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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제 7장 성령의 은사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2)존 맥아더

baromi 2008. 1. 14. 11:43

7장  성령의 은사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2)

 

존 맥아더

 

고린도 교회 안에서의 은사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성령 은사의 오용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좀더 면밀히 살펴 보자. 성령 은사의 남용은 현대의 은사주의 운동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회에 있어서도 커다란 문제였다. 제 2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에 교회를 세웠던(사도행전 18장)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건강과 영적 생활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 그는 18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교회를 세우고 안팎의 대적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였다.

바울이 떠나자 다른 지도자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을 하기 위해 왔다. 그들 가운데 몇몇 사람은 명성을 얻었으며 몇몇 사람들은 악명을 얻었다. 불행하게도 바울이 떠난 후 몇 년이 못 되어 심각한 윤리적, 영적인 문제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대두되었다. 그 상황이 너무나 심각하여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보낸 첫 편지(고린도전서)에서 오직 그 문제만을 다루고 있다. 분열, 개인 숭배, 배타심, 도덕적 타협과 절망적인 병폐들이 교회를 괴롭혔다. 육욕이 영성을 지배하였다. 성의 악용, 간음, 근친 상간, 간통이 묵인되었고 세속성과 물질주의가 들어왔다. 교회의 성도들은 세속 법정에 서로를 고발했다. 심지어 어떤 붕당은 사도적 권위에 대한 반역을 조장하고 있었다. 교회는 죄악으로 물들어 가는 그 성도들을 훈련시키려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부부간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독처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잘못 이해되었다. 자유가 남용되었고, 우상 숭배가 성행했으며, 이기주의가 판을 쳤다. 교만심이 교회 내에 퍼져 있었고, 심지어 사탄을 숭배하는 의식까지 교회 내로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남성과 여성을 위해 의도하셨던 바를 오용하였다. 주의 만찬을 더렵혔으며 사랑의 축제를 파괴시켰다. 이런 모든 현상을 통해-사람들이 이런 상황 하에서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성령의 은사는 왜곡되었고, 잘못 사용되었으며, 남용되었다.

고린도 교회는 하나의 부패한 교회였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그들이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이교도적 관습으로부터 수많은 악행과 그릇된 일들을 자신들의 교회 생활 속으로 기꺼이 끌어들였다. 그들의 문제는 성령 은사의 부족이 아니었다. 고린도전서 1:7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며, 거짓된 은사 혹은 악마의 은사로부터 어떻게 참된 은사를 분별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특별히 방언의 은사에 관한 문제에서 심도 있게 논의 된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주요 부분들은 성령의 은사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고린도 사람들은 성령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은사주의자들처럼,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무아지경과 무의식적 상태, 혹은 광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상태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교회 앞에 서서 방언으로 이야기 하곤 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예언과 해석을 하곤 했다. 사람이 거칠어지고 흥분하면 할수록 그 만큼 더 영적이고 신령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고린도의 우상숭배

다른 사람들에게 영적인 사람으로 보여지며, 영적인 사람으로 존경을 받으려는 욕망 때문에 방언의 은사는 대단히 남용되고 잘못 사용되었다. 어떤 신도들은 마치 그것이 진짜 방언의 은사인 양 무아지경 속에서 지껄여 댔다. 그것은 절대로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방언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이해했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파했던 때부터 성령은 그들에게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고 계셨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성령의 역사와 신비적 관습을 혼동하기 시작했다. 신비적 관습은 그들이 이교도였을 때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고린도 교회 설립 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고린도 교회의 핵심적인 유대인들 외에도 대부분의 고린도 사람들은 이교적인 관습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

고린도 지방은 철학에 열중해 있던 그리스 문명의 일부였다. 고린도 사람들은 다른 철학자들과의 논쟁하기를 좋아 했으며, 심지어 그들을 존경하기까지 했다. 그곳이 바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12에서 말한 분열과 파벌이 발생했던 곳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린도는 성의 부도덕으로 가장 잘 알려졌다. 그 도시의 이름인 고린도는 “Corinthianiz"(고린도화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써 ”매춘부와 함께 잠자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 고린도의 성적 타락은 극에 달했으며 세계 곳곳에 알려졌다. 성경 주석가인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에 따르면,

