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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06-1학기, 기독교 사상사) 터툴리안의 persona개념과 익명

baromi 2006. 6. 15. 08:19

 

“터툴리안의 persona(位格) 개념과 인터넷에서의 익명사용”



                                                    과   목 : 기독교 사상사

                                                    학   번 : 05*****6

                                                    성   명 : 손 재 익




Ⅰ. 서론


    21세기는 바야흐로 인터넷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시대의 등장은 우리로 하여금 커다란 유익을 안겨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을 살아가면서 인터넷이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우리에게 항상 유익만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에 장단이 있듯이, 인터넷 사용의 증가는 우리에게 불이익을 안겨다 주기도 한다. 그 불이익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익명에 의한 허위사실 유포”이다.

    인터넷이라는 특수한 공간(space)에서 익명을 사용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들이 최근 들어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비판이 쉽게 허용되지 않는 교계, 예컨대 교단 총회 홈페이지나 개체교회의 홈페이지에서 이러한 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일로 인해서 익명 사용 자체를 차단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 홈페이지에서는 익명으로 글을 게재하는 것을 차단시켜 놓았다.

    그러나 과연 “익명1)”을 사용하는 것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일까? 익명에 의한 허위사실 유포가 많은 불이익을 안겨준다고 해서 “익명 사용” 을 완전히 차단시키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우리는 감히 아니라고 주장한다. 익명에 의한 허위사실 유포를 차단하기 위해서 익명 사용을 막는 것은 목욕물을 버리기 위해서 아기까지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익명 사용이 정당한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교회사 속에서 그 정당성을 찾아 보려고 한다. 고대 교회 안에 있었던 한 논의를 통해서 이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교회사 속의 수많은 사건들과 논의들은 분명히 오늘날에 많은 유익을 준다.2) 이러한 확신에 근거하여 우리는 그 정당성을 찾아보려고 한다. 또한 교회사는 단순한 학문의 대상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에 대하여 실제적인 많은 교훈을 주는 실용적인 학문이라는 확신에서 이 주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교회사는 단순히 우리에게 암기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학문하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교회사는 우리의 최고 스승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는 하나의 텍스트이다. 교회사의 수많은 주제들 가운데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삼위일체에 관련된 논의들 역시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준다.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사역(the economy of salvation)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와 인식 등에 있어서 여러 가지 참조점(reference)들을 허락해 준다.3)

    이러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고대교부, 특히 터툴리안이 사용한 persona(위격) 개념이 오늘날 인터넷에서의 익명 사용에 있어서 어떠한 정당한 이유를 제공해 주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기독교와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교리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교리이며, 그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교리이다. 그러나 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적인 교리이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논의의 대상이며,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면을 갖고 있는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긴장관계에 대하여 일찍이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삼위일체를 부정하려는 사람은 구원을 잃을 위험에 처하지만,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지성을 잃을 위험에 처한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청교도 신학자 토마스 왓슨도 “우리의 좁은 사고 능력으로는 호두껍질에 모든 바닷물을 담지 못하듯이 단일신(Unity) 안의 삼위일체(Trinity)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4) 그만큼 삼위일체론은 우리에게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교리라고 할 수 있다. 



2. 고대교회의 삼위일체 논의에 대한 약술


     삼위일체의 논의들의 대부분은 이미 고대교회에서 상당부분 정리되었는데, 이 논의들은 칼빈이 그대로 큰 여과없이 사용5)할 만큼 우수하였으며, 오늘날의 삼위일체 논의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이 짧은 논문에서 고대교회의 모든 삼위일체 논의를 다루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간략하게 나마 고대교회의 삼위일체 논의를 약술해 보고자 한다.


