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히브리서 6장 4-6절: 회개케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baromi 2005. 9. 28. 00:03
LONG

(4) 회개

저자가 한번 타락하였던 그런 사람들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하는 것”을 원한다고 암시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한번 가졌던 회개는 범해진 죄들에 대한 일종의 후회(sorrow)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중요한 단계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죄인됨을 보기 전까지는 예수께서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죄들을 용서할 것임에 대한 신앙을 가질 필요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로부터의 회개는 모든 참된 구원하는 믿음에 앞서야만 하거나 동반해야만 한다. 그러나 핵심은 "회개 그 자체가 구원하는 믿음은 아니다" 는 것이다. 히브리서 6장 1절에서 저자는 “죽은 행위로부터의 회개”를 “하나님을 향하는 믿음”으로부터 구별한다. 우리는 막1장 15절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 와 행 19:4; 20:21; 26:20 등에서도 회개와 믿음을 밀접하게 연결되지만 그러나 구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구원하는 회개에 도달하지 못하는 그런 종류의 회개, 즉 구원하는 믿음을 수반하지 않는 회개를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히브리서 12장 17절은 에서가 장자권을 판 것에 대하여 시도했던 마음의 변화를 말하면서 metanoia(회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그를 구원에 인도하는 회개가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장자권과 관련하여 계약취소를 의미한다. 또한  누가복음 17장 3-4절(특히 내가 회개하노라 너는 용서하라)에서처럼 회개하다(metanoeo/metanoia)라는 단어는 구원하는 회개가 아니라 개인적인 잘못에 대한 미안함을 언급할 때에도 사용된다. 이것은 구원을 향한 회개가 아니라 잘못된 행동에 대한 단순한 유감을 의미한다. 구원하는 회개가 아닌 회개에 대한 또 다른 예는 유다의 행동에서도 발견된다: “때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은 삼십을 제사장들에게 도로 갖다주며”(마 27:3).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는 metanoia나 metanoeo가 아니라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회개에 대한 또다른 용어인 metamelomai 이다. 유다는 “회개했지만” 그러나 그는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지는 않았다(요 6:70-71; 13:27; 행 1:16-20; 마 27:5를 보라). 바울이 고후 7:10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회개를 만든다”고 말할 때 이것은 적어도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는 회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우리는 회개는 이미 행한 행동들이나 죄들에 대한 슬픔(미안함, 아쉬움, 후회)를 의미하고, 그런 죄들을 버리려는 결심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모든 회개가 구원하는 믿음을 동반하는 하나님을 향한 내적이고 진정의 회개를 포함하지는 않는다.또 한 가지 문제는 회개가 참으로 구원하는 회개이든 혹은 그렇지 않든지간에, 행 11:18의 “생명얻는 회개”는 언제나 즉시로 명백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또 다른 좋은 예는 베드로후서 2장 20-22에서 서술된 잘못된 교사들에게서 발견된다: 그들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앎을 통하여 세상의 더러움들을 피하였고”(20절)는 복음에 대한 지식과 회개에 대한 지식을 모두 가졌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후 그들은 자신들의 원래의 길로 돌아갔다. 더욱이 그들은 결코 실제로 구원받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베드로가 “the dog turns back to his own vormit, and the sow is washed only to wallow in the mire 라는 속담이 그들에게 발생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22절).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회개는 단지 외적인 깨끗함만이었고 그들의 참된 본성을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사실상,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종류의 회개가 있을 수 있다는 개념은 구원하지 않는 종류의 믿음이 있을 수 있다는 개념과 병행한다. 즉 지식과 찬성을 포함하지만 그러나 인격적인 신뢰가 아닌 그런 종류의 인식적 믿음이 있다(예를 들면, 요 3:2; 행 26:27-28l 약 2:19; 고전 15:2; 딤전 1:19 등에서 니코데모, 아그립파, 사단들의 “믿음”).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만약 히브리서 6:4에서 언급된 회개가 참된 구원하는 회개가 아니라면, 그런 회개에로 사람들을 “다시 새롭게”(restore)하는 것을 원한다고 저자가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고 반대할 수도 있다. 그에 대한 답은 저자는 4-6절에서 언급한 “회개”가 구원으로 인도하는지 인도하지 않는지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에 특별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회개의 실제적인 본질이 외적인 관찰에 의해서는 언제나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만약 누군가가 죄에 대하여 후회하고 그 죄를 버리기 원하고 그래서 복음을 이해하게 되고 성령의 사역의 다양한 축복들을 경험하고 교회의 모임에 참여하고서도, 그후 그냥 돌아간다면, 그런 사람들을 또 다시 죄에 대한 회개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는 것을 단순히 말한다. 따라서 이 어구가 원래 회개가 필수적으로 구원하는 믿음으로 인도하고 죄들의 용서로 인도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구절은 회개에 대하여 상세히 말하지 않고 있고, 그러므로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요점은 "회개라는 단어 그 자체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는 것이다.


