와 독일 경건주의의 발단


1) 경건주의의 발단에 대한 논쟁


- 최근의 경건주의 연구에 의하면 경건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에서 가장 의미있는 종교적인 갱신운동이며 경건운동이다(J. Wallmann과 M. Brecht).  개인의 신앙체험, 구원 그리고 실천이 있는 신앙, 경건의 실천이 경건주의적 신앙, 사상 그리고 행위의 중심이다.

- 17세기 초 거의 동시에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독일에서 경건주의의 역사가 유럽의 계몽주의와 함께 진행된다.  경건주의는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동유럽 그리고 북아메리카에 퍼졌다. 

- 독일에서 루터교 경건주의의 전성기는 슈페너와 프랑케가 활동했던 시기인 1675-1720년 사이이다.  실천적인 개혁운동으로서 경건주의는 독일에서 계몽주의와 유사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경건의 실천, 사회윤리적 자극, 교파 논쟁의 극복(그러나 로마 카톨릭에 대한 거리가 전보다 강화됨).  죄, 은혜 그리고 칭의에 대한 이해에서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는 구별이 된다.

- 확대된 의미에서 경건운동으로서 경건주의는 요한 아른트와 그에게서 나온 자극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생활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교리의 종교개혁을 보충

- 구체적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경건주의 운동으로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는 루터교에서 경건주의의 창시자이다.

- 두 가지 표식에서 경건주의는 정통주의와 태동하는 계몽주의와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교회에서 알곡회중으로서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ecclesiola in ecclesia)과 세상에서 교회를 위한 임박한 개선에 대한 희망, 즉 가까운 최후 심판 날의 기대로부터의 전향(J. Wallmann).

- 교회적인 경건주의는 민족교회(바벨론)로부터 탈퇴를 요구한 과격한 경건주의와 구별이 된다.

- 영국의 청교도적인 경건 서적과 중세 후기의 신비주의와 16,17세기의 신비적 영성주의는 경건주의의 뿌리에 속한다. 그러나 경건주의와 신비주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리츨(Albrecht Ritschl) (Geschichte des Pietismus)이 주장한 바는 오늘날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세상 도피적이고 신비적인 경향이 경건주의를 지배하지 않고 사회 윤리적인 자극이 지배하고 있다.


2) 필립야콥 슈페너 -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개략


- 슈페너의 생애에서 경건주의의 시작에 관여된 많은 자극들을 볼 수 있다.

- 1635년 엘사스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슈페너는 청교도주의적인 경건서적들과 요한 아른트의 ‘참 기독교에 대한 네 권의 책’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다.  철학(Justus Lipsius)과 자연과학에 있어서 그 당시의 지식에 대한 자신의 관심은 대학에 다니기 전부터 싹텄다.

-1651년부터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653년 철학석사 학위를 받음(토마스 홉즈에 대한 비판)

- 철학과 역사학의 공부 이후 1654-59년까지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함. 철저한 루터교 신학부의 중요한 교수들: 요한 슈미트(J. Schmidt), 제바스티안 슈미트(S. Schmidt), 단하우어(J.G. Dannhaner). 루터교 정통주의 교의학에 있어서 근본적인 교육.

- 바젤에서 히브리어를 더 배우고 제네바에서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에서 분파적인 경건주의의 창시자인 라바디(Jean de Labadie, 1610-1674)를 만난다.

- 로스토크(Rostock)의 신학자인 그로스게바우어(Th. Grobgebauer)의 개혁서 “황폐된 시온의 파수꾼의 소리”를 통해 슈페너는 민족교회의 부패를 접하게 되었다.

- 1663년부터 슈트라스부르크 대 교회의 부목사로 일했으며 1664년 신학 박사가 되었다(논문은 요한 계시록에 대한 것이다).

- 1666년 마인 강변의 프랑크푸르트에 루터교 목사단의 대표로 부임하였다.

