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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참된 믿음의 특성과 능력 문서 - 제 5장 참된 믿음이 드러내는 특별한 증거

baromi 2016. 7. 4.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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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믿음이 드러내는 특별한 증거

 

거룩하고 겸손한 생각을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보다 더 많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제부터는 참된 믿음이 자기 자신을 입증하는 특별한 방식을 예를 들면서 설명하고자 합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참된 믿음은 특별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입증합니다. 그 특별한 방식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혼을 회개의 상태로 이끌어 오는 것입니다. , 이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는 먼저 다음 세 가지를 반드시 말씀드려야만 합니다.

 

1. 먼저 , 제가 '회개의 상태' 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간략하게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2. 믿음이 회개의 상태를 산출하면서 자기 자신을 입증하는 시기와 상황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 또 어떤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믿음을 행사하는지를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3. 회개의 상태에 있게 될 때, 우리가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의무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설명 1.

제일 먼저, 여기에서 제가 '회개의 상태' 라고 일컫는 것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야 하겠습니다. 제가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복음적 회개에 속하는 은혜와1) 의무만 의미하지는 알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적 회개는 참된 믿음과 절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참된 믿음만큼이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탁월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일지라도 죄를 참되고 진실하게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결코 참된 신자일 수 없습니다.

1) 역자주- 여기에서 존 오웬이 사용하는 '은혜' (grace)라는 단어는, 은혜가 참된 신자들 안에 맺은 열매, 그 열매들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증거, 그리고 은혜의 방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점을 착안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서 제가 '회개의 상태' 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사랑에게 한결같이 있는 것이 아닌 특별한 회개를 의미합니다. 또한 이따금씩 믿음이 자신의 능력과 참됨을 입증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특별한 회개를 의미합니다.

 

또한 여기에서 제가 '회개의 상태' 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복음적 회개와 다른 종류,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는 어떤 은혜, 어떤 의무,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결코 두 가지 종류로 나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들의 상태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상태로 나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회개의 상태' 라고 부르는 것은 복음적 회개이긴 복음적 회개인데, 그 기질이나 그 근원에 있어서, 또 그 모든 열매와 그 결과에 있어서 탁월한 수준에 올라 있는 복음적 회개를 의미합니다.

 

여러 가지 복음적 은혜가 발휘하는 능력과 여러 가지 복음적 은혜가 행사되는 것에는 사람마다 다양한 수준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떤 은혜의 열매에서 더 큰 탁월함을 드러내고, 또 어떤 사랑들은 다른 은혜에서 더 큰 탁월함을 드러냅니다. 가령, 아브라함과 베드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베드로는 믿음이라는 은혜에 있어서 더 큰 탁월함을 발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나 요한은 어떻습니까? 다윗이나 요한은 사랑이라는 은혜에 있어서 더 큰 탁월함을 발휘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어떤 은혜들과 어떤 의무들은 어느 특정한 때에 이전보다 더 훌륭하고 더 고상하게 활용되고 이행되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원인과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 상황에 적합한 의무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513절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를 권면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우리가 처해 있는 여러 가지 상태와 다양한 상황은 그에 적합한 몇몇 은혜의 방편들을 특별하게 활용하고 그에 적합한 몇몇 의무를 부지런히 이행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여기에서 '회개의 상태'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곧 회개에 속하는 여러 가지 은혜와 의무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그리고 강력하게 활용하고 행사하는 것. 바로 이것이 제가 여기에서 '회개의 상태'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개의 상태' 에 꼭 있어야 할 것들은 본 장()의 후반부에 이르러 명확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설명 2.

회개의 상태에 관하여 두 번째로 말씀드려야 하는 것은 회개의 상태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곧 믿음이 회개의 상태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입증하는 경우에 속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회개의 상태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들은 여섯 가지 종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종류 1.

회개의 상태는 부패한 본성과 여러 가지 시험의 강력하고도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고 큰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참된 신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부패한 본성과 여러 가지 강력한 시험을 인해서 여러 가지 큰 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여러 가지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죄들입니다.

 

도덕적 부정을 저지르는 죄

술 칠하는 죄

탐식하는 죄

도적질하는 죄

의도적으로 거짓말하는 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을 압제하는 죄

박해의 시기에 신앙을 고백하지 못하는 죄 등등.

 

초대 교회는 이 마지막 죄의 경우회개의 상태에서 믿음이 자기 자신을 행사하지 않는 한 결단코 회복될 수 없는 죄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아무튼 이런 죄들은 크나큰 슬픔을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고, 근친상간의 죄를 범했던 고린도교회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자신들이범한 죄로 인해 얼마나 슬퍼했는지 과도한 슬픔에 빠질 위험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고후 2:7).

 

만일 참된 신자 중에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죄에 빠지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 있는 참된 믿음은 철저한 겸비함과 회개를 통하여 그 사람의 회복을 위해 즉각적으로 역사하기 마련입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죄에 대한 충분한 자각이 없어서 죄의 권세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하고 더 오래 그 아래 머물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그 사람이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어있습니다. 다윗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도 대부분 믿음은 하나님의 진노로 꺾여진 자신의 배가 다시 맞추어지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양심에 화평을 주는 회복만으로도 만족하지 않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믿음은 그들이 범한 죄의 본질, 그 죄를 범할 당시의 여러 가지 정황, 그 죄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 그죄 안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을 향한 부끄러운 무정함, 성령을 근심시킨 일, 그 죄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광이 실추된 것 등등을 올바르고 합당하게 기억합니다. 그리하여 믿음은 영흔으로 하여금 겸손히 통회하는 심령으로 자신의 죄를 슬퍼하면서 행하며 평생동안 회개를 전반적으로 실행하도록 만듭니다.2)

2) 역자주 - 구약성경을 보면 죄를 회개하는 사람이 취하는 외적 태도의 한가지로, 슬퍼하는 심령으로 걸음걸이를 조심스럽게 천천히 하는 것이 있습니다. 가령 ,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왕상 21:27),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 (3:14)에 그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믿음이 이런 식으로 행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큰 죄로부터 회복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정말로 참된 신자인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 회복을 의심해 보아야 마땅합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큰 죄로부터 고침을 받은 것처럼 행세하다가 다시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타락에 빠져 이전 생활로 되돌아가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믿음의 이 같은 행함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패한 본성과 온갖 시험의 강력한 공격을 받고 함락되어 실제로 큰 죄를 범하게 되었는데. 겸손과 회개를 통해서 겉으로 보기에도 멀쩡하게 다시 회복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런데 만일 이 사람이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회개의 상태라는 멍에를 벗어서 내던져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제는 이전보다 더욱 심각해집니다. 회개의 상태를 벗어서 내던져버린 이 사람은 얼마 있지 않아 다시 죄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하고 어쩌면 이제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떨어질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행보를 천천히 하는 사람만이 안전한 길을 걷고 있는 사람입니다.

 

종류 2.

회개의 상태는 과실을 범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실추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구원 얻는 믿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과실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실추되고 다른 사람들이 실족케 된 것 때문에 회개의 상태를 매우 충실하게 유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와 같은 과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여러 죄 중에서도 하나님을 특별하게 격분시키는 죄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삼하 12:14)

 

"그들의 이른 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36:20)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2:24).

