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와 논쟁

[스크랩] 지방교회의 양태론적 삼일신론 비판

baromi 2006. 10. 12.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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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의 양태론적 삼일신론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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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크리스쳔시민연대에서 발행한 "이단들의 최근동향 1권"(도서출판 리폼드, 발행인: 장관섭목사)에서 본인이 올렸던 지방교회에 대한 내용입니다.


크리스쳔시민연대에서는 1권과 2권의 두권을 발행하였는데, 본인이 1권에서는 "지방교회의 양태론"에 대해서, 2권에서는 "말씀보존학회와 킹제임스"에 대해서 집필을 하였습니다.


지방교회에 대해서 올렸던 많은 부분과 중복되어지며,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지방교회의 양태론


1. 서론

2000-2001년을 전후하여 월간지(현재 주간지)였던 교회와 신앙지는 이단들의 반론을 허용하는 유일한 이단연구지로서, 특집으로 오랫 동안 최삼경목사와 지방교회 조동욱외 일인과 공식 지상공개토론을 하였던 적이 있었다.
본인이 보는 관점에서, 토론은 지방교회의 완전한 패배였고, 분명한 양태론자인 그들은 최삼경목사에게 오직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둘러대기 위한 거짓 위장과 자신들의 신학적 정체를 감추는 변명만을 늘어 놓고 있었을 뿐이다.

그 이후 "교회와 신앙"의 홈페이지의 게시판은 언제나 지방교인들로 시끄러웠다.
그래서 교회와 신앙지는 게시판을 지방교회, 안식교회, 일반 이단등 게시판을 몇 개의 전용게시판으로 분류하여, 그들이 올리는 글을 허용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지방교회의 게시판에서 몇몇 난상토론이 있었다.
그곳에서 지방교회 김성일이라는 사람이 교회와 신앙지에 공식토론을 요청하였고, "교회와 신앙"지에서는 필자에게 토론을 권유하였으며, 필자는 이를 수락하여 2001년 여름에 교회와 신앙의 홈페이지는 단 둘만의 전용토론방을 특별히 만들어 주었고, 필자와 김성일이라는 지방교회 교인은 일대일의 공식 토론을 시작하게 되었다.
결국 삼위일체에 대한 토론을 마치고, 마침내는 다른 주제(구원론, 인간론, 종말론, 교회론등)의 토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지방교회측은 더 이상 토론을 할 수 없다고 토론조건의 재협상을 제안하다가, 마침내 일방적인 토론중단을 하므로서, 본인이 혼자 몇 개의 글을 추가로 올리다가 중단된 일이 있었다.

필자는 그 토론외에도 대구교회라고 하는 자생적인 지방교회와 오랫동안 토론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지도자인 이현래목사라는 사람이 워치만 니의 책을 읽고 그 사상에 스스로 자생적인 지방교회가 된 경우가 대구교회이다. 이들은 인터넷상에서 하표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는데, 지방교회와 거의 유사하다.
또 필자는 베뢰아 측과 토론을 한 적도 많이 있었는데, 그들도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주장한다.

최근, 지방교회는 인터넷이란 매체를 통하여 활발하게 지방교회를 알리고 선전하여왔다. 그들의 홈페이지는 상당히 많으며, 홈페이지에는 교육을 받은 전문 운영자들이 있어서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왔다.
물론 그들은 일률적이다. 그들만큼 교리에 충실한 사람들은 없을 정도로 100명이면 100명의 생각이 모두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교리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제 필자의 토론적 체험을 정리하고 요약하여, 지방교회의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필자의 글은 지방교회의 양태론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매우 상세한 자료가 되어질 것이며, 이러한 자료는 필자와 지방교회의 직접적인 몇번의 토론의 내용과 지방교회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책을 수십권을 직접 읽은 체험에서 기록되어진 것이다.
특히 이 내용은 일방적인 연구가 아니라, 상대방이 반론이 있었던 상호토론을 근거로 하였기에, 다른 자료들보다 더욱더 구체적이며, 가장 최근의 자료가 되어질 것이라고 본다.

그동안 지방교회와 토론을 한 사람들이 몇분(최삼경목사, 양승욱목사, 필자등) 있었는데, 지방교회는 토론에서 매우 이상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이상한 방법에 대해서 지방교회와의 토론자는 반드시 이 점들을 사전 숙지하여야만 한다.
필자는 그동안 약 10년 이상을 많은 이단들과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특히 지방교회가 사용하는 토론방법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매우 비열한 방법이었으며, 이단이라고 불리지만 도저히 신앙인의 방법이라고 볼 수 없는, 더군다나 이단이라고 할지라도 나름대로의 당당함을 조금도 찾을 수 없는 비열한 방법을 사용한다.
즉 지방교회는 이단성이 많은 위험한 곳이며, 더욱이 그들의 이단성이 대외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한 곳이다.

즉 그들의 토론은 논리적인 내용에 대한 성경적 토론이 전혀 아니다. 만일 그러한 토론이라면 너무나 쉽게 결론이 맺어지고 말 것이며 그러한 토론에 대해서는 오히려 환영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교리를 위장하고 감추며, 오히려 자신들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삼위일체라고 주장하며, 토론자를 삼신론자라고 공격하는 수법을 사용하며, 또 신학자들의 문헌과 서적을 왜곡시켜 부분적으로만 인용하여 다른 의미로 바꾸는 수법을 사용한다.
즉 거짓말을 하며 자신들의 정체를 감추는 토론을 하게 되므로 그러한 토론은 매우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추종하는 교리와 사상을 굳이 위장하고 감추면서 토론에 임할까?
그동안 그들이 사용한 수법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차후로 지방교회와 토론을 하려는 분은 이들의 수법을 항상 염두에 두고 대비하기 바란다.

첫째,  상대방을 삼신론자 혹은 이단이라고 모함한다:
자신들의 삼위일체론(삼일신론)이 양태론적 삼위일체가 아니라, 오히려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주장을 하고, 오히려 일반교회측의 토론자를 삼신론자라고 비방함으로서, 그 토론을 지켜보는 초심자들이 착각을 하게 하는 수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국내외로 유명한 몇몇 신학자들의 조직신학책 몇권만 참고하면, 이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이 곧 밝혀지게 된다.
지방교회는 토론하는 상대자마다 삼신론자라고 비난하며 공격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양태론적 시각을 갖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이들과의 삼위일체 토론을 하게 되면, 양태론이 무엇이며 정통삼위일체가 무엇인지 개념을 정의하고 시작하여야만 한다. 즉 대표적이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통조직신학책의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인용한다면, 이들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둘째, 교회사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자신들의 삼위일체론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 초대교부들의 교회사적인 주장을 인용하는 수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초대교부들의 주장은 삼위일체가 발전되어져가는 과정의 논리(고전적 삼위일체)임을 알아야만 하며, 이러한 논리들이 궁극적인 정통삼위일체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초대교부들의 고전적 삼위일체는 그 전개되는 과정에서 이단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게 된다. 종속주의와 투쟁하였으며, 양태론과 싸우게 되면서 미완성적인 삼위일체론이 성숙되어진 것이다.
예를 들면,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 경륜적 삼위일체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러한 용어는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어져가는 과정중에 있는 시대적인 용어일 뿐이며, 그러한 견해는 언제나 중심적인 신학이 아니었으며, 궁극적인 삼위일체론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삼위일체 형성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하는 수법이다. 즉 초대교회 교부들도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였으므로 지방교회가 정통삼위일체라고 하면서, 교회사적인 글 몇 개를 인용하면, 전문지식이 없는 성도들은 그 진위성을 도저히 확인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셋째, 신학자들의 책을 인용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양태론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조작하기 위하여, 극소수의 견해를 가진 신학자나 양태론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교수들의 견해를 전통적인 신학인 것으로 위장하여 소개한다. 그러한 극소수의 주장이 전통적인 삼위일체인 것처럼 조작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지방교회는 예수의 처녀잉태설까지 부정하는 한 자유주의 목사의 홈페이지를 소개하면서 그를 극구 칭찬한 적도 있었는데 지금도 지방교회의 홈페이지에는 그 목사의 글을 올려 놓았다.

때로는 국내외로 유명한 정통조직신학자들의 책을 인용하기도 하는데, 그 책들의 내용에서 전체적인 의미와 전혀 다른, 부분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내용만 골라서 선택적으로 인용함으로서, 그 책들이 지방교회의 양태론적인 삼일신론과 동일한 것처럼 위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지방교회는 이종성박사의 책과 차영배교수의 저서를 인용하면서, 지방교회의 삼일신론이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종성박사와 차영배교수, 김명용교수, 김영재교수등이 교회와 신앙의 특집기사(2001년 10월호)에서 지방교회는 분명한 양태론이라고 직접 비판함으로서, 그동안 이 신학자와 교수의 글을 인용하며 자신들이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하던 지방교회의 주장이 얼마나 거짓인지가 밝혀진 적이 있어서 이들이 큰 창피를 당한 적이 있었다.(이 글의 뒤에서 이 내용을 소개할 것이다)

또 토론을 하다보면, 한국교회에서만 삼위일체가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물론 세계의 저명한 신학자의 책을 인용하면 이들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이 곧 드러나게 된다.
실제적인 예를 들자면, 캘빈의 주장 중에서 오해를 받을만한 한마디만 골라 찾아서 부분적으로 올려놓든지, 웨슬레의 주장 한마디만 인용하여 부분적으로 올려놓고, 캘빈과 웨슬레도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인 양태론과 같다고 한 적도 있었는데, 이런 수법은 그야말로 한마디로 기가 막힐 정도이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 정식으로 문헌적인 자료를 제시하면서 반박하면, 더 이상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아니면 말고..."라는 식의 무안수치적 수법이다.

넷째, 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위장적 조작이 통하지 않게되면, 일반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비성경적이며, 자신들의 양태론적인 교리가 더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삼위일체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토론은 오히려 바람직하며 이러한 토론은 이들의 주장이 비성경적임이 곧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들이 인용하는 성경적인 증거는 몇가지 난제라고 여기는 몇 개의 구절뿐이다. 물론 권위있는 성경주석이나 성경사전등을 이용하면 이들의 주장은 곧 드러난다.
예를 들면 요1:14, 고전15:45, 고전6:17, 사9:6등의 몇구절만을 양태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우스운 것은 그동안 양태론이 아니라고 위장하고 감추며 자신들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억지 주장을 해온 것이 무색하게, <하나님 = 예수 = 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태론과 모순이 되는 성경구절(인격적인 구별)을 제시하면 이들은 그에 대해서는 답변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방법 역시 여의치 않으면 일반교회의 신학을 "교리주의"라고 비난하는 둥, 이러한 지방교회의 주장은 자주 바뀌게 되는데, 그것은 그동안 자신들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주장해 온 것이 모두 거짓임을 스스로 다시 한번 자백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이라고 계속 우기다가 그것이 발각되자, 일반교회의 교리와 신학을 교리주의라고 비난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은 교리가 없는가? 그들은 양태론이라는 교리를 갖고 있으며, 이상한 기독론, 황당한 인간론,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등 그들이야말로 100명이면 100명이 모두 그들의 지도자(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와 무조건 동일한 교리를 추종하는 그야말로 교리주의인 것이다.
항상 이단들은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고, 그들의 지도자의 개인적인 교리와 신학사상에 무조건 맹종한다.
당연히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100% 추종하고 있다.

다섯 번째: 교파의 차이점을 거론한다:
이들은 본인이 감리교라는 것을 지적하여, 장로교와 다르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또 장로교단 사이의 차이점을 부각시킨다. 혹은 각 교단에 스며있는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고의적으로 부각시키기도 한다.
그들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정통신학과 정식으로 대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때로 정통과 이단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단들의 상용수법이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이단이지만, 다른 교단은 정통신학내에서의 차이점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지방교회도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가 스스로 말하였듯이, 기독교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기독교가 아니다. 그들은 신론, 인간론,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등이 모두 다르며 부활관, 재림관, 천국관조차 다른 집단이다.

일반적인 성경적 진리 토론의 경우을 보면, 이단이라고 불리는 곳도 완전 사이비단체가 아닌 다음에는 그들 자신도 나름대로 성경적이라고 믿으며, 자신들의 견해를 당당하게 밝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지방교회와의 토론에서 보면, 지방교회의 토론방법과 태도는 신앙인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만큼, 위장, 모함과 왜곡에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일반 교회의 유명한 신학자의 책을 지방교회의 것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면서, 그 책들을 부분적으로만 인용할 수 있는가? 그들은 스스로가 일반 교회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그들의 양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보는지, 그들의 유치한 수법에 그들의 영혼의 정체를 의심치 않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느낌이었다.