- 바리새인의 거짓 의에 관한 설교(1669) 이후 진실한 기독교인의 모임이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1670년 프랑크푸르트의 콜레기움 피에타티스가 생기다.  경건주의는 이것으로 교회의 개혁으로서 첫 발을 내디딘다.  프랑크푸르트의 콜레게움 피에타티스(Collegium Pietatis)의 주동자는 법률가인 슈츠(J. J. Schüz)이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모임에 라바디의 사상(교회 밖의 작은 교회, ecclesiola extra ecclesiam)의 주요 중개자이다.  1675년부터 소위 잘호프 경건주의자들이 모이다.  이들은 후에 분리하여 나갔다. 

- 아른트(J. Arndt)의 복음서 설교집-신판의 서문으로 1675년 ‘경건한 소원들’이 또는 ‘참 루터교회의 하나님께 합당한 개선을 진심으로 요망’이 나온다. 이것은 후에 별권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은 소위 경건주의의 프로그램 책이다.

- 1686-1691년까지 슈페너는 선제후 게옥 3세의 궁이 있는 드레스덴에서 궁정 수석 설교자였다.  성인과 어린이들에게 공개적인 교리문답 교육을 통한 개혁의 노력들. 라이프치히와 함부르크에서 루터교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운동 사이의 논쟁들.  슈페너와 선제후 게옥 3세 사이의 긴장들.

- 1691-1705년 슈페너는 베를린의 교회 협의회 위원과 니콜라이 교회의 감독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교회에 영향을 끼치는 최고봉에 도달했다.  광범위한 서신 교환.  1694년 잘레 강변의 할레에 프로이센의 개혁적인 대학이 세워짐.  이 대학은 슈페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에 특히 영향을 받았다. 

-1705년 슈페너는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세상을 떠났다.


경건한 소원들(Pia desideria) - 경건주의의 프로그램서


- 이 책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교회의 세 계층의 부패된 상태에 대한 진단(지배층, 성직자와 일반 교인들)

2. 예측: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성서적인 약속에 근거한 지상의 교회에 대한 더 나은 시대의    희망(유대인 선교와 교황권의 멸망)

3. 교회의 개혁을 위한 6가지 프로그램

  1) 성서를 열심히 읽는 것과 교회의 공예배 이외에 성서를 공부하는 모임을 만드는 일(기       도회 모임 제안)

  2) 신자들의 만인 제사장직의 실현

  3) 기독교 신앙은 이론보다는 실천에 관한 것이다.

  4) 신앙적인 논쟁은 필요한 경우로만 제한 한다.

  5) 교회 개혁의 핵심으로서의 신학 교육의 개혁. 체험있는 신앙은 배운 지식보다 중요하       다.

  6) 설교는 신앙의 촉진과 열매를 위해 쓰여져야 하지, 설교자의 허영과 학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3) 슈페너 신학의 개요


- 슈페너의 신학은 특히 그의 설교집에 나타나 있다(복음적 신앙교리, 1688, 일년간 설교한 것의 모음). 근본은 종교개혁적인 칭의론이다. 슈페너는 이것을 무엇보다도 중생의 개념에서 요약한다. 그는 중생을 성결과 구별하였다. 슈페너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중생을 조건으로,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결을 믿음의 성장을 위한 근본으로서 이해한다. 경건의 실천은 이 세상에서 이룰 수 없는 완전에 이르고자 하는 여행이다. 슈페너의 교회관(ecclesiola in ecclesia)은 중생과 성결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이미 거듭난 기독교인의 개선을 강조하고 있다. 루터교의 칭의론에 대한 고수와 신비적인 영성주의로부터 선을 그은 것은 확실히 칭의에서 시대의 요청으로 성결을 강조하는 바를 옮겼음을 나타내고 있다.

  루터와 아른트에 기반을 두고 있는 슈페너의 개혁을 위한 제안들은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루터교 정통주의에 비해 새로운 것: 지상의 교회를 위한 더 나은 시대들의 희망(온건한 천년왕국설)과 고린도전서 14장에 근거한 사도시대적인 교회모임의 재정비. 1676년부터 슈페너는 “에클레시올라 인 에클레시아”(ecclesiola in ecclesia)라는 형태로 자신의 교회개혁지침을 요약하였다. 그는 경건하지 않은 대다수의 신앙 향상과 촉진을 통하여 교회의 개혁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경건한 사람들의 모임과 촉진을 통해 기대한다.


