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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천로역정강해?(8):도덕마을 앞에서의 공포와 전도자의 책망

baromi 2011. 9. 27. 23:28

천로역정강해(8):

도덕마을 앞에서의 공포와 전도자의 책망

히브리서12:25

천로역정본문(도덕마을 앞에서의 좌절과 전도자의 책망)

 

 

그리하여 가던 길을 바꾼 크리스챤은 더 손쉽고 현명한 도움을 얻기 위하여 정합당씨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그가 힘들여 언덕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그 언덕은 굉장히 높고 가파를 뿐만 아니라 산의 중턱 여기저기에 커다란 바위와 깊은 골짜기들이 위험스럽게 깔려 있어 그는 혹 그 바위들이 그의 머리위로 떨어지지나 않을까 두려워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언덕 앞에 우두커니 서서 어찌해야 좋을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 가던 길을 바꾸어 새 길로 접어들었을 때부터 등에 짊어진 짐은 훨씬 더 무거운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더구나 갑자기 언덕 위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본 크리스챤은 그곳으로 올라가다가는 불길에 휩싸여 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출19:16~18). 그는 땀을 흘리면서 무서워 떨기 시작했다(히12:21).

그리하여 크리스챤은 이세현씨의 그릇된 충고를 받아들인 것에 대하여 후회하기 시작했다. 마침 그 때 전에 보았던 전도자가 그를 만나러 저쪽에서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크리스챤은 부끄러움과 죄책감으로 인하여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차츰차츰 가까이 다가와 마침내 서로 마주 보게 되었을 때 전도자는 엄한 표정으로 크리스챤을 바라보면서 캐묻기 시작했다.

 

 

전도자: “여보시오. 크리스챤, 어찌하여 이런 곳에 오게 되었소?”

 

이러한 질문을 받고 어떻게 대답할 지를 몰라 당황하면서 크리스챤은 얼굴을 붉힌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자 전도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전도자: “당신이 바로 멸망의 도시 성문 밖에서 울며 괴로워하던 사람이 아닙니까?”

크리스챤: “예, 선생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전도자: “제가 당신에게 작고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드리지 않았습니까?”

크리스챤: “예, 그렇습니다.”

전도자: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쉽사리 결심을 바꾸어 다른 길로 들어서게 되었소?”

크리스챤: “실망의 수렁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오자마자 신사 한 분을 만났는데 그 분께서는 저쪽 언덕 너머에 있는 마을로 가면 나의 무거운 짐을 벗겨줄 수 있는 훌륭한 살마을 만나게 될 거라고 저를 설득하더군요.”

전도자: “그 분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크리스챤: “매우 점쟎고 권위있는 신사로 보였으며 어찌나 능숙하게 말을 잘 하는지 결국 제가 그의 말에 현혹되어 그만 딴 길로 들어서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막상 여기까지 와서 눈 앞에 놓인 언덕을 바라보니 커다란 바위가 여기저기 깔려있고 불길이 타오르고 있어 그냥 저 길로 가다가는 죽음을 만날 것 같아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갑자기 걸음을 멈추게 되었지요.”

전도자: “그 신사가 뭐라고 말하던가요?”

크리스챤: “처음에는 어디로 가느냐고 묻길래 사실대로 대답해 주었지요.”

전도자: “다음에는 뭐라고 물었습니까?”

크리스챤: “나에게 가족이 있느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했지요. 그러나 이처럼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는 이전처럼 그들과 즐겁게 지낼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전도자: “그랬더니 또 뭐라고 하던가요?”

크리스챤: “그는 내게 어서 빨리 짐을 벗어 던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역시 짐을 벗어버리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서 자세한 지시를 얻을 수 있도록 저쪽 문을 향하여 가는 중이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는 당신이 내게 가르쳐 준 길처럼 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따르지 않는 훨씬 편하고 빠른 지름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길로 가면 판단력이 뛰어나고 이러한 짐들을 쉽게 벗겨 줄 수 있는 기술을 지닌 고귀한 신사의 집에 이르게 된다고 했지요. 그리하여 어서 빨리 이 짐을 벗어버리고 싶은 생각에 그만 귀가 솔깃해져서 가던 길을 버리고 이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여기까지 와 보니 아까 말씀드린 대로 언덕이 너무 험하여 혹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서 지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중입니다.”

