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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제 8장 초대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2)존 맥아더

baromi 2008. 1. 16. 12:46

8장 초대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2)

존 맥아더

사도행전 10장의 고찰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이 성령 세례가 뒤따른다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종종 사용하는 세 번째 구절은 사도행전 10장이다. 사도행전 10장은 고넬료와 가이사랴 빌립보의 다른 이방인들이 구원받고 성령받은 것을 기록해 주고 있다. 복음은 진실로 “땅끝에까지”(행 1:8) 증거되고 있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간에 골이 있었다면 이방인들과 유대인들간에는 실제적으로 더욱 깊은 골이 있었을 것이다. 이방인 지역을 여행하고 온 유대인들은 반드시 그 발과 옷의 먼지를 털어야 했는데, 이는 이방인들의 먼지가 유대 땅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이방인들의 손으로 요리한 음식은 먹지도 않았다. 어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의 푸주간에서 썬 고기라면 사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한 이상을 보여주셨다. 베드로가 그 이상을 본 직후에 세 사람이 그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찾아와 자기들은 베드로를 만나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는 고넬료라는 사람이 보낸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

베드로는 자신이 방금 경험한 이상을 기억하면서 유대인들의 편견을 떨쳐버리고 고넬료가 살고 있는 가이사랴로 그 이방인들과 함께 갈 것에 동의했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단 한번 복음을 설명했으나 그곳에 참석한 고넬료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베드로와 함께 고넬료의 집에 찾아온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그리고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임”을 듣고 크게 놀랐다(행 10:45-46).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47절).

은사주의자들의 주장과 관련하여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일이 여기에 나타난다. 하나는, 고넬료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 사이에 아무런 간격이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들이 놀랐다는 것이다. 왜? 이는 이방인들이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방언은 무엇보다도 믿지 않는 이tm라엘에 대한 심판의 표시였으나(고전 14:21-22), 하나님께서는 이곳에서 믿는 유대인들에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한 것처럼 이방인들에게도 임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 현상을 반복하셨다.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것과 똑같은 일이 여기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는 변화의 시기였다. 만일 성령과 관계된 눈에 보이는 어떤 증거가 없었다면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이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신자들은 이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베드로는 즉각 그들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10:47). 명백히 베드로는 구원과 세례받는 일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임했던 것과 같은 성령을 받지 베드로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들이 구원을 받았으며 따라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도행전 11장에서 아름답게 이야기되고 있다. 11장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공의회 앞에 서서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는 유대인 형제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신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러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 11:15-17).

이 장면은 거의 유머스럽기까지 한 대목이다. 베드로가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이 보인다. “여러분, 미안한 얘기지만 나도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데 막을 도리가 없었지요!”

공회원들은 큰 충격을 받았으나 일어난 일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냉정을 되찾았으며, 하나님을 찬양했고, 하나님께서 자비롭게도 이방인들에게까지 역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주신 것을 인정했다(행 11:18). 교회는 하나가 되었다. 즉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된 것이다(갈 3:28, 엡 2:14-18).

이 사건들은 역사적인 전환의 시기에 특별한 이유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다. 이방인들은 회심의 순간에 서령을 받았다. 그들이 교회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들은 방언을 말했다. 그러나 그 일은 결코 뒤따라 발생한 일이 아니었다. 엉거(Ung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순절 사건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의미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사도행전 10장은 새로 시작된 시대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새로운 시대에서의 정상적인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원과 성령을 동시에 받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다. 사도 베드로는 현장에 함께 있었으며 따라서 이방인들이 참된 신자가 되었다는 것을 유대인들로 구성된 고의회에 보고할 수 있었다. 동시에 베드로가 그들과 함께 있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했기에 이방인들은 사도적 권위를 인정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그룹 모두가 같은 성령을 받았으며 한 지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9장의 고찰

사도행전 19장은 변화 가운데에 있는 교회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부분 역시 은사주의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받고 방언을 말할 수 있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해 그 근거로 사용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구원과 성령 세례 사이의 어떤 간격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어떤 오순절파들과 은사주의자들은 이 사람들이 여기에 기록된 이 사건 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믿었던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부분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사도행전 19장은 바울이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어떤 제자들”(19:1)이 있었음을 기록해 주고 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바울은 알기를 원하였다(2절).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은 답변이 특이했다.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2절)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이 이어서 질문한 내용이다(3절).

