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한글번역-크리스챤다이제스트에서 나온 루터의 로마서 주석(박문재 옮김)

baromi 2006. 1. 28. 15:28
LONG


처음 세 장에서 죄의 본질을 보여주고 어떻게 믿음이 의로 이어지는가를 가르친 후에 4장에서 바울은 몇몇 반론들과 난점들을 다루기 시작한다. 첫 번째로 논의되는 것은, 믿음이 행위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을 듣고서 그렇다면 선행을 할 필요가 과연 있는 것이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주장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행위와 관련하여 무엇을 했으며 그 행위들은 모두 헛된 것이며 그의 행위들은 무가치한 것이었는가 하고 묻는다. 그는 아브라함은 행위와는 상관없이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행위”를 하기 전에 성경에 의하면 단지 그의 믿음에 의거해서 그에게 의가 돌려졌다 - 창세기 15장[:6]. 할례라는 행위는 그의 의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명하셨고 순종의 행위로서 그것은 선행이었다. 따라서 또한 그 밖의 다른 선행들도 사람을 의롭게 하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브라함의 할례와 마찬가지로 그 선행들은 단지 그의 의가 그의 믿음 안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외적인 표지일 따름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선행은 단순히 그리고 전적으로 외적인 표지라고 이해하여야 한다. 선행들은 믿음으로부터 나오며, 좋은 열매와 마찬가지로 사람 자체는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에서 의롭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런 식으로 바울은 3장에 나오는 믿음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을 밑받침하기 위하여 성경으로부터 친숙한 예를 끌어와 예증한다. 이제 그는 다윗을 또 하나의 증인으로 불러오는데, 다윗은 시편 32편[32:1f.]에서 우리는 일단 의롭게 된 이후에는 행위들 없이 살아가지는 못할 것이지만 어쨌든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롭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후에 바울은 이 예를 더 넓게 적용하여 그것을 율법을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한다. 그는 유대인들이 단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아브라함의 상속자들이 될 수는 없으며 율법의 행위들을 준수함을 통하여는 더더욱 글어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상속자들이라면 그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상속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과 할례 이전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으며 모든 믿는 자들의 아버지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율법은 은혜가 아니라 진노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을 기꺼이 그리고 기쁨으로 성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들은 은혜가 아니라 마지못함을 낳는다. 오직 믿음만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예들은 우리를 위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믿음을 가질 수 있다.


