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스크랩] 칼빈주석. 고린도후서1장 주해/존 칼빈

baromi 2009. 3. 24. 08:54

칼빈주석. 고린도후서1장 주해

 

 

법률가 멜키오 볼마 루푸스에게 드리는 헌사


 먼저 저는 오래 전에 시작된 우리 사이의 우정을 당신께서 얼마나 성실하게 가꾸고 보강해 왔으며, 당신께서 당신의 우정을 증거할 기회가 올 때마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도움을 저에게 할애하셨으며, 당시 저의 소명 때문에 당신의 도움을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얼마나 당신께서 억척스럽게 저의 발전을 위해서 당신의 도움을 제공하셨던가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으뜸가는 이유는 처음 부친께서 제게 법학을 공부하도록 보내셨을 때 당신의 격려와 지도 아래 제가 헬라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점에 대한 기억 때문이랍니다. 그때 당신께서는 가장 탁월한 헬라어 교사였습니다. 제가 더 큰 진전을 보지 못했던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막 시작할 무렵에 부친의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제가 그 과정을 마칠 때까지 당신께서는 얼마든지 저를 도와주셨을 것입니다. 후에 제게 큰 도움이 될 언어의 초보를 확고하게 닦아주셨기 때문에 저는 매우 큰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에 대한 나의 감사를 후대 사람들에게 표시하고, 그와 동시에 저를 위한 당신의 수고가 어느 정도 열매를 맺었다는 점을 당신에게 보여주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546년 8월 1일 제네바에서 존 칼빈

 

고린도후서의 주제

 제 11장에서 그는 고린도인들을 타락시켜 오고 있는 잘못된 열성으로부터 소환함으로써 복음의 순수성으로부터 빗나가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다는 점을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는 그에 대한 존경의 결핍과 다른 지도자들에 대한 호의는 자신의 무슨 잘못이 아니라 그들의 교만과 궤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제 1 장

 

1절. 하나님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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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은 잘못이 있었는데도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체 안에 신앙의 참된 특성이 있는 교회는 비록 그것의 개별적인 회원들에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성도에게'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들은 교회 밖에 있던 성도들인가? 나는 그가 그 지역의 먼 곳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두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대답한다. 이 소란한 시대, 곧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사방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던 시대였기에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먼 곳에 흩어져 있던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6-20).

 

15절. 너희로 두 번 은혜를 얻게 하기......

 첫 번째 혜택은 바울이 18개월 동안이나 그들을 주께 인도하면서 보냈던 점이요, 둘째 혜택은 그가 옴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받은 신앙을 굳히게 되고 그의 거룩한 권면을 통해서 거기에 더 발전을 보도록 자극을 받는 것이다.

 

17절.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물론 이 구절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바울은 변덕을 꾸짖고 자신이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습관적으로 약속한다는 혐의를 벗어버리려는 뜻에서 실제로 이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예와 아니오에 대한 반복은 마태복음 5장 37절이나 야고보서의 말씀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때는 예가 나에게 있어서 예일 수도 있으며 내게 좋아 보인다면 아니오 아니오란 말이냐'하는 식이다. 그와 동시에 이 반복은 기록상의 잘못일 수도 있는데, 그 까닭은 벌게이트가 이 말들을 반복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울의 의미가 파악한다면 여기에 나오는 표현에 대해서 너무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 바울의 의미는 다음에 이어지는 대목에서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18절.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자기에 의해서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변화가 없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 나오는 '말'은 교의를 뜻한다.

 

19절. 우리......하나님의 아들......

 여기에 그의 담대한 주장에 대한 뒷받침이 따르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전파에 영원하고 불변한 하나님의 진리되시는 그리스도 이외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로 말미암아 전파된"이라는 표현은 강조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의 상상력에 의해서 모습이 흐려지게 되고 그의 진리가 그들의 기만에 의해서 더렵혀지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요, 실제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바울은 자신이나 자신의 동료들이 이런 일을 하지 않은 것으로 단언하면서 자기들이 신실하게, 그리고 온전히 정직하게 그리스도를 순수하고 꾸밈없이 제시해 왔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다음으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이 뒤바뀔 수 있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프로테우스처럼 시대에 따라서 다른 모양으로 그리스도를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그리스도를 이처럼 다루는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공을 놀리면서 기교를 부리는 사람들처럼 자신들의 가르침을 가지고 심심풀이로 삼는다. 그런가 하면 어떤 자들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서로 다른 거짓된 가면을 통해서 제시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하루는 이것을 가르치고 다음날은 무서워서 그것을 철회하기도 한다. 바울의 그리스도나 참된 사도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이처럼 다양한 색채로 그리스도를 색칠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종인 것처럼 주장하는데, 이것은 순전히 거짓이다. 요컨대 오직 참된 그리스도는 바울이 여기서 그의 성격으로 밝히고 있는 이 보편적이요, 영구적인 '예'를 보여주는 것뿐이다.