히브리서 6:4-6에 관한 기본적인 결론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런 용어들 모두는 복음을 듣고 그것에 이끌리고 교회의 활동들에 밀접하게 참가한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나 거짓된 그리스도인들 모두를 설명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타락하기 전에 실제로 구원받았는가 혹은 실제로 구원받지는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우리의 결정은 용어들 그 자체로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만약 어떤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그 구절들의 문맥에서 발견되는 다른 사실들에 기초해야만 한다. 우리는 히 6:4-6절이 서술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최대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적어도 교회의 사귐에 밀접하게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죄에 대하여 후회를 했고 그들의 죄를 용서받으려는 결정을 했다. 그들은 복음을 분명하게 이해하였고 복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인정을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유익을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때문에 삶에서 받게 될 변화를 알았고, 그들은 아마도 그들 자신의 삶에서 기로에 대한 응답들을 받았고 심지어 어떤 일들을 함에 있어 성령의 능력을 느꼈고 어떤 영적인 선물들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말씀의 참된 설교를 접하였고 그 가르침의 많은 부분을 알았을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긍정적이고 그런 것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실들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시작단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회개, 구원하는 믿음과 거듭남, 칭의, 양자됨, 성화의 시작). 사실상 그런 경험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시작 단계들에 예비적인 것이다. 그런 것들을 경험한 이들의 실제 영적인 상태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회개에로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모든 긍정적인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후 그들이 타락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욕을 보인다면(6:6), 그들은 아주 의도적으로 그런 축복들을 거부하고 결정적으로 그것들로부터 돌아서는 것이다. 그 죄는 그리스도에 대한 결정적인 거부와 아마도 그에 대한 공적인 비웃음을 포함한다: “crucify the Son of God” and “hold him up to contempt”(6절)

저자는 만약 이것이 발생한다면 그런 사람들을 일종의 회개나 죄에 대한 후회로 다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고 말한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강팍하고 그들의 양심이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하여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들에게 성경이 참되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고 삶을 변화시키신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 모든 것을 경험해 보았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중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반응할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성령께서 사람들의 삶에서 강력하게 일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만약 그들에게 죄로부터의 참된 회개는 더 나은 삶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그것을 알지만 그러나 그런 종류의 더 나은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의 것들에 대한 그들의 반복되는 익숙함과 성령의 많은 영향들에 대한 그들의 경험은 그들을 변화에 반대되도록 완고하게 만드는데 사용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자신이 편지를 적는 공동체 안에 바로 이런 식으로 타락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2:3; 3:8, 12, 14-15; 4:1, 7, 11; 10:26, 29, 35-36, 38-39; 12:3, 15-17). 그는 비록 그들이 교회의 모임에 참여하고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축복들중 일부를 경험하지만 그러나 만약 그들이 그 모든 것 이후에 타락한다면 그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저자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필수적으로 의미하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저자는 특별히 영적인 상태가 아직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경고하려고 편지하기 때문이다.


