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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 8장 초대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존 맥아더

baromi 2008. 1. 16. 12:46

제 8장 초대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1)

존 맥아더

 

앞에서 누차 살펴보았듯이 은사주의 신앙 체계의 주된 토대는 경험이다. 경험은 또한 은사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가르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하는 권위이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경험 중심의 접근은 성경을 다루는 방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사도들의 경험을 기록해 놓은 책인 사도행전은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을 성경적으로 입증하기 위해 가장 빈번히 연구하는 책이다.

사도행전은 서신서와는 달리 설교적인 성격의 역사 기록으로서, 갓 태어난 교회의 경험을 서술하고 있다. 반면에 서신서는 교회가 이미 설립된 시기의 신자들을 위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성경을 깊이 상고했던 기독교인들은 그 차이점을 인식하였다. 즉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교회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된 성경 구절들로부터 그들의 가르침의 중심 사상을 끌어냈다. 그들은 사도행전을 사도 시대의 영감받은 역사적 기록으로서는 이해했으나 그곳에 기록된 모든 사건 혹은 모든 현상을 전 교회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에 서술되어 있는 경험들을 갈망하면서 사도 시대의 특별한 사건들을 성령 역사에 필수적인 특징으로 보았고 그것을 교리 체계로 받아들였다. 즉, 그들은 그와 같은 사건들을 모든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일상적으로 기대할 만한 영적 능력의 표시로 보았던 것이다.

그와 같은 심각한 해석상의 오류는 성경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손상시키며, 은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있어서도 결정적으로 성경의 여러 대목을 혼란케 만든다. 그 자신이 은사주의자이기도 한 고든 피(Gordon Fee)는 은사주의자들이 전형적으로 사도행전에 그 근거를 두는 방식에 대하여 그 해석학적인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썼다.

만일 초대 교회가 보편적인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 것에 대한 기록 또한 보편적인 것인가? 혹은 서술적인 부분만을 전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만일 그렇다면 그런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예를 들면 우리 사도행전 1:26에 따라 제비 뽑기로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는가?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나 기독교인의 경험을 이해함에 있어서 앞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들은 정확하게 어떤 역할을 행하는가?

그러나 사도행전은 결코 교회의 교리를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초대 교회에 대해 기록해 주는 것으로, 옛 언약으로부터 새 언약으로 전환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사도적인 치유, 기적, 표적, 기사 등의 사건은 그 당시에서조차 보편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각기 특별한 목적을 지닌 특별한 사건들로서 항상 사도들의 사역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앞부분에서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 기적들의 빈도는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의사 누가에 의해 기록된 사도행전은 매우 중요한 시대를 담고 있는 것으로, 오순절에 시작된 교회에서부터 삼십년 후 제 3차 전도 여행을 마친 바울이 옥에 갇힌 내용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은 많은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거의 모든 장에 걸쳐 그 같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즉 옛 언약은 사라지고 새 언약이 충만하게 나타나고 있다. 바울 또한 그 가운데 포함되었다. 즉 그가 비록 새 시대의 사도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는 옛 것에 묶여 있었다. 유대인의 서원을 행하는 모습이 그것을 보여준다(행 18:18; 21:26).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회당에서 교회로, 율법에서 은혜로의 변화를 보게 된다. 교회는 유대인 신자들의 모임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형성되어졌다. 사도행전 초기에 신자들은 옛 언약 아래 하나님과 관계했었다. 그러나 뒤에 가서는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며 새 언약 아래 살면서 성령에 의해 새롭고 독특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역사상 특별한 시대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그 안에 나타나고 있는 변화들은 결코 반복될 수 없는 것들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가운데서 모든 교회에 대해 보편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가르침들은 명백하게 성경의 다른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은사가 뒤따른다는 교리

사도행전 2:4은 많은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이 신약의 핵심된 진리로 보고 있는 은사의 시금석과도 같은 구절이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은 구절이 기독교인들이 회심할 때 단지 제한된 의미의 성령을 받음을 가르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높은 단계의 영적인 삶을 가지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능력 가운데 들어가는 성령 세례를 구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 경험은 흔히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라고 말하는데 방언을 수반하며 그 결과 새로운 영적인 변화와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구원을 받은 후 성령 세례를 경험하는 것은 종종 뒤따라 일어나는 일로 언급되었다. 고든 피(Gordon Fee)는 오순절의 두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기j록한다. “첫째, 기독교인에겐 구원의 경험에 이은 그러면서도 그것과는 별도의 성령 세례가 있다. 둘째, 처음으로 나타나는 성령 세례의 신체상의 증거로는 방언하는 것이다”