2. 아욱스트 헤르만 프랑케(1663-1727)와 할레의 경건주의


1) 프랑케의 생애와 업적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는 1663년 3월 22일 법률가의 아들로 뤼벡에서 태어났다. 프랑케가 태어난지 3년 후 그의 부친은 작센-고타(Sachsen-Gotha)의 에른스트 信公(Herzog Ernst d. Fromme)의 신하가 되었다. 그의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프랑케는 고타에서 자신의 훗날의 개혁 프로젝트에 대한 자극을 받았었다. 에른스트 신공은 그의 재상인 제켄도르프(Veit Ludwig von Seckendorff, 1626-1692)와 함께 30년 전쟁(1618-48)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는데 매진하였다. 이 두 사람은 종파간에 있는 증오의 극복과 어린이 교육의 개선에서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위한 중요한 실마리를 인식하였다.

   프랑케는 유명한 고타 고등학교(Gothaer Gymnasium)를 졸업하고 16세에 에어푸르트(Erfurt)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이 대학교에서 별로 만족을 얻지 못하고 키일 대학교(Universität Kiel)로 옮겼다. 키일 대학교에서 그는 특히 교회사가이며 실천신학자인 코르트홀트(Christian Kortholt, 1632-1694)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프랑케는 외삼촌이 설립한 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공부했다. 이 재단의 장학금은 학자가 되거나 성직자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지급되었다. 조카의 영적인 발전과 모든 행동에 대해 만족을 갖지 못한 그의 외삼촌은 1682년 더 이상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프랑케는 키일 대학교를 그만두고 함부르크에 있는 유명한 오리엔탈 학자인 에드차르두스(Esdras Edzardus, 1629-1708)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운 후 패배한 학생으로 고타에 돌아왔다. 2년 동안 집에서 공부하면서 보냈는데 경제적인 어려움이 그를 압박했다. 마침내 어느 학생에게 히브리어를 개인교수하기 위해 1684년 라이프치히에 갔다. 그곳에서 프랑케와 이 학생은 슈페너의 사위이며 신학교수인 아담 레헨베르크(Adam Rechenberg)의 집에서 살았다. 프랑케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여 1685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철학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것으로 성서에 대한 언어학적이고 성서주석 강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프랑케에게 있어서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에 대한 몰입은 정적과 은거에서 내적인 정화에 대한 욕구를 강화하였다. 1687년 프랑케는 회심 이전에 스페인의 신비주의자인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 1628-1696/97)를 알게 되었다. 프랑케는 라이프치히의 루터교 정통주의자의 동의 아래 몰리노스의 몇 개의 글들을 이탈리아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프랑케는 몰리노스의 입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나 겸손의 실천, 참회를 받는 신부를 위한 조언, 하나님께 가는 유일한 길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상 그리고 의심에 대한 조언의 체험을 배척할 수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성서에 근거하고 있고 교리에 위반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프랑케는 파울 안톤(Paul Anton)과 함께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콜레기움 필로-비블리쿰’(Collegium philo-biblicum)을 만들었다. 이것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의 젊은 석사들의 모임으로 매주 모여 구약과 신약의 한 장을 해석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 모임은 매우 주목을 받았다. 왜냐하면 당시 대학교에서는 단지 교리적이고 논쟁적인 신학 강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행해진 성서해석은 엄청난 학생들을 불러모았으나 또한 프랑케에게 내적인 위기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1687년 가을 뤼네부르크(Lüneburg)에서 이 위기는 일어났다. 이것은 학문과 경건, 자신의 더 존귀한 영광에 대한 학문의 현존 혹은 이웃에 대한 의무에 있어서의 삶 가운데 결정을 해야할 문제였다.