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바울은 그들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렇게 말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4절).

에베소에 있었던 제자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구약의 가르침을 믿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영적 지식은 세례 요한에 머물렀으며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해 들은 후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었을 때 그들은 방언과 예언을 말하기 시작했다(5-6절).

분명히 이 제자들은 성령이나 방언을 구하지 않았다. 바울은 성령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성령의 오심과 관계된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사도행전 19:2을 번역한 대부분의 번역본들은 바울의 질문에 대한 에베소 신자들의 답변이 암시하는 바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우리는 성령이 오셨는지에 대해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그들은 성령에 대해 알았던 것 같다. 만일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따르는 자들이었다면 그들은 그가 성령에 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눅 3:16). 그러나 그들은 성령이 이미 오셨는지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다. 왜?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답변을 듣자마자 바울은 그들을 면밀히 살피기 시작했으며 곧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닌 세례 요한의 제자들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죽은 뒤 20년 동안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려 온 구약의 남은 자들, 즉 변회되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바울이 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했겠는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권함을 받으라. 너희는 요한이 가르친대로 회개했으나 이제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즉 요한 뒤에 오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바울이 이 제자들의 실체를 알게 된 후에 성령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사실을 주목하라. 바울은 그들 모두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면 그들은 성령을 받았을 것이다.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이 오순절 이후 교회에서의 정상적인 과정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얻는 것 이상의 다른 무엇을 얻게 하거나, 두 번째 단계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 에베소 제자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에베소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성령 세례에 대한 지식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임을 깨달았다.

따라서 바울은 에베소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했으며,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었을 때 그들은 방언과 예언을 말했다.

바울은 왜 그들에게 손을 얹었는가? 이는 그들로 더 이상 세례 요한을 따르지 않고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기 위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러면 에베소 신자들에게는 왜 방언이 주어졌는가? 방언은 그들이 비록 옛 언약하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 할지라도 이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교회의 지체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오순절을 경험한 사람들처럼 그들은 이제 새 언약 가운데 사는 자들이 된 것이다.

실제로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는 요 17:21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가 어떻게 응답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요한복음 17:21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가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모든 신자가 하나가 된 것 같이 두 언약 사이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오순절 사건이 그것을 보여주며, 사마리아 사건이, 그리고 고넬료와 다른 이방인들의 구원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여기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에 있는 요한의 제자들을 보게 된다. 그들 모두는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됨은 앞서 살펴본 세 차례나 나타난 기적적인 현상들에 의해 생생하게 확인되었다. 이 사건들은 전교회의 보편적인 방식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1세기 당시 기독교인들의 보편적인 경험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들은 단지 한정된 신자들에 대해 단 한 차례 주어지는 예외적인 표적이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난 뒤 나중에 방언을 동반한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도행전을 강제로 자기들이 만든 신학적인 틀에 끼워 맞추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사건들은 단순히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의 견해를 반영해 주지 않는다.

조셉 딜로우는 우리의 책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우리는 사도들의 경험을 가르치는 비극적인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그 보다 우리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사도들의 경험을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반면에 사도들의 가르침은 오늘을 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을 위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서신서 안에 명백히 제시되어 있다.

사도행전은 새 시대, 즉 교회시대, 성령의 시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준다. 현 시대를 사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믿을 때 성령을 받는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신약의 서신서는 그 같은 사실을 수없이 가르치고 있다.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간구함으로써 은사가 주어진다든지 방언이 그 증거라고 하는 따위의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바울은 성령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기록했다. 그리고 영적인 은사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보편적인 기독교인들의 경험이 사도행전 2장, 8장, 10장, 19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언급은 전혀 없다.

잠시 이야기를 바꿔, 바울은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아 알 수 있는 것처럼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며 그 즉시 기독교인들을 죽이던 자에서 주님의 종으로 변화되었다. 바울은 삼일 동안 장님으로 지냈으며 그 후 아니니아가 그에게 찾아와 그의 눈을 뜨게 하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기 위해” 그에게 손을 얹었다(행 9:17). 재미있는 사실은, 사도행전 9장은 그때 바울이 방언을 말했다는 것을 기록해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에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가 그들보다 방언을 더 많이 했다고 말했다(고전 14:18).

