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회 논쟁들

조선일보는 진정한 1등 정신을 회복하라

baromi 2005. 12. 23. 17:53
조선일보는 진정한 1등 정신을 회복하라
MBC는 조선일보의 상대적 준거가 아니다
엘리트정신에 걸맞는 매너와 품격 되찾아야
[ 오태민 / 2005-12-19 13:11 ] 조회 : 831 
90년대 20대 대학생으로서 조선일보에 대해 호감을 갖는다는 것은 매우 튀는 일이 분명했지만, 총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언론의 취재대상이 되어야 했던 필자는 스스로의 경험에 진솔한 것이 동년배들로부터의 인정보다 중요했기에 그럴 수 있었다.

조선일보를 빼고는 모든 신문이 오보를 가벼이 여겼다. TV는 필자의 인터뷰 화면에 맥주박스가 쌓인 출처 모를 화면을 편집하는 악질적인 거짓을 방송하므로 써 학생회가 맥주를 판다는 호된 비판을 들어야 했다. 가난한 진보적 순례자를 자처했던 한계레 기자는 학생회실에 제 집처럼 자리 잡고 앉아 전화와 물품을 자기 마음대로 쓰면서도 정작 중요한 기사는 취재없이 데스크에서 써 갈겼다. 오직, 조선만이 조선일보만이 직접 취재 후 전화 확인 절차를 거친 후 기사를 보도했다.

아주 가까운 지인은 김대중 정부시절 미 대사관에서 통역을 하면서 조선일보에 대해 필자와 비슷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는 환란위기 직후였고 미국에 대한 국민의 대중적 정서가 좋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기자는 영어를 할 줄 알면서도 대사나, 미 초청인사의 중요한 기자회견을 기사작성 후 다시 통역에게 컨펌을 받았다. 그 외의 모든 언론은 통역의 한국어 번역에 자기 나름대로의 오역과 판단을 보태 자신있게 신문, 방송에 내보냈다. 지인은 그 기자들의 무식하고도 악의적인 오역 덕분에 통역오류의 누명을 쓰고 대사관으로부터 자체 조사를 받기도 했고, 이런 스트레스는 지인으로 하여금 통역일 자체를 그만두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까지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진보로 규정하던 이 지인은 미 대사관이 언론 피알(Public Relation)도구로 많이 사용하는 미국연수(사실 공짜미국여행) 티켓을 얻기 위해 기자들이 어떤 행태를 보이는지를 보고는 같은 한국인으로써 부끄러울 정도였다고 한다. 반미적인 언론일수록 그 피알의 혜택을 많이 보는 것은 당연했다. 조선일보 기자의 고고한 엘리트주의는 한국 언론과 기자들의 이런 천박한 풍토 속에 논조에 대한 불만과는 상관없이 지인의 눈에 돋보였던 것이다.

겪어보고 조선일보를 칭찬하는 이들은 사실 그 논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일보의 1등 정신, 즉 엘리트정신 때문에 가능한 언론인으로서의 매너와 품격 때문이다. 각자의 경험에 솔직하다면 말이다.

그런 조선일보가 최근 아주 많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끝을 아직 속단할 수 없는 황우석 교수 사태에서 황 교수보다 혹은 한국과학계 더 나아가서는 국가 이미지가 받을 타격이 걱정되기에 앞서 조선일보가 걱정되는 것은 필자 혼자만의 기우는 아닐 것이다. 수 년전 정부와 일부 홍위병들의 조선에 대한 개떼 같은 공격에도 우리는 조선일보를 이렇게까지 걱정 하지는 않았다.

싸우다 보면, 그것도 비열한 적과 싸우다 보면 적과의 비교속에서만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함정에 빠지는 법이다. 그래서 싸우면서 닮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MBC처럼 공중파라는 막강한 공권력을 견제장치 없이 휘두르면서도 힘없는 진실의 사도인 양 하는 이들의 도덕성과 기자정신을 조선일보의 상대적 준거로 삼아서는 안 되었다. 싸우는 입장에서는 적의 기세를 꺾고 눌러 놓는게 중요하지만, 그런 개싸움을 신나게 하고 나니 정작 심사위원들이 채점하는 채조경기였던 것이다. ‘나는 K1이나 프라이드인줄 알았다’고 해도 속절없이 말린 것이다. 채점은 국민들이 한다.

조선일보는 1등주의와 엘리트주의로 다시 돌아가라. 적과의 비교 속에서 자신의 우월성을 찾는 이상 이는 진정한 의미의 엘리트주의도, 1등 주의도 아니다.

조선일보, 아니 우리 기성세대를 엘리트주의, 귀족주의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엘리트주의나 귀족주의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엘리트주의와 귀족주의가 섬세한 안목을 갖추지 않은 짝퉁일 때 어김없이 속물주의로 흐르는 것일 뿐이다.

취재대상의 진정한 잠재력이나 성과를 섬세한 안목으로 분별해 내지 못하는 엘리트주의는 출신학교, 현재 그 계통에서의 지위나 명성 같은 객관적인 라벨만을 갖고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림의 가치보다는 화가의 명성이나 가격표를 보고난 후에나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속물주의는 분명 안목없는 귀족주의의 짝퉁이다.

필자가 몸담은 계통에 관련한 비판을 하나 하고자 한다. 조선일보는 대입 논술과 관련 대대적인 사업을 시작하면서 필자를 놀라게 했다. ‘논술의 달인’이라는 시장의 천박한 마케팅용어를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표어에서 조선일보 1등주의의 속물성을 보았다. 만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술문제와 대학들의 채점행태를 주의 깊게 살폈다면 ‘논술의 달인’이라는 표현 자체가 매우 사기성이 짙은 마케팅 수사임을 어렵지 않게 알았을 것이다.

논술은 글쓰기 대회도(이런 이유로 많은 언론과 기자들이 관심이 있겠지만), 또 너저분한 배경지식을 머리에 넣어야 하는 퀴즈대회도 혹은 좌파니 우파니, 민족주의니 생태주의니 하는 정견을 피력해서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웅변대회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신문과 같은 대중적이고 일방적인 매체가 ‘논술시장의 달인’들을 앞세워 단기적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란 게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논술시장이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불안증을 이용해 호도하는 것에 맞서 사고력 훈련의 중요성을 피력하는 것이 조선일보다운 엘리트주의였다고 생각한다.

황우석 교수 사태에서 조선일보가 보여준 모습에 대해서는 첨언하지 않아도 조선일보는 나름대로 많은 고민 속에 있을 것이다. 이미 인터넷에서는 이 사건을 ‘조선일보 죽이기’의 좋은 재료로 활용하고 있다.

필자의 고언이, ‘이미, 칭찬이 독이 될 때 칭찬을 더하고, 비판이 필요 없을 때 비난을 더하는’ 저널리즘의 숙명적인 천박성을 반복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번 사건을 조선일보 문제로 만들려는 이들의 의도에 적극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라도 조선일보는 이 사건을 자기문제화할 필요가 있다.

성찰이야 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찰이야 말로 진정한 엘리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다. 조선일보는 이번 일을 계기로 진정한 의미의 ‘1등주의’를 회복하여 얼마 남지 않은 비지성적 수구집단과의 피할 수 없는 진검승부에서 사실과 지성의 편에선 날 벼린 칼이 될 것을 주문한다. 이것은 단순한 애독자 이상의, 아마도 대통령이 한겨레에 대해 갖고 있을 수준의 애정으로 보내는 간절한 고언이자 응원이다.

오태민 (명지외고 통합논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