    니케아 회의 이전에 서방교회의 삼위일체 신학은 일반적으로 터툴리안(Quintus Septimus Florens Tertullianus Kartaginensis, 160-225년경)을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6) 터툴리안은 최초로 라틴어로 신학을 저술한 사람으로 라틴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7) 터툴리안은 법률가와 수사학자로 훈련받은 라틴어를 사용하는 북아프리카인이었다. 그는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초석을 놓았는데, 이 일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다름아닌 “위격(persona)” 개념의 정립이다. 터툴리안은「프락세아스에 대항하여」(Adversus Praxean)라는 저술을 통해 자신의 삼위일체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는 우선적으로 라틴어의 ‘substantia’라는 용어가 헬라어의 ‘u`po,stasij’에 해당한다고 확신하였다. 이는 스토아적인 의미에서 ‘통합적 실재’(corporeal reality)라는 뜻이었다. 이 용어를 가지고 삼위일체 교리를 최초로 다루었는데 하나님의 단일성을 설명하는데는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분명하게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위격’ 개념에 persona를 사용하였는데8) 이것이 터툴리안의 가장 큰 기여점이다.9) 그의 persona 개념은 훗날 삼위일체 논의에 큰 도움을 주었는데 이는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어거스틴, 아퀴나스, 그리고 칼빈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오늘날의 삼위일체 논의에 있어서 의심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10)

    터툴리안의 위격 개념 정립이 고대 교회 삼위일체론 논쟁에 있어서 1라운드라고 한다면,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가 격돌한 니케아 공의회를 2라운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안디옥 학파의 아리우스에 의해 시작된 이 논쟁은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위격들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라는 그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주장은 성자가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아타나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기독교 구원론에 있어서 핵심적임을 주장하고, 아리우스의 기독론은 구속론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선언했다. 결국 아리우스주의는 이단으로 선포되었고, 이러한 기독론의 불일치는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서 확정지어졌다.11)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본질(homoousios)에 대한 개념은 분명하게 확정된다.12)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 이후 삼위일체 논쟁의 주요논점은 그 교리의 근원적 타당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13)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아리우스주의와 같은 이단들의 기독론의 문제가 분명해졌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근본에 있어서는 기본적인 동의가 이루어졌고, 동방신학자들의 경우 삼위일체론이 신학 체계를 위한 궁극적 원리라기보다는 침묵으로만 경외심을 표할 만큼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해14)할만큼 삼위일체의 일반적인 부분들에 대해서는 동감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이슈였는데,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의 구별을 시도함15)으로서 그 문제가 점차적으로 구체화되었다.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동일본질(homoousios)에 대해서는 분명해 졌으나 위격(hypostasis, persona, prosopon)에 대해서는 정확한 이해가 없었으나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시도를 통해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본질”과 “위격”의 구별을 통해서 삼위일체론 형성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한 본질의 한 위격”의 하나님이거나 “세 위격들의 세 본질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 본질의 세 위격들”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정한 것이었다.16)



3. 터툴리안과 그의 위격 개념


① 삼위일체 신학에 있어서 터툴리안의 위치


    최초로 라틴어로 신학을 저술하여 라틴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터툴리안은 전술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 신학 논의에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그의 역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바로 “위격(persona)” 개념의 정립이다.17) 그의 위격 개념은 오늘날의 삼위일체 논의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God is one in essence and three in persons.”18) 이는 삼위일체를 한 문장으로 서술하는 대표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교의학에서 이러한 문장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터툴리안의 가르침인 "una substantia(essenstia) - tres personae"(한 본체, 세 위격)에서 나온 것이다. 터툴리안은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substantia19)라는 용어와 persona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substantia라는 용어를 통해서는 “고유한 특성의 버팀목으로서의 하나의 사물의 실재, 하나의 존재의 토대를 생각한다.” 즉, "셋의 상호 결합되어진 것안에서의 하나의 본질"(una substantia in drei miteinander Verbundenen tribus cohaerentibus)을 고백한다. 그리고 persona 라는 용어를 통해서는 “독자적인 개체로서의 하나님의 실재의 형태/형상”을 의미한다.20) 다시 말하면, 구원의 경륜의 세 측면을 통합하는 것이 본질(substantia)이고, 세 측면을 구별하는 것이 위격(persona)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터툴리안의 본질의 단일성과 위(位)의 구별됨에 대한 강조는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다 잘 설명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방법이 되었다.21)