개신연에서의 본인은 지방교회에게 공식적인 토론을 요청하였지만, 그들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약간의 난상토론이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일반적인 토론중단을 선언하고 썰물처럼 빠져 나가게 된다.
또 개신연의 운영자가 공식토론과 공청회의 정식제안을 하였지만 이들은 답변이 없다.
그들은 그들의 정체를 아는 사람과는 토론하지 않는다. 토론하면 할수록 그들의 정체가 그대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2. 지방교회의 삼일신론은 양태론

삼위일체란 성경을 정리하고 체계화시킨 것으로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이해가 다소 어렵더라도 불구하고, 성경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에서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 양태론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양태론이 무엇인지, 그 정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만 한다.
양태론을 쉽게 설명하자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한 인격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필자는 회사에서 사장이고, 교회에서는 권사이며, 집에서는 가장이 되어진다든지, 물이 얼음과 수증기의 형태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한 실존적인 인격의 세가지 양태(Mode)를 보여주며, 이러한 것을 단일신론적 양태론이라고 하는데, 일반 성도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된 이단적인 주장이기도 하며, 특히 우리나라의 목회자들도 이러한 양태론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본인의 세 양태, 사장과 권사와 가장이라는 사역적인 직분은 상호간에 인격적 교류나 관계를 갖지 못하는데, 세 양태가 동일인격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역적인 분류를 곧 경륜적삼위일체(사역적삼위일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주장은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어가는 4세기 무렵에 잠시 있던 견해로서, 물론 현재 우리가 인정하는 정통삼위일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성부로, 신약에서는 성자로, 십자가 이후로는 성령의 세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곧 양태론인데,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언급되는 삼위간의 인격적인 교통에 대해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지므로 비성경적이다.
또 십자가에서 죽은 분이 성부하나님이 되어지므로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렸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벨리우스, 노예투스, 파락세아스등이 있었는데, 양태론도 몇가지 유형을 갖고 있다.

또 삼신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고 하는 세분의 신(하나님)이 각각 분리되어 계시다는 주장인데, 다시 말하자면 세분의 신을 믿는 이러한 주장은 삼신론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삼신론은 인격뿐 아니라 본질도 셋으로 분리시키는 주장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세분의 분리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주장하므로서, 최근에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 인격만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하나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단일신론은 오직 성부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으로, 대표적인 곳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가 이에 속하며, 구약성경만을 인정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이 되고만다.
양태론도 결국은 단일신론의 범주에 들어간다. 삼위를 모두 한 인격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몰몬교와 같이 다신론을 주장하는 이단들도 있으며, 더욱이 누구나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통일교와 같이 사람은 성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런데 지방교회 역시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곳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사이비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삼위일체는 토론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생략한다.

그동안 삼위일체론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어렵기 때문에, 오랫동안 삼위일체에 대해서 좀 쉽게 설명하고 이해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때로는 한 물방울이 셋으로 갈라지거나 다시 하나로 합하여지는 것을 삼위일체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삼위적인 양식을 물과 수증기와 얼음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더욱 혼란만 가증시킬 뿐이며, 양태론적인 자들은 그들이 즐겨 사용하던 물에 대한 비유 외에도, 수박과 수박조각과 수박즙으로 비유하여 삼위일체를 동일한 수박의 다른 형태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혹간은 삼각형의 세 내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세상의 어떤 물질에 대한 유비와 비교할 수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삼위일체를 아주 쉽게 이해하기 위한 위의 여러가지 유비는,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에 약간의 도움은 줄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바람직한 설명은 결코 되지 못한다.

특히 지방교회는 물과 수증기, 얼음의 비유를 하고 있으며 그리고 수박과 수박조각과 수박즙으로 삼위일체를 비유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양태론이기 때문이다.

3. 전통적인 정통삼위일체와 양태론의 신학적인 증거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의 세가지 명제는 아래와 같다.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인간의 논리적인 이해를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이해가 어렵다고 할지라도 성경을 일단 기록된 그대로 정리하여, 삼위일체라는 논리에 도달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란 논리가 먼저 이단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그것을 반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교회사를 공부해본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아래의 세가지 명제는 가장 성경적인 사항이다. 즉 세가지 명제를 동시에 만족하는 삼위일체가 정확한 삼위일체가 되어진다.

1)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2) 각 위는 각각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3)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이시며, 각 삼위는 상호관계적인 면에서 서로 구별되어짐으로서 인격적인 교통을 나눌 수 있지만, 하나님은 본질적이며 존재론적인 관점에서는 유일한 한분이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경에 그렇게 언급되어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기독교는 삼신론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각각 하나님이셔야만 하며, 또한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면 안된다.
그러한 성경적인 명제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세 위격은 인격적인 구별은 되지만, 본질적으로 분리되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곧 “삼위”(세 위격, 인격)와 “일체”(하나의 본체, 본질)이다.
한마디로 삼위일체를 정의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한마디로 굳이 표현하자면 "하나의 신적본질을 공유하는 세 인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격은 상호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구별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 본질은 하나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1:3)

이 문장에서 "형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카락텔"이다. 그 원래적인 정확한 의미는 "정확한 복사, 조각(the express image, mark)"라는 뜻이다.
또 "본체"란 말은 "휘포스타시스"로 "본질, 실상, 실체(confidence essence, of person)이라는 뜻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동일인격이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동등함과 질서적 종속이라는 말로 요약되어지며, three substanses one essence 혹은 three individual existances sharing one essence으로 설명된다.
바로 삼위일체의 "일체"라는 말이 히브리서의 "본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삼위일체란 성경적인 근거를 통하여 아래의 세가지 조건을 만족하며 인간의 이해를 돕고자 만든 논리가 아니며, 성경적인 정리를 체계화 시킨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즉 삼위의 인격은 각각 다르지만, 그 삼위의 신적본질은 하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호관계가 가능한 독립적인 인격체이지만, 그 삼위는 같은 신적본질을 공유하는 하나의 하나님이시다.

다음은 정통신학이 말하는 대표적인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내용이다. 정확한 책명과 페이지수를 밝혔으므로 누구든지 찾아 확인할 수 있으며, 이것을 올리는 이유는 지방교회가 자신들의 양태론을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주장하므로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81쪽)
우리가 보통 말하기를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한 신성(godhead)을 가지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서로 다르다고 한다. 이 서로 다른 셋은 상호관계라는 관계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렇게 이해하여야만 본질의 동일성과 이 셋의 구별이라는 형식이 만들어진다.

(아가페 성경사전 776쪽)
삼위일체론이 바탕을 두고 있는 성경의 기본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세 위격이 각각 하나님(신)으로 인정된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세 위격들 가운데서 각각 구별된(distintion) 모습으로 나타난다.

(같은 책 788쪽)
삼위일체론 정립에 있어서 중요한 또 한가지의 내용은 세 위격들 사이의 상호작용(그러므로 서로 구별이 가능하다)에 관한 내용이다. 특히 예수님과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대상인 아버지(the Father)와의 상호작용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마26:39)

(웨인그루뎀의 조직신학 상권 366쪽)
왜냐하면 각 위격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이다. 각 위격 간의 차이는 존재의 차이가 아니라 관계의 차이이며, 그럼에도 각 위격은 실제적으로 존재하여야 한다.

(같은 책, 347쪽)
양태론의 결정적인 결함은 성경 여러곳에 나타나 있는 삼위간의 개인적인 관계를 부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혹은 그것들을 단지 환상일뿐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해야 한다) 따라서 이 입장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삼위가 함께 계셔서 성부께서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께서는 비둘기같이 강림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해야 된다. 또한 예수께서 성부께 기도하신 모든 경우들을 환상이나 제스츄어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 거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는 성자와 성령에 관한 사상이 결여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양태론은 속죄의 핵심을 잃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대속의 희생제물로 아들을 보내셨고 아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아버지의 진노를 담당하셨으며, 삼위를 대변하는 성부께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고 만족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게 된다.

(같은 책, 333쪽)
하나님이 삼위이시라는 말은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들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또 성부는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독립된 인격체이다. 그리고 성자는 성령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세분이 각각 다른 인격체임은 앞에서 인용한 여러 성구에서 이미 살펴 보았으며 신약성경에는 그 외에도 많은 구절이 있다.

(루이스벌콥의 기독교신학개론 85쪽)
성경은 한 하나님이 삼위(3인격)로 되어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특별계시의 교리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은 교리이며, 인간이성으로서는 발견할 수 없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그의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한분이시나, 이 한 분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우는 삼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 삼위는 여러 사람들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혀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삼위는 오히려 신적본질이 존재하는 세 형태인 것이다.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신적 존재에 있어서의 이들 자기 구별은, 그들이 서로 인격적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 조직신학 262쪽)
이 사실은 성경에서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고 또 일반적으로 합의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사벨리안 체제는 결코 어떤 보편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성부에 의해서 보냄을 받고, 그에게서 오며, 그에게로 돌아가고, 그의 명령을 받고, 그의 뜻을 행하고, 그를 사랑하고, 그에 의해서 사랑받고, 그에게 기도를 하며, 당신이란 대명사를 사용하고 또한 그에 대해 언급할 때 그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신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상대적인 칭호를, 아버지와 아들에 역시 포함되어있다.

(하지 조직신학 303쪽)
성자는 본체에 있어서 성부와 성령과 동등하시지만 <인격적 실체에 있어서는 그들과 다르다>.

(하지조직신학 252쪽)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각 구별된 인격은 <구별된 숫자적 실체>이며, 또한 구별된 지식, 구별된 의지등을 소유하신다.

일반적으로 위의 책들은 정통신학을 대표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물론 얼마든지 더 국내외의 신학서적을 소개할 수도 있으며 자료는 무궁무진하다.
즉 조직신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본질에서 하나인 하나님, 인격적으로는 세 위격이 구별되어지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양태론에 대해서는 정통신학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뒤에 지방교회의 위트니스 리의 실제적인 주장을 그 책명과 페이지 수를 밝히며 소개한다.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은 인격을 구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인이 양태론에 대해서 정통신학서적을 참고하려는 이유는, 양태론을 주장하는 많은 단체들이 언제나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양태론이 정통신학인 것으로 가장하기 때문이다.(물론 성경적인 설명도 충분히 할 것이다)
양태론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삼위가 각각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하나님 자신이 성자 예수로 오셨고, 성자 예수가 십자가 이후 성령으로 오셨다는 주장은 분명한 양태론이다. 실제적으로 양태론은 동일인격의 세 과정이기 때문에, 그 세 양태는 서로 인격적인 구별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 위가 아니라 다만 다른 때에 다른 형태로 나타나시는 한 위라고 가르쳐왔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복음서를 통해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보는대로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상권 347쪽)

"양태론은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려는 열정 때문에 매력적이다. 이 입장은 한분뿐이신 하나님에 관한 구절뿐만 아니라 요한복음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구절이나 요한복음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구절들을 통해 지지를 얻는다" (같은 책, 347쪽)

"싸벨리우스파는 삼위를 단순히 신적행위, 혹은 신적 현현의 많은 형태로 보고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의 수여자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삼위는 한위로 축소되어 버렸다"(루이스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87쪽)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둘째 이단은 제4세기에 나타난 사벨리우스파 혹은 양식적 단일신론 이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는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관심은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충분한 신성을 주장하는데 있었다. 이 견해는 양식적 단일신론이라 불리워졌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3위를 하나님 현현의 세 양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신적본체가 자신을 나타날 때의 세형상을 가르키는 것이라 하였다.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사상. 신복윤교수)

"프락세아스(Praxeas)는 알려지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Sabellius)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Noetus of Smyma. 150년경에 활동)의 가르침에 훨씬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는 약간의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활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 초기 기독교에서는 신관 중 삼위일체의 문제, 특히 성부와 성자의 내적관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이단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번은 성부로, 한번은 성자로, 한번은 성령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활동했다고 보고, 십자가에 못박힌 분이 바로 성부 자신이었기에 성부수난설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신의 단일성과 조화시키고자한 단일신론자들이었다.(교육목회협의회, TBC 성서연구. 546 쪽)

이제 유명한 신학자들의 교과서적인 신학서적의 내용을 살펴 보았다. 이제 무엇이 올바른 삼위일체이며, 무엇이 양태론인지 충분히 분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양태론이란 하나의 인격을 가진 하나님이 세가지 양태, 즉 구약에서는 성부하나님으로, 신약에서는 예수로 오시고, 오순절이후에는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정통삼위일체는 인격에서는 상호교류가 가능하도록 구별되지만, 신적본질은 하나라는 것이다.

