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스크랩] 마틴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baromi 2009. 7. 8. 00:45

[로이드존스-로마서 강해]

1장 1~2절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1. 그리스도의 중심성

① 바울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말로 표현함으로서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과 삶의 중심, 그리고 자신의 사명으로 주어진 가장 중요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의 전 존재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있어서 그분을 떠나서는 자신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증거하는 일이 전부였기 때문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너무나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② 그의 서신서들은 모두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과 끝으로서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③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의 주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자신에게 있어서 자랑할 만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소개하며, 오직 주님에 대하여만 자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④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쳐진 사람으로서 그의 종이라고 자신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종은 자기의 생각에 따라 스스로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주인의 뜻에 따라 행하며, 그의 명령에 철저히 순복해야 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노예가 되기를 즐거워하며 기뻐했습니다.


⑤  이제 우리는 자신에게 이것을 적용 시켜 보아야 하는데,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앞에 서 계시는지와 우리의 삶 중심에 계시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사도의 사도적 자격 : 사도는 한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선택받아 파송된 자로서 자기를 보내는 자를 대표할 충분한 권위를 입은 자를 말합니다.


① 바울은 행26:16에서 주님께서 직접 사명을 맡겨 주셨으며 자기에 관한 진리를 전파할 위대한 목적을 위해서 특별히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② 바울은 갈1:11~12에서 자신은 다른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직접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전 11:23에서와 15:3에서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도들과 절대로 동등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으며, 자신은 참된 사도라고 주장합니다.


③ 롬11:13과 행26:18에서 그는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며, 그 직분을 크게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은 사도”라고 말합니다.


④ 사도의 직분은 계승되거나 사람들에 의해서 선출되는 직분이 아닌데, 그런 의미에서 사도로 추천을 받았던 맛디아를 보아서도 잘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게 된”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터를 세우는 일이 있을 수 없으며, 계속해서 세우거나 확장해서 세우는 일은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신약의 정경이 형성된 후에는 사실상 사도가 전혀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⑤ 택정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의미로서 선이 그어지고 사람들이 따로 구별 되어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따로 구별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구원도 사명도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창세전에 계획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3. “복음”이란 말의 의미

여기서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 합니다.

우리가 “복음”이라는 말과 너무 친숙한 나머지 그 복음의 깊고 엄청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너무나도 많은데, 우리가 다 알다시피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문자적으로만 살펴보고 끝나서 영적인 의미에 도달하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이 복음이 우리에게 좋은 소식으로 왔느냐 하는 것과 그 복음에 대하여 참된 이해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① 율법에도 은혜의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죄를 튀어 나오게 하기 위함이며 구원의 방도로 주어진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원 받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② 그렇다고 해서 복음이 율법이 실패한 뒤에 사후처리적인 방식으로 들어온 것은 결코 아니며, 단순히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선포하시는 것으로 끝나도 안 됩니다.

구약에서도 죄 사함에 대한 진술들이 풍성하게 있지만, 그것들도 복음은 아닙니다.


③ 복음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행하라고 호소하지 않으며, 도덕적이며 선한 삶을 영위하라고 호소하지도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선해지기 위해서 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좋은 뉴스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의 소식이 될 것입니다.


④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에게 스스로 구원하라고 권면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으로 주어지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⑤ 복음은 우리가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

만일 복음이 세상에 임한 것 중에서 최대의 좋은 소식이거나 사람이 받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은 소식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죄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인식을 가지고 있거나 현제의 자신의 모습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처럼 선하고 또 선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좋은 소식이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도움의 필요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들어도 감격해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쁨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먼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부족한 이유는 죄의 결과들을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죄에 따른 형벌을 인식할 때에만 복음의 좋은 소식의 위대함과 영광을 알고, 그 복음의 충만함으로 인도되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⑥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 하여 죄를 삼으셨습니다.

복음은 성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그에게서 나왔으며,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이루셨으며, 성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⑦ 우리가 구원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본능적으로 성부의 영광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우리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더 기쁠 수도 있고 어떠한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이런 상태가 된다는 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며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들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구원을 거기에서만 머물러 생각하고 아버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구원의 개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상태와 조건으로 인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구원의 결과로 주어진 영광이나 체험과 같은 간증거리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4. 거룩한 글 - 하나님의 말씀

바울은 2절에서 복음은 전에 “약속된”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은 그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말합니다.


①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② 바울은 행13:23과 행17:2에서 설교할 때에 복음은 하나님께서 수세기 전부터 약속해 오셨고, 성경에서 미리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③ 복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처음으로는 창3:15에서 진술하셨고,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에서, 그리고 그 약속은 계속하여 야곱을 통하여 되풀이 되어지며(창49:10), 그리고 민24:17에서와 삼하7장, 그리고 말라기 3:1에서 그런 다음 세례 요한에 관하여도 예고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 상세한 예언의 내용들은 매우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서에 나오는 상징들을 잘 종합하여 따져보면 예루살렘 도성의 멸망과 회복의 때를 지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다시 말하면 정확한 시기가 예언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렘23장, 삼하7장, 이사야7장, 미가5:2, 신18:15, 사53,42,49,52장, 단9:24, 슥9:9,12:10, 시16,22편에서 다 그 예언을 말하고 있습니다.


5. 복음의 계속성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하기 위해 미리 약속하신 자기의 아들을 보내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즉각 단번에 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러한 모든 구약의 역사가 필요했는지에 대해 최종적으로 완전한 답을 찾아내려는 시도를 할 수는 없으며 그것에 대하여 완전한 답을 알 수는 없지만 그에 상당하는 답변이 제시 될 수 있습니다.


① 죄의 깊이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며 인간을 폭로시키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죄는 단순히 어떤 가벼운 불순종의 행동이나 실수가 아니라 무섭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실로 무서운 영혼의 질병이 되는 죄의 실상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요5장, 고후3장)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구원하도록 모든 기회를 제공하시지만, 그들이 아무리 애쓴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룰 수 없음을 최종적으로 입증하십니다.(율법이 그 예)


③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만물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보여주고, 자신의 절대적 통제권과 자신의 최종적 권위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④ 이제 우리는 또 다른 문제로 나아가게 되는데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말하고자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새롭고 이상한 과거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에덴동산에서부터 발원한 하나님의 장엄한 목적임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내내 그것을 해 오셨으며 복음은 같은 연속극에 등장하는 극 중의 주인공 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공로를 근거로 해서 의롭다고 하신 적이 단 한번도 없으시며, 언제나 믿음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같고, 목적도 같고, 구원도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구약의 모든 역사는 그 방면에서 참 놀랍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약 성경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위안을 주고 용기를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에 우리를 절대적으로 복종시키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의 상태로 인하여 고민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의 위로와 위안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났던 어떤 일들 때문에 괴롭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판단할 수 없고 측량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세기 동안 잠들고 계신 것 같지만 여전히 존재하셔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오직 그분께 감사함으로 존귀와 영광을 돌릴 일 밖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1장 3~5절 :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5-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1. 그리스도는 친히 복음의 중심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되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이 복음은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성경에서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그의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것을 펼쳐 보이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으로, 그 점이 복음의 중심이며, 핵심이 되고, 중추신경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기독교 복음이 될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해야 하는 제일 위대한 진리는 바로 이분이 하나님의 영원하고 영존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으로서 신의 차원에 도달한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서 존재 하셨습니다.


② 그는 하나님의 모양으로 계셨었는데 이제 다른 형체, 즉 육신을 취하시고 오셔서 다윗의 후손으로서 사람의 형체로 존재하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여 사람들과 같이 되신 것입니다.


③ 우리 주님은 단지 인간의 몸만을 입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인간의 이지와 이성도 가지신 참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자에게 나시고 율법 아래 나시고 다윗의 후손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나심으로서, 육체를 따라 이스라엘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④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는 위대한 임금으로서 끝도 없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시며, 그 나라에서 영원토록 왕 노릇 하실 것이며, 다윗의 혈통으로 나셔야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기 때문인데,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부인하고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닌 것입니다.


2. 육신과 성결의 영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던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신 그가 육신을 취하여 다윗의 후손으로 존재하신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선포되었는데, 사람들이 비록 타락함으로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이시라는 것이 명백하게 증명 된 것입니다.


① 부활을 통해서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확실하고 절대적으로 선언됐습니다.


②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에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아기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다 그분께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아기로서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돌보아 주어야 할 아이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며,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유에 힘없이 누워 있었던 그 어린 아기로 오셨을 때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은 육체 속에 가려져 있어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여전히 하나님의 한 위격이신 전능하신 하나님 이셨습니다.


③ 그러나 부활의 결과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셨고, 그의 권능이 드러난 것이며, 육체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는 많은 것이 감추어져 있어서 그의 정체와 진상을 알 수가 없었지만, 부활의 결과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암행어사의 성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시는 순간에 그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고 그 표증이 온전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④ 주님이 부활하실 때에 인성을 취하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오직 유일한 중보자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나라는 그의 것이며, 그는 다시 그 나라를 아버지에게 돌려 드릴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⑤ 그러므로 복음의 범위는 영광에서 시작하여, 땅으로 내려오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가시고, 무덤으로 내려가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시고, 다시 영광 가운데 거하시게 된 것을 말합니다.


3. 예수의 주 되심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여러 위대한 사실들을 말한 다음에 궁극적으로 그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이 칭호는 우리 주님께 즐겨 쓰는 위대한 명칭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칭호와 이름을 쓰는 것이 즐거울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 속에 모든 사실이 다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①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모든 것은 이 이름을 인식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사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의 삶과 체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큰 것이었습니다.

관원들은 “가이사가 주”라고 말하도록 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그들은 “예수는 주”라고 계속 함으로서 투기장 안에 있는 사자들에게 던져져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교우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분명하고 바르게, 예수의 주되심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문스러운 점이 있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의 지위 전체가 붕괴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②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이며, 제사장이요, 왕 중의 왕이십니다.


③ 그리스도께서 종의 모양으로 자신을 낮추어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이 우주의 주가 되시며, 모든 권세와 권위에 높아지셨고, 생각 될 수 있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 계시며, 하늘에서 그가 차지한 지위보다 더 큰 지위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최고 통치자이십니다.


④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은 구원받고 도움을 받기 위하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요일3:23)


⑤ 만일 사람들이 복음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멸망과 심판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죄란 내가 그릇된 것을 행했다든지, 내 삶을 오염시키고 나로 하여금 비참하고 불행한 느낌을 가지도록 하는 것, 그리고 나를 넘어뜨리고 내가 이기고 싶지만 이기지 못하는 그런 것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과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⑥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⑦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인 다 자신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고 그의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⑧ 내가 복음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자신을 죄인이라고 믿으며, “나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 또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며,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제공하셨으므로 나는 믿는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내가 그렇게 믿는다면, 이제 전에 있던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가공할 죽음을 필연케 한 내 죄를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고 서글프게 생각하게 됩니다.


내 죄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분께 나아가겠습니까?

나는 이제 세상에 속하고 싶지 않으며, 나를 위해서 그처럼 많은 일을 행하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분께 나 자신을 드리게 됩니다.


그분을 우리의 구주뿐만 아니라 주로 믿지 않는 한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1장 6~7절 :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7-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 예수 그리스도께 속함

이제 우리는 여기서 바울 자신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를 대하게 됩니다.

그는 사도로 부르시는 은혜를 받아 이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깨우쳐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믿음의 순종”을 가지라고 촉구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① 바울은 로마 교회에게 그들도 본질적으로는 이방 사람들에게 속해 있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 다음에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인들로서 어떠한 사람들인지를 분명히 인식하도록 하였습니다.


②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이었으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에 의해서 그리스도께 주어진 자들(요17:6)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분께 갈 수가 없습니다.(요6:4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③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 그의 영역과 범주 안에 있게 되었으며, 그와 연합하여 하나가 되었습니다.


④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 시는 가공스러운 죄악과 무서운 방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무리들이 그리스도인들로서 이 이교도의 사회에서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 서도록 하였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이 세상에서 우리를 끌어낸 것이며, 마귀의 집에서 벗어나게 한 것입니다.


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듯이 우리도 그 사랑을 입은 자들 이라는 것입니다.(요17:22~23)


하나님께서는 전체 인류를 내려다보시며, 이 사람들에게 자기의 애정을 쏟아 붓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셔서 그들을 부르시는데, 어떤 이는 믿고 또 어떤 이는 믿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믿는 자들에 대하여 신학적인 용어로 “효력 있는 부르심”(유효한 소명)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사도 바울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똑 같은 방식의 효력 있는 부르심(유효한 소명)으로 부르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성령의 능력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⑦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일 수 있지만 그러나 그는 거룩한 사람이 아니며 성도가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성도가 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구별되는데 있으며, 세상으로부터만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구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자신을 드립니다.


2.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여기서 바울은 자기 편지를 받는 이 로마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부르심을 받아 성도들이 되었음을 상기시키고 난 뒤에 이제 개인적인 의미에서 그들에 관해서 자기가 어떤 느낌을 가지는지 알려주고 싶어 합니다.

사도는 지금 인격적이고 인간적인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고 있는데,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 접촉을 견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①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교리적이며, 믿음과 행위, 그리고 믿음과 실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②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이 모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은혜는 받을 만한 공력이 전혀 없는데도 주어지는 호의로서 이것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전체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에 의해서 인도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평강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이며, 하나님과 함께 평화를 갖게 됩니다.

죄의 결과로 얼마나 안절부절 못하며, 우리는 얼마나 쉼이 없습니까?

우리의 찡그린 얼굴, 찌푸린 이마, 염려로 가득찬 얼굴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근심하고 있으며 무엇인가 고통을 당하고 있고, 마음이 불안정하고 불행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를 체험하면 우리 속에 이 평강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안식을 찾기 까지 쉼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의 온전한 확신을 가지고 마음에 안정을 누려야 합니다.

환경 때문에 염려하고, 장래 때문에 걱정하고,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하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과 우발적인 사건과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불행한 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많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안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③ 회심한 그리스도인은 견고케 해주고 강하게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회심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며 갓난아기로 태어난 것과 같아서 양육되어지고 점점 더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④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와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나란히 동등하게 놓고 접속사 “그리고(와)”로서 연결시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품속에서 나오셨고, 다시 하나님의 품속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격위 우편에 계십니다.


⑤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는 말씀에서 그들이 어떤 비상하고 특별한 믿음을 가졌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의미에서 믿음을 가짐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잘 알려진 문명화된 세상인 로마 제국 안에 교회가 있어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며, 이 사람들이 로마에 있는 교회의 지체들이라는 사실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바울이 이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해야 합니까?

그것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소식을 듣는 것은 언제나 좋은 일이며 용기를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장 8~15절 :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9-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10-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1-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12-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노라.


1. 위대한 중보기도(8~11)

①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매우 가까이 계신 분이십니다.


②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새 언약 안에 있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사람이며, 또한 그것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입니다.


③ 우리는 하나님께만 기도를 드리며, 그분을 인격적으로 접촉하고 교제함으로서 바울의 고백처럼 “내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④ 바울은 자신의 소원이나 간구의 제목을 가지고 바로 하나님께 나가지 않고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는데, 감사의 기도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드립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하나님께 감사조차도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문제의 진상이 주님을 떠나서는 전혀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예수님의 피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없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⑤ 그리고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중보의 기도를 드렸는데, 그는 그처럼 바쁜 환경 가운데서도 기도할 시간을 얻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2. 기도로 인내함(10,11,13)

사도 바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는데, 그것은 기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자기의 주장을 할 때가 많고 자신의 요구만을 말하고 마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은데, 사도바울의 경우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기도를 드리고 그의 뜻대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들을 그분의 뜻에 맞추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① 그는 하나님의 전도 사업을 위하여 로마에 가는 길을 열어달라고 특별하게 기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조용히 순복하면서, 자신의 소원인 로마로 가는 일이 어떤 방법이든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② 위대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그처럼 친밀하고 하나님과 성령과 그처럼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그렇게도 간절하게 소원하는 것을 여러 해 동안 얻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큰 뜻 안에서 이와 같이 예외적이고 비상한 사람에게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③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고 싶어 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할 계획도 세워 놓았습니다. 그는 서바나에 가서 설교할 대단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곳에 이르게 될 때가 오면 그 길목에 있는 로마도 들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그러한 계획을 세워놓고 그렇게 원하였지만, 자기의 마음속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어 “좋은 길이 열려지는” 결정적인 확신이 들기까지 그 일을 행하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한 원칙으로 세워놓고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④ 사도 바울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좋은 여행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었고, 로마로 여행할 수 있는 좋은 길을 열어 주실 것을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들기 전에는 결코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면 그 어느 것도 잘 되었다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과 자기의 생각을 철저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킨 것입니다.