 

이런 사실로 인해서 참된 신자는 꾼임 없이 자신의 죄를 생생하게 기억하게 되고 자신의 죄를 항상 자신의 눈앞에 놓고 보게 됩니다. 또한 이런 사실은 은혜를 받은 영혼으로 하여금 회개에 속하는 모든 행동과 모든 의무를 이행하도록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다윗은 평생 정말로 그랬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막달라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다른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과실을 범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있는 믿음은 겸손하고 통회하는 심정을 그 사람 안에 지속시켜 주며, 교만과 마음의 높아짐과 부주의와 태만을 끊임없이 경계하도록 만들어 주기 마련입니다. 또한 믿음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크게 낮춘 가운데 죄에 대한 분한 마음과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마음과 함께 경건한 슬픔과 부끄러움을 다시 갖도록 만들어 주기 마련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말하는 회개의 상태에 포함되는 것들입니다.

 

자신들의 과실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실추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는 사람들은 그 마음 속에 그리스도인다운 정직함이 거의 없는 사람들입니다.

 

종류 3.

회개의 상태는 여러 가지 혼란케 하는 정욕과 부패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정욕과 부패함이 자신들의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더럽히지 못하도록 그것들을 제압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회개의 상태가 꼭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와 같은 정욕과 부패함은 모든 시험과 결탁하여 자주 우리 영혼을 불안하게 만들고 상처를 입히며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을 당한 영혼은 괴로움을 겪게 되고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4).

 

영혼이 이런 상태에 있을 때, 믿음은 영혼이 감쪽같이 속이는 죄의 기만성과, 강력하게 쳐들어오는 죄의 난폭함을 막을 수 있도록 영혼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고 신중히 처신하도록 만들며 부지런히 움직이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믿음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믿음은 이정도만 해놓고 그것으로 안주해 버리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믿음은 한걸음 더 나아가 영혼의 궁핍하고 위험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마음 안에 심어주어 마음으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경건한 슬픔을 충만히 가지게 하며,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게 하고 회개에 속한 모든 의무를 꾸준히 감당하도록 만듭니다.

 

회개를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치고, 아니, 뒤에 가서 말할 내용이지만 회개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노력하지 않는 사람치고, 정욕이나 부패함을 대상으로 벌이는 싸움에서 끝까지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또 그런 사람치고 올바른 근거 위에서 자기 자신의 평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 역시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도무지 길들여지지 않는 부패한 본성이 여러 가지 상상과 생각과 정서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 안에 끊임없이 역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상태 그대로 모든 의무를 이행하려고 생각하며 그 상태 그대로 신앙생활을 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승리나 평강을 기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야말로 회개의 상태를 반드시 소유해야 하고 회개의 의무를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필요가 가장 각별하게 있는 사람들입니다.

 

종류 4.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지역과 세대가 자행하는 수많은 죄악을 인해서 애통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실추된 것과 그에 대한 보응으로 장차 임하게 되어 있는 두려운 심판을 인해서 애통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상태가 반드시 있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시대의 죄악을 인해서 애통하는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을 크게 존귀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특별하고 탁월한 의무로 부각되는 시기가 여럿 있습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가견적 교회가 심각하게 부패해 있는 시대, 남녀노소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온갖 가증스러운 짓을 공공연하게 자행하는 시대가 바로 그런 특별한 시기입니다. 오늘날이 바로 그런 시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특별한 시기에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자로서는 것을 하나님 자신이 얼마나 크게 존귀히 여기시는지를 분명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9:4).

 

곧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읍 가운데서 자행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들만이 장차 임할 국가적 재앙과 환난의 날에 특별한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와 지역과 세대 안에서 자행되는 죄악을 인해서, 또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실추된 것과 그에 대한 보응으로 장차 임하게 되어 있는 심판을 언해서 애통하는 일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의무를 이행하는 일이 매우 빈약한 것만 같아 저는 두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회개의 상태가 없으면 이 의무를 감당하는 데 꼭 있어야 하는 마음의 상태에 결코 도달할 수 없으며 이 의무를 제대로 이행할 수도 없습니다. 회개의 상태가 없으면, 이와 같은 것들에 관한 여러 생각이 잠시 우리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일은 가능하겠지만, 그런 생각이 우리 마음에는 거의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지속적으로 신령 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영혼이라면 언제라도 이 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종류 5.

회개의 상태는 전도서를 기록할 즈음에 솔로몬이 그랬던 것처럼 인생의 대부분을 이미 다 보내고 나서 세상만사가 결국은 헛되고 헛될 뿐이며 심령의 괴로움만 더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에게 적절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그 동안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일의 다양한 상태와 모습을 회고해 보고 자신이 처했던 여러 가지 상황을 되돌아본다면, 인생 중에는 슬픔과 고통 외에 견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아마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 어떤 선한 사람들, 야곱의 경우처럼 가장 선한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야곱이 인생 말년에 애굽의 바로 앞에 서서 자신의 인생을 회고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 악한 세윌을 보내었나이다 하고“(47:9).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크게 만족스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일지라도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게 되면, 자신이 이 땅에서 잠시 누렸던 모든 안락 중에 가장 뛰어난 안락마저도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을 분명하게 깨달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니로다.

지금은 이 세상에 걸었던

모든 기대를 철회할 때로다.

 

바로 이런 깨달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회개와 애통을 특별하게 실행하면서 남아 있는 삶을 보내야 하는 사람입니다.

 

종류 6.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사랑의 상처를 입고 깊은 감동을 받아서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지내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하고, 그리스도가 계신 곳으로 가는 것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것들을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상태가 필요합니다. 이런 심경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고후 5:2,4,6,8).

 

이런 사람들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따로 떨어져 사는 동안 자신들에게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모든 죄악을 철저히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탄식하며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이처럼 멀리 떨어져 지내는 동안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자신들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온갖 죄와 우매함을 끊임없이 깊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한 불타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한, 그리스도를 대면하는 날이 이르기까지 그들은 겸손과 탄식으로 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다음과 같이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반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와 같은 사랑을 느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항상 기뻐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낮추고 회개해야 할 필요성이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적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런 주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답변.

물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와 같은 사랑을 느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항상 기뻐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들 안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날마다 점점 더 완성되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인한 영적 기쁨과 죄로 인한 경건한 슬픔이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경건한 슬픔의 지속적인 역사가 마음에 없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기쁨을 마음에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경건한 슬픔 안에는 신비로운 기쁨과 유쾌함이 있는데, 이 기쁨과 이 유쾌함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기쁨과 큰 영적 만족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과 동등하다는 사실입니다.

 

요약컨대, 지금까지 말씀드린 여섯 가지 부류의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회개 안에서 믿음을 행사해야 할 필요가 특별히 많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말하는 회개의 상태에는 무슨 특징 이 있으며 또 무엇이 회개의 상태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지를 말씀드리기에 앞서, (이것은 마지막 순서에 말씀드리겠다고 앞에서 전제한 바 있습니다) 회개의 상태와 관련하여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규칙을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겠습니다.

 

규칙 1.

회개의 상태에 꼭 있어야 하는 것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믿음이 그 중 어떤 것에 있어서 비록 성취도가 그저 미약하고 저급할지라도, 회개의 상태에 꼭 있어야 하는 것들을 얻으려고 신실하게 노력함으로써 믿음은(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바) 자신의 참됨을 입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회개의 상태에 꼭 있어야 하는 것들을 자신이 온전하게 충족시키지도 못하고 순종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참된 믿음에 필수적인 회개의 상태의 굉장히 중요한 한 가지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믿음이 많은 일에서 넘어지고 실패하며 자신이 성취하고 있는 큰 진보를 전혀 감지하지 못할지라도, 만일 회개의 상태를 진실하게 추구하며 이와 같은 갈망을 영혼 안에 지속적으로 유지시킨다면, 바로 그것을 통해서 믿음은 자신의 참됨을 입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규칙 2.