필자와 최삼경목사를 삼신론자라고 하였던 지방교회측은 차라리 이종성박사와 루이스벌콥도 삼신론자이며, 웨인그루뎀도 삼신론자이며, 하지, 제럴드브레이, 성경사전의 저자와 국내의 신학대학의 교수들도 모두 삼신론자라고 하여야만 할 것이다.
세 인격은 상호 구별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모든 정통신학자들의 조건이며 또한 성경에서 언급하는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명실상부한 지방교회의 지도자인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인용하여보자.

#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그 수박은 먹혀진 후 없어진다. 본래 그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후에 그 수박은 온 가족 속에 있는 것이다ꡓ(하나님의 경륜, 55-56쪽).

# 왜 그 분의 경륜을 이루는데 하나님의 세 인격들이 필요한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 다른 세 하나님이 아니라, 세 인격으로 나타난 한분의 하나님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363쪽)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과 그 영이 우리 안에 계심을 계시하여 준다. 그러면 몇 가지 인격이 우리 안에 있는가? 셋인가, 하나인가? 우리는 <서로 다른 세 인격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삼일(三一)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이다. …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도 있고, 아들도 있고, 성령도 있다ꡓ(하나님의 경륜, 16쪽)

# 우리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 290쪽)

위의 글을 읽어보면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지방교회의 실제적인 지도자이다, 워치만 니와 함께 위트니스 리를 지방교회는 사도라고 부른다. 지방교회의 교리는 위트니스 리와 100% 동일하다.

지방교회는 양태론을 주장하는 어느 장로교의 목사의 글을 올려놓고, 그를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있으며 그의 글 중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교회와 신앙 홈페이지에서 본인과 토론한 김성일님이 인용한 적이 있음, 또 지방교회 홈페이지, 변호와 확증에 실려 있음)

“신학을 향한 충고:'예수는 성령이다'라고 하면 사벨리우스(Sabellius)의 양태론(Modalismus)을 운운하며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성급하고 극단적인 편견은 버려야 한다. 만약 이러한 편견을 버리지 않는다면 결국 어거스틴도 양태론자라고 하는 것과 같으며 그 이유는 신학자들이 너무 잘 알고들 있을 것이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삼위일체가 자신들의 주장만으로 또 다시 악용되거나 남용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만 한다.' (김성일님의 토론글 3편)

이 내용의 글을 지방교회가 극구 칭찬하고 있었으며, 그 내용을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인용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계속 살펴보자.
지방교회는 언제나 자신들이 정통적인 삼위일체를 주장한다고 위장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은 세 인격을 구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음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보면 그러한 것이 얼마나 거짓인지 곧 알 수 있다.

# 아버지, 아들, 영 가운데서 <첫째분과 마지막 분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다>. 아버지, 아들, 영에서 마지막 분인 그 영은 삼일하나님의 최종 완결이시다. 하나님은 <셋이 아니시다>. 그 분은 하나이면서 셋인 분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6쪽)

#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주셨다. 이 아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지 말라. 우리에게 주신 바 된 이 아들이 바로 다름아닌 그 "하나님 자신"이다. 당신이 아들을 영접할 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당신의 기도에서 당신은 그분을 아들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 부른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8-19쪽)

아예 위트니스 리는 기독교가 성경의 계시와 정통적인 가르침과 해석에서 벗어났다고 주장을 한다. 마치 삼위일체와 양태론에 대한 정의와 판결을 위트니스 리 개인이 내리는 것으로 보인다.

#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분명하고도 명확한 성경의 계시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언급된 명확한 계시에 근거한 정통적인 가르침이나 해석에서 벗어나 그중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도 한 하나님이요, 아들도 한 하나님이요, 성령도 한 하나님으로서 세 하나님이 단체적인 한 하나님이 된다고 말한다(하나님 282쪽)

#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삼일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를 아들과 분리시킨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영을 모두 분리시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아버지, 아들, 영이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될 수 있는 위격들이라고 말한다.(하나님 287쪽)

#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계시지도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야 신조의 교리이다.(439쪽)

지방교회의 주장은 양태론이다. 아니 적어도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양태론이 분명하다.
어느 누가 보아도 위트니스 리의 주장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으므로 인하여, 지방교회의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며, 이러한 거짓이 더욱 지방교회의 위험성이 되어진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 마리아의 태 속에 들어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예수로 이땅에 와서, 하나님 자신이 직접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지방교회의 주장이며, 어느 누가 보아도 이것은 전형적인 양태론이 분명하다.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와 다르다고 말할 자신이 있는가?
지방교회가 위트니스 리와 다르다고 답변할 수 없다면, 지방교회는 기독교의 삼위일체가 아니라고 솔직히 말해야만 한다.
지방교회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변명은 물론 거짓말이다.
지방교회가 이러한 거짓변명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4. 상호내재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요14;10, 11)

참으로 어려운 내용이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in) 거하는 복합적인 상호내재를 말하고 있다.
자칫 문자적으로 생각하면, 뱀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서로의 몸을 자신의 안으로 삼키는 것을 연상시킨다.
서로가 서로의 안에 거하는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성경구절이 초대교회에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야기시켰던 문제의 구절이었다. 이것을 초대교회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라고 불렀는데, 그 어원은 셋이서 손을 붙잡고 춤을 추는 윤무(輪舞)를 뜻한다.
이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는 페리코레시스를 “상호내재”라는 공간적인 개념으로만 정의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 (신약의 결론, 하나님. 288쪽)

# 아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동시존재할 뿐 아니라, 상호내재하신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영원과거에 아들과 아버지가 동시에 존재했다는 것을 듣게 되는데, 그 이유는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아들이 오셨을 때 그 분은 그분 홀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그 분과 함께 계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그 분이 방에 계셨을 때, 그 분과 아버지는 함께 존재하셨다."(위트니스리, 하나님, 309쪽)

# 신격의 셋은 다만 <동시에 존재할 뿐 아니라, 또한 서로 안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 가운데에는 <동시에 존재함과 상호내재함>이 모두 있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 동시에 존재함은 같은 시간에 함께 존재함을 의미한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 310쪽)

# 아버지, 아들, 셋 모두가 동시에 존재했다. 나는 신격의 셋의 <상호내재와 동시존재>를 완전히 믿는다."(하나님, 305-306쪽)

이들은 자신들의 삼일신론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에 대해서, 자신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위트니스 리의 이 개념은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세 위격의 "동시존재"의 개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삼중적으로 존재하는데, 이 셋은 분리되어지지 못하며, 항상 동시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공간적 상호내재, 동시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삼위가 한 인격이라는 장소에만 국한되어지고, 인격적으로 서로 구별되어지지 못하므로, 결국은 하나인 것이다.

# 삼위양식설은 나무나 멀리 빗나가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상호내재함과 동시에 존재함을 믿지 않는다. 삼위양식자와 달리 우리는 신격의 셋, 즉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이 동시에 존재하며, 같은 상태 아래 있음을, 그 상호내재성과 동존재성을 믿는다(위트니스 리, 하나님 307쪽)

즉 성부 안에 성자와 성령이 함께 있고,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이 함께 있으며,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이다. 즉 그렇기에 자신들은 양태론과 다르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양태론을 정의하는 것은 스스로 양태론자가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이 되어진다.

지방교회의 주장, 즉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여 영이 되었다는 양태론(계승설이라고 하는 양태론)에 대해서 토론자가 지방교회를 비판하면,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호내재의 개념도 정통신학이 말하는 상호내재의 개념과 다르며, 결국 양태론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어떻게 하면 양태론을 모면해 볼까하는 궁리끝에 나온 것으로 보이며, 지방교회의 신학적 정체가 더욱 오류와 모순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위트니스 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세 단계와 세 방면으로 보았으며 한 인격, 한 실제의 세 형태를 주장한다. 그런데 그 삼위가 하나님 안에 동시에 공존하는 성분이나 요소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위트니스 리의 다음 주장을 살펴보자. 분명한 양태론이며 계승설이다.

#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위트니스 리의 하나님 297쪽)

#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처녀의 태 속에 들어가서 그 속에서 아홉달 동안을 머무셨다.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인성을 그분의 피난처와 거처로 취하셨다. 분명히 그분의 성육신은 그분의 과정이었다. 두번째로 그분은 삼십삼년 반이라는 인생의 긴 터널을 통과하면서 이 땅에서 생활하셨다. 이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 세 번째로 그분은 죽음 안에 들어가서 무덤과 음부를 포함한 죽음을 통과하셨다. 네 번째로 그분은 삼일후에 사망과 음부를 걸어 나오셔서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 또한 하나의 과정이었다.(세부분인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2-53쪽)

# 이 놀라우신 하나님은 그분의 분배를 성취하기 위해 <친히 두 단계>를 취하셨다. 성육신에 의해 그 분은 구속하는 어린양으로서의 사람,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또 하나의 단계 인 부활을 취하셨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더 전진된 어떤 것이 되셨다. 그분은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가지 큰 비밀. 19-20쪽)

# 최종완성이라는 단어는 일이나 혹은 과정이 완성되거나 끝났음을 가리킨다. 이것은 음식을 요리하는 것으로 예시할 수 있다. 요리하는 과정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식품은 날것이다. 두시간 동안 요리된 후에 식품은 만찬으로 최종완성된다. 성육신 전에 하나님은 인성이 없이 신성만 갖고 계신 날것이었다. 성육신과 인생과 죽음과 부활과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은 과정을 거치셨고 최종완성되었다. 이제 <그분은 더 이상 날 것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신성과 인생과 만유를 포함한 죽음과 능력있는 부활과 그리고 초월하는 승천을 지니신 최종완성되고 완결된 삼일하나님이시다. 이 모든 것들은 과정을 거치고 최종완성되신 삼일하나님 안에 있는 요소이자 성분이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일하나님. 53-54쪽)

# 하나님의 영은 <성육신, 인생, 죽음, 부활의 과정을 통하여 최종 완결된 영이 되셨다>. 그 분은 먼저 인성을 입으시고, 그 다음 부활 안에서 인성을 신성 안으로 이끄셨다. 이로부터 생명주는 영이 나왔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9

#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이 땅에서 삼십삼년반을 사셨을지라도 사람 안에 들어오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 분은 가서 죽으셔야 했다>............ 그리고 그 분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영이 되시어 제자들 안으로 들어가셨다.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을 갖게 했다.(67쪽)

# 그리스도는 사람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시다. 그 분의 신성한 부분은 그 영이자 <하나님 자신>이자 거룩의 영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의 온 존재>가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 안에 거룩의 영을 갖고 계셨으므로 바로 그 영이 죽음에서 살리시고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게 하셨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랑의 합당한 삶. 44쪽)

위트니스 리는 성자와 성령을 성부하나님 자신이 거치는 단계와 과정으로 본다. 전형적인 양태론이다.
곧 십자가에서 죽은 분은 하나님자신이 되고만다. 이것은 전형적인 성부고난설이다.
그런데 그들은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는 것안데, 이러한 변명은 세가지의 거짓말이 되어진다.

1) 그동안 자신들이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하던 것이 거짓말이 된다. 이러한 정통삼위일체는 없다.
2) 한 인격이 거치는 장래의 과정과 단계가, 어떻게 한 인격 안에 삼중적으로 동시존재, 상호내재할 수 있으며, 상호교류할 수 있는 구별되는 인격이 되어지는가?
3) 위트니스 리는 분명히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스스로 오류와 모순을 갖고 있으므로 너무 유치한 주장이 된다.
즉 본인이 중고등학교 시절의 과정을 거치고, 대학시절의 과정을 거쳤다고 가정을 하자.
본인과 중고등학교 시절의 본인과 대학시절의 본인이 인격적인 상호교제를 할 수 있는가? 본인의 인격과 중고등학생시절의 본인 인격과 대학시절의 본인 인격이 서로 시간적인 차이를 무시하고 동시존재, 상호내재할 수 있는가? 이들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결국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즉 이들이 주장하는 상호내재란 그들이 양태론임을 피하기 위한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그리고 그 변명은 스스로 모순과 오류를 불러오는 이상한 견해가 되고만다.

위트니스 리는 그동안 삼위가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이라고 주장하여 왔음을 이미 앞에서 살펴 보았다. 즉 그가 말하는 상호내재란 세 인격이 아니라, 한 인격이 거치는 세 단계, 세 과정일 뿐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거짓말로 인하여 점점 더 망가지고 있다.
다음 위트니스 리의 글을 보자....