② 터툴리안의 persona 개념에 대한 고찰


    터툴리안은 본질적으로는 하나이시지만, 세 개의 위격으로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persona 개념을 도입하였는데22) 과연 터툴리안이 사용한 persona의 사전적인 정의는 무엇일까? 옥스퍼드 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첫째, 배우들이 사용하는 ‘가면’이다. 둘째, 연극이나 드라마에서의 ‘배역’이다. 셋째,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 부분적인 역할이다. 넷째, 어떤 개인적인 인격의 실제적 존재이다.23)

    터툴리안은 하나님의 삼위성을 표현하기 위해 persona를 도입하였다. 앞서 본 것처럼 persona의 우선적 의미는 “가면”이다. 이 가면이라는 뜻을 지닌 persona는 동시에 인격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터툴리안은 왜 하나님의 삼위를 설명함에 있어서 ‘persona’ 개념을 도입하였을까? 터툴리안은 하나님이 가면을 쓰고 활동한다고 생각하셨을까? 아니다. 터툴리안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자의 특수한 역할, 즉 극중에서 역할이 서로 다른 인물과 같이, 독립적인 권능을 수행한다고 풀이하였다. 터툴리안이 persona라는 개념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이 가면을 쓰고 활동하셨다고 이해했기 보다는 하나님의 삼위 사역에 있어서의 인격성에 관심을 둔 것이다.24) 그는 삼위 하나님이 “위(位)”라고 하는 가면을 쓰고 활동하셨는데, 그것이 곧 각각의 위에 인격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본 것이다. 터툴리안이 가면을 하나의 인격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은 칼빈이 persona를 헬라어의 ‘얼굴’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provswpon’(프로소폰)으로 번역하는 것도 받아들인 사실25)을 통해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26)

    한편, ‘프로소폰’(provswpon)과 ‘페르소나’(persona)와 같은 용어들은 삼위의 타자성 또는 독립적인 실존을 표현하는 데에 아주 적합하였다. 원래 ‘얼굴’을 의미했다가 ‘표현’을 의미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역할’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던 ‘provswpon27)이라는 단어는 결국 ‘개체’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는데, 그 강조점은 통상적으로 외적인 양상 또는 객관적인 모습에 두어졌다.28)



4. persona와 인격성


    persona는 문자적으로는 로마시대에 극중 배우가 쓰던 가면을 의미한다. 그 당시의 배우들은 가면을 쓰고 극에 출연했는데, 그 이유는 청중들로 하여금 극중 인물의 성격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몇 안되는 배우들이 여러 개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가면을 쓰지 않으면 관객들이 잘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가면을 쓰고 공연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어떤 배역인지를 이해하도록 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술어 persona는 '극중 역할'이라는 의미의 발전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터툴리안이 ‘한 신성, 세 인격’의 개념을 통해 자신의 독자들이 이해하기를 원했던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 개념은 인류의 구원이라는 장대한 드라마 속에서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관련된 세 가지의 배역을 담당하시는 한 하나님을 의미한다. 그 다양한 역할들 뒤에는 오직 한 명의 배우만이 있을 뿐이다. 창조와 구속의 과정에 나타나는 복합적인 성격은 그 속에 여러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직 한 분 하나님 만이 계셨을 뿐이다. 그 하나님이 '구원의 경륜' 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역사하신 것이다.29)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구원에 있어서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내는 “구원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은 그것을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그것을 성취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그것을 죄인들로 하여금 믿게 하시고 받아들이게 하신다”30)라고 하는 표현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인격(persona)은 사회적 드라마에서 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한 인격은 사회적 관계성의 연계 구조 안에서 한 가지 역할을 맡는다. ‘개별성’이 사회적 관계성을 의미하지 않지만, ‘인격성’은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한 개인에 의해 수행되는 역할에 관한 것이다. 이 역할에 의해 그 인격은 다른 사람에 의해 독특한 존재로 인식된다.31) 또한 각각의 인간의 인격성은 그 자신에게서 부여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격(person)은 절대적으로 그의 본성(nature)나 그의 실존(substance)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32)

    이처럼 인격(persona)은 한 사람의 실체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한 사람의 역할을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5. persona와 인터넷에서의 익명


