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와 논쟁

(지방)교회 나눔님의 주장

baromi 2005. 5. 11.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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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joy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음이 더욱 분명해지는 군요. 성령도 인성이 있다. 그러므로 성령도 뼈와 살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이거 원.............이런 가르침이 바로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입니까?  삭제 꼬리말에 코멘트 01:13

 

 

바로미 일단은 저의 추측이 맞긴 하군요.   수정 삭제 꼬리말에 코멘트 07:31

 

 

나눔 흠... 홀리조이님은 본체론적 삼일성 또는 구약의 성령도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분으로 말씀하고계시니, 이는 대단히 놀랄일이고 많은 시간 토론을 요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약경륜과 신약경륜의 차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땅에 오신 놀라운 성육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의 죽음과 부활이 무엇을   삭제 꼬리말에 코멘트 07:49

 

나눔 의미하는지...침례자 요한 이후 '신약의 믿는이들'에게 주어진 '그 영'의 약속의(갈3;14) 축복이 과연 구약의 신자들과 같은 것일까요? 생명주는 영에 인성이 없다면 인성을 가진 사람과 연결,연합이 가능할까요? 무소부재 하신 하나님으로, 편재성으로 가능하다고 말하겠지요. 그렇다면 거듭남이 과연   삭제 꼬리말에 코멘트 07:53

 

나눔 누구에게 '한'하여 주어지는 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하튼 장로교 교리와 또 박형용 박사 논문의 깊이와 또 성경신학(모든 교단을 막론하고)안에서 저는 주님이 의도하시는 길을 발견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한가지, 저의 개인적인 사정으로(이사,집들이) 얼마동안 이곳에 못들어올  삭제 꼬리말에 코멘트 08:00

 

나눔 것 같습니다.   삭제 꼬리말에 코멘트 08:01

 

ARTICLE
일단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전개해보겠습니다.
글쓴이 : 나눔
조회 : 10   스크랩 : 0   날짜 : 2005.05.10 23:25


일단 제가 말하고 싶은 말을 먼저 전개해 보겠습니다. 꼬리말에 부분적으로 쓴 것을 다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바로미님이 쓴 글도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중점을 이곳에 먼저 쓰겠습니다. 우리의 논의의 중점은 고후3:17절의 ‘주는 영이시니 주 영이 계신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Now the Lord is that Spirit: and where the Spirit of the Lord is, there is liberty.). 이 구절이 과연 무슨 의미이냐 하는 것입니다. 왜 이구절이 중요한가하면 우리안에 영접되어 들어오신 분이 누구인가? 우리가 체험하는 성령은 과연 어떤 인격(person)인가 하는 것입니다. 박형용박사는 이 구절에서 '主는 靈이시다'를 '부활안에서 그리스도는 성령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구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그 영, 생명주는영, 실제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하였지요. 분명한 것은 저는 바로미님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3격)'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3격의 성령만이시겠습니까? 그 영, 생명주는 영은 3위의 성령을 포함한 개념입니다.


성령론에 대하여는 사실 교리적으로 말한다면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구별이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개역 성경에는 성령(the Holy Spirit)이 마1:18,20절에서의 경우처럼 아기 예수를 잉태시킨 영으로도 나올 뿐 아니라, 롬8:16절에서처럼 '성령이 우리영과 더불어...'라고 말할때도 성령이라고 말하는 부분의 원문은 the Spirit 입니다(롬8:23, 26-27, 갈3:2,5,14, 6:8, 계2:7, 3:22, 14:13, 22:17). 전자는 삼위의 3격으로서 신성만 있으시나, 후자는 부활후의 예수의 영화롭게된 인성을 가진 성령으로서, 고후3:17절이나 고전15;45절등 그 영, 생명주는영, 실제의영, 변화시키는영.....모두 다 '성령'으로 통칭 하기도하지요. 그러므로 박형용 박사가 말하는 '主는 靈이시다'와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경륜적인면, 곧 부활안에서 그리스도는 성령이다'라는 의미이며 저는 성령을 말할때에는 계속 괄호를 치고 (그 영, 생명주는 영, 실제의 영...)등으로 분별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곧, 부활후의 성령은 그영, 생명주는영, 그리스도예수의 영, 실제의 영으로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을 통과한 후의 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단 박형용 박사의 글을 정확히 한번 훑어보시기 바랍니다. 위의 동일한 맥락의 글들을 가져와보았습니다.

...

(박형용박사)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고후3:17a의 호 퀴리오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토 프뉴마가 성령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확증하였으니 이제 우리들은 바울 사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主는 靈이시다”했을때....Hamilton은 말하기를 “여기에서 동일시하는 것은 본체론적이거나 존재에 있어서의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고 동력적(dynamic)이며 구속적 행위에서 발생된 동일함을 뜻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는 것은 본체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요 경륜적인 의미로 이해해야만 한다. 동일시 하는 것은 그 성격상 구속적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신자들의 경험에 관한한 성령과 그리스도의 기능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새 질서에서는 동일시 되어질 수 있다는 구속적 역사적인 의미로“主는 靈이시다”(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라고 표현한 것이다.

