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나눔님의 글의 결론부분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다른 여러 사람들의 주장들을 인용하면서 그럴듯하게 주장하여도 그러한 인용이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주장 자체는 교부들의 신화교리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갑바도기아교부들의 신화교리를 인정하고 고백하나 지방교회의 신화교리는 최근 상당히 위험한 주경에 근거한 것들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위의 나눔님의 결론부분의 글들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해 보겠습니다.
(나눔님)
(홀리죠이)
지방교회의 신화교리는, 자신들이 신화가 되어도 창조주가 되지 않고 여전히 피조물이 됨을 인정합니다. 한편으로는 건전한 것 같이 자신들의 견해를 주장합니다. 하지만, 위에서도 분명히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의 적셔진다(saturated)고 합니다. 하나님으로 침투된다(permeated)고 합니다.
그저 단순하게 하나님의 도덕적인 거룩의 성품을 닮아간다고 하지 않고, permeated, saturated와 같은 표현을 쓰는 것은, 신화된 존재로서의 인간이 여전히 피조물이고 창조주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신화된 인간의 의미가 하나님만이 고유하게 지니신 신적 본성(저는 신격과 신성을 구분하는 저들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이 인간 안에 permeated되고 saturated된다는 식의 표현은, 이 표현들의 의미에 대해서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가지신 고유하신 신적 본성이 permeated, saturated된다는 것은, 말로는 피조물일 수 밖에 없다고 하고 창조주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주장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 오해를 받지 않으려면 이런 표현들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든지, 아니면 자제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 한 그런 오해를 받는 것은 이런 표현들이 신비주의자들의 체험들을 묘사하고 있는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눔님)
(홀리죠이)
지방교회는 하나님의 "아들"(휘오스)됨이라는 말의 원어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되는 하나님의 아들됨이라는 말을 거듭난 모든 신자들에게도 적용하는 것은 심히 위험합니다. 일반적으로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테크나)라고 합니다. "우리는....하나님으로 난다"고 하는 말은, 앞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아무리 신화되어도 피조물이요, 창조주가 아니라는 단서를 단다고 하더라도, 조심성이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화교리를 받아 들여서, 우리가 deified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인간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deified된다는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신적인 본성과 본질, 실체가 우리 안에 들어온다든지, 우리가 그런 것으로 변화된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을 닮아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와 같아질 것이라고 하면서 사도바울은 곧 이런 소망이 있는 자는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1요3:3)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런 도덕적 성품으로서의 신적 성품을 닮아간다는 면에서의 deified가 아닌, 그 신적 본성을 공유한다는 식의 지방교회 교리는, 아주 위험합니다. 조심해도 위험합니다.
(나눔님)
(홀리죠이)
이런 유기적인 강조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해석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부분이 된다고 해서, 모든 부분들이 없어진다면 그리스도가 없어지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신자들이 없어도 그리스도는 존재합니다. 포도가지가 없어도 포도나무는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은혜로 신자들을 당신의 가지로 삼으신 것에 은혜로 감사하는 것은 정당하나, 나뭇가지가 무엇이나 된 것처럼 자랑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우리가 그 분의 일부됨의 의미가 절제되어서 표현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나눔님)
(홀리죠이)
위의 말은, 조심해서 표현하는 듯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우리가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말입니다. 곧, 신자가 가지는 생명이 창조되지 않은 생명이라는 엄청난 주장을 하는 셈입니다. 몇번 반복해서 강조했거니와 신자들의 새생명은 창조된 생명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는 그리스도는 창조되지 않은 생명입니다. 신자들의 창조된 생명과 그리스도의 창조되지 않은 생명을 혼동하고 뒤섞어 "우리가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심히 위험합니다.
"오직 그 분 안에서만 하나님"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하는 듯 하나, 아주 교만한 주장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나눔님)
성도의 영화를 하나님이 되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에, "하나님이 되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신화의 교리를 인정하고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위험한 표현임을 아실 것입니다. 도덕적 성품으로서의 신적 성품을 가진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신적 본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들은 "본성"이라는 개념을 오해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신적 본성과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그 말 자체가 "창조주"가 된다는 뜻입니다. "본성"이라는 개념은 본질적 성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적 본성이란, 신만이 가지는 고유의 본성을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신적 본성을 가진다는 의미로서의 "하나님됨"을 강조하면서, 여전히 피조물이요, 창조주가 아니라도 하는 것은, "사각형이면서 원"이 되는 도형을 주장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모순이란 뜻입니다.
