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심자료

거듭난 자의 남은 죄에 대한 개혁신앙고백적 견해

baromi 2005. 4. 23. 08:50
LONG

그런 주장을 바로 아래의 수국님의 글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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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님)

 

홀리죠이는 균형이라는 논리로 성경을 맘대로 바꾸고 있다.균형이라는 말로 양의 탈을 쓰고 있는데, 그 말은 이리임을 증명하고 있다.그는 균형이라는 자기 중심적인 시각으로 성경을 더하기도 하고빼기도 하면서 거짓선지자의 심부름꾼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다.

로마서8:1절을 자기식으로 바꾼다.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는데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도 죄는 있지만 정죄함이 없다고 더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죄가 있다는 것과정죄함이 없다는 것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홀리죠이 성경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지 몰라도내가 읽는 성경에는 죄는 있지만 정죄함이 없다라고 기록되지 않았다.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은 균형잡힌신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적 그리스도의발언이다.

 로마서7:18-24절에서  바울은 "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느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했다.

 하나님께 대하여 죄로 말미암아 죽은 몸을 발견하게 된다.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받았지만 그것을 행할 수 없는 죽은 몸이다.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이 실제 삶에서 처절하게 확인되고 있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 되었고,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할 자를갈망하게 된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 사실과 함께육신을 개조하거나 변화시키는 관심에서 떠나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것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는데, 두 주인을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라고 고백하고, 천국열쇠를 받았는데잠시후 주여 그리마옵소서 했다가 사단이 된 모습이다.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나올 수 없는데 나온 것이다.바울도 자신의 삶에서 이런 이중적이고 모순된 삶을 보았던 것이다.여기까지 분명히 확인된 사람이 육신에 가능성이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아직 육신에 가능성을 부여하고, 육신의 변화와 어떤 것으로하나님의 법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속고 속이고 있으며 아직 아담안에 있는 것이고,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육신의 몸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대로 보고, 둘 수 밖에 없는 것이다.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이나 가치관이 기준이 되어서 선과 악의 경계를만들어 놓고 선을 행하고자 하고 악을 멀리 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생각하여 선행을 강조하고 그것을 성화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속고 속이는 것이다.이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종교장사를 하려는 삯군들이며, 말씀의 협잡꾼들이며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로마서8장은 그러므로로 시작된다.그러므로란 접속사는 앞에 있는 모든 글의 결론이다.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바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자기 절망을 경험하고 고백했던 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자로 변한 것이다.

7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8장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로 바뀐 사실도 주목해야한다. 바울의 표현방식으로 이해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전이고,그리스도 예수는 부활 이후이다.

 한 사람이 자기 절망의 늪에서 구원자를 바라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십자가가 무엇인지 알게되어 자신도 그 십자가와 연합됨을 경험하게 된다. 함께 죽었으니, 함께 부활하게 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로 나타나는 것이다.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그렇게 된 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바울은 정죄함이 없는 이유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는 것은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이지 않는자유를 얻었다는 말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사는 곳이 세상이다.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다는 선언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무슨 완전한 해방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더해서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무효화 시키는가?적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내어놓을 수 없는 발언이다.신학 할아버지를 해도 소용없다. 성경을 자기식으로 억지로 풀면망하게된다. 더하면 재앙을 더하고, 빼면 생명록 책에서 제해 버린다고 했다.

 그리고 17절부터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 해방된 자들이세상에 살면서 당하게 되는 고난은 당연한 것이다.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했다. 너희를 미워하기 전에나를 먼저 미워 했으니까 그 미움과 핍박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소망을 가지게 되며 인내하게 되고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했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나타나기를 기다린다는뜻이지 완전한 해방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을자신이 아직 갈등가운데서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는 줄로 착각하고있기 때문에 육신에 죄가 있다는 말만 자꾸 하고 있는 것이다.아직 성경이 보이지 않는데 하나님일 한다고 나서면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마귀의 하수인이 된다는 사실을알았으면 좋겠다.

