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리칼럼>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를 우리가 넘어설 수 있는가?
우리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가? 엉뚱한 말인 지 모르지만, 감히 선언하고 싶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어떻게? 바로 십자가의 복음으로!! 이런 선포적인 발언에 물론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 짧은 지면에 그것이 가능할 지 염려가 되지만, 오늘 설교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만 설명하기로 한다.
모던니즘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의 기본적인 관심은 확실한 지식의 추구, 곧 진리의 추구였었다. 아무리 의심해도 부인할 수 없는 바로 그런 사실을 추구해 왔었던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의심한다). 바로 내가 지금 의심하고 있다는 이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그 확실성을 추구한 것이다. 이런 추구 때문에 사실은 “사실과 가치”라는 베이컨식의 귀납법적 이원론을 낳는다(이것에 대해서는 곧 더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이렇게 확실한 지식을 추구한다는 모던이즘의 기본적인 목표설정(agenda)은, 자신이 발견했다고 여기는 지식의 확실성만을 강조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절대적 확신에 이르게 된다. 다른 사람의 지식과 관점과 견해를 무시하고 일종의 전제주의적(tyranic)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단과 정통에 대한 너무 지나친 구분과 관심이 이런 사고의 특징들 중의 하나이다.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지난 세기의 보수-진보간의 대립이었다. 보수측이든, 진보측이든 이런 절대주의적 확신을 추구했었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그 시대의 아들들이었었다.
이런 진보-보수의 대립갈등은 또 다른 반동을 낳게 된다. 시계의 진자가 진보와 보수 모두를 거부하는 쪽으로 향방을 두게 된 것이다. 포스트모던이즘의 기본적인 추이가 바로 이것이다. 한 마디로 상대주의. 그 극단적인 형태가 허무주의이다. 이들은, 이전 시대에 추구하던 객관적, 절대적인 진리는 아예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인식은 언어를 통해서, 최소한 우리의 인식의 구조를 통해서 걸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의 구조가 문화적으로 환경적으로 조성되는 한, 우리의 인식의 결과로 확인되는 그 절대적인 확신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확신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대주의가 공동체를 강조하는 경향을 낳는다. 모든 진리가 상대적일 수 밖에 없으니, 서로를 존중하면서 지내자는 것이 그 기본전제이다. 이단과 정통을 구분하는 것도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니 서로 존중하자는 일종의 <허용적인 사회>가 된다. 이런 상대주의적 진리는, <부드러운 진리>일 뿐만 아니고, 결국은 <이빨 빠진 진리>이며,<거세된 진리>이고, 최종적으로는, <진리는 없다>를 선언하게 된다.
이것에 대해서 십자가의 복음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바로 <비판적 실재주의>(critical realism)이다. 물론, 이것은 또 다른 <주의>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비평은 너무 <나이브>하다. 비판적 실재주의는,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되,그것을 파악하며 인식하는 것에 있어서, 인간의 인식구조가 가지고 있는 상대성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는 객관적인 진리, 절대적인 진리를 인식할 수 없는 한계를 솔직히 인정한다. 자신에게 비춰진 계시의 빛조차도 자신의 편견과 전제에 의해서 왜곡될 수 있는 줄을 알고, 그 계시 앞에서 오히려 겸손해 진다. 그러면서도 확신을 갖는다. 뜨거우면서도 깊은 확신이다. 절대적인 확신과 다른 것은, 겸손하다는 것이다. 의심만이 아니라 확신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진리와 사물 그 자체에 있는 특성이 우리의 인식의 한계와 상대성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파악되도록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자신을 일견 감추면서, 일견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그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진리를 알 수 없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일부>의 진리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충분하다. 이것은 결코 상대주의적인 진리가 아니다. <절대의 진리의 그 일부>이다. <일부>라 하더라도 우리의 삶과 우리의 믿음에 그리고 우리의 구원에 충분하다. 그리고 넉넉하다. 십자가의 복음이 바로 그 절대적 진리의 일부인 것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로 아버지께 인도할 다른 진리는 전혀 없다. 우리에게 계시된 <일부>의 진리이지만, <절대>적 진리는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가?
이렇게 질문을 던져볼 만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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