앞으로 살펴볼 것이지만 회개의 상태에는 꼭 필요한 것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회개의 상태와 회개의 심정을 가지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 안에 획일적으르 균일하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의 상태에 꼭 있어야 하는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에 좀 더 특출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다른 한 가지에 좀 더 특출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회개의 상태에 꼭 있어야 하는 것들 중 어떤 것들을 이행하는 데 특별하게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것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회개의 상태에 꼭 있어야 하는 것들 중 어떤 것들을 이행하는데 있어서 크게 장애만 되는 것들을 많이 소유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상태에 꼭 있어야 하는 모든 것들이 회개의 상태와 회개의 심정을 가지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 안에 획일적으로 균일하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해 둘 것이 있습니다. 비록 정도에 있어서는 다양함이 존재할 수 있지만, 회개의 상태에 꼭 있어야 하는 모든 것들은 마음 안애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하며, 그것들이 행사되어야 합당한 기회가 생길 때마다 때때로 분명하게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규칙 3.

회개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게 되면, 회개의 상태와 마음의 불만족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마음의 불만족은 어떤 것입니까? 마음의 불만족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망만 안겨주는 이 세상일에 단순히 싫증만 느껴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나무라며 인생의 문제로부터 자기 자신을 철회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마음의 불만족으로 인해서 사악한 길로 빠져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회개의 상태에 꼭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회개의 요소 1.

회개의 상태에 꼭 있어야 하는 첫 번째 요소는 이 세상을 부인(否認)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키고 있는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곧 이 세상의 것들을 사용하되 이미 알려진 여러 가지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듯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정해 놓고 사는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일에 얼마나 깊이 집착하고 있는지 아랑곳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이 세상일과 사업에 푹 빠져서 정신없이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온통 마음과 정서를 빼앗기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일반적으로 엄격하다고 부르는 생활 방식보다 좀 더 엄격하게 생활하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논하고 있는 믿음의 역사는 죄를 죽임과 이 세상을 부인하는 것에 그 기초를 세워야만 합니다. 그 기초 위에서 비로소 믿음의 역사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죄 죽임과 참회를 엄격하게 실행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항상 그 일의 기초를 이 세상을 부인하는 것에 세웠습니다. 먼저 이 세상을 부인한 다음에 죄 죽임과 참회를 엄격하게 실행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 중 대부분은 세 가지 오류에 빠졌고, 그 결과 그들이 원했던 모든 얼은 망쳐지고 말았습니다.

 

오류 1.

그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히 이행해야 하는 본성적이고 도덕적인 의무들을 무시하고 이행하지 않는 오류에 빠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버지로서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의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저버리고 독거생활에 파묻혀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럼으로써 그들은 인간 사회의 원리와 기독교 신앙의 원리가 그들에게 의무로 부과하는 바 국민으로서 사회에 기여해야 할 책임과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에 기여해야 할 책임을 모두 외면해 버렸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식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대한 의무들을 전혀 이행할 수 없는 삶의 방식, 가령 사랑의 모든 열매로 뭇사람을 존경해야 한다는 의무와 같이 중대한 의무를 전혀 이행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그런 삶의 방식에 자기 자신들을 가두었던 것입니다. 설령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섭리로 그들의 거주지로 정해 주신 장소와 환경에 살았을지라도, 이 사람들은 더 크게 유용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더 크게 도움을 주는 사람도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취한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복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도하고 있는 바 이 세상을 부인하는 일에는 그런 것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마땅히 행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감당한다고 해서 그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익 한 존재가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일은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이 세상을 활용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세상을 지나치게 남용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선을 행해야 합니다. 실로 이 세상을 가장 크게 부인하는 사람들처럼 인생의 모든 의무를 감당할 준비가 잘 되어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신체적인 힘이 크게 연약해진 경우가 아닌데도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삶으로부터 물러나서 혼자 은거(隱居)하고 싶다는 생각은 마귀로부터 오는 유혹입니다.

 

오류 2.

그들은 성경 이 전혀 요구하지도 않는 의식들을 수없이 정해놓고 그 의식들을 준행하는 오류에 빠졌습니다. 가령, 외적인 내핍 생활, 각종 금식, 음식을 가려먹는 것, 여러 가지 기도 시간 등을 스스로 정해놓고 지켰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마침내는 단식 (斷食)으로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것과 여러 가지 고행까지 첨가했던 것입니다. 죄 죽임과 참회를 엄격하게 실행하고자 했던 그들의 모든 의도는 끝내 이와 같은 것을 미신처럼 철저하게 신봉하면서 준행하는 것으로 끝이 났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해악을 초래하는 주범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와 같은 것을 결코 지향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의무만 준행 합니다.

 

오류 3.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을 지도하는 어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여러 가지 특별한 규칙과 명령을 따르기로 서원(誓願)하고 그것들을 준행하는 오류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그 특별한 규칙과 명령은 참된 신앙생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 신앙생활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으로 인해 모든 일이 전부 잘못 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본래 품었던 목적은 선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하는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와 그런 우리의 삶에 속하는 모든 것들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이 세상을 부인하고자 했던 그들의 본래 목적은 선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야만 하고 세상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의 인도를 받고 있다면, 우리는 겸손과 회개를 통해서 특별히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세상이 우리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못박힘 1.

현세적인 삶에 있어서 바람직한 것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죽이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정서는 본래 그런 일들에 매우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며 참으로 끈질기게 집착합니다. 우리의 정서가 특별히 더 그렇게 작용하는 때가 있습니다. 가령 남편, 아내, 자녀 등등 관계의 친밀함으로 인해 그 일들이 우리의 정서를 사로잡고 있을 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에게 잘 하면서도 그들을 위해서 마땅히 해줘야 할 것을 충분히 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자신이 아무리 그들을 정성으로 사랑해도 마땅히 그들을 사랑해야 할 만큼 충분히 사랑해 주지는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자신과 그런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이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 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마음이 그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이 우리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으며, 그들을 사랑하느라 신령하고 천상적이며 영원한 것들에 대한 애정이 약해지고 둔해진다면. 그들에 대하여 우리가 죽지 않는 한, 우리 마음은 결코 선한 상태에 있지 못할 것이고 회개의 은혜를 활용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추구하는 정도까지 다다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용한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하여, 가령 재산, 지위, 무사태평(無事泰平)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자신들이 제대로 생각하고 있다면 자신들은 그것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그것들을 과대평가하거나 그것들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이 거룩한 은거(隱居)를 시작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우리의 마음을 무디게 만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현세적 삶에 있어서 바람직한 것들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마음을 무디게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잠시 이것에 대하여 말씀드린 후에 세상에 대하여 못박히는 것에 관하여 몇 가지를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 그것들의 덧없음. 공허함, 그리고 만족도 안식도 전혀 줄 수 없는 무력함을 명확하게 알고 흔들림 없이 확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것들을 다음과 같은 것들로 표현합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 잠시뿐인 쾌락, 멸망할 것, 없어지는 것, 그 외에도 올무, 무거운 짐, 장애물 등등. 그것들이 결국 이와 같은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우리 마음에 꾸준히 각인시킨다면, 이전에 그것들을 기뻐하고 그것들로 만족하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 둔해질 것입니다.

