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심자료

[스크랩] Re:폴님이 곡해하시는 부분에 대하여(첨가)

baromi 2005. 5. 16. 15:03

주일모임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늘 예배와 교제 중에는 특별히 성령강림의 의미가 강조되고 또한 교제 중에 주의 성령의 임재가 누려지는 복된 모임이었습니다. 그 흥분과 감격을 가진 채 돌아오니, 벌써 밤이 늦어 지금 12시가 넘었습니다.

 

폴님에게 약속했던 글을 마저 적어야겠다 싶어서 아래와 같이 글을 올려 놓습니다.

 

                          *                        *                                 *

 

(폴님)

 

이곳에서 지금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다음 두 가지 큰 주제가 함께 논의되어 왔습니다.

 

1. 고후3:17 본문(또는 고전15:45)을 근거로 <경륜적인 관점에서 '예수는 성령이시다>라고

해석하는 관점이 소위 양태론 이단사상으로 정죄될 만 한 주장인가, 아니면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그런 주장을 함으로 양태론 이단 사상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이유에서건 위격의 동일시만 했다하면 더 들어볼 것도 없이 무조건 양태론 이단이다 라고 단정 지었던 과거의 한국교계의 시각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 제입장 입니다. 만일 위 주장이 양태론적 관점이라면 논문과 책을 통해 동일주장을 하고 있는 합동 신대원 총장인 <박형용> 박사도 양태론자로 공식 정죄되어야 잣대가 일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고전15:45 본문을 근거로 예수=성령(기능상)을 주장 하는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조직신학자 <개핀> 교수도 양태론 이단임으로 그 분에게 배운 후 국내 신학교 내에서 가르치는 사람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이외에 같은 주장을 한 루이스 스미디즈 책자 번역인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여수룬)도 보급되지 못하도록 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들이 자신의 고유사상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성경본문이 경륜적인 삼위일체 관점에서 ‘예수=성령’을 말한다고 ‘해석’을 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해석이 바르지 않다면 자신들의 바른 성경 해석을 내어 놓아야 할 터인데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 쟁점으로 삼아 자신의 대안적인 성경적인 해석을 내어 놓은 분이 없습니다. 앞으로 대안적인 해석이 나오면 그 때 가서 이 둘 중 과연 어떤 것이 고후3:17, 고전 15:45 본문을 제대로 해석한 것인지를 판단해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주제는 현재 여기까지 논의가 되었습니다.)

 

(홀리죠이)

 

현재의 논의를 정리하신다면서 저의 견해를 곡해하시는 것 같아서 토를 붙입니다. 저는 고후3:17이나 고전15:45를 근거로 해서 삼위일체의 경륜적인 면에서 예수가 성령이다고 주장하는 것을 양태론적인 이단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그런 주장의 위험과 오해가능성을 지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와 하나이다”고 하셨지만, “나는 아버지이다”라고 하신 적이 결코 없으셨던 것처럼, “예수와 성령이 하나이다”라고 할 수는 있어도, “예수가 성령이다”라고 하는 것은, 삼위의 2위와 3위를 혼동하는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경륜적인 측면>이라고 구실을 붙인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성령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양태론적인 혼동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큰 표현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박형용, 개핀, 스미디즈가 예수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것은 경륜적인 면에서입니다. 그러한 그들의 경륜론적 측면에서의 설명, 곧 고전14:45와 고후3:17에 근거한 “예수가 성령이다”라는 설명은, 예수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의 불가불리됨, 그 사역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이지, 예수의 본체와 성령의 본체가 같다는 면에서의 “예수가 성령이다”는 뜻이 아닙니다. 경륜적인 측면에서의 설명이란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예수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의 일치를 말하지, 예수의 본체와 성령의 본체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경륜적인 측면에서의 설명이란 뜻입니다.