2. 7-8절과의 연관성

7-8절은 gar(왜냐하면)로 4-6절과 연결되어 저자가 4-6절에서 지적한 것을 뒷받침하는 이유 혹은 설명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비유를 4-6절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자주 내리는 비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사람들의 삶 안으로 오게 된 축복들에 가장 잘 조화된다. 즉 자주 내리는 비는 빛에 비취임을 받음, 천국적 선물과 하나님의 말씀과 오게 될 세대의 능력을 맛봄, 성령의 사역에 참예함을 가리킨다. 그러나 비에 병행하는 것이 드러나는데, 왜냐하면 비는 “모든 종류의 땅”에 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땅에 여전히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비가 온 결과로서 어떤 종류의 식물이 나타나게 될지 말할 수 없다. 만약 비가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땅에만 내린다면(즉 경작하는 자들의 목적에 유용한 채소를 낸다면),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7절). 그러나 동일한 비가(비유적으로 빛을 받음, 맛봄, 참예함) 단지 가시와 엉겅퀴만을 내는 그런 부정적인 땅 위에도 내릴 수 있다. 차이는 경험하는 사건들의 종류가 아니라 비가 내리는 땅의 종류들이다. 즉 땅이 비에 반응하는 방법은 그 땅의 종류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4-6절의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중요한 도움을 제공한다. 8절의 “만약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면”이란 어구는 직접적으로 6절의 “만약 그들이 타락한다면”이란 어구에 대응된다.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될 것이다”(8절). 7절에서의 채소를 내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에 날카롭게 대조되면서 이런 결과들(저주받고 불살라짐)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마지막 심판의 그림이다. 더욱이 8절에서 단수 형용사 adokimos(worthless)와 단수 관계대명서 hes(of which)는 akanthas와 tribolous(가시와 엉겅퀴)라는 복수 명사들을 가리키는 것 이 아니라 단수 명사 ge(land)를 가리키기 때문에, 불살라지는 것은 단지 가시와 엉겅퀴가 아니라, 땅 그 자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락한 그 사람들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땅과 같다 - 그 마지막은 저주에 처하고 불에 살라진다.

또한 좋은 땅인지 혹은 나쁜 땅인지는 비를 많이 받느냐 적게 받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 땅에서 나온 무엇인가를 보기 전에는 그 땅이 좋은 땅인지 나쁜 땅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일단 가시가 나타난다면, 그 가시들은 그 땅의 참된 본질을 드러낸다 - 가시는 나쁜 땅에만 속한다. 정확히 동일한 방법으로, 4-6절에 나타난 사람들은 그들이 빛에 비취임을 받고, 천상적 선물을 맛보고 성령에 참여할 때 그것만으로는 그들이 참으로 구원받았는지 불확실하다. 즉 그 순간에는 그들의 상태는 불분명한데 왜냐하면 그런 경험들은 그들이 받은 모든 것들이지만 그러나 그런 경험들은 그들의 반응, 즉 그들이 보이는 열매의 종류가 선한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한번 타락하고 그리스도를 현저히 욕보이면, 이 악한 열매는 그들의 참된 상태가 처음부터 무엇이었는지 드러낸다: 그들은 처음부터 결코 참으로 구원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비유에 대한 또 다른 이해가 가능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아마도 타락한 자들은 단지 그들이 타락한 이후에 가시를 생산하는 땅과 같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타락하기 이전에는 좋은 땅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언어는 이런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1) 타락하기 이전에 좋은 열매를 맺는 것에 대한 지적이 없고, 그래서 이 견해는 그것을 지지하는 근거가 없는 단순한 사변에 불과하다. (2)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제시할 수 있는 열매맺는 지속적인 과정을 지적하려고 현재분사를 사용한다:


“having drunk and continuing to bear”(piousa....kai tiktousa) useful vegetation(7절)


“having drunk and continuing to bear”(ekpherousa) thorns and thistles(8절).


따라서 과거에는 좋은 열매를 맺었다가 이제는 가시를 맺는 땅이라는 그런 아이디어는 이런 저자의 그림에 맞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4-6절에 언급된 긍정적인 경험들이 그 사람들이 참으로 구원받았는지 구원받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반면, 타락하고 그리스도를 욕보이는 것에 대한 언급은 타락한 사람들의 참된 정체가 무엇인지 드러낸다: 처음부터 그들은 나쁜 열매만을 맺을 수 있는 나쁜 땅과 같다. 만약 가시를 내는 땅에 대한 비유가 4-6절을 설명한다면, 그들의 타락은 그들이 처음부터 결코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님을 보여준다.


