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찬양자료

[스크랩] 행20:28-32, 교회의 힘과 원리

baromi 2006. 6. 9. 09:02
 

행20:28-32. 교회의 원리와 힘, 06.4.23, 박 홍섭 목사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외동딸을 시집보내는 홀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며 그 딸을 향하여 몇 가지 당부의 말을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아버지의 당부는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깨달았던 결혼생활의 원리와 본질을 너무나 잘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떠나면서 교회의 장로들에게 앞으로 그들이 교회를 어떻게 살피며 돌보아야 할지를 당부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마치 사랑하는 딸을 위해 눈물로 당부하던 그 아버지의 모습 같은 바울의 권면을 보면서 교회가 어떤 곳이며, 하나님이 교회 가운데 주신 가장 큰 힘과 무기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이 본문을 통해 우리 교회가 붙들어야 할 분명한 신앙적 원리와 힘들을 확인하고 힘을 얻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권면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앞으로 교회 가운데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 교회를 힘들게 할 것인데 그 때 너희들이 어떻게 교회를 돌봐야 할 것인가? 하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28절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한 마디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잘 삼가서 치라는 것입니다. 삼가라는 말은 ‘프로세코’로 주의하다, 조심하다, 청종하다, 착념하다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장로들은 교회를 돌보며 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칠 때 어떻게 치라고 합니까? 첫 번째는 삼가면서 쳐야 합니다. 조심하고 주의하면서 쳐야 합니다. 왜 이렇게 삼가면서 교회를 치라고 합니까? 29절에 보면 원문에는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장로들이 삼가 조심해야 할 이유는 흉악한 이리가 교회에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예고하고 있는 흉악한 이리가 누구입니까? 30절을 보면 이들은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을 추종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어그러진 말은 왜곡된 말, 거짓으로 미혹하는 말, 바르지 못한 말을 뜻합니다. 이들은 어그러진 말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순진한 교인들의 마음을 미혹합니다. 왜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이러한 흉악한 이리가 들어올 것이고 너희 중에도 이와 같은 자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토록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런 흉악한 이리들이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롬 16:17-18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흉악한 이리는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로마교회, 어떤 교회에도 있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장로들은 늘 조심하고 주의해서 교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어그러지고 공교한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이런 자들이 있는가 잘 살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흉악한 이리는 또한 어떤 자들입니까? 예수님에 의하면 이들은 거짓 선지자입니다. 마7:15절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수님은 이들이 거짓 선지자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미혹하여 사람들을 노략질 하고 자기의 사람으로 만듭니까? 마7:13-14절과 15절은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그리고 나서 15절에 거짓선지자를 삼가라...이렇게 연결됩니다. 다시 말하면 흉악한 이리들은 거짓 선지자로서 어그러진 말, 넓고 편안한 길에 연관된 말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좁고 협착한 길이라서 사람들이 몰리지 않고 찾는 이가 없으면 생명의 길이라도 안 가르치고 안  전합니다. 그러나 멸망의 길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그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이 많다고 판단하면 기꺼이 가르칩니다. 이것이 흉악한 이리이고 그들이 사용하는 어그러진 말입니다.

흉악한 이리라고 이리처럼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오는데 얼마나 듣기 좋은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말은 어그러진 말입니다. 듣기는 좋고 기분은 좋으나 멸망의 길로 가게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이 바울의 두 번째 권면에서 나타납니다. 31-32절입니다. 교회에는 언제나 어그러진 말을 하는 흉악한 이리가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늘 깨어서 자신이 삼년 동안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삼년동안 눈물로 그들을 훈계하던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눈물로 훈계했던 말씀이라고 합니다. 흉악한 이리 앞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회의 무기는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인가 하면 바울이 눈물로 훈계하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신앙적 원리와 힌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 눈물로 훈계합니까? 그리고 그것이 왜 유일한 교회의 힘이고 무기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주문이나 부적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고 흉악한 이리가 들어올 때 그 말씀을 붙이거나 들이대면 자동적으로 어려움이 당장 물러가고 이리들이 어이쿠나 하면서 물러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일종의 묘방이고 주문이라면 눈물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겸손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마술사들이 마술 할 때 겸손 뜰거나 울면서 마술 하는 것 보셨습니까? 마술사들은 절대로 겸손 떨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이제부터 나타낼 결과들에 대해, 관중들이 모두 놀랄 그 결과들에 대해 마음껏 뽐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손에 짠 하고 비둘기를 손수건을....무엇을 만들어 내면서 박수 받을 준비나 자랑을 하고 있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얻어내는 무슨 묘책이 아닙니다. 짠 하고 어느 날 나의 필요가 등장하는 마술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 그런 묘책과 신비한 마술 같은 것이라면 거기에 눈물과 유대인의 간계 속에서 한 숨과 인내의 긴긴 밤들을 지새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은 일깨어 내가 삼년 이나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눈물로 훈계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삼년이나 매일같이 전해도 못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하면 척’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그것이 신비한 어떤 묘책이나 주술이라면 전하기만 전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후벼 파고 금방 변화시키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지 않고 아무리 옳고 바른 말이라 할지라도 듣는 사람들이 수긍할 때까지 기다리고 설득하는 방식으로 역사하며 그러기에 그 말씀을 전하는 자가 눈물로 훈계하는 것입니다. 마술처럼 교만을 떨거나 자신감을 가지고 전하지 않습니다.


눈물로 훈계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흉악한 이리 앞에 하나님이 주고 있는 교회의 유일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지도자자 모든 교인이 깨어서 이 싸움을 해야 합니다. 말씀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반응하는 싸움으로 정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신앙을 어려움이나 고난을 피하게 하며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일종의 주문이나 부적처럼 생각하고 나의 실상은 말씀과 상관없는 넓은 길을 갈 것인가? 여기에 대한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가 교회를 칠 때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교회를 다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도자가 무엇으로 교회를 칩니까? 말씀으로 칩니다. 그렇게 지도자에 의해서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양무리들이 그 말씀에 바르게 반응하면 흉악한 이리가 들어온다 할지라도 그 교회는 든든히 세워지고 하나님의 기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할 때는 교회는 흉악한 이리에 의해 찢기게 되며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무서운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표지 가운데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바른 말씀의 선포입니다. 두 번째는요? 성례이고 세 번째는 권징입니다. 개혁자들은 수많은 교회 중에 무엇을 보고 그 교회가 바른 교회인지 알 수 있는가?에 대한 표지로 이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교회는 늘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반응하는 교인들의 삶이 성례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원리대로 살지 않는 자들을 교회는 말씀의 원리대로 살 수 있도록 돌보고 지도하면서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로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는 권징이 시행됩니다. 말씀의 원리로 살지 않는 자들을 감독하고 지도하면서 듣지 않을 때는 그를 권징하여 교회를 거룩하게 지키고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이죠. 이런 중요한 일을 위해 성령이 감독자로 삼으신 자들이 바로 장로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사명인지를 돌아보면서 자신을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바른 지도와 그에 따른 생명의 반응들이 늘 끊이지 않는 공동체 되기를 소망합니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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