오순절 신학을 철저하게 고찰한 프레데릭 데일 브루너(Frederic Dale Brun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순절파에서는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나(회심)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자들을 성령으로 세례 주시지 않으셨다(오순절)고 믿는다.” 은사주의자들은 구원의 경험 이후 어느 시점에 이르면 성령의 세례가 일어난다고 믿는다. 브루너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오순절파가 이해하는 성령 세례의 가장 중요한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1)성령 세례는 일반적인 중생과는 “별도의 사건이며 잇달아 발생하는”사건이다. (2) 성령 세례의 첫 증거는 다른 방언을 말하는 것이다. (3) 성령 세례는 “전심을” 구함으로써 일어난다.

이 세 가지 요소, 즉 회심 이후에 성령의 세례가 뒤따른다는 것과, 그 같이 되기 위해서는 전심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방언을 말하는 것이 그 구체적인 증거라는 세 요소는 거의 모든 은사주의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대부분의 다른 신학 분야에 대해서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이 명료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 부분 만큼은 그들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 대개 명료하게 언급하는 편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은사가 뒤따른다고 하는 그들의 교리를 입증하기 위해 주로 사도행전을 많이 예로 든다.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은 단순히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 성령에 의해 세례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므로 그들의 주장을 증명하는 것으로 사용될 수가 없다. 오히려 고린도전서 12:13에 묘사된 성령 세례는 구원 이후의 다른 어느 시점에 일어날 수 없음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말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방언과 같은 증거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세례를 구하라는 어떤 요구도 나타나 있지 않다.

은사주의자들은 또한 고린도전서 14장을 그들의 세 가지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대목으로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장은 방언 은사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상 은사주의자들이 그들의 교리를 입증하기 위해 내어 놓을 수 있는 구절들은 사도행전에 있는 것들 뿐이다. 서신서는 그들의 가르침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실은 사도행전에서 조차 은사주의자들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지 않다. 단지 4장만이 방언이나 성령을 받는 것에 대한 언급이 있다. 사도행전 2장, 8장, 10장, 그리고 19장이 그것들이다. 그 중에 신자들이 구원 이후에 성령을 받는 것은 단지 2장과 8장에만 나타나며, 10장과 19장은 신자들이 믿음을 가짐과 동시에 성령 세례를 맏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은사가 부수적으로 뒤따른다고 하는 교리는 사도행전에서 조차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고 있다.

방언의 경우는 어떤가? 사도행전 2장과 10장 그리고 19장의 경우 신자들은 방언을 말했다. 그러나 8장에는 방언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다.

성령 세례를 전심으로 구하는 것은? 사도행전 2장에서 신자들은 단순히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약속을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약속을 기다렸을 뿐이다(1:4, 14). 8장, 10장, 19장 어디에서도 그와 같은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분명하다. 사도행전이 성령을 받는 일반적인 유형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은 한 가지 문제를 무시하는 것이다. 즉 사도행전은 결코 일관된 유형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순절 때 기독교인들이(행 2장),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인들이(10장), 그리고 에베소에서 단지 요한의 세례만 알았던 유대인들이(19장) 각기 성령을 받고 잇달아 방언을 말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모든 기독교인들의 표준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대목들 중 (사도행전 2장, 8자으 10장, 19장) 어디에도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의 경험을 가져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만일 방언이 보편적인 경험이라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것을 기록해 주고 있는 사도행전 8장에는 왜 방언이 언급되어 있지 않은가? 또한 사도행전 2장에서 4장까지의 내용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신자가 된 사람들이(사도행전 4:4에 의하면 5천명이 넘는) 성령을 받은 후(행 2:38) 방언을 말했다고 왜 기록해 주고 있지 않은가? 무엇인가가 보편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존 스타트(John Stott)는 다음과 같이 추론했다.

3천 명이 같은 현상의 기적을 경험했던 것 같지는 않다(강한 바람 소리, 불 같은 혀, 혹은 다른 나라 방언). 적어도 이런 것들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다. 그러나 베드로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확증으로 인해 그들은 같은 약속, 같은 선물을 받았음에 틀림없다(33, 39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에는 이러한 차이점이 있었다. 즉 120문도의 경우 그들은 이미 새롭게 변화된 자들로서 열흘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린 결과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반면에 3천 명은 불신자들이었던 자들로 죄의 용서함과 더불어 동시에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이 회개하고 믿는 일은 기다릴 필요 없는 즉시 일어난 일이었다.