3. 9-12절

비록 저자가 타락의 가능성에 대하여 가혹하게 말하지만, 9절에서 저자는 대부분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그의 독자들이 처함 가장 공통된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돌아간다(이제 저자는 그들을 “너희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Even though we speak like this, dear friends, we are confident of better things in your case-things that accompany salvation”(NIV)고 말한다. 우리는 마지막 어구를 “things that belong to salvation”으로 번역할 수 있다. echomena의 번역과 관련하여 BAGD, 334, 3은 echo의 중간태를 “hold oneself fast, cling to”로 번역하고, “of inner belonging and close association”으로 사용된 이 형태의 유일한 신약성경의 예로서 히브리서 6:9를 제시한다. BAGD를 따르면서 나는 “belonging to”라는 의미를 수용하는데, 그러나 동시에 NIV의 “accompany”를 따르는데 이것은 어느 정도 유사한 의미를 제공하고 논의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저자가 그런 “better things”을 말할 때 저자가 언급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10-12절은 9절을 설명하고(gar가 9절과 10절을 연결하는 것을 주목하라) 이 구절들은 여러 가지 “더 나은 것들”을 언급한다. 10절에서 저자는 그들의 삶에서 사역과 사랑과 섬김을 언급한다: “Your work and the love which you showed for his sake in serving the saints, as you still do.” 11절에서 저자는 소망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언급한다: “And we desire each one of you to show the same earnestness in realizing the full assurance of hope until the end.” 12절에서 저자는 이 소망에 대한 완전한 확신을 실현하는 그들은 믿음과 인내를 가질 것이다 고 말한다: “so that you may not be sluggish, but imitators of those who through faith and patience inherit the promises.” 이 방법으로 그는 참된 성도들을 격려한다.

그러나 핵심질문은 “무엇에 비하여” “더 나은 것”(better things)인가이다. 저자가 마음속에 생각하는 대조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가능한 해석들이 있다: (1) 심판 때에 불살라지는 것보다 더 나은 것(8절) (2) 빛에 비취임을 받고, 하늘의 은사,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게 될 세대의 능력을 맛보고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는 선한 경험들보다 더 나은 것들(4-5).

첫 번째 해석은 그럴듯하지 않다. 왜냐하면 (a) 히브리서에서 형용사 kreisson(better)은 나쁜 어떤 것에 대하여 좋은 어떤 것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어떤 것에 그것보다 더 좋은 어떤 것을 비교할 때(better covenant, better promises, better sacrifices, better possession, better country)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너희들의 경우에는 마지막 심판 때에 불살라지는 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우리가 분명히 느낀다” 고 말하는 것은 그럴듯하지 않다. (b) 만약 저자가 “너희들은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에 너희들에게는 심판에서 불에 살라지는 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이 있다고 확신한다” 고 말하기를 원했다면, 저자는 아마도 복수 ta kreissona (better things)를 사용하지 않고, “something better for you, that is, salvation”을 말하기 위하여 “something better”과 같은 단수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히 11:40의 단수 kreitton ti 와 비교하라). (c) 저자가 언급하는 더 나은 것들은 미래의 더 나은 것들(미래의 심판보다 더 나은 미래의 구원)으로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인 더 나은 것들로 더욱 잘 이해되는데, 왜냐하면 kai echomena soterias라는 어구에서 현재분사 echomena는 현재지속이라는 의미를 제공하는 것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즉 “things now presently belonging to salvation, and continuing to belong to salvation.” (d) 저자는 그들이 아직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여전히 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저자와 독자들 모두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관심은 독자들에게 “너희들이 타락하는 것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비교는 타락과 대조하는 것이 아니라 4-5절의 긍정적인 경험과 비교하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이 더욱 적절하다: (a) 이 해석에서 더 좋은 것들은 4-5절에서 언급된 좋은 것들- 빛에 비취임, 맛봄, 참여함-보다 더 좋은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좋은 것”에 대조하여 “더 좋은 것”이라는 저자의 언어 사용이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b) 저자는 그런 “더 좋은 것들”이 (심판에 대조되는) 구원이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동반하는” 혹은 “구원에 속한” 것들이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더 좋은 것들”을 10-12절에서 언급하는 사랑, 섬김, 믿음, 소망과 같은 그런 가치들로서 이해하는 것과 일치하는데,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인의 구원경험에 속하고 4-6절에서 언급된 긍정적인 경험들에 적절한 비교를 제공한다. (c) 10-12에서의 사랑, 섬김, 믿음과 같은 것들이 구원의 증거를 제공하는 유일한 선한 열매들이기 때문에, 저자가 그런 것들을 4-6절에 나타나는 그 자체로는 구원의 증거가 아닌 빛에 비취임, 맛봄, 참여함보다도 “더 좋은 것들”로 말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따라서 9절에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 대부분이 그가 4-6절에서 서술한 그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들을 가지고 있고 그런 것들은 구원에 속하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그의 독자들에게 있어 더 나은 것이다 고 확신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적으로 4-6절에 서술된 유익들은 구원에 속한 것이 아니다 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요점은 우리가 kai echomena soterias 라는 어구를 “즉, 구원에 속한 것들” 혹은 “그리고 구원에 속한 것들”로 번역하는데 타당하다. 이런 방법으로 9절은 이 전체 단락을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열쇠를 제공한다. 만약 저자가 4-6절에 언급된 사람들이 참으로 구원받았다 고 말하려고 한다면, 9절에서 저자가 그의 독자들에 대하여 더 나은 것들, 즉 구원에 속한 것들을 확신한다고 말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 따라서 9절을 기록하면서, 저자는 4-6절에서 말한 그 사람들은 많은 복들을 가졌지만 그러나 구원에 속한 것들을 가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6장 9-12절의 전체 단락은 저자가 6장 4-6절에서 서술한 것과 같이 타락에 빠지지 않은 성도들의 그룹을 그려내고 그들을 구별하는 것을 명백하게 한다. 이것은 저자가 4-6절에 나타나는 타락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그의 독자들 대부분이 다른 범주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은 그들의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는 자신들의 삶에서의 열매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7-12절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적절하다: 7-8절은 4-6절에 서술된 사람들을 계속해서 가시와 엉겅퀴를 생산하는 열매맺지 못하는 땅으로 설명하고, 그래서 그들은 결코 구원받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9-12절은 그 독자들은 4-6절에서 말하는 일시적인 경험들보다 다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고 그런 더 좋은 것들은 구원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7-8절과 9절은 4-6절에 서술된 그 사람들은 결코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고 지적한다.


