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자료

[스크랩] 고린도 후서 주석 (고후 12장)/존 칼빈

baromi 2009. 5. 2. 08:33

제 12 장

 

2절. 셋째 하늘에......

 그는 여기서 천체의 구조에 대해서 정연한 논리를 펴고 잇는 것이 아니다. 여기 3이라는 숫자는 더없이 높고 완벽한 것을 지지하는 완전수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하늘'이라는 단어 그 자체도 여기서는 모든 천구, 궁창, 그리고 이 세계의 모든 구조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복되고 영광스러운 왕국을 뜻한다. 그러나 하늘이라는 간단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바울은 자신이 그것의 가장 높은 곳, 가장 깊숙한 방에까지 이르렀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우리의 신앙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 거기에 들어서며 지식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들은 더 높이, 더 깊이 들어가지만, 셋째 하늘에 닿는 것은 아주 극소수에만 허용되어 왔다.

 

4절.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우리는 이 구절에서 우리의 지식에 대해서 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한계를 지적 받는 셈이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호기심에 빠지기 쉬우며, 그러기에 하찮은 질문에는 정신없이 말려들면서 교화에 도움이 되는 가르침은 경솔하게 지나치거나 단지 건성으로 맛만 보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이 호기심에 우리는 만용과 무모함을 더하며, 그 결과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서 숨겨진 문제에 대해서도 단언할 자세를 갖게 된다.


 이 두 근원에서 수많은 스콜라 신학과 저 어리석은 디오니시우스가 오만스럽게도 하늘의 구조에 대해서 고안해 낸 모든 내용이 솟아 나온 것이다. 우리로서는 주께서 기꺼이 자신의 교회에 계시는 것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으로 우리 지식의 한계를 삼아야겠다.

 

7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이것은 그가 자제하는 둘째 이유로서 하나님께서 자신 속에 있는 온갖 반항심의 징조를 억제하는 뜻에서 자신을 매로 굴복시켰다는 것이다. 이 매를 그는 '가시', 또는 가축을 모는 막대기로 부르고 있다......여기서 이 막대기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바울이 정욕에 대한 유혹을 받았다는 식으로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당치않은 소리이다. 그가 종종 두통을 앓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크리소스톰은 이것이 마귀의 사주를 받고 바울에게 큰 번민을 일으켰던 후메내오, 알렉산더, 그리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관련되는 것으로 본다. 나는 이 구절이 바울을 단련하는 데 쓰여진 서로 다른 모든 종류의 시련을 종합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우리의 신체가 아니라 중생되지 않은 영혼의 부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나에게 나의 육신을 찌르는 회초리가 주어지고 있는 것은 내가 아직 육신에 따른 유혹으로부터 면제될 정도로 영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라는 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사단의 사자'로 부르는 것은 모든 시험이 닥쳐도 우리는 당장 깨어나서 무장을 하고 사단의 공격을 물리쳐야 한다.

 

8절.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는 모든 것은 얻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도하지만 얻지 못하고 있다. 나는 간청에도 종류가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얻는 방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것으로 대답하겠다. 우리는 우리가 확실한 약속을 받고 있는 것들, 가령 하나님 나라의 완성,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 죄의 용서, 그리고 우리에게 유익한 모든 것에 대해서 아무런 제한 없이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증진될 수 있고 또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거나,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데는 여러 가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때마다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이 우리의 안녕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만만하고 주저함이 없이 요청하지만 그 방법을 규정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며, 만약에 우리가 그것의 세목을 정한다면 우리의 기도에는 언제나 그 속에 표현되지 않은 제한이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점을 잘 깨닫고 있었으며, 그의 기도의 의의나 목적에 있어서는 설령 그가 그의 청을 드린 형식에 있어서는 거절을 받았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응답을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요청에 응하시지 않거나 그것을 만족시켜 주시지 않을 때 우리의 기도가 낭비된 노력이라는 식으로 낙심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아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족하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로써 충분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9절. 내게 이르시기를.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그의 은혜로 만족하고 채찍을 거부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잇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고통이 제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있어서 우리를 지지하고 있는 한 우리는 아주 훌륭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을 깨닫고서 그 고통을 견디지 않으면 안된다.

 

14절. 나의 구하는 것은.

 자기 양떼로부터 이득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 참되고 정직한 목회자의 임무이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도 사람들을 우리 자신의 제자로 삼을 목적으로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주목해야겠다. 이득에 치우치거나 목회자들의 직무로부터 혜택을 보기 위해서 그것을 수행하는 것도 나쁘지만, 그보다 더 악독한 것은 제자들의 충성을 개인적인 야심의 여러 이유 때문에 횡령하는 것이다. 여기서의 바울의 의도는 자신이 조금도 부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영혼의 안녕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참으로 우아한 데가 있으니, 이것은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품삯을 추구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내가 너희들의 재물로 만족하지 않고 너희들 전체를 온통 나의 목회의 열매에서 나온 제물로 주님께 바치고자 하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수고를 통해서 그 자신을 부양하는 것은 어떤가? 이렇게 되면 그는 자신의 양떼의 안녕만을 추구하고 그 이외의 것은 거들떠 보지고 않을 것이다. 그에게 사례금이란 하나의 부가물에 불과하고 그의 유일한 목표는 내가 앞에서 말한 그것임에 틀림없다. 그 외의 것에 마음을 두는 자들에게 화가 미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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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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