   라이프치히에서 학문적인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프랑케는 1687년 다시 외삼촌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뤼네부르크에 있는 잔드하겐(Caspar Hermann Sandhagen) 감독에게서 성서 해석을 교수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프랑케는 외삼촌의 명령을 기도의 응답으로 여겼다. 왜냐하면 뤼네부르크에서 그는 내적 정화에 대한 필요한 안식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이 도시에 있을 때 그는 요 20:311)에 관한 설교를 부탁 받았다. 원래 그는 살아있고 자신이 체험한 믿음과 죽었으며 가르침을 받은 믿음 사이의 차이에 관한 설교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본문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숙고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내적인 신앙의 확신이 결핍되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는 기독교인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한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탈무드를 그렇게 생각하고 터키인들은 코란을 그렇게 생각한다. 그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없는지를 누가 알 수 있는가? 불확실함은 점점 커져가고 마침내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었다. 전적인 불확실함의 상황 가운데 공허함과 이제 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무의미함이 그에게 엄습해왔다. 높은 망루에서 전 도시를 관망하는 어떤 사람 앞에 있는 것처럼 자신의 전 과정이 그의 앞에 놓여졌다. 의심은 점점 커져갔다. 프랑케는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나 더 이상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다. 설교를 3일 앞두고 마침내 변화가 일어났다. 가득한 행복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확신이 섰다. “바로 나의 모든 의심은 사라져 버렸다.”

   프랑케는 1687년 뤼네부르크에서 있었던 자신의 유명한 회심의 체험을 1690/91년에 기록해 놓았다. 그를 무신론적인 회의론자로 만들었던 이성은 다시 신앙에 대한 시녀가 되었다. 루터의 로마서 서문의 글로 프랑케는 이 “내적인 거듭남”을 서술하였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게 하며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 기질, 감각 그리고 모든 힘에서부터 전혀 다른 인간으로 만든다.”이런 점에서 쿠르트 알란트(Kurt Aland)는 프랑케의 회심을 루터와 비교하고 있다. 즉 신앙의 본질을 루터의 로마서 서문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그의 안에서 타오르는 경건과 학문 사이의 갈등이 이제 실천적인 기독교에 근거하여 결정되었다. 그는 세상이 인정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가치를 두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게 “냄새나는 분뇨 웅덩이”로서 나타났다. 새롭게 얻은 내적인 독립과 확신이 그에게 반박을 제기하고, 적대 관계를 견디어 내고 박해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데퍼만(K. Deppermann)은 프랑케의 뤼네부르크의 회심을 세 가지 특징으로 말하고 있다:

① 프랑케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루터처럼 죄의 용서에 대한 체험이 아니라 무신론적인 의혹으로부터의 승리였다. 의혹은 무엇보다도 세 개의 대표적인 유일신론적인 종교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되었다.

② 의심의 극복은 논리적인 것이 최종방법이 아니라 더 이상의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서적인 체험에서 찾은 것이다. 프랑케가 계몽주의의 자연신학에 대한 통로를 결코 발견하지 못하였음은 이것과 확실하게 연관되어 있다. 자연신학은 그에게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③ 신앙의 확신에 대한 체험은 계속되는 삶의 방식에 유효한 결론을 주었다. 이웃에 대한 실제적인 봉사는 이제 프랑케에게 있어서 자신의 명성을 위한 학문적인 성과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뤼네부르크에서 회심을 체험한 이후 프랑케는 함부르크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슈페너의 친구 중의 한 사람인 요한 빈클러(Johann Winckler, 1642-1705) 목사가 세운 자선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쳤다. 이것은 그의 외삼촌을 다시 노하게 했다. 그는 이러한 일을 비합리적인 광신의 표시로 여겼다. 빈클러의 교육에 대한 자극들은 프랑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난다. 함부르크에 있을 때 프랑케는 드레스덴에 있는 슈페너에게서 두 달 동안 지냈다 (1689년 1월/2월). 프랑케와 슈페너는 긴밀한 우정을 맺었다. 1689년 2월 프랑케는 라이프치히로 돌아왔다.

   바로 프랑케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성서 주석 강의를 맡았다. 그리고 그의 새로운 정신은 즉시 확실히 나타났다. 교리적이고 신학 논쟁적인 강의 시간은 이제 모든 학부의 학생들을 위한 부흥의 시간이 되었다. 또한 도시에 있는 수공업자들과 시민들도 청강을 하였다. 수십 개의 소그룹과 기도 모임이 생겨났다. 교수들 스스로 조직적인 학술 연구, 학문의 활기찬 활동의 종말로 대학교의 몰락을 두려워했다. 물론 여기에 상처받은 자부심과 수업료의 감소도 한 몫을 하였다! 수공업자들은 물론 여자들도 신분이 높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소그룹에 참여하였다. 왜냐하면 기도 모임 참석자들은 일반적으로 공 예배를 무시하거나 꺼렸기 때문에, 이 새로운 운동은 라이프치히에 있는 목사들과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 운동은 학생들이 목회적인 차원의 환자심방을 했을 때에 그들의 활동 그룹 내에서 갈등을 겪었다. 정통주의자들은 새로운 경건운동을 “경건주의자”라는 별명을 붙였다.

