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만 니가 데살로니가전서5장23절을 언급하면서 주장하는 말이 다음과 같다.
“영과 혼을 분리하는 것이 그처럼 중요한 문제인가? 영혼의 분류여부는 신자의 영적 생활을 엄청나게 좌우하기 때문에 이는 극히 중요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영역 영역의 한계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영적인 생활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이해가 없이 어떻게 성장이 가능하겠는가?”(정동섭역, 1권 34쪽).
결국 자신의 주장을 따라서 삼분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적 생활”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성장도 없다는 것이다. 자기의 삼분설만이 “영적 생활”의 기초이고 보장이라는 것이다. 참 어처구니 없는 말이다.
성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없이 어떻게 영적인 생활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그의 <영적>인 사람의 <영적> 생활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영적>인 것은 결코 성경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을 그가 그의 삼분설을 주장하기 위해서 두 번째로 인용하고 있는 성경구절을 살펴봄으로 지적하도록 하겠다.
그것은 바로 히브리서4장12절 말씀이다. 그 구절은 이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 구절에 나오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표현에 근거해서, 그가 “따라서 인간(사람)은 세부분의 구성체임이 명백하다”(정동섭역, 1권36쪽)고 한다.
무엇 보다도 먼저 질문이 앞선다. 바울은 지금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라는 표현을 통해서 “인간은 세 부분의 구성체임”을 보여주고 있는가? “혼과 영”을 찔러 쪼개서 나눠야 한다면, 왜 “관절과 골수”도 찔러 쪼개어 나눠서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주장하지 않는가? 혼과 영을 쪼개서 나누면 <영적인 사람>이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면 <영적인 사람>인 아닌가?
삼분설에 자기 주장을 끼워맞추려고 하다보니 말씀의 한 부분을 무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그가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영적인 사람>인가 의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구절은, <혼과 영>, <관절과 골수>로 나눠져 있어서, 오히려 이분설을 인정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바울은 관심은 삼분설, 이분설 등의 학설을 입증하는데 주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작용하는 그 역사의 강력함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의 빛추는 그 조명 앞에서 우리 인간의 어떤 부분도 감추어질 수 없이 드러낸다는 것을 강조한다. <혼과 영 및 관절과 골수>를 언급한 뒤에 그가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분명하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은 워치만 니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워치만 니는 자신의 이론 속에 자신을 감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점이 그러한지 아닌지는 좀 더 그의 책을 읽어가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그가 해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중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지방)교회와 논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3)창세기2장7절-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가? (0) | 2006.03.04 |
---|---|
[스크랩] (1)데살로니가전서5장23절이 과연 삼분설을 지지하는가? (0) | 2006.03.04 |
[스크랩] Re:워치만 니를 경계함 (0) | 2006.02.25 |
[스크랩] Re:"워치만 니의 비밀" (0) | 2006.02.24 |
[스크랩] 워치만 니를 경계함 (0) | 2006.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