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박창진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히6장과 관련하여)

baromi 2005. 9. 3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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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나는 박창진님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개념이 심히 의심스럽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인가 질문한다. 아마도 박창진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인가? 예를 들어, 회심하기 전의 사울이나 대제사장의 장인 안나스는 어떠한가? 빌라도의 뜰에서 십자가에 못박아 라고 외친 그 유대인들은 어떠한가? 신약성경이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구원받았다는 것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민족적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따라서 그들 모두가 일차적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인가? 그렇다면, 요한복음 8장 21-59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과 그의 하인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혹은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 엘루마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고 따라서 첫 구원을 받은 사람이었는가?

이런 질문과 관련하여 언약백성의 개념에 대하여 질문하고자 한다. 박창진님께서 이해하는 언약백성은 어떤 개념인가? 그리고 옛언약의 백성과 새언약의 백성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들은 동일한가? 구원과 관련하여 그들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옛언약의 백성과 새언약의 백성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은 동일한가 다른가? 나아가서 시대적으로 족장시대와 왕국시대와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또한 집합적 의미에서의 이스라엘백성과 하나님의 백성과 옛언약과 새언약의 백성이라는 개념과 개별적 의미에서의 이스라엘백성과 하나님의 백성과 옛언약과 새언약의 백성이라는 개념은 같은가 다른가? 그리고 그 각각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수많은 것들을 질문할 수 있지만 그만두기로 하자.


4. 박창진님은 히브리서의 수신자에 대한 나의 설명과 관련하여, 두 가지 주장을 한다.

첫째, 본문의 사람들이 잠시 교회에 들어와서 다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라는 것은 님의 결론에 입각한 것일 뿐입니다. 둘째 두 번째의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는 님과 같이 참된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도 더 깊은 살핌이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님이 세 번째로 언급한 이들과 동일한 사람들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주장은 그냥 넘어가자. 여기에서 두 번째 주장만 살펴보자.

가장 기본적으로 박창진님은 여전히 성경본문과 나의 지적을 잘 읽지 않고 있다. 내가 언급한 세 번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딱지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내가 언급한 세 번째의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죽은 행실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졌고 세례와 안수를 받았고 죽은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한데에는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가 다시 필요하지 않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에 이른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을 통해서 그들에게 구체적으로 구원받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그런 초보를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6장 4-6절의 사람들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지만 떨어져나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결코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5. 한편 박창진님은 “교회=알곡이라는 것은 저의 도식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확신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 16:18; 행 2:38; 행 13:48; 롬 1:6-7; 고전 12:13등을 인용하면서 여기에 가라지가 포함될까요 라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박창진님은 요일 2:19절을 언급하면서 “속하지 아니하였나니”라는 어구가 미완료로서 애초부터 우리-교회-에 속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고 주장한다. 그리고 박창진님은 교리적인가 성경적인가 가 중요하다고 하면서 앞서 언급한 성경구절들을 인용하면서 기존교리말고 성경적 근거를 제시해보라고 한다.

 

먼저 요일과 관련해서는 앞에서 이미 미완료에 대한 박창진님의 이해가 정확하지 않음을 밝혔다. 즉 요일2:19절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은 그들이 나갔을 때와 관련되지 “애초부터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박창진님 식의 의미는 포함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박창진님의 요구대로 교회에 알곡만 속하는가 아니면 가라지도 포함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는 성경구절을 언급하자: 마태복음 18장 15-17절 요한삼서 1장9-11절과 요한계시록 2장 18절-29절과 요한계시록 3장 1-6절 등이 있다. 이중에서 요한계시록 2장 18-29절만 살펴보자. 이 본문은 두아디라교회를 향한 말씀이다. 그 핵심은 두라디아교회에게 책망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두아디라교회가 용납한 일이다. 심지어 이 자칭 선지자 이세벨은 교회 내에서 주님의 종들을 가르쳐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다. 더욱이 이 여자는 회개할 기회를 받았지만 회개하기를 거절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를 심판하실 것이고 또한 고로 더불어 간음한 자들도 회개치 않으면 심판할 것이고 그의 자녀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이 본문에서는 계속해서 두아디라 교회 내에 있는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격려를 하면서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격려한다. 우리는 이 두아디라 교회 내에 있던 이세벨이나 그에게 유혹된 자들중에서 회개치 않는 자들과 이세벨의 자녀들을 알곡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가라지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들은 분명 교회 내에 있던 자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두아디라 교회에는 이세벨의 가르침에 유혹되지 않고 여전히 참된 믿음을 유지하였던 이들도 함께 있다. 그렇다면 두아디라교회=알곡인가?