ARTICLE

히브리서 6장 4-6절: 회개케 할 수 없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번호 : 2261   글쓴이 : andere28
조회 : 90   스크랩 : 0   삭제 요청 : 0   날짜 : 2005.09.01 03:09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브리서 6장4-6절은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매우 당혹스러운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묘사한 사람들은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들인가? 그리고 만약 그들이 정말 구원받았었다면, 이 구절은 참된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이 의문을 해소하기 위하여 본문 자체를 살펴보는 것에 앞서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를 해야 한다. 정확한 문제는 “히브리서 6장 4-6절에서 언급한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시작단계를 경험하고 그 이후에 타락하여 자신들의 구원을 상실한 사람들인가” 이다. 이 질문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또 다른 기본적인 합의가 있어야 한다. 즉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시작단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구원을 상실하였다 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나는 일반적인 개신교 복음주의권 내에서 통용되는 것을 따라서 다음과 같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시작단계에 포함되는 내용들을 제시한다: Regeneration(거듭남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Conversion, Justification, Adoption, the beginning of sanctification. 비록 순서는 다를 수 있고 어느 한 항목이 다른 항목을 포함할 수도 있지만, 이 다섯 가지 요소 모두를 경험한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출발단계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비록 신약성경에서 구원은 과거적 측면, 현재적 측면, 미래적 측면을 가지지만, 여기에서 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시작 단계”를 경험한 사람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즉 구원받은 사람들로 정의한다. 따라서 “구원을 상실한다” 는 표현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결정적인 시작단계에서 경험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구원을 상실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삶의 경험에서 더 이상 죄에 대한 회개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않을 것이고, 또한 하나님은 그들의 거듭남을 회수하고 따라서 그들은 다시 한번 죄 속에서 영적인 사망을 경험하고, 그들의 칭의를 회수하고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죄의 용서를 받지 않고 그들의 양자됨을 철회하고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며 또한 내적인 성화작용을 철회하고 따라서 그들은 더 이상 삶 속에서 점증하는 거룩함의 패턴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정의에 기초하여 히브리서 6장 4-6절은 한번 구원받았지만 타락하여 구원을 상실한 사람들을 언급하는 구절인가를 살펴보자. 먼저 우리는 6장 4-6절 자체를 살펴보고, 그 후 6장 7-8절, 그리고 9-12절과의 연관성에서 6장 4-6절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전체적인 문맥과의 연관성은 살펴보지 않을 것이다.


1. 6장 4-6절

먼저 6장 4-6절 자체를 살펴보자.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는 구절에 의거하여 이러한 경험들을 한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단순히 이 구절 자체에만 근거해서 그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사실 이 경험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시초에 있는 긍정적인 경험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경험에 대한 정보에만 기초하여 마치 그것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누구나가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출발단계를 경험하였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결정적인 출발단계를 경험하였는지를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실들, 예를 들어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과 구원자로서 믿고 신뢰하는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거듭남을 주셨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들을 양자로 삼았는지, 그리고 그들의 삶이 참된 구원의 증거를 제공하는 열매를 보여주기 시작하는지에 대하여 알아야만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요점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라는 구절만으로는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결론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위의 어구들을 차례로 자세히 살펴보자.