두 무리, 즉 120문도와 3천 명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오늘날에 해당하는 표준으로는(종종 생각하는 것처럼) 틀림없이 전자가 아닌 후자, 즉 3천 명의 경우이기 때문이다. 120문도의 경험이 독특하게 두 단계를 거친 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정황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들은 오순절이 되기 전에는 성령의 은사를 받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역k적인 정황은 오래 전에 끝났다. 우리는 3천 명의 성도처럼 오순절 사건 이후의 시대에 사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경우처럼 우리 역시 죄의 용서와 성령의 “세례” 혹은 “은사”가 동시에 주어지게 된다.

 

사도행전 2장의 고찰

물을 것도 없이 사도행전 2장은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이 성령 세례에 대한 그들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사용하는 구절이다. 교회의 기원에 대한 누가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1-4).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잇달아 성령 세례가 일어난다고 하는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려고 한다.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1-4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와 방언을 경험한 사도들이나 다른 제자들이 이미 구원을 받았던 사람들임을 지적한다. 그러한 자들이 바로 오순절 때 성령의 능력을 받았던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한 은사주의자들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 없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에 언급되어 있는 제자들-혹은 적어도 그들 중 일부-이 구원을 경험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가 있다. 아마도 11명의 사도들을 포함하여 사도행전 1장에 기록되어 있는 다락방에 모였던 120명도 모두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가 구원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께서 그의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했었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 15:3). 그들의 구원을 확증하고 있는 구절임에 틀림없다.

대부분의 은사주의자들은 제자들이 또한 오순절 전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 20:21-22은 다음과 같이 기록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이 부분에 대한 은사주의자들의 정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미 성령을 주셨으며 오순절의 사건은 그보다 높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 실제적인 능력을 준 것은 보다 높은 수준의 성령의 세례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복음 20:21-22의 바른 해석인가? 은사주의자들의 견해는 면밀히 검토를 거치지 않은 데서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구절은 제자들이 실제적으로 성령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오순절이 되기까지는 성령의 강림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한 것은 단순히 “성령을 받으라”라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의미하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단지 오순절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것에 대한 약속 혹은 보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크리소스톰(A.D 345-407)을 비롯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이 보았다.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는 요한복음 20장의 말씀은 제자들이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지 못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로부터 8일 후 그들이 두려움에 문을 잠근 채 숨어 있는 장소로 예수께서 찾아오셨다(20:26). 예수께서 그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약속한지 일주일 이상이 지난 후였다.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보이기 위해 어느 곳에도 가지 않았으며 또 아무 능력도 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증거는 사도행전 1장 앞부분에서 나타난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4). 계속해서 예수께서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5절). 4절의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은 요한복음 14:16의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언급하는 듯하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요한복음 20:26에서 예수님에 의해 되풀이 되어졌으나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다. 이때도 제자들은 여전히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도행전 1:8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능력을 받는 것은 명백히 성령을 받는 것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으며 약속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가운데 있었다. 만일 성령이 요한복음 20장에서 그들에게 임하였다면 이미 능력이 주어졌을 것이며 따라서 더 이상 무엇인가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순절이 되기까지 제자들이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음을 다른 두 군데 성경 구절에서 더 찾아볼 수가 있다. 요한복음 7장과 16장이 그것이다. 요한복음 7장은 예수께서 초막절 때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내게로 와서 생수를 마시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기자는 39절에서 예수께서 성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였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구절은 분명하게 예수께서 영광을 받기까지 성령이 오시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승천 후에야 영광을 얻으실 수가 있었다.

또한 요한복음 16:6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음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승천하심으로써 그들에게서 떠나가셨다.

그러므로 성경을 철저히 상고하게 되면 예수께서 요한복음 20:22에서 말씀하신 것이 단순히 성령에 대한 약속이었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제자들은 그 당시 여전히 성령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 모든 사건이 변화의 시대에 일어났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명백한 교체가 일어나고 있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알았고 또 그를 믿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구약을 믿는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오순절 때 성령이 도래하기까지는 성령의 영원한 내주에 대해 경험할 수도 이해 수도 없었다.