바울은 사도행전이 기록해 주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일어난 경험의 다양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글 어디에서도 먼저 구언을 얻은 뒤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유다나 야고보, 베드로의 글 역시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도도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성령 세례가 잇따라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다.

 

능력을 구해야 하는가, 나타내야 하는가?

사도행전 8:19은 시몬이 성령의 능력을 사려고 하는 것을 기록해주고 있다. 베드로는 그에게 이렇게 답변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

시몬은 능력을 원했으나 그것을 잘못된 방법으로 구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 역시 능력을 원한다. 즉 그들은 더 나은 기독교인으로 살 수 있기를 원하고 있다. 그들은 증거할 능력, 제자들을 만들 능력, 그들이 소명받은 대로 세상에 복음을 전할 능력을 원하고 있다. 이같은 것들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시몬의 사건이 보여주듯이 어떤 사람들은 잘못된 혹은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영적인 능력을 구한다. 시몬은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영적인 능력을 인간의 노력으로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이는 인간의 죄악된 마음을 드러내 주는 것이었다. 많은 은사주의자들이 시몬이 보여주었던 것과 똑같은 이기적인 이유로 영적인 능력을 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몬이 했던 것처럼 종종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을 얻으려고 말이다.

은사주의자들의 입장에 대해 그렇게 비판적이지 않은 마이클 그린은 고린도 교회의 은사주의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했다.

그들 은사주의자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더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만이 기독교s들에게 축복임을 강조했다. 그리스도 외에 무엇인가를 더하려고 하는 가르침은 마치 일부 은사주의자들이 “물론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 외에 성령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자기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 은사주의자들은 항상 능력을 얻으려고 애썼다. 즉 그들은 영적인 능력으로 인해 우쭐대며, 항상 능력을 얻기 위해 지름길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의 답변은 그의 능력이 아닌 그의 약함을 자랑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는 그것을 통해 단지 그리스도의 능력만이 나타나기를 바랬다. 바울은 사도의 표가 표적과 기사와 능력 가운데 있음을 알고 있었다(고후 12:12). 그러나 그는 또한 사도나 혹은 다른 어떤 기독교인들의 능력이 마치 그의 몸에 가시가 있었던 것처럼 고통의 인내로부터, 혹은 선교 여행중에 그가 겪었던 거과 같은(고전 4장) 곤욕과 시련의 인내로부터 옴을 알고 있었다. 은사주의자들은 부활과 그 능력의 신학을 가졌으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다 준 십자가와 그 수치의 비밀을 다시 배울 필요가 있었다(고전 1:18).

그들 은사주의자들은 항상 증거를 얻으려고 애썼다. 그들 가운데 방언과 치유와 이적이 그처럼 높이 평가되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보이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 행해야 한다고 말해 주고 있다. 하나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 어둠 속에서 어떤 증거 없이 그 분만을 의지하도록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신다.

오늘날의 은사주의자들도 똑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처럼 무엇인가를 더 갈망하고 더 큰 능력을 요구하며 증거를 보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보다는 시몬이 구한 성령을 더 구하는 듯이 보인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백히 가르치고 있는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며,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 경험이 어떤 만족을 주건 관계 없이 잘못된 것이다. 능력과 기적적인 증거를 구하는 대신 모든 기독교인들은, 즉 은사주의자들이건 그렇지 않건 똑같이 그의 고난에 참여하며 그의 죽으심을 본 받는 가운데(빌 3:10-11) 그를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그의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롬 6:4-5).

 

성령 세례는 실제적인 것인가, 느낌인가?

성령 세례가 뒤따라야 한다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은 또 다른 문제점을 야기시킨다. 성령 세례가 은혜의 두 번째 역사라는 믿음은 은사주의 운동의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은사주의 작가들과 지도자들은 일반적으로 방언에 의해 입증되는 “세례”가 구원에 이어 나타나는 중요한 다음 단계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신서를 살펴보게 도면 전혀 다른 견해가 드러난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2:13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성령 세례는 실제적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갖는 구원 경험의 중요한 일부분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물세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물세례 의식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로마서 6:3-4과 갈라디아서 3:27에서 영적인 침수와 관련하여 사용한 것과 똑같은 개념의 헬라어 밥티조(baptizo)를 사용하였다.