 양무리 마을이라는 이름은 좋지만주인장이 보니까 양의 탈을 쓴 이리로서 양을 노략질 하려고 만든카페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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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죠이)

 

위의 글을 조목조목 비평하면서 글을 적을까 하다가, 글을 적다 보니,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거짓된 자는 스스로 그 거짓됨을 드러낸다. 함부로 자기와 다른 견해를 두고 적그리스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본색이 어떠함을 드러내고 있다.

 

 

무슨 말을 덧붙일 것인가?

 

 

 

한백성 홀리죠이.

ARTICLE

대구지역의 “평강교회”라는 교회의 담임목사인 수국님은, 죄인들의 거듭남을 강조하되,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이제 남은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거듭난 성도들은 죄와는 이제 상관없이 산다고 한다. 잘나가다가 삼천포를 빠진다는 말이 이것이다(삼천포에 사시는 분에게는 죄송한 표현이지만).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면서 자신이 성경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면서 그것을 지적해 주는 충고를 겸허히 듣고 새겨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적반하장격으로 그런 충고를 적그리스도적인 것이라고 폄하하고 있다. 그 어처구니없음을 아래에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을 이제 신앙고백적인 면에서, 성경적인 면에서, 그리고 신자의 체험 면에서 비판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글 자체를 비판하고자 한다. 실상, 비판할 것도 없는 견해이고, 비판하느라고 시간만 낭비할 것이라고 여겨왔지만, 이렇게 한 번 정도는 정리해 두어야 앞으로 이런 헛된 비성경적 주장으로 성도의 삶을 현혹시키는 짓을 불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서이다.

                                              

첫째, 신앙고백적인 면에서이다. 여기서 신앙고백적이라는 것은, 종교개혁 이후에 작성된 개혁주의 계통의 신앙고백문서에 기초한 입장을 말한다. 생각밖에 우리들은 이것들에 대해서 무지한 경우가 많다. “평강교회”가 어느 교단, 어느 신학을 추구하는 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박옥수계열의 구원파의 주장을 반복하는 듯 하면서도, 어떻게 위장해 있는 지 더욱 파악해 보아야 하겠다. 성경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성경대로 믿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두번째로 지적할 것이다. 하지만 먼저, 이러한 주장이 개혁주의신학의 입장에서 진작부터 비판해 온 입장들임을 지적하고 싶다. 이런 비성경적인 주장이 “정통”, 혹은 “개혁주의”신학을 빙자하지 못하게 함이다.

 

먼저, 벨직신앙고백서(1561년)에서는, 그 항목15(Article 15)에서 “인간의 원죄”를 취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Nor is it by ay means by baptism; since sin always issues forth from this woeful source, as water from a fountain: notwithstanding it is not imputed to the children of God unto condemnation, but by His grace and mercy is forgiven them. Not that they should rest securely in sin, but that a sense of this corruption should make believers often to sigh, desiring to be delivered from this body of death.

 

여기서 죄는 샘물의 근원(fountain)에서 흘러나오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정죄함(condemnation)에 이르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해서 용서받게(forgiven) 된다고 한다. 그렇게 죄가 정죄되지 않고 용서함받는다고 해서 죄속에서 태만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러한 (죄의) 부패된 느낌으로 인해서 신자들로 하여금 탄식하면서 이 사망의 육신으로부터 구원에 이르도록 소망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정죄함을 받지 않은 “감사”와 아직 완전한 “몸의 구속”에 이르지 못한 “탄식”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1566년에 작성된 화란의 도르트신경에서는 어떻게 고백되고 있는가? 그 5장(Head V)의 1-4항(Article1-4)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 중에 1항만 옮겨 보겠다.

 

Article 1: Whom God calls, according to His purpose, to the communion of His Son, our Lord Jesus Christ, and regenerates by the Holy Spirit, He delivers also from the dominion and slavery of sin in this life, though not altogether from the body of sin and from the infirmities of the flesh, as long as they continue in this world.

 

도르트신경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어떤 사람을 중생시키시고 또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중에 죄의 지배(dominion)와 노예됨(slavery)으로부터 구원(delivery)시켜주시지만, 죄의 몸과 육신의 연약함으로부터 “전적으로 구원시켜주는 것은 아니다”(not altogether from…)고 한다. 이렇게 죄의 몸과 육신의 연약함을 야기시키는 것을 3장에서는 “내주하는 죄”라고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By reason of these remains of indwelling sin, and the temptation of sin and of the world, those who are converted could not persevere in a state of grace if left to their own strength.”