   1690년 라이프치히의 소요가 일어났다. 슈페너의 프랑크푸르트 ‘콜레기아 피에타티스’는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콜레기아 비블리카’가 되었다. 프랑케는 법적으로 이 일에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했다. 라이프치히 대학교 신학부는 1690년 3월 프랑케에게 모든 성서 주석 강의를 금했지만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대단한 소요가 대학교에서 일어났으며 마침내 유명한 법률가인 토마시우스(Christian Thomasius)가 법률고문으로 상담하게 되었다. 법적인 고려에서 이 위대한 계몽주의자는 교황청 같은 루터교 신학부에 완전히 냉소와 경멸을 퍼부었다. 그러나 토마시우스의 평가서는 프랑케를 이롭게 하기보다는 더 어렵게 했다. 왜냐하면 그가 드레스덴의 궁전으로부터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슈페너는 작센의 선제후에게 광범위한 평가서를 통해 라이프치히의 경건주의를 후원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샤데(Johann Caspar Schade, 1666-1698)와 프랑케의 친구들은 라이프치히에서 추방을 당했다. 선제후의 정부는 1690년 3월 10일 라이프치히에서 기도 모임을 금지했다. 라이프치히 사건에서 비로소 경건주의 운동이 전 독일에서 루터교 정통주의에 대해 날카롭고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이 되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신학부는 라이프치히 대학교 동료들과 더불어 경건주의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전까지 슈페너의 개혁 제안들은 광범위하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었다. 이제 슈페너와 프랑케는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의 파괴자로 보였다. 물론 이것은 경건주의자들을 토마스 뮨처와 동일 선상에 놓은 것이었다.

   프랑케는 라이프치히를 떠나 에어푸르트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드레스덴에 있는 슈페너처럼 프랑케도 에어푸르트에서 자신의 설교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어린이와 성인을 위한 교리문답 교육을 실시하였다. 여러 교회에서 사람들이 경건의 모임에 참석했다. 교구에서는 이 일을 등한시하고 있었다. 프랑케가 에어푸르트 대학교에서 자신의 강의에서 몇 명의 동료들과 성공적으로 경쟁하였을 때,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기독자의 완전, 직통 계시에 대한 신앙 그리고 선행의인과 관련하여 다시 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프랑케는 결국 얼마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에어푸르트를 1691년 10월 14일 떠났다.

   이제 슈페너는 프랑케를 구하는데 관여해야 했다. 1691년 늦가을 프랑케는 베를린에 있는 슈페너에게 머물었다. 당시 슈페너는 드레스덴의 궁전 수석 설교자에서 바로 베를린의 교회 평정관이면서 니콜라이 교회의 감독교구장 이었다. 당시 베를린의 궁전에서는 할레에 새로운 대학교를 세울 계획을 하고 있었다. 슈페너는 프랑케를 정치가들에게 소개를 시켰으며, 프랑케가 이 새로운 대학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베를린에서는 할레에 세워지는 새 대학교를 통해 엄격한 루터교적인 대학교인 비텐베르크와 라이프치히에 대한 정신적인 견제를 이룰 수 있을 것을 믿었다. 이미 비텐베르크와 라이프치히에서 사람들은 1613년부터 브란덴부르크의 왕실이 고백한 칼빈주의와 투쟁했다. 할레 대학교의 설립으로 루터교 내에 관용 정신이 확산되기를 기대했으며, 그리하여 경건주의자들을 할레 대학교의 교수로 초빙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루터교와 칼빈주의 사이의 교리적인 차이는 어떤 본질적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믿음으로 거듭난 것이 제일 중요했다.

