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히브리서 6장에 대한 정창욱(빚진자)의 반론에 대한 반론

baromi 2005. 9. 28. 00:00

히브리서 6장에 대한 정창욱(빚진자)의 반론에 대한 반론


빚진자님의 반론을 잘 읽었습니다. 님께서 지적하신 몇몇 점들에 대하여 저의 재반론을 제시하는데, 사실 본문 어휘들과 관련된 님의 반론은 저의 글을 자세히 읽지 않으셨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어휘들과 관련하여 님께서 제시한 문제들에 대하여 이미 저의 글에서 설명하였기 때문입니다.


1. 접속사 gar와 수신자의 문제

빚진자님께서는 1-3절과 4-6절 역시도 gar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시면서 1-3절의 젖먹이 그리스도인들이 4-6절에서도 동일하게 그 대상인데 그들에 대한 경계구절로 4-6절이 제시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1-12절은 모두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먼저 gar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님께서는 gar가 가지는 "그러므로"라는 의미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헬라어 사전만 보더라도 gar는 for, since, then, indeed, certainly 등의 의미를 가집니다. gar가 “왜냐하면”이라는 이유가 아니라는 것은 우선적으로 문장자체에서 자연히 드러납니다.


3절과 4절은 이렇게 됩니다.

.... εανπερ επιτρεπη ο θεος. Αδυνατον γαρ τους απαξ ....


6절과 7절은 이렇습니다.

.... και παραδειγματιζοντς. γη γαρ η πιουσα .....


즉 6-7절과 달리 3절 다음에 4절은 대문자로써 분명히 문장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사용된 gar는 “for나 since”가 아니라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하여 말할 때 사용하는 “then, indeed, certainly”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대문자로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gar의 의미가 “for, since”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님께서 주장하듯 그 수신자가 동일하게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의미로는 1-3절과 4-6절을 매끄럽게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4-6절의 언급들은 1-3절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래에서 언급할 것이지만 1-3장의 주어가 “우리”이지만, 4-6절은 “그들”이라는 것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다음으로 수신자의 문제입니다.

님께서는 1-12절의 수신자는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4-6절에서 언급하는 타락한 그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저는 님의 주장 전반부-1-12절의 수신자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님의 주장의 후반부 4-6절에서 언급하는 타락한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4-6절의 타락한 그 사람들은 수신자가 아니며, 또한 4-6절의 타락한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1-12절 전체의 수신자가 그리스도인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히브리서 기록자는 1-12절 모두, 아니 히브리서 전체의 대상을 그리스도인들로 하지만, 4-6절에서 경계의 예로든 "타락한 어떤 사람들"은 서신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고 또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즉 부정적인 예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들이 아이들에게 경계의 예들을 들 때, 좋은 예들을 들 수도 있지만 부정적인 예들을 들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아들과 함께 신호등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빨간불인데도 불구하고 건너갔습니다. 그것을 보고 저는 아들에게 "애야, 저 사람들은 잘못하는 것이란다. 저 사람들처럼 하면 안된다. 파란불 일때에만 건너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 대상은 누구입니까? 빨간불인데 건너간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이야기의 대상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대화의 직접적인 대상인 아들입니다. 히브리서 6장1-12절도 이와 같은 상황입니다.

이것은 빚진자님께서 반론의 3번항목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3번항목에서 빚진자님의 지적의 핵심은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인”에게 쓰고 있다가 갑자기 “거짓신자”들이 읽으라고 본문을 쓸 논거가 전혀 없습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저 역시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6장 4-6절을 타락한 그 사람들(거짓신자들)이 읽으라고 기록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 역시 히브리서 전체가 대상으로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단지 지적하는 것은 이 부분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계의 예로서 거짓된 신자들을 예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거짓신자들이 교회 내에 여전히 남아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타락하였고 떨어져 나갔고 배교한 사람들, 즉 이미 가시와 엉겅퀴를 낸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들이 교회 내에 있지 않다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대상으로 본문이 기록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본문은 그런 사람들을 예로 들어, 참된 신자들에게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3절과 4-6절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드러납니다.

a. 1-3절의 주어는 "우리"입니다. 4-6절의 주어는 "그들"입니다.

b. 1-3절에서 우리는 “완전한데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것을 허락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4-6절에서 그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의도적으로 욕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c. 1-3절에서 우리가 경험한 것은 죽은 행실을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들, 안수, 죽은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것들을 알았고 경험했고 고백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또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4-6절의 그 사람들이 경험한 것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들을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에서 타락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의도적으로 욕을 보였습니다.


