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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참된 믿음의 특성과 능력 문서 - 4장 참된 믿음이 행사하는 합당한 규례들

baromi 2016. 7. 4.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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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믿음이 행사하는 합당한 규례들

 

하나님에 관한 경건한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게 되면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를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런 깨달음은 경외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믿음을 합당하게 행사하도록 우리를 장려하는 또 다른 수단이다.”

- 존 오웬

 

셋째로, 믿음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할 때나 공적 모임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때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규례(規例) 안에서 자기 자신과 모든 은혜를 합당하게 행사하려고 부지런히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할 때나 공적 모임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때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규례(規例) 안에서 자기 자신과 모든 은혜를 합당하게 행사하려고 부지런히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바로 이것이 믿음이 자기 자신을 입증하는 세 번째 방식입니다.

 

이것은 믿음과 영적 순종의 시금석이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규례 안에서 행사되는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것이 결여되어 있는 영혼은 생명이 없는 영혼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현재 실제로 기만하고 있거나 아니면 앞으로 기만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기만하기 쉬운 까닭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이유 1.

사람들은 자기들이 눈에 보이는 여러 가지 외적 의무들을 많이 이행하고 있거나 이행하는 의무의 조항들을 계속 늘려가고 있으므로 자기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위선자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58:2,3).

 

여러 가지 외적인 의무들을 많이 이행하고, 이행하는 의무의 조항들을 계속 늘려가는 것. 이것은 로마 카톨릭이 복음을 배교(背敎)한 자신들의 실체를 숨기기 위해 사용했던 위청(僞裝) 전술이었습니다. 종교적 의무를 끝없이 늘려 가는 것. 이것은 그들이 의지하고 자랑했던 일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외적인 의무들을 지속적으로 이행함에 있어서는 신실한 체 하지만, 자신들의 정욕을 타고 들어오는 죄는 전혀 삼가지 않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날마다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정욕에 탐닉하고 태만에 빠져 지내는 사람들도 자신의 그런 행태(行態)를 정당화할 근거를 만들려고 외적인 의무들을 끊임없이 이행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사람들 가운데 종종 일어납니다. 심지어 자신이 이행하는 외적 의무를 일반적인 표준을 초과하는 선까지 늘려 가는 일도 있습니다. 특별히 사람들은 자기 가정 안에서 또 자신이 출석하고 있는 공적모임 안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합니다.

 

이유 2.

외적 의무들을 이행함에 있어서 다양한 은사들이 자신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쉽게 생각해버립니다.

 

그러나 구원에 이르는 은혜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런 일을 믿고 안심하게 되면, 그것은 매우 강력한 수단이 되어 그 사람의 영혼을 형식적 신앙에 가두어 놓게 되고 은혜의 역사가 그 사람 안에 시작되는 것조차 철저히 차단하게 되며 그 사람의 온 영혼에 불치의 완고함을 깊이 심어놓게 됩니다.

 

신실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영혼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의무를 완수하려고 은혜로 말미암아 생기 넘치고 진지해진 마음의 활동으로 끊임없이 애쓰고 노력하기 마련입니다. 만일 영혼이 이와 같이 행하지 않는다면, 만일 영혼이 이와 같은 결과를 성취하지 못한다면, 신실

한 믿음은 의무를 이행했다는 사실만으로 영혼이 조금이라도 만족하거나 조금이라도 안심하는 일을 결코 허용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신실한 믿음은 그 것들을 더러운 누더기로 간주하고 내버리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의무들을 이행할 때 자신 안에 은혜가 실질적으로 역사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런 의무들을 거뜬하게 이행할 수 있는 사람. 또 그런 의무들을 이행하는 일과 관련하여 자기 자신을 겸비하게 하지 않고서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런 의무들을 거뜬하게 이행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 안에서 구원 얻는 믿음의 분명한 증거를 결코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과 관련하여 반드시 있어야 하는 믿음의 이 같은 행사에 대해서 무지 (無知) 하거나 경시(輕元勛하거나 싫증을 느끼면 필연적으로 세 가지 해악(害惡)이 뒤따라오게 되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파멸에 빠뜨린 주범입니다.