    터툴리안이 하나의 인격으로 이해한 ‘가면’을 오늘날의 인터넷에서의 ‘익명’과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을까? ‘익명’에 인격을 부여함으로서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앞서 언급한 person 개념을 익명 사용에 적용하면 그것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손재익’ 이라고 하는 사람이 인터넷에서 ‘우크~’ 라는 이름으로 계속해서 글을 쓴다. ‘손재익’이라는 사람의 인격을 ‘우크~’에 부여한다. ‘손재익’은 계속해서 ‘우크~’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게 되면 ‘손재익’의 인격은 ‘우크~’에 부여된다. ‘우크~’라는 이름으로 쓰여지는 글에는 ‘손재익’이라는 사람의 인격이 ‘우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손재익’은 ‘우크~’라는 ‘가면’(persona)을 쓰고 ‘손재익’의 ‘인격’(persona)으로 활동하는 것이다. '손재익'이라고 하는 본성과 실체는 ‘우크~’라고 하는 익명의 역할을 통해서 충분히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이 억지일까? Buffon 은 이렇게 말했다. “문체는 그 사람 자신이다.” 우리는 익명 사용의 실제적인 예들을 통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6. 익명 사용의 실제적 예들


    일반 문학에서 필명 사용의 예는 흔히 볼 수 있다. 그런데 덴마크의 유명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필명이 아닌 가명을 사용했다. 그는 그의 저서 『철학적 조각들』, 『죽음에 이르는 병』등에서 각각 ‘요하네스 클리마쿠스’와 ‘안티 클리마쿠스’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33) 키에르케고르는 왜 가명을 사용하였을까? 이에 대해서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편역한 황필호는 6가지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에 네 번째로 키에르케고르 작품가 가진 ‘연극적 요소’를 언급한다. 그리고는 네 번째 이유를 가장 합당하다고 말하고 있다.34) 우리는 ‘연극적’이라는 말에서 추측을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연극에서 사용하는 persona 개념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의 가명에 하나의 인격을 부여함으로서 작품에 있어서 묘를 더해 준 것이다.

    터툴리안을 닮은35)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가명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는 일찍이 익명을 사용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36) “Charles d'Espeville”라는 익명을 사용한 적이 있으며, 또한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마르티누스 루카니우스”(Martinus Lucanius)라는 가명을 사용했다.37) 나아가 그는 “알쿠이누스(Alcuinus)”라는 익명으로 책을 출판하기도 했으나 이런 모든 가명들을 쓴 인물이 칼빈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38) 알쿠이누스 라는 이름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기독교 강요』를 처음 출판할 때도 사용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7. 현대사회와 익명사용, 가면의 내재적 한계성39)


    우리는 앞서 본 논의를 시작하면서 이 논의를 하는 이유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교회사 속의 수많은 사건들과 논의들은 분명히 오늘날에 많은 유익을 준다. 이러한 확신에서 비롯하여 우리는 그 정당성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 속에 시작한 논의이므로 우리는 과연 21세기의 오늘날에 이러한 논의가 어떤 유익을 주는 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터툴리안이 사용한 persona 개념을 인터넷에서의 익명 사용 정당화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현대사회를 일컬어 익명성의 시대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군중 가운데 하나의 익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설명하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의 시대는 과학문명의 발달, 특히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인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군중 속에서 자신을 상실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이는 인터넷 공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또한 대형화되어지는 교회 가운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대형화되어지는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가 인터넷으로 대체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는 익명을 극복하기 위해 익명을 그 대안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오늘날의 시대는 익명성이 극대화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익명 자체가 가진 내재적 한계를 통해서 익명성을 극복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극복의 대안으로 이 글 전체에서는 익명 사용을 말하고 있다. 익명 사용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면을 쓰고 활동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가면은 한 사람의 실체를 어느 정도로 드러낼 수 있는가? 익명 시대에 익명 사용은 한 사람의 인격성을 얼마나 드러낼 수 있을까?