계곡 너머로 아크로폴리스 언덕이 우뚝 솟아 있고 그 위에 사랑의 여신인 아 프로디테 신전이 서 있었다. 그 신전에는 일천 명의 여사제가 있었다. 그 사제들은 신에게 바쳐진 매춘부들이었다. 그들은 밤이면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내려와 고린도 거리에서 매춘 행위를 하였다. 그래서 이후에 그리스 잠언에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다. “모든 남자들이 고린도 지방을 여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저속한 도덕성이 고린도 교회로 유입되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책망했다. 그 이유는 고린도 교인 중의 한 명이 아버지의 아내와 불륜의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혼은 심각한 문제 거리였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결혼에 관한 논의에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신비 종교들의 영향

모든 경우에 있어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배경은 신자로서의 신분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위협들 중 하나는 이교도적인 신비 종교의 계속적인 영향력 행사였다. 이교도적인 신비 종교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개종하기 전에 섬겨 오던 것이었다. 그것은 천년 이상이나 그 지역을 지배해 왔다.

신비 종교들은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그 기원은 수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아야 한다. 그것들이 주장하는 많은 가르침과 의식들은 모든 다양한 집단에서 나타난다. 분명히 그것들은 동일한 것을 가르치고 있다. 즉 상호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신비 종교가 하나의 기원, 즉 바벨론에서 시작되었다. 아에 관해서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모든 잘못된 예배 의식은 바벨론의 신비 종교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 이유는 모든 거짓 종교가 바벨탑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바벨탑은 복잡하고도 잘 조직화된 최초의 거짓 종교를 대표했다(창 11:1-9).

함의 손자요 노아의 증손자인 니므롯은 배신한 족장이었다.. 그는 바벨탑의 건설을 계획하고 그것을 지시했다(10:9-10). 전체 계획은 하나의 잘못된 종교 체계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경배를 그릇되이 모방한 것이었다. 그 후로 모든 거짓된 종교 체제는 바벨탑에서 있었던 최초의 배교와 유사한 철학적, 교리적 결속력을 갖게 되었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탑을 쌓는 사람들을 퓨결하실 때 그들을 세상 이곳 저곳으로 흩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벨에서 시작된 거짓 종교의 씨를 가지고 이곳 저곳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정착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그들은 바벨에서 행했던 거짓된 종교 의식을 행하였다. 그것을 사용하면서 약간씩 변형시키기도 하고 첨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후의 모든 거짓된 종교는 바벨에서의 거짓된 종교의 후손일 수밖에 없다. 고대 바벨론의 이교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그 기세를 높이고 있다. 요한계시록 7:5에 따르면, 그것은 마지막 고난의 때를 지배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7:5에서 사도 요한은 바벨론을 자주색과 주홍빛 옷을 입은 신성 모독적인 여인으로 묘사한다. 그녀는 음녀의 어머니요, 세상의 왕들이 함께 음란하는 대상이며, 신성 모독의 이름들로 가득한 여인이다.

확실히 고린도와 같은 번성한 무역 중심지에서는 사람들이 신비 종교의 모든 다양한 형태에 관해 알고 있었고 신비 종교 의식을 행하였다 .심지어 오늘날의 거짓된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들 신비 종교들은 복잡한 의식과 의례를 행하였다. 그것들은 재생을 통한 갱생, 속죄 제물, 축제, 금식들을 포함한다. 또한 신비 종교 신자들은 스스로 손발을 잘라내거나 채찍질을 행했다. 그들은 성지 순례와 공적인 신앙 고백, 헌납, 종교적인 세정식, 그리고 죄에 대해 대가를 치르기 위한 고행들을 믿었다.

