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교회와 논쟁

[스크랩] 신약적 관점에서 본 워치만 니의 성령론(2)/Archie Hui박사

baromi 2006. 9. 8. 08:17

C.성령세례(Spirit-Baptism)와 성령충만(Spirit-Fullness)

 

워치만 니는 성령 안에서의 세례(baptism in the Holy Spirit)를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filled with the Holy Spirit)와 다소 동일시한다[앞의 II를 참고하라/Michael Eaton은 편리하게도 성령세례(Spirit-baptism)에 대한 8개의 서로 다른 견해들을 정리해서 제공해 주고 있다. 이 8개를 2개의 큰 그룹으로 나누어서 성령세례(Spirit-baptism)이 하나의 경험으로서 간주되느냐 아니냐는 것을 구분한다. 첫번째 곧 경험으로 간주하지 않는 견해에는 세 가지 다른 입장들이 있는데, 성례전적 해석(로마 카톨릭), 회심의 비경험적 부분으로 보는 해석(Richard Gaffin) 그리고 회심 이후에 오게되는 비경험적인 요소로 간주하는 해석(F.B.Meyer)가 그것들이다. 두번째 큰 그룹에는 다섯가지의 서로 다른 입장들이 있는데, 회심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는 해석(George Whitefield, James Dunn), 성결의 선물로 보는 해석(John Wesley, A.M. Hills, Liewis T.Corlett), 사역을 위한 능력의 주어짐으로 보는 해석(D.L.Moody, R.A.Torrey), 성령 자신의 선물이라고 보는 해석(Don Basham), 그리고 구원의 확신이나 인치심으로 보는 해석(Thomas Goodwin, Marty Lloyd-Jones) 등이 그것이다. Eaton은 자기 자신의 해석을 9번째로 첨가하는데, 회심에서 이미 원리적으로 주어진 그것을 실제적으로 발휘하게 하는(release) 회심 이후의 경험으로 해석하는 입장을 제시한다(David Watson과 일치하는 견해). 더욱 자세한 것은, M.A.Eaton, Baptism with the Spirit: The Teaching of Marty Lloyd-Jones(Sheffield: Sheffield Academic Press, 1996) 13-37].두 표현 모두 다 기독교인의 사역과 봉사를 위한 능력을 의미한다. 오직 유일한 차잇점은, 성령세례(Spirit-baptism)은 한 번 주어진 그것으로 끝나는 것(an once-and-for-all event)이고 '성령으로 채워지는 것'(filled with the Holy Spirit)는 신자의 삶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이다[Spirit-baptism에 관한 니의 관점은 Torrey이 관점과 비슷하다. R.A.Torrey, The Holy Spirit: who He is and What He does, New York: Fleming H.Revell, 1927,107-53을 참고하라. 니는 Torrey의 글을 읽은 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Nee, Collected Works, 17:412-14;Life, 126-28), 그의 견해에 영향을 받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확실치는 않다].

 

성령세(침)례(Spirit-baptism)에 관한 한 세례(침례) 요한과 예수님이 정확하게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가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하여튼, 세례(침례)요한이 한 말과 예수님이 한 말씀이 똑같은 것이 아니다. 우선, 요한은 성령세(침)례을 능동적인 의미에서 언급한다. 곧 오시는 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마3:11/눅3:16,막1:8,요한1:33); 반면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수동적인 것으로 묘사한다. 곧 사람들이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행1:5,11:16,참고: 고전12:13). 둘째로, 그 청중이 서로 달랐다. 요한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하여 선포하였는데, 대부분의 그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채로 드러나게 된 반면,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선포하였는데, 얼마간 이미 당신과 함께 지냈던 자들이었다. 세째로, 마가도 마태도 부활절(요한20:22)이나 오순절(행2:1-42)에 성령님이 오신 것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왜 마가와 마태는 성령세례에 대한 약속이 때가 되어서 성취하게 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왜 그들이 각각 기록하고 있는 복음서에서 성령세례가 그렇게 우선적인 위치에 있다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예언의 성취된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면, 그 약속부분은 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이 모든 것들은 세례요한의 성령세례에 대한 언급이 예수의 성령세례에 대한 말씀과 일치된다고 단숨에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당연히 세례요한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거나 부어주실 분으로서 오실 자를 예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야훼의 불의 영의 능력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을 죄로부터 씻어서 정결하게 하실 분으로 예상하고 있었다고 믿을 만한 이유들이 있다(이 주제에 대해서 좀 더 충분히 다루고 있는 글로서 Archie Hui, 'John the Baptist and Spiirt-Baptism', EvQ 71 1999,99-115를 참고할 것). 첫째, 구약과 유대주의에서는 종말론적 선물로서의 성령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 선물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주어진 하나의 선물이지, 다윗적인 메시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E.Best, 'Spirit-Baptism,' NoveT 4 1960,236; Turner, Power from on High:The Spirit in Israel's Restoration and Witness in Luke-Acts, Sheffield:Sheffield Academic Press, 1996, 179-80; V.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Mark, 2d ed.; London: Macmillan, 1966,157). 둘째, 구약성경과 유대주의에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다윗왕적인 메시아가 성령으로 무장되어서(이사야11:1-5, 1에녹서49:3,62:2, 1QSb 5:25,4Q161 frs.8-10, Pss.Sol.17:37,18:7) 바로 이것으로 인해서 모든 죄인들에에게 공의와 심판을 실행하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을 정결하게 씻으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Pss.Sol.17:22-45,18:5,cf.1에녹서46:1-8,48:1-50:5,62:1-63:12,1QSb5:24-29,4ㅃ161 ㄺㄴ.8-10,2 Apoc.Bar.39:1-40:4,4Ezra 12:31-35,13:21-50).