    인간은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풍부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가장 풍부한 변형 생활을 하고 있다. 단 한 시간 내에 인간의 표정이 얼마만큼이나 변할 수 있는가는 거의 파악하기 힘들 정도이다. 만일 누군가가 얼굴에 나타나는 그 많은 흥분과 정조를 연구할 시간이 있다면, 그는 아마 그 얼굴이 드러내는 무수한 변화에 깜짝 놀랄 것이다. 많은 문명권에 있어서 표정을 마음껏 지을 수 있는 자유가 크게 제한되어 있다. 희노애락의 감정을 즉시 드러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관습상의 이유로, 표정을 마음대로 지을 수는 없다. 이러한 특성과 더불어 군중 시대에서의 인간은 자기 자신을 숨기거나 변형하려는 성향을 가진다.40)

    가면은 인간의 변형의 유동적 활동의 최종 상태이다. 이제까지 놀라울 정도의 미묘함과 다양성을 표현하던 변형의 유동적 활동이, 일단 가면 속에 흘러가면 끝장이 난다. 일단 가면을 쓰게 되면 새로 시작되는 그 어떤 것도 나타낼 수 없으며 무의식적이고 무형적인 성향도 드러낼 수가 없게 된다. 가면은 명백한 것이다. 가면은 확정된 그 무엇을 표현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가면은 경직되어 있고, 이 확정된 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의 가면 뒤에 또 하나의 가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한 인간에게 하나의 가면 뒤에 또 하나의 가면을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특수한 이중가면(Doppelmasken)을 쓰고 있다. 하나의 가면을 벗자마자 또 다른 가면이 나타난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도 하나의 가면이며 또 하나의 최종 상태인 것이다. 또 하나의 가면을 쓰는 것도 하나의 도약이다. 하나의 가면과 또 하나의 가면 사이에 무엇이 있었든 간에 그것은 곧 사라진다. 이 경우에는 어떤 부드러운 과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새롭고 다른 가면이 이전의 것과 마찬가지로 명백하고 경직된 상태로 갑작스럽게 거기에 나타난다. 가면을 여러 가지로 바꿈으로써 모든 것이 가능해질 수 있지만 그것은 단 한번의 도약, 한 순간의 집중적인 동작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가면의 작용은 주로 외향적이다. 가면은 하나의 실상을 만들어낸다. 가면은 침범당하지 않으며 가면과 목격자 사이에 거리를 설정한다.41)

    진정한 가면은 결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며, 그 자체가 영속적이고 명백하게, 계속적인 변형의 흐름 속에서도 항상 불변하는 것으로 남아 있다. 가면의 순수한 효과란 가면 뒤에 숨어 있는 것을 전혀 밝히지 않는다는데에 기인한다. 가면의 완전성은 그것이 배타적이며 그것 뒤에 있는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상태로 있다는 데에 있다. 가면이 명백하면 할수록 그것의 배후에 있는 것은 더욱 애매해진다. 이 가면으로부터 무엇이 터져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가면의 외양이 지니는 경직성과 그 배후에 숨기고 있는 비밀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감은 엄청나게 커질 수가 있다. 이 긴장감이야 말로 가면이 위협적이라는데 대한 본질적인 이유이다.42)

    가면을 쓴 사람은 가면의 특성에 상응하는 어떤 한계 내에 머물러 있어야만 한다. 가면은 씌어지는 것이며 또한 외부적인 것이다. 물체로서의 가면은 이것을 쓰는 사람과는 분명히 분리되어 있다. 가면을 쓴 자는 가면을 낯선 것으로서, 결코 자기 몸의 일부가 될 수 없는 어떤 것을 느낀다. 가면은 그를 성가시게 하며 좁은 곳에 밀어 넣는다. 가면을 쓰고 있는, 그는 자신과 가면이라는 이중의 얼굴을 갖는다. 그가 가면을 자주 쓰면 쓸수록, 그리고 가면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자신은 그만큼 더 가면의 실상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그러나 가면과는 절연된 나머지 부분이 항상 남아 있다. 즉 발견될까봐 두려워 하는 일부분 그가 퍼뜨리고 있는 공포가 자기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 외부에서 가면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표출하는 비밀은 가면 뒤에 있는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치지만, 그러나 물론 그 영향이 동질적인 것은 아니다. 구경군들은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며 그는 가면이 벗겨질까봐 두려워한다. 그가 자신을 완전히 버릴수 없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의 변형은 상당한 정도까지는 가능하지만 결코 완전할 수는 없다. 가면은 변형을 방해하는 제한 장치이다. 왜냐하면 가면은 벗겨질 수 있고 가면 착용자는 그것을 두려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면은 땅에 떨어지거나 열러서는 안된다. 그는 가면에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 항상 수심에 싸여 있다. 가면은 그 자체가 가면을 쓴 사람의 변형일 뿐 아니라 그가 관리해야 하는 무기이자 도구인 것이다. 그는 연기자로서 가면으로 변형해야 하면서도 한편으로 일상 생활 속에서 그 가면을 취급한다.43)