⑤ 바울은 여러 가지 장애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밝혀지는 것을 예민하게 느꼈으며, 그것들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많은 장애요소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을 인도하시기 위해서 그 장애요소들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도 보여줍니다.


⑥ 장애의 요소에는 성령께서 사람의 영을 억압하시고 직접 통제하시는 방식으로 올 수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모든 사람들이 좋다고 하거나, 아무리 옳다는 확신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억지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의 방해로 장애가 오는 경우도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잘 분별하고 장애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억지로 그 장애물을 치우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이런 걸림돌들이 제거 되었을 때에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⑦ 우리는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생각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없애야 하며, 전체를 보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순복해야 합니다.


3. 사역에 대한 바울의 자세(9)

① “내가 섬기는”이란 말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은 예배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 그 자체가 하나님께 예배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여기서 “심령으로 섬기는”이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섬김은 진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은 내 영으로, 즉 자신의 내밀한 부분에서 나오는 뜨거움과 골수로 사무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는 내면적인 섬김입니다.


③ “심령으로”라는 말은 육적이지 않고 영적인 섬김이라는 말로서 육적인 것은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로 이루어지며 자신의 지식이나 학식을 자랑하는 것인데, 그 반대가 되는 영적인 것은 최선을 다하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④ “심령으로” 섬긴다는 것은 삶과 마음의 가장 깊은 소원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며, 자기의 존재 전체와 자기의 전체 인격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4. 복음의 부요함(9,11)

① 사도 바울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알았으며, 그 능력에 힘입어 설교했으며, 사도는 이러한 신령한 은사들을 나누어 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해줄 수 있음을 믿었고, 또한 그렇게 하기를 원했습니다.[실례 : 행19:1~6]


② 그런데 고린도교회에서는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서로 자랑하고, 논쟁하는 등, 자신이 받은 은사가 최고라고 생각하여,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멸시하는 등 그들을 세워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 요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 사람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고 싶어 하는 것은 교리를 밝혀주고, 가르치고, 교훈하고, 세워줌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뿌리가 잘 박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했던 성령의 은사들은 자신이 소유한 많은 은사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하나님에 관한 진리로 사람들을 거룩하게 세워줄 수 있는 지식과 지혜의 말씀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를 참으로 굳세게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깊고 철저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5. 바울의 순전한 겸손(12)

12절 말씀을 다르게 번역하면 “이는 곧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각자 서로 용기를 얻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① 사도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용기를 주고 자신은 위안을 받게 될 것을 확신 하였듯이 우리도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이렇듯 서로 용기를 주고 위안을 받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② 그가 그들에게 정중하고 겸손한 문구를 사용하여 편지를 쓴 것은 자신이 겸손한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지식이 많다거나 자신의 세련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오해를 피하고자 했던 것이며, 무엇보다도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③ 그는 사도로서 부름을 받았고 위대한 능력을 받아 그 능력을 행사하는 성령을 힘입은 사람이었으며, 또한 자신의 입지가 특출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또 자신의 처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유익을 얻고자 했으며,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참된 교제를 나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신령한 은사들도 나누어 주고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들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그들과 같은 위치에서 그들을 바라 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④ 성도들은 모든 체험들과 사상들과 이해들을 서로 교환하며, 상호 주고받으며, 서로 도와주며, 모두 다 이 일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6. 복음을 전할 능력(14)

이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말씀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전체 삶과 힘을 들여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사람들과 접촉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 다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①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빚진 자”라는 말을 합니다.

자신은 이제 채무를 갚아야 할 의무를 마땅히 행해야 하는 자리에 처해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안식과 평안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그 영혼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빚진 자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것을 가진 자들로서 당연히 복음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것을 갚기 위하여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어야만 합니다.


② 이 지식은 단순히 한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적으로 이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의지하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기 때문에 죽음 앞에 서게 될 때에도 이 확신으로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축복을 나누어 줄 수 있고 또 건네 줄 수도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③ 사도 바울이 매우 강조하고 싶어 하는 사실은 자기는 이것을 모든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그는 온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합니다.

당시에 헬라 사람들은 인류세계 전체를 헬라인과 야만인으로 나누어, 헬라인이 아니면 야만인 둘 중 하나에 속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그래서 바울은 이 가치 있고 값으로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지식을 온 세계 열방의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④ 우리가 진정으로 불신자들이 믿지 않은 채로 죽는다면, 정말로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믿고 있다면,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강박관념을 느껴야 합니다.


⑤ 그리고 우리는 영광스러운 복음이 자기를 위해 해 놓은 일을 의식하고 그 영광스러운 복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과 평강과 행복을 체험함에 따라서 다른 모든 사람들도 같은 유익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빚진 자라”는 말씀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1장 16~17절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 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이제 로마서 1장 중 새로운 대목을 시작하게 됩니다.

처음 여섯 절반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일에 대한 보편적인 진술을 하였으며 그 다음부터 15절까지 에서는 자신과 로마에 있는 성도들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문제를 다 다루고 난 뒤 더 나아가서 로마서의 대 주제를 공표하게 되었으니 이 부분은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16절에서는 그 주제를 진술하였고 17절에서는 그 주제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1. 십자가의 거치는 것(16,17)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씀은 적극적인 역설을 부정의 형식인 곡언법 방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진실로 복음을 자랑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사도 바울은 매우 의도적으로 반부정적인 방식으로 그 점을 표현했는데, 그것은 로마 교회의 지체들인 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지만 무언가 복음을 부끄러워했는데, 디모데 같은 사람도 복음을 부끄러워함으로서 바울은 그에게(딤후1:8)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또한 그가 후에 오네시보로에 대해서 칭찬한 것은 “부끄러워 아니한 것”(딤후1:16)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바울 자신도 복음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시험을 때로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특별한 형태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그 특별한 시험을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보여주고자 했을 수도 있습니다.


② 세상이 복음을 미워하는 이유는 복음이 전달하는 메시지의 내용 때문입니다.

복음은 지독하게 가난한 가운데서 태어난 한 분을 선포하는데, 그의 출생과 자라난 환경 모두가 비천하며, 그 분은 스스로 굉장한 것을 외치고 나서는 정말 무능한 모습으로 잡히시더니, 더 나아가 너무나 연약한 가운데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래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를 조소하고 비웃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포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상 조롱받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게 하는 시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③ 복음은 유능한 사람이든 부족한 사람이든,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모두 동일한 수준으로 끌어내립니다.

사도 바울은 대단한 지성을 소유한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가진 지성은 모두 “분토”나 “배설물”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그것을 이해 할 수도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미워합니다.

사도는 세상의 조롱과 빈정거림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로 인해 복음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시험도 왔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④ 십자가에 거치는 것은 “나는 정죄 받고 상실되어 있으며 너무 무능하여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죽어 주시지 아니하셨다면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용서 또한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복음을 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전혀 소망이 없으며, 비열하고 쓸모가 없다고 말함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상처를 줍니다.

그로 인해서 복음 자체가 사람들 속에서 거부반응을 산출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미워하고 조롱합니다.


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는 이유는 분명히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참되고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과 그리고 그것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계시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한다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 의”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⑥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이유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는 방식이어야 하고, 또한 성령님을 높여 드리는 독특하고 구별되고 유별난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을 받아 거듭나 새로운 본성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하셨는지를 이해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2. 화해와 회복(16,17)

성경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행하는 일은 언제나 죄 가운데 떨어지고 계속해서 그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더 낮은 차원으로 떨어져 비참과 절망에 처하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내려 오셔서 죄와 수치에 사로잡힌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한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율법 아래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의 세상에서도 여전히 그 일을 하고 계시는데, 그래서 모든 복음 전도는 다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그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지기까지 그 일을 행하여 나가시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체계가 역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① 구원은 사람이 죄의 책임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부터 건짐을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철저하게 화해시킴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회복시킵니다.


③ 또 그 구원은 우리에게 소망 가운데 처음 주어진 그 영광으로 회복시켜 줍니다.


3.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16,17)

① 복음은 우리 속에서 구원을 산출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③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살인자와 자기 의를 가장 크게 자랑하는 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둘 다 하나님 앞에서 그저 잃어버린 자에 불과합니다.


④ 구원 받은 사람은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지어진 사람입니다.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신의 성품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도받아 결국은 영화에 이르고 하나님 면전에서 거룩을 누리게 되는 그 놀라운 길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음(17)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❶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며 ❷ 구원 문제를 해결해 주고 ❸ 하나님 자신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며 ❹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❺ 그리고 모두에게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이유는 복음 안에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 때문입니다.


① 복음은 “명백하게 보여 지는 것” 또는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의에 대한 하나님의 방식으로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므로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③ 이 복음은 언제나 동일한데,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의 방식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이유는 계시의 내용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①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의 의”인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②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드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완전하게 모든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켜 드렸습니다.


③ 우리의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입니다.


④ 그것은 하나의 속성으로서의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의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지막 여덟 번째 이유는 이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 방식을 보여준다는데 있습니다.


① 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오게 됩니다.


②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③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도구가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을 공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인데, 그 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미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의에 이르게 하는 도구이며, 의에 이르게 하는 통로인 샘입니다.

 

 

1장 18~20절 :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1. 복음의 증험될 필요성(18)

하박국 선지자는 그의 예언서 2장 4절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더 낫게 번역한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살리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복음에 대한 위대한 선포이며,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무한한 사랑과 긍휼과 자비로서 불의한 사람들을 구하여 의롭게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의 복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고 전가시키셨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들을 이제껏 살펴보았으니, 이제 그 어휘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이제 의인이 되는 방식으로 주어진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① 이 믿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행위의 반대는 믿음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행위로는 의에 이를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믿음과 행위를 서로 반대로 놓는 것처럼 보이는 진술들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을 도구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전체 안에 들어있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믿음에는 세 가지 본질적인 특징이 수반 되는데, 그것은 믿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요소로서 다른 말로 한다면 지성과 마음과 의지가 수반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 속에서 행동으로 인도되고, 움직임을 유발시키고, 변화와 고백을 유발시킴으로서 입술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2. 성경적 복음전도를 위한 주도적 개념(18)

바울이 복음을 자랑 하는 것은 복음이 정말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이며, 복음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것도 그 필요에 합당한 만족을 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사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이 하나님과 가진 관계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위치와,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들이 갖게 될 영원한 운명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② 복음은 어떤 사람들의 필요나, 사람들을 괴롭히는 문제들이나, 사람들이 이길 수 없는 죄나, 불행과 같은 문제들을 먼저 다루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말합니다.


③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있는 지위와 신분과 위치를 자각하고, 그런 다음에 개인적인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평안이나, 기쁨, 구원의 체험, 죄를 포기할 수 있는 체험, 그리고 다른 어떤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관계라는 제일 중요한 문제에서 떠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사도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성경의 전체 메시지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회심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제일 먼저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로부터 두려워 떨게 되고, 복음이 주어짐으로 인해 참 평안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④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으로 여기며, 하나님을 자기들의 입장에서 어떤 친절을 보이는 존재로만 인식하려고 합니다.


⑤ 신학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 또는 “현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정하며, 그 개념은 구약의 종족 신의 잔재나 유물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구약의 여호와는 무서운 존재이며 피에 굶주린 존재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사랑과 부성애에 넘치는 하나님으로 진노의 개념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⑥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교리를 믿고 있으며, 또한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피해가려고 하며, 증거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그 교리를 싫어 한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빼 놓으면 복음의 영광을 누릴 수가 없고, 구원의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⑦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성경의 증거는[롬1:18, 2:5, 3:5, 4:15, 5:9, 9:22, 12:19, 13:4, 고전11장, 고후 2, 5장, 엡2:3, 5:6, 골3:6, 살전1:7,8, 히2:1~3, 5:8~9, 6:4~9, 10:27, 12:25~29, 벧전4:17~18, 벧후3:8~9, 행2:40, 17:30,31, 마7장의 산상수훈, 마11장의 소돔과 고모라를 말씀하신 것, 눅12:4~5, 요3:16, 3:36,] 신약 성경의 전체에 너무나도 자주 나타나고 있는데, 계시록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고, 구약성경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또한 너무나도 많이 접할 수 있기 때문에 말 할 것도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진노와 십자가(18)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는 신약 성경에서나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라는 말을 때로 오해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람이 통제력을 잃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로 돌입하는 그런 인간 존재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데, 사실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①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는데, 죄는 하나님께 구역질나는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을 인정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과 반대되는 것들을 미워하시고 어둠과 죄와 사단의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은 다 미워하신다는 것도 인정해야합니다.


② 하나님의 진노가 뜻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죄를 보실 때 혐오하시며, 하나님의 공의와 의로서 죄를 다루시며 그 죄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가 그대로 묵과 되어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은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를 불가피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복음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사용하는 용어가 같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지만,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진노 역시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③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좇아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가 양심 속에서 참으로 명백하고 분명하게 나타나셨습니다.(롬2:15)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 속에 양심을 넣으심으로 인하여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④ 어떤 법을 어기면 그 법을 어긴 것 때문에 육신적인 차원에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⑤ 또한 자연법칙을 어기면 어떤 확실한 징벌을 당하게 되는데 만일 건강법칙을 잃게 되면 그 댓가로 건강에 해를 입듯이 말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발견되는 피조계와 자연계의 모든 상태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계시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가시와 엉겅퀴”는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일부입니다.

[예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얼마간 방치해 두면 여러 가지 잡풀과 원치 않는 것들이 자라나서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결국 그것은 짧은 시간 내에 황패해질 것인데, 그것은 타락 때문에 땅에 가해진 하나님의 저주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그 형벌로 우리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진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사망입니다.


⑥ 우리는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까지도 볼 수가 있습니다.

❶ 성경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는 먼저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형벌로 땀을 흘리며 애를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과 잉태하는 고통과 수고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의 경우가 그랬고 초대 왕인 사울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크게 사랑을 입은 사람이었던 다윗도 죄를 지었을 때 그 댓가를 톡톡히 치룰 수밖에 없었다는 것과, 많은 사람들이 그 원리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❷ 성경 밖의 역사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 또한 성경역사의 원리와 같습니다.

두로와 시돈과 다른 나라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데, 선지서들 중에서 열방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오늘날 에는 이미 다 드러난 상태이지만 2차 세계대전 중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로서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진노를 믿기 때문입니다.

당시 히틀러 같은 사람이 성공하여 일어서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셨지만 그것도 어느 지점까지만 허락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⑦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죄를 미워하시고 그냥 묵과하실 수 없어서 그 죄를 징벌하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죄에 대하여 의로운 요구를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그 죄를 심판하셔야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⑧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일어났던 일이 그처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 주님께서 고뇌하고 땀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고통을 당하시면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지 아셨기 때문인데, 그것은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으신 이유는 그가 그 때에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좇아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체험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⑨ 심판은 즉각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마지막 심판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신 의로 말미암아 얼마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가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지옥에 갈만한 죄인이고, 하나님의 사랑이나 긍휼이나 자비나 불쌍히 여김을 요구할 만한 것이 전혀 없지만, 내가 죄인 되고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내 죄를 위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그로인하여 나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고, 영생을 얻고, 영원토록 영원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불경건과 불의(18)

죄의 본질과 죄의 핑계 댈 수 없는 성질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나타납니다.

인류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불의한 것을 택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불의까지 저지르는데, 그 불의의 결과로 섬뜩한 결과들이 주어졌으며, 이제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하여 하신 일을 보게 됩니다.


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사람들(딤후3:5)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삶은 그것을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의와 경건치 않음, 또는 경건치 않음과 불의를 서로 갈라놓을 수 없고, 이 두 가지는 언제나 서로 함께 가게 되는데, 경건치 않음은 언제나 불의를 앞서 존재합니다.


② 정도와 형태에 관계없이 우리는 전존재로 하나님을 소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해야 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삶의 최고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의 최고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불의가 가능해지는 것은 오직 경건치 않은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른 위치를 지키고 있는 한 행실도 여전히 바르게 되며 모든 것이 잘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왜곡시켜 말하면서 죄짓게 하는 수작을 물리치지 못하게 되면, 그 올바른 행실은 깨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어떤 죄에 빠지고 맙니다.