 

해악 1.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속하는 의무를 이행할 때 필수적인 믿음의 이 같은 행사에 대한 무지나 경시나 싫증은 거짓 경배의 핵심 요소인 각종 미신적 의식과 결탁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거짓 경배의 원인과 기원이 되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바 신적 경배에 속하는 모든 규례 안에서 사람들이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면, 그들에게 있어서 신적 경배에 속하는 모든 것은 한갓 무익하고 부담스러울 뿐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있어서 그와 같이 믿음을 끊임없이 행사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신적 경배에는 어떤 생명력 도 찾아볼 수 없기 마련이고 그런 신적 경배를 통해서는 어떤 만족감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신적 경배를 통해서 만족을 전혀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자신들의 정서를 매료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을 신적 경배 안에 포함시키거나 신적 경배의 부수적인 요소로 첨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신적 경배 안에 이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적 경배를 완전히 등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굉장히 다양한 기도문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기도문을 따라 기도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입은 기도문을 따라 막힘없이 기도하겠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그와 반대로 끊임없이 이리저리 배회하고 자신이 즐거워하는 것들을 생각하느라 분주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행사되지 않는 한, 사람의 마음은 신령한 것을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단순히 이행만 해 도 사람의 마음에 모종의 위안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실제로는 전혀 무의미한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외에도 각종 예복과 특정한 몸가짐과 존경하는 몸짓들로 구성된 다양한 외적 의식을 만들어 첨가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동일한 목적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창안해 내는 것입니다. , 신자들에게 있어서 신적 경배의 핵심과 요체는 믿음을 행사하는 것인데, 자신들이 그와 같은 믿음의 행사를 상실하거나 결핍하고 있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써 외적 경배를 통하여 일종의 자기만족과 흡족함을 얻어 자신의 마음과 정서를 즐겁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신적 경배의 생명이요 요체(要諦)인 믿음을 행사하는 일에 있어서 쇠약해지게 되면, 그 사람은 생기 없는 형식만을 사용하는 상태나 그보다 전혀 나을 바 없는 본성의 여러 가지 기능과 기억력만을 활용하는 상태로 매우 서서히 빠져들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이전에 영적 은사를 탁월하게 발휘했고 그 장점을 살려서 의무를 잘 이행했던 사람들 중에도 신적 경배의 생명이요 요체인 믿음을 행사하는 일에 있어서 쇠약해짐으로써 이제는 기껏해야 아베마리아의 기도(성모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 나 사도신경(Credo)을 최상의 기도로 드리는 수준으로 하락한 사람들도 여럿 있습니다.

 

해악 2.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속하는 의무를 이행할 때 필수적인 믿음의 이 같은 행사에 대한 무지(無知)나 경시(輕視)나 싫증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적 예배에 속하는 엄숙하고 신성한 규례들을 완전히 등지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어 왔으며, 전율과 열광적인 찬양과 과장된 환희 안에서도 얼마든지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헛된 상상을 많은 사람들 속에 깊이 각인시켜 놓는 원인이 되어 왔습니다.

 

이것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리고 거짓을 좇아갔습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신적 경배 제도를 잠시 동안 순종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신적 경배 제도를 생기 있고 능력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믿음이고,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중에 그런 믿음을 반드시 행사해야만 했는데, 문제는 그들에게 그럴 만한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규례는 그들에게 무익하고 부담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안에서 감미로움이나 만족이나 유익을 전혀 발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헌신짝처럼 내던져 버리고 거짓을 좇아간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갓 담근 포도주를 마시려고 얼마나 안달이나 있습니까? 만일 그 사람들이 장기간 잘 숙성된 포도주를 마셔 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그래도 그들이 갓 담근 포도주를 마시려고 그토록 안달을 내겠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 경배를 추종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들이 신적 경배 안에 반드시 있는 감미로움과 능력과 생명을 체험해 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어떨까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믿음을 행사함으로써 실행되고 활기를 얻는 올바른 신적 경배 안에서 그와 같은 것들을 체험해 본 경험이 그들에게 있다면 어떨까요? 그래도 그들이 신적 경배를 버리고 헛된 거짓 경배를 좇아갈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이 각각 무엇이라고 기록했는지 들어 보십시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다내려 함이니라” (요일 2:19).

 

만일 (그들이 이 지혜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속하는 의무를 이행할 때 필수적인 믿음의 행사에 대한 무지나 경시나 싫증은 오늘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잠시동안 신적 경배에 관한 복음의 규례들을 따르고 준행하다가도 그것들을 버리고 떨어져 나간 참된 이유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규례 안에서 행사할 믿음이 없었고, 그들 자신도 믿음을 얻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규례 안에서 그 어떤 생명도 참되게 발견하지 못했고 그 어떤 유익도 얻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신적 경배를 버리고 띠나간 것입니다.