8. 예상되는 비판과 그에 대한 반박44)


    하나님의 삼위 사역을 설명하는 persona 개념을 통해 인터넷에서의 익명 사용에 적용하는 것에 대하여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일 것이다. 약간의 의아심을 가질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삼위를 그렇게 적용이 가능할까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에 대해 예상되는 몇 가지 비판에 대하여 반박하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의 존재방식은 인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칼빈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곧 나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한다”45)고 말한바 있다. 뿐만 아니라 person 개념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하고 있는 zizioulas 는 교회의 신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인간의 존재방식과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아는 것에 기초한다고 말하고 있다.46)

    둘째, 위의 논의는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삼위를 인터넷에서의 익명사용에 바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위 논의에서 터툴리안이 사용한 persona 개념을 익명 사용에 적용했다. 이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삼위로 존재했으니 우리도 삼위로 존재할 수 있다.”라는 주장은 매우 위험한 주장이다. 기독교 고유의 교리인 삼위일체론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 이는 인간에게는 절대로 적용되기 어려운 신비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Ⅲ. 결론


    이상에서 우리는 고대교회, 특히 터툴리안을 중심으로 사용된 Persona 개념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인터넷에서의 익명 사용의 정당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대교회에서 삼위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실재에 대한 설명은 매우 중요하였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인간의 이성으로 온전히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고대교부들은 하나님의 위격 개념을 ‘가면’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persona”를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는 가면도 하나의 인격을 나타낸다는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다. 본질적으로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성자, 혹은 성령이라는 ‘가면’을 인격화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오늘날 인터넷에서의 익명 사용의 정당성을 주장할 만한 충분한 근거가 된다. 인터넷에서의 익명 사용이 가지는 장점을 이해한다고 한다면 이러한 논의를 통해 그 근거를 얻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아직까지 이러한 논의가 신학계에서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걸로 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이 짧은 논문에서 다 다룬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오늘날 우리에게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에 대해 더 깊은 연구를 통해 더 발전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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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여기서 무명의 정당성까지 주장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익명”과 “무명”을 구분하려고 한다. 익명과 무명은 분명히 다르다. 예컨대, “손재익”이라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우크~”라는 이름으로 글을 게재한다면 그 “우크~”라는 이름은 하나의 익명이 된다. 익명은 일종의 “가명” 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 이름 없이 글을 게재한다면 그것은 無名이다. 그리고 여러 개의 마구잡이식 닉네임으로 글을 올린다면 그것 역시 무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칼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과거의 신학에 대한 책임감을 현대의 신학에 대해서만큼 느끼지 않고서는 교회 안에 머무를 수 없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슐라이어마허 등 그 외의 사상가들은 사멸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다. 그들은 여전히 말하고 있으며 우리가 교회 안에 함께 속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것 만큼 확실하게 생생한 음성으로 경청을 요구하고 있다. (Alister E. McGrath, 소기찬 외 3인 역, 「신학의 역사」, (서울: 知와 사랑, 2001), p.35)


3) 칼빈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곧 나를 아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존재를 이해하는 중요한 참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Institutes, Ⅰ. ⅱ. 1.)


