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찬양자료

[스크랩] 행20:1-12, 사명이 이끄는 삶2

baromi 2006. 6. 9. 09:03
 

행20:1-12, 사명이 이끄는 삶2, 06.3.26, 박홍섭 목사


방금보신 화면은 어떤 영화의 장면을 사진으로 보여드린 것인데 어떤 영화인지 아시겠습니까? 예. 바로 개봉 한 달 만에 600만명이 넘는 관객동원에 성공한 김동원감독의 투사부일체라는 영화입니다. 전편인 두사부일체가 350만 관객을 동원했다면 속편인 이 영화는 전편을 능가하는 속편이 없다는 말을 무색케 하며 훨씬 더 많은 사람을 극장에 끌어들인 소위 흥행에 성공한 영화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무엇이 이처럼 많은 관객들을 끌어 모은 것일까요?

하나는 위계질서가 목숨만큼 중요한 폭력조직의 보스가 나이 많은 고등학생으로 등장하고 그 부하인 중간보스가 교생실습생으로 나오면서 일어나는 코미디의 독특하고도 전형적인 구조인 뒤집기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단순한 뒤집기상황에서 연출되는 웃음만으로 그토록 많은 관객들을 모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는 또 다른 흥행의 성공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관객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의 개연성을 가지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보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등장인물들의 영어에 대한 무지함을 통해 영어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우리사회의 모습을 드러내어 공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라든지, 교육에 의해 교화되어야 할 대상인 조폭들이 거꾸로 학원비리의 핵심관계자들을 응징하고, 학생들이 동원돼 이 싸움에 임하게 함으로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우리의 교육적 문제에 대해 일종의 반항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렌즈 중의 하나입니다. 분명 투사부일체라는 이 영화는 수준 높은 영화는 아닙니다. 어쩌면 유치할 정도의 조폭코미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치한 영화에 수많은 관객들이 모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특징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야망과 욕심을 따라 살면서 느끼는 각종 현실적 불만과 스트레스 속에서 잠시나마 이런 조폭코미디영화를 통해 자신의 불만과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일종의 심리적 위로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망과 욕심을 따라 진행되는 세상 사람들의 삶이 이런 영화를 통해 적지 않은 위로를 얻고 있다면 이들과 달리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여기에 대한 하나의 분명한 답을 확인하고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려고 하는 행20장은 행18장 23절부터 시작된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의 흔적 중의 하나입니다. 지난 주에 확인한 것처럼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여를 머물며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와 함께 은장색 데메드리오가 주동이 된 소요사태를 맞아 자신의 동역자들이 붙잡혀 연극장으로 끌려가는 참변을 당했습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데 하나님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의 엄청난 반대와 소동을 함께 겪었던 것입니다. 그 소요가 그치자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북부 마게도냐를 거쳐 남부 헬라지방에 3개월가량을 머물게 됩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바울이 머물렀던 헬라지방이 거의 고린도일 가능성이 많고 이렇게 고린도에 머무는 3개월동안 로마서를 기록한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19:21절에서 밝힌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아시아의 수리아지방으로 바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에베소의 소요사태와는 또 다른 방해와 반대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끊임없이 자신을 반대하고 해하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결사대가 자신을 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배를 타고 바로 수리아로 가지 못하고 일행들을 먼저 드로아로 보내어 거기서 기다리게 하고 자신과 누가는 다시 마게도냐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무교절을 지내고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닷새만에 드로아에서 헤어진 일행들과 만나게 되고 드로아에서 한 주간을 머물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야망과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따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가는 길에 끊임없는 반대와 방해가 나타나고 그로인해 많은 시간과 거리를 돌아서 가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드로아에서 머문 마지막 날인 주일에는 더 황당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유두고의 죽음입니다. 7절부터 9절까지를 보십시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틑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해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여기 안식 후 첫날은 바로 주일을 말합니다. 떡을 떼고 강론이 있는 주일예배의 형태가 신약성경에서 최초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바울의 설교가 좀 길었습니다. 밤중까지 계속 된 것을 보면 35분 정도 하는 저의 설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하튼 설교가 길어지고 그 와중에 창에 걸터앉아 설교를 듣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삼층 누에서 떨어져 죽게 됩니다. 이 본문을 쓰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가입니다. 누가가 누구입니까? 의사입니다. 의사가 죽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죽은 것처럼 보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정확하게 죽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예배를 인도하다가 설교 중에 교인이 떨어져 죽었습니다.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다른 일도 아니고 예배 중에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급하게 설교를 중단하고 내려갑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니.” 바울이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내려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해하지 않고 청중들을 제어했다는 상상을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태연하겠습니까? 얼마나 놀랍고 가슴이 뛰겠습니까? 바울도 똑같습니다. 그는 뛰는 가슴을 안고 급하게 죽은 유두고의 몸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무엇이라고 기도했는지를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기도 후에 유두고는 살아납니다. 기적이죠. 그리고 바울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떠들지 마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그리고 다시 올라가 떡을 떼고 날이 새기까지 설교를 계속하고 떠나갑니다.


이 사건은 흔히 우리가 들었던 것처럼 설교 중에 졸면 죽는다. 이 메시지를 하기 위한 본문은 아닙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런 늬앙스가 없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래도 유두고 편입니다. 그렇다고 설교 중에 마음 놓고 졸지는 마십시오. 그렇다면 도대체 유두고 사건은 어떤 메시지가 담긴 내용입니까? 유두고를 책망하는 내용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상황 속에서도 바울을 통해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를 허락하셨는가? 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짧은 본문의 기록이지만 중요한 신앙적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자기 야망과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역사만이 아니라 방해와 소동과 고난과 막히는 일과 중단되는 일들이 함께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갈 수 있는 길도 몇 개월을 돌아가야 하고 쉬운 일도 어렵게 되어갑니다. 심지어 오늘 드로아에서는 예배 중에 교인이 죽기까지 합니다. 겉으로 볼 때 이런 바울의 여정이 어떻게 보입니까? 결코 쉽지 않은 여정입니다.


우리의 생각처럼 사명 따라 살면 무조건 길이 열리고 형통하다는 모습은 분명히 아닙니다. 오히려 본인은 너무나 힘들게 느껴질 수 있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2절과 12절을 보십시오.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여기 2절에 권한다는 말이나 12절에 위로라는 말이 같은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자신은 가는 곳마다 막힘과 방해와 고난이 있었지만 이런 바울을 통해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위로는 조폭코미디 영화가 주는 유치한 일시적 위로와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이것이 사명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내용입니다.

고난이 있고 막힘이 있고 방해가 있고 소동이 있습니다. 결코 평탄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그때 원수가 주는 막힘과 방해, 그리고 세상이 일으키는 소동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일하심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간섭으로 자신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의 엄청난 위로를 경험하게 되는 위로의 통로가 되는 삶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어떤 삶이 되면 좋겠습니까? 자기 야망과 욕심을 따라 살다가 생기는 각종 불만과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하고 기껏 수준 낮은 폭력 코미디 영화를 통해 심리적 카타르시스와 위로를 경험하고 또 다시 자기 욕망을 향해 살아가는 세상의 사람들과 같은 모양으로 살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이 있는 사명의 길을 가다가 방해도 있고 막힘도 있고 소동도 있고 돌아가는 어려움도 있지만 그때그때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간섭과 역사가 있고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도 함께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하는 그런 삶을 살겠습니까? 정당한 결심을 갖고 주의 은혜를 구하며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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