 

해악 3.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속하는 의무를 이행할 때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믿음의 행사에 관한 무지나 경시나 싫증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제도적 경배를 배제하고 자연 종교를 채택하면서 불경(不敬)에 빠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의 빛을 조금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보면서도, 그 안에서 고운 모양이나 풍채를 전혀 보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영혼들 이 날마다 멸망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할 때나 공적 모임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때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규례(規例) 안에서 자기 자신과 모든 은혜를 합당하게 행사하려고 부지런히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이것과 관련하여 참된 믿음은 그 어떤 환난과 그 어떤 곤경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입증하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믿음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할 때나 공적 모임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때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규례 안에서 자기 자신과 모든 은혜를 합당하게 행사하고 지속적으로 행사하려고 항상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참된 믿음도 그 행사와 활동 에 있어서 연약해질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도 쇠퇴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도 잠자는 것 같은 상태에 처할 수 있습니다. 특정한 의무에 있어서 특정한 기간 동안 그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의 습관적 내면 상태에 있어서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참되고 진실한 믿음인 한, 그 믿음은 반드시 그와 같은 연약함을 박차고 일어날 것이고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를 벗어버릴 것이며 스스로 분발하여 전심전력 자신의 의무를 이행 할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그렇게하기 마련입니다.

 

영혼에게 가장 심각하게 위험한 상태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형식적 신앙에 빠져 있는 상태와 의무를 수 없이 이행하면서도 그 안에서 믿음의 행사를 태만히 하는 상태. 바로 이런 상태가 영혼에게 가장 크게 위험한 것입니다. 만일 영혼이 이런 상태에 빠지게 되면, 그 영혼은 이미 죽어 있지는 않을지라도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위험에 분명히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우리는 믿음의 이 같은 증거를 상실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경계하고 주의할 것입니다. 믿음의 이 같은 증거를 잃지 않고 보유하고 있으면, 다른 모든 것들이 우리를 대적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상황에서도 믿음의 그런 증거로 인해 우리는 큰 힘을 얻을 것입니다. 절망의 문턱에서 자포자기하고 싶은 심경을 느끼던 중에, 믿음의 이 같은 행사를 기억하고서 절망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이전에 자신들이기도 중에 믿음의 역사를 체험했다는 사실이 절망의 문턱에서 자포자기 하려던 그들을 소생시키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는 일은 마치 보석과 같습니다. 보석은 어떻습니까? 보석함에 보관되어 여러분 옆에 있는 동안에 보석은 별로 크게 쓸모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한끼 양식을 구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보석의 진가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는 일도 이런 점에서 보석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다음과 같은 문제 제기를 하고 그 해답을 구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일에서 믿음을 합당하게 행사하는 일을 통해서. 믿음은 자기 자신 을 증거하여 시험과 환난의 시기에도 우에게 위로를 준다고 했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일에서 믿음을 합당하게 행사하려면, 제가 지금부터 말씀 드리는 여섯 가지 지침들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지침 1.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하나님의 신성안에 있는 완전무결한 여러 가지 속성들을 합당하게 지각함으로써 여러분의 마음이 항상 감동되어 있도록 힘쓰십시오. 특히 하나님의 주권, 거룩하심 , 광대하심, 그리고 편재하심 등을 합당하게 지각함으로써 여러분의 마음이 항상 감동되어 있도록 힘쓰십시오. 이렇게 하면,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의 성격상이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마다 우리 안에 그런 마음의 상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들을 골라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쳐 하나님을 합당한 방식으로 섬기는 신앙으로 그들을 이끌고자 했을 때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바로 이것을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 역시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아니이다.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24:19-22).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12:28,29).

 

또한 성경은 우리 안에 그런 마음의 상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하나님에 대한 영광스러운 서술적 묘사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현을 수 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마음의 상태를 갖지 못한다면, 만일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생각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대하심에 관한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속하는 모든 의무 안에서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준비를 전혀 갖추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관한 경건한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는 것! 이것을 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은혜를 합당하게 활용할 수 있는 출발점에서 있게 됩니다. 만일 이것이 우리에게 없다면, 그 어떤 거룩한 생각과 정서도 우리 마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이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 마음은 의무를 행할 때마다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은혜로운 역사를 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일 의무를 이행하기 시작하는 출발점에서 이것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에게는 의무를 이행하는 데 걸림돌과 장애물이 되는 것들만 가득할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럴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마다 하나님에 관한 경건한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운다면, 우리가 행하는 의무를 실추시키는 불필요한 모든 무례함은 추방될 것이며 육적이고 형식적 인 마음의 모든 상태도 제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마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바 믿음을 행사할 기회를 언제나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경건한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미천한 자들인지를 동시에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런 깨달음은 우리를 장려하여 경외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믿음을 합당하게 행사하도록 만드는 또 다른 수단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그와 같은 깨달음을 가졌기에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고 하나님 앞에서 경외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전도서 기자가 우리에게 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18:27).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5:2).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보이는 뻔한 육적 담대함은 이와 같은 것들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영혼을 파멸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육적 담대함을 가지 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것에 불과하고 그들 자신에게도 무익한 것에 불과합니다.