#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삼일하나님이 삼일하나님을 보내셨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복음14장26절에 의하면 삼일성의 첫 번째가 세 번째를 보내셨다. 그러나 세 번째가 보내심을 받았을 때, 그 분은 두 번째로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더 나아가 요한복음15장26절에 의하면, 세 번째는 첫 번째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았을 뿐 아니라 두 번째에 의해서도 보내심을 받았다. 세 번째가 오셨을 때 그분은 두 번째로 첫 번째와 함께 오셨다. 하나가 보내심을 받을 때에 모두가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가 올 때 모두가 오는 것이다.(성령. 190쪽)

이미 설명하였듯이 동일인격의 세 양태는 서로 동시존재, 상호내재할 수가 없으며, 서로가 서로를 파송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성경은 성부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고, 또 성자가 성령을 파송한다는 언급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방교회의 주장대로 무조건 받아들여서, 상호내재를 한 인격 안의 동시존재라고 인정하고 생각하여보자.
이렇게 보아도 이들의 주장은 오류가 곧 드러난다.
성부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셨다. 또 성자도 성령을 파송하셨다. 동일인격이 동일인격을 파송할 수가 있는가?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의 인격이 나의 대학시절의 인격을 파송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위트니스 리는 삼일하나님이 삼일하나님을 보내셨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삼중적인 동시존재, 상호내재를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성부하나님이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셨는데, 보내시는 성부하나님 안에서도 삼위가 상호내재하고, 보내심을 받은 성자와 성령에게도 각각 삼위가 상호내재한다면, 삼체구위가 되고만다.(언제나 상호내재, 동시존재하며,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삼체구위가 아니라면, 어떻게 상호존재, 동시존재인 삼위가 분리되어 파송되어질 수 있는가?
이들의 주장은 곧 오류로 밝혀지며, 이런 질문을 하면 지방교회는 답변을 하지 않으며, 삼신론자니 뭐니 하는 개인적인 비난만을 늘어 놓게 된다.
위트니스 리는 셋이 셋을 보냈다고 궁색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상호내재가 셋에서 함께 이루어진 것인가를 물으면 답변하지 않는다.
한 인격이 셋으로 분리시켜 보냈다면 동시존재적인 상호내재가 모순이 된다. 세 인격 중 한 인격이 한 인격을 보냈다고 하여도 동시존재적인 상호내재가 모순이 된다.
그러니 삼중적인 인격이 삼중적인 인격을 보냈다고 하여야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삼위일체가 구위삼체가 되어지고 만다. 이에 대해서 위트니스 리는 “성경은 너무 깊이 따지지 말고 그대로 그냥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인격을 실제로 구별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이미 보았듯이 위트니스 리는 분명히 예수와 성령(부활의 영)은 상호내재가 아니라, 한 인격의 하나님이 거치는 두 단계 혹은 두 과정이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거치는 과정과 단계가 어떻게 상호내재가 되어지는가? 달리 말하자면, 상호내재되며 동시존재되는 삼중적인 존재가 어떻게 하여 거치는 단계와 과정이 되어지는가?
한 인격안에 분리되지 않고 상호 동시존재하는 세요소가 어떻게 서로 파송을 할 수 있는가?
지방교회가 말하는 삼위란 거치는 과정과 단계를 말하는가? 아니면 한 인격 안에 동시존재 혹은 상호내재하는 요소나 성분을 말하는 것인가? 이러한 주장은 양태론을 더욱 이상하게 변형시킴으로 더욱 모순되게 할 뿐이다
결국 이 변명으로 인하여 지방교회 양태론은, 일반적인 양태론보다  더욱 유치하고 황당한 주장이 되어질 뿐이다.

또 이들에게 있어서 구약의 하나님의 영과 신약의 성령과 부활후의 영(생명주는 영)이 그 개념이 다르다. 만일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성령)과 성부하나님이 각각 공존하여 동시사역을 한다면 한 인격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 신약에서 예수님과 성령이 각각 공존하여 동시사역을 한다면 한 인격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이 단계와 과정을 거치고 변화하여 최종완결된 것이 부활후 영이라는 주장이기 때문에, 오순절 이전의 성령은 부활후 성령과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만다.
더욱이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의 신과 신약의 성령, 오순절 이후의 성령이 다르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정통신학도 있는지 이들에게 물어보라..... 이들은 이에 대해서 전혀 답변조차 하지 않으며, 토론자에 대해서 개인적인  비난만 퍼붓게 될 것이다.

#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영을 말하지만, 그것은 최종 완결된 영이 아니다. 여호와의 영과 성령도 최종 완결된 영도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최종 완결된 영이 계시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 후였다. 이 영은 창세기의 하나님의 영, 구약의 여호와의 영, 마태복음 1장의 성령과 다르다.(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27-28쪽)

지방교회의 삼일신론은 전통적인 삼위일체와 전혀 다르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이것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이것을 숨기고 위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의 위험성이다. 게다가 상대방을 역으로 삼신론자로 모함하고 비난함으로서, 진정 이들의 인격과 양심을 의심치 않을 수가 없다.
이들에게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닌, 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것을 의미한다.
이들의 주장은 성경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위트니스 리라는 개인의 해석에서 비롯된 것인가?
더욱이 자신들의 주장이 전통적이라고 주장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견해가 전통적인 가르침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방교회는 자신이 전통적인 가르침과 다르다고 고백하는 위트니스 리를 이단이라고 생각하는가? 둘 중에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 전통적인 가르침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온전한 하나님이 아닌, 아들 하나님만 성육신이 되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상 신약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신약은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이 성육신 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78쪽)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주장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고백한다.
비록 양태론자이지만 지도자답게 그래도 당당하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인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주장이 전통적인 삼위일체라고 주장하며, 양태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들을 전통적인 기독교라고 위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방교회는 아래의 주장과 같이 아들과 아버지와 영을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위트니스 리를 이단으로 공포할 수 있는가? 혹은 지방교회와 위트니스 리의 견해는 다르다고 변명할 수 있는가?

#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아들이 아버지이고 주님이 그 영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들이 충고할수록 나에게는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할 힘이 더 생긴다. 나는 성경에 따라 아들이시고, 사람이 되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그리스도가 오늘 아들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그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의 성령 48쪽)

위트니스 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동일인격임을 스스로 고백한다. 이 한마디의 고백은 지방교회가 양태론임을 명백하게 증거하고도 남는다.

지방교회가 정의하는 상호내재란 정통삼위일체가 아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그 개념은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에 있었던 완전치 못한 견해였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 삼위일체, 상호내재등의 논리는 모두 삼위일체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존재하였던 견해일 뿐이며, 실제로 그러한 견해는 모두 양태론이라는 위험한 논리로 발전해 나갔던 것이다.
삼위일체라는 용어에 대해 위트니스 리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 우리 헬라인 친구들은 한 본질과 세 실체라고 말했으나, 라틴인들은 한 본질(혹은 실체)과 세 인격이라고 말했다....이렇게 말한 것이 신비스로운 것으로만 이해된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충분하겠다......세 인격이라고 말한다면, 왜 세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가?.....우리는 그 각각을 유일한 <한 인격이라 부를지언정, 세 인격이라고 부를 수 없다>..(위트니스리 리, 성령51쪽)

위트니스 리는 이미 삼위일체의 용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단이지만 지도자다운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그는 이미 용어적인 삼위일체 개념을 알면서도 굳이 한 인격의 양태론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예들인 지방교회는 자신을 숨기고 위장하며 정통신학이란 이름 뒤로 숨으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다.

5) 상호내재의 교회사적 증거

이 부분이 지방교회가 자신들을 정통삼위일체라고 가장 자신있게 주장하는 것이 되어진다. 지방교회는 필자의 공식토론 제안에 대해서 이 주제만을 특별히 토론하자고 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부분에 특별히 많은 내용을 할애하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란 정통신학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장하기 위한 조작이다.

상호내재에 대해서 교회사적인 증거를 설명하여보자..... 과연 지방교회가 말하는 상호내재가 정통신학인가?
페리코레시스란 상호내재라고 해석하면, 장소적인 개념으로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페리코레시스”는 위격들의 상호점유[co-inherence of the persons: 헬라어로는 perichoresis, 라틴어로는 circuminsessio]라고 한다.
원래, 헬라어 "페리코레시스"는 상호내재가 아니라, 상호교류나 상호순환, 혹은 상호침투, 상호상통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

원래 페리코레시스(상호점유)라는 단어는 오리겐의 종속설과 이단들의 주장에 대항하여 제시된 단어였다.
즉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들과, 혹은 성부라는 주격 안에 종속적으로 성자와 성령의 인격이 있다는 오리겐의 종속주의적인 주장에 대항하여,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이것을 반박하기 위하여 "페리코레시스"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적본질이 서로 동일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요한복음14장의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 그 교회사적인 배경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상호점유라는 용어는 삼위가 모두 동일한 신성을 갖고 있다는 증거를 제공하게 되므로서, 이단들과 종속주의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는 일격을 가하게 된다.

# 갑바도기아 모델의 장점부터 얘기하자면, 상호점유론으로 대표되는 사상은 의심할 바 없는 진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 시대에 횡행하던 이단들에 대항한 싸움에서 천재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라 묘사할 수 있는 중요한 기여였다. 갑바도기아 모델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위격 들 각각이 서로 혼란이 없이 충분한 신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주장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91쪽)

# 갑바도기아 삼위일체론의 기본 원리는, 하나님의 본성은 성부의 위격 안에 인격화 되었다는, 혹은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잘 사용하는 용어를 쓰자면, 위격화되었다는 믿음이다. 이것이 오리겐의 기본원리였다. 그러나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이 기본원리를 여러 면에서 의미심장하게 생각하였다. 오리겐은 성부를 세 휘포타시스 가운데서 첫번째로 생각한 데 반해,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2위가 성부에게 나오듯이) 제3위가 성부에게서 직접 방출했다고 말하는 편을 선호했다(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84-185쪽)

페리코레시스란 "한 장소에 동시에 거한다"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고, 종속주의에 대항하여 예수님도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본질을 가졌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된 것이다.
종속주의란 하나님이 제일 크시고, 예수와 성령이 그 하나님 안에 포함 혹은 종속되어있다는 주장을 말한다.
그 상호점유라고 하는 성경적인 증거로 종속주의는 이단적인 주장으로 정죄되었다.... 그런 점에서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논리는 매우 진보된 이론이었다.
다시 말하여 상호점유는 본질적인 점유, 신적본질이 동일하다는 개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는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이유로 후대의 비판을 받게 된다.
종속주의와 같은 이단들이 사라지자 이제는 그 용어를 양태론자들이 악용했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와 같은 이단들이 그 당시에도 있었나 보다.

"또한 이 말은 모든 신적인 속성 각각이 세 휘포타시스 모두에게 똑같이 돌려진다는 의미다. 즉 세 휘포타시스는 모두 전능하며 전지하며 영원하다. 이 교리는 종속론의 문제를 피하게 해주며 사벨리우스주의나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성부고난설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골로새서 2:9 "그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에 대해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상호점유의 개념은 오리겐의 위계질서적 모델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진보였다. 그러나 이 개념은 휘포스타시스들이 <서로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느냐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이 점에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럴드브레이의 신론, 186-187쪽)

상호점유라는 증거는 종속주의와 같은 이단들에게 일격을 가하는 진보된 논리였다. 그러나 후에 그 용어가 위격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의문으로 비판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용어는 오늘날의 지방교회와 같은 이단들에게 악용되어지게 된다.
즉 지방교회는 종속주의에 대항하였던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를 교회사로부터 빌려와, 자신들의 상호내재가 정통신학이라고 거짓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지방교회는 어거스틴도 동시존재적인 상호내재를 주장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어거스틴도 양태론자인가 라고 되묻는다.

이미 언급하였다시피 이 용어는 삼위일체가 전개되고 발전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진보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이 휘포스타시스에 대한 상호내재가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어거스틴의 시대에 이르러 양태론자들에게 잘못 사용되어졌던 것이다. 즉 그들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삼위가 구별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문을 일으켰고, 그래서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페리코레시스는 성공적인 삼위일체 이론이 아니었다는 평을 받게 된다.
물론 이러한 고전적 삼위일체는 이단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논리는 삼위일체가 발전되고 전개되는 과정에서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 페리코레시스란 용어는 지금도 정통신학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지방교회와 같은 상호내재는 사용되지 않는다.....그것은 양태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적교류 - 상호교류, 상호순환, 상호침투의 개념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래서 상호내재는 인격을 구별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유기체적인 영적교류라는 개념과 삼위가 모두 동일한 신적본질을 갖고 있다는 증거로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가 사용되어지고 있다.

김석환박사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보면 그 서문의 추천사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일부 현대신학자들이 자기들의 신학적 문제점을 감추기 위하여 이 정통교부들을 끌어와 극찬함으로서 마치 자기들의 신학적 입장이 정통임을 은근히 과시해 왔다”(추천사, 서철원교수)

즉 지방교회와 같은 이단들이 자신들의 이단적인 주장을 감추기 위하여 이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주장을 부분적으로만 인용하며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정통이라고 위장해 온 것이다.
실제로 김석환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은 구체적인 비평이 없이 교부들이 갖고 있었던 고전적삼위일체론을 그대로 저술하고 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교부들의 고전적삼위일체가 곧 정통삼위일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여야만 한다.