 

󰊲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하여 못 박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시는 그리스도를 많이 생각할 때, 그 분이 어떻게 죽으셨고 또 왜 죽으셨는지를 깊이 생각할 때, 만일 우리 마음 안에 구원 얻는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 마음은 이 세상의 바람직한 것들을 더 이상 다정 한 눈길로 즐거이 바라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닮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싸늘하게 죽어 있고 색이 바란 것으로 비쳐지게 되어있습니다.

 

󰊳 모든 생각을 신령하고 영원한 것들에 끊임없이 집중하는 일이 요합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다른 책에서 이미 강론한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과 관련하여 필요한 모든 충고를 골로새서 31절 이하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右便)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승배니라”(3:1-5).

 

바로 이것이 믿음이 맨 처음 일하기 시작하는 곳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 복음에서 맨 처음 배우는 교훈입니다. 곧 이 세상의 바람직한 것들을 사랑하고 갈망하는 마음을 죽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자기부인(自己否認)이 라는 교훈. 바로 이것이 믿음이 복음에서 맨 처음 배우는 교훈입니다. 이것을 행하는 과정에서 믿음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려고 애써 노력 합니다. 만일 여기에서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진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회개라는 이 거룩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그 이상의 다른 모든 노력은 결국 허사(虛事)가 되고 맙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것과 관련하여 여러분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다음과 같이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믿음이 이 의무를 감당하고 이 일을 행할 수 있으려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조건들이 내게 반드시 구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여러 가지 조건들 중에 어떤 조건을 덜 구비하고 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이 그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시작 단계인 이곳에 앉아서 스스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곰곰이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만일 내 마음을 이 세상으로부터

더 확실하게 떨어뜨려 놓지 않는다면,

만일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갈망하는 마음을

현저하게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으며

철저히 둔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만일 내 마음을 그와 같은 상태로

더 확고하게 만들고자 날마다 힘써 노력 하지 않는다면,

나는 살아서도 이 의무와 무관한 사람으로 지낼 것이고,

죽을 때도 이 의무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죽을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못박힘 2.

이처럼 이 세상의 바람직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애정과 사랑과 갈망과 기쁨을 죽이면, 이전에 그것들을 향해 느꼈던 여러 가지 정념(情念), 곧 두려움과 분노와 슬픔 같은 것들은 자연스럽게 완화되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고 상실될 수 있으며 곤란해질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하면 두려움과 분노와 슬픔 같은 정념에 빠져버립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예민해지고 나약해지기 쉽습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마음에 그 모든 일을 쌓아두고 고민 고민합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마치 자기 외에는 자기와 같은 어려움을 경험해 본 사람이 거의 없는 것처럼 고민되고 실망되는 모든 일을 한결 더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조그마한 일에도 크게 요동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다른 격렬한 정념도 느끼지만, 여러 가지 사소한 일에도 자주 분노에 휩싸이고, 크고 작은 모든 변화에 자주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입니다. 또한 까다롭고 괴팍하며 심술궂은 사람들은 모든 일에 불쾌감을 쉽게 느끼고 감정을 쉽게 상하는데, 이것 역시 앞에서 말한 이유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심적 상태를 완화시키고 이 같은 기질과 괴팍한 성향을 축출하는 것은 믿음이 행하는 일의 한 부분입니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부인하면, 마음은 차분해지고 침착해지며 평온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그 어떤 사건과 일이 발생할지라도 그런 마음은 쉽게 요동하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은 그런 일들에 대하여 죽어 있으며 거의 관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45절에서 우리에게 탁월하게 행하라고 권면한 마음의 관용(寬容) 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잘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우리 마음의 관용이 모든 사람에게 확연히 알려질 만큼 탁월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란 친척 관계, 가족 관계,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관계를 통해서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의 관용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유익을 끼치고 훌륭한 본을 보이도록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런 마음의 관용이 없기 때문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하며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불안감만 잔뜩 심어주며 살고 있으며 이 세상에 해악만 끼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의 관용은 모든 신자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의 관용을 탁월하게 발휘하는 사람들은 특별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믿음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부인하며 회개를 특별하게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못박힘 3.

이 세상을 부인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현재 일이나 장래 일에 관해서 염려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슨 일을 만나도 근심하지 말고,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말며,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직 우리의 모든 일을 친히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적인 처분에 모든 일을 전적으로 의탁하라고 명령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명령 중에서 이보다 더 엄하게 하달된 명령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생각이 너무나 허망해서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을 오히려 가장 소중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적인 일에서든 공적인 일에서든, 사람들의 머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염려하고 장래 일어날 일을 근심하느라 거의 쉴 새 없이 분주하게 돌아가며 온갖 생각과 책략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믿음은 세상을 부인함으로써 사람들의 이런 성향도 완화시킵니다. 그것을 완화시키는 것이 회개를 촉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라면 믿음은 언제나 그것을 완화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영혼이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확고하게 그리고 전부 다 복종시키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믿음은 영혼이 하나님의 의지라면 무조건 만족스럽게 여기도록 만듭니다.

 

더욱이 믿음이 있는 영혼은 이 세상 물건을 활용하되 그것 때문에 염려하지 않으면서 마치 이 세상 물건을 전혀 활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것들을 활용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매우 상세하게 그것도 신적인 논법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시면서 역설하시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625절 에서 34절까지를 읽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직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 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 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격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 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6:25-34).

 

세상에 대하여 못박힘 4.

또한 목숨을 위한 여러 가지 의무와 일보다는 신앙에 속하는 여러 가지 의무와 일을 항상 더 선호하고 항상 먼저 이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목숨을 위한 여러 가지 의무와 일을 항상 부지런히 경계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신앙에 속하는 의무들을 끊임없이 방해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것들은 자신들이 우선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목숨을 위한 여러 가지 의무와 일이 과연 우선권을 차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그 의무와 그 일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어떻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대한 관심이 우리 마음을 장악하고 있다면, 목숨을 위한 의무와 일이 신앙에 속하는 여러 가지 의무보다 더 선호될 것입니다. 또한 신앙에 속하는 여러 가지 의무는 대부분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고 다른 일을 하기에는 전혀 적절치 않은 시간이 생길 때까지 계속 연기될 것입니다.

 

반대로 신령한 것들에 관한 관심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면, 다음과 같은 주님 말씀에 따라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3).

 

물론 이 규칙이 모든 상황과 모든 여건에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보다는 우물에 빠져 있는 소나 나귀를 건져내는 일이 더 중요한 일로 부각되는 상황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근본적인 원칙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은 제사보다는 인자(仁慈)를 더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12:7).

 

하지만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 앞에 행할 때면, 믿음은 언제나 신앙에 속하는 모든 의무를 목숨을 위한 다른 모든 일보다 더 우선시하는 법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그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변변치 못한 구실을 갖다 대며 신앙에 속하는 의무들을 얼버무리고 넘겨버리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다른 일을 하기에도 부적절한 시간으로 신앙에 속하는 의무들을 무성의하게 내팽개쳐버리는 일을 믿음은 결코하지 않습니다. 근신하여 기도하는 것도 겸손과 회개를 탁월한 수준으로 이행하려면 꼭 필요한 바 이 세상을 부인하는 것에 포함됩니다.

 

세상에 대하여 못박힘 5.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다는 만반의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준비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위대한 의

무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원리입니다. 이런 준비가 어느 정도 우리 안에 참되게 없다면, 결코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상태에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는 바 이 세상을 부인하는 것과 관련해서 요구되는 이런 준비는 탁월한 수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일컬어 그리스도와 비교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상대적으로 미워하는 것 이 라고 부르십니다.