전도자: “그렇다면 잠깐 그대로 서 계십시오. 내가 당신께 하나님의 말씀을 보여 드리리다.”

 

 

그리하여 그는 떨면서 서 있었고 이윽고 전도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히12:25).

그는 다시 계속 읽어 주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10:38).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나서 그 말씀을 적용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지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권고를 물리치고 평화를 향한 길에서 벗어나 파멸과 멸망의 길로 들어섬으로써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고 있소.”

이 말을 듣고 크리스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죽은 듯이 전도자의 발 앞에 엎드린 채 울부짖었다. “오, 슬픈 일입니다. 이젠 다 틀렸으니 저주 받아 마땅한 저는 어찌해야 좋을까요?” 그러자 전도자는 이 모양을 보고 크리스챤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말했다.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든지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으니(마12:31; 막3:28) 믿음을 버리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도록 하십시오”(요20:27). 이 말을 듣고 크리스챤은 다소 생기를 얻은 듯 했으나 아직 두려움에 떨며 전도자 앞에 서 있었다.

(유성덕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9)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좁은 문을 향해서 나아가고자 할 때, 기본적으로 크게 두 가지 유혹을 받게 됩니다. 하나는 되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최고집씨와 유약한씨를 통해서 이 점을 살폈습니다(예수님의 비유로 치자면, 길가에 뿌린 씨나 돌짝밭에 뿌려진 씨와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유혹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믿음의 길을 따라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복음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율법의 길을 따라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인간의 도덕과 윤리의 그럴듯한 외양으로 가장하고 있습니다. 열매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싹이 나고 잎이 납니다. 자랍니다.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그 결국이 어떠합니까? “말씀을 들으나...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게 됩니다.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이런 유형의 사람을 “이세현씨”와 “도덕마을”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천로역정2부에서는 크리스티아나와 그 자녀들이 이세현씨의 유혹이나 도덕마을을 향해서 가다가 낭패를 당하는 일 같은 것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순례자마다 그 여정이 차이가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습니다. 신앙생활이 상당히 매력적이고 세상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것도 같아서, 열매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결국은 열매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인해서, 기독교신앙을 믿음의 종교가 아니라, 행함과 윤리,도덕의 종교로 윤색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염려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성공하지 못할까 유혹을 받습니다.

 

 

이런 유혹은 교회 역사에 있어서 계속 되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세상사람들이 보기나 듣기에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윤리를 강조했던 자유주의신학이 그렇게 했습니다. 요즘에는 신복음주의신학으로 표현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굉장히 매력적인 것 같은데, 이 길로 현대교회가 들어서게 되면서, 교회다운 모습과 활력과 능력을 상실해버리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에서, 이런 사람들과 교회를 향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히12:25).

 

우리가 어느 길을 가야 합니까?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 경고를 받았습니다. 오늘 천로역정의 본문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이런 잘못된 길을 갔을 때가 있음과,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람(전도자)을 만나게 하셔서, 자신이 지금 잘못된 길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된 길을 들어선 사람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도 잘 보여줍니다. 

 