(1) "한번 빛에 비취임을 받았다“(4절)

“빛에 비취임을 받았다”(photizo)라는 어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언뜻 보기에 이  어구는 “복음을 듣고 믿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10장 32절에서 저자는 동일한 어구를 가지고 독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 된 시간을 언급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이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또한 비록 photizo라는 동사는 아니지만 같은 어원의 명사인 photismos를 회심과 관련하여 두 번 사용하는 고후 4장 4절 6절은 유사한 개념적인 병행구를 제공한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4, 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어구에 근거하여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결정적인 시작단계”를 경험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히 10:32절에서 “빛에 비취임을 받았다”는 단어가 독자들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 즈음에 발생한 어떤 사건을 설명하는데 사용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복음을 듣고 믿었다”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서 이 단어는 “복음에 대하여 듣고 배우는 것”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약성경에서 phitozo라는 단어는 “복음을 믿었다” 혹은 “믿음을 가졌다”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열 한번 나타나는데, 때때로 단지 램프에 의한 빛을 언급하고(눅 11:36), 때때로 구원을 가져오는 특별한 배움이 아니라 일반적인 배움을 언급한다. 예를 들면, 요 1:9에서 사용된 photizo는 세상에 온 모든 사람을 비취는 것을 의미하고, 고전 4:5에서는 마지막 심판 때 오게 될 빛이 (모든 사람들에게) 비취임을, 그리고 엡 1:18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수반되는 성장을 의미한다.

아마도 히브리서 6:4의 photizo가 “믿음을 가졌다”를 의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는 고후 4:4-6절인데, 고후 4:4-6에 나타나는 명사형 photismos와 관련하여, 바울이 복음의 빛을 보는 것과 관련하여 회심을 나타내는 확장된 비유를 제시한다. 그러나 심지어 이 구절에서도 photismos라는 단어 그 자체가 회심하다(믿음을 가졌다)는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여러 가지 다른 단어들(phos - light-, lampo - shine - , photismos - illumination)을 사용하여 제시하는 것은 빛을 비췸에 대한 전체적인 비유일 뿐이고, 그런 여러 가지 단어들도 결코 회심을 의미하는 기술적인 용어가 아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세계에서, photizo는 “복음을 듣고 믿음” 혹은 “구원하는 믿음을 가짐”을 의미하는 기술적인 용어가 아니다. photizo는 배우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우리가 이 단어와 관련하여 가장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히브리서 6장 4절에서 photizo는 “복음을 듣고 이해한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정도이다. 분명히 복음의 사실들에 대한 그런 지적인 이해는 구원하는 믿음으로의 중요한 단계이지만, 그러나 그것 자체가 믿음에 본질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신뢰의 요소를 완전히 구성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 어구에서 “한번”(hapax)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에서 발생하는 결정적이고, 단번의 빛에 비취임을 지적하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 hapax(once)라는 단어가 단 한번 발생하고 반복되지 않는 사건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hapax는 히브리서 9:7에서 대제사장이 “매년 반복하여” “once a year” 성소에 들어가는 사건을 말하는데 사용된다. 빌립보서 4:16에서 바울은 hapax를 빌립보인들이 그에게 “once and again” 선물을 보내었다고 말하는데 사용한다 - 선물을 보내는 그 사건은 빌립보인들이 두 번째 선물을 보낼 때 반복되었다. hapax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언급하는 곳(예를 들어 히브리서 9:26-28)에서, “결코 반복될 수 없다”는 의미는 문맥 속에서 다른 언급들로부터 도출되는 것이지, hapax라는 단어 그 자체에 포함된 의미가 아니다. 그러므로 hapax(once)라는 이 단어는 그 자체로 “시간적으로 단 한번” 발생하고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반복할 것인지를 상술하지 않고 단순히 “한번” 발생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2)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