 

세번째, 이런 해석은 공관복음서에서 기술하고 있는 이야기전개와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데, 공관복음서에서는 세례요한의 말이 있고나서 곧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분명히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그의 메시야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무장되어진 다윗왕적인 메시야로 볼 수 있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마3:16,12:28-32,막1:10,12,3:29,눅3:22,4:1,14,18,10:21,12:10,행10:38). 다른 말로 하자면, 요한의 예언의 성취는 부활절이나 오순절을 까지 기다려야 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삶에 이미 모두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만인이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이나 복음서기자들이 오실 자에 대한 세례요한의 메시야관을 아무런 수정없이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례요한은 이사야11장의 용어로 성령세례를 보는 경향이 있는 반면 예수님과 복음서기자들은 이런 묘사를 이사야42:1-4와 61:1-2에 나타나는 야훼의 고난받는 종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것으로 교정하고 있다(막1:10-11//마3:16-17//눅3:21-22,막12:17-21, 눅4:17-19).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능력으로 심판하려 오신 다윗가의 메시야이신지를 의심하게 한 것이 바로 이 부드러운 측면의 예수였다(마11:2-6/눅7:18-23, cf. 마11:16-19/눅7:31-35).   

 

네번째, 복음서기자들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시는 분으로 예수(세례요한이 아니라)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일치한다. 예를 들자면, 예수는 당신의 제자들이 사람들의 재판정에 서게 될 때 성령의 도우심이 있을 것을 약속하였다(막13:11과 마10:19-20/눅12:11-12). 누가복음21:15에서, 이런 종류의 도우심은 예수님 당신 자신께서 하실 것이라고도 한다. 이런 도우심이 바로 성령님께서 앞으로 주시게 될 선물임을 함축한다. 사도행전6장10절에 기록된 스데반의 지혜를 고려하면 누가는 이러한 예수의 선물이 오순절날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참고,2:33,16:7). 비슷하게,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선물로서 보혜사 혹은 진리의 영이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였다(요14:16-17,26,15:26, 참고,눅11:13).  몇 가지 이런 예들을 보면, 이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하기도 한다(요15:26,16:7,cf.6:63,14:26). 4복음서에 의하면, 이 예수의 선물은 부활의 날에 성취된다(20:22).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복음-사도행전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약속된 성령을 제자들이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그들에게 이 성령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눅24:49,행1:4-8,cf.요7:38-39). 사도행전1:4-8에 대해서 의미심장한 것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예수님 당신께서 친히 성령의 약속 혹은 선물을 요한의 성령세례(Spirit-baptism)예언에 연관시키셨다는 점이다(cf.11:16).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 혹은 당신 자신의 선물과 성령세례 사이에 있는 결정적인 연관성을 지적하신 분이 세례요한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또한 성령세례의 일차적인 촛점을 (이사야11장에 기초한) 성령으로 구비하신 메시야에서 하나님의 신을 그 추종자들에게 부여하실 메시야에게로 전환하신 분이 요한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이 사실은 구약성경에 기초한다기 보다는 당신 자신의 자기이해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관이나 전이가 함축하는 바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초월적인 신적 기독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선물, 혹은 예수님 자신의 선물로서의 성령을 요한의 성령세례와 연결시키신 분이 세례요한이 아니고 예수님이시라면, 성령의 역할이나 기능이 무엇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였는지에 대한 질문이 생기게 된다.

 

 

 

 

 

 

 

 

 

 

....(계속).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holyjo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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