성령 세례를 위해 전심으로 구해야 한다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비록 120문도가 다락방에서 기대와 흥분 가운데 기도하고는 있었지만(행 1:4), 그들이 성령을 간절히 구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는 데 있어 제자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이란 단지 약속의 주권적 성취를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사도행전 어디에서도 성령이나 방언을 받기 위해 간구했다는 대목을 찾아볼 수 없다. 8장에도, 10장에도, 19장에도 성령을 구하는 것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다. 또한 안디옥 교회의 신자나 갈라디아, 빌립보, 골로새, 로마 데살로니가, 혹은 고린도 교회에 있는 신자 주 누구도 성령이나 방언을 위해 간구했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다. 사도행전 가운데서 성령으로 충만하고 방언을 말한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는 대목들을 연구해 보라. 그 같은 현상이 일어난 부분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경험을 위해 초대 교회의 신자 중 누군가가 간구했다는 기록을 단 한 군데도 찾아볼 수가 없다. 프레데릭 데일 부루너(Frederic Dale Bruner)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했다. “이것이 방언과 함께 성령 세례를 특별히 구해야 한다고 믿는 오순절파의 주장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는가?”

오순절 때 성령이 오심으로써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게 되었다. 즉 그때로부터 신자라면 누구든지 믿음을 가지는 순간부터 성령이 오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다. 로마서 8:9은 그 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모든 기독교인이 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다 한 성령을 마셨다고 주장하는 것이다(고전 12:13).

사도행전 2:3-4은 성령의 실제적인 도래를 기록해 주고 있다. 제자들은 각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2-3절). 그때 모든 사람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졌으며 각기 다른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에 모인 모든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를 말하는 그 놀라운 언어는 특별한 목적을 지닌 것이었다. 즉 그것은 믿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심판의 표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한 교회 내에 다른 무리가 들어옴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아울러 사도들의 영적인 권위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방언의 목적에 대한 보다 깊은 논의를 위해서는 은사Ⅱ 10장을 보라).

사도행전 2:5-12은 그곳에 있었던 유대인들(“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들”)이 놀랐다고 기록해 주고 있다. 그들은 이같은 놀라운 이적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였다. 베드로가 서서 설교하자 3천명이 믿고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순간 3천명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2:38).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3천명이 제자들의 경우처럼 방언을 말했다는 기록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사건은 독특한 이적이었다. 그것은 교회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오순절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특별한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기를 원하셨다. 그랬기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던 것이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 때문에 그들이 방언을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처음 성령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경험한 사건이 유일하고도 극적인 사건임을 알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와 다른 종교로부터 예루살렘에 나아온 순례자들이 각기 그들의 말로 메시지를 듣기를 원하셨다. 교회가 탄생했으며, 이것은 새로운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메릴 엉거(Merrill Ung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순절 사건은 세상과 인간의 창조 사건처럼 반복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처럼 오직 한번으로 끝나는 사건이다. 이것은 다음 몇 가지 단순한 사실로부터 명백해진다. (1) 하나님의 영은 한번 이땅에 오셔서 교회 가운데 그의 거처를 가지실 수가 있었다. 바로 오순절 때 그렇게 하셨다. (2) 하나님의 영은 한번 교회 안에 들어와 그 안에 머무르실 수가 있었다. 바로 오순절 때 그렇게 하셨다. (3) 그 사건은 특별한 때(행 2:1) 특별한 장소에서(행 1:13, 14)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고전 12:12-20) 특별한 구약적 유형의 성취 가운데서(fp 23:15-22) 일어났다. 그 사건은 한번 시작된 새로운 질서를 계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단 한번만 일어날 수 있는 이 사건을 모든 시대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사도행전 2장에서 일어난 사건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물론 그 같은 현상들은 오늘날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1976년에 은사주의자들은 “계속되는 오순절의 기적”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세계 대회를 열었다. 주목할 만한 일은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이 자기 나라 말로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역자들과 헤드폰이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이 그들의 교리를 주장하는 근거로 사도행전 2장을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사실은 이 시대의 은사 현상은 오순절 때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8장의 고찰