 

가령 그리스도와 비교해서 다른 것들을 상대적으로 미워하지 못하도록 하는 모든 것을 경멸하며 거부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 신앙의 경주에서 세상이 무거운 짐으로 우리에게 작용하는 일이 결코 없도록 하는 만반의 준비,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일을 미련 없이 버리겠노라고 마음으로 확고하게 결심하는 만반의 준비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나도 평정을 잃지 않고 즐거워한다고 해서 그런 결심이 우리 안에 지배적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숙고하고 있는 믿음의 이 역사, 곧 이 세상을 부인하는 일에 있어서는 그런 결심이 우리 안에 지배적으로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필수 요건입니다.

 

, 이렇게 해서 회개의 상태에 꼭 필요한 첫 번째 요소를 상세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두 번째 요소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회개의 요소 2.

회개의 상태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두 번째 요소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족과 혐오감을 느끼며 죄를 특별하게 기억하고 마음에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맺으신 언약에서 다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죄를 다시는 형벌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자신도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말아야 하고 우리의 죄로 인해 다시는

겸비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는 언제나 죄와 연관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죄를 기억하는 일이 있기 마련입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51:3).

 

시편 기자는 자기 자신의 죄가 항상 자기 앞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 자기 자신의 죄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범했던 죄를 다시 기억하는 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죄에 대한 기억 1.

기쁘고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과거의 죄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죄를 기억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젊었을 적 에는 자신의 정욕을 마음껏 만족시키며 살았지만 이제는 몸이 늙어서 여전히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정욕을 이전처럼 만족시킬 수 없는 방탕한 죄인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과거의 죄를 기억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범했던 죄를 기억해 내고 마음 속으로 그것들을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지금도 그런 죄들을 얼마나 기뻐하는지 서슴없이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과거에 범했던 죄들과 관련하여 어떤 유감(遺憾)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사실에 대한 유감이 있을 뿐입니다. 즉 이제는 신체적 힘이나 기회가 없어서 그런 죄들을 현재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유감이 있을 뿐입니다. 사악하게 늙어간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젊은 날 범한 죄가 그 사람의 뼛속까지 인박혀 있다는 것도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음란한 사귐, 불순한 모임, 정욕을 자극하는 모든 것들을 그와 같이 기뻐하고 있습니다. 실로 이것은 두려운 징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무지 회개할 수 없는 완악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두셨다는 매우 두려운 징조입니다.

 

죄에 대한 기억 2.

과거의 죄에 대한 기억 이 불안과 두려움과 절망으로 끝을 맺는 경우도 있습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과거에 법 한 죄는 그 사람의 마음을 힘들게 만드는 기억으로 그 사람에게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즉 과거의 죄에 대한 기억이 그 사람의 마음에 괴로움을 주는 기억으로 가끔씩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죄가 악화되어 가고 있는 현실도 상기시키면서 과거의 죄에 대한 기억 이 그 사람의 마음에 괴로움을 주며 이따금씩 찾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죄가 자신들을 찾아올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디론가 숨어 버립니다. 가령 과거의 죄와 관련하여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지워버립니다. 또는 자신을 찾아온 죄와 대화할 시간을 전혀 내주지 않습니다. 또는 파산한 채무자가 하는 것처럼 여러 가지 무의미한 생각과 말을 늘어놓으면서 다음 번에 생각하자고 자꾸 연기시킵니다.

 

그러나 이따금씩 죄는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을 기세로 사람들을 찾아옵니다. 죄는 그들을 법정 에 세워서 변론시켜도 좋다는 체포 영장을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발부 받아서 그 영장을 들고 찾아옵니다. 죄가 이런 식으로 찾아오면,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이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과 절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욕에 더욱 더 몰두함으로써 불안과 두려움과 절망을 가라앉히고 새로운 기분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가인이 바로 이런 사람들의 전형 적 인물입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4:13. 16. 17).

 

죄에 대한 기억 3.

회개를 촉진시키는 역 할을 하는 죄에 대한 기억도 있습니다. 과거의 죄를 기억하는 이 세 가지 방식은 영혼이 죄를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입니다. 그런데 영혼은 죄를 바라볼 때 다음 세 가지를 바라봅니다. 잠시 이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대상 1.

영혼은 과거에 범했던 죄를 기억하면서 자신의 본성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으며 죄라는 열매의 뿌리가 되는 자신의 본성이 얼마나 사악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바라봅니다. 사람들은 죄를 보면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우매한 사람인지를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죄를 보면서 자기 자신이 죄와 사탄에게 얼마나 기만당했는지를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죄를 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치 아니하는 마음과 무정한 마음이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의 마음은 경건한 부끄러움으로 가득하게 됩니다(6:21). 이런 경건한 부끄러움은 회개에 많은 도움이 되고 회개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과거에 범했던 많은 죄와 과실을 지금보다 더 많이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보다 더 겸손하고 더 신중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노년이 되었을 때 다윗은 자신이 젊은 날 범했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일을 자신이 새롭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해 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

내 소시(少時)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25:7).

 

대상 2.

영혼은 과거에 범했던 죄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내와 용서하시는 자비가 자신의 삶에 분명하게 드러났었다는 사실을 바라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영혼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전에 나는 여러 가지 죄를 많이 범하며 살았다.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버리실 수도 있었다. 아니, 당연히 하나님은 그렇게 하셔 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를 죄 가운데 완전히 내버리실 수도 있으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정 말로 그렇게 하셨더라면, 나는 긍휼을 얻기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한 번 얻지 못한 채 죽었을 것이다. 더욱이 내가 과거에 범했던 어떤 죄들은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짓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살려주셨고 내 죄를 용서해 주셨다. , 나 같은 죄인을 살려 두신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심이여! 그토록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던 내 죄악을 용서해 주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긍휼이여!”

 

시편 기자는 시편 1033, 4절에서 이와 같은 심경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대상 3.

영혼은 이런 사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중보와 피가 얼마나 효력 (效力) 있는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며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신다는 사실을 바라보게 됩니다(요일 2:2).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혼은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내가 이처럼 많은 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은 죄사함을 통해서 은혜를 존귀케 하고자 함이었는가? 내 영혼과 양심 이 죄의 오염과 더러움으로부터 깨끗케 된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신자의 마음에 주어지는 해답은 그리스도의 중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의 모든 영광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속죄(贖罪) 사역의 가치,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속전(贖錢)의 가치,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말갛게 씻기시는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신자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가장 깊은 겸손이 하나님의 사랑과 화평에 대한 새로운 지각과 조화롭게 어우러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좁은 길로 행하는 영혼은 자신이 과거에 범 했던 죄를 이와 같은 방식으로 기억하는 일에 끊임없이 마음을 쏟습니다. 그런데 죄를 보면서 그와 같은 것들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믿음 이외의 다른 것으로는 죄 안에서 그와 같은 것들을 볼 수 없습니다. 만일 믿음 이외의 다른 것을 가지고 죄를 보게 되면, 죄는 그저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모습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나야겠다는 생각과 두려움과 공포만 가득 채워질 뿐입니다. 반면에 믿음으로 죄를 보는 것은 모든 은혜를 거룩하게 활용하도록 격려하는 강력한 효과를 산출합니다.

 

회개의 요소 3.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족과 혐오감을 느끼면서 죄를 특별하게 기억하고 마음에 묵상하면, 경건한 근심(곧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영혼안에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실로 경건한 근심 (곧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의 본질과 핵심요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79절 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경건한 근심(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정말로 그렇다고 선포합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후 7:9-11).