5장에서 바울은 믿음이 가져오는 열매 또는 행위에 도달한다. 그러한 것들은 평안, 기쁨, 하나님과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이에 더하여 슬픔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확신, 용기, 신뢰, 소망이다. 믿음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넘쳐흐르는 선의로 인하여 이런 유의 모든 것들이 수반된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기도 속에서 중보기도 할 수 있기 전에는 물론이고 우리가 여전히 원수 되었을 때조차도 죽음을 겪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서는 안되겠지만 믿음은 행위와는 상관없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주장한다. 아니 오히려 올바른 유의 행위들은 무시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단순한 의식주의자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유의 행위들을 날조해내지만, 이러한 행위들은 평안이나 기쁨, 확신, 사랑, 소망, 용기, 확실성,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행실이나 믿음에 속하는 그 어떤 것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이제 바울은 흥미있는 여담을 하며 죄와 의, 죽음과 생명의 기원을 논한다. 그는 어떻게 아담과 그리스도가 두 가지 상반되는 유형을 대표하는지를 보여주면서 실제로 그리스도가 둘째 아담으로 와서 믿음 안에서의 새로운 영적인 출생으로 인하여 그의 의를 전하여야 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아담이 우리의 이전의 육체적 출생을 통하여 우리에게 죄를 전하였을 때 아담이 행했던 것과 짝을 이룬다. 이것이 바울이 아무도 자신의 육체적 출생으 f막을 수 없듯이 아무도 죄로부터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으며 행위로 말미암아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자신의 단언을 입증하는 방식이다. 이와 아울러 바울은 의에 도달하는 데 어떤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아마 도움을 주었을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그것이 왔을 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죄를 증가시켰다는 것을 입증한다. 우리의 악한 본성은 율법에 더욱더 적대적이 되고, 그 율법의 엄격성에 비례하여 우리의 본성 자신의 고안물들을 추구하는 것을 선호한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더욱 필요하게 만들고 우리의 본성을 구할 은혜에 대한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6장에서 바울은 믿음의 특별한 기능을 논한다. 현안 문제는 육에 대항하여 싸우는 영의 싸움으로서 우리의 칭의 후에도 살아남아 있는 죄와 정욕들을 마침내 철저하게 죽이게 된다. 그는 믿음은 위리가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양 느슨해져서 나태와 자기 확신에 빠져있게 되면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킬 수 없다고 가르친다. 죄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하여 죄와의 싸움은 우리를 정죄로 이끌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우리의 몸을 길들이고 몸의 정욕을 죽이며 그 지체들을 통제하는 일을 그것들이 정욕이 아니라 영에 순종할 때까지 계속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시례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기 훈련에 순종할 때까지 계속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세례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기 훈련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세례는 또한 죄의 죽음과 은혜의 새로운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최종적인 목표는 우리가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사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율법 아래가 아니라 은혜dkfo 있을 때 이것이 가능하다고 선언한다. 그는 “율법 아래 있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해준다. 이것은 율법이 우리를 속박하지 못하며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고안물들을 따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말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 아래”있다는 것은 은혜와는 상관없이 살면서 율법의 행위들을 성취하는 데 몰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경우에 죄는 율법을 통하여 우리를 지배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을 자연적으로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우리의 상태는 매우 죄악된 것이다. 그러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기뻐하게 만든다. 그때 죄는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며,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편을 든다.


율법이 우리 편이 되는 것은 죄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의 본질 자체인데, 바울은 이 장 끝까지 이러한 상태에 관한 논의를 계속한다. 그는 이 자유는 율법에 의해 선행을 하도록 속박되지 않고 단순히 선행을 행하며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자유는 영적인 자유이다. 그것은 율법을 폐하지 않는다. 오히려 율법에 부족한 것 즉 자발성과 자유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율법은 침묵하고 활동을 멈추게 된다. 율법은 더 이상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채권자에게 빚을 지고 있고 갚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과 같다. 문제를 해결하여 당신이 해방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채권자가 당신으로부터 채무를 받기를 거절하고 자신의 장부에서 당신의 채무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다. 아니면 어떤 친절한 사람이 채무를 지불하고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돈을 당신에게 주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해방한 방법이다. 우리의 자유는 우리가 어떤 것을 행하기를 거절할 수 있는 조악하고 육체적인 자유가 아니라 그보다 많은 것, 실제로 모든 것을 행한다. 그것은 율법의 요구들과 의무들로부터의 자유이다.


7장에서 바울은 결혼생활에서 이끌어온 유비를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한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결혼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된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하여 아내는 자유롭게 되고 해방되는 것이다. 여자는 다른 남편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것이 단순히 허용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요지는 여자는 이제 처음으로 다른 남편을 얻는 데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여자는 이전 남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전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양심은 옛 죄악된 자기의 이전 상태에서는 율법에 속박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자기가 영에 의해 죽을 때 우리의 양심은 해방되고 각자 율법으로부터 놓여나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양심이 무력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처음으로 우리의 양심이 두 번째 남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부여잡고 생명의 열매를 낼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 다음 바울은 죄와 율법의 본질에 관하여 더욱 폭넓게 설명해 나가면서 오직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는 실제로 살아나고 강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옛 자기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될 때 율법에 대하여 더욱더 적대적이 된다. 옛 자기의 본성은 죄악된 것이며 그럴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 자기에게 율법은 죽음과 모든 죽음의 고통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율법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악한 본성이 선함, 율법에 의해 요구되는 선함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병자에게 걷고 뛰라고 하며 건강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성 바울은 이 시점에서 율법을 올바로 이해하고 가장 좋은 방식으로 해석한다면 율법은 단지 우리에게 죄를 생각나게 하고 죄들을 사용하여 우리를 죽이며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진노를 받기 쉽게 만든다고 단언한다. 우리가 율법을 정면으로 만날 때 이 모든 것을 우리의 양심은 경험을 통해 철저하게 배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올바르게 되어 구원에 이르고자 한다면, 우리는 율법과는 다르고 율법보다 더 나은 그 무엇을 필요로 할 것이다. 율법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맹목적이다. 주제넘게 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행위를 통하여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율법이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특히 자유롭고 열심이고 기뻐하는 마음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세를 올바르게 읽지 못한다. 여전히 수건이 그의 얼굴을 덮어 감추고 있다.