   할레의 경건주의의 활동은 “인간의 변화를 통한 세상의 변화”(M. Schmidt)라는 표어로 요약될 수 있다.


2) 프랑케 신학의 개요


  프랑케 신학 또한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과 죄의 깊은 이해를 강조하는 루터의 전통에 서 있다. 프랑케에게 있어서 특히 구원사실의 존재적인 관계는 특히 개인이 중요한 것이다. 회개의 투쟁과 일회적이고 증거할 수 있는 회심의 강조를 통하여 루터적인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사실을 관철할 수 없는 인간론적이고 심리학적인 관찰방법이 나타난다. 이것은 루터 신학의 본질적인 것에 강조의 옮김을 뜻한다.


3. 고트프리트 아르놀트(1666-1714)와 신비적 영성주의의 신학


1) 고트프리트 아르놀트(Gottfried Arnold)


  아르놀트에게서 신비적 영성주의가 경건주의에 미친 영향이 보여지고 있다. 슈페너와의 접촉외에 아르놀트는 일찌기 급진적 경건주의적으로 교회에 대해 비판하였다(바벨론의 만가, Babels Grablied).

  아르놀트의 교회 역사철학적인 두 권의 중요한 책: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공동체들의 첫번째 사랑’(Die erste Libe Gemeinden Jesu Christi, 1696), ‘비당파적인 교회와 이단의 역사’(Unparteische Kirchen- und Ketzerhistorie, 1699/1700).

이미 첫번째 작품에서 아르놀트는 소위 말하는 타락 이론(Verfallstheorie)을 적용하였다: 믿음과 사랑 안에서 서로 결속된 사람들의 참 교회는 십자가와 박해 아래 있으며 초대 기독교 이후 점점 더 많이 세상에 빠졌다.

  ‘비당파적인 교회와 이단의 역사’에서 아르놀트는 이 타락사상을 교회사 전체에 적용시킨다. 기독교는 특히 콘스탄틴 황제 이후부터 더 많이 퇴보하였다. 그 이유: 교회가 국가와 동맹을 맺음. 교권주의와 교리의 억압. 이 타락은 교황의 교회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적인 교회들에게도 해당된다. 침묵하며 평화를 사랑하고 믿음으로 사는 기독교인들은 “장벽교회들” (Mauerkirchen)과 대조를 이루는 내적인 심령의 교회를 이룬다. 제도적인 교회로부터 이단자들과 이탈자들로 정죄를 받은 사람들이 이 기독교인들이지만, 이단자들이 단순히 성인들로 표현되지 않는다. 아르놀트에 있어서 척도는 “비당파적인”, 즉 종파들을 뛰어넘는 기독교의 개인주의적인 모습을 정당화 시키려는 관찰방법이다. 아르놀트는 교회사에 있어서 오류를 제기하였으며 기독교의 역사에서 평신도들과 여성들의 영향에 눈을 뜨게 하였다.

아르놀트의 이 작품은 계몽주의와 고전주의 시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경건주의 역사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2) 신비적인 영성주의


  교회 중심적인 경건주의의 역사에는 처음부터 또한 민족교회(Volkskirche)로부터 분리를 불러일으킨 교회 비판적인 경향들이 있다. 이 경향들의 사회적인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세상으로부터 단절하는 것과 결혼을 포기하는데 까지 이르는 극단의 개인주의와 같은 공동체 형성이 있다. 급진적인 경건주의자들은 제도뿐만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비판한다: 주요 표지들은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를 가진 천년왕국설적인 미래의 희망(계시록 20장), 의롭게 만듦의 의미에 있어서 칭의론에 대한 비판과 만인구원론, 즉 »영원한 지옥의 벌들«에 대한 부정.

이 급진적인 경건주의와 신비적 영성주의의 경계는 자주 뚜렷하지 않다.

- 급진적인 경건주의의 대표자들:

슈츠(J. J. Schütz, 1640-1690);

페터센(J.W. Petersen, 1649-1726)과 그의 부인(J. E. Petersen, geb. von und zu Merla, 1644-1721);

에파 폰 부틀러(Eva von Buttler, 1670-1721).

고트프리트 아르놀트도 결혼하기 전 그리고 루터교 목사로 목회하기 전에는 급진적인 경건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