경험한 내용의 분명한 차이를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앞선 글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출발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관련하여 다섯 가지 요점을 제시하였습니다. 그에 비추어보면, 1-3절에 나오는 우리는 분명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출발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4-6절의 그 사람들이 경험한 것에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6절에서 언급하는 그 사람들과 관련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어떤 경험들을 하였다는 정도입니다. 문제는 그런 경험들만으로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만약 1-3절에서 우리가 경험한 내용 중에서 적어도 두 가지,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지는 것만이라도 4-6절에 나온 그 사람들이 경험한 내용에 속한다면 저는 그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전혀 그런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2. 본문 어휘에 대한 문제

빚진자님께서 언급하신 네 가지 석의방법론적 순서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앞선 저의 글에서 계속해서 지적하였듯, 히 6장 4-6절에서 사용된 단어들 자체는 그 자체의 문맥에서 분명한 의미, 즉 그 단어들 자체가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시작단계(저의 글에서 가장 먼저 제시했습니다)를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 단어들이 히브리서 전체문맥에서 사용된 예들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앞선 글에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비추다”와 “맛보다”란 단어만 여기에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단어들에 대해서는 앞선 글을 좀더 자세히 읽으시면 될 것입니다.

프티조(비추다)는 단어

빚진자님께서는 이 단어가 히브리서에서 나타난 두 번 모두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고 있다고 단정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히 10:32절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에서 “빛에 비취임을 받았다”는 단어가 독자들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 즈음에 발생한 어떤 사건을 설명하는데 사용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복음을 듣고 믿었다”는 것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에서 이 단어는 “복음에 대하여 듣고 배우는 것”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히 10:32절이 언급하는 대상은 지금은 분명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빛을 받았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았다”는 언급으로부터입니다. 즉 “빛을 받았다”라는 단어 그 자체가 “그들이 복음을 믿고 구원하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빛을 받은 그 순간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순간, 그리고 고난의 큰 싸움을 참는 순간에는 시간적인, 의식적인, 심정적인 등등 차이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예는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바울의 예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빛에 비취임을 받았고 직접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메섹에 들어가 아나니아를 만날 때까지의 삼일동안에 바울에게 심정적으로, 의식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본문 상에서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빛을 받았다는 사실자체가 그리스도를 믿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6장에서 빛에 비취임을 받았다는 언급 그 자체가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명백하게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만약 히브리서 6장 4절에서도 히 10:32절이나 사도바울의 예와 같이 빛을 받은 이후 그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의 모습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히브리서 6장 4-6절에서 서술하는 빛을 받은 그 사람들이 보여주는 빛을 받은 이후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의도적으로 십자가에 못박고 욕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히 6:4-6절에서 언급한 그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규오마이(맛보다)라는 단어

이 단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논점은 이 단어 자체만으로는 그 사람들이 참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저의 글에서 지적하였듯 그들은 하늘의 은사, 하나님의 선한 말씀, 내세의 능력을 실제로 맛보았습니다. 즉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자동적으로 나타내지는 않습니다. 님께서 예로 든 히브리서 2장 9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맛보았다는 구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핵심문제는 그들의 경험 혹은 그리스도의 경험이 실제적인 경험이냐 아니냐 가 아닙니다. 핵심문제는 히 6장 4-6절에서(혹은 성경전체에서) 하늘의 은사, 하나님의 선한 말씀, 내세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했다는 언급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필수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느냐는 점입니다. 이미 앞선 글에서 지적하였듯, 우리들은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도 또한 성경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은사, 하나님이 선한 말씀, 내세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하였다는 언급자체만으로 우리는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저는 엄격한 의미에서 칼빈주의자는 아닙니다.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모든 것들에 다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칼빈을 존경하고 칼빈의 가르침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며 또한 성도의 견인을 느슨한 의미에서 수용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6장에 대한 견해를 제시한 것은 본문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제가 본문에 대한 견해에서 계속해서 지적한 핵심 내용은 히브리서 6장 4-6절에 나오는 그 사람들에 대한 언급에 사용된 용어들만으로는 그들이 (타락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히브리서 6장 4-6절의 말씀이 소위 성도의 견인을 지지하거나 혹은 반대하는 근거로 사용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이런 저런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지만 좋은 교제와 논의들이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