 

그들은 경륜론적 측면에서의 예수와 성령의 사역의 동일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이단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저는 강조해 왔습니다. 제가 그들을 이단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폴님이 지금까지의 토론을 정리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토론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인상이 듭니다. 지금까지의 저의 설명들을 다시금 참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경계하는 것은, “예수가 성령이다”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의미를 “경륜적인 측면”이라고 하면서도, 성령이 인성과 신성을 가진 존재로 설명하는데까지 나아가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을 비록 박형용, 개핀, 스미디즈를 빙자해서 한다고 해서, 그들과 함께 같은 주장을 한다는 식으로 강변하는 것은, 박형용, 개핀, 스미디즈를 오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곡해하는 것이요, 또한 그들의 주장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인성과 신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고 또한 예수(그리스도)가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위격의 혼동이요, 양태론의 전형적인 주장임을 보여줍니다. 이런 주장이 옳다고 입증하려면, 성령이 인성과 신성을 가진 존재임을 성경적으로 입증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부활후의 성령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폴님)

 

2. 이외에 또 하나 중요한 문제제기는 고전 15:45의 ‘생명주는 영’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으로서 성육신 때 입으신 인성이 포함된 영인가 아닌가’ 하는 논의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 홈에서는 우리 안에 들어오신 영이 인성을 포함하는가 하는 형태로 논의가 되어 왔습니다.

 

만일 ‘마지막 아담’이 예수님이고 <생명주는 영>은 <부활한 예수님>임을 인정한다면, 자연적으로 ‘생명주는 영’ 안에도 인성이 포함된다고 해야 일관성이 있습니다. 만일 ‘생명주는 영’은 인성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예수님에겐 인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게 매우 위험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즉 주 예수님의 양성을 부인하는 이단이 되고 맙니다. 이런 이유로 누구든지 <생명주는 영 안에 인성이 포함됨>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이 포함된 영이 존재 한다>는 인식 자체도 한국 교계 대부분의 성도들에겐 매우 새로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7:39의 ‘성령(그영)이 아직 계시지 아니하셨다’ 라는 말씀이 언급한 그 영이 주님 부활 후 존재하게 되었음을 지적한 앤드류 머레이의 ‘그리스도의 영’이란 책을 소개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아마 이 단계를 내면적으로 충분히 소화하고 확신을 가지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만일 위 단계가 이해가 되었다면 그 다음에 우리는 거듭났을 때 <신성과 인성 모두가 포함된 생명주는 영>을 영접했는가 아니면 통상의 이해대로 (인성은 당연히 없으신) 성령님만 안에 모셔드렸는가 가 쟁점이 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3:6의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또는 고전 6:17의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본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기초적인 논의와, 골1:27, 3:4, 고후13:5, 요일5:11 등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내주를 말하는 성경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로 심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주제는 더 깊어서 아마 인터넷상의 논의로는 어떤 만족 할만한 결론을 기대하기엔 무리이며, 추후 어떤 분이 심도 깊은 연구를 통해 논문 형태로 다룰만 합니다.)

 

(홀리죠이)

 