 

또한 경건한 근심은 성경이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합니다.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은 신음과 눈물과 탄식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침상을 눈물로 적시는 것으로도 자기 자신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이 경건한 근심에 다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경건한 근심 에 관하여 위대한 모범 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다윗이 보여준 모범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자주 말씀드린 적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또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줄로 압니다. 저는 이것에 관해서 장황하게 말씀드리지 않고. 다만 몇 가지만 밝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경건한 근심은 무엇을 근심하는 것인가?

(2) 경건한 근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가? 믿음은 어떻게 영혼 안에 경건한 근심을 조성하는가?

 

이 두 가지 질문을 순서대로 살펴보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경건한 근심은 무엇을 근심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경건한 근심은 두 가지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 대상을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상 1.

여러 가지 죄 중에서도 그 특성 때문에 또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악화되고 있기 때문에 양심에 가장 깊은 혼적을 남긴 죄들이 경건한 근심의 대상입니다. 물론 전반적으로 경건한 근심은 기억해 낼 수 있는 과거의 모든 죄와 알려진 모든 죄를 대상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살아온 삶에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양심에 가장 깊고 가장 예리한 상처를 입힌 죄가 몇 가지씩은 있기 마련인데, 바로 이런 죄들이 경건한 근심의 특별한 대상입니다.

 

다윗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녀의 남편인 우리야를 살해하는 큰 죄를 범한 후에, 죽을 때까지 자신이 범한 그 죄로 인해 끊임없이 통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젊었을 적 에 범한 다른 죄들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통회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과거 삶을 돌아본다면, 죽는 순간까지 경건한 근심을 유지해야 마땅한 이유를 제공하는 죄를 몇 가지씩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일에 예외가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대상 2.

경건한 근심의 또 다른 대상은 매일 엄습하는 여러 가지 연약함, 넘어지고 자빠지는 일, 그리고 마음과 행실에 스며드는 태만함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가장 탁월한 사람들도 빠지기 쉬운 것으로 경건한 근심의 또 다른 대상입니다. 회개라는 길로 행하며 의무를 신실하게 준행하는 구원받은 영혼은 이와 같은 것들을 늘 슬퍼하고 탄식합니다.

 

저는 지금 경건한 근심에 관한 두 가지 질문을 순서대로 답변하는 중에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충분하게 말씀드렸으므로, 이제는 두 번째 질문을 살펴보면서 답변을 하고자 합니다. 경건한 근심에 관한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2) 경건한 근심의 가장 큰 핵심은 무엇인가? 믿음은 어떻게 안에 경건한 근심을 조성하는가?

 

이 질문애 대해서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경건한 근심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핵심 1.

먼저,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입니다. 이것은 모든 경건한 근심의 토대요 원천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께서 불쾌하게 여기시는 것들로부터 돌이키고 회개하는 모든 일의 토대요 원천이기도 합니다(고전 11:31). 앞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죄에 관하여 영혼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살핍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살핀 결과에 근거해서 날마다 자기 자신에게 판결을 내립니다.

 

이런 일에는 반드시 슬픔과 근심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런 일은 슬픔과 근심 이 없이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영혼이 이런 일을 마땅한 의무로 알고 있고 이런 일을 좋아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반성하는 그 모든 작업은 고난처럼 결코 유쾌하지 않고 오히려 크게 고통스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에는 반드시 슬픔과 근심이 따르기 마련인 것입니다.

 

핵심 2.

이렇게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의 직접적인 결과는 영혼의 끊임없는 겸손입니다. 자기 자신을 살핀 사람은 그로 인해 자신이 어떤 마음 상태와 어떤 심령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또한 이렇게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은 모든 교만과 마음의 자랑과 자기 만족을 뿌리째 뽑아버립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올바르게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그와 같은 것들이 발붙일 자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께서 크게 칭찬하시며 위대한 여러 가지 약속들을 보장해 주신 마음의 상태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마음이 겸손한 자들을 특별히 돌보아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관심이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가르칩니다. 실로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겸손이 결코 자라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바꾸어놓고 감동시킬 수 있는 모든 논법과 모든 생각을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활용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겸손한 마음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이전에 범했던 죄들과 현재 범하고 있는 죄들로 인해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살피는 일을 그 모든 노력의 근본으로 삼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마음에 겸손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겸손의 모양과 틀과 옷은 얼마든지 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결코 참된 겸손을 갖출 수 없습니다. 마음에 겸손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얼굴 표정과 행실은 얼마든지 겸손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겸손이 없으면, 교만이 마음에서 홀로 왕 노릇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겸손은 경건한 근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심 요소입니다.

 

핵심 3.

경건한 근심 안에는 마음의 심각한 고통과 불안이 늘 있습니다. 본래 근심이란 고통을 주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평강을 원하는데, 근심은 그것과는 정반대의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근심 안에 있는 이런 고통은 영적 평강이나 영적 기쁨과 대립되는 고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경건한 근심 안에 있는 이런 고통은 믿음의 열매인데, 믿음의 열매치고 하나님과 더불어 맺은 화평과 일치되지 않는 것이나 혹 나중에라도 그 화평을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다른 여러 가지 위로들과 대립되는 고통입니다. 이런 고통은 온 세상을 다 소유한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 고통입니다. 다윗은 죄로 인해 근심하는 중에 마음에 이런 고통을 느낄 때면 언제나 하나님께 자신이 겪는 고통을 토로(吐露)합니다. 때때로 다윗은 시편 88편 에 표현된 것처럼 심각하고 두려운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사오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사망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살륙(殺戮)을 당하여 무덤 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니 ,

지회는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 데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 라).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게 가증되게 하셨사오니 ,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幽魂) 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 라).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혹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 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 하여 주의 얼 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

이런 일이 물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렀나이다.

주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나의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88).

 

영혼은 때때로 이런 고통에 압도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 고통을 하나님 앞에 탄식으로 아뢰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영혼은 구원받게 됩니다(102:1).

 

핵심 4.

마음 깊은 곳에 이와 같이 고통스런 심령과 탄식하는 심령과 통회하는 심령이 있다면, 이런 마음은 자기 자신을 표출하기에 합당한 기회가 오면 그 때마다 여러 가지 가시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탄식, 눈물, 애통하는 부르짖음 등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고백은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 하도소이다.“

(31:10).

 

다윗이 항상 자신의 눈물을 말하는 것도 동일한 이유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세 번씩이나 부인한 자신의 죄를 기억하며 심히 통곡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향유를 부었던 마리아는 눈물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었습니다. 우리도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합니다. 경건한 근심으로 충만한 영혼은 자신의 내면 상태를 매우 다양한 외적 표현들로 표출하기 마련입 니다.

 

저는 지금 스스로 온전하다고 생각하며 괴로움과 담을 쌓고 쾌활하게 살아가는 신앙 고백자들에 관하여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에는 그런 신앙 고백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믿음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 상태를 표출할 수 있는 외적 표현 수단을 항상 다양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 사이에는 인간이 본래 타고난 기질과 체질이 이와 같은 외적 표현 수단을 따르지 않는다는 너무나 그럴 듯한 주장이 있는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심으로써 경건한 근심이 그 사람의 마음을 간헐적으로 방문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 안에 내주할 경우, 거기에는 경건한 근심을 표출하는 외적 표현들이 완전히 없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느 한 가지 외적 표현이 부족하다면, 다른 외적 표현으로 부족한 부분이 보충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는 것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많이 합니다. 눈물을 홀리는 것이 어떤 것이든 한 가지 틀림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많이 탄식하고 많이 신음하는 것은 그 어떤 사람의 체질에도 반대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죄로 인해 많이 탄식하고 많이 신음하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체질에 주입된 죄에만 반대될 뿐입니다.

