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도 입
우리는 지난 강론에서 성경에 나타난 계시의 총화(總和)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음을 다니엘서 2장에 기록된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 해석과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의 내용 및 신구약의 여러 본문에 근거해서 확인해 봤습니다.
참으로 세상역사는 그 자체로서 단순한 인간역사의 기록이 아닙니다. 역사의 진행 성격상 반복적이거나 순환의 역사도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종말론적으로 출현하게 될 하나님 나라라는 분명한 최종적 목표를 향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하나님의 역사 곧 ‘언약적 구속사’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당신의 친 백성들을 찾아 구원하시고(마 1:21; 눅 19:10), 이들을 통해 교회를 이루시며(마 16:18∼19; 엡 2:11∼22), 나아가 이들 교회의 종말론적 총화의 실체로서 하나님 나라(눅 22:14∼20; 계 21:1∼3)를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일하심의 역사 말입니다. 여기서 구속사를 굳이 ‘언약적 구속사'라고 설명하는 이유는 본 강론에서 지속적으로 설명되겠지만 하나님의 구속사가 세상역사 속에서 '선(先)언약 ― 후(後)성취’의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제 1강 총론(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통해서 여호와 중심의 신앙에 있어서 생명처럼 붙들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명제들을 확인했습니다.
● 세상역사는 목표 지향적입니다. 이 명제가 담고있는 주된 사상은 세상역사 진행에는 반드시 최후적 종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역사는 종말의 완성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 세상역사의 성격은 점진적입니다. 이 말은 역사진행의 성격을 가리키는 바 곧 역사진행이 반복과 순환이 아닌 점진적 성격을 띠고 나타난다는 지적입니다(롬 13:11).
● 세상역사의 최종적 목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명제에 함의된 주된 구속사적 사상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가시적인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모아진다는 사실입니다.
● 세상역사의 본질은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 본 명제의 당위성은 위에 언급된 다른 명제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곧 세상역사를 현장과 무대로 해서 역사의 종국에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완성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케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역사의 내용 말입니다.
…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이 명제는 위의 모든 명제의 총화의 결과로 도출되는 성경의 총체적 계시의 결정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啓示書)로서 그 중심사상은 하나님께서 전 우주적 역사를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적으로 간섭하시고 통치하시는 절대 주권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36)
하나님은 오늘도 생존하셔서 당신의 남은 구속사를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집행해 가십니다. 이 거룩하신 사역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먼저 부르셔서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아 누리게 하시는 가운데 남은 구속사를 선양하고 운반하는 자들로 존재케 하십니다. 이런 사실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이루어진 구원의 실질을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실제적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살아 계신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요, 그의 소유된 친 백성들(벧전 2:9)입니다. 곧 교회공동체 말입니다.
오늘부터는 이런 전(全) ‘우주적 하나님 나라 사상’이 창세기에서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 전체의 편집구도 속에서 어떻게 계시되며 진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구속의 경륜을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이는 성경의 총체적인 계시관(성경 신학적 관점)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정당한 해명을 통해서만이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지’(what the bible says)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적 본의에 깊이 접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옳게 분별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바르게 성장하며 비로소 성경적 신앙관, 곧 구속사적 신앙관에 든든히 서게 됩니다. 이는 바른 성경적 교회를 이루는 첩경으로 작용합니다. 신령한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엡 2:20). 우리가 성경적 바른 교회의 표지(標識)를 운운할 때 사도성의 유무를 확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적 바른 교회란 다른 말로 사도적 교회를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모든 가르침의 교훈과 원리, 역사적 개혁교회의 전통과 전승을 교회적 생명으로 삼아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지의 여부에 의존해서만 교회로서의 일차적 진위가 가늠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종교적 열정을 가진 몇 몇 사람들이 모여서 마음에 맞는 목회자를 초빙해 놓고 제반 기독교적인 치장으로 그럴듯하게 격식을 갖췄다고 해서 교회로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있으나 그것이 적법한 지식의 체계에 근거해서 정당한 방식으로 표출되지 못할 때, 바른 교회는 고사하고 불법적이며 불복종적인 교회와 신앙으로 판정을 받아 정죄(定罪) 당할 뿐입니다(롬 10:2∼3; 마 7:21∼23; 사 11:30∼31).