어떤 주장은 히브리서 2장 9절에 근거하여, “맛보았다”(geuomai)라는 용어는 어떤 것에 대한 완전하고 풍성한 경험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았다(히 2:9).” 따라서 “하늘의 선물”이 성령을 의미하든(행 2:38; 8:20; 10:45; 11:17), 혹은 칭의를 의미하든(롬 5:15, 17), 이 사람들이 이 선물을 “맛보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참으로 성령의 내주하심을 경험했고, 구원에 참여했다는 것(롬 8:9,11)을 의미하거나 혹은 그들이 참으로 칭의를 경험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것은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고 그래서 구원을 경험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geuomai라는 단어가 “맛보다”를 의미할 때, 그 단어의 뜻에 내재된 것은 두 가지 사실들이다: (1) 맛봄은 일시적이다, (2) 그것에 대한 더욱 지속적인 경험이 따라올 수도 있고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음식이나 음료를 맛보는 것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27:34에서 사용된 geuomai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 포도주를 마시도록 제공되었지만 그러나 그가 그것을 “맛보았을” 때, 그는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geuomai가 “어떤 것을 알게 되다”는 의미로 사용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6:4-6에 유사 어구가 요세푸스에게서 발견되는데(유대전쟁 2. 158), 에세네파의 신학적 견해에 대하여 “whereby they irresistibly attract all 재 have once tasted their philosophy.” 여기에서 요세푸스는 “한번 맛본” 이들은 에세네 철학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에세네 철학을 강력하게 공격한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히브리서 6장에서 “맛보다”는 단어만을 놓고 볼 때, 하늘의 선물, 하나님의 말씀의 선함을 “한번 맛본” 이들이 그런 것들을 강력하게 공격하였을 수도, 혹은 공격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핵심은 “한번 맛보았다”는 언급이 그들이 그러한 것들을 “완전히 그들 자신의 것으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는 것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히 2장9절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실제로 맛본 그것에 대한 “실제 경험”은 히브리서 2장 9절뿐만 아니라 geuomai가 언급된 모든 예들에서도 “실제 경험”이다. 히브리서 6:4-6에서도 그 사람들은 천국의 선물, 하나님의 말씀들, 오게 될 세대의 능력(개역성경은 내세의 능력)에 대하여 “실제적인 경험”을 가졌다. 그러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핵심은 그들이 그런 것들을 통하여 “구원하는” 경험을 가졌느냐 가지지 않았느냐, 그들의 경험이 회심, 구원하는 믿음, 칭의 등등을 가져오는 그런 경험이었느냐 아니냐 이다. 따라서 만약 “천국적 선물”이 구원이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천국의 선물을 맛본 “실제 경험”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he dorea tes epoiraniou(천국적 선물)이라는 정확한 어구는 신약성경의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그래서 천국적 선물이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에 대한 다른 예들로부터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상, 선물(dorea)이라는 단어 그 자체는 다른 곳에서 성령을 언급하고(행 2:38; 8:20; 10:5; 11:17), 성령은 하늘로부터 보내어지기 때문에(행 2:33; 벧전 1:12), 히브리서 6:4절이 의미하는 것은 “천국적 선물을 맛본” 그들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어떤 경험을 가졌다는 것이다 - 아마도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요 16:8), 귀신을 쫓아냄(마 12:38), 어떤 종류의 치유받음(눅 4:14, 40; 고전12:9). 그러나 핵심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그런 경험들은 그 자체로 구원을 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을 방해하고”(행 7:51), 심지어 성령으로부터 양심의 가책을 받은 이들도 “성령에 반대하여 저주를 선포할 정도로”(마 12:31) 그렇게 강력하게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맛본 다른 것들도 유사하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선함을 맛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참됨과 능력을 알게 되었고 심지어 어떤 것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말씀을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오게 될 세대의 능력들”(우리 번역은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것은 아마도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 악령을 내쫓음, 치유를 경험하는 것에서 성령의 새 언약의 능력에 대한 어떤 것을 느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게 될 세대의 능력”을 맛봄은 복음에 선포하는 것을 포함하고 그래서 그 사람들은 구원받았거나(빌 1:15-18: 잘못된 동기로 복음을 전함) 혹은 예언하고 기적을 일으키고 예수의 이름으로 악령을 쫓아내었을 것이다(마 7:22-23). 그러나 핵심은 그런 경험들 자체가 그 사람은 구원받았다는 것을 필수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는 점이다(예수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너희를 모른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로부터 떠나거라 - 마 7:23). 즉 여기에서 맛봄의 본질은 상대적이다.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맛봄에 대한 신약성경의 예들은 맛봄이 일시적이고, 맛본 것들에 대한 더욱 지속적인 경험은 따라올 수도 있고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구절들에서, 이것은 천국적 선물, 하나님의 말씀, 오는 능력들의 맛봄은 일시적이었고 우리는 그런 맛봄에 대한 단순한 사실로부터 마치 그런 것들에 대한 더욱 지속적인 경험이 따라왔느냐 따라오지 않았느냐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성령에 참예한 자