17절 하반절의내용도 성령과 그리스도를 동일시 하는 것이 본체론적인 의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자유(엘류데리아)의 개념이 17절 하반절에 언급되었는데 바로 이 사실이 바울이 경륜적인 면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갈5:1;롬8:2). 영광, 생명, 의, 평화 등의 개념과 더불어 자유 역시 새로운 계약의 특징들 중의 하나로서 성령의 사역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갈4:21과 5:1;5:13과 5:16ff 비교 참조).

여기서 종합해 보면 바울의 사상은 역사적이다. 새로운 시대는 옛 시대보다 탁월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신 분이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졌다. 성령은 창조적이고 활동적인 영으로서 새 시대를 주관하시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생활은 성령에 의해 조정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영으로서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 主는 靈이시다 37쪽 ---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主는 靈이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신자들의 경험을 설명할 때 그리스도의 기능과 성령의 개념을 교대로 사용하는 예를 바울서신 내에서 찾아 비교함으로 지금까지의 증명이 더 확실해질 것이다.

신자들의 생명
우리들은 성령을 통해 생명을 가졌다(롬8:11).
우리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가졌다(골3:4).

...


금세기 초 유명한 스코틀란드 신학자 제임스 데니(James Denney)가 고후3;17절에 대한 글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고, 그 영은 바울이 이미 고후3:6절에서 말한 영이다. 그것은 성령이신데, 새 언약 아래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자는 그 영을 받는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둘은 동일시되실 수 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체험에 관한 한, 그리스도의 영과 그리스도 자신 사이에 차별이 없다.'(James Denney, The Second Epistle to the Corinthians, p. 134.)


조금 더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부언하겠습니다. 요14:16-20절까지의 성경구절은 제가 위에서 한 말을 증거합니다. 17절에서 주님은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위 구절은 육신안에 주예수님이 가시면 또 다른 보혜사가 너희에게 올것인데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고 또 너희 속에 거하신다는 말씀이지요. 이런 말씀을 하시는 주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뜻일까요? 육신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온다' 이말씀과 '내가 가면 또 다른보혜사가 너희에게 온다' 이 말씀의 뜻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바로 실제의 영(부활후의 성령, 그 영)과 동일시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요14:17절은 진리의 영이 우리안에 계실 것임을 말씀하시고 20절에서는 아들이신 그분이 우리안에 계실 것을 말씀하시지요. 이것은 우리 안에, 우리 속에 계신 그 영이 주님 자신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으세요" 라고 말하고, 복음을 전하면 성령을 받으므로 중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 영접 vs 성령으로 중생/ "성령충만하세요." 라는 말이 신성의 성령, 우주 가운데 충만한 영이 사람 밖에 어떤 능력으로 충만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넘치는 공급으로 내 구원에 이르도록 속사람이 평강,기쁨,확신으로 강건케 되는 것을 말합니다(빌1:19, 엡3;17). 성령받아 구원얻은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그들 속에 거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을 받았는데 그리스도가 믿는이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고후13;5, 롬8:10, 골1:27).
저는 바로미님처럼 그리스도께서 믿는이 안에, 성령께서 믿는이 속에 거하는 것을 '유물론적 발상'이라고 말하는 분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생명과 진리이신 것은 객관적으로는 알지만 그들 안에 생명과 실제되심에 대하여는 주관적으로, 체험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부담은, 우리 속에 계신 삼위하나님이 우리 속 존재안에서 어떠한 분이신가를 분석하고 상고할때, 삼위의 하나님은 믿는이 안에서 아버지,아들,영이 모두 '한 분'으로서 우리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엡4:6, 골1:27, 요14:17). 그러면 어떻게 삼위하나님께서 우리안에 들어오실 수 있는가? 바로 삼위하나님의 완결인 성령(그 영)을 통해서라는 것이지요. '그 (성)령'에는 신성의1,2,3격과 영화롭게된 인성을 가지신 부활안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믿는이 안에 내주하시는 것은, 아버지는 아들안에 아들은 그 영으로 믿는이에게 실제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진리의 그 영'을 알지 못한다면 삼위하나님을 어떻게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삼위하나님을 어떻게 영접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영접하는 '생명주는(그)영'은 다만 본체적 삼일성(존재와 본질에서의 영원성, 무소부재, 상호내재..)의 제3격인 성령만이 아니고 더하여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화롭게된 인성을 포함한 성령을 우리안으로 영접(receive)하여 받아들인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