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e Hui박사는 스코틀란드 에버딘대학에서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성령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그리고 성령론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워치만 니의 성령론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역자: 홀리죠이).
신약적 관점에서 본 워치만 니의 성령론
(The Pneumatology of Watchman Nee: A New Testament Perspective)
출처: Evangelical Quarterly, 75호 4권, 2003, 3-29
I. 서론
워치만 니(1903-72)는 중국교회 역사에 있어서 아주 영향력있는 지도자들 중의 한 명이다. 그는 "the Little Flock", 혹은 "the Local Church"라는 중국토종교회를 설립했는데, 계속 확장되고 있는 추세이다. 공산당이 중국본토를 차지하게 되는 1949년에 이르러서는 이 운동은 7만명의 신도가 있었다. Leslie T.Lyall이 중국내지선교회(the China Inland Mission)에 있는 중국기독교지도자들에 대한 책을 썼을 때, 세 인물을 뽑아서 그들을 다윗왕국의 세 장수들에게 비교하였다(Three of China's Mighty Men, London:OMF Books, 1973, 9-10).워치만는 이들 중의 한 명이었는데, '통찰력의 인물"이라고 불리워졌다(다른 두 인물들은, '겸손의 인물'인 상해의 Yang Shao-t'ang of Shansi, '철의 인물'인 북경의 Wan g Ming-dao).
중국교회지도자들 중에서 워치만 니는 유별나게도 중국기독교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영향력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그의 책들 중에서 어떤 것들(특별히 The Normal Christian Life, Fort Washington: Christian Literature Crusade, 1958 같은 책)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서 수만부씩 팔렸다. Dana Roberts는 말하기를, '인쇄된 매체들을 통해서 그의 책들은 복음주의운동권 내에서 성경해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였다(Understanding Watchman Nee, Plainfield: Haven Books, 1980, ix). 니의 신학적 용어의 관점에서, 중국교회에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의 면에서, 그리고 중국교회의 신학적 측면에서, 학자들은 지금까지 니의 인간론 혹은 교회론에 연구를 치중해 왔습니다. 그의 성령론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본고에서는 신약연구의 관점에서 니의 성령론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II. 워치만 니의 성령론
니는 믿기를,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에서 성령의 역사가 의미심장할 정도로(significantly) 차이가 있다고 한다(Nee, Collected Works, 21:17-19,28,32-33,105; Communion,49,79-83). 그는 구약에서는 성령이 사람들 위에 강림한다고만 말하고 신약에서는 성령이 사람들 위에('upon', epi) 강림하는 것만 아니라 사람들 속에('in', en) 거하시려고 오신다고도 말한다고 생각한다. 니에게 있어서 성령의 외적 강림은 능력과 사역에 관계되는 것이고, 성령의 내적 임재는 기독교인의 매일의 삶, 성화, 거룩과 관계된다. 그래서 성령의 두 가지 종류의 오심을 구별해야 한다고 한다. 내적인 오심은 새생명과 관계되고, 외적인 오심은 그리스도인의 봉사와 관계된다.
니는 계속해서 이 두 가지 성령의 오심에 대해서 상술한다. 예수의 첫제자들의 예를 인용한다. 그 제자들은 두가지 종류의 성령의 선물들을 받는데, 하나는 예수 자신으로부터 받는 것이고 다른 것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받는 것이다(Nee, Collected Works, 17:403-23,21:19,27-29,106-12,115-16; Communion,49-67,79-83;Life, 113-40). 첫번째 선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밤, 4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에게 숨을 쉬시게 될 때 성령을 그들이 받은 그 선물이다(요20:22). 이것은 그가 이전에 보혜사가 오시리라고 했던 그 약속의 성취로서의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다(14:16-17, 15:26,16:13, cf.7:39). 성령의 두번째 선물은 오순절날에 주어지는 것인데(행2:1-42), 구약성경 요엘서2:28-32에서 약속하신 그 약속의 성취로서의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다. 니는 이 두가지 선물이 혼동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요20:22는 요14-16장의 맥락에서 읽혀져야 하며, 행2:1-42는 눅24:49와 행1:4-8의 맥락에서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순절날의 선물은 신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외적 오심이라면, 부활절의 선물은 제자들의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한 성령의 내적 임재와 관계된다.
요한복음서의 부활 첫날 저녁시에 주어진 선물은 단순히 새로운 생명, 혹은 중생의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니에게 있어서, 예수의 제자들은 이미 중생하였고 새생명을 가지고 있었다. 요한적인 선물은 그러므로 새로운 생명이 아니고, 오히려 요한복음10:10에서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풍성한 생명의 종류이다. 이 풍성한 생명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며, 성령이 전적으로 통제하는 것의 결과이며 우리들 삶의 주가 되도록 하는 것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니는 영향력으로서의 성령과 하나의 인격으로서의 성령을 구분하고 있다(Nee, Collected Works, 17:416-17,21:24-26,32,124-25;Communion,37-43;Life,129-33). 어떤 사람이 중생할 때에 어떤 영향력으로서의 성령을 경험하게 된다. 이 때에, 신자는 새로운 생명,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연약하고 때로는 실패하며 죄와 육체를 정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신자들이 성령의 인격되심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을 성령의 통제에 내어맡기지 못하는 한, 그들의 옛본성은 그들의 새로운 본성을 계속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 단계에 있어서 신자들에게 결핍된 것은, 영적인 생명이 아니라, 건강하고 지속적인 영적 생활이다. 이런 일은, 신자들이 성령이 인격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성령이 그들의 삶에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의 통제에 자신을 맡기게 될 때에 가능하게된다. 니에 의하면, 신자들이 이런 결정적인 단계를 거치게 될 때,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며, 성숙하고 풍성한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니는 또 다른 구분을 한다. 그는 우리가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filled with the Holy Spirit,눅1:15,41,67, 행2:4,4:8,31,9:17,13:9)와 "성령으로 충만한 것"(full of the Holy Spirit, 눅4:1, 행6:3,5,7:55,11:24,13:52, 엡5:18) 사이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Nee, Collected Works, 21:30-32). 이 둘은 의미심장할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들이다. 한 편으로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filled) 은 단지 단기간에만 일어나는 어떤 것이다. 엘리자벳(눅1:41), 스가랴(1:67), 그리고 사도들(행2:4,4:8,31,9:17)은 예언, 증거,복음전도, 설교와 같은 사역의 특별한 수행을 하기 위해서 단기간으로 능력을 덧입게 되었다. 반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은 좀 더 장기간에 걸쳐서 일어나게 되는 그 무엇이다. 예수님(눅4:1), 스테판(행6:5), 바나바(11:24),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제자들(행13:52)은 짧은 기간 동안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보통때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결론적으로,
'(지방)교회와 논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마지막 글이 되기를 바랍니다.-지방교회의 기독교에 대한 입장 (0) | 2006.03.25 |
---|---|
[스크랩] 신약적 관점에서 본 워치만 니의 성령론(Archie Hui박사) (0) | 2006.03.22 |
[스크랩] (4)창2:7-생명들의 기운들...고로 혼적인 생명, 영적인 생명? (0) | 2006.03.08 |
[스크랩] (3)창세기2장7절-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가? (0) | 2006.03.04 |
[스크랩] (1)데살로니가전서5장23절이 과연 삼분설을 지지하는가? (0) | 2006.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