먼저, 크리스챤이 도덕의 마을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길이 험하고 힘들게 되었습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커다란 바위들이 머리 위로 떨어지지나 않을지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망연자실 어찌해야 좋을 지 알지 못했습니다. 동시에 등에 짊어진 짐은 훨씬 더 무거운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언덕 위에서 불길에 휩싸여 타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이것은, 바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백성들이 느꼈던 두려움입니다. 율법을 행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율법의 짐은 무거워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윤리와 도덕적으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실패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인정과 존경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속으로는 썩어들어가는 자신의 위선과 거짓된 모습으로 괴로워하게 됩니다. 죄의 짐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넓은 길인 것 같은데, 결국은 사망의 길인 셈입니다. 우리는 이런 복음과 생명이 없는 도덕과 윤리적 삶으로 복음을 변질시키는 일들이 있어서는 안되고, 이런 일이 잘못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낭패를 느끼고 있는 크리스챤에게 전도자가 다가와서는 질문을 합니다(천로역정본문읽기). “여보시오, 크리스챤, 어찌하여 이런 곳에 오게 되었소?” 대답을 못하고 있자, 계속 질문합니다. “당신이 바로 장망성 성문밖에서 울며 괴로워하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계속 질문을 하지요. 왜 이렇게 계속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정말 몰라서 알기 위해서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도덕적 낭패, 곧 스스로의 도덕과 윤리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함으로서 복음을 변질시키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냐 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크리스챤은 잘못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잘못이 분명히 무엇인지를 깨닫고 또한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막연한 감정으로 잘못됐구나 느끼는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이전 청교도들은, 회개를 이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인지를 지성적으로 인정하고, 또한 그것을 감정적으로 후회하며 다시는 그런 짓을 범하지 않아야 하겠다는 의지적인 결단까지 있어야 그것이 용서받을 수 있게 하는 회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전도자는 그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여겨질 때 우리가 이렇게 회개하고 또한 어떤 사람이 잘못을 깨닫고 있다면 이렇게 회개하도록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괜챦아요 평안하세요 하면서 위로하기에 급급하다면, 진정한 평화를 맛볼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거짓된 평안으로 만족케 한다면 참으로 잔인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면서 떨고 있는 크리스챤에게 결정적으로 제공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의 성경본문입니다.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히12:25). “삼가 말씀하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땅에서 경고하신 이”는 누구입니까? 모세입니다. 모세의 경고를 무시하였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땅이 그 입을 벌여서 삼켜버리고, 불이 나와서 태워버리기도 하였습니다.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경고하셨습니까? 산상보훈의 마지막에 주신 경고가 무엇입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모세의 경고가 무섭습니까? 예수님의 경고가 무섭습니까? 히브리서기자는 지금 사랑의 주님의 경고가 더욱 무섭고 두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찾는 자가 적다고 하였습니다. 인기가 없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사람의 생각으로 윤색해서 믿음직하도록 만들거나 행할 수 있게끔 타협하고 변질시켜 놓으면,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이런 것을 전도자가 설명하면서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였노라고 책망합니다. 큰 두려움 중에 사색이 되어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합니다. 참된 회개의 표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전도자는 위로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위로의 때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든지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으니 믿음을 버리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도록 하십시오”(요20:27) 합니다. 믿음있는 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우리가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면 이제는 윤리와 도덕이 전혀 필요없다는 식의 생각 말입니다. 존 번연은 여기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참된 믿음은, 결코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하는 것, 그리고 경계하는 것은, 믿음없이,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 없이, 자신의 의와 노력으로 이루려고 하는 도덕과 윤리입니다. 우리가 참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구원받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좁은 길로 행해야 합니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더욱 철저하게 경계하는 것이 전도자의 다음 부분의 교훈입니다. 다음 주일에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토론문제

 

1) 가던 길에서 벗어난 크리스챤의 잘못은 어디에 있습니까?

 

2) 길을 바꾸었더니 오히려 더욱 힘들고 험한 준령을 만났습니다. 이런 결길은 어떤 것들입니까?(렘18:15) 그리고 누구의 전략입니까?(고후11:3~4)

 

3) 등에 지워진 짐이 더욱 무거워진 이유는 무엇입니까?(갈2:4)

 

4) 얼굴이 빨개진 이유는 무엇입니까?(잠1:23)

 

5) 전도자가 일일이 캐묻는 목적은 무엇입니까?(요16:8)

 

6) 세상-지혜자는 우리가 십자가를 어떻게 보도록 만듭니까?(고전1:22~25)

 

7) 철저하게 질문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요5:14)

 

8) 조급증은 영적으로 어떤 것입니까?(딤후3:4)

 

9) 책망을 받을 때 떨고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렘11:19)

 

10)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 곁길로 빠진 것에 대해서 전도자가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까?(히10:38~39)

 

11) 말씀을 적용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딛1:9)

 

12) 전도자의 말에 크리스챤이 죽은 자와 같이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롬7:24)

 

13) 전도자는 언제 사죄의 가능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삼하12:13)

 

14) 전도자는 책망했지만, 한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어떻게 권면하고 있습니까?(살전2:11)

(김홍만,52주스터디천로역정, 생명의 말씀사:2010)

출처 : ImagoDei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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