이제 바울은 어떻게 육과 영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서로 다투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내재하는 죄를 죽여야 하는지를 적절하게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의 예로 든다. 그러나 그는 율법이라는 명칭을 영과 육 모두에 적용한다. 왜냐하면 요구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의 본질이듯이 육은 영에 대항하여 싸우며 사납게 날뛰고 자기 자신의 길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영은 육에 대항하여 싸우며 자기 자신의 길을 고집한다. 이러한 씨름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계속된다. 육이 더 강한가 영이 더 강한가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이, 어떤 사람들은 덜 이러한 씨름이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완전한 자기는 두 요소, 즉 영과 육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는 완전히 영적으로 될 때까지 우리 자신과 싸운다.


8장에서 바울은 이러한 싸움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육은 그들을 정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육과 영의 본질을 보여주고 영이 우리에게 자신의 성령을 주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것은 우리를 영적으로 만들며 육에 제한을 가하며 우리에게 죄가 우리 안에서 아무리 격렬하게 날뛴다고 하여도 우리는 영에 순종하고 죄를 죽이고자 하는 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시켜 준다. 그러나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우리의 십자가와 고난만큼 육을 길들이는 데 효과적인 것도 없기 때문에, 그는 고난 속에 있는 우리에게 영과 사랑과 모든 피조물들의 지지를 확신시켜줌으로써 우리를 위로한다 특히 영은 우리 안에서 탄식할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도 육과 죄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우리의 갈망을 공유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 장(章)이 어떻게 옛 아담을 죽이고 육을 통제하는가 하는 믿음의 실제적인 작용을 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9,10,1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를 다룬다. 이 섭리에 의해서 누가 믿음을 갖게 되고 갖게 되지 않는지, 누가 죄를 정복하고 누가 그렇게 할 수 없는지가 먼저 결정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손을 떠난 문제로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달려 있다 - 따라서 우리는 참되게 의롭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가장 큰 필요이다 .우리는 연약하고 흔들리기 때문에 그러한 섭리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지 않다면 단 한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마귀는 분명히 우리 모두를 압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은 변함없으시며 그분의 섭리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고 그 누구도 그 섭리의 성취를 방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도 불구하고 소망을 갖게 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여기서 먼저 그들의 추리력을 사용하여 고상하고 힘있는 방식으로 그들이 선택받은 자들 가운데 있는지의 여부를 쓸데없이 물으면서 하나님의 섭리의 깊은 곳을 탐사하기 시작하는 불경건하고 교만한 사람들의 시도를 멈추게 하여야 한다. 그들은 실패에 의해서 또는 쓸모없는 모험을 거는 것을 통하여 그들 자신에게 재난을 가져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이 서신의 각 장(章)을 스스로 연구하여야 한다. 당신의 죄를 개닫고 그분의 은혜를 아는 방법을 배우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집중하라. 다음으로 1,2,3,4,5,6,7,8장에서 논의되고 있는 죄의 문제와 씨름하라. 그런 다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8장에 이르렀을 때 당신은 9,10,1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섭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식을 배우게 될 것이고 섭리가 주는 확신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수난, 십자가, 죽음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섭리의 문제에 부딪쳤을 때 우리 자신이 상처를 입거나 하나님에게 은밀하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아담을 완전히 죽여야만 우리가 아무런 해도 받지 않고 이교리를 짊어지고 이 독한 포도주를 마실 수 있는 이유이다. 따라서 주의하라! 당신이 여전히 젖을 먹는 어린아이일 때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삼가라. 모든 가르침은 우리에게 적절한 나이가 되고 적절하게 성숙하여 합당한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을 요구한다.