성령 세례는 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와의 생생한 여s합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받는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가운데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일상적인 삶의 원리를 가져다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영적인 세례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다른 신자들과 연합하게 하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받는 것은 우리 신자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이지 결코 느낌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이 구절의 엄청난 진리가 이제까지 상당히 왜곡되어 왔다.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생생한 사상을 뒤섞고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성령 세례를 통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우리 모두 한 성령을 마심으로써 몸의 생명이 유지케 되었다는 것이다.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마습이라는 이 두가지 사상은 각각의 성도를 그리스도와 다른 지체들에게 연합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성령과의 충족된 관계를 보여준다.

고린도전서 12:13은 “한 성령으로”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은사주의자들이 크게 혼란을 겪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다. 헬라어 원본은 “엔"(en)이라는 전치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에서"(at), "에 의해"(by), "더불어”(with)라는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안에서”(in)라는 의미로 번역하기도 한다. 헬라어 전치사들은 그 전치사에 이어 나오는 단어의 의미에 따라 다르게 번역된다. 고린도전서 12:13의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신약의 문맥과 가장 잘 상통하는 번역은 “에 의해”(by), 혹은 “더불어”(with)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회심할 때 우리는 성령에 의해 혹은 더불어 세례를 받는 것이다.

이 대목은 결코 성령이 세례를 베푸는 자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성경 어디에서도 성령을 세례를 베푸는 자로 말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3:11에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말하기를 그는 그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나 그의 뒤에 오시는 어떤 사람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했다. 계속해서 그는 말하기를, 그 분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고 했다(마 3:11-12).

일반적으로 은사주의자들은 이 구절의 “불”을 오순절 때 보였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12절을 볼 때 요한이 의미했던 것은 심판의 불,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이 분명하다. 오순절 때의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은 명백히 쭉정이를 태우는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심판의 불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며, 그 대리인은 성령이 아닌 그리스도이다(5:22). 따라서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세상에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사람과 꺼지지 않는 지옥 불로 세례를 받을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1:7-8과 누가복음 3:16은 비슷한 내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요한복음 1:33 또한 그리스도에 대해 마찬가지의 내용을 말하고 있다.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다.” 이 모든 구절들은 예수를 세례를 주는 이로 묘사하고 있다.

오순절 날 있었던 설교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우리는 여기서도 역시 그리스도가 오순절 날의 기적적인 사건 속에서 성령을 “부어 주시는”분, 즉 세례자로 묘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바울은 로마서 8:9에서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모든 신자가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았고 또 성령이 거하신다는 사상을 버린다면 우리는 한 몸의 가르침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지체되지 않은 사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에 거하는 자들인가?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자들이 머무는 처소는 어디인가? 기독교인이면서도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자들이 있을 수 있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 바울이 가르치고자 하는 가르침은 모든 기독교인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한 생명의 근원을 소유한, 즉 그리스도가 거하고 있는 한 몸이 된 이들이다.

성령 세례에 대한 은사주의자들의 견해는 실제로 구원의 가르침을 재정의하는 것이 된다. 그들의 견해를 따른다면, 구원은 진실로 영적인 승리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한 가운데 있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더 필요하다. 그들이 종종 모든 신자가 약간의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방언의 증거와 함께 성령 세례를 아직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완전한 능력이 가로막혀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루터교의 유명한 은사주의자인 래리 크리스텐슨(Larry Christenson)의 견해이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고린도전서 12:13의 명확한 의미를 무시한 것 처럼 보인다. 그리스텐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심 이상의, 구원의 확신 이상의, 성령을 갖는 것 이상의 그 무엇 즉 성령 세례가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사실보다 더 인간에게 이해가 안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도록, 혹은 그것을 정의하거나 설명하도록 부름받지도 않았다. 단지 대망의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가운데 그 안에 들어가도록 부름받았을 뿐이다.