은사주의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또 다른 대목은 사도행전 8장이다. 사도행전 8장은 교회에 가해지는 핍박과, 유대와 사마리아로 제자들이 흩어지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로인해 사마리아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다음은 사도행전 8:14-17의 내용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은사주의자들이 이 내용을 성령 세례가 뒤따른다는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것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 예수의 이름을 세례를 받았으나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다. 분명히 성령 세례가 뒤따르는 것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있었다고 해서 성령 세례가 뒤따르는 것이 전 시대에 적용될 수 있는 원리로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구원과 그들의 성령 받은 사건 사이의 간격은 그들이 두 언약이 교체되던 시대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간의 적대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만일 이들 사마리아 사람들이 어떤 초자연적인 표적이나 과시 엇이 구원과 동시에 성령을 받았다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간의 불화는 기독 교회안에서도 계속되었을 것이다. 오순절 사건은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것이었다. 따라서 오순절 때 탄생한 교회는 배타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만일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들만의 기독교 모임을 출범시켰다면 그들간의 오랜 적대 감정과 경쟁 심리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이방인들의 모임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쟁과 함께 오래 계속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사도들이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 이르렀을 때 그들에게 성령을 허락하셨다. 논란의 여지가 없도록 모든 사람이 볼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새 언약 아래서의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 민족을 높이시되 사마리아 사람들까지도 한 교회 안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사도들의 능력과 권위를 인정하는 것 또한 중요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아는 것이 중요했으며, 사마리아인들에게 있어서는 유대인 사도들이 신적인 진리의 통로임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사도행전 8:16의 한 부분을 살펴보면 이 사실은 더욱 명료해진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아직…… 없고”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 우데표 “oudepo”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단순히 일어나지 않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났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과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된 것 사이에 간격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초대 교회 당시에 진행중이던 중요한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 간격은 분명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새로운 일을 행하고 계신 것을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도 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의해 교회 가운데 받아들여진 사실이 사도들과 모든 다른 유대인 신자들에게 증거되었다. 그들은 같은 그리스도, 같은 구원, 같은 성령을 받았으며,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똑같이 받아들여진 자들이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같은 사도들의 권위 아래 있게 되었다.

프레데릭 데일 부르너는 사마리아인들이 교회 가운데 들어온 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것은 평범한 사건이 아니었다. 사도행전 10장의 이방인의 수용과 같은 사건이었다. 사마리아는 건너야 할 다리이자 점령해야 할 터이기도 했다. 즉 사마리아는 가장 깊은 균열을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뛰어넘어야 할 다리였으며, 교회가 더 이상 예루살렘에 혹은 단지 유대인들 가운데서만 안주할 수 없었기에 선교를 위해 점령해야 할 터였다.

우리는 신약의 여러 기록을 통해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감정을 알고 있다. 또한 유대인 교회에 이방인들이 들어오도록 고통스럽고도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사도행전 ·10-11장, 15장의 중요한 기록도 알고 있다. 오순절 이래 다른 모든 곳에서 성령 세례와 성령의 선물이 하나로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분명하게 이 둘이 구분되어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사도들에게, 그리고 멸시받는 사마리아인들에게, 더 나아가 현재와 미래의 전 교회에 대해 신적인 의지를 명백하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 신적인 의지란,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선물을 주심에 있어 어떤 편견도 없다는 것이며, 복음은 믿는 곳이라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 지금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가 베풀어지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사마리아에서처럼 성령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것,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성령의 선물은 거저 주어지는 것일 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같은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사실을(이것이 복음의 사실이었다)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이 그들 자신의 눈으로 와서 보기까지, 그리고 어떤 공로나 종족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29절)을 나눠줌에 있어 그들 자신의 손을 도구로 사용하시기까지 그의 선물을 잠시 보류하셨던 것이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주어지는 놀라운 재현이 사마리아에서 일어났고, 그것도 처음 사마리아에서의 그 놀랄 만한 재현은 이 소외된 사람들에게 성령의 선물이 주어짐으로써, 그것도 처음 유대인 신자들에게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어났다. 이것은 “사마리아 오순절”이 아니었으며 단시 교회의 성장을 위한 중요한 단계였다. 단지 한번의 오순절 사건이 있었을 뿐이며, 따라서 이 사건이 오순절 사건에 다른 무엇을 결코 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교회에 대해 중간에 막힌 담이 헐어졌음을(엡 2:14-15)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메릴 엉거(Merrill Unger)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사마리아 오순절”로 불릴 수 없다. (1) 오순절 사건은 반복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 안에 성령께서 영원한 거처를 정하시기 위해 강림하셨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령은 거처를 갖기 위해 또 다시 오실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새 시대에 대해 단 한번만 주어지는 사건이었다. (2)어느 누구도 처음 오순절 때 주어진 것처럼 성령을 받을 수 없다. 그것은 그때 단 한번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오순절은 새 시대의 시작이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건은 새시대를 여는 것이 아닌, 이미 열린 그 시대의 영적인 축복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었다

사마리아 사건은 탄생이 아닌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순절 사건처럼 단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의 특권이 주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특권이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시몬의 반응이 보여주듯이, 어떤 초자연적인 표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람 같은 소리나 불의 혀같은 것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지 않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8:18-19). 진실로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이 두 교회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같은 사도적 권위 아래 같은 성령을 지닌 한 교회가 있었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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