 

20절.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여기서 다시 그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기초가 되신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에 대한 전파가 얼마나 확고부동해야겠는가 하는 점을 확증하고 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보증이 되시는 그 자신이 만약에 불안정하다면 그것처럼 모순된 일도 없을 것이다. 물론 다음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발언은 일반적이지만 그래도 바울의 가르침의 불변성을 확증하는데 적용될 수도 있다. 여기서 그는 복음을 일반적인 용어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자신의 복음에 대해서 이 특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이 확실하고 훌륭한 근거를 가진 것이라면 나의 전파 역시 확실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거기에는 이 모든 약속들을 확고하게 만드는 그리스도 이외에 아무 것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의 유일한 의도는 자신이 선포한 복음이 아무런 생소한 덧붙여지지 않은 순수한 복음이라는 점을 보여 주는 데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의존한다는 일반적인 교의를 곰곰히 생각하도록 하자.


 이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서 주목을 요하는 발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원리,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 대해서 은혜로우신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의 약속들은 우리에 대한 그의 아버지로서의 선의에 대한 증거이다. 따라서 이것들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약속들이 신령한 은혜에 대해 증거가 되는 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무자격한 자들에 대해서도 선을 행하시지만, 이러한 친절에 약속이 덧붙여질 경우 자신을 그들에게 아버지로서 보여주는 것이 그의 특별한 의도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죄에 대한 사면을 얻기 전에는 하나님의 약속을 소유할 수 없으며, 이 사죄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셋째, 하나님의 모든 약속 가운데 으뜸되는 것은 그가 우리를 그의 아들로 입양하신다는 것으로서 우리의 입양의 근원과 뿌리는 그리스도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생자의 형제와 지체 된 자들에게만 아버지이실 뿐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며, 그리스도를 떠날 경우 우리는 그에게 더없이 흉측하고 가증스러운 존재가 되고 만다. 따라서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비준되고 확립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기 이전에는 약속들이 불확실했으며 무가치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데, 그 까닭은 바울이 여기서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창세 이후로 신자들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의 기원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대답한다. 그러기에 모세와 선지자들은 하나님과의 화해, 구원에 대한 소망, 또는 어떤 종류의 은혜에 대해서든 이야기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언급하며, 그와 동시에 그의 나라와 강림을 선포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구약 시대의 약속들은 경건한 자에게 유익한 범위에서 그들에게 성취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어떤 의미에서 지연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그 약속의 성취를 본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였다. 약속을 의미하는 신자들은 그것의 참된 성취를 중보자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미루었으며, 그들의 소망도 그때까지로 미루었다. 간단히 말해서 어느 누구든 그리스도의 사망과 부활의 효과를 곰곰히 생각한다면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확실하게 성취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약속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날인되고 확증된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1:21-24).

 

23절. 내가......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그가 그들에게 가지 않으므로 그들을 아꼈다는 것은 만약에 그가 갔을 경우 더욱더 심각하게 그들을 질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그가 오기 전에 그들이 제 정신을 차림으로써 더욱 더 과감한 처방의 필요성이 없게 되는 편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가 고린도인들에 대한 바울의 아버지로서의 온유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은 그가 얼마든지 그들을 상대로 화낼 수 있었는데도 그들을 꾸중하는 기회로 삼지 않는 것이 그의 큰 아량의 표시이기 때문이다......우리는 또한 그의 맹세의 형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먼저 그는 하나님을 불러 자신의 증인이 되어 주실 것을 요청하고, 다음으로 "내 영혼을 두고"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인간의 지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의심스럽거나 모호한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께 향하며 오직 홀로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진실성을 증거해 주시기를 바라는 경우가 있다. "내 영혼을 두고"라는 말에는 '내가 만약에 거짓말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처벌할지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점이 비록 명백하게 진술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이것을 항상 맹세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설령 우리가 신실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며 자신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요, 그 결과 그의 이름을 모독한 것은 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치게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4절. 우리가......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자신이 그들의 신앙의 주관자가 아니라는 말로써 그는 그러한 지배력이 부당하고 용납할 수 없으며, 교회에 대한 횡포나 다름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신앙은 인간에 대한 그 어떠한 예속으로부터든 완전히 자유로와야 한다......따라서 우리는 신앙에는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전혀 다른 주인이 없어야 하며, 인간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목사들에게 인간의 양심에 대한 특별한 지배력이 없는 것은 그들이 사역자요, 조력자이지 주인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확정된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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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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