 

지첨 2.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위엄에 비추어 보면 여러분이 행하는 최선의 의무조차도 결코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지각함으로써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십시오. 아울러 그처럼 보잘 것 없는 여러분의 의무 이행을 선뜻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겸양을 제대로 지각함으로써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십시오.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가정해 보십시오. 우리가 의무를 이행할 때마다 최고로 탁월하고 최고로 생기 넘치는 은혜의 활동이 그 의무 이행 안에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매번 최고로 뜨거운 열정으로 기도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우리가 설교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을 온통 설교에 집중하며 최고로 겸손하고 최고로 깊이 회개하는 심령으로 설교를 듣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다른 의무를 이행할 때에도 매번 불붙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하지만 거룩하시고 엄위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무한하신 거룩하심에 비추어 볼 때 이 모든 것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들입니까!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4:18,19)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15:16).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16:2).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행하는 최선의 의무들은 정말 아무런 가치도 없고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경건한 행위에도 죄악이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경건한 행위도 우리의 인격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를 필요로 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씻음과 의롭다하심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그런 경건한 행위에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것은 정말로 무한한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로 우리는 평생동안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거룩하게 기리며 살아야 마땅합니다.

 

, 여기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행한 최선의 의무들도 이 정도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소유하게 되는 최선의 마음 상태도 이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럴 진대 하물며 하나님을 경배하면서도 그 안에서 믿음을 합당하게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생기 도 전혀 없이 그저 의무만 형식적으로 간신히 이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크게 모욕하는 나태함과 태만함이겠습니까! 또한 이런 우매함은 얼마나 지독한 어리석음이겠습니까!

 

이런 태만함은 얼마나 크고 중한 죄입니까! 그것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중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에 관한 깨달음을 우리 마음에 계속 간직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의무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우리 자신을 격려하도록 합시다.

 

지침 3.

하나님께 나아가면서도 하나님에 관한 경건한 생각을 우리 마음에 채우기를 게을리 하는 것, 또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의무 가운데서 믿음이 합당하게 행사되도록 분발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할 수 있는 모욕 중에 가장 치욕스러운 모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신적 속성과 신성(神性)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깨달을 수조차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물의 번듯한 외관과 외양을 보시면 흡족해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그럴 듯하게 꾸며서 하나님 앞으로 가져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가 우리에게 절대 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정 말로 혐오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4:12,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29:13).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誓願) 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詐欺)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萬軍)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14)

 

구약의 말라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사육하는 양무리 중에 수컷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흠 있고 눈먼 것을 골라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속이는 자혹은 저주받은 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1:14). 그런데 어느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들의 상태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거룩한 의무를 이행하는 중에 적극적으로 믿음을 발휘하지 않고 믿음을 합당하게 행사하는 일을 태만히 할 때, 우리의 상태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와 다를 바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거룩한 의무를 이행하는 중에 적극적으로 믿음을 발휘하여 합당하게 믿음을 행사하는 것!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재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 야 할 것은 바로 그 것입니다. 그 것이 없으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무는 눈먼 것과 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악취가 진동하는 썩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의무를 이행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비참한 일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비참함 은 자신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의무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참함은 의무를 한없이 늘려가면서 늘어난 의무에 짓눌려 부담을 느끼고 허덕이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비참함은 의무에는 참여하지만 거기에서 아무 런 유익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도 비참한 일일진대, 이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전적으로 도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더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사람들이 마음의 완 고함과 완악함을 더욱 증대시켜 자기 자신의 영혼을 파멸 로 몰아넣는다는 것은 얼마나 더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시편 기자의 말을 빌어서 여러분을 권면합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 할지어다”(4:4).

 

우리는 의무를 이행하는 중에 믿음을 행사함으로써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우상으로 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이 언제나 이 같은 믿음을 행사할 수 있기까지는 시편 기자가 말하는 일을 계속 행하십시오.

 

지첨 4.

하나님을 경배하는 의무에 참여할 때마다 여러분이 어떤 일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대하게 되는지 먼저 생각하고, 그것으로 여러분의 영혼이 항상 깊이 감동되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대하게 되는 일들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영광에 관련되어 있는 일들

(2) 우리 자신의 영혼에 관련되어 있는 일들

 

우리 마음이 이런 일들을 꾸준하고 합당하게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의무에서도 믿음은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발휘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이런 일들에 세밀한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깊이 깨닫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기도를 하면서도 정말로 기도할 때 믿음이 필요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르게 되고, 기도 중에 우리가 믿음을 행사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르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무들은 형식주의에 완전히 빠지게 됩니다.