 

핵심 5.

경건한 근심은 회개에 속하는 모든 의무와 모든 행위와 모든 열매를 지향하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자극합니다. 경건한 근심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결코 없으며 감정을 전혀 수반하지 않는 경우도 결코 없습니다. 은혜인 동시에 의무인 경건한 근심은 영혼을 격려하여 모든 은혜를 활용하도록 하며 은혜와 똑같은 종류에 속하는 모든 의무를 이행하도록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711절 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머.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머,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후 7:11).

 

그러므로 경건한 근심은 참된 믿음으로 인하여 영혼 안에 발생하는 회개의 상태에 속하는 한 가지 요소인 것입니다. 또 믿음은 경건한 근심을 통해서 앞서 언급한 시기에 자기 자신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만일 어떤 사람 안에 이런 경건한 근심이 지속적으로 활등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 얻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증거로서 그보다 더 분명한 증거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근심을 품고 애통하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이 경건한 근심의 가치가 구원 얻는 믿음을 입증하는 다른 모든 증거를 합쳐 놓은 것과 맞먹는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경건한 근심이 없으면 다른 모든 증거들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경건한 근심이라는 상태를 어느 정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의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은 상태에 있다는 가치 있는 증거를 결코 소유할 수 없습니다.

 

회개의 요소 4.

회개의 상태에 속하는 또 다른 요소는 회개의 상태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외적 의식입니다. 가령, 정욕을 죽이려는 정당한 목적으로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육체에 해롭거나 더 중요한 의무에 방해되는 것들 혹은 습관들을 절제하는 것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 점에 있어서 큰 오해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우치는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극단으로 치우치는 태도는 이와 같은 문제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으레 취하는 태도입니다.

 

교황주의자들은 로마 카톨릭이 성경의 규범을 버리고 배교(背敎)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사람이 참회의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욕(禁慾)이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회개의 본질을 엉뚱하게 오해함으로써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41절에서 3절 까지 장차 실현될 교묘한 배교에 관하여 신자들에게 예언하면서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불렀던 여러 가지 것들을 회개로 착각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회개를 대부분 그런 것들로 대체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논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딤전 4:1-3).

 

결혼을 금하는 것, 모든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결혼을 하지 않기로 성직자들에게 맹세시킴으로써 그들을 속박하는 것, 그리고 엄격한 내핍생활이란 미명 아래 다양한 법과 규범으로 식물을 폐하게 하는 것 등이 로마 카톨릭이 말하는 금욕의 본질이었습니다. 거기에다 그들은 수도복을 착용하는 것, 금식 훈련을 하는 것, 꺼칠꺼칠한 옷을 입는 것, 단식을 통하여 몸을 쇠약케 만드는 그럴듯해 보이는 수많은 방법들까지 추가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런 위선의 헛됨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알려졌습니다.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다른 극단으로도 치우쳐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육체적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라고 평가되는 것들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자기들에게 완전하고 전적 인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들에게는 의복이나 음식을 위한 지출을 절약해야 하는 의무가 전혀 없으며. 그 자체로 볼 때 합법적인 것들은 얼마든지 자신들의 원()대 로 사용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자기들은 경건한 근심과 특별한 회개를 가장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자유를 운운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극단도 로마 카톨릭이 빠져 있는 극단 못지않게 치명적이고 해로운 오류입니다. 이와 같은 극단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더러 경계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134절에서 36절까지의 말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21:34-36).

 

그러므로 우리가 논하고 있는 회개의 상태에는 이에 적합한 여러 가지 외적 의식을 준행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세상의 달콤한 유혹을 싫어하는 마음으로 죄로 인해 겸비해지고 고통스러워하는 심적 상태를 무거운 발걸음과 천천히 걷는 행보로 표현하는 것과 함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을 억제하는 여러 가지 외적 의식들이 회개의 기간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은 결코 죄로 인해 겸비해지고 고통스러워하는 자신들의 상태와 형편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들은 적당한 모든 외적 표현을 통하여 그것을 표출해야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수도사들의 잡다한 규율처럼 괴상망측한 옷을 몸에 걸치거나 이상한 몸짓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내면 상태를 표출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 가운데 있는 어떤 사람들처럼 일부러 경건한 어투를 꾸며서 말하거나 무뚝뚝하게 처신함으로써 자신들의 내면 상태를 표출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들은 회개라는 내적 마음 상태를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방식만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내면 상태를 표명합니다.

 

회개의 요소 5.

방심하고 있다가 죄로부터 기습 공격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죄의 유혹이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즉각적으로 유혹에 대항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항상 갖추고 밤에나 낮에나 은밀하게 혼자 있는 시간을 단호히 경계하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은혜를 행사하는 중요한 목적은 영혼을 겸손하고 통회하는 상태로 늘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느 한 순간이 라도 겸손하고 통회하는 상태가 깨져버리면, 회개라는 은혜를 행사하는 모든 목적은 그 기간 동안 실현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마음으로 하여금 다음 두 가지 일을 경계하도록 만듭니다.

 

(1)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의 상태를 상실할 수 있는 시간들

(2)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의 상태를 상실하게 되는 원인들

 

먼저,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의 상태를 상실할 수 있는 시간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의 상태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특별히 면밀하게 경계해야만 하는 시간대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밤에나 낮에나 우리가 은밀하게 혼자 있는 시간입니다. 은밀하게 혼자 있을 때 드러나는 우리의 실체가 우리의 진정 한 실체입니다. 우리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우리가 은밀하게 혼자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있어서 최선의 시간이거나 최악의 시간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에 우리 안에 지배적으로 역사하고 있는 내적 원리가 정체를 드러내고 활동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책을 받았던 것입니다.

 

침상에서 악을 꾀하며 간사를 경영하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2:1).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은밀하게 혼자 있는 시간은 최악의 시간이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 사람들은 밤에 은밀히 혼자 있게 되는 시간동안 다음 날 아침이 밝아오면 힘을 다해 실행에 옮기고 싶은 모든 악을 구상하고 궁리하며 즐거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룹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밀하게 혼자 있을 때 행하는 일은 솔로몬의 아가(雅歌)에 등장하는 신부의 고백처럼 그리스도를 열렬히 찾는 것이고 시편 기자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처럼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3:1).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 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63:6).