12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는 방법에 관하여 말한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제사장이며 그들이 드리는 희생제물은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돈이나 가축이 아니라 그들의 정욕을 죽인 후의 그들 자신임을 보여준다. 그런 후에 그는 영의 훈육 아래에서의 그리스도의 외적인 행실을 기술한다: 어떻게 그들은 친구, 대적, 동료에게 가르치고, 설교하고, 규율하고, 섬기고, 주고, 고난받고, 사랑하고, 살아가고 행해야 하는지. 이러한 것들은 이미 말한 대로 믿음이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의당 해야 하는 행위들이다.


13장에서 그는 우리에게 세속 권세들을 존중하고 순종할 것을 가르친다. 이 주제는 실제로 그러한 행실이 사람들을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공공의 평화를 보장해주고 선한 시민들을 보호해주며 반면에 악한 자들은 두려움 없이 또는 편한 마음으로 악을 행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도입되었다. 그러므로 선량한 사람들이 그 권세에 봉사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한 권세는 선량한 사람들에 의해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사랑은 다른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는 이 전체를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라 해야 하는 것을 우리를 위해 하셨던 그리스도의 본으로 결말을 짓는다.


14장에서 바울은 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고 아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는 우리에게 약한 자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돕기 위하여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를 사용하도록 가르친다. 이렇게 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복음에 달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열이 일어나서 복음이 멸시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강하게 될 때까지 복음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게 하는 것보다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어느 정도 달래는 것이 더 낫다. 사랑만이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데, 고기를 먹는 문제 및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이 무절제하고 냉정하게 논의됨으로써 쓸데없이 약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진리를 알기 전에 혼란에 빠뜨리게 되는 경우에 이것은 특히 필요하다.


1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본을 인용하여 우리가 명백한 죄인들과 비위에 거슬리는 습관들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하여 연약한 자들의 짐을 짊어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들을 내팽개쳐서는 안 되고 그들이 변화될 때까지 그들에 대하여 참아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대하여 하신 것이고 날마다 계속해서 행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온갖 종류의 불완전한 것들과 아울러 많은 단점들과 악한 습관들을 참으셨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우리를 돕는 데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그런 다음 결론적으로 바울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칭찬하며 그들을 하나님께 추천한다. 그는 자기 자신의 지위와 메시지를 설명하며 그들에게 예루살람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열심히 연보를 하도록 간청하고 자기가 전적으로 사랑에서 그렇게 말하고 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 즉 율법, 복음, 죄, 형벌, 은혜, 믿음, 의, 그리스도, 하나님, 선행, 사랑, 소망, 십자가의 의미를 가능한 최대한도로 풍부하게 설명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서신은 의인이든 죄인이든 강한 자든 약한 자든 친구이든 적이든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며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게다가 모든 것을 성경으로부터 친숙하게 입증하고 있으며, 바울 자신의 경우나 선지자들의 예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다. 이 서신은 아쉬운 점을 남겨놓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성 바울은 이 서신에서 단번에 기독교 교리 전체를 간략하게 설명함으로써 이 서신이 구약전체를 준비하는 길잡이가 되도록 의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서신을 우리 마음 속에 진정으로 잘 간직한다면 우리는 구약에서 발견되는 빛과 권능을 소유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서를 정규적이고도 지속적으로 연구하여야 한다. 하나님게서 이러한 목적에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라바나이다. 아멘.