또 가지 지적하는 것은 박창진님은 교회에 대한 나의 이해가 교회≠알곡이라고 주장한다. 이것 역시 나의 글과는 상관없는 박창진님 식의 이해이다. 교회에 대한 나의 이해를 도식화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외형적)교회= 알곡 +가라지. 두아디라교회에 적용하면, 두아디라교회 = 알곡+가라지


6. 계속해서 박창진님은 “땅에 대한 계시역사적인 이해”를 언급한다. 그러면서 계 21:1절을 들어 이 본문이 마지막 천국에 대한 묘사가 아니고, 주후 70년 이후의 교회 시대 곧 옛 언약은 완전히 폐하여진 후의 교회 시대의 시작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하면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옛 언약의 백성을 바다는 이방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이것은 구약성경에서의 상징적 의미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이런 해석을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런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솔찍히 황당한 해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만 언급하자. 계시록 21장 1절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라는 것은 "renewal"을 의미한다. 또한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로 번역된 και η θαλασσα ουκ εστιν ετι 라는 어구는 정확히 번역을 하면 “바다는 아직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옛 하늘과 옛 땅이 변화되어 질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과 그 과정 중에 바다는 아직은 있지 않았다(즉 과정이 좀더 진행되면 바다도 새로이 변화되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5절에 가면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기록한다(아마도 이 전체 과정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과정이 새롭게(renewal) 되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런 의미들을 박창진님의 해석에 적용하면 어찌되는가? 옛 언약의 백성들이 새롭게 변화되어 나타나고 이 과정 중에 이방인들은 아직은 새롭게 되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만물은????


뭐 어쨌든 이 부분은 우리의 논의의 핵심과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되기에 그냥 넘어가고 히브리서와 관련하여 박창진님이 주장하는 것을 살펴보자.

박창진님은 “히브리서에서 땅은 무시간적이고 무역사적인 물질명사가 아니라 이스라엘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옛 언약에 속하여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언약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맺는 합당한 채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새 언약의 법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고 가시와 엉겅퀴는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고 주장하고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고 있는 땅은 현재까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있는 상태로서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가능성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가능성입니다 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그들과 비교하여 더 낫다고 말씀되어지고 있는데, 그 두 가지 가능성에서 좋은 것을 취하게 되더라도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상태이기에 그들보다는 낫다고 이야기된다고 주장하면서 문법적으로 “더 나은 것들”이라는 어구가 복수라는 지적과 관련된 나의 질문에 응답하는 듯하다.

 

사실 상당히 황당한 느낌이 드는데, 이제까지 박창진님의 주장은 히 6:4-6절에서 언급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었는데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이고 따라서 이 구절은 성도의 견인에 대한 칼빈주의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구절이다 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옛언약에 속한 사람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영접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박창진님의 설명과 관련하여 우리의 논의에서 핵심적인 것과 관련된 질문만 하자: 옛언약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은 사람들인가 아닌가?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첫출발을 한 사람인가 하지 않은 사람인가? 그리스도인임과 구원을 받음이라는 것과 옛 언약에 속해 있다는 것은 어떤 본질적인 관계가 있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나의 응답은 새언약의 시대에 옛언약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옛언약에 속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출발을 한 사람들이거나 혹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한번 언급하지만 히 6:4-6절과 관련된 우리의 논의의 핵심은 “이 구절에 나타난 사람들이 이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출발한 사람들이냐 아니냐”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박창진님은 지금까지 이들은 이미 믿음을 가졌지만 다시 타락하여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이다는 주장을 하였고 따라서 칼빈주의의 성도의 견인에 대한 교리는 틀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령 박창진님의 주장처럼 히브리서가 언약의 중첩기에 있던 옛언약 백성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박창진님의 이런 주장은 오히려 본문이 성도의 견인의 부적절성을 보여준다는 처음주장과는 반대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박창진님 스스로도 밝히듯, 옛언약의 백성이라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느냐 가지지 않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구원이 결정되며 그들의 신분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하는 것은 박창진님은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가시와 엉겅퀴는 내지 않는 것이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히브리서 전체에 대한 논의와 히브리서 6장 4-6절에 대한 논의를 혼동한다. 물론 이것은 박창진님이 히브리서 전체의 수신자와 6장 4-6절에서 언급하는 그 사람들을 동일한 사람들로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나아가서 이러한 박창진님의 주장은 6장 4-6절의 앞뒤 문맥의 언급들만 살펴보아도 반박된다: 6:1-3; 6:9-10; 6장 17-20절 한군데만 인용하자: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니.