우리가 성경을 통시적인 관점에서 보는 계시적 안목과 통찰력이 부족하고 결핍되게 될 때 필연적으로 이런 함정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마귀는 교묘하게 이런 어리석은 자들의 어두운 인격과 빗나간 종교적 열심을 부추겨서 거짓된 교회를 이루게 하는 것을 통해서 정작 바른 교회를 이루는 일을 적극적으로 훼방하며 공격하게 만듭니다. 이들이 당대에 절대다수를 이루어 큰 힘과 권세로 제도권을 형성해 나타나게 될 때, 그 영향력은 심대(甚大)한 것으로 자칭 진리의 대변자를 가장해 행세(行勢)하기조차 합니다. 우리는 지난 교회역사 속에서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종교(왕상 12:25∼33)와 예수님에게 맞섰던 유대율법주의(마 23장), 그리고 중세 카톨릭교회를 통해 이런 사실을 극명하게 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임의해석하며 편의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기복의 도구로 삼게 될 때, 이는 교회가 세속화되며 신앙이 변질될 수밖에 없는 지름길입니다. 역사가 이를 밝히 증명합니다.
그렇다면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거의 5세기 가까이 지나고 있는 오늘날, 다양한 교단으로 분파 된 개신교들은 얼마나 역사적 개혁교회와 1세기 사도적 교회들의 적법한 전통과 정통을 오늘에 계승, 유지,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지 심각히 자문자답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를 구성하고 있는 교회원들이 본질상 타락한 죄성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으로 인해 끊임없이 개혁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타락하고 변질될 수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분과 소속과 부르심의 사명을 성경이 말씀하는 바 총체적인 진리의 체계인 성경 신학적(구속사) 토대 위에서 바르게 해명하고 인식해서 적용하게 될 때, 그로 인해 합당한 성경적 바른 신앙과 교회를 이루게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가 본 강론의 대 주제를 ‘하나님 나라’로 선정해서 성경을 통전적(通全的) 안목으로 살피는 가운데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계시의 흐름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살피고자 하는 이유가 이에 근거합니다. 성경말씀의 본의적(本意的) 회복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목회현장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사활이 걸린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만에 하나라도 말씀을 해석하는 자세와 입장과 계시적 관점이 부족하고 결핍돼서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는 큰 통나무 같다느니, 큰 담벼락 같다느니, 아니면 큰 부채와도 같다는 식의 당치도 않는 주장을 고수한다면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호랑이 새끼를 갖고서 머리를 자르고 꼬리를 떼어내고는 몸통만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를 고양이의 몸통이라고 고집한다면 이를 어찌 수용할 수 있겠는지요. 그러나 작금의 교회 현장 속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여전히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임을 감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 세미나의 주된 목적은 성경해석에 대한 구속사적 관점의 회복을 통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본의를 정당하게 밝혀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심정대로 그 본의에 합당하게 해명되는 것을 통해서만이 성경적 신앙관의 재정립 및 교회의 진정한 개혁과 갱신은 보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신학적 관점(구속사관)에 의한 말씀의 회복이 전제되지 않고서 기존의 제도화된 체제를 굳세게 유지하는 가운데, 몇 가지 내용을 수정하고 보완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교회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개혁의 본질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총체적 계시의 본의를 회복시켜서 이를 계승하고 재해석해서 보다 풍성히 발전시켜 나가는 재(再)창조적 신앙행위입니다.
이제 제 1강 총론에서 확인 된 신적 기원의 ‘하나님 나라 사상’이 어떻게 성경의 전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섭리적 손길에 의해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구속사적 계시안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이를 위해 성경이 자증(自證)하는 동질의 내용과 주제를 따라서 성경을 몇 개의 범주로 나누어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 에덴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창1∼3장).
둘째 : 초기 인류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닉적 섭리사역(창4∼11장).
셋째 : 족장들의 언약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창12∼50장).
넷째 : 이스라엘 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출 ∼ 느).
다섯째 :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사 ∼ 말).
여섯째 :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속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 (마 ∼ 계 : 현재적 및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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