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2장7절은 과연 삼분설을 주장하는가?
워치만 니는 자신의 영혼몸 삼분설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제는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언급한다. 창세기2장7절에서 언급되는 표현들이 그의 삼분설을 지지해 준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창세기 2장7절은 이렇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a living soul)이 된지라”.
워치만 니는, 이 구절에 나오는 “생기”가 “사람의 영”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몸”과 접촉을 하자, “혼”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해석은 참으로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이 구절에 나오는 “생령”, 혹은 “생혼”(a living soul)은 히브리 원어로는 “네페쉬 하야”라고 한다. 이 “네페쉬 하야”라는 말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생물들에게 적용되는 표현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구절이 바로 창세기2장의 19절이다. 그 구절은 아담이 자기 앞으로 오는 모든 생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장면에 대한 묘사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네페쉬 하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이 구절에 나오는 “생물”들이 히브리 원어로 하자면 바로 아담이 “산혼”(a living soul)이 되었다고 하는 바로 그 “네페쉬 하야”이다. 그러니, “네페쉬 하야”는, 워치만 니가 오해하고 있는 식의, “영”과 “몸”이 접촉함으로 인하여 생겨나게 된 그런 류의 “산 혼”이 아니다. 모든 호흡을 가진 생물들을 일컫는 표현인 셈일 뿐이다. 이것을 확인하려면 이미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물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를 검토해 보면 분명해 진다. 1장20절, 21절, 24절에 나오는 “생물”들이 모두 “네페쉬 하야”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워치만 니가 말하는 식으로, “영”이 “몸”과 접촉함으로 인해서 생겨난 것이 “혼”이라는 이해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하나님의 “생기”가 “사람의 영”이 되었다는 식의 해석은 너무나도 위험하기까지 하다. 하나님의 생기로 인하여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의 이곳 저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에스겔이 보았던 환상의 골짜기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생기”가 사람의 “영”이 되었다는 것은, 굉장히 이교적이다. 플라톤철학에서나 가능한 생각이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유출설”을 주장한다. 그런 주장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워치만 니가 그런 오해를 하는 것은, “네페쉬”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네페쉬”를 “혼”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서 온 것이다. 그렇게 워치만 니의 잘못된 해석을 따르게 되면, 모든 “생물”들도 “혼”을 가진 존재들이 된다. 그 “혼”들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워치만 니의 주장을 따르게 되면, “혼”이란, “영”과 “몸”의 결합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생물”들도 또한 “영”을 가진 존재들이 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 바로 워치만 니의 성경해석이라는 것이다.
창세기2장7절은, 워치만 니가 보는 것처럼, 영혼몸의 삼분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단지, 인간이 하나님의 생기로 인하여 “살아있는 존재”(a living being)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네페쉬 하야”로 표현하면서 다른 “생물”들과 차이점을 두지 않는 것에 성경기록의 비밀한 뜻이 있다. 인간이란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해서 다른 “생물”과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다. 다른 “생물”들이 창조될 때에도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지 않으셨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 그것 자체가 “생기”를 불어넣으신 것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말씀”하시기 위해서는 “생기”,”호흡”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인간이 특별한 존재인 것은, 그가 “영”이 주어졌다든가, “혼”이 되었다든가, 아니면 그 영이나 혼의 어떤 특별한 기능, 곧 이성이나 인격 같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 속에 이미 개진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이 인간의 내부 안에 있는 그 어떤 기능이나 구조, 어떤 역할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성경을 오해하게 된다. 워치만 니도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구조나 기능,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의해서 갖게 되는 그 관계에 의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될 수 있는 어떤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야만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런 이해가 없는 워치만 니의 인간이해는 철저한 왜곡과 오해를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그 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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