그리고 “더 나은 것들”이라는 어구가 복수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박창진님의 반론은 그 비교되는 대상이 “복을 받거나 불사름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 나은 것들"이라는 비교의 용어에서 복수가 사용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인듯 하다. 그러나 어법적으로 이런 설명은 불가능하다. 즉 “A는 좋은 것이고 B는 나쁜 것인데 C는 A와 B보다 훨씬 좋은 것이다”는 문장은 언어용법상 불가능한 문장이다. 더욱이 이미 언급하였듯 히브리서에서 더 나은 것들이라는 표현이 긍정적인 것들을 비교하여 사용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박창진님의 설명은 일차적으로 언어적으로 합당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박창진님의 설명이 대로라면, 복을 받거나 불사름을 당하는 것이라는 이 서로 대조되는 둘 모두보다 더 나은 것들은 무엇인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은 이 문맥에서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불사름을 당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데, “복을 받는다”와 “불사름을 당한다”는 것이 직접적으로 대조되는 것을 볼 때에는 복을 받는다는 것은 최종적 구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최종적 구원보다 더 나은 것은 무엇일까?


이사야서와 관련해서는 제발 히브리어 본문을 꼼꼼하게 한번 보라는 권고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ARTICLE

나의 반론에 대해서 박창진님께서 또다시 반론을 제시해 주셨다. 이에 대하여 설명과 함께 박창진님의 해석에 대한 반론을 제시한다. 바라기는 이번 글이 히브리서 6장과 관련하여 마지막 글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지적하였지만 제발 박창진님의 출신학교의 전통을 살려서 본문을 원문으로 올바로 충분히 숙고하고 글을 올리면 좋겠다.

 

1.  박창진님은 παραπεσοντας(떨어져나갔다)와 관련하여 요일 2:19절에서 미완료를 사용한 것을 지적하면서 “왜 미완료를 사용하지 않았는가” 질문하면서, "님의 결론에 따르면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이들이 교회에서 떨어져나갈 때에 요한사도는 미완료를 사용하여 애초부터 그들이 교회가 아니었다고 증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먼저 요일 2장 19절과 관련하여 박창진님은 헬라어 본문을 정확하게 살펴보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요일 2:19절을 살펴본다.

εξ ημων εξηλθαν αλλ' ουκ ησαν εξ ημων

         동직과능 3복         동직미능 3복

우리로부터 그들이 나갔지만 우리로부터 있지 않았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 주동사는 εξηλθαν(나갔다-과거) ησαν(있다-미완료)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미완료는 말하는 사람의 시점에서부터 과거의 시간에 발생하거나 진행중인 사건을 설명하는데, 언급된 다른 동사의 시상에 종속된다. 즉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사람의 시점에서 과거의 시점, 즉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간 그 시점을 가리킨다. 즉 요한사도는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박창진님의 말처럼 "애초부터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히브리서에서 παραπεσοντας(떨어져나갔다)은 요일에서 나오는 두 가지 언급 중에서 “나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즉 히브리서에서는 "그들이 우리에게 속해있지 않았다는 점"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박창진님의 질문은 요일본문을 철저하게 읽지 않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여전히 박창진님은 나의 글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며 또한 나의 글에 자신의 추측을 덧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박창진님은 "(Andere28)님의 결론에 따르면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부름을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부름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다"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박창진님의 이런 지적은 “하나님의 구원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자동적으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자신의 전제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의 주장은 "그 사람들은 그런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결국 교회에서 떠나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사람들이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부름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의 구원의 부름이라는 표현은 너무나 모호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복음을 들은 것이 구원의 부름인가? 아니면 특정한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 구원의 부름인가? 아니면 우리를 믿음에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내적인 효과적인 부름이 구원의 부름인가? 노파심에 다소 도식적으로나마 설명하면, 외적인 부름과 내적인 부름이다. 개혁주의에서는 외적인 부름만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수 없다고 믿는다. 외적인 부름과 더불어 내적인 부름-성령의 효과적인 부르심과 그리스도의 은혜의 적용과 그에 따른 결과-이 있어야지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 히브리서와 관련해서 보자면, 히 6:4-6절에 있는 사람들은 외적인 부름만을 받은 사람들이다. 아마도 이렇게 설명하면 박창진님은 교리를 적용한 것이라고 반박하면서 성경구절을 대라고 할듯하다. 한부분만 언급하면, 에베소서 1장 3-15절의 본문이다. 본문에 대한 자세한 주석은 하지 않는다.