다음 글의 내용은 “결론”이라는 제목으로 김석환박사가 직접 쓰고 있다.

“한편 세 번째 소주제인 페리코레시스 이론과 관련하여 헬라어인 페리코레시스 용어 그 자체를 분해해 보면, 페리코레시스 용어는 다소 정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상호내주의 의미도 포함하지만, 다소 동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상호관통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호관통(상호상통)의 의미에서의 피리코레시스에 관한 진술이 아타나시우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위격들의 삼위성에 관하여 진술할 때, 상호내재(공통내재)의 의미에서만 그들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김석환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349쪽)

어거스틴은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을 상호내재라는 장소적으로 알았고 상호상통, 상호교류라는 동적인 개념으로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실제로 양태론자라는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다.
결국 이 상호내재란 개념이 바로 양태론으로 발전하는 이론을 제공하여 주었던 것이다.
상호내재란 개념이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면 안된다. 상호내재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여야만 한다.
그렇기에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상호내재라는 개념이 비판을 받아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갑바도기아 교부인 바실은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단어를 상호교류, 혹응 대자성의 관계로 강조하여 해석하였다. 그러므로써 그는 양태론자들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바실(필자주: 초대교부)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통해서', '안에서' '함께' 라는 낱말을 구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성적 상호교류 또는 대자적 관계성을 강조했다. ..... 그는 신성의 통일성과 단일성을 강조하다가 군주신론(필자주:양태론)에 빠진 데오도투스나 사모사타의 바울을 경계했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1쪽)

바실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정확하게 페리코레시스를 상호교류, 순환이라고 해석하였으며, 본성의 동일성과 함께 위격의 구별성, 별개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 우리는 위격들의 상호내재성, 즉 후에 이른바, 페리코레시스(교류, 상호순환)라고 불리우는 교리를 발견한다. <신성은 분할된 위격들 안에, 분할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 세 위격들 속에는 '본성의 동일성'이 있다. 성자는 성부 안에 있고, 성부는 성자 안에 있다. <위격들의 구별에 따라서는 둘이 별개>이나, <본질의 공유에 따라서는 하나>이다. 위엄은 둘로 쪼개지지 않고, 영광도 나뉘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 의해 설명되는 영광송 역시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다. 형상에 따른 영광은 원형에로 나아간다. 한 경우에는 모방의 이유인 형상이고, 다른 경우에는 본질에 의한 아들이시다. 그러니까 세 위격은 각각 자신 안에 한 동일실체 전부를 갖는다. 그리고 각 위격은 실체에 관한 한, 다른 위격들을 완전히 포괄하고 관통한다. 그러나 <각 위격은 한 동일실체를 전부를 갖되, 다른 위격들과 공유할 수 없는 특성>을 갖는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바실 교부의 견해, 150쪽)

다음은 갑바도기아 교부중에 한명인 그레고리의 주장이다.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그대는 한 빛의 섬광과 동시에 셋에 의하여 즉시 조명받아야 한다. <개별성이나 위격들에서는 셋>이다. 또는 누가 그렇게 부르기를 원한다면 위(persons)에서는 셋이다. 왜냐하면 그 음절들이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한, 우리는 그 용어들에 대해서 시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체의 관점에서는 즉 <신격의 관점에서는 하나>이다. 왜냐하면 내가 만일 그렇게 말해도 좋다면, <위격들은 구분없이 나누이기 때문>이다. 위격들은 구분 안에서 연합된다. 왜냐하면 신격은 셋안에서 하나이고, 그 셋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셋 안에 신격이 있다. 또는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셋이 바로 신격이다.(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 그레고리 교부의 견해 217쪽)

그렇다면 현대의 조직신학자가 말하는 페리코레시스에 대해서 알아보자.....
웨인그루뎀은 분명하게 독립된 삼위와 독립된 개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 그(예수)는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게" 해달라고 했는데 이는 우리의 연합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완전한 연합과 같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으로, 우리의 하나됨은 영원하고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것이어야 함을 (하나님의 하나됨과 같이)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삼위를 통한 비유가 대단히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개개인의 성품을 흡수해 버리지는 못할 것을 경고하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완전한 연합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들은 <독립된 삼위>이다. 마찬가지로 어느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되겠지만,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능력, 관심 책임, 친구관계, 선호도, 욕망등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로 남아 있을 것이다.(웨인 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557쪽)

다음은 상호내재를 말하는 성경구절에 대해서 주석성경과 정통조직신학책을 살펴보자.
오픈2 주석성경은, 박형용교수, 유재원교수, 윤영탁교수가 주석의 감수위원으로 적혀 있다. 그 설명도 명백하게 구별되는 인격과 본질적 동일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오픈2 주석성경:(신약 172쪽, 173쪽)
14:9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듯 하나님을 본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아무도 그 분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는 분이심을 뜻한다. 곧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의 속성, 성품, 그분의 뜻, 계획등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성부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인격적으로는 구별 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심>을 말한다.
14:20 내가 아버지 안에....하나님과 예수님과 믿는 이들 사이의 <친밀한 영적결합>을 의미한다.

다음은 웨슬레목사가 말하는 페리코레시스이다. 그도 고유의 인격성과 함께, 본질의 단일성을 주장하고 있다.

# 웨슬리는 성부, 성자, 성령, 각자가 지니고 있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삼위의 상호내재를 주장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표현하는 신학적 용어로 '상호내재'(perichoresis)를 사용한다. 이 말은 "서로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상호내재함으로써 서로간의 일치를 이룬다. 이와 같은 상호내재의 속성에 의해서 성부, 성자, 성령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서로 <구별이 된다>. 이로서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구별될지라도> 서로 분리되거나 떨어지거나 나뉘어지지 않는 <단일성>을 갖게된다(김영선의 웨슬레 신학)

지방교회는 위의 웨슬레의 글을 앞부분만 인용하고 뒷부분을 제외하며 인용하다가 본인에게 발각되어 큰 창피를 당한 적이 있다. 웨슬레도 상호내재를 주장하였다고 하면서 “고유의 인격성”에 대한 설명을 삭제하였던 것이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489쪽)
한분의 하나님은 단지 한분의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라, 한분의 하나님의 존재 안에 있는 세가지 관계성이 곧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위격으로서는 전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이분은 아들이요, 저분은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이종성박사의 글이 요점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주고 있다. 삼위일체에서 동일한 것은 존재 안에 있는 관계성(상호교류, 상호상통)이다. 그러나 위격으로서는 서로 전적으로 다르다(인격의 구별)는 것이다.
즉 우리는 정통신학이 말하는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교회사적인 교리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은 지방교회의 주장을 맞는지 틀린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말을 하며 미혹을 하고 있다.

또 중요한 것은 지방교회는 이 상호내재를 장래의 하나님과 성도에게도 적용시킨다. 즉 하나님과 사람은 한 실체, 한 인격, 한 영이 된다는 것이다. 즉 신인합일론이라고 불리는 주장은 소위 하나님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이들의 구원론이며 천국관이며 재림이며 부활인 것이다.
다음 위트니스 리의 글을 보자.....

# 또한 신약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사실은 상호내재이다. 상호내재는 연합보다 깊다. 오늘날에도 우리와 하나님은 두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된 한 실체가 될 것이다.(위트니스 리의 새 예루살렘, 391쪽)

하나님의 삼위가 상호내재되어 결국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이 되었듯이, 하나님과 성도는 상호내재되어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루이스 벌콥은 지방교회와 같은 신인합일론적인 연합에 대해서도 구별되는 인격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정통신학자들은 모두가 구별되는 고유의 인격, 독립적인 인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 C. 신비적연합의 그릇된 개념들. 2. 신비적 오류:
다른 위험한 오류는 신비적 연합을 신자와 그리스도의 동일성으로 이해한 신비주의자들의 그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신비적 연합에는 본질의 연합이 있으며, 거기에는 한편의 인격성이 단순히 다른 편의 인격성으로 합체가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신자는 두 개의 구별된 인격들로 남아있지 않는다.(루이스벌콥, 벌콥조직신학 하권, 199쪽)

그렇다면 이제 상호내재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알아보자.....과연 요한복음14장의 in me 를 장소적, 인격적인 개념으로 해석하여야만 하는가?

성경의 용례에서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빌립보교회에게 편지를 썼다.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1:30)

바울과 빌립보교인은 서로가 서로의 인격 안에 거하는 상호내재, 동시존재를 뜻하였는가?
바울과 빌립보교인은 인격이 구별되어지며 한 믿음 안에서의 유기체적인 영적연결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또 지방교회는 주와 합하는 자는 그들의 신인합일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로 “한 영”이라는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나 본문을 전후로 살펴보자.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 된다고 지방교회는 해석한다.....
그렇다면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인격이 된다는 것인가? 우리는 동일한 적용을 위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만일 주와 합하는 자가 한 영이 되어지지 않는다면, 창기와 합하는 자도 한 몸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본문을 앞뒤로 읽어보라.... 그 성경본문은 양태론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의 음행과 음란을 비난하고 경고하는 내용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창기와의 음행과 음란을 삼가하라는 것이다. 즉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같은 음란함이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지는 자가 된다..... 즉 창기와 같은 음란한 자가 된다..... 그리고 주와 합하는 자는 주님과 유기체적인 연결을 하는 자가 되어진다.... 주님과 같은 거룩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창기와 창기와 합하는 자는 그 고유의 인격을 분명히 구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남선교회가 하나가 되자"고 하였을 때에 그 "하나"가 한 인격이 되자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 남선교회는 고유한 인격을 구별하면서, 같은 믿음, 같은 목적의 유기체적인 연결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왜 이들은 주와 합하는 자가 한 영이 된다는 것을 한 인격, 한 실체가 되는 것을 해석하는가?

양태론을 주장해놓고 성경에서 그것을 짜깁기로 맞추려고 시도를 하다보니....이러한 엉터리 해석이 등장하게 된다. 더욱 우스운 것은, 그동안 신인합일을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던 지방교회가 이제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는 성경본문을 들이댄다는 것이다.

이제 지방교회가 말하는 궁극적인 상호내재가 무엇인지 나타난다.
그들은 지방교회가 상호내재를 주장하기 때문에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상호내재란 결국 한 인격, 한 실제, 한 영이 되는 것을 가르킨다
결국 그들은 명칭만을 삼중적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삼위의 인격을 구별한다고 말한 것이 모두 거짓말로 밝혀지는 것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지방교회의 상호내재하시는 삼위하나님은 결국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을 가르킨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성도를 포함하는 상호내재는 성도와 하나님이 한 인격, 한 실체, 한 영이 되는 것을 말한다.
만일 상호내재가 삼위의 인격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방교회의 신인합일도 하나님과 성도의 인격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정확히 말할 수 있어야만 하며, 그렇다면 위트니스 리의 아래 주장에 대해서 지방교회는 그가 이단이라고 말해야만 한다.

# 또한 신약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안에 거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사실은 상호내재이다. 상호내재는 연합보다 깊다. 오늘날에도 우리와 하나님은 두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된 한 실체가 될 것이다.(위트니스 리의 새 예루살렘, 391쪽)

# 신약은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함께하신다고 말할 뿐 아니라 아들과 아버지가 상호 내재하심을 계시한다. 아들이 아버지와 상호 내재한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 안에 계시며 아버지가 아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7장 21절은 이런 상호 내재를 계시하는 또 다른 구절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들과 아버지는 상호 내재의 방식으로 동시 존재하신다. 이것은 그분들이 동시 존재하실 때 아버지는 아들 안에 존재하시며 아들은 아버지 안에 존재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편, 33쪽)

#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다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고 그리스도도 우리와 하나가 되실 수 있다. 우리는 그 분과 한 영이 되었다. 하나님이 당신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당신 안에 담기 위한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45쪽)

#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왜 그런가? 그 목적은 우리를 그 분과 똑같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똑같은 것이다.(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3쪽)

지금까지 살펴본 양태론과 신인합일론, 이 두가지가 위트니스 리는 성경의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는 하나님의 공급(양태론)과 분배(신인합일)라고 말한다.

6) 경륜적 삼위일체

이들이 상호내재와 함께 주장하는 것이 경륜적 삼위일체이다. 이 용어는 교회사나 정통신학을 아는 사람에게는 섣불리 사용하지는 않지만, 초신자들은 생소한 용어이므로 반박을 하지 못하게 된다.

