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스크랩] 로마서분해1~8장[D.M.로이드존스

baromi 2009. 7. 8. 00:44

로마서분해
(1:1~7)

1. 수신자들과 그들의 배경
우리는 로마서 1:18,19절부터 끝절까지 읽어보게 되면 그 세계, 특히 로마 제국이 어떠한 종류의 삶을 영위했던가에 대해 무언가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해 왔던 대로, 도덕이 땅에 떨어진 무서운 모습을 짐작케 합니다. 이 사람들은 그와 같은 세상에서 빠져나온 그리스도인들로 함게 모였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류의 분위기 속에서 살며 그러한 류의 삶에 빠진 사람들 중에서 나온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게 무서운 환경에 속했던 사람들이 성도로 변할 수 있게 한 것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16절에서 그 한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다른 어떤 것도 로마제국과 로마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산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은 또한 그 일을 해냈습니다. 그 결과 사도는 지금 그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 교회를 설립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거기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본 적은 없었지만, 모든 것을 따져볼 때 주후 58년쯤 이 편지를 쓴 것 같습니다. 그 문제를 사도행전에 세밀히 관찰해 보면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을 마치려 할 즈음에 이 편지를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특히 사도행전 20장과 로마서 16장을 함께 읽어보십시오. 로마서 16장에 열거된 몇몇의 사람들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사는 가이오라 하는 사람과,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문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이 제3차 전도여행이 끝나갈 무렵, 곧 주후58년경에 이 편지를 썼다는 확증이 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요점은 로마교회가 사도바울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가 세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이교회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날에 예루살렘 명절에 여러 제사장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 중에 로마에서 온 사람들도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던 삼천 명 가운데 로마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아마 그들이 로마로 돌아가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메시지를 전하여 자기들의 삶을 통해서 그 메시지를 드러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로마교회가 생기게 된 한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2. 교회의 터와 성격
교회는 그리스도 신자들의 한 모임입니다. 그 모임이 런던에나 로마에나 고린도에나 에베소에나 또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모임은 그 장소에 ‘속한’것이 아닙니다. 그 모임이 그 장소 내에 있을 뿐입니다.
신약이 교회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 ‘교회들’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있음을 일반적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이라는 식으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에 여러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게 문안하면서 ‘그들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고 싶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다른 말로 해서 그들은 어떤 큰 중심적인 건물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간의 집에서 돌아가면서 함께 모인곤 하였습니다. 이 집에서 잠깐, 저집에서 잠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교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집에 있는 교회에 대해서 바울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3. 로마서를 쓴 이유
바울이 그들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땅히 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11절에서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을 견고케 하려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회심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건전하게 회심하고 거듭났다 할지라도 위험한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사도는 마지막 16,17절과 1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순진하고 무식한 신자는 그들의 말에 솔깃하기 쉽습니다. 결국 그래서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리게 될 수 있습니다. 회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견고해지고 세움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이 점이 더 필요한 세대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로마서를 연구해야 합니다. 이 점은 언제나 끈질기게 사람들을 괴롭히는 난제입니다. 그 당시에도 거짓선생들-유대교를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흔들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갈라디아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 다른 선생들의 말을 들음으로써 거의 모든 것을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우리는 회심한 사람들을 견고케 해주어야 한다는 것에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바른 터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없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교훈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이 선신을 연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로마와 다른 지역에 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믿는 것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들은 경지장 안에 있는 사자들에게 던지워졌습니다. 또하 그들의 집은 불탔고 가장 잔인한 억울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사람들답게 참아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누구’를 믿는가 뿐 아니라, 자기들이 ‘무엇’을 믿는가를 알았습니다. 순교자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믿는지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종교개혁당시의 순교자들은 이신칭의의교리가 너무나 사활적이고 주요하기 때문에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그것을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심지어 자기들의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누구’를 믿는 가 뿐 아니라 그들은 ‘무엇’을 믿는가도 알았다는 것입니다.

4. 서신의 분해
로마서를 1장에서 11장까지는 교리적인 부분이요, 나버지 12장부터서 16장까지는 실천적인 부분-이미 설정된 교리를 적용하는 부분입니다.