2. 박창진님은 계속해서 “본문의 여러 표현들이 은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해석의 결론에 입각한 것이고 각 동사의 의미에 대하여서는 히브리서 자체의 표현법에 근거하여 밝혔다”고 주장한다. 과연 박창진님은 각 동사의 의미에 대하여 히브리서의 “각 동사 자체”에 근거하여 밝혔는가?(이것은 빚진자님의 글에도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나의 주장을 다시 한번 지적하자: 히브리서 6:4-6과 그 앞뒤 문맥에서는 단어 자체와 문맥, 그리고 히브리서 전체에서도 “비취임을 받고, 맛보고, 참예되어지고”등이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 것”을 직접적으로 의미하지 않는다. "하늘의 은사(덕)들" "십자가에 못박았다", "타락한"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박창진님이 자신의 설명을 철회하였기에 다른 것 한 가지만 살펴보자.

박창진님은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에서 ‘참예한 바’라는 단어는 ‘동류들’(1:9)로, ‘형제들’(3:1)로,  ‘참예한 자’(3:14)로 사용되었습니다. 먼저‘동류들’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동류들로서 하나님의 사역자들인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형제들’이란 히브리서 기자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을 가리킵니다. ‘참예한 자’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잡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는 것을 말할 때 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에 참예한 바가 된다는 것은 성령의 부은바 되어 하늘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박창진님이 언급하는 히브리서 본문들을 살펴보자.

1:9 παρα τους μετοχοθς σου

             형대목남복

박창진님은 “먼저 ‘동류들’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동류들로서 하나님의 사역자들인 천사들을 가리킵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동류들”이란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엄밀하게 번역을 하면, “너의 참여자들보다”라는 이 어구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천사들은 예수님에게 참여자들하는가? 천사들은 예수님의 동역자들인가? 혹은 예수님은 천사들에게 참여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은 천사들의 동역자인가? 이 어구만으로는 너의 동류들이라 번역된 어구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히브리서 1장 1-14절의 핵심은 그리스도와 천사들의 구별과 차이에 대한 것이다. 즉 동류들인 천사들에게는 부정적인 비교이다. 천사들은 예수님보다 못한 존재들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1장 9절에 대한 우리말 번역에 있는 “승하게 하셨다”는 어구는 원래 없는 것이다. 원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너의 참여자들보다 너에게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셨다.” 이것은 시편 45편 7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이 구절에서 사용된 μετοχοθς(동류들)로는 6장 4절에서 사용된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첫출발(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만약 참예한바되고 라는 단어가 그 자체로 그런 의미를 가진다면, 천사들은 어떤가? 천사들도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들인가?


3:1 Οθεν, αδελφοι αγιοι, κλησεως επουρανιου μετοχοι

                           명소여단 형소여단 형대호남복

                         부르심(초대)  하늘의   참여한 자들

이와 관련해서 하늘의 부르심은 무엇인가-이에 대하여는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와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 모두가 거룩한 형제들인가 질문한다. 즉 거룩한 형제들은 모두가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이다. 그러나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 모두가 거룩한 형제들이라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또한 이 구절에서 보듯 “참여한 자들”(μετοχι)이란 단어 자체가 그리스도인(혹은 거룩한 형제들)이다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만약 하늘의 부름에 참여한 자들이라는 것 자체가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요 형제자매들일 것이다.