1# 어찌 주님이 기도하시는 아들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가 될 수 없겠는가? 기도하는 것을 듣고 계시는 아버지는 기도하는 아들이시며, 기도하는 아들은 또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이다.(신약의 결론. 하나님 323쪽)

즉 삼중적으로 동시에 거하는 상호내재를 주장하다보니, 예수님의 안에는 하나님과 성령이 함께 동시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성부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자기가 자신안에 있는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 되고만다.
즉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성부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 되므로, 결국 양태론이 되고 만다. 그런데 위트니스 리는 뜻밖의 주장을 한다.

2# 그러므로 요한복음17장에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 그분은 땅에 계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셨다. 그 분은 땅에서 기도하고 계신 분이셨으며 동시에 하늘에서 기도를 들으셨던 분이시기도 했다.(하나님 323쪽)

왜 위트니스 리는 스스로 모순이 되는 주장을 하고 있을까?
공간적, 장소적으로 동시존재, 상호내재하는 삼위가 하늘과 땅에 분리되어 있다면 곧 모순이 되지 않는가?
지방교회는 실제로 이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자신들도 구별되는 인격을 주장하므로 정통삼위일체라고 위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는 동시존재적인 상호내재를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의 이 상반된 주장은 “경륜적삼위일체”라는 변명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 "경륜적"으로 말하자면 아들은 이 땅에 계셨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다. 그러나 요한복음14장에서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본질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아들이 이 땅에 계셨을 때, 아버지는 그분 안에 계셨으며, 그 분은 아버지 안에 계셨다. 우리는 "본질적"이라는 단어를 그분의 본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을 언급하는데, "경륜적"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는데 사용한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고 아들은 땅 위에 계셨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즉 그 분의 실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에 따르면, 아들은 항상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셨다. 이것은 상호내재의 문제이다. 이들은 아버지와 하나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상호내재하였다. (위트니스 리, 그리스도. 33-34쪽)

즉 본질적으로는 공간적, 장소적으로 제한되는 동시존재, 상호내재를 하는데, 그러나 경륜적으로는 하늘과 땅에 계셨다는 것이다... 위 글을 읽고 지방교회도 구별된 삼위를 인정한다고 생각할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다음 글을 읽어보자....

# 본질적이라는 것은 생존과 존재를 위한 것이며, 경륜적이라는 것은 일과 기능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본질적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분의 존재를 가르키는 것으로, 그 분의 존재하심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경륜적인 삼일성을 말할 때 이는 그분의 움직이심과 역사와 기능을 가르키는 것으로 그분의 경륜 안에 있는 거룩한 삼일성을 의미하는 것이다.(위트니스 리, 성령 69쪽)

이들이 말하는 용어를 파악하면, 그 다음부터는 이들의 주장은 전혀 어렵지 않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란 실제적인 삼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과 기능을 위한 사역적인 분류인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격적으로는 구별되지 않고, 단지 사역적으로만 구별된다는 것이 경륜적 삼위일체인 것이다. 다시 말하여 존재론적으로는 오직 한 인격안의 삼중적인 동시존재인데, 단지 사역적인 관점에서 보면(실제가 아니라), 하늘에도 땅에도 계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에, 위에서 보는 견해와 아래에서 보는 견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정통신학이 말하는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삼위, 상호관계를 갖는 삼위는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통신학자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에 대해서 살펴보자.

# 앞서 언급했던 유니테리언주의의 두 번째 전통은 아마도 첫 번째 전통보다 오래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훨씬 더 복잡하다. 이 두 번째 전통은 터툴리안시대 이래로 발전한 서구 혹은 라틴전통신학과 연결되어있다. 그 뿌리는 명백하게 경륜적 삼위일체론에 연결되어있다. 터툴리안을 비롯한 몇몇 사람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받아들이고 고도로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경륜적 도식의 기본 전제를 받아들였는데, 그 전제란 성부와 성자가 영원 안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성부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전제를 역사에 대한 특정한 경륜적 이해에 연결시켰다. 역사 안에서 성부 역시 자신의 역할이 있었다. 이러한 경윤주의에 따르면, 구약성경은 성부에 대한 계시의 시대였으며, 성육신에서 승천에 이르는 시기는 성자에 대한 계시의 시대였고, 오순절 이후부터의 시기는 성령에 대해 계시하는 시대라는 것이었다...........그러나 터툴리안은 경륜주의가 가지고 있던 또 하나의 오해에 반대했는데 그것은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에서 알게 된 견해였다. 프락세아스는 알려지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라고 보기도 하지만 서머나의 노예투스의 가르침에 훨씬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 위격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2-153쪽)

경륜주의는 양태론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륜주의는 4세기 이후로는 정통신학이었던 적이 없었다.

# 그러나 이 견해는(필자주: 경륜적삼위일체는) 전체 교회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신학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 후부터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자는 없었다......이러한 이유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제4세기 이후부터는 신학영위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7쪽)

지방교회는 초대교회 교부들도 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구분하여 주장하였기 때문에, 지방교회가 말하는 경륜적삼위일체는 정통삼위일체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종성박사의 교회사적인 삼위일체론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허위조작인가 곧 알 수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경륜적 삼위일체란 이미 4세기 이후에 자취를 감춘 이론일 뿐이다. 이들은 삼위일체를 경륜적과 본질적으로 구별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양태론이 아니라고 위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그들은 본질적으로는 상호내재(페리코레시스)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다음 자료를 보면 이 상호내재란 개념이 바로 양태론으로 발전하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상호내재란 개념이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면 안된다. 상호내재는 고유의 인격성을 강조하여야만 한다. 그렇기에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상호내재라는 개념이 비판을 받아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과연 내재적(본질적) 삼위일체와 경륜적(사역적) 삼위일체라고 분류하는 것이 정통신학일까?
특히 지방교회와 같은 경우는 양태론적 비난을 피하기 위한 고의적인 조작성이라고 볼수 밖에 없으며, 그 결과 매우 조잡스러운 논리가 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지방교회는 교회사에서 그 용어만을 빌려 온 것으로, 그 개념은 전혀 다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본질적 삼위일체를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을 때에, 경륜적으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내재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다.

# 경륜적인 면에서 그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시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그분은 한 하나님이시다......경륜적인 면에서 셋-아버지 아들, 성령-은 분리 된 것처럼 보이고, 각기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나 우리의 체험면에서 볼 때 성령은 하나님과 동등한 위격이요 하나님 자신이다.(성령70쪽)

위트니스 리는 경륜적(사역적)으로만 삼위이며, 실제로는 한분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본질적으로는 삼중적이며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자신들이 삼위의 인격을 구별한다는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이 단번에 밝혀진다.

삼위일체를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구분하여, 그 두가지가 전혀 다른 관점인 것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자기의 이단적 주장을 합리화시키려는 조작일 수 밖에 없다.
삼위일체란 인격이 셋이고 본질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재적으로나 경륜적으로나 동일하게 적용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삼위가 인격적으로 구별되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성경적인 기록자체이기 때문이다.
대외적이든, 대내적이든, 본질적이든, 경륜적이든, 그것을 가리지 말고, 삼위는 인격적으로 구별되어지며 상호교류가 가능하지만, 그 세 위격의 본질은 오직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야만 한다.
성자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은 비둘기처럼 머리 위로 임하셨으며, 하늘로서는 성부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성경기자의 기록이다.
이것을 경륜적인 것으로만 설명하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이 성경적인 기록은 본질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여야만 한다. 성경의 기자는 4세기에 만들어진 이 논리에 대해서 알 수가 없었으며, 오로지 경륜적인 관점에서 이 성경적인 기록을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어느 때라도 기독교의 성부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성부하나님이 돌아가신 적이 있거나, 돌아가실 가능성이 있다면, 하나님은 생명의 근본이시며 전능하신 불사의 하나님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성부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이 돌아가셨다는 것에 동의하여야만 한다.
이것이 경륜적으로만 돌아가시고, 본질적으로는 돌아가시지 않았다고 설명할 수가 있는가?
그러한 설명은 궤변이며, 분명한 양태론적인 이단이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분과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는 분의 인격이 구별되어지지 않는 주장은 양태론이며 서 성부고난설이며, 결코 그러한 주장은 성경적이 아니며 기독교의 것이 아니다.

내재적으로는 삼중적인 동시존재, 상호내재인데, 경륜적으로는 세 단계와 과정이라는 지방교회의 설명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너무 유치하고 조악한 주장이다.
양태론적인 주장을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위장하고 감출 수 있을까하고 생각한 위트니스 리의 개인적인 방법이 지방교회를 더욱 망가뜨린 것이다.
게다가 그 용어를 교회사에서 빌려와 정통신학인 것으로 위장하려는 수법이 지방교회를 더욱 악화시켜 사이비집단으로 추락시키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양태론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을 발각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숨기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는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방교회 위트니스 리의 주장대로,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주장을 한다.....
그렇다면 예수와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 거치는 단계와 과정이 되어진다.
즉 성부의 시대에 예수라는 신약시대의 과정은 아직 거치지 않은 장래의 과정이 되어지며, 성령이라는 과정은 오순절 이후에 하나님 자신이 거쳐야 할 미래적인 과정이 되어진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내재적으로 보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이 동시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볼 때에,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은 동시존재하는 요소란 말인가? 아니면 서로 시간적 차이를 갖는 과정과 단계가 되는가?
본인의 사역적 직분의 구별, 즉 교회의 권사와 회사의 사장과 집안의 가장이 상호교류할 수 있는가? 아니면 상호내재 혹은 동시존재할 수 있는가?
아니 본인이 전에 어느 회사에 과장이었고 부장이 되었었다. 그리고 지금 사장이 되었는데, 본인의 과장과 부장과 사장이라는 세 단계와 과정이 한 인격에 상호내재, 동시존재될 수 있는가?
본인이라는 동일인격의 과장과 부장과 사장이라는 과정과 단계가 서로 인격적인 상호교류를 할 수 있다는 해괴망칙한 주장이 바로 지방교회의 주장이다...게다가 더욱 흉칙스러운 거짓말은 이러한 주장을 정통신학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

성경의 기자들이 본 기록은 과연 내재적인가? 경륜적인가?
도대체 어떤 기록은 내재적으로 분류하고, 어떤 기록은 경륜적이라고 구분하라는 이야기인가?
실제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 어느 사건은 내재적이고, 어느 사건은 경륜적인 되는가?
지방교회의 양태론적 견해에 불리하면 경륜적이고, 유리하면 내재적이라고 구분하는가?

과연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에, 경륜적으로 하늘로 기도하라고 하셨단 말인가?
과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실 때에, 그 절규의 소리를 오직 내재적으로 들으라고 하셨는가?
과연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성부하나님께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을 때에, 그것을 내재적과 경륜적 두가지 관점을 나누어 기도하셨단 말인가?

이제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는 이제 삼체일위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본질적으로는 셋, 인격은 하나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양태론을 피하기 위한 변명이 그야말로 조잡하고 유치한 궤변이 되어지며, 지방교회의 양태론은 황당한 논리가 되고만다.

6. 고전적 삼위일체: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하였으므로 정통삼위일체인가?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발전해갔던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자. 삼위일체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양태론이란 논리는 항상 등장했으며, 그 양태론은 2000년 교회사동안 언제나 위험하고 이단적인 주장이었으며 양태론이 정통삼위일체가 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단지 그 고전적 삼위일체가 전개되어지는 과정에서 정통삼위일체는 양태론과 언제나 투쟁하게 되면서 발전되어진다. 그 당시의 초대교회 교부들의 견해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 개념적인 면에서 그들은(갑바도기아 교부들) 휘포스타시스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바르게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사고에서 그 용어는 우리가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연상하는 충만한 의미상의 발전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2쪽)

#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한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쪽)

# 3세기 초에 터툴리안은 인격들(persons), 얼굴들(faces), 가면들(masks)과 같은 단어의 의미를 빌어서 세 위격, 한 본질(Three persons, One essence)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후 같은 세기의 사벨리우스는 터툴리언의 개념으로부터 약간 애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양태론(이는 문자적으로 아버지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성부고난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는 신고난설, 즉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과 같은 개념으로 삼위일체론을 변형시켰다. 그는 세 개의 구별된 실체들이 한 신성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에 따라서 성부의 형태, 성자의 형태, 성령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참조: 물, 얼음, 수증기와 같이 유사성을 갖는 세 인격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아가폐 성경사전 779쪽)