 

바로 이 성도 안에 거주하는 “남은 죄” 때문에, 자신의 힘에 의지하게 되면, 회심한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은혜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은 죄의 거주를 분명하게 명시하는 것이 또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이다. “인간의 타락과 원죄, 그 심판”을 다루고 있는 6장의 5절에 의하면, 부패한 본성이 우리들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중생한 사람들 속에조차 남아있다고 한다(“This corruption of nature, during this life, doth remain in those that are regenerated.”). “성도의 성화”를 다루고 있는 13장의 2절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그것을 지적한다.

 

“This sanctification is throughout, in the whole man; yet imperfect in this life, there abiding still some remnants of corruption in every part.”

 

죄에서 “해방”된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성화의 과정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사람의 모든 부분(every part)에 부패의 흔적들, 남은 것들(remnants)이 얼마간(some)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주의전통에서 인정해 오고 고백해 온 입장이다.

 

이것을 먼저 명시하는 것은, 거듭난 신자들은 이제 죄와는 상관없는 자들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신자의 몸 안에 남은 죄가 있다는 주장을 비성경적인 양 야유하고 오히려 비극적인 삶을 연명하는 사람들인 양 조롱하는 것은, 이러한 전통적인 신앙고백의 입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러한 입장이 신학일 뿐이고, 성경적이지 않는가? 과연 이런 고백을 작성한 사람들이 성경을 참고하지 않았고 자기들의 관념 속에서 이런 것들 만들어 내어 고백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이 성경의 어떤 구절들을 근거해서 위와 같은 주장을 했는지 살펴보자. 그런 성경구절들을 실상 너무 많기 때문에, 다음의 몇가지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첫째, 로마서6장12절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고 신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그들이 “신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죄가 왕노릇하게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다. 곧 신자들 안에 “죄”가 있어서 그 죄가 “왕노릇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7장16-17절은 어떤가?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것은 20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만일 내가 언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 부분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다양한 견해들이 있는 줄을 안다. 바울이 아직 거듭나지 않았던 시절을 되돌아보면서 하는 죄의 고백이라는 해석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구절의 동사는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상상적인 현재가 아니라 바로 지금 현실적인 현재이다. 그리고,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22절)한다고 하였으니, “거듭난 사람”임이 분명하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할 수 있단 말인가?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면서도, 자기의 지체 속에 다른 법, 곧 “죄의 법”이 있음을 발견한다. 곧 “내 속에 거하는 죄”이다(17,20절).

 

지금 바울의 상황은 이렇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의 법 아래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탄식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면서 성도들에게 어떻게 권면해야 할까? 감사가 넘치고, 탄식은 줄어들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8장의 권면이 시작되는 것이다. 성도는 “해방된” 존재들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 남은 죄가 왕노릇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을 좇지 말고, 영의 생각을 좇아서 하라고 한다. 이런 모든 권면의 배경에는,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탄식하는 것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그는 8장23절에 말하기를,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한다.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하지만, 한 구절만 더 첨가하자. 1요1:8이다. 사도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죄인들이 거듭나기 전에 지었던 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도요한이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대상은 이미 거듭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4장1절에서 그는 그의 수신자들을 “사랑하는 자들이여”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편지의 기록목적을 5장13절에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이라고 한다. 이미 그들이 “거듭난 자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기쁨을 충만히 경험하면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알게”(5:13)하려고, 그리고, “기쁨을 충만케하려고”(1:4)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요한서신의 어떤 구절들(예,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들은 신자들이 죄를 “전혀” 짓지 않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 같다. 이것은 오해이다. 여기서 “짓지 않는다”고 한 것은, 계속적으로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듭난 자가 죄를 계속적으로 즐기면서 그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죄를 범하는 일들이 전혀 없다면, 사도요한이 1장8절에서 한 말과 모순이 된다. 모순이 된다면 성경이 아니다. 사도요한이 그것을 몰랐을까?