그러나, 아마도 ‘무아지경’이라는 말이 신비 종교를 가장 잘 특징지어 주는 말일 것이다. 신비 종교 신자들은 신과 신비적이고 감각적인 교감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왕래하는 상태나 환각 상태, 혹은 최면 상태나 난잡한 주술 속으로 자신들을 집어넣기 위한 일이면 무엇이든 다 했다. 그들은 그런 상태 속에서 신과 감각적으로 교감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은 바울이 에베소서 5:18에서 말했던 것처럼 병적인 행복감을 얻기 위해 술을 사용했다. 실제로 도취 상태였는지 아니면 감각적인 흥분 상태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신자들이 병저긴 행복감 상태로 빠져들었을 때, 그들은 마치 마약에 중독된 상태와 같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시드니에 있는 세인트 앤드류 대한(St. Andrews Colege)의 신약학 교수이자 역사 신학 교수인 앵거스(S.Angus)의 주장에 따르면, 신비 종교 숭배자들이 경험하는 환각 상태는 그들을 “표현이 불가능한 신비한 상태”로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기능을 마비시키며, 인격을 형성하는 도덕적인 노력을 멈추게 하거나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 반면에 그것은 감성적이고 직관적인 것들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숭배자들은 그의 이성이 모호해지고 그 대신 감정이 민감해지는 그런 상태에 빠져들곤 했다. 또한 지성과 양심이 열정과 감성과 감정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했다. 이것이 무아지경, 즉 병적인 행복감에 도취된 상태였다. 앵거스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무아지경은 불면과 금식, 강한 종교적인 기대, 빙글빙글 도는 춤들, 물리적인 자극, 신성한 대상에 대한 묵상, 자극적인 음향 효과, 환각제의 흡입, 재발성의 병폐(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한 것과 같은 경우), 환각, 연상, 그리고 신비 종교 의식에서 사용되는 다른 모든 수단들에 의해 야기될 수도 있다…… 한 고대 작가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서 빠져나가 전적으로 신과 합일되었고 무아지경에 빠졌다.”

신비 종교 숭배자들은 그러한 무아지경을 경험함으로써 일상적인 경험의 차원을 뛰어넘어 불건전한 자아의식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들은 육체가 전혀 영혼의 방해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믿게 되는 그런 미칠듯이 기쁜 상태를 경험한다.

앵거스의 주장에 따르면 무아지경은 “비도덕적이고 열광적인 상태로부터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일체감을 느끼는 단계에까지, 그리고 모든 시대의 신비주의자들의 특징이기도 한 개인의 고통의 해방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무아지경은 영혼을 육체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영의 세계와 교통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터무니없이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만들어 낸다. 그러한 상태에서 아마도 사람은 단지 영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그런 사물들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은 신비주의자들의 무아지경의 상태와 같은 그런 체험을 정확히 묘사해 낸다. 병적인 행복감의 여러 가지 상태를 경험한 은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성령의 어떤 은사, 특히 방언의 은사 덕분으로 돌린다. 그들의 공통적인 고백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너무나 황홀하다. 이전에 결코 느껴보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황홀한 감정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다. 우리는 황홀한 경험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예를 토해서 보게 될 것이다.

 

초대 고린도 교회 방문

신비 종교로부터 갖가지 예배 의식, 예식, 관습, 그리고 다른 유전이 고린도 교회로 스며들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것들이 교회로 스며들 수 있었을까?

1세기에 고린도 지방을 방문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과 당신의 가족이 고린도에 있는 초대 교회를 방문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이 정시에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부유한 사람들에 의해 이미 한 시간 전에 주연이 시작되었으며 이제 막 끝내려는 것을 발견했다고 생각해 보라(고전11:17-22). 당신을 위해 남겨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막 도착하고 있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 또한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부유한 사람들이 탐욕스럽게 마지막 남은 음식 찌꺼기 마저 게걸스럽게 먹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 중 몇몇은 완전히 술에 취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두 집단이 있다. 술에 취하지도 않고 뱃속이 텅빈 상태로 한쪽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집단과, 음식을 실컷 먹고 술에 마취되어 다른 한쪽에 앉아 있는 부유한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러한 구별 때문에 거기에는 논쟁이 있고 나쁜 감정이 있다.

주의 만찬이 있게 되지만 말이 만찬이지 난장판이 된다. 아무것도 곧이어 먹거나 마시지 못했던 사람들은 대식가가 되는 것이다. 다음, 예배 의식에 들어가지만, 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소리치고 떠드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환각 상태에서 지껄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언을 말하려 하고, 말한 것을 해석하려 노력한다.