#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헬라어 "프로소폰"은 라틴어의 "페르소나"라는 말과 같이 그 어원이 얼굴, 모양, 또는 배우가 쓰는 가면을 의미하였다. 한 배우가 세가지의 가면을 쓸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대에서 한명의 배우가 서로 다른 세 사람의 가면을 쓰고 다른 역을 맡을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인격의 하나님이 세 역할, 즉 창조자로서, 구속자로서, 성화자로서의 삼중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가르칠 위험을 갖고 있었다.
즉 용어적으로 볼 때에 한 인격적 존재가 경륜적(사역적)으로 세 역할을 하였다고 오해될 수 있었으므로, 그러한 견해가 곧 양태론으로 발전하는 위험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 수세기에 걸쳐 많은 훌륭한 교사들이 삼일하나님의 두 면을 일치시켜 보려했다. 그렇게 하는데서 그들은 어떤 용어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인격'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한 하나님의 세 인격이라 말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삼일성을 설명하기 편리하므로 우리도 이 용어를 임시로 빌어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한 하나님의 세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어거스틴이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한 것을 보자. 어거스틴은 삼일하나님의 비밀을 적절하게 표현할 인간의 언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삼위양식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신약의 결론. 성령51쪽)

위트니스 리는 어거스틴이 양태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던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이 상호내재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지방교회는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의 모순인가를 알 수 있다.
정통신학 역시 어거스틴의 이러한 오해적인 비난에 대해서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 교회가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는 동의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 것은, 어거스틴이 죽은지 반 세대가 지난 451년의 칼케톤 공의회에서였다. 이리하여 페르소나에 대한 정의에 휘포스타시스의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성격을 포함시키는 길을 열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이 위격들을 "존재양식"이라고 말하면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영구성이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어휘선택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가 선택한 어휘는 그를 사벨리우스주의로 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이것은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얼굴이나 가면을 뜻하기 때문에 삼위가 한분 하나 님의 세 얼굴로 이해되어 결국 양태론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역주)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8쪽)

정통삼위일체는 곧 어거스틴이 주장이 아니다.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의 용어적인 개념은 어거스틴이 죽은 후 500년 후에 공식적으로 동의어라고 선언되었다.
이제 지방교회는 어거스틴이 사용한 용어였으므로 정통신학이라는 궤변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양태론이 왜 이단적인 주장이 되는가?
예수님이 곧 성부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이라고 주장하는 양태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성경적인 답변을 할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양태론이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과 예수님의 인격적 구별이 되지 않는다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진 예수와 그것을 속죄제물로 온전히 받으신 하나님이 동일한 인격이 되고만다. 즉 기독교의 십자가 대속의 개념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또 지방교회 주장대로 보자면, 예수님은 이미 살려주는 영이 되버렸기 때문에, 양태론으로 보면, 예수의 인격적인 재림은 없게 된다. 즉 종말론과 구원론조차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7. 하나님의 편재

더군다나 삼위의 하나님은 오직 성도의 안에만 내재하고 다른 곳에는 전혀 계시지 못하는 분들이 되고만다. 즉 지방교회의 주장은 하나님의 편재, 무소부재라는 속성을 무시하며, 게다가 오직 한 장소에 삼위하나님을 모두 가두어 버렸다.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을 가두어 버린 것이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언급하고 있는가?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8-10)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17:24-25)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23:23-24)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15: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3)

정통신학이 말하는 하나님의 편재성은 성경적인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게다가 지방교회는 너무나 우습고 자의적인 해석을 하고 있다.
본인에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묻는다.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시며, 성도안에도 계시느냐고 물으면서,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하나님은 1/3이고 땅에 있는 하나님은 1/3이며 성도의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이 1/3이냐고 묻는다.
참으로 지방교회에게 측은한 심정을 느낀다. 지방교회는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해서 전혀 이해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000명의 성도에게 내재하시는 하나님은 1/1000 씩의 하나님인가?
온 세상에 충만하신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만 계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지방교회는 무엇이 성경적인지 정말로 분별하지 못하는가?
삼위하나님을 한 공간에 가두어버리는 지방교회는, 성경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인가를 묻고 싶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서나 충만하시다..... 그 말은 역으로, 하나님께서 동일한 의미에서 모든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한 장소에 나타나실 수도 있다는 개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나타나시지 않는 방법으로, 어떤 곳에 인격적으로 나타내시며 임재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시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셨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나타나셨으며, 성전에서도 임재하셨고 몇몇 선택된 사람에게는 부분적으로나마 그 모습을 보이신 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는 없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으며(출33:20) 하나님을 본 자는 없다.(요일1:18)
예수님은 신체적인 부활을 하셨고 그 분은 고기와 떡을 먹으셨다. 신체를 가지신 분이 어떻게 성도의 안에 들어오는가? 삼위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도의 안에 거할 수가 없다.
우리는 성령하나님의 인격적인 내재를 통하여 영적으로 삼위하나님과 교제를 한다.

예를 들면, 그 하늘보좌가 어느 특정한 공간적 장소적인 개념에 존재하는 의자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곳에 어디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어느 곳에서나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인 기록에 대해서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적인 영역을 말하며, 그러한 개념은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며 편재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경을 굳이 요약하자면.....

1. 성부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특별히 "하늘"이라고 불리는 보좌에 계신다.
2. 성자 하나님은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에 계셨고, 지금은 "하늘"이라고 불리는 보좌에 계신다
3. 성령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 안에 인격적으로 거하시는 신격의 대표(Present Representative)이시다

우리의 안에는 성령하나님의 인격이 계신다. 물론 삼위하나님은 서로 상호교류하시며, 우리는 성령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온전하신 신적본질을 소유하게 된다.
양태론에 의하면 재림예수의 인격이 부정되어진다. 이미 성령이 되어버린 예수님의 인격은 이 세상에 없으며, 오직 성도라는 공간에 삼중적인 동시존재로 갇혀 버리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방교회에게는 인격적인 예수님의 재림이 없으므로 종말론에서도 이단적 주장을 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는 영 안에서 하나님과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하며 그분들과 교제한다.

요 13: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예수님이 오직 성도의 안에만 갇혀있다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지방교회는 “영”이란 개념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이 성도들 안에만 갇혀 계시다면, 지방교회는 사람이 죽으면 그 신(spirit)이 사람의 안으로 들어간다고 가르치는가?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전에 기억하라”(전12:7)

십자가 강도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지방교회 성도들의 안에는 십자가 강도도 함께 있는가?

하나님은 누구도 보지 못한다. 이것은 성경적인 기록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일1:18)

하나님은 본 사람은 죽고만다. 이것 역시 성경적인 기록이다.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33:20)

지방교회는 삼위의 인격이 모두 성도의 안에 들어온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성경에 그러한 구절은 단 한마디도 없다. 그러한 위트니스 리의 주장은 성경을 부정하는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볼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으며, 다른 곳에는 계시지 않고 우리 안에만 계신다는 것인가?
게다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시간은 종말적이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분은 성령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시다.
성부하나님은 온전하게 거룩하신 분이므로 우리 안에 들어오실 수가 없으며, 성자예수님은 신체를 가지셨으므로 우리 안에 들어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성령을 파송하셨던 것이다.
성령께서는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 분은 하나님의 신적본질을 가지신 분이다.

물론 우리는 삼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성령하나님을 통하여 삼위하나님과 상호교류한다. 영 안에서 하나님에게 예배와 기도를 드리며, 영 안에서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께 간구한다.
즉 성령의 교통하심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셔서 신체적인 부활을 하셨고 그 분은 고기와 떡을 먹으셨다.
신체를 가지신 분이 어떻게 성도의 안에 들어오는가? 성부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도의 안에 거할 수가 없으며 성자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우리 안에 거할 수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성령님에 의해서 아버지께 나아가느니라"(엡2:18)
(For through him we both have access to the Father by one Spirit)    

예수님과 성령님, 그리고 아버지라는 세 인격적 관계와 그 각각의 사역이 잘 언급되어 있는 구절이다.  
For Jesus Christ(말미암아), by Spirit(의하여), to Father(께)를 의미한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일4:12)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사랑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8. 양태론의 성경적인 모순:

다음은 양태론이 모순이라는 성경적인 증거이다.

1)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기도한 것인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인가? 경륜적으로 질문한 것이 결코 아니란 점을 잊지 말기 바란다.

2)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에게 바쳐진 제사였는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바쳐진 제사였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였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상호존재과 동시존재를 주장하게 되면, 자신이 자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 제사로 바쳐지기 위해 예수님 자신을 자신에게 바치는 것이 되어진다. 제물로 바쳐지는 분과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인격적으로 구분되어야만 한다.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 십자가의 대속이다......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바쳤으며 누가 그 희생제물을 기쁘게 받았는가?

3)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이 말씀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영혼을 부탁한다는 것인가?

4) 다윗이 기록한 시편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라는 구절은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는 의미로 재조명 되어진다(마22:43). 다윗이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를 본 것인가? 하나님과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예수를 본 것인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이 시편의 기록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셨으며, 다윗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별되었다(동시대에 공존하셨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구절이다. 신약에서 마22:43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말한 "내 주"는 곧 예수이시다..... 다윗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를 구별하였으며 예수님이 직접 구약의 이 말씀을 인용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삼신론자인가?
만일 인격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다윗은 세 인격을 어떻게 구별하였을까?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이 장차 거쳐야 할 두 번째 단계를 구별하여 보았는가? 신약에서 예수님은 그 문장을 유대인들에게 친히 직접 말씀하셨다.

5)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는 성경말씀은, 다른 보혜사가 곧 동일한 보혜사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구별된 인격으로 다른 보혜사를 말하는가?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면서 왜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셨으며, 3인칭대명사 "그"라고 하셨는가?

6) 사람과 한 분 하나님 사이의 또 다른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가 있다는 성경말씀(딤전2:5)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의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한 분이라는 것을 가르키는가? 바울은 삼신론자인가?

7)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 인격이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인격인가?
요한12:28의 예수님의 지상간구와 하나님의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무엇인가? 또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하나님의 소리는 예수님 안에서 들려오던 예수님 자신의 소리인가? 복음서의 기자들은 삼신론자들인가?

8)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다. 이 삼위는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하나의 인격인가? 스데반은 삼신론자였는가?

9)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주기도문에서 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10) 사도행전 10:37-38 성경본문...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예수에게, 자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아니면, 부어주시는 하나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되어있고, 부음을 받으시는 예수에게도 삼위가 상호내재되어있으며, 붓는 성령도 삼위가 내재되어있단 말인가?
혹은 자신이 자기에게 자신을 부어주셨는가?
누가는 삼신론자였는가? 아니면 구위삼체론자였는가?

지방교회는 인간론, 기독론(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한 견해도 전통적인 기독교와 전혀 다르며 초대교회부터 있어왔던 이단적인 주장들을 추종한다.
또한 신론뿐 아니라 구원론, 종말론, 교회론, 인간론도 모두 전통적인 기독교의 것이 아니다.
또 부활관과 천국관도 전혀 다르며 모두 극단적이며 부분적이다.
예를 들자면 심지어 그들은 단체구원을 주장하며, 믿음이 아닌 행위구원을 주장하며, 죽어서 가는 장소적인 천국의 개념도 부정하며, 실제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거듭남, 부활, 영생이라고 주장한다.
또 위트니스 리의 성경해석은 심한 알레고리(풍유)로 왜곡되어있다. 어떤 경우에는 누가 보아도 전혀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유치한 해석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라는 첫단추를 잘못 꿰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를 언급하는 성경적인 기록을 모두 달리 해석하여야만 하는 위트니스 리로서는 무리한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위트니스 리는 스스로 지방교회가 기독교와 다르다고 수없을 만큼 그의 책에서 반복하여 말하고 있으며, 카톨릭과 기독교를 사탄의 교회, 음녀, 바벨론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으므로, 여느 이단과 동일한 배타적이며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트니스 리의 후계자들은 - 이중의 얼굴을 가진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를 갖고 있다고 하면서, 오늘도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9. 지방교회가 주장하는 성경적인 증거

(1) 요8:24의 성경해석:

물론 지방교회는 소위 난제라고 불리는 성경본문만을 인용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삼위의 인격을 구별하는 일반적인 성경본문에 대해서는 전혀 인용을 하지 않는다.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4)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이라는 구절을 보면,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는듯 하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본문을 보면 "I am he" 라는 인칭대명사가 없다.
그래서 킹제임스 영어성경은 he 라는 단어를 괄호 안에 넣었고,

I said therefore unto you, that ye shall die in your sins: for if ye believe not that
I am [he], ye shall die in your sins.

NIV 영어성경은 he 라는 인칭대명사를 빼고, I am the one 이라고 번역하였다.

I told you that you would die in your sins; if you do not believe that I am the
one I claim to be, you will indeed die in your sins.

헬라어 성경원문을 보면, he 라는 인칭대명사는 없다.
"피스티오(to believe) 호티(that) 에고(I) 에이미(am)"라고 되어 있다.

항상 이단들은 평범한 성경본문에는 관심이 없다. 난제라고 생각하는 부분만을 교리에 맞추어 채택한다.
이단들이 가장 많은 인용하는 것이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이다. 성경은 수많은 곳에서 믿음을 강조하는데 단 한 구절이 믿음을 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되어 있다.
물론 그것은 믿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며, 회개를 강조하는 반어법적인 표현기법이다.