마지막 장은 인사로 되어 있다. 이 장은 또한 복음과 나란히 유포되면서 보음에 해를 기치고 있었던 사람이 만든 가르침과 관련된 고상한 경고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정확히 성 바울이 로마와 로마 가톨릭주의자들로부터 사람들을 그릇 인도하고 귀찮게 하는 교회법과 교령(敎令)들이 사람이 만든 법률과 규례들의 우글거리는 온갖 구더기들과 아울러 나올 것을 예견했던 것같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에 와서 온 세상을 먹어버렸고 이 서신과 성경 전체를 삼켜버렸을 뿐만 아니라 영의 역사를 방해하고 우리의 신앙을 파괴함으로써 그들의 하나님, 곧 배 이외의 다른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여기서 바울은 그들을 배를 위하는 자들로 묘사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들로부터 구하시기를. 아멘.

ARTICLE

이 서신은 진실로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서 복음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인이 시간을 들여서 한 단어 한 단어를 마음 속에 새겨둘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묵상할 가치도 있다. 이 서신은 영혼의 일용할 양식이며 아무리 자주 읽거나 많이 연구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칠 수 없다. 당신이 이 서신을 더 많이 탐구하면 할수록 이 서신은 보다 더 귀하게 되며 그 향기가 더 좋아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서 이 서문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서신을 가장 좋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할 안내의 글이 되도록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 서신은 논평들과 온갖 종류의 별 상관없는 것들로 덮여서 질식상태에 있어 왔다. 그렇지만 그 핵심에 있어서 이 서신은 성경 전체를 조명하기에 거의 충분할 정도로 밝게 빛나는 등불이다.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용어를 익히는 일이다. 우리는 율법, 죄, 은혜, 믿음, 의, 육, 영과 같은 단어들을 통해 성 바울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읽는다면 우리는 공연히 시간만 허비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율법”이라는 용어를 일상적인 의미로, 즉 어떤 행위들이 허용되어 있거나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그 무엇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통상적인 법률들에 해당하는 바, 당신은 비록 법률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명하고 있는 것을 겉으로 행함으로써 지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내면의 확신들을 따라 판단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당신의 마음 속에서 성취되어야 한다. 당신이 단지 어떤 행위들을 행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의 형벌들은 실제로 외식(hypocrisy)과 거짓말과 같이 우리의 내적인 확신들과 동떨어진 어떤 행위들에 적용된다.


시편 117편[116:11]은 모든 사람이 다 거짓말쟁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선함을 싫어하고 악을 좋아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 속에서 발견되는 특징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함을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으로부터 지키고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비록 겉보기에 우리가 많은 미덕들을 행하고 영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듯이 보일지라도 죄가 들어오고 하나님의 진노가 불러일으켜진다.


그러므로 2장에서 성 바울은 유대인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율법을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말하지만 그가 말하려는 요지는 아무도 율법을 “행위”를 통하여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나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22f].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겉으로 보기에 당신은 율법을 꼼꼼하게 지키고 있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며 재빨리 모두 다 가르치려고 하고 있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당신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알지 못하고 있다. 겉보기와 행실에 있어서 당신이 형벌이 두렵거나 보상을 바라고 율법을 지킨다고 한다면 당신은 자유로운 선택과 율법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하는 것ㅇ l아니라 마지못해서 그리고 강제 아래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이 되고 만약 율법이 없다면 당신은 다른 식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논리적 결론은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당신은 율법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도적이고 실제로 도적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적질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물론 이런 유의 외적인 행실은 이런 유의 속임수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당신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가르치는 것을 알고 있지 않으며 율법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아니 오히려 바울이 5장[:20]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율법은 당신의 죄를 증가시킨다. 사람이 율법을 미워하면 할수록 율법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더욱더 요구한다.