3:14 μετοχοι γαρ του Χριστου γεγοναμεν, εανπερ την αρχην της υποστασεως μεχρι τε

     형대주남복       명소남단  동직완능1복 if       명목여단     명소여단 

                                 γινομαι

λους βεβαιαν κατασχωμεν 

              동가과능1복   


사실 이 구절은 매우 어려운 구절이다. της υποστασεως(확실한 것)은 소유격으로 목적적 의미 혹은 소유적 의미라는 두 가지 번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번역은 “만약 우리가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예자가 일 것입니다”이다. 즉 시간적인 의미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라는 의미이다. 두 번째 번역은 “만약 우리가 확실한 것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견고히 붙잡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예자들일 것입니다”이다. 즉 내용적인 의미에서 확실한 것 전부를 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이 3장 6절에 나온다: 그리스도는 그의 집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이런 두가지 번역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의 논의와 관련된 핵심적인 것을 살펴보자. 먼저 질문되어야 할 것은 “시작할 때 확실한 것”(υποστασεως. 동일한 단어가 히브리서 1장 3절-그 본체의 형상-과 11장 1절-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에 나온다)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3장의 문맥에서 대답되어야 한다. 3장의 문맥에서 핵심은 “믿음”이다. 12절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라. 그리고 19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즉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본체의 형상이심에 대한 믿음-이 문제가 된다. 이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떨어지고 능히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 즉 우리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인이 아니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참예자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작할 때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졌고 그 믿음을 끝까지 가진 자들은 그리스도의 참예자이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그리스도의 참예자”라는 어구와 관련된 것이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참예자가 되는 사람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자들이다”는 것이다. 즉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붙잡는 자”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붙잡지 않는자”, 그리고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붙잡는 자”는 다르다. 우리는 어느 쪽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가? 우리는 어느 쪽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출발을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가?


어쨌든 이 구절들에서부터 박창진님이 6장 4절에 대하여 “그렇다면 성령에 참예한 바가 된다는 것은 성령의 부은바 되어 하늘에 속한 자로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추론에 불과하다. 즉 앞에서 언급한 구절들에서처럼 “(성령에) 참예한바 되었다”는 어구만으로부터 그들이 성령의 부은바 되었다, 하늘에 속한 자다,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었다는 의미를 끌어낼 수 없다. 박창진님의 이 어구들에 대한 설명은 본문에 근거하지 아니한 추론에 불과하다.


3. 박창진님께서는 나의 글에서 “은혜와 은혜가 주어지는 방편들”이라는 표현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은혜란 구원받음을 뜻하고 은혜가 주어지는 방편들이란 구원받음이 주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의미일 것이라고 지적하고, “하나님께서 첫 구원과 관련하여 본문에 언급된 것들을 은혜의 방편으로 활용하신다는 성경적인 증거가 있습니까” 라고 질문한다. 그러면서 “복음서의 기사를 근거라고 제시하지는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은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라고 부르시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관련한 기사를 불신자를 신자로 부르심에 대한 예증으로 대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라고 단서를 붙인다.


먼저 박창진님은 “은혜란 구원받음을 뜻하고 은혜가 주어지는 방편들이란 구원받음이 주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의미”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으로 “은혜=구원받음”이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구원받음은 은혜의 결과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 직접적으로 말하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육신으로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부활시킨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은혜(χαρις와 דסה)가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라. 이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편은 성령을 통한 사람의 말씀의 증거, 능력(병고침 등등)의 행함, 성도간의 사랑, 세례와 성찬 등등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방편들을 통해서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여 은혜의 결과인 구원을 우리에게 이룬다. 아주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은혜라고도 평소에 말하기도 한다.

각설하고, 박창진님의 조건을 따라서 민족적 이스라엘이 아닌 사람 중에서 그런 경험을 한 사람에 대한  성경본문증거를 몇 가지만 제시한다: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와 그 가족, 사도행전 13장 6절 이하의 총독 서기오 바울과 박수 엘루마 사도행전 16장 16절이하의 본문의 귀신들려 점치는 것으로 주인을 이롭게 하던 여종 혹은 사도행전 28장 7-10절에 나오는 멜리데섬의 보블리오라하는 사람과 그의 부친. 혹은 행 24장 24-27절의 총독 벨릭스나 26장의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