④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자신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거룩에 대한 개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 그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⑤ 하나님이 없는 종교나, 거룩이 없는 의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를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설교의 말씀을 듣게 만듭니다.


⑥ 복음전도의 일차적인 목적도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바른 태도를 갖게 하는데 있습니다.


⑦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에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들을 향하여 의도하신 바로 그 관계로 사람들을 되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5. 일반계시와 특별계시(18~20)

이제 우리는 죄가 전혀 핑계 댈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① 인류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몰랐다고 핑계를 늘어놓을 수 없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알고도 고의로 그것을 막고 끌어내렸기 때문입니다.


② 그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았을 때가 있었고 여전히 알고 있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식을 그들에게 내면적인 것을 통해서 이미 알려 주셨는데, ❶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그들 안에 나타내심으로서 알려 주셨습니다.(19절) [예 : 세계 중에 가장 원시적인 부족들을 만난다 할지라도 최고의 존재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을 전혀 만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❷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람들의 양심을 통해서, 즉 옳고 그름에 대한 의식, 그리고 죄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과 우주를 도덕적으로 통치하는 분은 의롭고 정의롭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③ 또한 하나님께서 외면적인 것을 통해서 이 지식을 주셨는데, 창조를 통해서 자연 속에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양과 달, 별과 짐승들, 우주의 질서와 체계, 계절 등,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들로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④ 그리고 세계와 열방들의 전체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처음 열한 장을 통해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성경 밖의 세상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곳에서나 언제나 같은 것이 작용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섭리나 창조계 자체를 통해서 자신을 보여 주셨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역사를 통해서도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⑤ 이제까지 증거했던 모든 것들이 이방적인 나라들에게 해당되어 그들이 핑계 댈 수 없다면 특별한 계시를 받고,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말씀해 주시는 은혜를 받았던 유대인들이야말로 얼마나 더 핑계 댈 수 없겠습니까!


⑥ 이제 현대에 와서는 자연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에 더하여 특별계시인 구약 성경과 그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그것에 더해 신약 성경까지 주어진 현대인에게는 핑계를 댈 수 있는 조건은 더욱더 희박해 진 것입니다.

 

1장 21~24,32절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32-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1. 부흥의 필요성

우리는 이제 죄 안에 있는 사람은 핑계 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양심)에 심어놓으신 진리를 거부하고, 제어하고, 또 항거하고 마음으로부터 진리로 향하는 마음이 올라오는 것을 억눌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만하여, 불의, 즉 악과 죄를 기뻐하고,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께로부터 떠나있기 때문에, 영적 총명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막고 억눌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이 그러한 일을 정확히 어떤 양식으로 행하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창조계에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으며, 찬미하지도 않는 등, 삶 속에서나 심지어 생각에서 조차도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아야 할 영광의 마땅한 자리를 내주지 않습니다.


②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조 계 전체가 다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자연법칙을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얼마나 잘 나타내고 있는지 모두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가장 위대하게 지음을 받은 사람만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③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하고, 또 그분을 전능자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인류가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 자기들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생각해 보고, 하나님을 시험해 보고, 하나님을 점검해 보고, 하나님을 물리치기로 작정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인류의 자세입니다.(그런 상태에 있는 인류는 자기들의 가치보다 훨씬 못한 것들을 우상으로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만들어 냈다.)


④ 그리고 32절의 말씀에서 보면 그들은 의도적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아는 지식을 무시한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 존재 속에는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의식이 있고, 양심이 있습니다.

만일 어떤 일을 하면 징벌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에 대하여 앎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러한 것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고 즐거워하고 그들에 대해서 농을 하고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⑤ 그들은 이론에 있어서도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이 온전한 지식을 한쪽으로 밀어붙일 뿐 아니라 그러한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마음을 정해 버리고,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신을 따르며 숭배하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28절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 자체를 없애버리기는 원치 않지만, 그들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그로 인해서 그들은 조물주 되시는 하나님보다 피조물들을 더 섬깁니다.


⑥ 사도는 25절의 그 숭엄한 말씀 중간에 갑자기 “아멘”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시점에서 사도가 그렇게 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이 모든 형상들과 우상들과 거짓말 사이의 차이에 너무나도 압도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사실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할 때 멈추어 서서 경배와 찬미와 송축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여호와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 이름이 너무나도 거룩하다고 느꼈기 때문인데, 어쨌든 우리는 이러한 외경스러운 의식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러한 외경스러운 의식을 되찾으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초월적인 하나님, 위엄에 충만하시고 무한하시고, 영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우리는 겸비해져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을 말할 때 외경심과 거룩한 두려움으로 말해야 합니다.


⑦ 인류가 이러한 진리를 짓눌러버림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미련하게 되었습니다.(22절)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할 말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순투성이며 기괴하기까지 한 진화론은 믿으면서도 하나님은 믿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점성술은 믿으면서도 사람의 운명을 정하고 모든 만상을 주관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우준하게 된 자들입니다.


⑧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몸을 수치스럽게 합니다.(24~26절)

그들은 더러운 정욕과 가공스러운 부패를 저질러 놓고도 뻔뻔스러우며, 그러한 일에 아주 신기한 것이 있다고 말하려고 애씁니다.

그런 일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조차 말하려고 하며 이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이러한 패역한 짓을 변호들을 하는데 “합당치 못한 일들”(28절) 즉 본성에 위배되는 사람의 육신적인 존재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⑨ 우리는 주위에 상실된 상태에 있는 수백만의 영혼들의 모습을 보고 큰 부담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어떠한 일도 할 수가 없고 그들에게 말해 주고 따져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하실 수 있고, 하시고, 하실 것입니다.

간구합시다.

하나님께서 부흥하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기를 간절히 구하고 복음을 전할 특권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모든 개개 그리스도인마다 이러한 일에 눈을 떠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 곧 가장 미련한 자라도 깨끗케 할 수 있는 그 의와 그리스도의 피, 그들이 옷 입을 수 있는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에 대해서 나가서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십사하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2장 1~3절 :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1 장

①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로 이미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므로 그들의 삶이 어떠하든지 이방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철저하게 정죄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②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구원받은 절대적인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할례 받은 사실을 또 다른 구원의 증거로 제시합니다.


③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 필요한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자기들을 그들과 똑같은 죄인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④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으며, 성경을 읽고 연구하며 성경을 자랑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며 있는 힘을 다하여 이방인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고 했고, 또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입견에 눈이 멀어 있어서,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것만을 보았으며, 어떤 설교나 강론을 들을 때에도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내어 버렸던 것입니다.


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는 하지만, 자기들의 이론과 자기들의 생각과 자기들의 선입관을 확증하기 위해서만 그렇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나는 유대인이고 저 사람은 이방인이다.”라고 했던 그들처럼 우리도 “나는 감리교에 속했다.” “나는 침례교에 속했다.” “나는 장로교다.”라는 꼬리표를 달기를 얼마나 좋아합니까?

교회 안에서는 또 어떻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쉽게 “우리는 몇 교구 사람에 속 한다”라고 말들을 합니까?


⑥ 우리는 여기서 죄의 교활성이 우리가 듣는 진리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하게 하는 방식을 대하게 됩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너무나 많은 죄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보는데, 그 반응은 그러한 것들을 참아내지 못하고 그들을 마땅히 어떤 처벌, 심지어는 없애 버려야 한다고 느끼며,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이 행했던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정죄해 버림으로 자신들의 울타리를 치고 자신들을 변호합니다.


⑦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고, 그들의 저주거리였음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우리도 역시 똑 같은 방식으로 그들과 같은 행위들을 하고 있습니다.

바뀐 것이 있다면 그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입장으로 내세우는 것이고, 우리는 복음을 자신의 입장에 맞추어 내세운다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그 정신(마음)을 빼내어 버린 형식과 의식, 그리고 예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안입니다.


⑧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시고 계시는데, 우리는 언제나 보이는 것들에만 신경을 씁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에만 치장을 하고 진정으로 그 안에 들어있는 정신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2 장

유대인에게 있어서 문제 거리가 되는 것은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좇아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를 몰랐기 때문에 자기들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필요성 또한 알지 못한데 있었습니다.

죄란 얼마나 교활한 것인지 이렇듯 유대인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자신들이 이 끔찍한 입장에 몰렸던 것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포착하지 못하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① 구약 성경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자주 가장 어리석고 가장 끔찍한 죄악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흔히 그들의 도덕적 조건이 참으로 통탄할 정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이 그 점에 대하여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으며, 우리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조차도 그 상황은 똑같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24절에서 그 점을 매우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다른 어느 누구와도 다르다고 주장하면서도 자기들이 영위하는 삶의 방식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다른 민족들을 저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을 쳐다보면서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복락과 축복을 받는 특별한 대상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런 삶을 살아가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싶지 않다.”라고 말을 합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의 의도가 그것입니다.


②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과 어떤 특별한 죄행을 저질렀다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 점을 인식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가 경건치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꽤 존경받을 만한 사람일 수 있으면서도 경건치 않을 수 있습니다. 경건치 않다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경배하지 못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최상의 존재로 여기지 못하게 하는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 속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경건치 않음은 도덕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더욱 비참한 것은 자기들이 죄인들임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며 그로 인해, 어째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했는지를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④ 유대인들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의 잘못을 어떻게 저지르고 있었는지를 사도 바울은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 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 하나님의 미워하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부모를 거역하는 자, 우매한 자, 배역하는 자, 무정한 자, 부자비한 자” 등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정기적으로 성전에 나가지만 그들은 경건치 않음의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불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죄의 형태가 아니라 죄의 본질로서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는 한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식이었으나 우리 주님은 미워하는 것조차도 살인이라고 하셨으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조차 이미 간음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말을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율법이 “탐내지 말라”고 하는 것을 결코 지킬 수 없습니다.

탐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탐심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의 마음에 품고 있는 악한 생각까지도 죄라는 것을 잘 나타내 줍니다.


문제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그 중심에 있는 정신입니다. 물론 그 마음속에 일어나는 죄를 행동화하면 더 악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그러한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정죄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도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니 그는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은 다윗의 경우에서 너무나도 잘 알 수 있는데, 나단 선지자가 자식과 같은 어린 양을 죽인 사실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그 일에 대하여 명백하게 알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의 아내를 취하는 문제였을 때는 자기가 그 일을 했기 때문에 그 일의 잘못됨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에 우리가 비판 받을 것을 염려해야 합니다.

똑 같은 척도로 우리 자신들이 측정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⑥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판단은 언제나 진리대로 되며, 그리고 언제나 동일하고 공정한 하나님의 판단은 영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얼버무릴 수 없습니다.


⑦ 하나님의 판단에 있어서 편애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위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장

사도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과, 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진 오직 유일한 구원의 소망은 유대인들에게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의에 있음을 명심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죄악과 그 죄악에서 자신을 스스로 건질 수 없는 철저한 무능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판단함으로서 스스로 자신들을 정죄하고 있다고 그들에게 입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공의가 있으므로 그 의가 죄의 판단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공의로서 판단하셔야 합니다.


②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심판)은 반드시 진리를 따라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온 인류는 하나님의 판단과 진노를 하나님께서 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제공되어진 그 길을 떠나서는 결코 피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 죄를 심판하지 않고서는 어느 사람이라도 용서하실 수 없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의 죽으심을 통해서 그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지상에 오신 것이 필요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죄의 용서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조금이라도 손상시킨다면 그것은 성경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죄의 눈멀게 하는 무서운 효능을 매우 명백하게 보고 있습니다.

죄는 전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그 인격을 파멸시키는데, 지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다른 모든 요소들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고, 그 말씀이 읽혀지며, 설교되어 지고 있고 그 말씀을 자랑하고 있으나, 죄가 그 눈을 멀게 함으로서 성경을 철저하게 잘못 읽었고 잘못 이해했습니다.


④ 죄는 자기들의 역사에 대하여도 눈멀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 때문에 갈대아 사람들을 들어서 징벌하셨고 그들에 의해서 파멸되어졌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던 것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될 것인데, 그런데도 그들의 역사를 읽고도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⑤ 그리고 죄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하여 시대의 표적을 보지 못하게 함으로 자기들이 고대하던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⑥ 그리고 죄는 거짓된 안전감을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용납하심을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재앙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축복하시고 계신 것으로 착각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죄 짓는 즉시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치 않고, 우리가 죄를 범하고 나서 심판하지 않으니 하나님은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⑦ 우리는 죄의 삶을 계속 고집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에 대해서 말 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있는 힘을 다해서 우리 스스로 안에 있는 어느 형태의 죄든지 핑계대려고 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기대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 빠지는 때에는 우리의 회개가 언제나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회개는 철저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 재빨리 우리 자신을 조금씩 치료하려고 하고 그 고통을 제거하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속한 것으로 얼른 뛰어 가는데,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남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2장 4~5절 :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5-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


4 장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 된다는 세 번째 논증을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 때문에 하나님은 사실상 심판하실 수 없다는 식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① 그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언지를 알았더라면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살펴보기 위해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선하심에 너무도 놀랍고 감사해서 하나님을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② 그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오해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일종의 더딘 것으로 생각하거나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나머지 하나님의 선하심은 죄를 본다 할지라도 정말 그렇게 절망적으로 생각할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나 공의와 같은 것이 있지만 그 점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진행해 가는 것입니다.


③ 그들은 하나님께서 의와 공의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만 그렇게 하시고, 시행하시지는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속성 때문에 심판하지 못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만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없습니다.


④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하나의 방종과 하나의 자유와 자기들의 죄에 대한 하나의 구실이나 핑계로 사용하였습니다.


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목적과 의도와 목표를 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어떠한 유의 통제하는 영향력을 행사하심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회개케 인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해 버립니다.


⑥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끝내 회개하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에게 은혜와 자비하심을 베풀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내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통해서 입증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일하시는 방식에 대하여 우리는 온전히 이해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⑦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언제나 함께 나타나는데, 그것은 마치 동전과 같아서 한쪽 면에는 공의가 또 다른 면에는 사랑이 존재하여 같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주어지는 은혜의 뒷면에는 반드시 공의의 심판이 같이 존재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죄를 지었을 때에는 반드시 그에 대한 보응이 반드시 주어집니다.


5 장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회개케 인도 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회개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합니다.


①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다시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다른 결심을 하고 다른 결론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②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것과 동등하게 행동을 수반합니다.

그것은 생각을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행동의 진로를 바꾸는 것을 포함하여 그 사람의 삶의 전체적인 방향과 습관의 변화를 함축합니다.


③ 그리고 회개는 자신에 대한 관점을 바꾸게 되고, 나아가서 인생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이 바뀝니다.

단순히 어떠한 죄에서 돌이켜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경 계시의 차원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알기 시작하는 순간 “나는 정말 비열하기 짝이 없으며 죄로 가득한 자구나! 나는 정말 불의하구나! 내 속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아 선한 것이 전혀 없구나!”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육체의 욕심에 따라서 짐승처럼 살던 자신의 모든 삶을 다 보내 버립니다.

아니 그는 이제 사람이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목적을 가진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동과 행실은 회개의 마지막 결과라는 것입니다.

 

2장 6~10절 :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 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 에게라.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본문은 구원의 이치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이치를 설명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심판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발견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임할 심판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 두려운 심판에서 면제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놀라워하고,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또한 구원의 영광을 누리며, 감사하는 생활함에 있어서 우리가 유대인들과 같은 생각이나, 그들과 같은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본문에서 발견해야 할 과제입니다.


6 장

①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사람에게 개인적이고 개별적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든지, 어느 가정에서 태어났든지, 어떠한 환경 가운데서 태어났든지, 그러한 것들과 무관하게 각 개인들의 처한 상태에 의해서 심판이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태어난 장소와 환경이 그 사람에게 큰 영향력을 줄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러한 조건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상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②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그 심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어떠한 차별도 없이 보편적으로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서 내려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이 심판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오히려 그들이 가진 많은 유익들 때문에 특별히 더 엄격한 심판이 가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❶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이며, 또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 가를 숙고해 나갑니다.

  ❷ 그들의 삶의 일반적인 추세와 방향의 차원에서 그들을 탐사합니다.