4) Thomas Watson, 이훈영 역, “A Body of Divinity”, 「신학의 체계」,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 p. 198. 왓슨은 Unity(단일성)와 Trinity(삼위일체)라는 단어의 ‘~nity’의 공통되는 발음을 강조하여 대조시키고 있다.


5) 김재성, “칼빈의 삼위일체론, 그 형성 과정과 중요성”, 『조직신학연구』 통권 2호 (2003), p. 174.


6) 조병하, “서방교회 삼위일체 신학의 효시로서의 테르툴리아누스의 글 「Adversus Praxean」”, 『기독교 사상』통권 471호,(1998,3), p. 93.


7) 유명한 기독교 사상가인 유스토 L. 곤잘레스는 터툴리안이 최초의 라틴신학자라는 사실에 대하여 ‘아마도’라는 단서를 붙인다. 그 이유는 미누키우스 펠릭스(Minucius Felix)의 『옥타비우스』(Octavius)가 더 초기의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의 논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자의 신학적 중요성은 극미하므로 터툴리안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라틴신학자라 할 수 있다. (유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 신학의 세 가지 유형”, (서울 : CLC, 2004), p.21, n.4.)


8) 김재성, p. 151.


9) 터툴리안은 persona 외에도 trinitas, substantia, Christi druo naturae, satisfactrio 등의 용어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10) Ted Peters, “God as Trinity: Relationality and Temporality in Divine Lif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3), p.34.


11) Alister E. McGrath, 소기찬 외 3인 역, 「신학의 역사」, (서울: 知와 사랑, 2001), pp. 61-63.


12) 김병훈, “삼위일체: 삼위 하나님의 위격의 이해”, 『신학총론』, 통권 22권 1호, (2004,5), p. 183.


13) Alister E. McGrath, 소기찬 외 3인 역, 「신학의 역사」, (서울: 知와 사랑, 2001), p. 63.


14) 유해무, 개혁교의학,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p.25의 각주 15번 참조. 토마스 왓슨은 ‘신학의 체계’에서 말하기를 “삼위일체는 단순히 신앙의 대상이다. 이성의 다림줄은 이 신비를 측정하기에 너무 짧은 것이다. 그러나 이성이 건널 수 없는 곳을 신앙은 헤엄쳐 건널 수 있다. 단일신 안의 위격의 삼위성 교리는 완전히 초자연적인 것이어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신성한 교리는 이성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초월한다. 삼위일체는 신적 계시에 속하는 것으로서 겸손한 신앙으로 예배할 대상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Thomas Watson, p. 203.)


15) 김병훈, p. 184.


16) 김병훈, p. 189.


17) 본질과 위격의 개념을 분리시키 것에 있어서는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김병훈, p.184.와 Alister E. McGrath, 앞의 책, p.110.을 참조하라.)


18) Reverend Herman Hoeksema, Reformed Dogmatics, Reformed Free Publishing Association(Grand Rapids : 1985), p. 131.


19) substantia 는 글자 그대로 ‘~의 밑에 서 있는 것(that which stands under)’을 의미한다. (도날드 K. 맥킴, “Theological Turning Points - Major Issues in Christian Thought -”, 「교회의 역사를 바꾼 9가지 신학 논쟁」, (서울: UCN, 2005), p.43.)


20) 조병하, p. 105.


21) 도날드 K. 맥킴, “Theological Turning Points - Major Issues in Christian Thought -”, 「교회의 역사를 바꾼 9가지 신학 논쟁」, (서울: UCN, 2005), p.43.


22) 앞서 “고대교회의 삼위일체 논의에 대한 약술”에서 다룬 바와 같이 터툴리안이 위격 개념을 설명함에 있어서 “hypostasis”가 아닌 “persona” 개념을 사용한 것에 대해 우리는 주의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zizioulas에 따르면 “hypostasis”와 “persona”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용어이다. 헬라 철학에서 person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그 어떤 표현과도 상관이 없는 반면에 “hypostasis”는 “substance”와 연결되어서 인간의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는 표현이다. 오리겐 당시에 동방신학에서는 hypostasis을 person을 대신하여 삼위일체를 설명하는데 사용하였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John D. Zizioulas, “Being As Communion”, (New York: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93), pp. 36-37.)