이것이 7장[:14]에서 바울이 율법을 영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율법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라면 우리의 행위는 그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에 영적이다. 하지만 율법이 영적이기 때문에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당신의 내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 그러한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며, 이 영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요구들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진정한 소원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은 두려움이나 강제 아래에서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행해진다. 그러므로 율법은 영적이기 때문에 율법이 영적인 마음들에 의해 사랑을 받고 율법이 그러한 유의 마음을 요구할 때 그 영이 우리 마음 속에 있지 않다면 죄는 그대로 존재한다. 율법 자체는 옳고 선하고 거룩하지만 율법에 대한 적대감과 불평불만은 그대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하는 것과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사람이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와 힘으로 행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율법에 의해 요구된 행위들을 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모든 행위들은 우리가 율법을 싫어하며 율법을 속박이라고 느끼는 한 헛되며 소용없다. 이것이 3장[:28]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이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학교에서 논쟁을 일삼는 궤변론자들이 우리에게 행위를 통하여 은혜를 받을 준비를 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를 그릇 인도하고 있는 것임은 분명하다-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마지못해서 선행을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가 그런 행위들을 통하여 스스로 선하게 될 준비를 할 수 있겠는가? 마지못한 적대적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까닭이 있겠는가?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요구사항들을 기쁘고 사랑스럽게 충족시켜야 한다. 마치 율법이나 그 형벌들이 존재하지 않는 양 율법에 대한 속박감을 느끼지 않고 덕스럽고 올바른 삶을 살아라. 그러나 이 기쁨, 이 속박받지 않는 사랑은 성 바울이 5장[:5]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 속에 부어진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첫 단락에서 말했듯이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믿음 자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통해서만 온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한다. 바울이 3,4,10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그분이 사람이었는데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고 선포한다.


우리는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얻어진 영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영은 우리에게 율법이 목표로 하고 있는 행복과 자유를 준다. 그리고 이것은 선행이 진실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정죄한 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성취한다고 말하고 있는 3장[:31]의 의미이다.


성경에서 ‘죄’라는 단어는 우리의 육체적 행위에 의해 행해진 외적 행위들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행위와 관련된 모든 상황들, 우리로 하여금 행위를 하도록 유인하거나 촉발시키는 모든 상황들을 의미한다. 특히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작용하는 충동들. 또한 이것은 “행함”이라는 단일한 용어가 사람이 완전히 굴복하여 죄로 떨어지는 경우를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외적으로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여전히 몸과 영혼의 완전한 파멸에 떨어져 있을 수 있다. 특히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보며 모든 죄의 뿌리이자 근원, 즉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의 불신앙을 바라본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선한 행위들을 행하고자 하는 영과 소원을 주듯이 불신앙은 죄의 유일한 원인이다. 그것은 육을 높이며 창세기 3장[:6]에서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 일어났던 것처럼 명백하게 잘못된 행위들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을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불신앙을 따로 지적하여 그것을 죄라고 불렀다. 요한복음 16장[:8f]에서 그리스도는 영이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인데 …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선행 또는 악행이 행해지기 전에, 그것들이 선한 열매 또는 악한 열매로 드러나기 전에 신앙 또는 불신앙이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여기에 모든 죄의 뿌리, 수액(樹液), 주요한 동력이 있다. 이것은 성경이 뱀의 머리, 옛 용의 머리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는 아담에게 약속한 대로 그 머리를 부수었음에 틀림없다.


은혜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우리를 향하여 지니시는 인자 또는 호의이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꺼이 그리스도를 주고 우리 위에 성령과 하나님의 축복을 부어주신다고 할 때 은혜(grace)와 은사(gift)는 서로 다르다고 하겠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호의 등을 말하고 있는 5장[:15f]에서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은사와 영을 날마다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할지라도 오히려 그것들은 부족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 7장[:14-23]과 갈라디아서 5장[:17f]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옛 욕망들과 죄악들이 여전히 우리 속에 아른거리며 영에 대항하여 싸우기 때문이다.