어떤 견해들은 이 구절에서 “참예했다”(metochos)는 용어는 히브리서 3:14(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에서 그리스도 안에의 구원얻는 참예를 지적하는 것과 같이 성령에의 구원얻는 참예를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령에 참예한 자가 되었다는 구절에서, 첫 번째 질문은 metochos (partaker)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이다. 영어 사용자나 한글 사용자에게 있어 이 단어가 가지는 정확한 의미가 분명하지는 않다. 이 단어는 very close participation이나 attachment 을 의미할 수 있고 혹은 a loose association with the other person or persons named 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3:14에서 “partakers(metochoi) of Christ”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구원에의 참예를 가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 metochos는 associats나 companions를 언급하는 느슨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 눅 5장7에서 제자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어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을 때, 제자들은 다른 배에 있던 동료들(metochoi)을 불러서 자신들을 돕게 했다. 여기에서 metochoi라는 단어는 물고기를 잡는 일에 있어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동료였던 이들을 언급한다. 시편 45:7을 인용하는 히브리서 1장9절은 metochos를 “친구”(RSV) 혹은 “동료”(NIV, NASB)를 언급하는데 사용한다: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에베소서 5장 7절은 불신자들의 죄악된 행동들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그러므로 저희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되지 말라-문자적으로는 동료가 되지 말라-고 말할 때, sum-metochos 라는 유사한 단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metochos라는 단어는 공통적으로 다른 누군가와 어떤 것을 함께 하거나 함께 참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성령의 동료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사람들이 성령의 존재의 일부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으로서 성령은 부분들로 나누어질 수 없고 자기존재의 어떤 부분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고, 또한 왜냐하면 metochos란 단어는 “to have a share of the being of another person”을 결코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어구는 성령의 사역에 어떤 방법으로 연관되고 성령이 주시는 유익들중 일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해석가들은 이 어구가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사역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가정하는데, 확실히 그런 의미는 성령의 동료가 되는 한 방법이다. 그러나 거듭남은 사람들이 성령에 참여하거나 혹은 성령의 유익을 받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고 따라서 우리는 거듭남이 여기에서 의도된 의미이다 고 가정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어구는 성령의 어떤 유익이나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욱 낫다. 예를 들면, 이 어구는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고 기도에 대한 응답이나 혹은 다른 영적 선물들을 사용함에 있어 성령의 유익들중 일부를 경험하는 것을 단순히 의미할 수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유익들중의 어떤 것들에 참여한 자들이다 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히브리서 3장 14절의 그리스도의 동료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6장4절의 성령의 동료가 되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metochos라는 단어가 그 자체로 명확하게 “partook of saving benefits from someone”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partook of some influence or benefit from (someone)”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 문제는 해결된다. 유익이나 영향의 정확한 종류는 각 상황이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오늘날 세계에 대한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근본적인 역할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동료”가 되는 것은 자연히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성령과 관련하여, 성령은 오늘날 세계에서 다양한 역할들을 하시는데, 그중에는 거듭남을 불러일으키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선물들의 제공,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 사역을 위한 능력의 부여 등도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동료”가 되는 것은 구원을 포함하여 성령이 주시는 “모든 것”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유익들 중의 “일부”에의 참여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5장 7절에 나오는 고기잡는 동료들의 예는 좋은 비유를 제공한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다른 동료들과 관계를 가질 수 있었고 그들과 어느 정도의 영향을 주고받고 심지어 그런 관계에 의하여 삶이 전반적으로 변화됨 없이도 그들로부터 어떤 유익들을 받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좋은 비유는 이그나티우스의 To the Ephesians(ca. A.D. 110) 11:2에서 발견된다. 이그나티우스는 감옥에서 편지를 적는데 에베소인들의 기도에 대하여 감사를 표한다. “in which may I always be a sharer(metochos)” - 그는 언제나 그들의 기도들로부터 유익을 받기 원한다. 그래서 metochos라는 단어는 실제적으로 약한 것으로부터 실제적으로는 강한 것까지의 영향의 정도를 보여주는데 왜냐하면 그 단어는 단지 “어떤 활동에 함께 나누거나 참여하는 것 혹은 참여자”를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히브리서 6장에서 언급된 사람들이 교회와 관련되고 그래서 성령의 사역들 중의 일부에도 관련되고, 어떤 방법들에 의해서 성령에게 약하든 강하든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이상 - 즉 그들이 성령에 의한 거듭남의 유익에까지 참여했는지-은 결코 분명하게 말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