이것이 초대 고린도 교회의 전형적인 주일날 모습이다. 이제 당신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1:17에서 “너희들은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악한 것을 위해서 모였다.”라고 말한 이유를 이해할 것이다. 그들의 예배는 전체가 광적이고, 모순적이고, 혼란스러운 아수라장이었다. 바울은 그것을 완전히 뜯어 고치기 위해 강하게 책망했다. 바울은 방언의 적절한 사용에 관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다루었던 문제는 오늘날의 은사주의 운동을 혼란스럽게 하는 그런 문제와 같은 것이다. 즉, 어떻게 당신이 참된 은사와 거짓된 은사를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은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신들린 말을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어떻게 당신은 그 차이를 말할 수 있는가? 먼저, 참된 방언의 은사는 통용되는 외국어의 구사 능력이었다(은사Ⅱ 10장을 보라).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방언의 은사가 무아지경 중에 하는 말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코 사탄이 거짓 종교의 손아귀 속에 사람들을 잡아두기 위하여 행하는 것과 같은 그런 유의 은사를 주시지 않으신다.

고린도는 이단 성직자와 여자 성직자들, 그리고 점쟁이와 마술사로 가득 차 있었다. 갖가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사람들은 신적인 능력과 신적인 영감을 주장했다. 고린도 교회가 세속화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이단 활동이 서서히 교회 안으로 흘러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단이 교회 속으로 그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이 성령님께서 가시적이고 들을 수 있으며 접촉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역사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요엘 2:28에 약속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완성되기 시작했다고 믿었으며 초자연적인 현상의 도래를 기대했다.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성령님께서 오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바울 또한 확실히 초대 교회의 오순절에 있었던 놀라운 사건과 다메섹 도상에서의 자신의 회심, 그리고 제 ·1차 전도 여행과 제 2차 전도 여행 중에 있었던 놀라운 표적들에 관해 그들에게 이야기 했다.

사탄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활동에 대한 그들의 열정을 이용했다. 고린도전서는 신약성경의 가장 초기의 편지들 중 하나이다. 이미 그 때 난처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사탄이 신실한 크리스천들을 세속적으로, 오류로, 그리고 거짓된 습관과 같은 것으로 빠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신비적인 모든 것들이 성령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추측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릇된 은사 사용의 소용돌이

오늘날 오순절파의 은사주의는 고린도 교회가 경험했던 것과 동일한 문제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교도 사회이다. 이교도 사회는 그 영향력을 교회에까지 강하게 미친다. 과도한 육욕과 도덕적 타협이 교회 안에 스며들어 왔다 심지어 부도덕과 부패라는 가장 성결치 못한 모습들이 최고 수준에 있는 은사주의 지도자들에게서 표면화되고 있다. 현대 은사주의 지도자들의 태도와 고린도 교회에 만연했던 사상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서 추방되어야만 했던 사상이었다.

현대 오순절 운동의 지도자 중 하나 사람과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당신도 내가 경험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글쎄요, 한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당신은 어떠한 경험을 하게 될 때, 당신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 경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는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그것이 사탄의 것일 수도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마지 못해 “그렇소”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당신은 그 차이점을 구별합니까? 설명해 주시지요.”

그러자 은사주의 지도자인 그 친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정확히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상황과 같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온 것이 아닌지 알지 모했다. 성령의 사역은 이교의 무아지경의 상태와 혼동되었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했따.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에서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라고 말한다. 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알기를 원했는가? 만약 교회가 성령의 은사를 잘못 사용하면 성화되지도, 성숙되지도 못하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없이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사탄은 가능하면 언제나 자신의 행위를 성령의 은사로 위장한다. 또한 사타은 성령의 은사에 대한 그릇된 관념과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한다. 교회에 혼란과 혼동을 야기시키기 위함이다. 그러한 일은 고린도 교회에서도 일어났고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다

사람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2에서 말한 것과 비슷한 상황 속에 휘말리고 있다. 고린도전서 12:2에서 바울은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개종하면서 등을 돌렸던 이교 숭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 즉, 잘못된 제도의 희생자들이었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희랍어 동사 “아파고”(apagō)는 마치 죄수와 같이 어떤 사람을 끌고 다니는 것을 지적할 때 사용한다(마 26:57; 요 19:16).