크리스텐슨의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고린도전서 12:13의 진리를 받아드리기보다는 오히려 의미가 분명치 않은 어떤 것을 부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받으신 것은 명백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예수께서는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던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셨던 것이다. 크리스텐슨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때때로 성령 세례는 저절로 일어난다. 때때로 그것은 기도와 안수를 통해 일어나기도 한다. 때때로 그것은 물세례 후에, 혹은 그 전에 일어나기도 한다. 때때로 그것은 실제 회심과 동시에 일어나기도 하며 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일어나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즉 성령으로 세례받는 것은 결코 단지 가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누구든 성령으로 세례받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것은 절대적인 경험이다.

이러한 주장을 함에 있어서 크리스텐슨은 진리의 근거를 경험에 두고 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령 세례는 영적인 사실이며 어떤 감정적인 느낌과 결부된 육체적인 경험이 아니다.

 

세례와 충만의 차이는 무엇인가?

은사주의자들과 그들의 글에 대해 계속 연구하다 보면, 그들이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는 성령 세례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을 효과적으로 살게 해 주는 성령 충만에 관해 혼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게 된다(엡 5:18-6:11).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안내해 주는 찰스 헌터와 프란시스 헌터같은 사람들이 그렇다. 찰스 헌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사역하는 사람들 가운데 당신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것은 우리가 사람들을 세례 가운데 이도하는 방법이다.

“당신은 이제 막 성령이 성령 세례 혹은 성령의 선물이라고 부르는 것을 받으려는 중에 있다. 당신의 몸과 같은 크기인 당신의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 완전히 채워지고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당신은 성령께서 공급하고 있는 영적인 언어를 말하게 될 것이다.”

먼저, 사람의 영혼이 그의 몸과 같은 크기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물질이 아닌 영혼은 크기가 없다. 둘째로, 헌터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이 마치 같은 것인 양 말하고 있다. 그것들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에서 발행하는 「오순절의 복음」이라는 잡지는 수십 년간 그 발행인 란에 “우리는 사도행전 2:4에 따라 성령 세례가 모든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다”라는 신조를 실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2:4은 단지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라고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사도행전 2장 어디에서도 신자들이 성령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사도행전 2:1-4은 두 가지 명백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오순절 때 기독교 신자들은 몸 안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러고 나서 성령이 신자들로 하여금 기적적인 증거를 행하도록, 즉 다른 언어를 말하도록 충만히 임했다. 그 순간 신자들 모두가 회심을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우리는 어떻게 충만케 될 수 있는가? 이미 임하신 성령께 복종할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과 충만에 이르게 된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신자다운 삶을 위해 계속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했다(5:18).

성경 어디에서도 기독교인들에게 세례를 위해 기다리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다. 성경 어디에서도 우리들에게 방언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을 주목하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다. 기독교인들은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가르침은 있으나, 이는 성령에 의해 세례받기 위해 기다리라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당신의 삶 가운데 성령의 능력과 충만을 알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주님께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당신 가운데 충만케 되며 당신의 삶은 풍성케 된다(갈 5:25).

신자들은 누군가에게(그리스도) 들어간 자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 안에 누군가를(성령) 소유한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을 소유한 자들이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다(고전 6:19).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몸 가운데 거하고 계신다(고후 6:16).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다. 성령의 약속은 이미 우리에게 충만히 채워져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성경은 명백하다. 더 이상 기다릴게 아무것도 없다. 기독교인들의 삶은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통제에 복종하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을 통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골 3:16).

중요한 사실로서, 신자들이 성령 세례를 받는 방법에 대해 모든 은사주의 교사들이 다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 같은 혼란과 모순이 발생하는가? 은사주의 교들이 성경을 명확하게 인용하지 않고 적당히 해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은사주의 교사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성경이 결코 성령 세례를 받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게 때문이다. 즉 성경은 단지 신자들에게 그들이 이미 성령으로 세례 받았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기독교인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실 중 하나는 이미 성취된 다음의 간략한 두 진술 안에 담겨 있다. 하나는 바울이 말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베드로가 말한 것이다.

“너희는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골 2:10).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전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벧후 1:3).

어떻게?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벧후 1:2).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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