  ❸ 그들의 실제적인 행동과 행위의 차원에서 그들을 시험합니다.

이제 우리는 유대인들의 그러한 모습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우리의 신앙에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③ 의인의 태도와 악인의 태도

  ❶ 의인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하여 어떤 이해를 갖고 있으며, 그 삶 속에서 최고의 일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닮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면전에서 보내는 것을 구합니다.

  ❷ 의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시키시고 존귀하게 하십니다.

  ❸ 의인은 하나님께서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썩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며 완전하고 순전한 상태와 죄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토록 끝없이 완전할 수 있는 상태를 고대합니다.

  ❹ 의인은 언제나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알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큰일이 없습니다.

  ❺ 악인의 보편적인 태도는 8절에서 그것을 한마디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그들은 당파적인 사람들로서 하나님께 악의적인 반대를 하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을 기쁘게 하고 자신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에 따라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❻ 불의를 좇는 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배역하고 하나님과 다투며, 그들은 당을 지어 하나님의 견해를 반대하는 자기의 견해를 세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알기는 하지만 복종하고 싶어 하지 않고 성경과 다툽니다.

그들은 다투는 정신을 가지고 있어 무지 가운데서 하나님의 견해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며 자기들의 견해를 세웁니다.

  ❼ 그리고 그들은 자기중심적이며, 하나님께 따지고 들며, 자기가 원하는 다른 유의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에 대하여 진노의 자세를 보이며, 그 진노는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❶ 환난과 곤고로 나타납니다.

  ❷ 영원한 멸망으로 나타납니다.


7 장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에 대하여 명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고자 하는 명백한 진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그 행위에 따라 보응하실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전체적인 문맥을 생각하지 않고 부분적인 구절에 집중하다보면 진정으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생각하지 못하고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주제로 삼아 마치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① 이 대목에서 사도는 계속적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강해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누구도 하나님의 의에 도달 할 수 없는 죄의 결과에 대해서 강론을 펼쳐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② 사도 바울이 진정으로 유대인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란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느 누구도 행위로서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이제 믿음으로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논증이라는 사실입니다.


③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구원을 추구하지 않을 것인데, 자기의 공로나 자기가 속해 있는 민족성이나, 자기의 가문이나, 자기의 태생이나, 자기의 소속 관계나, 자기의 직업이나, 다른 어떤 것이라도 그런 것을 빌미로 삼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은 그런 것을 의지하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런 모든 핑계와 구실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제까지 유대인들을 상대로 하여 말 하고자 하는 것은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요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다루고 있는 바울 서신의 주제입니다.

 

 

2장 11~17절 :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12-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17-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8 장

사도 바울은 이제 하나님의 진노의 전체문제에 관하여 발전시켜 또 다른 논증을 끌어냅니다.

사도가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의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는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제기할 수 있는 반론의 여지가 있는 모든 주장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하나님께서 관심을 기울여 얼굴을 보시지 않는 것, 즉 사람들이 하나님의 면전에 설 때 수치감으로 머리와 얼굴을 떨어뜨리고 설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편벽된 사랑을 보여 주시지도 아니하시고, 어떤 사람의 얼굴을 다른 사람의 얼굴보다 더 들어 주시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② 사람들은 사람의 외모로 판단하거나, 지연, 학연, 혈연과 같은 어떤 주어진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더욱이 자신들에 대해서는 더욱 관대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 관하여 보호하려는 성향을 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외모로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진리대로 하십니다.

③ 율법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이라고 말하며, 율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다.”고 말한 것은 세상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나누어지는데, 유대인에게는 율법이 주어졌고 이방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기 때문에 이방인은 기록된 율법의 은택을 가지지 않은 자로서 판단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혀 듣지 아니하고 복음을 들을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던 사람들은 복음을 들은 자와 같이 판단 받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구원 받는 다른 방식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의 공평성이 여기서도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유대인들에게 주었다고 해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특혜를 받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판대에서 주어질 오직 한 가지 질문은 “죄에 대해서 어떠하냐?” “너희 삶이 어떠하냐?” “네가 무엇을 행하였느냐?”라는 말일 것입니다.

⑤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는데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망한다.”는 말과 “심판”을 받게 된다는 두 가지 표현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적용하시는 표준이 이방인들에게 적용하시는 표준보다 더 높고 엄격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보다 유대인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들을 때마다 그 책임 또한 증가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⑥ 이제 16절의 “심판 날”의 문제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장으로서 두 부류의 최종적인 운명을 결정지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부활”이 될 것이냐 아니면 “심판의 부활”이 될 것이냐는 최종적 운명을 결정짓게 될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⑦ 마지막 요점은 어떤 사람도 심판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절대로 말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는 심판장이 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대 제사장으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대 제사장 되시는 분이 우리와 똑 같은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 내셨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모든 입을 막고 모든 것 중에 대표가 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는 심판장이 되십니다.

9 장

① 13절은 유대인들을 다루는데, 자기들이 율법을 가졌다는 바로 그 사실 자체가 자기들은 특별한 범주에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 즉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는 자라야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② 14~15절은 이방인들을 다루는데, 그들이 율법이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도덕적인 의식의 차원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하나의 법이 있다는 것이며, 모세의 율법아래 있지는 않지만 하나의 도덕적 의식, 즉 마음에 기록된 율법을 통해서 심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째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도덕적인 표준과 개념을 유지하려고 애씁니다.

③ 사도는 이제 두 번째 논증에서 그들의 양심을 통해서 스스로 입증한다고 합니다.

양심은 인간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기능으로, 어떤 일들은 그릇되고, 어떤 일들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속에 있는 모니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삶을 사는 동안 대단히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친히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자기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할 때는 “선한 양심”으로 그러한 일을 했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 순간까지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말하지만 그 옳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심을 완벽한 도구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그 양심에 복종해야 합니다.

연약한 형제의 양심은 언제나 존중돼야 하는 것은 그가 자기 양심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따라 정죄 당하는 것은 양심의 가책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임을 다 알고 있다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마다 그 속에 심판을 발하는 내면적인 소리와 모니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④ 복음은 전혀 듣지 않았던 이방인들도 자기들이 가진 빛에 따라 생활하였으므로 자신들을 구원할 수 있고 구원하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빛을 따라서 살았고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시기 때문에 자기들에게 비추어진 빛에 따라 살았다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방식이나 이방인들이 의롭다 함을 얻는 방식이 아니라 정죄와 심판과 진노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육체가 없음을 입증하려는 것이며,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모두가 다 정죄 아래 있음을 입증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율법이나 자연인들에 주어진 도덕적인 개념이나 양심의 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발각 시키고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께서만이 구세주라고 가르치고 있고 그를 떠나서는 어떠한 구원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10 장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공정하며 언제나 표준을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옳고 그릇됨에 대한 지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판단이 언제나 의롭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일을 하고 있으며, 또한 롬2:2에서 지적하듯이 그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 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유대인은 율법을 따라서 정죄를 받고 이방인은 도덕적 의식을 통해서 정죄를 받으니 그 둘 다 정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② 율법을 아는 것 자체로, 또는 도덕적 의식을 갖는다는 것도 어느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직 정죄만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을 아는 지식을 어느 형태로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은 우리를 돕기는커녕 거꾸로 우리를 정죄하는 원천이 됩니다. [예 : 눅1:6의 사가랴와 엘리사벳에 대한 진술, 눅2:25의 시므온 =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친히 보여주신 교훈을 믿었고, 긍국적으로는 메시야가 오실 날을 갈망하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③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혀 듣지 못했던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것이 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도, 보지도, 알지도 못했는데, 그들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질문, 그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하나님을 힐문하느뇨?”(롬 9:20)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답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한 가지 대답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다만 ‘도덕적 의식을 통해서 모두 다 정죄를 받았고 또한 어느 누구도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동등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장 17~29 :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 모독을 받는 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 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 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 니라.


11 장

  사도는 지금 율법의 지식만을 의지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전혀 쓸모가 없음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율법의 지식이 자기들에게 주어졌다는 단순한 사실만을 의뢰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유대인들로 하여금 유대인들 스스로가 자랑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였고 그 일련의 긴 질문들을 그들에게 던져 봄으로서 그 문제의 근본과 핵심을 알게 하였는데, 그 시대의 유대인들의 무서운 외식을 폭로하면서, 보편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외식에 대하여 경고하시고 있는데, 그 외식은 우리를 괴롭힐 수 있는 가장 교활하고 끔찍한 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외식 자는 진리에 대해 보편적이고, 이론적이며, 이지적인 관심만을 보이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형태나 형식에만 신경을 쓰고, 진리 자체의 지성적인 국면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흥미롭고 매력적인 것, 그리고 이론적이고 순전히 객관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② 외식 자는 자신의 부족을 의식하지 못하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겸비함이 전혀 없고 언제나 자기 만족감에 빠져서 자신에 대하여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에 대해 종교적이고, 경건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외식 자는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차고, 자기 신뢰감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서 스스로 자신은 어느 부분에서는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③ 외식 자는 일종의 확신과 뽐내는 모습을 드러내 노출 시킵니다.

자신이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자신이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합니다.

가령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니 매우 행복하다는 인상을 끼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랑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나타내지만 실상의 삶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것을 쇼맨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은 결코 쇼맨이 아니라 삶 속에 베어 있는 것들이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드러나 보이고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비추어 지는 그런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본문에서 사도 바울로부터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❶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지만 자신에 대하여는 전혀 설교하지 않는다고 하며, 자신에게 먼저 설교하고 가르치고 책망합니다.

  ❷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고 한 그 일을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있다고 책망합니다.

  ❸ 율법과 율법에 대한 지식을 그처럼 자랑하면서도 그 율법을 어김으로서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 지식을 많이 알아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뽐내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진리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야 하며, 그 진리를 통해서 겸비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 그런 일들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인격적인 삶 속에는 적용시키려는 수고를 전혀 하지 않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배하고 있고, 섬기고 싶다고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④ 이러한 결과 때문에 외식에 대해서 사도가 우리에게 말하는 24절의 메시지는 자신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내세우고 있지만 그들의 잘못된 모습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분명히 적용해야 할 요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 중 어느 누구든지 유대인들이 행한 것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서 욕되게 하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⑤ 이제 24절에서 생각해야 할 것은 자연인들은 우리 속에서 보는 바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24절에서 이사야 52장 5절을 인용하면서 말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받는 자들이었는데 갑자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들은 갈대아 군대에 패배 당했고 아주 힘없이 되어 그들의 도성은 함락당하고 무너졌으며 그들은 자기 나라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이방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그대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다른 신들은 전혀 신이 아니라고 늘 말해왔던.......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다른 신들이 이스라엘 하나님보다 더 능력이 있어 보인다. 만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이 주장하던 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면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그들을 이기도록 내버려 두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에스겔 선지서 36:20~33에서도 똑 같은 원리에 대한 매우 상세한 진술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36절에서 하신 말씀을 이방인들이 이해하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⑥ 25절에서 바울은 할례가 가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할례 자체에는 고유한 가치나 어떤 본질적인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 속해 있는 조건에서만 할례는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거룩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도 거룩하기 때문에 할례는 거룩한 자라야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표증의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거룩하지 못하다면 그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26절과 27절에서 계속 말해 갑니다.

할례는 어떤 내면적인 것에 대한 외면적인 표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어떤 내면적 은혜의 외면적 표이며, 하나의 내면적 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 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은 외면적인 것들을 자랑하고 그것들을 대단히 칭찬하며, 그런 사람들을 대단히 존경하며 높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눅16:15) 말씀하십니다.


⑦ 이 모든 것들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킵시다.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고, 어떠한 위치에 있으며,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 그러한 조건들을 의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새로운 성품을 받았느냐?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느냐?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일 수도 있고, 성경에 능통할 수도 있고 모든 것을 유대인들이 했던 것보다 더 잘한다고 할지라도 정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의 상태로서 우리가 새로운 성품, 새로운 마음,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3장 1~2절 :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12 장

바울은 2장에서 사람이 할례를 통해서 구원받지 못한다거나 유대인이라는 사실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하였지만, 할례를 받은 사실과 율법을 받은 사실은 모든 방면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많은 유익이 있다고 합니다.

구원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이 전혀 차이가 없고, 또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온 세상이 다 하나님 앞에 죄가 있음은 마찬가지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서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①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맡기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를 받은 민족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는 것보다 인간에게 있어서 더 큰 특권이 있을 수가 없으며, 그것은 바로 생명을 주는 것이고,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기근을 당하는 것보다도, 어떤 환난을 당하는 것보다도 무서운 일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고 사람을 그냥 혼자 내버려 두셔서 그 행사와 소위대로 방치해 두시는 일입니다.

② 구약 성경을 가짐으로 그것을 연구하고 적용하고 그것을 위하여 시간을 보내면서 기도함으로 주어지는 특권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③ 부모가 그리스도인인 자녀가 가진 유익은 이 가르침, 이 하나님의 말씀, 이 지식, 이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오래전에 회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모든 것의 소리를 접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에 친숙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장 3~8절 :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됨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13 장

우리는 본문에서 견고하게 붙잡아야 하는 원리들 중 하나 로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약속은 인간의 신실성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구원은 전혀 있을 수가 없을 것인데, 이것이 바로 구약성경의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①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을 선택하셨고, 모든 약속을 그들에게 주셨으며, 은혜로 그들을 대접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이 부단하게 거듭 실패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 만일 그들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그 족속은 벌써 소멸되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그 어느 약속도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효력이 없을 것이지만, 그 백성들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의도를 가지시고 그 놀라운 언약을 이루어가십니다.

② 이것은 교회에도 적용이 되며, 인간의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아직도 존재하는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의 의도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안심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③ 구약으로 돌아가서 구약 전체를 읽어보면, 유대인의 실패가 하나님의 목적을 무산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실패는 사실상 하나님의 방식의 정당성과 옳음과 진실성을 더 뛰어나게 하고 돋보이게 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④ 유대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우리가 죄를 지을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긍휼이 더 빛나 보일 것이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좋은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중상모략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여기서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그에 대하여 사도는 너희가 바로 그러한 요점에 너희 자신을 묶어 매고 있다고 말하며 그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며, 그들은 정죄를 받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런 핑계를 댈 구실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도덕적인 원리를 파괴하고 있으므로 정죄를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의로우시며,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어떤 경우에도 저해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공의는 절대적인 것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짧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들을 우리의 상상이나 이성적인 판단에 맡겨 버리면 그릇되어지고, 결국 망하는 길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진 일들에 대하여 공손하고 겸손한 자세로 그것에 대하여 순복할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질문이든지, 어떠한 의문이든지, 모든 것에서 우리의 관점을 견지하더라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겸비하게 한다면 잘못되어 나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3장 9~20절 :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 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14 장

우리는 이제 유대인의 이점과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것의 특권이 무엇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는 큰 이권이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진노나 구원의 전체 문제에 대해서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도는 이제 자기가 다루는 주제로 돌아와서, 성경에서 그것을 입증하는 최종적인 자료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① 사도는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다 “죄 아래” 있다고 합니다. 죄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 아래 있다는 말과 동등하게 사용 되는데, 성경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각자 죄 아래 있든지 은혜 아래 있든지 두 입장 중 하나에 속해 있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 두 큰 범주 속에서 예외를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어떠한 상태나 위치, 조건들에 말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죄 아래 있느냐, 은혜 아래 있느냐 둘 중 하나라고 합니다.

신약의 교훈은 어떤 나라에 속한 것의 차원에서 놓여지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느냐, 이 세상 나라에 속했느냐 둘 중 하나입니다.

② 모든 인류는 본성적으로 죄책 아래 있으며, 죄의 권세와 죄의 오염 아래 있으며, 사람이 아무리 정결하고 선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영역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영역과 지배 아래 있으면서도 선한 사람이 있으니 이 문제는 우리가 어느 영역에 속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 선한 사람이든 세상이 알고 있는 가장 훌륭하고 착한 사람이든 가장 비열한 사람이든 모두 다 죄 아래 있습니다.

③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전혀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은혜와 복음에 대한 가장 높은 개념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가장 큰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언제나 죄를 가장 크게 의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눅7장)

④ 10~12절의 말씀은 시편 14편, 53편에서 인용한 말씀으로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보편적인 묘사이며 진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결과로 야기된 상태를 살펴보고 그 인간 조건에 대한 보편적인 묘사를 여기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도가 첫 번째로 말하는 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인이라고 하는 말은 사상과 생활에 있어서 정직하다는 것이며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나 이웃에 대하여 흠이나 책망 받을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의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대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복음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든지 어떤 일을 했든지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같은 죄인이요 다 같은 구주를 필요로 합니다.