1:1~15절에서는 우선적인 문안인사를 하고 있으며, 주제를 보편적인 입장에서 도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즉각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와 같이 그주제는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1:16~4장 마지막까지에서는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그의 대주제를 정교화 시켜 나가기 시작합니다. 특별히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의 차원에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일이 무엇인지를 말해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구원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어떤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요, 바울이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행함으로 얻는 차원의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께로서 온 의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의입니다.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인들을 위해서도 주어진 의입니다. 그는 계속 그 위대한 주제를 거론해 나갑니다. 바울이 1장16절에서 4장 마지막까지 바로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첫 번째 요점은 누구나 그것을 필요로 하다는 것입니다-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이 필요합니다. 18절에서 1장 마지막까지 이방인들이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무섭게 그것을 필요로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유대인들도 동등하게 그것이 필요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2장의 논증입니다.
3장1~20절까지 바울은 유대인의 중요성과 특권을 밝혀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어떤한 일을 의도하셨는지 보여줍니다. 저는 그가 유대인의 위치와 율법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3장 마지막 문단인 21~31절까지에서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힘있고 거대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서품 때문에 ‘자기도 위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일을 행하신 방식을 보여줍니다. 다른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4장으로 넘어오면 바울이 또다른 거대한 일을 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4자에서 그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3장에서 말한 방식대로 사람을 다루어 오셨으며,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차원에서 사람을 대하시고 복주셨음을 증거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고상한 믿음을 들어서 이 점을 증명합니다. 또한 같은 것을 말하는 다윗의 시편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원리에 입각해서 사람을 다루고 계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너희는 신앙원리를 포착하지 못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4장의 내용입니다. 4장은 정말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구원의 방식이 새로운 원리를 전혀 도입하지 않고 있음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5장1절에서 8장 마지막까지 사실상 다음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제안하는 바입니다. 곧 이 위대한 구원의 확실성과 온전성과 최종성을 밝히 드러내며 역설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구원의 안전성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성화와 같은 하나의 부수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바울이 그 교리를 어떻게 풀어나가는 지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바울은 5장 2절에서 사실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규례를 따라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가 말해왔던 것을 요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는 말은 ‘영화’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끝이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바로 그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구원에 있어서 절대 안전한 자리에 있습니다. 어째서? 그는 세가지로 답합니다.
먼저 그 구원이 하나님의 행사이기 때문에 안전합니다-그리스도인 자신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시는 방식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안전합니다-그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 그리스도와 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세 번째 확실한 근거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내 안에 계셔서 힘있게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이 세가지 주제를 소개하고 있는 5장 1절로 10절까지에서 그 점이 어떻게 드러났는가를 지적해 보겠습니다. 그 주제들이 처음 열 절 또는 열한 절 속에서 언급된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11절에서 5장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를 특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으니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을 바울은 알리고 있습니다.
6장과 7장으로 나가봅시다. 거기서 이 교훈과 관련하여 제기 될 수 있는 반론과 난제와 논증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는 어떤 사람이 5장 끝까지 들은 다음에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을 상상해 보는 것입니다. ‘바울 당신은 갑자가 무율법주의자가 되었소?’
바울은 ‘난 전혀 그런 류의 말을 말하지 않고 있고’라고 말합니다. 6장과 7장에서 그는 ‘그럴 수 없느니라’는 말로 잘라 말하며 그 무서운 억측을 논박합니다.
그는 무율법주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어떻게 다룹니까? 그는 그것을 이렇게 다루어나갑니다. 공 6장에서는 매우 실제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매일의 삶과 죄짓는 문제의 차원에서 다루어 나갑니다. 그는 자기가 무율법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사람의 말을 변박하고 있습니다. 또한 죄가 믿는 자 안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의 연합했다는 진리를 이해함으로써만 그 죄를 이김을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에 7장에서는 계속 율법의 차원에서 그 문제를 다루어 나갑니다. 바울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복음을 믿더라도 율법을 계속 순종해야만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7장에서 그 문제를 거론하며 ‘보시오, 당신은 율법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멈추어야 하오. 그는 계속해서 죄의 깊이와 능력 때문에 과거에 율법이 어느 사람도 구원할 수 없었으며, 장래에도 아무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7장 하반부의 논증입니다. 전반부에서는 우리를 정죄할 수 있는 율법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고, 후반부에서는 내가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율법지키는 일에 의지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 말을 들어보라 너희를 구원하고, 앞으로 구원하여 끝내 영광에 이르게 할 것은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그 사실이다-그밖에 다른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그것은 위대한 연합의 교리를 다시 그러한 특별한 방식으로 설파한 셈입니다. 그리하여 7장 마지막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바울은 8장의 주제를 그런 식으로 도입합니다. 7장과 8장사이에는 조그마한 틈이나 이음새도 없습니다. 그저 줄곧 계속되어 나갈 뿐입니다. 그는 이 절대적인 확실성을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린느 그 점에 대해서 분명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안전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위해서 그 일을 절대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육체로 인하여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즉, 율법은 그것을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새 법입니다.

5~9절까지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생각을 준다고 말합니다. 10절과 11절에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죽을 몸마저 일으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이 이미 살림받은 것처럼 몸도 죄 가운데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2절과 13절은 우리가 이 지상에 있는 동안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몸의 행실을 능히 죽이게 하실 것이니 우리는 마땅히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근절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즉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14절로 17절까지에서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확신을 줌으로써 그 일을 하신다고 말합니다. 곧 양자의 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18절로 25절까지에서는 성령이 하나님의 위대한 궁극적 목적에 대한 장대한 관점을 줌으로써 그 일을 행하신다고 말합니다.
26절과 27절은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는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여전히 지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내 구원의 안전성이 있습니까? 내 구원의 안정성은 바로 ‘거기에’있습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말입니다.
그런다음 28절에서 8장 마지막까지 그 모든 것을 다시 요약합니다.

5. 로마서 4~8장은 구원의 확실성에 관한 것.
5장에서 8장까지의 전체 주제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전성,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내 종말은 안전하다’는 문제입니다. 그는 이미 5장에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안전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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