그렇다면 성경본문은 어떻게 해석하여야만 할까?
that I am.... 혹은 What I am....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났을 때에 모세가 하나님에게 묻는다. 하나님이 누구라고 유대백성들에게 말해야 되는가 하고 말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한다. I am What I am (that I am)

즉 예수님이 자신을 I am 이라고 한 것은 스스로 계신 분이라는 것과 오래 전부터 계신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있기전부터 예수님은 계셨다고 말씀하시는데(요8:58) 그 구절이 바로 I am 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하시니”(요8:58)

지방교회는 특별히 요8:24 바로 다음 구절을 읽어 보는지 묻고 싶다.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요8:26-27)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의 내용은 "나를 보내신 이가 아버지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을 유대인들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지방교회는 예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를 보내신 이가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프쉬게)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프뉴마)이 되었나니(고전15:45)

지방교회는 이 구절을 통하여 예수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마지막 아담이 과정을 거쳐 성령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구절이 아니다.
앞뒤의 전제적인 문맥을 보면 "아담과 예수"를 대비시키는 그러한 대조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본문은 마지막 아담은 무엇이 되고, 예수는 무엇이 되고....이러한 변화과정을 말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마지막 아담이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문자적으로 해석하려면, 아담은 산 혼이 되었다고 문자적인 해석을 하여야만 하지 않는가? 그러면 아담은 산 혼이 되었다고 해석하여야 하는가?
창세기2장7절을 보면 아담은 생령(네페쉬 하야=생명체)가 된 것이다.
성경본문의 앞부분을 살펴 보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5)

본문은 부활을 말하고 있다. 즉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본문은 아담이 생기를 불어넣음을 받아 육의 몸(생명체)가 된 것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신령한 몸이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르다. 즉 예수는 구원주가 되심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부활하셨다. 그분은 살려주는 영적존재-신령한 부활의 신체가 되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과연 "프뉴마"라는 단어가 언제나 "성령"이란 뜻으로 해석되어지는가?
이것이 아마 관점이 되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프뉴마는 언제나 성령으로 해석되어지지 않음을 알려 드리며, 본문에서 볼 때에는 오히려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어린 요한이 "심령"이 강하여졌다는 구절(눅1:80)에서 "심령"은 프뉴마인데, 이것은 당연히 성령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어린 요한이 성령이 강하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심령"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 눅24:37과 39절에서도 프뉴마는 단순한 육체와 반대되는 "영"의 개념으로 사용되어진다.
그렇다면 고후와 고전을 기록한 바울의 경우에는 어떻게 사용되어지는 지를 보기로 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이 로마서에서 "성령"은 "프뉴마"이지만 우리 "영"도 프뉴마인 것이다.
즉 프뉴마가 프뉴마와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영"을 성령이라고 번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갈6:18)

이 심령도 프뉴마이다..... 즉 프뉴마가 언제나 성령이라고 번역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가 영이시라는 개념은 반드시 주가 성령이 되셨다고 해석되어질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신령한 몸을 갖고 계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영적존재라는 개념으로서 "프뉴마"라고 해석하며, 그 분이 구원주가 되심을 "살려주는 영적존재"로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또 [현대인의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존재가 되었다라고 쓰여 있으나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자.... 모두 아담은 생명체적인 개념, 마지막 아담 예수는 살려주는(구원을 해주시는) 영적존재라는 개념으로 번역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spirit 란 단어를 모두 소문자로 번역하였다.

And 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was made a living soul; the last Adam [was made] a quickening spirit.(KJV 영어성경)

So it is written: "The first man Adam became a living being"; the last Adam, a life-giving spirit.(NIV 영어성경)

번역본은 국어이든 영어이든, 모두 성령이 아니라, 영으로 번역하였다.
위트니스 리는 성경원문을 갖고 있는가? 이러한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해석이 성경적인 해석인가?
교리가 성경에 근거를 한다면, 원본이 없고 번역본만을 갖고 있는 우리는 당연히 그 번역본에 의하여 교리가 근거를 갖아야만 한다. 굳이 번역본이 틀렸다고 해석해야만 하는 교리가 성경적이란 말인가?

성경적인 증거를 몇 개 더 들어보자.
마5:3의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 심령도 "프뉴마"이다.
또 육신과 대조적인 영적인 개념으로 분명히 사용된 구절에서도 "프뉴마"가 사용되어지는데, 마26:41의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에서의 "마음"도 프뉴마이며, 요4:23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신령도 "프뉴마"이다.
지방교회 사람들은 놀라지 말기 바란다..... 마8:16과 막5:13등 몇구절에서는 "귀신"이 "프뉴마"라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지방교회는 그 단어를 성령으로 해석하지 바란다.
그러한 해석은 오직 프뉴마가 성령이 아니라, "영적존재"라는 뜻으로 해석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창세기 2장7절을 참고하여 보자.
사람이 생령(히:네페쉬, 헬:프쉬게)이 되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영적존재가 아니라 생명체(Living Being)이다. 이 네페쉬라는 단어는 창세기1장20, 21. 24절에서 짐승에 해당하는 단어도 "네페쉬=생물체"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2장19절. 9장4절의 "생명"도 "네페쉬"이다.

즉 아담은 "생명적 존재".... 마지막 아담인 예수는 살려주는 "영적존재-신령한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문맥을 무시하고 갑자기 예수가 성령이 되었다는 식의 해석은 인정받기가 매우 곤란한 견해이다. 그러한 주장은 자신들의 양태론을 입증하기 위하여 성경구절을 짜맞추는 식이 될 뿐이다.

성경본문의 다음 구절도 보라. 모두 부활에 대한 구절이다.
예수님이 첫 부활의 열매이시며 그 부활의 몸이 신령한 몸이신 것은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46-49)

아담은 누구인가? 흙에 속한 자이다. 예수는 누구인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자이다.
우리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흙에 속한 형상을 갖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부활시에 하늘에 속한 자의 몸, 신령한 몸을 갖게 될 것이다.
본문은 이렇게 해석되어진다.
아담은 흙에 속한 생명체였지만, 마지막 아담인 예수는 살려주는 구원주로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부활체이시다.

(3) 고전6:17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7)

이 성경본문만 보면 주와 합하는 자는 정말로 주와 한 영이 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성경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부분적으로만 치우치는 해석이 된다. 원래 이단들은 그 구절만을 분리시켜 해석을 한다.
성경본문의 전문을 함께 보자...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6:16-17)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한 인격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인격이 된다는 것인가? 우리는 동일한 적용을 위하여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만일 주와 합하는 자가 한 영이 되어지지 않는다면, 창기와 합하는 자도 한 몸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본문을 앞뒤로 읽어보라.... 그 성경본문은 양태론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의 음행과 음란을 비난하고 경고하는 내용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창기와의 음행과 음란을 삼가하라는 것이다.
즉 창기와 합하는 자는 창기와 동질, 동류의 음란한 자가 된다...그리고 주와 합하는 자는 주님과 유기체적인 연결을 하는 자가 되어진다.

예를 들어 "우리 남선교회가 하나가 되자"고 하였을 때에 그 "하나"가 한 인격이 되자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 남선교회는 같은 믿음, 같은 목적의 유기체적인 연결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왜 이들은 주와 합하는 자가 한 영이 된다는 것을 한 인격, 한 실체가 디는 것을 해석하는가?

양태론을 주장해놓고 성경에서 그것을 짜깁기로 맞추려고 시도를 하다보니....이러한 엉터리 해석이 등장하게 된다. 더욱 우스운 것은, 신인합일을 부정하고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던 지방교회가 이제는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는 성경본문을 들이댄다는 것이다.

(4) 이사야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지방교회는 이 아기가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므로 예수 =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그것은 정통삼위일체의 당연한 명제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사야9:6은 아기가 하나님의 인격과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아기의 이름이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예수는 하나님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분으로 불리고 있음을 생각하라.

(NIV 영어성경) He will be called....
(KJV 영어성경) His name shall be called

히브리어 “쉠”은 “이름, 영광, 명예, 명성”을 가르키며, 히브리어 “카라“는 ”부르다, 드러내다, 수여하다“를 가르킨다.

즉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이름과 영광, 명예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한 한분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10. 국내의 정통조직신학자들은 지방교회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지방교회는 토론을 할 때에, 차영배교수의 책을 인용하기도 하며, 이종성박사. 김명용교수의 글을 인용하기도 한다. 즉 지방교회와 동일한 견해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차영배교수를 비롯한 국내의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몇 해 전에 최삼경 목사와 윗트니스 리측이 교리논쟁을 했다. 그 때 최삼경 목사가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이 변형된 양태론임을 밝히자, 반대로 윗트니스 리측에서는 최삼경 목사를 삼신론자라고 주장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결국 윗트니스 리의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본다. 최목사가 논쟁 중에ꡐ윗트니스 리의 주장처럼 한 분 하나님(성자) 안에 다른 두 분 하나님이 들어와서 한 인격이 된다고 한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하는 것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양태론이다',ꡐ그리고 성자 하나님만 육신을 입었다ꡑ라고 한 것을 가지고 삼신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양태론적 눈으로 보기 때문에 저지른 잘못이 아닐 수 없다.(차영배교수의 글에서 인용)

# 1996년부터 98년의 기간에 월간지 <교회와신앙>의 발행인 최삼경 목사는 윗트니스 리측과 벌인 논쟁에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을 변형된 양태론으로 규정한다. 필자는 최삼경 목사의 말에 동감한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을 양태론이라고 말할 가치조차도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양태론은 합리주의적 이해에서 출발하는 삼위일체 이해로 나름대로의 전제와 논리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의 경우는 논리성을 결여한 채로 겁없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전혀 부적합하고 불경스런 비유를 들면서 조잡한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신학적으로 논쟁할 가치조차 없음을 발견한다. 윗트니스 리는 너무 많은 비유와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일일이 들어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대꾸하고 논쟁을 한 최삼경 목사의 노고를 치하한다.(김영재교수)

# 군주신론에도 몇 가지 유형이 있다. 동력적 군주신론(Dynamic monarchianism)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만 가지고 있을 뿐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지는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또한 종속적 군주신론이 있다. 때로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이라고도 한다. 아들과 성령은 세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존재양태에 지나지 않으며,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보다 열등(劣等)하다고 한다. 따라서 참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뿐이다. 또 다른 한 가지 유형은 성부 수난설이라는 3위1체론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은 완전동일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수난당하신 것은 사실은 성부 하나님이 수난당하신 것이라고 한다. 이 설은 초대교회에서 이단설로 정죄되었으나 그 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강조하는 신학이나 설교 안에 끊임없이 재등장하는, 중요하고도 위험한 사상이다...........3위1체론을 말할 때 두 가지 말해서는 안 될 금물이 있다. 하나는, 3신(령)론이 1신(영)신론으로 발전한다는 생각과 하나님의 섭리에 실패와 변경이 있다는 두 가지 사상이다. 전자는 지방교회론자들에게서 발견되고(윗트니스 리 : 하나님의 경륜, 15쪽) 후자는 스코휠드의 세대주의에서 발견된다. 복음적이고 정통적인 3위1체 신관이 말하는 하나님에게는 발전이나 전진이나 개혁이나 변경이 없다........3위1체 하나님을 알기 쉽게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이단적인 과오를 범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태양에 비유한다든가 물(H20)에 비유하는 과오를 범한다. 또 어떤 이는 수박에 비교하고 또한 생산품에 비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신비적 존재양식을 불완전한 물건과 비교함으로써 신성을 모독한다."(이종성박사)

# 삼위일체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혼동하기 위한 교리가 아니다.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령이 성부가 되는 괴상한 교리가 삼위일체론이 아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인격적 개체성을 위협하는 삼위일체론은 모두 잘못된 삼위일체론이고 이단적인 삼위일체론이다. 사과는 하나지만 껍질과 속과 씨가 있듯이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계신다는 표현 역시 잘못된 삼위일체론의 비유이다. 위와 같은 비유는 일신론의 위장일 뿐이다. 위와 같은 비유가 삼위일체의 비유로 한국교회 안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철저한 일신론적 사고가 한국교회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을 믿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이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이미 이슬람과 같은 일신론의 이교적 사상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론은 일신론과의 투쟁과 대립을 통해 형성된 교리였다. 그것은 일신론과 삼신론의 중간에 있는 교리가 아니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똑같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려는 교리였다. 그것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와 오순절 이후 성령의 경험을 통해 얻게 된 세 분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바탕이 된 교리였다. 그런 까닭에 삼위일체론은 성부 하나님의 경험밖에 없는 유대교의 일신론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기독교의 독특한 신관이었고, 이런 까닭에 초대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김명용교수)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하나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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