또한 창세기 3장[:15]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의로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정도로 은혜는 충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많은 은사들처럼 파편적으로 나뉘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완벽하게 사로잡아 우리의 중보자인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게 하며 은사들이 우리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바울이 자기 자신을 여전히 죄인으로 묘사하고 있는 7장[:9f]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과 (여전히 불완전한) 은사들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어떠한 고발도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8장을 당신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의 육이 아직 죽지 않은 한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기 시작하는 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의와 선의를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죄들을 보지 않으시며 그것들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죄가 죽을 때까지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갖고 있는 믿음에 따라 우리를 다루신다.


믿음(faith)은 꿈꾸는 그 무엇, 인간적인 환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 용어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들이 믿음에 도덕적인 진보나 선행들이 수반되지 않음을 보면서 여전히 믿음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하게 될 때, 그들은 믿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우리가 올바르게 되고 구원을 얻으려면 “행위들”을 하여야 한다고 선언하는 오류에 빠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들을 때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 속에서 그리고 그들 자신의 추리력으로 그들은 그들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여기는 한 생각을 날조하여 이것을 “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사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에 상응하는 체험을 갖고 있지 않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더 나은 삶을 가져오지도 못한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으키시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 요한복음 1장[:13].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힘에 있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이 동반된다. 오, 믿음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얼마나 생생하고 창조적이고 적극적이고 강력한 것인지. 믿음은 내내 좋은 것 외에 다른 것을 행할 수가 없다. 믿음은 결코 행해야 할 선행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질문이 던져지기 전에 선행을 이미 행하고 계속해서 선행을 행하고 있다. 이런식으로 활동적이 되지 않은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믿음을 손으로 더듬어 찾으며 선행을 찾아다니지만 믿음이 무엇이며 선행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믿음과 선행에 대하여 말도 되지 않는 소리들을 지껄인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있고 흔들림없는 신뢰이자 신앙인데 그것이 너무도 확고하기 때문에 사람은 믿음을 인하여 천 번이라도 죽을 수 있다. 이런 유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 이런 유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기쁘고 활기차게 만들며 하나님 및 모든 인류와의 관계에서 열심을 내도록 만든다. 이것이 성령이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무엇에 내몰려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모든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며 자기에게 그러한 은혜를 보여주었던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 온갖 종류의 곤경을 겪고자 한다.


실제로 불로부터 열과 빛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믿음으로부터 행위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의 그릇된 인식들과 자기들이 믿음과 행위에 관하여 영리한 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는 다른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들을 주의하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당신 안에 믿음을 창조해주시도록 간구하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아무리 스스로를 속이려고 할지라도 또는 당신의 노력과 능력이 무엇일지라도 당신은 언제나 믿음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의(righteousness)는 바로 우리가 마음 속에 갖고 있는 믿음과 같은 것으로서 “하나님의 의”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다. 왜냐하면 이 의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도록 사람의 본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죄로부터 해방되며 하나님의 계명들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존귀를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따라 기꺼이 사람들을 섬기며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무를 이행한다. 이런 유의 의는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나 우리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통상적인 자연과 과정 속에서 생겨날 수 없다.


아무도 스스로에게 믿음을 줄 수 없으며 불신앙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 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은 자신의 가장 작은 죄악들조차도 없이할 수 있는가? 믿음이 없이 행해진 것이나 불신앙의 결과로서 행해진 것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꾸며졌다고 하더라도 거짓된 것, 자기 기만, 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 로마서 14장[:23].


육(flesh)과 영(spirit)은, 육은 오로지 도덕적 불결과 관련이 있고 영은 오로지 우리의 마음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 바울과 요한복음 3[:6f.]에서 그리스도에 따르면 육은 육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 즉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모든 감각을 포함하여 몸과 영혼, 자기 자신 전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육에 기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아직 받지 못한 사람이 갈라디아서 5장[:19f.]이 육체의 일로 묘사하면서 육체의 외식과 가증스러운 행위들로 부르고 있는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영의 고상한 것들에 관하여 유쾌하게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을 “육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게다가 로마서 8장[:3]은 율법이 육에 의해 약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도덕적 불결만이 아니라 모든 죄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성격상 좀 더 영적인 일종의 악함인 믿음의 결여에 대하여 언급한다.