고린도전서 12:2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아직 이교도로서 우상을 숭배할 때 신비한 환상 속에서 악령에 이끌려서 생활했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제 그들은 이교에서 행했던 의식을 교회 속으로 유입시키고 있었으며, 악령이 그리스도께 경배하는 자리에 침투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무엇이 진정한 믿음이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무엇이 사탄에게서 온 것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어TEk. 그들은 열성적으로 추자연적인 것을 신봉했다. 따라서,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무엇이 사탄에게서 온 것인지를 구별할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추악한 혼란뿐이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말 그대로 사탄의 행위를 성령의 사역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이교도처럼 그들은 비이성적이고 환각적이며, 야단법석떠는 행위에 몰입해 들어가곤 했다. 그러나, 그것을 진실한 성령의 은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정말 영력 있는 사람은 황홀감, 무아지경, 그리고 감성적인 광란들 속으로 빠져드는 사람이 아니다. 성령 추안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죽은 듯이 꼼짝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의 사역은 아니다.

성경의 그 어디에서도 어떤 사람이 자제력을 잃었을 때, 그리고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사로잡혔을 때, 바로 그때 성령의 은사가 주어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의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인들을 극도의 황홀경이나 졸도 상태로, 혹은 정신 없이 열광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성령의 열매는……절제”(갈 5:22-23)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 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우리는 어떻게 기묘한 일들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서 일어났는지에 관한 힌트를 고린도전서 12:3에서 얻는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는 놀라운 말씀이다. 말 그대로, 신자인 척 하는 사람이 교회 중에 일어서서 성령의 은사를 가장한 영적 은사를 행하며 예수를 저주했다는 말씀이 아닌가!

이제 분명한 것은, 어떤 이가 “예수, 그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의 은사 행위는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것에 관해 무지했다. 왜 그러했을까? 내용보다 현상에 근거하여 진정한 성령의 은사를 판단하는 것이 그들에게 가능한 일이었을? 예배 모임이 더욱 무아지경이 되면 될 수록, 그리고 병적인 행복감이 만연하면 만연할수록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눈에는 성령님의 충만하신 사역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아무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 분별 수준은 낮은 것이었다. 그들은 성령님께로부터 온 것이 무엇이며, 사탄으로부터 온 것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에 관해 많은 주장들이 있다. 아마도 가장 그럴 듯한 주장 중에 하나는 교회로 조용히 들어온 이단과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 이단은 신약의 교회 전체에 들어와 이미 역사하고 있었다(요일 2:22; 4:2-3). 그것은 예수님의 신성과 그의 구속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2세기에 영지주의는 그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예수를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로 표기하고 있다) 저주할 자”(고전 12:3)라는 말을 주의해 보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오의 영과 인간 예수를 구분하는 이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는 후에 영지주의의 중심적인 교리가 되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죽으심 바로 직전에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님을 떠났고, 예수님은 저주 받은 죄인으로 죽었다고 가정한다.

그것은 부활에 관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생각에 혼란을 야기시킬 수도 있었을 그런 종류의 오해였다. 분명히 어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예수께서 육체적으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는지에 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위험한 혼란을 막기 위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을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 것이며”(고전 15:14)라고 편지했다.

특정한 교리적 문제가 무엇이든간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혼란의 깊이는 당시 그들 중에서 행해지던 많은 환각적이고 기적적인 현상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령의 은사는 아니라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오직 가치있는 것만이 위조된다

만약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지칭했다면, 그들이 성령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는 영적인 은사들은 가짜인 것이 분명하다. 내가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다. “어느 누구도 가치 없는 것을 위조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잡동사니들을 위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돈을 위조하며, 다이아몬드와 보석을 위조한다. 위조하는 사람들은 가치있는 것을 위조한다. 가치가 위조할 유일한 대상물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고리도 교회에서 성령의 은사를 위조하느라고 바빴고, 오늘날도 동일한 일을 하느라고 바쁘다.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은사주의 운동 전체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발견했던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은사주의 운동 지도자들은 징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성경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린도 교회를 파멸시키려했던 것과 동일한 잘못을 핵심 교리로 삼는 체계 속에서 봉사하고 있다.

비은사주의 지도자들은 이런 문제를 의무적인 화합을 위해 덮어두려고 해서는 안된다.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들의 영적 은사를 오용하고 있다고 책망했다. 그는 성령의 은사가 위조되고 파괴되면 그리스도의 몸이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탄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을 혼동케 한다. 바울 시대에도 그랬고 오늘날도 여전히 그렇다. 위조품을 용인하면 진품을 위조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반드시 진품과 위조품을 구별해야 한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바르게 사용되고, 성경이 정확하게 해석되고 가르쳐지며, 신자들이 절제로서 성령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만이 올바르게 설 수 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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