지금까지 전통개혁신학은 이런 모순적 표현을 피해 왔습니다. "신적 본성"이란 용어를 혼동하고 있는 나눔님과 지방교회의 위험한 주장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나눔님)
(홀리죠이)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신 과정을 통하여 죄인이 성도가 되고, 그 성도가 신화되는 과정을 그 역으로 추정하고 있는 나눔님과 지방교회의 주장은 위험합니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말도 애매모호합니다. 만일, 표현한다는 말을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나타내고 증명한다"는 뜻이라면 아주 위험합니다. 그런 의미로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되었지만, 결코 하나님이 된 것이 아니고 여전히 사람이었습니다. 거듭난 자들이 물론 아담 그 이상으로 신화가 되어지지만, 결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나타내고 증명한다는 의미로서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신화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신화"가 됩니다.
지방교회는, 신화교리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신화의 목적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말을,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말이나 뜻이나 언어나 태도로 "증거한다"는 의미로서의 "표현한다"는 뜻이라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위의 표현이 그런 뜻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을 공유하고 소유하고 permeated되고, saturated되어서 그렇게 하나님된 존재됨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정말로 위험한 주장입니다.
죄인들이 의인이 되어서 영광의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성품에 참예한자 된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의 그 고유하신 그 어떤 것에도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초청에 의하여서 그 분의 거룩하신 도덕적 성품을 닮아서 그 분과의 교제에 합당한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로서의 신화교리는 충분히 용납되고 교부들이,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이 용납하고 그 교리로 즐거워하며 소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지방교회의 신화교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위의 주장들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위험합니다. 아주 위험합니다.
(나눔님)
저의 이런 경계는 원세호님이나 기타 이단감별사들의 주장과는 전혀 인간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 지도 잘 모릅니다. 단지 위의 지방교회의 주장은, 전통적 개혁교회의 주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앞으로 기회있는 대로 전통적 개혁교회의 주장을 이곳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위의 지방교회에서 혹 개혁교회의 주장을 들어서 인용하고 있지만, 얼마나 잘못된 인용인지 개혁교회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금방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눔님)
(홀리죠이)
개혁신앙을 가진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삶의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만 두지 않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에도 두고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또한 그 방법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 것만 아니라고 어떤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상태는 곧 하나님과의 유기적 연합과 교제를 말합니다.
성도의 삶의 목적에 대한 이런 개혁교회의 설명과 지방교회의 설명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위에서도 분명한 것처럼, 지방교회의 관심은 인간의 인간이상의 그 무엇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죄인되었던 자들이 의인이 "되고", 성화"되며", 영화"된다"는 의미에서의 "됨"을 인정하는 것은 옳습니다. 성도된자 들은 이렇게끊임없이 "되어야 할 "중도적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 됨이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을 공유한다는 식의 하나님됨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어선 것입니다. 영광과 영원의 하나님과의 교제와 연합을 오해한 것입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을 오해한 것입니다. 즐거워할 것 그 이상을 즐거워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험한 것입니다.
(나눔님)
(홀리죠이)
윗부분에 나오는 성경구절에는 한 구절도 이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을 사람이 신적 본성과 생명을 가진다는 의미로서의 "하나님-사람들"이 된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것에 위의 성경구절들을 적용하는 것은, 성경적 기초가 없는 주장입니다.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한다고 해서 성경적인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되도록 부추겼던 사단(뱀)도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합니다. 지방교회가 이런 사단의 전철을 밟지 않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눔님)
(홀리죠이)
"이러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는 것이 윗말의 관건입니다. 앞의 말과 관련시키면, "하나님이 된 사람"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곧 신적 생명과 본성을 창조주되신 하나님과 더불어서 공유하게 된 "하나님-사람들"을 "이러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으로 충만한 <한 온전한 사람>, 혹은 <한 새사람>(엡2:15)에 대한 이해는 바람직 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성도에 대한 이해가 이제는 잘못된 교회의 이해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과 생명을 가진 자들로 오해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성도의 유기적 연합을 그리스도와 성도간에는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오해하게 합니다.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오해합니다. 왕국의 실제체험에 대해서 오해하게 합니다. 지방교회의 신화의 개념이 오해케하는 것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문장인,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영원토록 만물을 다스리고 이들을 통해서 표현되신다'고 하는 말도 위험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이 "신화"되어져서 "하나님"이 된다면, 창조주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실까요? 존재하실 이유가 없어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방교회의 신화교리는 바로 하나님을 축출하는 아주 위험한 교리가 되는 셈입니다. 인간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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