 

이 부분을 주해하면서, F.F.Bruce라는 신약학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 안에 ‘거하는’ 자가 범죄하지 않는다는 요한의 언명(3장6절의)은 신자가 때로 죄를 범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그가 강조하는 것은 범죄하는 생활이 하나님 자녀의 특징이 아니라는 것이다. 범죄하는 생활을 영위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런 생활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할 수 없다.”(아가페출판사,114쪽).

 

이런 부분들에 대한 성경구절들을 구체적으로 공부해 본다면,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들의 남은 죄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공급되는 힘에 의하여 이루어가는 우리의 삶의 거룩과 성화에 대해서 더욱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는 세 번째로, 신자의 삶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 말하겠다.

 

실상, 신자가 거듭나게 된 이후에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거듭남의 목적이다. 거듭남 자체가 거듭남의 목적이 아니다.  그래서,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으로 자신의 거듭남을 증거해 가야 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거듭나게 되었다고 해서, 단숨에 천사가 되는 것은 아님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체험하게 된다. 마음으로는 원이로되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 남은 죄가 그것이다. 이 남은 죄가 있다고 해서, 우리의 거룩과 경건의 삶을 진작시키는데, 핑계나 변명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남은 죄의 교리가 아니다. 오히려 신자의 삶을 통해서 발견되어지고 체험되어지는 이 남은 죄를 느끼고 발견할 때마다, 그것을 죽여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죽임”(mortification)의 교리이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할 때의 그 옛사람도 이 “남은 죄”를 의미한다. 거듭남으로 인해서 부패한 본성의 뿌리를 통째로 뽑아버렸는데, 아직도, 잔뿌리들이 남아있는 것이고, 똥차가 똥을 비우고 깨끗이 씻었는데도 아직도 그 냄새가 구석구석에 배어 있어서 냄새를 피우게 되는 것과도 같다. 그 냄새를 없애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은혜의 역사가 필요한 것이다.

 

거듭난 사람이 이제는 전혀 죄와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은, 똥차가 똥을 비웠다고 이제는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자기의 코를 막아서 그 냄새를 못맡을 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코를 찡그리게 된다. 거듭났다면서, 그의 말에 주님의 교양이 없는 것을 보면 그렇다.

 

거듭난 것은, 지옥을 향해서 가던 죄인이 그 방향을 돌려서 천국을 향해서 가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회심”(conversion)과 연결된다. 문제는, conversion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차가 동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가게 된다고 해서 방향이 바뀐 것이지 차가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런데, 차가 바꿨다고 한다면, 세살 난 어린애도 웃게 된다. 물론, 회심은 차가 방향을 바꾸는 것 그 이상이다. 깨어지고 부패했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지는 과정이 회심이고 중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회심하고 중생했다고 하더라도, 죄인이었던 내가 “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저주하던 “내”가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이다. 이전에 형제를 “저주”하던 혀로 이제는 형제를 사랑한다고 한다. 이전의 나나 지금의 나나 같은 나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나이다. 이전의 혀와 지금의 혀는 같은 혀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혀이다.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같은가?

 

이것에 분명해야 한다. 중생 이전의 삶과 중생 이후의 삶에 불연속적인 부분이 있고, 연속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해방이로되, 불안정한 해방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방된 것만을 강조하고, 지금 자기 안에 역사하고 있는 남은 죄를 무시하게 되면, 경건한 것처럼 보이고, 승리하는 삶처럼 여겨질 지 모르지만, 실상은, 자기를 속이고, 남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요한이 그의 첫번째 편지 1장8절에서 강조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회개하기 바란다. 사도의 호소이다. 

 

  거듭남과 영화의 삶은 다른 것이다. 해방되었다고 해서, 모든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다. 거듭남이란 이제 영적 마라톤을 출발한 것이지 마친 것이 아니다. 물론, 시작한 사람은, 마치게 될 것이다. 중도에 탈락하는 사람은, 그 출발 자체가 거짓이었음을 증명한다. 성도가 성도가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그 성도됨으로 거룩을 추구해가는 것과 그것이 완성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가 필요하다. 거듭났다고 해서, “남은 죄”가 없고, 그것과는 상관없다고 하는 것은, 은혜의 은혜됨을 알지 못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