이 부분에 있어서도 폴님은 오해가 있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시다는 것이고, 또한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신성과 인성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있다고 해서 그 의미를 살과 뼈를 가지신 채로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주장한 것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은 불리불가한 상태로서 인성은 하나님의 우편에 있고, 신성은 천지만물 가운데에 편만한 중에 바로 우리들 속에도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의 주장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됨을 결코 인정하지 않고, 동시에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이시되, 그렇다고 해서 살과 뼈를 가지신 인성으로 우리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신성으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거니와 앤드류 머레이의 “그리스도의 영”이란 책의 주장은, 결코 폴님의 견해를 지지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한 구절도 폴님의 견해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폴님께서는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주장을 넘어서서, 성령도 신성과 인성을 가지시고 계신 분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마치 한국교회 교인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양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알 필요도 없는 주장을 그런 식으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7:39의 “성령(그 영)이 아직 계시지 않았다”는 말씀에 대한 앤드류 머레이의 해석도 전혀 폴님이 이야기하는 것과 다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으로서 그의 인성을 가지심이 우리 죄인들에게 끼치는 영향의 영광스러움을 강조하는 중에, 그리스도의 영이 곧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그리스도의 영이심을 강조하는 것이지, 그 영이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셨다는 식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폴님이 보시는 것은, 앤드류 머레이의 글에 대한 폴님의 오해에 기인합니다. 계속 그런 주장을 하시려면, 어느 구절이 과연 성령이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진 것으로 앤드류 머레이가 주장하는 지를 구체적으로 거론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를 빙자해서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것은 앤드류 머레이가 무척 섭섭해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앤드류 머레이를 거론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코 앤드류 머레이는 님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폴님은 인성과 인격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실 때에 “인성”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 내주하십니다. 삼위 하나님 중에서 “인성”을 취하신 분은 오직 2위가 되시는 성자 하나님, 곧 그리스도 우리의 주 되시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인성을 취하시지 않았습니다. 성령님께서 인성을 취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2위와 3위의 위격을 혼동하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분으로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지니셨던 인격적 존재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인격이십니다. 인격(person)과 인성(human nature)을 혼동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면에서 요3:6, 고전6:17,골1:27, 3:4, 고후13:5, 요일5:11이 님의 견해를 지지해 준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폴님) 

 

추신: 저 아래 꼬리말 내에서의 홀리 조이님의 문제제기에 대하여 제 의견을 조금 말씀드리자면,

물론 위 1의 요점을 이해하고 ‘예수=성령’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2의 요점인 인성을 포함한 생명주는 영과 일반적인 성령까지도 구분해 주기를 기대하는 자체가 무리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진리들은 주님의 긍휼과 계시해 주심을 입어야 깨닫고 확신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골1:26에서 바울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 부터 옴으로 감취어졌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은 신약시대를 사는 적지 않은 성도들에게도 이 비밀은 아직도 비밀로 남아 있습니다. 저는 이곳 홈에서 이런 심도 있는 주제들에 대해서 누구나 공감할 어떤 결론이 도출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쟁점들을 내어 놓고 함께 분량 껏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주님께 나아가 간절히 기도함으로 어떤 선입관과 굴절도 없이 성경본문이 말하는 그대로 깨닫고 믿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홀리죠이)

 

마치 폴님께서만, “주님의 긍휼과 계시해 주심을 입은” 것 같이 주장하시는군요. 그런 긍휼과 계시가 있어야만 “인성을 포함한 생명주는 영과 일반적인 성령을 구분하”게 된다는 식으로 주장하시는 것을 보니깐 말입니다. 저는 님과 같은 식으로 “구분”하지 않거든요. 저는 님이 받았다고 믿는 긍휼과 계시가 없는 모양입니다. ㅎㅎ 사실, 그런 “긍휼”과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미 계시되신 성경말씀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계시가 필요하다고 여겨지지 않거든요.

 

1:27의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살과 뼈가 성도 안에 내주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비밀을 미신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미신화를 이미 개혁교회는 오래전부터 지적해 왔습니다. 바로 로마천주교가 성찬식에서의 빵과 포도주가 변형되어서 예수그리스도의 실제의 살과 피로 화체된다는 식의 설명이 바로 그리스도의 살과 뼈가 성도의 몸 안에 내주한다는 님의 주장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미신이 바로 이것에서 연유된 것을 아십니까?

 

님께서는 구교를 싫어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로는, 구교의 주장을 이 면에서 답습하고 있습니다.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미신”으로 만드는 것 말입니다.

 

로마구교의 "미신"에 현혹되는 일이 결코 없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선입관과 굴절없이 말씀의 빛을 따라서 비췸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이미 교회에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있는 이런 "미신"을 잘 보셔야 할 것입니다.   

 

한백성 홀리죠이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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