⑤ 13절은 시편 5:9에서 인용한 말씀이고, 14절은 시편10:7에서 인용한 말씀이며, 15~17절은 이사야 59:7~8에서 취해온 말씀인데 이 대목은 행동으로 나타난 죄의 특별한 양상을 보여 줍니다.

⑥ 죄는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어리석어졌으며, 참 지혜를 소유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깨닫는 자도 없다”고 말할 때 영적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며, 하나님께 속한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세상적이고 세속적이고 육적인 이해는 가지고 있으며,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예술이나 학문이나 어떤 다른 유의 지식이나 문화에 있어서 매우 능숙할 수 있지만, 영적인 통찰력과 깨달음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합니다.

죄 아래 있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여 자기가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성경의 진술을 좋아하지 않고 심지어 자신을 한 짐승으로 여기도 하며 자랑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자기가 동물에서 진화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⑦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의롭게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원래의 의로움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요구에 합당한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전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들의 죄를 담당케 하시는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⑧ 그리고 18절에는 그 모든 것을 압축하여 요점을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 경건한 두려움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고뇌를 가진 두려움이 아니며, 경외심에서 나오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엄위 때문에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⑨ 이 두려움의 또 다른 요소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싶은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심으로 찬미하고 싶어 하는 소원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과 교통하고자 하는 소원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소원하고 하나님의 면전에 있고 싶어 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의 요소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장이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확신에 넘치고 담대함을 가지고 뛰어나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관한 이 엄청난 진리를 훼손시켜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이 전혀 없고 거만하며, 뻔뻔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약 하나님에 관한 어떤 것을 알기만 했더라면 즉각 침묵을 지킬 것인데, 그리고 자기가 결국 죽게 되면 마지막 최종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일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19절에 와서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똑 같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지만 유대인 자신은 진노 아래 있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왜냐하면 선택된 족속 중에 속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나는 너희에게 여러 인용의 말씀을 열거했고 그 말씀들은 너희가 가진 율법에서 나온 것이다. 너희가 가진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너희가 정죄 아래 있다는 것을 바로 그 말씀들이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처럼 자랑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자랑할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음을 입증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모든 입을 막으려 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엇 한 가지도 내 세울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는 모두 하나님의 면전에서 죄책을 가진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떠한 조건에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바른 방식은 언제나 세리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1. 위대한 전환점 “이제는”(21~31)

본문은 이 서신서 중의 새로운 부분이면서 3장에 있어서도 새로운 대목의 시작입니다.

① 1:16~17에서는 바울이 복음을 너무나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또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기뻐하였다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② 1:18로부터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엄청난 진술이 시작됩니다.

③ 1장의 나머지 부분과 2장 그리고 3장의 첫 부분을 계속하여 써 내려가면서 이 부분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④ 3:20에서 어느 누구도 결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게 되었거나 앞으로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못 박아 두었습니다.
⑤ 우리는 3:18을 다 읽고 나서 완전히 절망적인 처지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데, 어느 누구도 자기가 전혀 소망이 없음을 깨닫지 못하거나, 절망과 무력함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갈 오직 유일한 이유가 되는 것은 어떤 육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율법에 의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⑥ 그렇다면 우리에게 전혀 소망이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인가? 라고 자문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사도는 지금 바로 그 대답을 하려고 “이제는”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킹 제임스 성경에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번역이 원문의 뜻을 훨씬 더 드러나 보이게 합니다. 이제까지의 나의 조건은 ⑤번과 같은 조건에서 소망이 없었는데, “그러나 이제는”이란 말로 그 상황은 완전히 전환되어 감탄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⑦ 우리의 영혼은 눈멀었고 벙어리였으며,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변했는데 그것은 복음이 왔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저주와 양심의 가책, 그 외에 우리를 저주하고 짓누르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대처하는 신앙의 답변은 언제나 “그러나 이제는” 이라는 아주 경이로운 말입니다.

⑧ 그러면 우리는 그가 로마 교인들에게 펼쳐 보이려고 하는 이 경이로운 기쁜 소식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❶ 구원받는 길

     ꊧ 하나님께서 전에 준비하시고 약속하셨던 의를 나타내 확증시킨 것

     ꊨ 우리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는 것

     ꊩ 이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열려 있다는 것

     ꊪ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이라는 것

  ❷ 위대한 구속의 특징

     ꊧ 구속의 길이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한다는 것

     ꊨ 이 길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길이라는 것

     ꊩ 모든 세상과 모든 족속의 하나님이 되심을 보여 주는 길이라는 것

     ꊪ 그 길이 율법을 영예롭게 하고 굳게 세우는 방법이라는 것


2. 사죄 보다 더한 것(21~3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본문 말씀이 이렇듯 감격스러운 것은 이전에는 실마리만 보이고 어떤 모형으로 표현 되었으며, 그림자만을 비추어 주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열려 졌고 완벽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심으로서 모든 역사에 위대한 전환점이 정말 일어난 것입니다.

① 유대인들이 열심을 다하여 도달하려 했던 것은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한 의였으며, 그 밖의 사람들은 그들의 도덕성과 철학으로서 그것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바울은 그 모든 것이 헛것이라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적으로 새로운 입장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의로서 그것만이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②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 그 자체로는 하늘에 들어갈 허락을 얻지 못하는데, 그 허락을 얻으려면 필연코 의로 옷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왕의 결혼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한 사람이 쫓겨난 것과 같습니다(마22:1~14).

③ 우리는 적극적인 의를 필요로 하는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이 위대한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간주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④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만족시키신 결과를 우리에게 전가 시켜 주심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세우지 않고는 구원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않으면 결코 구원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⑤ 신앙이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과 구원을 위해서 행하신 것을 신뢰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를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며 자신의 어떠한 것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⑥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여전히 죄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말할 수 없는 죄를 지었고, 나는 죄의 생활을 해왔으며, 신성모독 자였으며, 행악 자였고, 비열한 사람으로, 내가 범하지 않은 죄란 거의 없었다.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있는 죄를 알지만 내가 내 자신의 의로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의를 나의 것으로 간주하신 것이다.” 그는 전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것만을 의지하고 바라봄으로서 이러한 고백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들을 들추어내어 그것들을 살펴보고 그리고 인식하고 그 모든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더 나아가서 그 모든 것들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⑦ 죄란 ❶표적(거룩한 표준)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표적을 맞추지 못하는 것, ❷범법 하는 것, ❸ 바르지 못하여(옳지 못함) 똑바로 가지 못하는 것, ❹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 ❺ 본래 악하고 그 자체가 나쁜 것, ❻ 계명을 어기는 것(요일3:4)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기뻐해야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영광에 대해서 모릅니다. 왜냐하면 한번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영광이 열려 나타냄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데, 그에게는 그것을 누리고 참여하는 것이 전부이며, 모든 것 중에 가장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죄는 사람을 불의하게 만들 뿐만 아니고 그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아 갑니다.

⑨ 내 안에 있는 새 사람은 계속해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될 것이며 나의 육신마저도 영화롭게 되는 더욱더 경이로운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 어떠하였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완전히 행하신 일을 믿으면 우리는 그의 의로 옷 입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운데 이식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벧후1:4)가 되는 것입니다.


3. 오직 값없는 은혜로(24)

① 구원이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안에서 죄로 양심이 가책을 입고 있으니 자신이 의롭다 함을 얻은 신분이라는 것을 의심합니다. 칭의는 우리들 안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행함에서 오는 열매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행해진 어떠한 일, 즉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의롭다고 간주해 주시고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의이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② 그렇다면 이 구원이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사실 “은혜”라는 말보다 더 놀라운 말은 없습니다. 그 말은 전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준 과분한 총애나 자비를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발적인 사랑의 실천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③ 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 뿐 아니고, 죄와 마귀의 노예가 되어, 이런 처지에 있는 인간은 무능하며, 완전히 노예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에 대한 응분의 댓가를 지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할 것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우리의 주님은 그 율법에 대하여 완전하게 순종하셨으며, 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속전의 값을 지불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4. 화목제물(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는 말씀에서 “세웠다”는 말의 실제 어휘는 “제시하였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지만 본문에서는 세웠다는 표현이 더 적합합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갈보리 위에서의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묘사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일어난 것을 공적으로 선포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화목제물”의 화목이 의미하는 것은 진노를 진정시키고 달래고 유화 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청교도의 존 오웬 박사는 어떤 화해에도 본질적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❶ 가해를 중단하고, ❷ 피해자를 유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❸ 가해자는 상해에 대한 책임을 지고, ❹ 가해를 사유케 하는 희생이나 다른 수단을 써야 한다고 하는데, 이 네 가지는 화목제물에 대한 전체 관점에 다 적용이 됩니다.

② 화목의 개념은 속죄의 개념보다 더 크고 깊은 것입니다.

[참조 : 속죄제물의 의미 = 죄가 속해 지기 전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관계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목제물의 의미 = 죄가 존재하는 동안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③ 사도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2:1~2)라고 증거함으로서 단순히 우리가 우리의 죄가 속죄될 필요가 있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고, 대언자가 있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언자가 하는 일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 관련된 어떤 일, 즉 화해일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대언자가 필요합니다.

④ 화목이란 말은 누군가가 공격을 당했고, 누군가가 손해를 보았으며, 상해가 있었으며, 양편에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는 관념을 전달해 줍니다. 가해자 측에서 뿐만 아니라 피해자 편에서 다 함께 어떤 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하여 진노를 터뜨리시고, 또 한편으로는 죄인이 구원 받도록 하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우리가 해를 끼친 바로 그 하나님께서 범죄자를 해결하여 주실 길을 제공하셨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제공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과 죄를 향한 분노와 진노는 풀어졌고 진정되었으며, 이제 그분은 그럼으로써 사람을 그 자신에게 화해시킬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화목제물”이 뜻하는 의미입니다.


5. 예수 그리스도의 피(25)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는데,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속량할 수 있었습니까?

그 대답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피”로 그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①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흔히 우리의 구속과 구원에 관련하여 강조되어 언급되어 있는데, ❶ 행28:8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쳐야 한다고 했으며, ❷ 롬5:9에서는 우리가 그의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입었은즉....... 라고 하고, ❸ 엡1:7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하며, ❹ 그리고 히9:12,14,19; 벧전1:19; 계1:5에서 그것을 봅니다.

② 바울은 여기서 “피”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구약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데, 하나님도 같고 또한 구원도 같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은 시대와 형식에 있어서는 다르지만 구원은 항상 한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주님은 구약의 레위기의 가르침 가운데서 예시되고 암시되고 예표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루시고, 다 끝내셨으며, 다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에서 주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고난 받고 죽음 가운데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하실 것이 구약에 쓰여 있었고, 그래서 주님은 마땅히 고난을 받아야 했고, 3일 만에 부활하셔야 했습니다.

③ “피”란 “죽음으로 끝난 생명”을 의미합니다.

피는 짐승이 고난 받아 죽었다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증거가 되며, 유대인들에게 임했어야 할 심판이 짐승에게 대신 임하여 죽음의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드려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란 “희생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④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희생적 죽임을 명하셨는데, 그 죽음의 목적은 ❶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바친 것이며, 그 점이 하나님과 화목하려는 그들의 의향이었습니다. ❷ 화목을 얻는 것은 속죄로 말미암아서인데, 죄가 도말 되고 씻어지면 이제 화목 된 하나님께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❸ 가해자에 의해 가해자를 위해 그의 죄를 대체된 동물에게 전가시켜 희생물에 대한 여러 가지의 심판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❹ 희생제사의 효력은 범죄 자에 대한 용서와 하나님의 은총의 회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로서는 죄를 처리하지 못하고 단지 죄를 간과하고 덮어두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며, 구약의 제사와 희생 제물들은 일종의 육체적인 정결을 위한 것들로 의에 이르게는 하지 못하였으며, 하나의 의식적인 결례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도움을 줄 뿐이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에 대해 사람을 참으로 화해시킬 수 있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지 않고는 그들은 구원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도들도 오실 메시아를 믿지 않고는 의인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을 구원에 이르게 한 것도 신약시대와 같이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입니다.[예 : 안나(눅2:36~38), 시므온(눅2:25~31)]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는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죽음을 떠나서는 죄가 처리 될 수 없으니 피 흘림을 떠난 죄사함은 없습니다.

⑥ 우리가 죄를 지은 바로 그 하나님께서 친히 대체물을 제공해 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세우신 것입니다.

  ❶ 그의 생명은 죄를 위한 제물이 되었습니다.(사53:6)

우리의 죄악이 그에게 짊어진바 되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죄가 그에게 전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부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임하게 될 심판이 우리의 죄성과 죄악으로 인해서 그분에게 임한 것입니다.

  ❷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에서 아들의 사정을 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가 담당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맛보아야 하고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셨던 것입니다.

  ❸ 그는 자기의 피를 가지고 “가장 거룩한 하늘 지성소”에 단번에 들어가셨고 그의 피를 드리셨으며 그것이 열납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충분하셨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전부 쏟은바 되었습니다.

⑦ 우리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죄짓고 부정하게 되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항상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그 피는 우리의 양심까지도 깨끗하게 하여 줍니다.(히9:13~15)

⑧ 우리는 새 언약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옛 언약에 속해 있지 않으며, 새롭고 더 좋은 언약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주어졌습니다.


6. 자랑할 데가 어디뇨?(27~31)

구원의 방법은 우리의 입장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입장에서 더욱더 많이 고려되어져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며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는 데에 있습니다.

①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나타나는데 그것이 첫 번째 특징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은 모든 자랑을 배제시킵니다.

출신 성분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❶ 유대인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하며 이방인들을 “들개”로 취급했습니다.

  ❷ 자기의 의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했고, 자신들의 경건한 삶과 도덕적인 삶을 자랑했습니다.

② 구원의 길에 대한 해석은 더욱 영광스러운 방식으로 자랑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그것은 하나님 법정에서 단번에 쫓겨났습니다. 그것은 결코 다시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길 안에는 그것을 위한 한 치의 땅도 없습니다.

③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완벽한 공로입니다.

그리고 그의 완전한 삶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존전에 그리스도께서 나아가심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전가시키심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의에 이르게 하는 통로요 매개체로서 믿음 자체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의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의는 그리스도의 의이며 믿음은 단순히 그것을 우리에게 전가시켜주는 매체입니다.


7. 차별이 없느니라.(29~31)

구원에 있어서 우리는 자기의 공로나 출신, 성공, 이해력 등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구원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차별을 폐하셨다는 것인데, 이것이 구원 방법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구원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 어떠한 상태에 있든,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차별 없이 똑같이 적용 됩니다.


8. 세워진 율법(31)

이제 하나님의 구원 방법의 특징으로 묘사해 온 것 중 마지막 세 번째 예증을 대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구원의 길, 즉 하나님께서 그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움으로 이루어진 이 구원의 길을 율법으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효력을 잃게 되고 폐하여지거나 무익하게 되었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 바울의 논리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새로운 믿음의 법을 맞이했기 때문에 이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율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허물고 방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는 구원의 방법이 어떠하거나 우리가 고집하는 속죄 교리가 어느 것이든지 간에 반드시 율법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세워주고 붙들어 견고하게 하는 것은 “복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합니다.

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율법을 존귀케 하며 세우는 것입니다.

② 우리 주님 자신이 모든 면에서 율법을 이루심으로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유일한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로 말미암고, 구원은 율법과 마귀와 사망의 올무에서 건져내기 위한 속전인 주님의 피로 인한다는 이 구원과 구속의 길이 다른 무엇보다도 모든 면에서 율법을 존귀케 한 것입니다.

  ❶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자발적인 순종 가운데서 율법을 존귀케 했습니다.(갈4:4)

  ❷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케 하심으로 존귀케 하셨습니다.

  ❸ 주님은 가장 거룩한 순종의 생활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고 철저하게 존귀케 하셨습니다.

  ❹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상의 수난의 순종 속에서 율법을 더욱더 뚜렷하게 높이셨습니다.