23) ① A mask esp as worn by actors ② A character in a play, dramatic role ③ the part played by a person in life ④ the actual being of someone individual personality. (Oxford Latin Dictionary edited by P.G.W. Glare, 1982). persona의 어원은 아마도 에트루리아어(Etruscan)의 ‘phersu’에서 왔는데, 이것은 종교적 예식이나 연극에서의 가면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리스 신화의 형상인 Persephone와 관련되어 있다. (John D. Zizioulas, p.33, n.20.). 


24)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을 쓴 중세의 교부 어거스틴은 삼위일체론을 묘사하기 위하여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끌어낸 유비들’을 사용하였는데 어거스틴 역시 하나님의 삼위 사역에 대하여 인격적으로 이해했다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도날드 K. 맥킴, 앞의 책, p.60.) 어거스틴이 사용한 인간 영혼의 구조로부터 도출해 낸 유비들을 사용한 것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5th Ed), 「고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pp. 297-299.을 참조하라. 


25) 김재성, pp. 151-152.


26) “가면(masks), 얼굴(faces), 인격(persons)”이라는 단어의 관계연구는 ‘위격’개념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Ted Peters, p. 34.


27) ‘provswpon’ 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1) the front part of the head ⅰ) face, countenance ⅱ) personal presence or relational circumstance 2) entire bodily presence, person 3) the outer surface of someth 4) that which is present in a certain form of character to a viewer, external things, appearance : Bauer. Walt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edited by Frederick W. Danker, William F. Arndt, and F. Wilbur Gingrich,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3rd edition), pp. 887-888. ‘provswpon’와 같은 용례로 쓰이는 히브리어인 ‘!ynIP;’ 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1) Head of a living being 2) Front side, surface 3) in certain expressions 4) In conjunction with certain vbs 5) In conjunction with prepositions 6) with regard to God : NIDOTTE 3:637-639.


28) J.N.D. Kelly, “Early Christian Doctrines”(5th Ed), 「고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p. 130.


29) Alister E. McGrath, 김홍기 외 3인 역, 「역사 속의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pp. 385-386.


30) In fact each person of the Trinity was involved in this great work of salvation. The love, grace and wisdom of the Father planned it; the love, grace and humility of the Son purchased it; and the love, grace and power of the Holy Spirit enabled sinners to believe and receive it. (John Owen, The Holy Spirit, Banner of truth trust, 1998, p. 1.)


31) Alister E. McGrath, 김홍기 외 3인 역, 「역사 속의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8), p. 319.


32) John D. Zizioulas, p. 19.


33) S. Kierkegaard, 황필호 편역, 「철학적 조각들」(서울: 집문당, 1998), pp. 14-16.


34) 상게서, pp. 20-26.


35) Jelle Faber, 「성신의 신학자, 존 칼빈」, (서울: 성약출판사, 2004), pp. 13-14.


36) T.H.L. 파커, 죤 칼빈의 생애와 업적,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6), p. 51.


37) William Lindner, 「John Calvin」, 김대웅 역, (서울: 기독신문사, 2004), p. 84.


38) T.H.L. 파커, p. 52. 앞서 필자는 Buffon 의 “문체는 그 사람 자신이다”라는 말을 인용했는데, 아마도 칼빈이 익명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칼빈의 저작임을 눈치챈 이유가 그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39) 이 단락의 상당수는 1981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카네티의 다음의 책을 많이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Masse und Macht), (서울: 주우, 1982).


40) 엘리아스 카네티, “군중과 권력” (Masse und Macht), (서울: 주우, 1982), p.361.


41) 상게서, p. 362.


42) 상게서, p. 363.


43) 상게서, p. 364.


44) 이러한 형태의 전개는 청교도들이 그들의 설교에서 주로 사용한 방식에서 힌트를 얻었음을 밝힌다.


45) Institues, Ⅰ. ⅰ. 2.


46) John D. Zizioulas, p. 15.


출처 : 말씀사랑 교회사랑 책사랑
글쓴이 : 우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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