 

우리의 기도 중에서 가장 훌륭한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련되어 있는 일들과 우리 자신의 영혼 에 관련되어 있는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느끼고 있는 바를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 바로 이것이 가장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와 같은 것들에 관한 지각이 우리에게 전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기도 시간에 아무리 많은 말을 하고 아무리 그럴듯한 행동을 취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기도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와 같은 것들에 관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지속적으로 거한다면, 즉 우리가 이와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한다면, 즉 우리 마음이 이와 같은 것들에 천착(穿鑿)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마다 믿음이 반드시 역사하게 되어 있습니다. 혹 여러분은 기도할 수 없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관련된 것들과 여러분 자신의 영혼에 관련된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십시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기도하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입니다.

 

지침 5.

여러분은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여러분의 열정을 싸늘하게 냉각시키는 경향이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들을 부지런히 경계하도록 하십시오. 가령,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는 육신의 피곤함 때문에 올 수 있는 내키지 않는 마음. 산란한 마음, 각종 어리석은 상상, 마음을 맴 도는 일상적인 일 등을 부지런히 경계하도록 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이와 같은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고 경계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여러분의 마음을 장악할 것이고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믿음이 행사되는 것을 철저하게 가로막을 것입니다.

 

지침 6.

하지만 지금까지 말씀 드린 그 어떤 지침보다 더 중요하고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속하는 여러 가지 의무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직무와 관련하여 맺고 계신 관계를 언제나 조심스럽게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의 인도를 받을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께 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직무는 교회의 기도와 탄원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이 같은 직무를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으려면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하는데,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건하게 경배하는 의무를 이행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모시고 그를 인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간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의무를 이행하면서도 우리가 그 안에서 믿음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심하게 조롱하는 짓이겠습니까! 실제로는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일을 마치 진심에서 우러나와 하는 것 것처럼 꾸며대는 것이니, 그 얼마나 하나님을 심하게 우롱하는 짓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직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를 이보다 더 크게 모욕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보다 더 크게 깔보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고 계신 자신의 직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속하는 여러 가지 의무와 맺고 계신 관계를 합당하게 숙고하는 것은 믿음으로 하여금 곧바로 자기 자신을 합당하게 행사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곧 자신이 맡으신 직무를 이행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구원 얻는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고, 그리스도를 제대로 생각하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믿음은 자기 자신을 발휘하여 복된 체험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여섯 가지 지첨은 모든 거룩한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믿음을 행사하도록 우리를 고무시키고 지도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의무를 이행할 때마다 이처럼 믿음을 행사하는 체험이 영혼 안에 지속되면, 이것은 그 믿음의 참됨을 입증하게 되어 있고, 시험과 환난이 닥칠 때마다 우리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 줄 것입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반론.

우리는 기도의 은사가 매우 부족하고 빈약합니다. 우리는 간절하고 열렬하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기도할 때 믿음을 행사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답변.

간절하고 열렬하게 기도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열렬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은사가 매우 빈약한 경우에도 내재해 있는 은혜는 얼마든지 매우 수준 높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이런 경우는 흔히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하여 최선의 것을 드리려는 마음입니다. 겉으로 들어나는 열렬한 기도보다는 진정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불평을 털어놓을 지도 모릅니다.

 

불평.

우리를 대표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의 은사가 빈약합니다. 그들과 함께 기도할 때 은혜를 전혀 활용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답변 1.

기도에 있어서 사람들마다 영적 은사가 크게 차이난다는 것은 분명 한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킵니다.

 

답변 2.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런 불평을 갖도록 만드는 사람들과 여러분이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며 여러분에게 부과된 의무인지 잘 살펴보십시오. 혹 여러분에게 이롭지 않은 것을 여러분 스스로 자원하여 선택해 놓은 후에 나중에 가서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답변 3.

설령 그 들의 은사가 너무나 빈약하다 할지라도, 그런 은사를 통해서 그들의 마음 안에서 은혜가 역사되고 있다면, 우리 마음에서도 은혜가 역사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안에 은혜가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가 전혀 없는 경우라면, 문제는 어렵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견해입니다.

 

답변 4.

믿음의 참된 대상이 되는 것에 반응을 보이고 그것에 관하여 믿음을 행사하기 위하여 기도의 내용에 여러분의 마음을 계속 고정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믿음은 기도의 의무 가운데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옳은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예수안에 하나교회
글쓴이 : 다니엘(정성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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