  ❺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요구를 자기 위에 메우신 하나님께 불평이나 도망가지 않고 순순히 복종하심으로써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❻ 율법의 제일 되는 기능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었는데, 십자가는 그렇게 율법을 세우며 그 점을 나타냅니다.

③ 십자가는 죄에 대한 심판으로 주어졌으며,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함으로서 율법을 세웠습니다.

④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분이 율법을 세우신 모든 것들이 전가되어 율법을 세우는 일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4장 1~3절 :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1.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아브라함(1~3)

우리는 새로운 장에 이르고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되는데, 바울은 여전히 그가 이미 다루어 왔었던 칭의라는 주제를 계속하여 나가고 있는 것이며, 유대인들이 제기할 수 있는 반대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파되었고 다수의 유대인들이 믿어 개종하였으며 사도는 그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돕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우리가 경험을 통해 잘 알듯이 중생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될 대 여전히 우리 안에 옛 본성들이 남아 있는 것과 같이 유대인은 참으로 개종하였고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식의 사고방식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던 관계로 그것을 깨뜨려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돕고 싶었으며, 동시에 복음 밖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① 복음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② 사도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의 의를 사람들에게 전가시킴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여(이신칭의)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신약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까지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용하셨다는 교리를 세워주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은 구약이든 신약이든 언제나 동일한 오직 한 가지 방법뿐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③ 이 구원의 길이 모든 자랑을 떨쳐낸다는 것입니다.


④ 사도 바울은 이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성경이 아브라함에 관해 무엇을 말하는가를 보여 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하는 사람들 중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은 하나님께 큰 사랑과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메시아에 관련된 직접적인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❶ 1~5절까지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❷ 6~8절까지는 다윗이 시편 32편에서 직설적으로 말한 것을 대하게 되며, ❸ 9~12절까지는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있었던 것을 들어 할례가 결정적인 것은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며, ❹ 13~17절까지는 이런 것이 역시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있었다는 점을 논증합니다.


⑤ 4장은 구약을 이해하는 매우 귀중한 열쇠가 됩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은 모든 자랑을 배제한다는 것인데, 이 말은 사실 논제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 자체가 그것을 단번에 단정해 버렸기 때문인데, 사람이 자랑할 만한 행위로 인하여 되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여러 명제에 대한 교훈에 단순히 찬동만을 표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내가 너와 언약을 맺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신 그 언약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네 씨로 인하여 땅의 온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 너의 씨로 번성케 하여 너와 네 씨로 인하여 온 세상이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으로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습니다.

언제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칭의 교리가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씀을 읽을 때, 우리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칭의 방법이 행위로나 율법이나 할례로 또는 어떤 종류의 것들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한 그렇게 파악해야 하는 것은 중요한 핵심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아들의 의를 전가시키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미치며, 그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얼마나 경이로운 일입니까?

아브라함이 그것을 알고 그리스도의 날을 미리 보며, 그것을 믿고 즐거워했다니 그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윗도 율법 아래 있던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칭했던 구약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이 현실로 이루어질 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분명히 그것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들을 구원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는데, 그것은 영원 전부터 취소시킬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4장 4~8절 :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 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1.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심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길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모든 것을 명백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는 그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했던 것은 이 구원의 방법,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사람에게 의를 베푸심, 그리고 그 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점을 믿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다.”라는 말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너의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훨씬 그 이상으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내보이셨던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것을 창세기 12~18장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복음의 예고를 받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좀더 구체화하기 위해 또는 좀더 분명한 태도로 서술하기 위해 4~5절도 계속해 나갑니다.


① 일한 자에게 주어지는 삯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은 빚을 갚는 일로서 법적인 일이지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친절과 아낌없는 마음과 그의 자비로운 성품에서 할 필요 없는 일을 나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② 5절에서는 “일을 아니할지라도(일을 하지 않고 해내지도 못하는 사람일 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칭의를 행하시는 자는 하나님이십니다.


  ❶ 일하지 않는 자, 즉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일을 해내지도 못하는 사람을 “일하는 자”와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은 보기에 선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불경건한 사람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❷ 율법과 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은 경건치 않은 것으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은 아브라함도 포함되는데, 아브라함도 중생하기 전에는 불경건한 죄인이었습니다.


  ❸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경건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술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하나 실상은 자신들의 선행만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❹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데, 먼저 우리를 경건하게 만드신 다음에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치 않을 때에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③ 6~8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에 대한 굉장한 확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시편 32편 가운데 있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❶ 죄를 지은 사람은 복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게 많은 죄에 대한 책임이 있지만 하나님은 하늘의 원장부에 있는 그의 죄를 기록하지 않으실 것이며, 죄를 멀리 내던져 버리시고, 그 죄를 사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계시며, 그것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❷ 참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은 그의 죄가 탕감을 받고 하나님께서 다시는 그것을 보시지도 않도록 가리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그의 것으로 여겨 주시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칭의 교리로서 내가 재판 석에 서 있을 때 내 빚이 청산되고 내 죄가 가리움을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를 그의 등 뒤로 던지셨으며, 결코 나의 죄를 다시 보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의 죄는 그의 앞에서 영원히 도말되었습니다.


④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취하셔서 우리에게 지우시지 않고 주님께 지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우리 죄를 짊어지우시고 그 안에서 우리 죄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⑤ 우리의 죄가 주님께 전가된 것처럼 또한 주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혀 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주님은 완전한 의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배설물 과 같고, 경건치 않으며 소망이 없고 무력하기 그지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그에게 전가시키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화목하시고 세상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전혀 공로가 없다는 그것이 칭의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4장 9~17절 :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 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 오직 믿음(9~17)

사도 바울은 이미 1절과 5절에서 유대인들이 행위가 구원의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반론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이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과 시편 32편이 역시 이 교리를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가를 계속 증명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대목에서 바울은 두 가지의 더 심각한 반대를 대처하고 있는데, 첫 번째 반대는 9~12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행위가 그렇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필수적인 것이긴 하다는 주장을 논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13~16절까지로서, 거기서 그는 똑같은 방식으로 유대인들처럼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이 아브라함을 받는 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은 할례받기 전까지만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동안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참으로 완강하며 교활한 불신앙의 특징은 그들의 주장이 꺾이게 되면 또 다른 주장이 즉시 고개를 쳐든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언제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구원에 합당한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공격하며, 인간 측에서 아무런 할 일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며, 자신에게 어떠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그리고 구원이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라는 교리를 듣고 분개합니다.

① 구약적 지식이 없이는 신약의 논증, 특히 바울 서신의 논증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② 그래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할례를 받았을 때가 아니라, 무 할례 가운데서 라는 것은 이 논증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입니다.

  ❶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는 14년 전에 받았던 칭의에 대한 보증, 즉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라”(요6:27; 엡1:13~14)는 뜻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의가 전가 된 것이 진짜임을 보증하는 표로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11절)

  ❷ 아브라함 이전에도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람들은 아벨과 에녹, 노아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방법을 뚜렷하고 노골적으로 확증시킨 최초의 경우는 아브라함에게서 이었습니다.

전에는 그것이 법률적인 방식으로서는 선언되지 않았습니다.

③ 12절에서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역시 할례에 속한 자들 중에서 믿는 사람들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과 같이 무 할례자들 중에서도 동일한 신앙을 가진 믿음의 동행자들의 조상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④ 13절의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역사 가운데 있었던 진술입니다.

  ❶ “약속”이란 의미는 창15:7에 확실히 나타나 있는데, 그것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곳은 창22:16~18로써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으로 사도바울이 18절에서 말한 약속이 이 약속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❷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포착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이 약속이 율법이 모세에게 주어지기 430년 전이라는 것입니다.(갈3:17 참조)

  ❸ 그리고 “후손”이라는 말은 갈3:16에 우리를 위해 이 말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았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또한 이 말씀에서 창17:7,8과 같은 구절에 대한 참된 의미와 이해를 얻게 됩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말씀 또한 긍국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서, 그리스도는 “후손”이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만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후손”이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⑤ 우리가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를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고, 그럼으로써 약속에 따라 상속인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팔레스틴 땅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것은 엡2:12,13과 엡3:5,6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2. 전능자의 은혜로 보증된 구원(13~17)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세 번째 논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의 신앙에 대항하여 반대하며,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율법에 대한 구약의 교훈을 묵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그들의 반응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 특별한 문제점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맺어진 약속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① 13절에 그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것은 율법의 중개를 통해서가 아니고 믿음의 의를 통해서라는 명확한 진술이 있는데, 그 역사는 아바르함의 사적을 다룬 창세기의 여러 장들 가운데서 발견됩니다.

  ❶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했을 때 어떤 의미로든 율법을 염두에 두고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순전히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며, 그것은 순전한 은혜이며 순수한 약속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❷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행하고 행치 않아야 할 것에 관한 특별한 조건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언약의 문제로 다루었습니다.

  ❸ 언약이 하나님의 의해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율법은 430년 후에야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② 사도 바울은 14,15절에서 율법 자체의 본질에 근거하여 또 다른 주장을 합니다.

  ❶ 만일 그 약속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맺어진 것이라면, 믿음이 발붙일 틈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어떤 일은 명하고 다른 일은 금함으로서, 항상 우리의 행위와 행동과 품행과 소행 등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을 내세우는 순간 우리는 행위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믿음은 전혀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❷ 만일 율법을 내세우면 “그 언약 역시 쓸모없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율법을 지키는 조건으로 언약을 맺으셨다면 그것은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그 언약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❸ 율법은 언제나 진노를 이루는 것이며, 진노는 축복의 약속과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진노는 심판을 의미하며, 약속은 기업과 생명과 기쁨과 영광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언약이 율법의 중보를 통해서 맺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우리들 모두를 할 말이 없게 만들고 절망하게 하며, 우리 모두를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언약이 율법의 중보를 통해서였다면 단 한 사람도 유익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③ 언약은 율법의 중보를 통해서 오지 않았음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13~15절에서 표현했으며, 사도 바울은 이제 16,17절에서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들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함이니라.”

  ❶ 행위와 은혜는 서로 반대되는 말로서 서로 혼합시킬 수 없으며, 만일 행위를 은혜의 체제 속으로 끌어넣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며, 그것은 별개의 것으로 결코 이 둘이 함께 취급될 수 없습니다.

  ❷ 율법 아래 에서는 언제나 행위와 공로의 문제로서 그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게 되지만, 은혜는 전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 어떤 공로도 요구도 달라고 소리하는 것도 전혀 없습니다.

  ❸ 믿음의 길만이 전적으로 은혜로 이끌어 주며, 그러므로 모든 영광이 하나님과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증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영광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므로, 만일 믿음 외에 어떤 것을 끌어 들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깎아 내리는 것이 됩니다.

  ❹ 구원이 믿음으로 되어야 하는 이유는 믿음이 은혜가 역사하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④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완전하였을 때 실수하였고 타락하였는데, 아담은 죄로부터 자유로웠으며,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을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산 안에서 조차, 그의 성품 안에 죄가 없는 조건에서 조차 타락하였다면, 죄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속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⑤ 전능하신 분외에는 성도의 견인을 보충할 자가 없으며, 그분 외에는 우리를 궁극적인 구원과 영화에 이르게 할 자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교활한 죄인이라도 소망이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계획하시고 목회하신 바를 결단코 이루십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것이며,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 약속은 모든 후손에게 “확실한 것입니다.

 

4장 18~22절 :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은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1. 믿음의 본질(18)

사도 바울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알게 될 것이지만 23,24절에서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함이 아니뇨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고 한 것과 같이 칭의에 대한 진리를 보여 주는데 있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진정한 목표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사도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해서 여기서 말하는 바는 언제나 믿음에 속한 것과 믿음의 모든 측면인데, 그가 믿음에 관해 말하는 것이 칭의에 대한 것 뿐 아니라 생활과 전쟁, 난경의 극복 등 신앙 행위의 전체 영역에서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얻은 그의 믿음이 그로 하여금 정확히 무엇을 행하게 했느냐가 관건일 것입니다.

 

①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에게 맺었던 언약의 놀라운 말씀을 믿게 했습니다.

  ❶ 육신으로 죽어있던 몸을 통해 주어질 자손에 대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❷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그 언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된 이 약속을 분명하게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이 내 때를 바라고 즐거워했고 그를 보고 기뻐했느니라.”는 말씀의 뜻이 그 점을 함축합니다.

  ❸ 아브라함은 뚜렷하게는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행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 즉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보내서 구원하실 것이며 그 아들은 육신을 따라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또한 이삭을 통해서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그분을 세우실 것”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네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신 뜻을 알았던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엄청난 말씀을 의지하여 믿도록 하였습니다.

믿음은 증명을 요구하지 않으며 증명거리도 찾지 않습니다. 어느 의미에선 믿음은 그러한 증거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족하고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❶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참 믿음이란 언제나 그 안에 확신의 요소를 가진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 합니다.

  ❷ 믿음은 앎이며, 지식의 요소가 있어서 “완전히 설복되어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❸ 믿음은 지각을 함유하고 있으며, 그것은 가슴 속에서 전인격으로 일어나고 완전히 확신함에 거합니다.

이것은 매우 참되고 본질적인 신앙의 요소입니다.

 

③ 참 신앙인도 의심의 공격을 받을 수 있지만 그들은 언제나 의심을 극복하고 그 의심에 바른 대답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 자체가 불신앙이 아니라, 그 의심을 바른 것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의심이 증폭되어 그것을 따르는 것이 불신앙인 것입니다.

 

④ 불신앙의 요소는 언제나 어려움만을 바라보게 되고 상황과 조건만을 따지는 지성적인 판단에 의지를 합니다.

 

2.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18~22)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강하게 하였다는 말씀으로 그것이 믿음을 강하게 하는 비결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우리 자신을 강하게 할 수 있으며, 우리의 믿음도 강하여 진다는 말입니다.

 

① 아브라함의 두드러진 신앙의 비결은 바로 자기 몸과 사라의 나이에서 오는 어려움만을 보지 않았고 또한 약속의 대성에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그 두 가지 것에 낙심치 않고 대신 하나님을 바라고 우러러 보았던 것이 바로 신아의 참 비결입니다.

 

②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모든 영광스러운 “속성”을 숙고해 보고 명상함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관한 진리를 깨달음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이 진리이기 때문에 그를 경배함으로서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빛 가운데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위탁함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❶ 영원성 ❷ 편만성(무소부재) ❸ 전능성 ❹ 의, 공평, 진리, 거룩, 불변성, 영존성 ❺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마음(목적)을 바꾸시지 않는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동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약속하신 것을 가장 확실하게 이루십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믿었으며, 그것에 대하여 명상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③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서, 믿음은 하나님을 순전하게 믿는 것을 말하는데,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직 그만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없고 그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만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은 없습니다.

 

④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바라보며 더 크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아는 것이며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그분을 신뢰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것은 신앙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을 적용시키는 것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에게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에 대하여 얘기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덕을 세웁니다.

 

3. 우리의 칭의를 위한 부활(23~25)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점을 지적한 사도 바울은 이제 23~25절에서 그것은 어떤 인간도 생각해 낼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라는 것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그는 이 위대한 이신칭의의 논증을 매듭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 관한 진술이 아브라함에게만 국한돼서는 안 되며, 아브라함에게 진리였던 것은 하나님과 화해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에게도 같은 진리입니다.

이것만이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이며 다른 길은 없다는 요지입니다.

이제 의롭다 함을 얻는 이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바울의 답변을 듣게 될 것입니다.

 

① 하나님을 믿고 영화롭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믿음으로서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언제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의 위대한 거룩한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 하는 믿음입니다.

 

② 그 믿음은 특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차원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단순히 일반적인 하나님 신앙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특수한 신앙입니다.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인 부활을 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기독교의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하는 것도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되며 우리의 죄는 그저 우리 가운데 있게 됩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정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죄에 대한 심판의 차원에서 정죄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는데, 만일 하나님께서 살리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리 주님이 우리의 죄책에 대한 심판을 담당하실 수 없었다는 결론을 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그의 아들이 사역을 완성시켰으며 완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분명하게 보는 것은 그의 부활 안에서 입니다.

 

 

5장 1~2절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1. 하나님과 화평의 양면성

우리가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진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에 대해 이루어진 그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나 사람, 그 어느 편에서도 화평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의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공로의 결과로서만 모든 원수 됨의 원인이 처리되어 하나님이 사람과 화평 하는 것처럼 사람도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양편의 이런 화해가 있어서 거기에 “하나님과 더블은 화평”이 존재케 되는 것입니다.