반면에 영적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 때, 베드로가 배를 띄워 고기를 잡고 있었을 때처럼 가장 외적인 행위들에 몰두해 있는 사람에게 흔히 적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육"이라는 용어는 사고와 사실에 있어서 몸과 현세의 삶에 봉사하며 살아가며 수고하는 사람에게 적용된다. “영”이라는 용어는 사고와 사실에 있어서 몸과 현세의 삶에 봉사하며 살아가며 수고하는 사람에게 적용된다. “영”이라는 용어는 사고와 사실에 있어서 영과 내세의 삶에 봉사하며 수고하는 사람에게 적용된다. 당신이 이 용어들에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결코 바울의 로마서나 성경의 어떤 책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제롬이든지 아우구스티누스든지 암브로시우스든지 오리겐이든지 아무튼 그 누구든지 이 용어들을 다른 식으로 사용하는 모든 교사들을 경계하라. 그들보다 더 뛰어난 인물들일지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제 서신 자체에로 눈을 돌려보자.


복음을 설교하는 자의 첫 번째 의무는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하고 죄의 본질을 기술하는 것이다. 영으로부터 나오지 않거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서 경험되지 않는 모든 것은 죄악된 것이다. 설교자의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의 모습과 그들의 통탄스러운 상태를 보여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겸손히 도움을 간청하게 만들어야 한다.


성 바울은 이러한 지침을 따라서 1장에서 당시에 몇몇 중대한 죄들과 불의들을 정죄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교도들의 죄악들이었고 여전히 지금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동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의 불경건함과 악함으로 인하여 하늘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날마다 인정하지만 은혜로부터 떨어진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가 너무도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예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은 눈이 멀어서 끊임없이 악으로 떨어진다. 그 결과 거짓된 우상들을 섬기는 것에 더하여 불미스러운 죄들과 온갖 종류의 악을 범하게 된다. 수치를 모르기 때문에 처벌받지만 않는다면 다른 죄들도 범한다.


2장에서 바울은 이러한 벌들을 확장해서 겉으로 보기에 경건해 보이지만 은밀하게 죄들을 범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유대인이었고, 또한 그러한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쁨과 사랑 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미워하고, 모든 위선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한다. 그들은 시기, 증오, 교만, 온갖 종류의 부도덕으로 가득 차 있지만 스스로를 흠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 - 마태복음 23장[:28]. 이들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멸시하는 사람들로서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다. 그러므로 성 바울은 율법의 참된 설교자로서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자신의 본성이나 터무니없는 공상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내릴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이런 유의 사람들을 명백한 죄인들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는 그들은 완악하며 회개치 않는 자들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3장에서 그는 이 두 부류를 함께 다루면서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비록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 있었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진리나 믿음을 효력없게 하지 못했다. 그는 아울러 시편 50편이 말하고 있는 것, 즉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신실하시다는 것을 인용한다. 그런 다음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사실로 돌아가서 자신의 주장을 성경을 통해 입증한다. 그는 아무도 율법의 요구사항들을 성취함을 통하여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단지 죄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그는 경건하고 거룩하게 되는 올바른 방식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을 정교하게 제시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며 아무도 하나님에 의해 시인을 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아무런 공로 없이 올 수 있을 따름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피를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구원을 얻었다. 우리를 위하여 그분은 하나님의 “속죄소”가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에 범했던 모든 죄들을 사하신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믿음을 매개로 하여 수여하는 자신의 의만이 우리의 유일한 살 길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복음이 설교될 때 이 의를 나타내신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는 이미 그 복음을 증언하였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율법에 따라 행해진 행위들을 폐기하고 그 행위들에게 돌려지는 존중을 부인하지만 율법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