 

그러므로 겸손한 영혼은 혼자 있는 시간에 마음을 쉽게 침범하는 여러 가지 헛된 상상들이 자신의 마음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부지런히 경계합니다. 겸손한 영혼은 여러 가지 헛된 상상들이 자신의 마음의 질서 정연한 상태를 일순간이 라도 어지럽히는 일이 없도록 부지런히 경계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겸손한 영혼은 오히려 혼자 있는 시간들을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는 데 온전히 활용합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겸손한 영혼은 자신을 감동시키고 자신을 겸손케 하기에 적합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골똘히 묵상합니다. 곧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모든 생각들을 골똘히 묵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의 상태를 상실할 수 있는 시간들을 말씀드렸으니, 이제는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의 상태를 상실하게 되는 원인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겸손하고 통회 하는 마음의 상태를 상실하도록 만드는 원인은 여러 가지 유혹입니다. 모든 유혹은 갑작스런 기습 공격이나 끈질긴 구애 작전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총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회개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는 영혼은 죄의 유혹이 얼마나 간교하고 얼마나 난폭한지를 항상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영혼은 유혹이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일순간일지라도 마음을 혼란에 빠뜨리게 되면 겸손하고 통회하며 상한 심령은 결국에 완전히 축출되거나 제거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땅한 의무는 겸손하고 통회하며 상한 심령을 보존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신령한 영적 지혜를 조금이라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이 넘어지기 쉬운 유혹이 어떤 종류의 유혹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믿음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특별히 그런 유혹을 끊임없이 경계하고 감시하도록 만듭니다. 또한 어떤 유혹이든 그것이 처음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에 즉각적으로 그 유혹을 공격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합니다. 왜냐하면 유혹은 처음에 그 정체를 드러낼 때에 가장 연약하고 가장 쉽게 함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결코 어떤 유혹이라도 영혼을 공격할 시간이나 근거나 힘을 얻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여 믿음은 겸손한 마음의 상태를 보존하고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유혹의 잔인한 입으로부터 자주 영혼을 구원해 내는 것입니다.

 

회개의 요소 6.

영혼은 자신의 이런 상태를 만족스러워합니다. 영혼은 죄가 될 정도로 자신의 이런 상태를 싫증내지도 않고 조바심 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은 자신의 활기와 능력이 더욱 성장하고 더욱 번성하기를 위해서 노력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항상 깊이 신음하며 깊이 탄식 합니다.

 

영혼이 토해내는 이 같은 탄식은 영혼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대상과 영혼이 이르기를 원하는 최종 목적과 모두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탄식의 중간에는 육체의 현재 상태가 지속되기를 원하는 육체의 신음과 탄식도 어느 정도 개입되어 있습니다.

 

탄식의 대상 1.

신자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며 탄식하는 대상은 신자들 내에 잔존하는 죄의 세력 입니다. 잔존하는 죄의 세력은 영혼을 괴롭히고 불안하게 만드는 주범 입니다. 물론 잔존하는 죄의 세력 때문에 유익한 일도 가끔 일어납니다. 여기에서 유익 한 일은 잔존하는 죄의 세력으로 인하여 영혼이 더 깊이 겸손해지고 더 깊이 애통하게 되며 더 깊이 자신을 낮추게 되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효력 때문입니다. 잔존하는 죄의 세력의 본질은 본래 영혼을 해롭게 하고 멸망케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탄식을 로마서 724절에서 다른 모든 신자들의 처지와 형편을 대표하여 자기 자신을 예로 들어 말하면서 힘차게 표현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 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기를 갈망하며 영혼이 끊임없이 토해내는 이런 탄식은 그 영혼을 자극하여 죄가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죄를 추격하도록 만듭니다. 이런 탄식은 믿음의 열매인데, 믿음의 열매는 예외 없이 모두 열정적이고 과실을 잘 맺는 법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자신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을 향해 활발하게 움직이는 법입니다. 믿음의 열매인 이런 탄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탄식에 있어서 믿음이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죄의 완전한 멸망입니다. 바로 이것을 영혼은 탄식하며 갈망합니다. 바로 이것을 얻고자 영혼은 싸웁니다.

 

이것이 믿음의 행함입니다. 이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2:26). 믿음은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죄까지도 다 전멸시킬 때까지 쉬지 않고 죄를 추격합니다. 믿음은 죄로부터 한순간도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죄에게 한순간의 안식이나 평안이라도

주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죄가 멸망하여 존재하지 않기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 그것은 구원 얻는 믿음의 한 가지 복된 증거입니다.

 

탄식의 대상 2.

신자들이 이르기를 원하여 탄식하며 갈망하는 것은 영광을 완전하게 향유하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 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養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8:23).

 

영광을 완전하게 향유하는 것! 실로 이것은 모든 신자들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장차 누리게 될 은혜이며 또 장차 이행하게 될 본분입니다. 현재 모든 신자들은 자기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죄의 신하와 영지로 존재하지 않기를, 곧 죄에게 종노릇하는 것으로부터 구속받기를 각각 자신의 분량 안에서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자의 몸이 죄의 도구가 된다는 것은 신자의 몸이 죄의 종노롯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종노릇으로부터 우리의 몸이 완전하게 구원받기를 우리는 갈망합니다. 우리의 몸이 완전하게 구원받으면 양자됨의 은혜는 우리의 전인격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탄식과 갈망을 가장 뛰어나게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겸손과 회개의 상태에 있어서 출중한 사람들입니다. 영광을 완전하게 향유할 수 있기를 갈망하며 간절히 탄식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들은 겸손과 회개의 상태에 있어서 출중한 사람입니다. 양자됨의 은혜가 완성되는 것! 영광을 완전하게 향유하는 것! 이것을 그들은 탄식하며 사모하고 갈망하며 동경합니다. 그들은 장차 밝히 드러날 그 영광을 바라보면서 가장 깊은 슬픔 속애서도 기쁨을 얻습니다. 그들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히 장차 밝히 드러날 그 영광을 고대하며 주님을 기다립니다. 참으로 회개하는 어떤 사람이 죽음을 동경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책망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장차 죽음을 통해서 그 사람이 얻게 될 변화의 위대함과 탁월함은 그 사람의 현재 생명이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탄식의 대상 3.

그러나 이 같은 영혼의 갈망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현재 존재를 보존하고자 하는 육신의 갈망입니다. 육신의 이런 갈망은 영혼의 갈망과 항상 붙어 다닙니다. 하지만 믿음은 서로 모순되는 이 두 가지 소원을 조화시킵니다. 그리하여 영혼이 싫증을 느끼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도록 만듭니다. 믿음은 마음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하는 반석에 마음을 견고히 세움으로써 서로 모순되는 이 두 가지 소원을 조화시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마음으로 하여금 서로 모순되는 이 두 가지 소원 중 어느 한 가지에 완전히 휩쓸려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이 두 가지 소원을 조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먼저, 믿음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규범으로 삼아 그 두 가지 소원을 통제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럼으로써 믿음은 그 두 가지 소원이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방지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 두 가지 소원과 의향의 규범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두 가지 소원과 의향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제를 받는 한, 우리는 그 소원으로 언해 범죄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믿음은 그 두 가지 소원을 모두 유용하게 만들 수 있는 한 가지 은혜를 첨가합니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뜻에 항상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소원도 이루고 싶고

저 소원도 이루고 싶으나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대주재 (大主宰) 하나님 의 의지이오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일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모범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26:37-39).

 

회개의 요소 7.

지금까지 말씀드린 회개의 상태를 완성시켜 주는 것으로서 제가 제일 마지막에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소는 천상적이고 비가시적이고 영원에 속하는 것들을 정말 많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겸손한 생각을,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보다 더 많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상하고 천상적인 묵상을,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보다 더 많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늘 탄식하고 늘 애통하며 늘 우울하게 지내는 것으로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보다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보다 지존 무상하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57:15).

 

하나님께서는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시지만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들은 비록 낮은 땅에 거하고 있지만 천상적인 묵상을 통해서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함께 거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장 겸손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자기 비하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선명하게 보는 사람들입니다. 한 웅덩이나 한 우물에서 가장 깊은 부분의 수면이 하늘에 떠 있는 해와 달을 가장 선명하고 가장 맑게 비춰주는 법입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체로 가장 겸손한 영혼이 영원에 속하는 것들을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법입니다


출처 : 예수안에 하나교회
글쓴이 : 다니엘(정성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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