그 분의 공로로 인하여 죄와 타락으로 인해 깨졌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가 다시 정립된  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는 본문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기대하고 있거나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있고, 이미 얻었고, 그것을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용서를 받을 것과 천국에 들어갈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소유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❶ 하나님의 화평은 사람의 마음을 쉬게 합니다.

그것은 그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제공된 이 하나님의 길이 정말 모든 절실함을 채워주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이 길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와 의와 거룩을 충족시키는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신 것을 봐서 나까지도 의롭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❷ 그리고 심령이 만족하게 되며,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송사에 대하여 분명하게 답변 할 수 있게 되어 평화를 고수하게 됩니다.

❸ 마귀의 송사에 대해서도 같은 확고함으로 대답해 나갈 수 있는데, 마귀는 우리를 참소하고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평화를 깨버리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희미하게라도 믿는 사람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이길 수 있습니다.(계12:11)

❹ 우리가 죄에 빠졌을 지라도, 혹은 갑작스런 시험이 덮쳐오더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대제사장이 계시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완전한 믿음의 확신이 있기 때문에 넘어질 수가 없습니다.


② 거짓 화평의 특징은

❶ 믿음을 단순히 신념이나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조로 생각하고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❷ 이런 사람들은 주로 그리스도와 그의 공로에 의지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믿음을 의지하고 자신을 세뇌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바라보고 그것을 신뢰할 공로로 봅니다.

❸ 그들은 사죄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의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 죄의 용서에만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활에 태만하고 거룩을 구하지 않습니다.

❹ 그들은 죄에 빠질 때에 그것을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죄를 가렸다고 하여 너무나 빠르고 쉽게 그리고 너무나 가볍게 자신을 치료합니다.


③ 참 화평을 가진 사람은 결코 자기가 화평을 가졌음을 감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가 진정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자기를 주목하시고 그의 은혜로 자기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❶ 그들은 겸손하며,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며, 낮아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❷ 하나님과 우리 주님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언제나 솟아나는 사람들로 기도와 찬양과 감사가 끈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위해 이루어 놓으신 것 중 무엇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❹ 그리고 그는 언제나 자기의 생활에 조심하는데, 행위에 의지하게 되거나 자신을 의롭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이루신 일 때문에 자기의 감사하는 마음을 그리스도께 보여주길 원하여 모든 생활에 조심하는 사람입니다.


2. 하나님께 나아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 우리 주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주님 안에서 이기 때문입니다.


①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며, 성화를 이루는 것은 하나의 진행 과정입니다.

우리는 주의 은혜와 지식 가운데서 자라나 점차적으로 성화되는 것입니다.

② 우리가 죄에 거할 때가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갈 권리와 나아감을 얻지 못했지만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소개장”을 얻었으며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③ 우리는 모두 본성적으로 하나님께 반역자이며, 하나님 뜻 앞에 우리의 뜻을 주장하고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것 앞에 우리의 좋아하는 것을 주장하였고, 우리는 그를 몰랐으며 그를 욕했고 그를 잊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심판과 보복 밖에는 받을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법적으로 가장 엄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이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시는 대신 용서하시고, 축복하시고, 은총을 부어 주시는데, 그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은혜를 요구하지 못하지만 전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에게 값없이 그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모든 축복은 모두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④ 우리의 기도 생활의 특징은 우리가 이 들어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총애와 웃음 띤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꺼이 축복하시고, 우리가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의 복락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쓰신다는 것,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넘치는 위대하고 값진 약속들에 둘러 싸여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된 것입니다.

⑤ 바울이 “서 있는 것”으로 묘사한 것은 신앙의 절대적인 확신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앞으로 주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소망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 은혜 안에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3. 소망 안에서의 자랑과 기쁨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란 말씀을 살펴볼 것인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의 지위를 자랑하고 “소망으로” 내다보는 이 “하나님의 영광”을 자랑하고 기뻐 어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는 확신과 확증을 가지고 그것을 내다보고 있으며, 그것에 대한 전망, 바로 그것이 그가 산다는 것 자체를 가슴 벅차게 하는 것입니다.

① 사도 바울은 복스러운 비전, 즉 하나님의 모습을 사모 하고 있었는데, 이는 우리 믿음의 궁극적인 종국이요 모든 것의 최종적인 목표로서, 이 목표는 끝내 우리들이 서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모습을 우러러 볼 수 있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예 : 스데반, 다메섹 도상의 사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변화산상에서 목격했던 주님의 모습]

② 우리 자신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그 앞에서 견딜 수 있기 위해서 그것은 없어서는 안 될 중대한 것으로 이것은 다시 구원의 최종적 일부로서 우리는 이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확실하게 이미 보이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 영광은 우리 속에서 이미 시작 되었는데, 우리를 의롭다 하신 분께서 우리를 영화시키기로 미리 작정하셨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우리는 안심할 수가 있습니다.

③ 우리가 하늘을 향해 가는 중에서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고후3:18)

④ 우리가 말하는 이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인데 우리는 이것들을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이 영광을 포착하기만 하면 우리는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자랑한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롬5;3-5   [로이드존스-로마서 강해]

글쓴이: 예수님사랑   08.05.24    http://cafe.daum.net/jesusminuk1004/Hbgu/53

 

 

5장 3~5절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1. 환난과 믿음

사도는 우리에게 이신칭의의 결과로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더 나아가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우리를 기다리는 그 영광을 받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또 다른 증거로서 우리의 믿음이 시험과 고통과 문제와 생활의 고초를 당해 낼 수 있는 면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던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라고 세상에서 그들이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과 동일합니다.


① 기독교는 단순한 금욕주의에 불과하지 않으며, 닥쳐온 어떤 환난을 단순히 견뎌내고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환난을 즐거워하고, 자랑합니다. 그것은 그로인해 주어질 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시험을 참아내는 것만이 아니고, 그것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며, 시험 가운데서도 행복한 것이며, 그것 때문에 그 사실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실상 우리의 소망을 촉진시키고 더해준다는 사실 때문인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2~14)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③ 그리스도인은 시련과 환난이 올 때 처음에는 고민하고 불안해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환난을 처리하기 위해 전진하며, 우리에게 주어질 그러한 영광들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목적과 방법으로 주어진 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는 믿음의 행사로서 그것을 즐거워하고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④ 환난이 닥쳐오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그를 더 멀리 떠나게 만드는 조건이 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환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더 그리스도께 밀착되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진정한 평화를 누리며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많은 축복들 때문에 기뻐하며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부끄럽게 하지 않는 소망(5)

사도는 3~4절에서 우리가 당하는 시험과 환난이 그 소망을 요동케 하기는커녕 그것을 더욱 확신케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5절에서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알아야 할 것은 다가올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① 소망 때문에 그는 부끄럼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는 말인데, 진정으로 이 소망을 얻은 것을 아는 사람은 이러한 시련들과 환난들을 극복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자랑할 것이고 그것을 영예롭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소망은 결코 낭패를 당하게 하지 않을뿐더러 우리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이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그것이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고 사도는 그 이유를 댑니다.

“부은바 됨”이란 말씀은 흘러넘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으며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속에 붓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렇게 해 주심으로 그것을 받은 사람마다 환난 중에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흘러넘쳐 난다면 거기에 대해서 일말의 의심도 없이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넘치는 확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③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확신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 바가 되었다면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 날에 이러한 일이 있었고 오늘 날에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충만함 속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3. 성령과 확신(5)

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성령님이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장막입니다.


② 우리가 계속 믿음을 가지고 나가 끝내 하나님 앞에 확실히 선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이 증거합니다.

성령께서는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일하시고, “뜻을 두고 행하게”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은 나를 끊임없이 감화하고 끌어주고 책망하고 말씀의 맛과 그것을 열망하는 마음을 줍니다.

그분은 나를 권능으로 붙잡고 계시며, 언제나 우리 안에 계셔서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기도하십니다.

 

롬5:6-11   [로이드존스-로마서 강해]

글쓴이: 예수님사랑   08.05.24    http://cafe.daum.net/jesusminuk1004/Hbgu/52

 

 

5장 6~11절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11-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1.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6~8)

자기가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커다란 확신을 누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함으로 인해 아무것도 그것을 요동케 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사랑보다 우리의 구원이 최종적으로 확실하다는 것보다 더 큰 확신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해주는 데 있어서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한 구절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구절의 말씀은 요3:16이 본문의 주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말씀을 떠나서는 칭의의 방법이나 방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자신을 화해시켰습니다.

  ❶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근거로 우리에게 구원과 용서를 허락하시도록 호소하고 간청한 데 대해 하는 수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행하신 일로서 창세전에 사람이 창조되기 전, 세계가 시작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이 권위 있고, 영광스러운 구원의 길을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❷ 구원이란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있으며 구원이 위대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라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의 사랑은 감정에 끌리기 쉽고 변덕스러우나,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하고 영원합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에서 이때가 언제이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특별한 시점은 역사상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때가 찬” 정확한 시기는 어느 때인지 살펴보겠습니다.

  ❶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율법을 그때까지 약 1,400년 동안 소유해 왔던 것은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육체가 하나도 없음”이 입증되도록 이 기나긴 시간이 사용된 것입니다.


  ❷ 이 “기약한 때”에는 헬라 철학도 율법과 똑같은 기회를 충분히 누려봤던 시점입니다.

사상사의 저 위대한 전성시대와 궁극적인 실재에 관한 연구시대가 막 지나갔던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노력이나 열심으로 자신을 구원할 모든 기회를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❸ 역시 같은 방식으로 로마 문명과 법률, 문화도 그들 나름대로의 기회를 가졌었습니다.

이집트의 거대한 문명도, 앗수르, 바벨론, 중국문명도 그러했습니다.

세상은 자신을 구할 모든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❹ 그러나 사람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❺ 바로 이 “기약한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두셨는데, 바로 이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시작하는 것ㄷㅎ 여기서부터 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도다.”라는 이 말씀은 주님의 생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주검을 강조하는 말로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❶ 그리스도의 교훈이나 이적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닙니다.

  ❷ 그분의 주검이 경건치 않은 자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❸ 십자가형은 가까이만 해도 수치스럽고 모욕적이며 불명예스러운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참으로 아는 데는 여기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최상의 확증입니다.


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측량해 보는 또 다른 방식은 주님께서 그 일을 위해서 해 준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가 얼마나 깊은가를 재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용한 “힘이 없는”, “연약함”, “경건치 않은”, “죄인들”이라는 이 어휘들에서 우리는 어떤 영적 능력도 전혀 가지지 못한 “전적 무능력”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❶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마땅히 알아야 할 때도 알지 못했습니다.

❷ 우리는 연약하고 전적으로 무능한 상태를 깨달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❸ 우리는 본래 영적 이해에 있어서 전혀 무능합니다.

❹ 이 상태는 죄와 허물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❺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❻ 사람의 의는 더러운 넝마와 같고 더러운 배설물과 같이 해로운 것으로서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자연인으로서는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❼ 그리고 우리는 본질상 율법에서 요구하는 의를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영광을 주님께 돌리려 함”이란 말은 ❶ 주님을 자랑한다는 것이며, ❷ 그렇게 된 것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안 결과인데, 우리가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전혀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결과라는 것입니다.

본성은 죄로 오염되었고 부패하였고 어리석어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 결과 본래대로는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⑦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으며 오직 하나님의 영구한 사랑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로 전락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을 뿐 아니라 갈보리 언덕에서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놀랍고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탄 할 수밖에 없습니다.


2.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6~11)

우리는 지금 하나님 백성인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위대한 증거와 또한 모든 되어진 일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두 방면에서 관찰 할 수가 있는데, 즉 되어진 일과 그 되어진 일의 혜택을 받는 장본인들의 경우에서 말입니다.

❶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❷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측량하고 있습니다.

❸ 그리고 하나님의 너무나도 넓은 사랑으로 인도되어질 것입니다.


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 무엇인가가 있었는데, 죄의 결과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불경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❶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이 손상되었습니다.

❷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로 인식되지 못할 만큼 손상되어 더 이상 하나님을 닮지 않게 된 것입니다.

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주신 바 사람의 진실한 신성성과 모든 것 위에 뛰어난 영광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자기의 형상을 사람에게 부여하심으로써 사람을 영예롭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 그것은 흐트러지고 사람은 경건치 않게 된 것입니다.


② 이제 7,8절의 “를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에서 말하는 ❶ 의인은 정직한 사람, 율법을 지키는 사람, 계명을 영예롭게 하는 사람, 규칙과 법률을 복종하는 사람, 행동에 있어서 아주 바른 사람을 말합니다.

❷ 선인은 의인처럼 모든 일을 바르게 행하는 사람이며 더 나아가 사랑에 의하여 통제받는 사람이며, 그는 십리를 동행하여 주며, 겉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주는 사람입니다.

[예 : 한 사람이 바른 박자와 바른 연주법으로 피아노를 옳게 연주했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악보로 연주하는 또 다른 연주자는 여기에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는 연주에 생명을 불어 넣고 있으므로 사람들을 감동케 하고 있습니다. 전자는 매우 옳았지만 둘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그 묘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인과 선인의 차이입니다.]

❸ 우리의 서 있는 자리는 의인도 선인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랑스럽지도 못하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참 모습은 죄인들로 의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의인이나 선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③ 우리는 이렇게 전적으로 대가없이 주어지고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얻게 된 구원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④ 그래서 이 사람들이 자기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바라고 즐거워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그들이 자기들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이해하고 포착할 때에 그것을 기뻐하리라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3. 더욱 더(9~10)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자신의 선언을 기초로 해서 하나의 논증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데 이 두절 속에 있는 논증은 성경 가운데 나와 있는 구원의 확신이나 최종성에 관한 가장 강력한 논증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초월하는 확신의 방법이 단 하나 있는데, 그것은 5절에서 언급하였던 성령 자신의 직접적인 증거입니다.(롬8:16)

이제 “더욱”이라는 말로서 시작한 그의 권위 있는 추론을 끌어낸 사도 바울의 논증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우리의 죄가 용서 받은 사실에 감사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버림을 받지 않을까라는 불안한 생각을 가질 수 있으나 바울은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많은 증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우리가 그의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이라고 말하는데,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용서함을 받았다는 것이 포함되는 법률적이고 법정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셔서 우리를 의로 여긴다고 선언하시는 것이 됩니다.


② 칭의는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칭의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는 방편으로 그것을 제정하심으로서 가능케 된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책의 문제는 해결 되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는 이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피로서 가능케 된 것입니다.


③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거듭남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때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거듭남은 회심의 순간에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의롭다 칭함이 먼저 있은 후에 거듭남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재판을 받은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결단코 다시 정죄함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④ 우리에게 성화와 영화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한 과정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때에 그러한 조건에 관계없이 이미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되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이 복음이 우리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4.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발전 된 논증(10)

지금 이 순간에도 사도의 관심은 오직 우리가 구원과 구원의 최종성에 관해 확신하는 것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았으며, 영원토록 안전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위대한 논증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차원에서 발전시켜 왔습니다.


①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관해 무엇인가를 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상태나 조건이나 신분이나 관계는 원수 사이에서 되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❶ 화목을 얻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우리의 어떠한 조건 여하에 의해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시작되어 우리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❷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을 멈추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복종하고 그를 경배하기 원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❸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화목을 얻게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②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 되는 것은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의 피를 인하여”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필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사 십자가의 치욕과 고난과 수치를 당케 하셨을 리 만무합니다.

그것은 ❶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롬3:26).

❷ 하나님께서는 사랑도 되시지만 공의의 속성이 있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전존재로서 행하십니다.

❸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랑이시면서 동시에 언제나 공의로 행하십니다.

❹ 하나님은 거룩이시오, 빛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는 두려움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화목제물이 그렇게 필수적이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❺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른다고 덮어두실 수 없으며, 그 죄를 벌하시겠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죄를 벌하셔야만 하고 그래서 분노하셔서 독생자 안에서 죄를 형벌하심으로써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으며, 그의 공의는 만족되어 우리를 보실 수 있는 것입니다.


③ 이제 우리가 죄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꼭 죄에 빠질 것이지만,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는 본문에서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누리게 될 영광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참조 : 시편 33편, 34편, 103편, 눅1:46~47; 빌3:1; 4:4]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우리는 애통하는 것이나, 슬픔이나, 죄나, 수치가 없는 나라에 살게 될 것인데, 그때 우리는 육신마저 완전히 영화롭게 되고 죄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롬5:12-21   [로이드존스-로마서 강해]

글쓴이: 예수님사랑   08.05.24    http://cafe.daum.net/jesusminuk1004/Hbgu/51

 

 

1. 새로운 대목의 서론적 강해(12~2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의 생명 속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구원이 용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전체 지위와 입장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❶ 원죄의 교리이며 ❷ 창세기 1~3장의 역사성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❸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언약과 계약을 통해서 사람을 다루신다고 가르치는 ‘언약신학’의 차원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2. 우리와 아담의 단계(12)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문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때 하나의 문제가 저절로 떠오르게 되는데, 만일 우리 모두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정확히 말해서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며, 우리는 아담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문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며, 죄는 모든 사람에게 미친 죽음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① 히브리서 7장 9~10절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에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이 죄를 지을 때에 아담의 허리, 즉 아담의 행동에 따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②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자연적인” 머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전체 인류의 총수이며 대표로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와 언약을 맺음으로 네가 누릴 모든 복락은 너의 자손들에게 미칠 것이고, 네게 임할지 모르는 어떤 심판도 너의 자손들에게 임할 것이다. 네가 행동할 때 단 너 혼자만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너를 인류의 총수와 대표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하는 것은 네 자손들 모두를 통째로 끌어갈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우리의 연대적 머리요 대표라는 것입니다.[예 : 십계명 가운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아버지의 죄를 자손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는 말씀, 기타 성경 가운데서 자주 발견됨]

③ 모든 사람들과 아담의 관계는

❶ 우리는 아담 안에서의 우리의 타락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하여 말하며,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 즉 오실자의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❷ 아담은 인류와 인간성의 머리라고 하는 양편에 다 해당됩니다.

❸ 아담과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으므로 각자는 언약적 머리입니다.

 

3.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15)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아담의 허리에 있었습니다.

아담은 우리 모두의 조상이요, 시조로서 모든 민족이 그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아담과의 관계는 육신적인 계통과 육신적인 전승에 기초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육신적인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다시 나지 않고서는 육신적인 혈통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할 수 없습니다.

① 본문에서 “범죄”란 낱말과 “은사”란 낱말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범죄”는 아담의 범죄이며, 그가 저지른 불순종함으로서 인류가 타락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❷ 그런 행위의 결과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함으로서, 범죄와 죄책은 사망을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말은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왔고 사망은 언제나 죄에 대한 심판의 일부분으로서 주어집니다.

❸ 그러므로 사망은 우리가 번 일종의 노임과 같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에서 은사“범죄”와 완벽한 대조를 강조하여 값없는 선물로서 우리의 삯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② 그리고 “더욱(더욱더: much more)”이란 말은 모든 것에 더하여 라는 의미입니다.

“더욱”이란 말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아담과 우리의 연관은 필연적으로 모두 죽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❶ 이 말은 사망과 생명 사이의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사망은 확실하게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생명만큼 능력이 있지는 못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불멸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영생, 즉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계시는 한 분이 계시는데, 그것이 사망보다 “더욱더” 크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망이 확실하다면 생명은 “더욱더” 확실하여 우리는 더 이상 사망 아래 있지 않는다는 생명의 능력을 체험적으로 “더욱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❸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서 만일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가져왔다면 그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은 “더욱더”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더 기뻐하는 것입니다.

❹ 구원의 축복이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잃은 것보다 “더욱더” 많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❺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멸망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게까지 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크다는 말입니다.

❻ 사망은 끝이며 종말이라서 열매를 내지 못하며, 아무것도 상상해 낼 수 없습니다.

❼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생명으로 인도하여 넘치게 되고 발전하고 번성하고 계속 증가하는 바로 생명의 본질입니다. 그 씨는 충일된 생명으로 이 은혜가 항상 흘러넘칩니다.

③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었으며, 무죄 상태에 있었고 그는 죄를 짓지 않았으며 그의 본성은 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거기엔 그 상태에 부정적인 것이 있는데,

❶ 그것은 범죄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❷ 그리고 그에게 없는 것이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④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담의 신분보다 더 나은 신분으로 옮겨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중의 일원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담에게 부족했던 타락의 가능성이 제거되고 아담이 가지지 못했던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게 되었으니 분명 아담의 신분보다 더 나은 신분으로 옮겨 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한 범죄와 많은 범죄(16~17)

① 이제 본문이 지적하는 “한 범죄”“많은 범죄”에 대하여 살펴보면, 한쪽에서는 아담의 한 범죄가 정죄에 이르렀고 다른 쪽에서는 “많은 범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행동에 의해 장악됩니다.

심판은 한 죄의 결과인 아담의 한 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진 유죄 선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가 다른 쪽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그러므로 한편에선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에게 심판을 가져오게 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② 다음에 살펴볼 것은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망은 모든 사람을 이기고 모든 육체를 장악한 정복자로서 왔습니다.

그래서 전 인류는 아담 한사람의 죄의 결과로 사망의 폭군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일생이 매여 종노릇하게 되어, 그들은 언제나 죽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내세와 죽은 다음과 무덤의 소망을 전혀 가질 수 없으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영광 안에 있는 생명에 관해 알지 못하며 이 세상의 생명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가공할 일은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할 것이라.”는 말씀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것”의 반대입니다.

이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우리 주님의 역사의 결과로 “생명 안에서의 왕 노릇”함으로서 사망이 더 이상 우리 위에 왕 노릇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정복된 죽음 위에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5.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인의 확신(18~19)

로마서 5~6장의 대 주제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한 원리는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개별적으로 우리를 다루시기도 하지만 우리를 연대적으로 또한 한 총체의 한 부분들로 취급하시기도 한다는 겁니다.

아담이 한 일이 그의 백성들을 위해 확실한 결과를 가져왔듯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도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확실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백성으로 속해 있으며 아담이 우리의 연대적 머리였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백성의 연대적인 머리요 대표라는 개념을 붙잡아야 합니다.

바울의 논증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인류를 이러한 연대적인 방식으로 취급하셨다는 것입니다.

①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스런 사람으로 여겨진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인정되어 죄인의 신분인 옛 신분과 인연은 끊어지고,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② 우리는 이제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생명과 영생의 세계와 그 영토에 속한 사람입니다.

③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요, 이제 내가 죄지을 때 다시 율법을 거역하여 죄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죄수의 행위가 아니라 자녀의 잘못된 행위인 것입니다.

④ 그러므로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관련된 것으로서 진노의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신분입니다. 

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패하고 실수하는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자신을 죄인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6. 율법의 기능(20~21)

사도 바울은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못 박아 두었으며,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 이제 거기서 더 나아가 12절로 시작하는 문단에서는 율법이 우리를 정죄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대인들이 율법이 의롭게도 하지 못하고 정죄조차 하지 않는다면, 율법은 어떤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율법이 주어진 목적이 무엇이냐고 반문해 올 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답변 하고 있습니다.

그 의문이 떠오른 것은 바울이 13~14절에서 사실상 이 점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악하여 율법이 모세를 통하여 공표되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며”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맨 처음 정죄함을 받은 것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 정죄란 이미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입했다(따라 들어왔다)”는 그 말은 율법은 첨가적인 것으로 하나의 특별한 기능을 위해서 때가 차매 들어온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구원의 근본적인 것처럼 근본적이지 않고 그저 들어온 일이요, 첨가되어 따라 들어온 것입니다.

② 율법은 구원의 방도로써 의도된 것이 결코 아니며, 의롭게 되는 것도 불가능하고, 생명을 주는 일에도 불가능합니다. 율법은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세 가지 방식으로 죄를 증가시킬 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❶ 율법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법전화 시켜 죄를 규정하고 죄의 진정한 본질을 깊이대로 이해하고 알도록 도와주며, 무지와 어둠을 재는 척도가 됩니다.

❷ 죄에 대한 자각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나 지적 정보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그릇됨을 알게 합니다.

❸ 그로 인해 후회하게 합니다. 죄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한 행동입니다.

③ 율법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의 면전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거나 그를 위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 의해 모욕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은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지 않았다고 하거나 성자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없었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은 없습니다.

④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주어졌으며 우리를 구원할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절망감을 느끼기까지 죄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을 알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7. 흘러넘치는 은혜(20~21)

우리는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는 첫째 진술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거기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합니다.

① 여기서 “넘쳤다.”는 말씀은 “흘러 넘쳤다”는 개념을 전달해 주며, 이 말은 사실 “삼켰다.”는 말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가 죄의 효력을 없애버리는 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삼켜 버리고 훨씬 위로 초월하여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훨씬 넉넉하여 죄의 효력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고도 남습니다.

 

② 21절은 어떻게 해서 “죄가 더 심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인가 하는 것을 설명해 줌과 동시에 그것은 로마서 처음부터 이 지점까지의 모든 내용에 대한 결정적인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죄가 더해짐에 따라 은혜는 더욱더 넘쳐 그 죄를 삼켜버린다는 것입니다.

죄가 어떻든지 또는 죄가 과거에 인류에게 행한 일이 어떻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행한 일은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같은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자연법칙”이라 부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연 안에서 놓으신 법으로서 존재하며, 이 법칙은 너무나도 정확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발명하여 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전체적인 목적을 향해 유도되어지며, 그 몸의 일원들이 됩니다.

이 위대한 목표는 그의 무한한 은혜 안에 있으며 우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 자신을 개체로 보지 않고 목적과 계획안에서 은혜의 왕 노릇을 보아야 합니다.

은혜는 단지 우리를 돕거나 보조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성취되어집니다.

그것만이 유효적인 우리의 구원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은혜의 힘이란 찾는 것과 살리는 것과 중생시키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지하는 힘”입니다.

은혜의 제지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심하기 전까지도 그들 가운데 나타나는데 그들이 구원이 불가할 정도로까지 자신들을 내버려 두지 못하도록 합니다.

또한 성령을 훼방하도록 절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제하는 은혜의 능력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필요합니다.

그가 유혹에 둘러싸여 있게 될 때 또 그 마음 가운데서부터 나오는 시험 등에서 필요합니다.

⑤ 그리고 우리의 불멸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위태롭게 할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그 은혜의 능력에 대해 감사합시다.

⑥ 또한 성도를 성화하는데 역사하시는 은혜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육체 안에 거하고 있는 죄에 대항하여 나타나는 은혜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귀의 세력을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또한 우리를 깨끗이 할 수 있는데 그 능력만이 우리의 정결을 지킬 수 있습니다.

⑦ 죄는 언제나 빼앗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건강, 행복,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은혜는 나누어 주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미약하고 보잘 것 없이 주는 것이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이 국왕답게 흘러넘치도록 주시는데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받지 못하고 있거나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면 그것은 우리의 수치입니다.

⑧ 그리고 은혜의 왕 노릇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우리에게 지시하신 어떤 특정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행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의 보호하심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잘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피곤하고, 안 되고, 슬픔과 절망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⑨ 은혜의 승리로 인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완성 가운데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이렇듯 은혜의 통치는 우리를 점도 티도 흠도 없이 될 최종적인 완성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질 “새 하늘”“새 땅”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백성들인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실 것과 우리가 그와 함께 있음으로 인하여 그것이 영광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확실히 인도해 가실 영광입니다.

 

 

롬6:1-4   [로이드존스-로마서 강해]

글쓴이: 예수님사랑   08.05.24    http://cafe.daum.net/jesusminuk1004/Hbgu/50

 

 

6장 1~2절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1. 서   론

로마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6장에서 시작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6장을 1~14절과 15~23절의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에서는 다소 순수하게 교리적인 방식으로 율법폐기론의 위험 문제 전체를 다루고 있으며, 두 번째 부분은 반 율법주의로 유도하는 그릇된 추론의 어리석음 교리적인 방식으로 보여준 다음에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서 그것이 전혀 어리석고 이치에 맞지 아니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 우리의 신분(1~2)

① 본문의 “우리”라는 말에서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거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 즉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의 입장을 말합니다.

❶ 사도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독특하고 특수한 지위, 현재 우리가 처한 우리의 존재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❷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서 다시 살게 된 우리의 지위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죄 가운데 거할 수 없다는 논지입니다.

“우리”라는 말은 죄에 대하여 죽어 있는 우리의 현재 상태와 상황입니다.


② 우리가 거듭나고 의롭다 함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죄의 왕 노릇에 대하여 완전히 죽게 되고, 죄의 영토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의 결과로서 우리가 이런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죄의 왕 노릇과 죄의 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이제 우리는 죄의 체계와 통치와 왕 노릇과 그 나라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 은혜의 나라로 옮겨져 은혜의 통치아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져(골1:13) 흑암과 마귀와 지옥의 권세와 그 나라에 속해 있었으나 이제 그로부터 건져내져서 더 이상 그들의 지배아래 있지 않고 은혜라는 다른 통치 밑에 있는 것입니다.


④ 우리는 이전의 체계에서 다른 체계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빌3:20; 엡2:19)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담 안에 있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리는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진 하늘의 시민입니다.


⑤ 이제 우리에게 보증 된 것은 온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이 내게 절대적으로 또 확실하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내가 죄의 통치에 대하여 죽고 은혜의 왕 노릇에 대하여 살아났습니다.

산다는 것은 계속해서 거주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모든 목표인 죄와 죄의 역사와 죄에 속한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권세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감히 죄에 계속하여 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⑥ 우리는 은혜의 통치와 왕 노릇 아래 있으므로 죄에 계속 거주하거나 죄의 삶을 살 수없습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라는 말에서 범하는 것은 계속 산다는 의미로 썼습니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하나니” 그런 다음에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4~36) 이것이 아들이 관계하는 곳에 있는 절대적인 자유입니다.


⑦ 사람이 죄의 개별적인 행동을 전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은 계속해서 죄의 체계 가운데서 거주하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❶ 우리는 법적으로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며, 지위에 있어서 완전히 해방이 되었는데도 느낌으로는 여전히 노예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의 삶의 내제된 기억들 때문인데, 그것은 마치 어린 아들이 자기를 가르치던 종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❷ 우리는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지위와 신분이 옮겨졌지만 옛 습관과 옛 영향으로 인하여 해방된 노예들이 빠졌던 것처럼 우리도 그것을 잊고 마귀의 말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귀를 피하고, 저항하고, 대적해야 합니다(약4:7)


3. 그리스도와의 연합(3~4)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에 대하여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고 질문할 수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로서, 연합의 교리를 설명해 나갑니다.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연합의 교리는 기독교 진리 가운데서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심오하며, 가장 극적이고, 가장 위안을 주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이처럼 큰 확신과 위안을 주는 교리체계는 없습니다.


“세례 받은”이란 어휘의 정확한 의미는

❶ 세례란 생명과 연합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인 인치는 것으로서 이미 성취된 사실을 인정하고 봉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❷ 죄의 생활을 뉘우치고 동시에 새 삶의 길을 서약한다는 것입니다.

❸ 이스라엘이 홍해를 지날 때에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간접적인 의미에서 모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❹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서의 구속적이고 구원하는 효과를 믿는 우리의 믿음의 표라고 해석합니다.

❺ 더 깊은 영적 실재, 곧 우리와 그리스도가 죽음과 장사에서 연합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눈에 보이게 나타난 규례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장사하는 표로 물 아래로 내려가고, 부활하는 표로 물 위로 다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일어난 일을 극적으로 그려주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취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이 지적하는 “세례”는 물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세례를 가리킨다고 할 것입니다.


②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야기 할 때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친히 죄의 체계와 영역과 통치로부터 결별하는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❶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같이 죽음으로서 죄의 체계와 관계와 통시에 대한 관계를 끝낸 것입니다.


❷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을 통하여 그의 장사지냄도 우리는 함께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장례를 지냈다는 것은 죽은 사실을 확실하게 증거하는 최종적인 행위로서 완전히 끝난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왕 노릇과 통치와 그 체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전혀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백성들입니다.


❸ 죽으심과 장사 지냄에 연합된 우리는 이제 그의 부활하심에도 함께 연합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영역, 새로운 관계에서 살아나 새 생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ꊧ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죽음 전에 처하여 있던 모든 것이 영원히 끝났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ꊨ 그리스도께서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영광으로 다시 영화롭게 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ꊩ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결과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시는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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